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와이프

 

 

 

글렌클로즈를 위한 글렌 클로즈의 영화

단순한 플롯과 구성을 꽉 채운건 그녀의 연기와 표정이었다.

 

남편이 노벨상 수상 소식을 듣는 새벽 다정한 노부부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누구나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고 느낄 만큼 서로에게 다정하고 여전히 서로가 필요하고 심지어 섹시하기깍지한 관계 . 완벽하게 나이든 부부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편의 노벨상 수상 소식으로 뛸듯이 기뻐하지만 한편 씁쓸한 표정이 언뜻 언뜻 들어난다.

그동안 도와준 아내를 언급하며 감사하는 자리에서도 조안의 표정은 썩 밝지 않다.

무조건 좋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까

비행기를 타고 스웨덴으로 가는 길 틈틈히 과거가 플래시백 되는데

결국 남편의 그 모든 작품은 조안의 것이었다.

재능이 없는 교수였던 남편 대신 재능있는 조안이 글을 고치고 손대면서 발표한 모든 작품이 연달아 인기를 얻고 명성을 얻으며 어쩌면 두 부부의 공동작품으로 그러나 세상은 철저하게 남편의 작품으로 그 모든 것을 평가한다.

시대의 이유로 여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은 책의 목록을 더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그래서 조안도 글쓰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한 것은 그렇게 재능 없는 남편이 한 무리의 영리해 보이는 여학생들앞에서 당당하게 하는 말이 그것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조안을 글을 썼지만 작가가 아니었다.

시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기도 했겠지만 어느 부분은 그녀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남편을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고

누가 쓰던 작품이 완성되고 성공한다면 그만이라는 소박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소박한 마음이 커다란 명성과 부와 명예로 돌아왔다.

철저하게 조안은 뒤로 숨고 남편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일을 조금씩 알아가며 뒤를 캐는 전기작가에게 조안은 마음이 흔들린다.

여태 나이 먹어가며 여전히 자기가 손이 가지 않으면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처럼 불안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남편을 챙겨야 하는 것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서재에 박혀 썼던 글들은 남편의 이름으로 출판되고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남편은 작품과 주인공마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남긴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모든 주부가 아내가 한 번은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

내 인생은 어디로 갔나?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왔을까?

스웨덴 왕에게 자신의 역할이 '킹 메이커'라고 말을 하지만 

남편이 수상소감으로 다시 자기를 언급하며 영혼의 단짝이니 영감의 원천이니 하는 말에 그만 모든 감정이 올라온다.

이전에 조안은 남편에게 절대 수상 소감에서 자기를 언급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를 했었다.

누군가의 내조자로 빛 뒤에 숨은 어둠이기는 싫었을까?

아니면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에서 나는 제외되고 잊히는 것이 영 꺼림칙했을까

그저 조력자로 내조자로 사는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두 부부는 평생 처음으로 충돌하고 돌이키지 못할 지점까지 갈라서지만

그 순간 남편은 사망한다.

가장 명예로운 순간, 가장 절정에서 가장 뒤통수를 치며 이제 조안은 죽은 노벨문학상 작가의 남은 가족이 된다. 죽어버린 작가의 아내로 남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조안은 전기작가에게 남편의 일을 더 이상 떠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모든 것은 거짓이며 있지도 않은 일이라고..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노트를 집어드는데.

 

그녀는 그 노트에 이제 자기의 글을 써가기 시작할까

아니면 그냥 빈 노트로 두고 작가의 아내로 살아갈까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어떤 답을 찾을 수도 없다.

영화내내  지루하고 예측 가능한 플롯에서도 다양하게 빛나며 의미를 응축하던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겨우 눈빛으로 모든 감정이 오가고 영화를 풍성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녀가 아니면 누가 표현할까

마지막 비행기안에서 그녀의 표정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집에 돌아가면 아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까

모르겠다.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이번 선택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되기를 빈다.

더 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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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은 맹목적일 수 밖에 없다.

믿는다는데 이유가 들어가는 순간 그건 믿음이 아니게 된다.

 

그냥 변명이 된다.

 

고백하자면 책을 먼저 읽었을 때 앞부분을 대충 넘겨버렸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신에 대한 이야기랑 동물원을 정리하는 이야기를 그냥 넘겼던 거다.

주인공이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다 믿게 되었다는 팩트만  인지하고

인도의 사정으로 캐나다로 이주하기로 결정한 아버지가 동물원의 동물들을 팔았고 그 동물들과 가족이 함게 배를 타고 간다는 사실만 또 주입했다.

눈으로 보며 이해하는게 역시 쉬웠다.

주인공이 세가지 종교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긴긴 항해와 연결이 되고 두가지 버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걸 영화를 보며 이해했다..

 

채을 띄엄띄엄 읽으며 이야기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극한에 몰린 사람이 기대하는 건 막연한 희망도 바닥을 치는 절망도 아닐것이다.

그냥 이야기 지금 이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이야기가 힘이 될 때가 더 많다고 믿는다.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마주했을 때. 스스로가 바닥을 치고 있다고 생각될때

내가 점점 내가 아닌 괴물이 되어가는게 아닐까 싶을때

어딘가 절실하게 매달리고 싶어진다.

그게 신이든 무엇이든

 

여담이지만 지난 몇달동안 종교에 매달린 경험을 가졌다

살면서 한번도 종교에 이렇게 오래 몸을 담근 적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라는 게 역시 대단한 힘을 가졌다는걸 다시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하고 다니기 시작했는데

결국 모든 건 내 욕심이고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신 혹은 절대자  아니면 조상에게라도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순간에도 순수한 기도(가 뭔라고 정의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의 시간보다 무언가를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가 나이롱 신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도하는 방법을 몰라서일 수도 있다.

그냥 신에게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내가 바라는 상상을 들려주고 나중에는 급기야 협박에 거의 맞짱 뜨자는 시비까지 술술 나오더라

결국 무언가 구원을 바라는 순간 (나라는)인간은 신과 이야기에 매달리게 된다.

내가 상상하는 이야기. 바라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그냥 술술 나온다

그게 기도랑 통하는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파이도 상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일이 견디는 일이고 그게 신에 대한 기도였을 것이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리사와 선원과 엄마라는 아픈 상황대신 얼룩말과 오랑우탄과 하이에나와 뱅골 호랑이가 더 견디게 해주고 스스로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버전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무조건 믿어버리는 순간이 맹목이고 광신도같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무조건 믿고 매달리는 순간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면서 내내 한다.

고난을 주었고 견디는 힘도 주는것이 신이라면

견디는 힘을 어떻게 행동으로 실행할지는 결국 사람의 선택이다.

이야기를 상상하며 스스로가 괴물이 아니라고 자꾸 말해주는 일이 신의 축복일수도 있겠다

 

결국 이야기 초반의 신에 대한 이야기 종교와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끝에서 다시 마무리 된다.

파이가 견뎌낸 동물들의 이야기들이 결국은 믿음의 한 방법이었다.

 

믿는다는 것

견디는 것  그리고 관게를 맺는다는 것

다양하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었다.

마지막 성인이 된 파이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던 건 믿음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을까

좋은 작품은 이렇게 볼 때 마다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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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인 당신 사츠오는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머리를 자르게 했다.

어쩌면 아내가 원한 일일 수도 있다.

어중간하게 길어 보기 좋지 않은 남편의 머리가 걸려 잘라줘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해준다는데 뭐 괜찮으니까 먼제 나서지 않았나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과정조차 없이 단순하게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동안 늘 그랬듯 아내에게 무뚝둑하게 서운한 소리를 한다.

그리고 아내가 급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순간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순간 시간이 정지해버린 것같은 그 찰라동안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뒷정리를 부탁해"라는 아내의 말이 그저 이발 이후의 뒷정리 정도였을까?

어쩌면 그땐 아차 싶었던 마음이 후에 두고두고 생각나며 당신을 괴롭힐지도 모른다.

그때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고 무엇을 보았을까?

 

친구와 여행을 갔고 아내를 존중한다는 마음에 당연히 전화연락 따위는 하지 않았고

습관처럼 (아마 그랬을거다) 애인을 불렀고 부부 침실에서 섹스를 한다.

어떤 죄책감도 끼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부재중으로 돌려놓은 전화에서 경찰의 전화통화를 듣는다.

아내가 죽었다.

시신을 확인하고 유류품을 받아오고 아내를 화장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당신은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어디에나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보여야 할지를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갑작스런 사고에 화를 내는 조문객들에게도 덤덤했고 함꼐 여행을 갔던 아내의 친구의 남편 요이치를 만났을 때도 덤덤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 죄책감에 찾아오는 애인에게 다시 욕구를 느낄만큼 정말 아무일도 없다는 듯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뜬금없이 걸려온 요치오의 전화에 대응하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불쑥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제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당신의 매니저가 물어봤지만 당신도 왜 느닷없이 요치오의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큰 아이들

엄마가 없어도 화물차를 몰아야 하는 아빠는 여전히 바쁠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해 아이들의 일상이 희생되고 뒤엉키고 포기되어야 하는 것을 보고 느낀 배려였을까

한번도 접하지 못한 아이들과의 생활이 어긋나고 삐거덕거리면서도 잘 적응되어갔다.

아이들은  당신 사츠오에게 적응하고 당신은 아이들에게 적응하고 그렇게 바쁘고 웃고 힘든 일상을 지내면서 당신은 당신 감정을 그렇게 눌렀다.

슬픔 상실 죄책감따위는 원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저 아래로 눌러버리고 바쁘고 즐겁고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은 일상을 지냈다.

 

"내가 잊으면 누가 기억하나요?" 라고 되묻는 요치오의 울음앞에서 순간 멈칫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간 일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렇게 흘려버리는 것이 순리라고 생가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하고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당신을 지탱하게 했지만 오히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일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몰랐을 때였으니까

매일매일을 울면서 저장된 아내의 메세지를 듣던 요치오는 의외로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온다.

순간 울컥 눈물이 나지만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그렇게 과학관 여선생님을 만나고 세상과 연결되어 가는데

당신은 여전히 제자리였다.

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아내를 애도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다.

당신은 속이는 것이 아니라 몰랐던 것이다.

남들을 속이고 좋은 모습만 보여주는 기만이 아니었고 그저 어떻게 애도하고 어떻게 슬퍼해야하는지 몰라서 당신앞에 놓은 시간을 무엇으로든 채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뭐든 채워놓지 않으면 그대로 바람이 빠지고 쪼그라들어버릴 것만 같았을테니까

요시오 가족에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고 아이들이 호감을 표시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자리를 잃은 것같았다. 질투를 하고 결국 자신의 죄책감을 고백한다.

"사고가 나던 날 애인을 불러 침실에서 섹스를 했었다고."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낯설었던"당신은 아무렇게나 그러나 바쁘고 의미있다고 믿으며 채워졌던 일상이 비워지면서 "삶은 타인이다"라는 발견에 도달한다. 그리고 처음 울기 시작했다.

목놓아 울지 않고 꾸역꾸역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당신 다웠다.

 

삶이 갑작스럽게 당신앞에서 문을 닫아버렸을 때

늘 함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상대가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없어져버렸을때

갑작스러운 충격은 사람의 감정을 굳게 만들어버린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리고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울어야 하는 것인지  견뎌야 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살아온 리듬을 유지해야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요치오처럼 모든 것을 놓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하고 당신처럼 모든 것을 다름없이 끌고 갈 수도 있다. 누가 더 낫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들은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맞았다면 애도를 겪어야 한다

오래오래 울거나  미치도록 원망하거나그리워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애도를 겪지 않으면 앞으로 다음으로 나갈 수 없다. 그저 눌러놓은 감정으로 외면해버리면  늘 제자리에서 돌고 있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웃을 수도 있다. 배가 고플 수도 있고 무언가가 아름답다고 느끼고 내가 잘  살고 있다고 대견해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뿌듯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먹먹함도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이 그 감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외롭다고 느꼈나 보다.

결국 삶은 타인이었다는 당신의 문장이 슬프고 아름다웠다.

 

왜 당신의 책 제목이 (영화의 제목이) 아주 긴 변명이었을까

단순히 길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변명이라는 말

결국 살아간다는 건 계속되는 변명이 아닐까...유치하게 생각해본다.

내가 그땐 그래서 그랬고 어쩔 수 없었고 늘 생기는 결과에 입장을 변명하고  상실 이후에도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자꾸 변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실을 경험해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요치오의 남매는 엄마가 없어도 훌쩍 자랐고

당신도 아내가 없어도 이제 머리를 자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쓸 수도 있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변명해도 괜찮다

당신의 변명을 납득하고 받아줄 테니까...누구나 변명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

 

뜬금없이 마지막 당신이 아내의 이발 도구를 만져보고 정리하는 장면이 슬프고 좋았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아마 당신은 도구따위엔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아내는 헤어디자이너라는 사실만 인지할 뿐 어떤 도구를 쓰고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만지며 그 도구들이 아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생각하지 않았고 생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 떠나기 직전에도 당신의 머리를 잘라주던 아내의 모습처럼 그저 아내는 당신이 생각하고 의미하는 존재로만 여겼을 것이다.

당신이 도구들을 만지고 정리하며 아내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아내의 모습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이 늦었지만 안하는 것보다 괜찮다.

 

당신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 울고 이후의 일들을 기록해서 엮어내고 그리고 아내의 물건을을 정리하고

당신의 애도가 시작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왜 그랬냐면.... 하며 긴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을것이다.

 

영화 초반 내내 당신이 너무너무 미웠는데  당신의 행동들이 가식이고 찌질하다고 욕했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나 자신을 본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리고 나도 나의 긴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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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은 마르크스가 생산수단과 관계라고 정의한 것보다 훨씬 많은 뜻을 지니고 있다. 계급은 당신의 행동 그리고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에 영향을 미친다. (계급에 따라 정해진) 당신의 경험은 당신이 인생에 관해 세우는 기본 가정들 당신이 배운 행동양식, 당신이 자신과 타인에게 기대하는 점. 미래에 대한 당신의 생각,당신이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방식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방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중산계급 여성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계급'을 기꺼이 그대로 인정하더라도 계끕에 따른 행동양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계끕에 따른 태도는 계급행동을 실제로 논하거나 스스로 계급행동을 바꾸지 않으려는 교묘한 속임수다. 그러나 이런 행동양식은 반드시 인식되고 이해되고 바뀌어야 한다.

 

                               

                벨 훅스 < 페미니즘>중 인용된  리타 매 브라운의 < 참을 수 없는 한계>에서

 

 

영화와 위 인용문이 상관있는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책에서 읽었던 저 문구가 떠올랐다.

누구나 자기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면서 그것이 전부라고 믿는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 촘촘한 층위의 계급이 존재하고  차이가 존재하고 그로인한 차별이 있고 입장이 있고 관점이 다르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의라든가 상식이라든가 평균적이고 객관적인 판단 근거가 존재한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내가 믿는 근거가 내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는 막이라는 걸 모른다. 그  근거가 나를 보호하기때문에 기준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내세우는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기울어진 저울이라는 것도 관심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공평과 불평등 그리고 차별은 그저 책에서 존재하고 관념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나는 어떤 차별도 어떤 편견도 없다고 믿는다.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을 거부할 뿐이다

나 역시 그럴 것이다.

 

살인으로 30년을 복역했던 미스미는 출옥해 자신을 고용했던 식품공장장을 살인해서 태워버리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의 변호를 맡은 냉정한 시게무라는 그를 사형이 아닌 무기징역으로 형을 낮추기로 한다. 법을 기준으로 미스미의 사건을 다시 검토하고 살인의 의도와 살인과 강도의 순서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질렀던 이유등을 파헤치면서 그저 냉정하게 법의 잣대로 조금이라도 그의 형을 낮추려고 한다. 물론 그게 시게무라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할수록 미스미는 자꾸 말을 바꾸고 피해자의 딸사카에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까지 드러난다. 게다가 판결을 앞두고 미스미는 그간의 모든 진술을 뒤집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시게모리를 극심한 혼란이 빠뜨린다.

 

냉철하게 법으로만 미스미를 대하는 시게무라.

어떤 마음으로 사람을 죽였는지 그리고 그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런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법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형을 낮출 것인가를 기본값으로 두고 미스미의 범행을 기계적으로 파악한다. 연인을 끊은 딸을 통해 조금이라도 연민을 이끌어내볼까 하는 마음에 홋카이도까지 가고 여러번 면회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듣지만 그건 그저 변론을 유리하게 이끌기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런 시게무라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면서 그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던 관점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스미 역시 자기와 다름없는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이혼절차를 밟고 있는 자기 역시 부모때문에 상처입은 딸이 있고 자기가 조금이라도 무심해지면 그 딸 역시 미스미와 딸이나 피해자의 딸 사카에와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다. 모두가 다르다고 여기던 관점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진다.

사람을 죽였던 미스미는  죽은 카나리아를 묻어주고 남은 카나리아를 자유롭게 해주었던 면을 가지고 있고  사카에게 가지고 있는 아픔을 공감하고 그를 위해 무언가를 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은 변하지 않은 존재야  와 사람은 변화 시킬 수 있어 라는 믿음 두가지중 어떤 것이 맞을까를 이야기하던 시게무라와 그의 아버지의 대화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든 그  의견자체가 오만하고 이기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사람을 변화시킬수 있다는 믿음은 무언가를 무조건 밀어붙이게 만들고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은 그대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버리는   제각각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미스미를 바꿀 수 잆다고 믿음으로 사형대신 30년형을 선고했던 지난날 판사였던 시게무라의 아버지와 미스미가 강도로인한 살인이라는 것을 뒤집어 사형대신 무기징형으로 낮추려는 시게무라역시 미스미를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철저히 자기 입장(법)에서 대상을 판단할 뿐이다.

 

영화는 정말 미스미가 살인을 했는지 사카에대신 죄를 뒤집어 쓴 것인지  미스미의 진실은 무엇인지 하나도 알려주지 않고 끝을 맺는다. 어쩌면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되묻고 있는 듯했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판단하는 것이 법이라는 이름뒤에 있는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교묘하게 비웃는 미스미의 말과 첫번째 살인 그리고 두번째 살인에 이어 세번째 살인은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의지가 뒤섞인 표정과 행동은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사람을 바라보는가? 사건을 판단하는가를 묻고 있는 듯했다.

 

시게무라는 법대로 하면 모든 일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미스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미스미를 살리기 위해 사카에의 진실을  이용해야 할 때와 덮어야 할때를 판단하는 것조차 그에게 낯선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유있게 뻔뻔하게 매번 말을 바꾸는 미스미앞에 모든 것이 진실일것도 같고 모든 것이 거짓일것도 같은 애매함 앞에 길을 잃는다. 그가 철석같이 믿었던 법조차 그에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한 인간에게는 법으로 판단하는 것 이외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법이라는 것이 만병통치약인가 하는 모호함까지 더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거리에서 머뭇거리는 시게무라를 내려다 보며  화면은 어두워진다.

십자가 형채로 남은 시신을 태운 자국과 짧은 꿈속에 눈싸움을 하고 드러누었던 미스미 시게무라 사카에의 모습을 위에서 보면 세걔의 십자가 형상이고 마지막 사거리역시 십자가 모습이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 과연 정의라는 것만 존재할까 내가 믿는 신념은 항상 옳은 게 맞을까? 시게무라의 혼란은 아마 지금부터 시작될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삼성 이재용의 판결이 났다는 기사가 떴다.

1심과 다르게 집행유예로 판결이 났다는 기사와 해맑게 배시시 웃고 있는 50넘은 이재용의 사진을 보니 영화나 현실이나... 하는 생각을 한다.

 

법대로 하자구.. 법대로 해.. 라고 호기롭게 소리치며 법이 모든 만병통치약인듯 여기던 때도 있었다. 법이란 모든 것을 정의롭고 공평하게 판단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을 때는 행복했다.

결국 법이라는 것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고 사람의 일이란 완벽하고 순결한 공정함 걕관성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법을 판단하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이가 부족하고 편견이 가득한 주제아 정의롭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 세상에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평론가 이동진의 평을 보면서 무릎을 치고 아하.. 이렇게 봐도 되는구나 하고 감탄했지만

내가 영화보고 나온 추운 날 어떤 판결은 또 다른 방향으로 영화를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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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억 가운데 단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무얼 선택하시겠습니까까?

 

영화는  당혹스럽고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고 시작한다.

내가 죽었고 죽어 저 세상으로 가기전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하면 그 기억 하나만 남기고 모든 것은 사리진다. 나는 단 하나 내가 선택한 그 기억만을 지닌채 이 세상을 떠나 저 곳으로 간다.

사람들은 담담하게 자기 삶을 돌아보거나 당혹스러워하며 기억을 헤어린다.

오래 산 사람은 많은 기억속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곤혹스럽고

짧은 생을 산 사람은 많지 않은 기억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

가장 좋았던 기억을 하나씩 꺼집어 낸다.

객석에서 나는 지금 이순간 내게 던져진 그 질문에서 나는 어떤 기억을 선택할까 생각한다.

이 사람과의 추억을 선택하자니 저 사람이 걸린다.

모두가 함께 했던 기억은 사실 내가 꼭 하나로 선택하기엔 망설여진다.

결심했다.

그냥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누군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 사랑해줬던 사람  소중하고 의미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

내가 가장 좋았던 순간 언제나 꺼내 볼 때마다 빙그레 웃음지을 수 있는 기억은 무얼까

 

영화속의 등장인물들은 쉽게 그 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자기의 삶 전체를 되돌아본 뒤에 겨우 찾아내기도 하고 선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그 한 순간을 꺼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소중했던 시간은 남들에겐 별 의미 없는 순간일 수도 있고

내가 선택한 그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한 사람은 나와의 순간을 선택하지 않기도 한다.

그렇게 흘러가는것이 삶이다.

 

그리고 선택된 장면을 만들기 위해 저승 (즉었으니 저승이 맞겠지?) 사람들은  무대를 꾸미고 그날의 색감이나 상황 분위기를 세세하게 살핀다. 아니 죽었으면 무슨 초능력이 있는거 아니었나?

아날로그적으로 몸으로 무대를 만들고 꾸미고 촬영한다.

그 과정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기억은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 그대로 재현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이 담긴 비디오를 보며 그대로 만들거나 차라리 비디오의 한 장면을 짤라 써도 무방하다.

그러나 기억은 그 순간의 내 감정과 생각 상황 그리고 시간의 더께로 조금 기울어지고 덧칠해지고 한모퉁이는 떨어져 나간 오롯이 내 머리 속에 있는 나만 아는 순간이다.

그래서  이곳도 저곳도 아닌 중간의 그 사람들은 자꾸 기억을 물어보고 고민하며 세심하게 각각이 가지고 있던 그 순간을 재현해준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지고 사람들은 기쁘게 떠난다.

 

영화 가운데 달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달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있는데 보는 사람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라보이는 걸 달이 변했다고 한다고. 뭐 그런 대사.....

요즘 하는 생각인데 세상에 순수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절대적으로 순수함이란 인간의 머리속에 추상적으로 존재할 뿐 어떤 불 순물도 없는 순수가 있을까

중립이 불가능하고 순수도 없다.

모든 순간에 모든 상황에 각각의 입장이 있고 생각이 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않고 중립이야 .. 이건 ㅇ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야 하는 그 수말을 뱉는 순간에도 많은 생각과 감정과 정의가 그리고 이런 저런 것들이 섞여버린다.

그래서 제각각의 입장이 있고 사정이 있고 논리가 있다.

다만 비슷하게 묶을 수 있을 뿐이지 같지 않다.

모두가 다른 기억을 가지고 떠난다.

설령 내가 선택한 기억속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기억을 선택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건 받아들여야 한다.

 

감독은 영화에 일반인을 등장시켰다고 했는데 보는 내내 누가 배우이고 누가 일반인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자기의 기억을 떠올릴 때의 몸짓이나 표정 그 모든 것은 대본이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보였을까?

마지막 부분에 가짜 벛꽃잎을 비닐 봉지에 담아 건내던  할머니의 무심하고 따뜻한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그건 어떤 연기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감독이 무얼 말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삶에서 꼭 가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달은 변하지 않는데 변한다고 믿어버리는 내마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삶의 기억을 닮은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사실 춤고 너무 잔잔해서 조금 졸았지만

극장에서 나와서 자꾸 생각나도 되씹을 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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