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도란스 기획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권김현영 엮음 / 교양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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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을 읽고 갸우뚱해서 다시 읽었다.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가해라는 말에 대

 

해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

나는 '피해자 중심'이라는 의미를 '피해자 우선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2차 가해'라는 말은 누구도 피해사실에 대해 다른 토를 달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말에 쉽게 이러쿵 저러쿵 하는거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것이 잘못이었을까

잘못은 아니다.

여태 살아오면서 약하고 힘없고 당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아니 그들이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쉽게 내쳐지고 존재하지 않는양 여겨지고 행여 들어보더라도 나중에... 나중에 합시다.. 우선은 다른 더 크고 급하고 중대한 사안들 우선... 이라고 밀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우선 듣고 내가 하는 말을 믿어주고 내 말에 공감해주는 일은 정말 갑격스럽다. 내가 당하고 쪼그라들고 아픈 내 말이 우선이라는 건 감격을 넘어 어리둥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하지 성폭력이라는 것이 어떤 증거를 내밀기도 어렵고 당사자들의 상황과 당시의 맥락에서 들여다 봐야 하는 문제가 수두룩하다보니 보는 입장에 따라 제각각의 의견들이 충돌하고 목소리가 큰놈들 사회적 당위성에 보호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이기는  싸움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사건을 말할 때 일목요연하게 일관성 있게 이성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다.

꽃뱀이 되는 것도 쉽고 뭔가 노리는게 있어서 몸으로 덤볐다는 말도 너무 많고 좋아서 해놓고 뭔가 틀어지니까 들고나오는 복수아니냐는 말도 참 쉽게 납득이 되는 세상이다.

물론 개중에 그런 사악한 사람이 절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뒤집어 보면 꽃뱀이 되어가면서 쌍년이 되고 걸레같이 가벼운 년이 되어가면서 사실을 말해야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 성공하려면 몸으로 거래를 할 수도 있는게 꼭 여자들이만의 문제일까? 몸을 주면 니가 원하는 걸 줄게라고 제안한 놈도 있을 거고 행여 먼저 제안한 어떤 여자에게 그거  정정당당하지 않소 하고 끊어내지 않고 좋다고 냉큼 받아먹은 놈도 있을거고... 결국 그렇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결국 남은 건 꽃뱀과 쌍년과 걸레다.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 나누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이 아니다.... 라는 것이 이 책의 근본 태도라고 생각한다. 개개의 가해, 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사회제도의 문제이고 인식의 문제이고 아직도 기울어진 정의가 반듯하다고 믿는 사팔뜨기들의 문제다.

 

그렇게 망신 줬으면 됐잖아.

고소 했고 처벌 받았으면 된거 아니야?

물론  원하는 만큼 형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재판까지 가고 알려질대로 알려진것으로 됐잖아

그것도 미투로 봐야돼?

좋아서 한거 아니었어? 제정신으로 모텔을 가고 오피스텔을 가?

한번 당했으면 두번은 가지 말아야지  무슨 음모가 있는거 아니야?

심년도 더 전에 있던 일을 지금 말해서 어쩌자는 거지?

순수한 미투가 있고 물타기 하는 미투가 있어

미투가 변질되고 있는 중이야

 

오가는 말들이 그건 아니잖아 라고 버럭해버릴 문제가 아니다.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고 드러나는 일은 결국 지나야 할 과정이고 겪어야할 현실이지만

그 모든 사정사정에 자를 들이대고 조건들을 붙이는 건 누가 기준을 만들었을까?

 

결국 문제는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지배규범을 바꾸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내고 인식의 틀을 바구어 나가는 것인데  법이 바뀌고 규범이 바뀌어도 그것이 사회전체에서 통용되는 상식으로 인식의 틀로 자리 잡지 않으면 기본 규범들을 좀처럼 제자리에서 내려올 수가 없다 바뀔 수가 없다.

피해자의 말을 듣고 가해자를 처벌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의 문제라는 생각이 없다면 누군가의 재수없는 일이 되거나 나와 상관없는 흥미거리 추잡한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피해자 가해자만 관련된 '협의의 당사자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성폭력은 다시 개인의 문제이자 고통과 불행의 문제가 될 뿐이다. 성폭력을 둘러싼 투쟁은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그런 행동르 하면 안 되지 않나' 라는 새로운 상식을 만들어가는 싸움이어야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자들은 피해자 주관적인 느낌은 가해자 중심사회에서 판단을 할 때 중요한 참조 사항이자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피해자의 주관적인 느낌이 유일한 판단기준이어서는 안된다. 피해자는 당연히 자신의 경험을 주관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경험을 공론의 영역으로 가져올 때는 정당한 의무를 지게 된다. 패미니즘은 그 정당화 과정에서 해적 투쟁에 연대하는 언어이지 무조건 편들어주는 언어는 아니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생각해 볼 문제다.

 

오히려 우리는 무엇이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맥락에 의존적이며 상황적이다. 이때 상황애 대한 상이한 해석을 허용하고 그 해석이 얼마나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찰적인지 그러면서도 설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자 했는지(사실이 아니라 정의로서) 판단기준이 될 수 있다

 

기준이 없는 문제는 늘 사회적 당위성이 힘을 갖는다. 힘이 있는 사람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사람 상식이라는 기준을 만들고 거기 한점 차별이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늘 통용된다.

섹스는 욕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고

강간 피해에 있어 모든 여성들은 신경증이 생길만큼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일이지만 남자들 사이에서의 행위는 그렇게 크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순간의 재미이고 경쟁이고 힘을 보여주는 순간의 놀이로 치부된다. 그렇게 한가지 사항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차이가 날 경우 결국 폭력의 문제도 단순화되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욕심을 내며 억지를 부린다는 것이 통용된다.

피해가 있다면 가해도 있다.

아무도 아무짓을 하지 않았는데 아프고 소외받고 상처받고 죽음을 당하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그정도의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만큼의 일이 된다.

계속 드러나는 미투과정에서 이건 그들의 개인적인 문제다. 이제 충분하지 않았는가 피로감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고소하는 것으로 처리하지 왜자꾸 크게 떠들고 모두에게 원치않은 과잉정보를 제공하는가...  이미 변질되었고 이용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떠들지 않았더라면 관용으로 넘어가거나 있을 수 있는 일 좋은게 좋은 일  사회생활을 하면 겪을 수 있는 일 누구는  조용히 넘어가는데 꼭 뭣도 아닌 것들이 떠들고 문제를 만든다는 생각들....

그리고 몸을 사리며 팬스를 쳐야겠다고 단세포적으로 나오는 반응들까지 .

결국 문제들을 드러나지만 누구도 이것이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이고 사적인 문제이고 알아서 할일이라는 것

 

 

이런 통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두번째 글 < 문단내 성폭력 연대를 다시 생각한다> 였다.

누가 가해자인가? 누가 나쁜 놈인가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더 당했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가를 질문해야했다고 말한다. 2차 가해에 대해 발언할 때도 무엇이 성폭력 피해를 의심하게 하고 성폭력 고발을 어렵게 하는지를 질문해야 했다고  말한다.

너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라는 말로  순수에 조금의 티끌이라도 묻으면 끌어내야하고 의심해야하고 조작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들이 빈번했따.

이것이 왜 폭력이고 아파하는 일인지 생각하기보다 누구야 누구? 이쪽에 더 관심이 쏠린다.

한바탕 욕을 하고 법적으로 처벌을 받고 나면 끝!!이 되고 처벌이 끝난 자리에 또다른 가해자가 들어오고 또 처벌을 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개인적인'문제로 피해를 호소하고 누군가는 '개인적인 판단 착오'로 욕을 얻어 먹는다. 구조와 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모든 일은 돌림노래처럼 계속된다.

용서라는 말은 용인이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는 문장이 그래서 아프다.

 

정채윤의 글 < 소수자는 피해자인가>는 그 피해 가해 대상을 여성-남성의 문제를 확장해서 다양한 성적소수자들에게로 확대된다.

웃자고 하는 농담이 폭력이 되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 글은 쉽게 들어온다.

여기는 앞에서 언급된 일반 통념들이 더 확장이 된다.

 

동성애자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으로 가족으로 친구와 동료로 존재한다는것, 이 세상은 이성애자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일급비밀이다. 존재하지도 않은 동질감으로 사회 공동의 규범과 성 역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비밀은 늘 위태위태하다. 즉 커밍아웃은 벽장에서 나와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벽장을 열고 나와도 우리는 여전히 벽장속에 있다. 그런데도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자신의 세상 밖에 사는 존재로 상상하며 세상을 자신들만의 것으로 지켰다. 동성애자들은 상상의 세계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현실에서 오히려 투명인간이 되어야 했다.

 

아웃팅 방지 캠페인은 '커밍아웃할 권리와 우웃팅당하지 않을 권리는 성적소수자의기본권'이라고도 주장하지만 이런 권리란 성립 불가능하고 쟁취 불가능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커밍 아웃을 할 권리가 있는게 아니라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가 있고 스스로 밝혔든 우연히 또는 강제적으로 밝혀졌든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말이 꼬이는 것 같지만 내가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가지겠다면 누구에게도 내가 소수자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웃팅 당할 일도 없고 그로 인한 범죄도 생기지 않는다

아웃팅은 범죄라는 것은 희안한 슬로건이다.

누군가가 타인의 정체성을 강제로 밝히는 것은 폭력의 한가지이긴 하지만 그래서 드러난 정체성이 사회에 잘 스며들고 누구나 무심하게 인정해버리는 것이라면 2차 문제는 생각할 이유가 없다. 결국 범죄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이 사회의 통념이 범죄를 양산한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어지는 루인의 <피해자 유발론과 제이 트렌스젠더 패닉방어> 에서 패닉방어라는 용어를 처음 보았고 결국 성적 소수자라는 것을 미리 밝히지 않아서 내가 충격을 받아서 제정신이 아니어서 이렇게 사람을 폭행하고 죽일 수 밖에 없다는 말... 이게 말인지 막걸린지 모르겠다.

성적 소수자라는 것 표면적인 성과 성기가 일치하지 않은 것을 알아버린 충격으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래서 배신당했고 그래서 죽였다?????

좀 심한 말이지만 그렇게 충격으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 당사자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게 아닐까? 그런 쿠크다스도 못되는 멘탈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나?

결국 모든 것은 남탓이고 나는 사회적 통념을 잘 지키고 믿는 성실한 시민이며 건강하고 건전한 인간이라는 걸 타인의 죽음과 피해앞에서만 증명한다.

 

그리고 역시 마지막 정희진의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에서 모든 주제를 아우르고 정리된다.

피해자는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고 투쟁으로 획득되는 개념이며 이 과정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누가 사회적 약자이고 무엇이 피해인지 이문제에 대한 복잡한 논쟁이 먼저 되어야 한다. 가해자이 패해의식 피해자의 죄의식이 우리사회에는 여전히 흔하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장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정치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은 비정치적으로 간주되어 왔거나 비가시화되었던 피해를 드러내고 가해와 피해를 둘러싼 갈등 곧 사회 정의의 중요한 의제를 제기한다.

 

단순히 피해자를 돕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그건 법치주의라면 당연한 일이고 모든 사회, 국가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걸 위해 피해자가 인생을 걸어야 하고 불신과 치욕을 견여야 하는 사회란 희망이 없는 지옥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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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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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정도로 그 개념을 정의해 볼 수 있다.

 

혐오표현의 유형

차별적 괴롭힘 ....>> 편견 조장.....>>  모욕 ...>> 증오 선동

 

 

말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지만 말 한마디에 칼날이 번득이기도 한다.

무심코 던진 말일 수도 있고 심사숙고해서 어렵게 꺼낸 말일 수도 있는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말들은 그저 말이 아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입장과 시각을 모두 아우르는 결과물이다

생각없이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생각없음이 아예 존재하지 않은 생각이 아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속에 젖어 있는 선입관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 세상의 상식과 당위들이 뒤엉켜서 나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그것이 말로 글로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니 어쩌면 한 번 더 생각하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당연하게만 받아들여 내 뱉은 말이니 생각없이 나온 말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그런 말들이 누군가에게 꽂혀 칼이 되고 독이 독이 된다.

칼에 맞은 상처나 독에 찔린 상처는 깊은 통증과 흔적을 남기고 한 번 아팠던 사람은

다음에 비슷한 말에 다시 경기를 일으키고 몸을 움츠리며 불안에 떤다.

칼이 아픈지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경험해 본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

 

모든 이들은 평등한 인간이고 인간성의 존엄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정의에 관한 기초적인 권한을 가지며 모든 이들은 폭력, 배제, 모욕, 종속의 가장 지독한 형태로부터 보호받을 자격이 있음에 확신하는 것이 정의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데 혐오표현은 이 기초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혐오표현이 공존의 조건을 파괴한다면 이것은 헌법적 가치인 인간존엄 평등 차별로 부터 자유로울 권리 연대성 등을 훼손하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표현이 이러한 가치들을 파괴한다면 표현의자유가 우선시될 수 없다.

 

누군가를 어떤 가치관을 싫어할 수 있다.

그리고 싫다고 당당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많아지면 내가 가진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되고  힘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말로 인해 상처입을 타인이 있다는 건 잊게 된다

아니 타인을 인식하지만 그가 그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음 역시 당연하게 생각해버린다.

그리고 말들이 모이면서 행동이 되고 규칙이 되고 울타리가 되거나 분노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생각이 말로 형태를 갖게 되고  모이게 되면서  움직임을 만들고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그 이면에 누군가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은 잊어버린다. 아니 그게 당연하게 된다.

 

혐오표현이 잠재적 가해자들 사이에서 확산성이 있다는 점도 혐오표현의 해악을 가중시킨다. 명예 훼손이나 모욕은 특별히 전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혐오표현은 다르다.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혐오감정과 차별적 편견이 권력욕이나 경제적 궁핍 사회불만등과 결합되어 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게 전가하고 희생양을 만들기도 하고 혐오 이데올로기가 후대에 전승되어 사회에 뿌리박히고 혐오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저자는 혐오표현이 가지는 제한성과 배타성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것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그런 혐오표현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제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강제성을 띄어서 제한하는 방법이 있지만 그럴 경우 개인의 표현의 자유와 부딪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말이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이 싫다고 말하는 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재갈을 물리는 것이 제도화 되어버리면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사회가 평등하지 않고 누군가 어떤 집단은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험했다면 그들에게 던져지는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는 그저 한마디의 말이 아니다.

그건 공포일 수 있고 불안 나아가 생명까지 위태로운 무시무시한 상황일 수 있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느끼고 스스로 투명인간처럼  취급당했던 어떤 소수자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동의하지 않아. 라는 말은 그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뿐 아니라 하나의 폭력으로 다가올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말들이 어느 순간 하나하나 개별적인 언어라 아니라 뭉쳐진 덩어리가 되어 어디서 나를 후려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직 혐오표현을 경험하지 않았고 왠만한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없다면

사회가 살만한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만큼 운이 좋고 소수자가 아닌 편에 있는 경우라고 생각을 해야한다. 사회는 여기저기 기울기가 다른 곳이다.

저자는 제도적인 장치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자꾸자꾸 말하고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혐오표현이 자리잡지 못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걷잡을 수 없이 혐오표현들이 다양해지고 여기저기서 에상치 못하게 부 딪치고 충격을 주는 혐오표현들이 그렇게 정화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처럼 서로서로에게 겨눠지는 수많은 혐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생겨났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과연 개개인의 생각과 표현의 자유와 약자를 향한 (본인은 정당하다고 당당하게 믿는)혐오발언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고 결국은 사람 사이에서 생긴 갈등을 사랆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지 않나 하는 조금은 말랑말랑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향해 비난을 하고 혐오를 드러내는 일이 세상에 어떤 도움이 될까

아니 나아가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혐오하고 없어지기를 바라고 그래서 물리적인 행동을 옮기는 일이

나에게도 과연 득이 되는 일일까

그래서 사라진 누군가 약자 혹은 혐오대상이 언젠가는 내가 되지는 않을까

해결책 보다는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책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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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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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금까지 우리 사히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기고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은 것은 ‘가족 총력전’이 되다시피했다.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아이들의 자율성은 간단히 무시됐으며 가족주의의 극단이라 할 마음가짐 즉 아이를 소유물로 바라보고 토에하는 행동은 여전하다. 가족 바깥의 사람들에 대한 배척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화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는 제 할 일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채택 10주년 기념 엘레노어 루즈벨트의 연설중에

“보편적 인권은 어디에서 시작할까요? 작은 곳 그리고 아주 rkRKdns 곳에서부터입니다. 아주 가깝고 아주 작아서 그 곳은 어떤 세계지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곳은 각각의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중략) ...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을 지키려는 모두의 노력이 없다면 보다 큰 세계에서의 발전도 헛될 것입니다.

 

가족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아동 인권의 관점에서 가족과 공공성을 생각해보려는 이 책의 시도가 우리 주변의 작은 곳에서부터 변화를 만들려는 흐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것이 없겠다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내것인 너를 위한 친밀한 폭력. 체벌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에 따라 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한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t n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러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요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나는 언제든 너의 몸에 손댈수 있다는 가르침, 과거 여성에 대한 폭력도 같은 메시지를 깔고 있었다. 체벌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에 있는 타인에 대한 반복적 폭력은 모두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나느 sdjs제든 당신을 통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메시지 당신의 존재할 권리를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때리는 사람인 나라는 주장.그렇게 힘으로 상대를 침묵시키고 상대의 목소리를 부정하고 때리는 사람의 목소리르 상대안에 심으려는 시도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사랑을 연관짓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사랑하면 신체적으로 우월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힘으로 억눌러도 괜찮다고 가르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하고 돌보는 관계에서도 더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문제해결방법으로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체벌은 아이들에게 ‘네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사람을 때려도 괜찮다’ '공격적이어도 괜찮다‘고 가르친다.

데이트 폭력 체벌 등 친밀한 관계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맞는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내가 맞을 짓을 했다’고 믿도록 강요한다. 맞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맞았다고 스스로를 낮추고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회를 말해준다.

 

성인간의 관계에서 상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는 행위는 이유가 무엇이든 형사적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보호와 교양 목적의 징계’라는 말로 상대에게 이도적인 해를 끼쳐도 돈다고 법이 허용하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이다. 아이도 한 개인으로서 자율적인 존재이고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이를 법의 언어로 반영하지 모할 이유가 없다.

 

 

과보호 방임. 자식을 소유물로 생각할 때 생기는 일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불가능성에 대하여

동반자살이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할 이유

#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 인권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 동반자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라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비극으로 잘못 인식하도록 만듭니다 부모에 의한 자녀 살해가 지속되는 이유는 부모가 자녀를 소유물로 생각 할 뿐 아니라 이웃과 사회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사회가 고민해야할 일은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지고 작동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엔 가족을 운명공동체로 보고 부모는 자녀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강박이 지나치게 뿌리 깊다. 부모는 항상 모든 것을 바쳐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뒷바라지 해야하고 만약 그렇지 못하면 부모 자격도 없다는 식의 강박관념 말이다. 자신과 자녀의자아를 분리하지 못하고 내 아이들의인생이 따로 있다고 바라보는 인식이 희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을 끝낼 때 자식의 생명을 거두는 것이 끝까지 책임을 지는 부모의 태도라고 생각해버리기 십상이다. 이를 ‘가족동반자살’이라는 온정적 표현으로 부르고 ‘오주하면...’이라고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가족은 압축적 근대화가 낳은 온갖 부작용의 해결사 역할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랜기간동안 복지를 가족이 해결해왔다. 정부가 압축적 근대화 과정 내내 유지한 기본 기조는‘ 선 성장 후 분배’ 정책이었고 그 결과 복지와 교육 의료 부양등 거의 모든 사회문제를 가족에게 떠념겼다.

사회는 급격히 변화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 집단주의의 약화를 불러오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거꾸로 직곅족 중심의 배타적인 가족주의는 더 강력해졌다.

 

친권은 권리가 아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에는 더 이상 집이 안전한 곳에 되지 못할 경우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이는 원래 태어난 가정에서 친부모와 함RP 자랄 수 있는 권리를 치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친부모가 되레 아이에게 해로울 때 붐와 아이를 분리하는 것이 아이의 안전과 삶의 질을 위해 더 낫다고 판단한할 경우 국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국가의 아동보호제도이다. 하지만 한국의 아동보호 제도는 지나치게 강력한 친권에 부딪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부모에게 학대를 당해 긴급보호조치로 집을 떠나 시설에서 살게 된 아이의 경우 구각에서 수급자로 지정 받아 의복비 식비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문제는 수급비를 받기 위한 통장을 개설해야 하는데 미성년자인 아이의 명의로 통장을 만들려면 친권자인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를 학대해 결국 격리를 당하기까지 이른 부모가 통장 개설에 순순히 동의할 리가 없다. 동의하지 않거나 동의를 전제로 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계좌를 만든뒤 아이명의 계좌에서 마음대로 돈을 인출해가기도 하는데 친권자이므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친권은 자녀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이자 의무이다.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왜 미혼모만 있고 미혼부는 없을까

 

임신단계에서 미혼 임산부에게 미혼모가 받을 수 있는 지원 관련 정책등으ㅢ 정보를 제공하고 비밀을 보장해주며 상담하는 콜센타같은 지원이 절실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제도가 없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저소득 미혼모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어떨까? 정부는 아이(만 13세 미만)를 홀로 키우는 저소득 미혼모에게 월 12만원(엄마가 청소년일 경우 17만원)의 양육비를 준다. 만약 미혼보가 직접 키우기를 포기하고 아이를 다른 양육시스템으로 보낸다고 해보자 입양을 보낼 경우 입양가정은 입양 수수로 270만원을 지원받고 매달 15만원(14세 미만 )의 양육수당과 20만원의 심리치료비 100%의료지원을 받는다. 또는 위탁가정이나 시설에 보낸다고 해보자. 2015년 보건복지부의 <대한 양육제도 양육비실태조사연구>에 따르면 위탁 가정은 월 66만7000원 공동 생활가정은 128만원 양육 시설은 166만원의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시설의 경우 종사자 인건비 일부가 포함되므로 단순 동등비교는 할 수 없지만 어떤 경우든 미혼모가 아이를 버리는 것 보다 직접 키울 때 정부의 지원이 가장 적은 것은 사실이다. 만약 미혼모가 기초수급자가 된다면 이 혜택도 사라진다. 생계 급여와 아동양육비는 중복해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혼모를 위한 제도적 지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핏줄때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마룬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재도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이의 인권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

 

입양.. 정상가족으로 수출되는 아가들

 

국내입양을 활성화하고 해외 입양을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뒤집는 상황이 거듭되던 무한루프이면의 일관된 흐름은 미혼모가 아이의 양육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상황이 고착되어버렸다는 것이다 1070년대에 미혼모의 자녀가 입양의 주류를 차지하기 시작하고 1980년대 입양이 산업화하면서 미혼모가 아이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미혼모는 부도덕한 여성으로 이미지화 되면서 평범한 어머니일 수 있는 기회에서 배제되었다

이 바탕에는 ‘결혼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결합만이 가족이며 이 틀을 벗어나면 해외든 국내든 입양을 통해서 아이에게‘제대로 된 가족을 찾아주는 게 더 좋다느 sdlstlr 즉 강력한 정상가족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 사회규범을 일탈한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부재를 채우고 보내는 입장에서는 부모의 부재를 채움으로써 정상가족의 원칙을 완성하려는 의도에서 한치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 피부색이 다른 가족이 산다는 것의 의미 ... 이주가정의 아이들의 차별문제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규정하나

 

한국에서 가족은 왜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사실 핵가족은 근대의발명품이 아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확대가족 대가족은 드문 현상이었고 부부 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고 한다. 수명이 짧아 3대 이상이 공존하는게 드문일이었고 확대가족 유지에 필요한 경제력을 갖추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줄곧 핵가족 제제였는데도 핵가족을 이상화했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비판하는 담론이 출몰했던 이유는 뭘까

이는 구각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 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등을 골라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 것이다. 상반된 두 사례의 공통점은 국가가 아무런 사회적 비용도 지불하지 않고 노인 부양의 문제를 비롯한 사회무네 원일을 핵가족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가족상을 내세우며 국가가 가족을 이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사회정책이 가족단위로 설계되는 방식이 지속되면 가족을 형성치 못한 개인, 가족에게 충실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개인에게는 사회가 또다시 불이익을 가하는 셈이 된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 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ㅇ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 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잉 현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의 하락을 하지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나서고 저소득층은 방임상태로 인한 돌봄 공백상태에 빠지고 이 스트레스 해소 대상은 아이들이 된다.

 

개인 아닌 가족단위로 사다리에 오르는 사회

 

왜 가족주의는 회사 학교 사회로까지 퍼졌나

가게등에서의 호칭 어머님 이모님

가족같은 분위기 가족같은 회사

우리는 00 가족입니다.

가족을 강조하는 것과 동시에 내 가족 내 부류와 다른 타인은 배척하고 금을 그어버린다.

임대주택단지의 울타리 혐오시설의 거부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부모체벌 금지법은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

 

한국은 왜 가족안에서의 개별성 가족 밖에서의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가?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인 안전망이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기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자기 집단만 중요시 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스웨덴의 부모체벌 금지법이 있다

 

가족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 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가족내에서 이러지느 sgoddnl들이 전부 사행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가족이 사생활영역으로 닫힌 공간 관계가 되어버리면 가족은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과 관계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공간과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폭력은 일상안아세 가정안에서 이루어진다.

부모 체벌금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체벌을 금지하는 법의 목적은 단순하다. 병백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메시지를 내보내는 것 폭력과 비폭력 사이에서 아주 단순하고 선명한 줄을 긋는 것이다. 어른의 책무는 아이에게 폭력이나 협박 위협에 기대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며 정부의 책무는 비폭력적으로 아이를 키우는 게 가능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체벌을 금지하는 법과 함께 부모가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저우가 제공하고 정부와 사회가 합심하여 부모가 아이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만한 시간과 에너지를 갖기 위해 필요한 환경을 체게적으로 조성해야한다.

 

삶은 개인적으로 해결은 집단적으로

스웨덴식 사랑 이론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은 개인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익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귤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함께 살기 가족의 짐을 사회로

아이의 권리인정과 부모의 보호가 평화롭게 공존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아이의 권리와 부모의 권리가 상충하고 부모가 아이의 안녕을 심각하게 침해할 때 선을 긋는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다. <유엔 아동권리협약>은 이 책임이 국가 공적 권력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적 권력이 개입할 때의 기준은 아동 최선의 이익의 원칙이다. 즉 지금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아이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지닌 사람이 아이에게 필요한 보호와 배려의 의무를 지킬 숭 lT도록 국가는 모든 입법적 행정적 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한다.

즉 아이 개인과 부몬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가족의 외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는 아이의 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는 상항이 되었을 때는 그 관계에 아주 사적인 부모 자녀 관게에 개입할 당사자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짓을 정하는 게 먼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해보는 공감의 감수성을 높이려는 노력은 물론 필요하지만 이를 개인의 도덕적 과제 감성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폭을 넓히려는 교육이 공교육에 제도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고 ,<차별금지법>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등 이 제정되어야 한다. 그게 우리를 같이 살아가게 해주는 공감의 제도화이다. 역지사지하고 공감하는 능력보다 사적 관계에서는 예의 공적관계에선 정책과 제도가 우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더 인간적인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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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슬퍼지는 게 싫어서 보지 않으려다 중간부터 보게된 드라마가 <마더> 였다.

아픈 아이를 보듬는 건 결국 모성이라고 진부하고 일방적인 타령을 보게 될까봐 기겁했었다 그러나 중간부터 본 드라마는 드라마의 완성도 때문인지 개인적이지만 보편적인 관심때문인지 계속 보게 만든다.

결국 가정폭력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또다른 폭력으로 대물림 된다.

기억에서 봉인해버린 폭력과 버림받았다근 상처 그래서 어떤 사랑앞에서도 외롭고 불안했을 수진은 자기와 비슷한 혜나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건 당연하다.

혜나는 또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수진의 내면아이였으니까

폭력의 피해자이고 버림받은 아이를 이젠 수진이 손을 잡아준다.

그건 혜나에 대한 공감이며 동시에 아직도 8살에 머물러 자라지 못한 수진에 대한 돌봄이다. 스스로 직면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동안 피하기만 하고 상처에 허우적거리기만 했던 수진은 이제 혜나를 통해 혜나를 윤복으로 키우면서 스스로와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가 남은 윤복은 그 용기를 수진에게 나눠준다.

수진의 마음을 공감하고 자기 때문에 수진이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걸 보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둘은 서로의 내면 아이가 되고 미래의 어른이 되어준다.

그리고 또다른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설악이 있다.

아마 보여지지 않았지만 가족 불화가 있었고 불안한 엄마가 있었고 아직 생존을 위해 어른에게 기대야 하는 어린 설악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울지 않고 떠들지 않고 깨끗한 아이가 되는 것

그래야 엄마가 떠나지 않고 나에게 착한 엄마로 남아줄거라는 막연하고 가느다란 희망을 붙들려고 하지만 그건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자살 중에 가장 지독한 모습을 보인다는 목 매다는 방법으로 죽은 엄마를 설악이 가장 먼저 발견한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작은 다툼과 불화에서 스스로 책망하고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내가 조금만 똑똑했다면 내가 없었더라면...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쓰는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설악의 상황은 공감가능하고 이해가능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건 설악의 책임이 크다.

세상의 모든 엄마를 괴롭히는 아이들을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죽은 설악의 엄마도 순간순간 설악 때문에 웃고 설악 때문에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찰라도 있었을 텐데... 설악은 그 찰라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아니 더 큰 고통으로 지워버렸을 것이다.

여기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 두 여자가 있다.

너무 어려서 아이를 낳아 예뻐하지만 키울수 없던 엄마는 잘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지만 결국 폭력앞에 굴복하고 아이를 버리고 살인자가 되고

또 다른 어린 엄마는 아이가 이쁘지 않아서 울기만 해서 남자가 떠났다고 믿으며 모든 원망을 아이에게 투사한다. 예쁠때도 물론 있고 의지도 되지만 어린 엄마의 삶은 쉽지 않다

누구든 손을 내밀고 웃어만 준다면 그대로 기대버리고 싶을만큼 아슬아슬하고 아프다.

그래서 엉뚱한 선택을 하고 이기적인 마음을 품는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사회적 문제의 근원은 가족이다.

어떤 가족을 경험하는가는 살아가는 나머지를 모두 좌우한다.

경험과 기억은 누가 가져갈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오롯한 내것이다.

그것이 나를 만들고 나를 살게 하고 내가 선택하게 한다.

그렇다면 가족은 무조건 절대 선이어야 하고 모든 윤리의 기준이되어야 하나?

오로지 가족만...

그건 가족에게 너무 가혹하다.

l그런 안전망 하나 없이 사회에 던져지면 결국 자영이 되고 수진의 엄마가 되고 설악이 된다.

모든 게 가족 탓이고 가족 때문일 수는 없다

엄마의 양육이 아이를 결정하고 아이의 삶을 바꾸지 못한다.

엄마는 때로 강한 용기를 내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어딘가 기대고 싶은 아이이가도 하다.

엄마에게 아빠에게 그리고 아이에게 힘을 줄 안전망이 필요하다

감성적인 공감 이해 이입이 아니라 예의있게 신중하고 정중하게 그 순간 순간 필요한 것을 내밀 수 있는 제도와 관심이 필요하다.

가족은 깨질 수 있다. 깨져도 된다.

가정폭력 특례법이 결국은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목적이라는게 참 유감이다.

누군가 모르는 낯선이에게 가한 폭행은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친밀한 가족관계의 폭행은 상담과 조언과 충고로 다시 억지로 봉합된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된다. 가정을 지켜야지..

이미 깨지고 상처만 남은 가정을 지키라니 그런 개뼈다귀같은 소리가 있나

가해자가 다리뻣고 익숙한 공간에서 쳐 자는 동안

피해자는 혼자 모든 악조건을 감수하고 몸을 뉘일 안전처를 찾아 해맨다.

늘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관계에서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고통 받는다.

     

결혼제도에 속하지 않고 아이를 낳읗 수도 있다

그것이 도덕적으로 지탄을 받을 일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그럴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일이 힘들 수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고 독박육아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엄마의 모성의 위대함이 스스로 아이를 양육할 수는 없다.

돈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고 제도적 뒷바침이 필요하다.

가정내 갈등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이 악해서일 수도 있고 상황에 몰리다 보면 살기위해서 일 수도 있고 잘못된 양육으로 잘못된 도식이 성립되어 생길 수도 있다

가족일은 사적인 일이니 알아새 처리하라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누군가 죽거나 만신창이가 되어야 관심을 가진다는 건 너무 잔인하다.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도 있지 부모가 자식을 때릴 수도 있지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은 다 안그런데 참 유별나게 굴기는...

그런 말이 주는 2차 피해는 지금 말하지 않기로 한다.'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고  혹은 아이에게 최선이 내가 키우는 것보다 입양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이 옳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가족간에 갈등이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받쳐줄 시스템은 너무나 없다.

자연스럽게 태어나면 위대한 모성이 키우고 아비가 되면 처자식 책임지고 먹여살리는 건 당연한거고 도덕적으로 일탈까지 사회가 다 받아줄 수는 없고 가족의 문제에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접잖은 척 뒤로 빠져야 하고... 이건 그저 사회 안전망을 가지지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더라

어떤 체게적인 뒷받침이 있었다면

자영은 조금더 긍정적으로 혜나를 돌봤을 수 있고

잘못된 선택으로 매를 맏던 수진의 생모는 사회의 도움으로 전과대신 다른 자립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설악도 괴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진이 자기 가족만 아은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사회 안전망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결국 가장 기초적인 교육과 양육은 가정에서 책임질 수 밖에 없고 가족이 그만큼 중요한 사회적 단위이지만 세상이 달라지고 다양해지는 만큼 문제도 제각각 벌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뒤를 버텨주는 울타리가 될 사회적 제도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일은 필요하다. 아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그저 그렇게 끝맺음이 된다면 그렇게 반복될뿐이다

그건 결국 문제를 개개인에게 맡겨버리는 무책임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바뀌지않는다

그래서 이 책 말미에 저자가 말한 개개인이 가져야할 예의와 사회적인 정책과 제도가 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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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자본론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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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원숭이도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글을 읽고 기본적인 해독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다. 다만 수식이 조금 헷갈리거나 이해했지만 다음장에서 다시 새롭게 보일 가능성은 있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자본론>이란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또 다른 의미이다.

어떤 체제든 자본의 움직임이 방해받아서는 안되며 자본이 모든 것의 중심이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값이라는 속성은 어떤 체제에서도 바뀌지 않는다.  체제 위에 자본이 있다

신 자유주의라는 이름 세계화라는 이름은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좀 더 넓은 무대를 원하는 욕망 과 다르지 않다.

인간이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자 하는 욕구를 무시하고

각자 도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경쟁으로 몰고 가는 것은 결국 자본의 논리였다.

성적대로 힘을 가진대로 돈을 가진 만큼을 기준으로 줄을 세우는 사회 그래서 무한경쟁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면서 모든 패배와 절망은 모조리 개인의 몫이 된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은

가지지 못한 자는 게으른 자이고 이루지 못한 자는 미련한 자이며 얻어내지 못한 자는 무능한 자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자본의 힘은 정치에도 교육에서  사회전반적인 질서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보루라고 믿는 법에도 존재한다. 힘이 기준이 된다.

 

지금 다시 옛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지금 여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기는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왜 제국주의의 형태로 나타나는지

세계가 함께 머리를 모아 세계를 위해 만들었다는 대부분의 기구들이  결국은 강자의 논리가 되고 마는지..그 모든 뒤에는 실제는 없으면서 모두를 지배하고 추앙받는 자본이 있다.

둥구권이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성장하면서 이제는 지나간 논리라고 치부했던 자본론이 다시 신자유주의 시대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은 행복하고 만족하는지???

 

이런 책이 왜 교과서로 쓰이지 않을까?

뭐 완벽한 책은 아니지만 한번쯤은 읽어봐야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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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한 번 쯤은 기사로 흘러다니는 이야기로 접했을 주제를 페미니즘이라는 틀로 다시 들여다 본다. 

메갈의 탄생과 과정 그리고 그들이 받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가 있고

언제나 페미니즘과 함께 이젠 짝꿍처럼 따라다니는 여자도 군대를 가야 진정한 평등아니야 하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데이트 폭력을 비롯한 친밀한 관계의 폭력이 있고

모든 일에 관여하는 진보논객들이 유일하게 침묵하고 스스로 조용하게 자성한다는 분야가 페미니즘이다.

정치도 빠질 수 없고 섹스에 대한 공개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  다양한  성지향성을 가진 소수자의 위치 성노동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그리고 남자나 여자나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속물적인 본성을 언제나 여자에게만 향하는 현 관점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과연 진짜 페미니즘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그중에 가장 흥미가 갔던 것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범주에서 볼 수 있는 데이트 폭력부분과 그와 연결해서 함께 생각해 볼 진보 논객의 입장과 성노동의 합법화의 주장의 당위성과 그 주장의 한계를 짚어본 두가지 꼭지였다.

 

 

 

언어가 만들어지면 피해는 발견되고 급증한다. 일상적이었던 것이 언어화되었을 때 그제야 특별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생성은 개인과 개인 여성과 남성의 불평등한 관계 맺음과 무기력한 소통 과정으로 인해 피해의 심각성이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터져나오는 폭발적 저항의 결과이다. 언어는 중립적인 듯 보이지만 그 언어에 연루된 사람 위치 이해관계에 따라 전혀 다르게 활용되는 매우 정치적인 속성을 품고 있다. 과거 가정 폭력과 데잍 폭력이 사랑과 로맨스의 연장선으로 이해되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언어야말로 문화 담론의 헤게모니를 함축하는 권력의 상징이다. 그러나 데이트 폭력과 같은 저항적 언어가 만들어지고 알려지는 것은 기존의 남성 중심적 관계에 대한 도전으로 진단되었기 때문에 '역차별'  ' 꽃뱀' 그리고 무수한 '00맘' '00녀' 시리즈등 여성 혐오적인 공격으로 되돌아왔다. 문제는 현재까지 만들어진 저항의 언어가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많은 문제들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극에 다다른 또 다른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명명되지 않고 재개념화되지 않은 성차별적 문제들은 차고 넘치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만큼 사적인 공간에서 여성혐오와 폭력은 저항에 대한 효과적인 제압 방식으로 개념화 되면서 폭력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치정과 멜로 그 경계에서 데이트 폭력을 묻다.

 

 

남성성은 가족과 학교에서 남자다워야 한다고 주입되는 성역할 포르노그라피등을 통해 전달되는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스포츠 군대를 경험하는 동안 조직적 위계적 관계등을 습득하면서 연습된다. 연습돤 남성다움은 일정한 때가 되면 이성애 연애 관계에서 비로소 실천 되는데 돈을 더 쓰고 가방을 들어주고 어두운 밤길을 데려다 주면서 보호자의 권한을 확보한다. 더군다나 여성은 성적으로 무지하거나 자신의 성적 욕망에 둔감하다는 믿음 아래 여성의 No는 Yes 를 의미할 뿐으로 여성은 성적으로 가르쳐주고 리드해야할 대상이 된다. 이런 남성성은 훗날 이성애 가족에서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밀봉해지는데 자녀와 아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더불어 그들을 통제할 권리와 결합되며 완성된다.

 

남성성은 저절로 생성된 것이 아니며 위계적 남성성을 추구하도록 독려하는 구조 속에서 순환된다. 여성학자 벨 훅스는 직장등의 공적인 세계에서 권력적 관계로 인해 굴욕감을 느끼고 심리적 학대를 받은 남성들이 폭력을 억누르고 있다가 통제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여성을 학대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서 순환된다고 말한다. 더우기 경쟁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 아래 실업이 증가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분노읙 ㅏㅁ정이 친밀한 관계에서 해고나 보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여성에게 분출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타고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기 위해 끝없는 노력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이 수행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은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남성다움의 전형적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강한 남성이 미인을 얻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약한 여자를 보호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자만은 결국 의사소통의 거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데이트 폭력이란  살짝 밀친 장난이거나 타이름이거나 터프한 성적 관계이거나 오빠가 생각하기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정당화 된다. 따라서 데이트 관계에서 성폭력이라는 명명은 더더욱 성관계를 동의한 여성의 변심과 모함에서 비롯된다고 믿어지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폭력 연구자들이 재차 말해왔듯이 폭력은 악이 아니다. 폭력은 악이 아니라 구조다. 연애와 사랑등 아름다운 이름으로 회자되고 성역할이라는 이름으로 착취의 흔적을 지우려 하겠지만 비대칭적인 젠더 구조에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호명으로 만나는 이성연애가 착취적이지 않으려면 각고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의식적인 노력이 없는 자연스러운 연애는 성별화된 연애의 수행이기 쉽다. (중략)

데이트 폭력 담론에서 폭력을 예외적인 악으로 구정하고 가해자를 '가해자'로 굳히는 일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폭력을 구조로서 이해하고 구조안에서 자신이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면 가해자의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가해자의 성찰이 곧 구조의 변화이고 균열일 수 있는 건 이때문이다.

                                                    남성진보논객과 담론 헤게모니

 

폭력 폭력  누구나 말하고 알고 있지만 그 폭력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저 물리적으로 힘으로 누군가를 제압하고 누군가에게 보이는 상처를 입히는 것 맞고 때리고 꼬집어서 상처가 생기고 벌겋게 자국이 남는 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해서 가르치는 것 바꾸려고 하는 것 도와주려고 하는 일들 그리고 내가 예의있게 하기 위해 모른 척 하거나 내가 나서면 안될거 같아서 눈을 감았던 일들

순간적인 감정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냈던 일들 그리고 나서 나는 다 잊었으니 나는 뒤끝이 없는 깔끔한 인간이라는 근거없는 믿음

사랑하니까 아끼니까 보호하기 위해 그 정도는 할 수 있는거 아니냐는 일방적인 믿음과 신념들

그 모든 것은 폭력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입장에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계속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걸 연습해야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고 있다고도 믿는다.

나는 알잖아.. 그런데 행동은 다르다.

나는 사랑을 주었는데 상대는 공포를 억압을 폭력을 받기도 하는 걸 모른다.

그리고 그 폭력을 목도했을 때 눈을 감는 것 역시 폭력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 폭력을 옹호하며 피해자의 맞은 편에 자기가 위치한다는 것을 모른다.

폭력을 행한 사람이 악이고  특별한 경우라고 믿으며 그 특별한 행위때문에 모든 다른 이들이 함께 뭉뚱거려 같은 집단이라고  명명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는 것도 때로는 폭력이 된다.

내게 이익이 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은 페미니즘으로 인정되고 내가 불편하고 힘든건 너무 막 나가는 이기적 행동이라고 구분짓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폭력이 아니야.. 라고 믿는 어린 아이들이 많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서 나는 잘 못 느끼니까 그런 건 없다고 믿는 것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고 그 신념하에 행한 행동이니 당연히 상대도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

세상엔 다양하고 소소한 폭력이 여전히 많이 있다.

절대 폭력의 얼굴을 하지 않은 채로..

페미니즘을 넘어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폭력이 얼마나 다양하고 일반적이고 때로는 찌질해보이는 것까지 있는지 생각해본다.

 

성매매 문제를 성 노동이라고 봐야 한다는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의 문제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 다만 비합법적이라는 것만 없다면 개개인의 자율하에 하나의 노동으로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다음 꼭지인 성노동 비범죄화 안될 일이다 를 읽으며 생각이 복잡해졌다.

성매매 (성 노동)이라는 것이 깔끔하게 성을 구입하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있고 그들이 금전적으로 혹은 관계적으로 동의만 있다면 성을 사고 판후 깔끔하게 돌아서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배가 고픈 사람이 편의점에서 원하는 삼각김밥을 골라서 돈을 지부하고 그것을 먹고 나오면 되는 일과 성매매는 또다른 형태의 활동이다.

성 매매에는 포주라는 또다른 기생적 관계가 붙어 있다.

그리고 집창촌의 성매매가 아니라 단란주점이나 그 외 아가씨가 나올 수 있는 여러형태의 업수들이 존재하고 매매라고 한다면 일차 술자리가 아니라 이차 함께 외출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라 일차 술자리에서 일어나는 여러일들을 성매매로 볼 것인가. 아니 볼 수 없다면 그 때 일어나는 여러가지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며 갑질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결국 성매매의 문제도 존중이 존재하지 않은 폭력의 문제가 연결된다.

내가 돈을 주 고 산건  매매자와 매수자의 깔끔한 성관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내가 돈을 지불했으니 그 만큼 나는 원하는 무엇이든 하겠다는 사심이 들어있고

관계까지 안 갔으니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떳떳하다는 이중적인 심리가 들어있을 수 있다.

결국 성 매매는 성만 매매 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폭력과 가학적이고 치욕적인 모든 행위를 포함하고 있는 일이다.

다만 성매매 (혹은 성노동) 단순한 하나의 경제생활을 수반하는 노동으로 본다는 것은 그 일부만 보는 것이다.

어렵다.

 

결국 읽다보면 늘 느끼지만 페미니즘이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다 함께 소외된 사람없이 잘 살아보자는 이야기다.

세상은 내가 경험하고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내가 편하고 정의롭다고 믿는다고 모두가 그렇지 않다고 말해준다. 어딘가 불평등이 있고 소외가 있고 폭력이 있다

내가 알고 고의로 행한 것도 있고 나도 모르고 행하고 그게 당연하다고 믿는 신념때문일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말...

하기는 쉽지만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쉽고 편하고 익숙한 걸 택하는 존재다.

그제 본 영화에서 그랬다.

달은 늘 그저 같은 달일 뿐인데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시간에 따라 자꾸 변한다고 한다.

변하는 건 달일까 달을 보는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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