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
이사야 벌린 지음, 안규남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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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뭐라 건 네 갈 길을 가라맑스는 신곡에 나오는 이 말을 평생의 자우명으로 삼앗다. 듣기엔 멋진 말이다. 실제 맑스는 그 말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 말에 따라 사는 사람도 멋질까? 저자가 그리는 맑스란 사람은 존경할 수는 있지만 인간적으로 좋아하기 힘들다.

 

그가 호의적이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거나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배려해줬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대다수를 바보 아니면 아첨꾼으로 보았으며 그들을 드러내놓고 의심하거나 경멸햇다. 그가 외부인들에게 보인 태도는 지나치게 고압적이어서 불쾌감까지 주었다.” 천재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천재들은 자신이 본 것을 보지 못하는 개미들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바보는 벌레일 뿐이다. 케인즈 역시 그러했는데 면전에 대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케인즈에게 바보 취급을 받고 모욕을 당한 어느 경제학 교수는 얼마나 분했는지 아무 말 없이 케인즈를 보는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런 천재들의 우주는 자신이 인정할 수 잇는 작은 소집단에 만들어진다. 케인즈의 우주는 엘리트 집담인 케임브리지 대의 사도회에서 만난 사람들이 전부였다. 맑스의 우주 역시 그 만큼 아니 더 작았다. “그는 주위 환경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살았다. 그의 주변에는 가족과 가까운 친구, 정치적 동지들로 구성된 소집단이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주로 독일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그는 (런던에 살 때도) 영국인이라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에 대해 이해라려고도 신경을 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별나리만치 주위 환경에 영량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자신의 우주를 벗어난 곳은 외계일 뿐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의 삶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맑스는 당대의 혁명가들 중에서 기묘하게도 고립된 채 평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고립은 단순히 기질때문은 아니었다. 남이야 뭐라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것은 그 을 침묵하게 하는 거대한 신념이다.

 

아도르노는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비교하면서 두 작품은 오직 그 때만 가능했다고 말한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주관과 객관, 다시 말해 개인과 세계의 균형이라 아도르노는 말한다. 그러한 균형이 완전하게 구현된 것이 두 작품의 위대성의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균형은 오직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보여준 비전에서만 가능했다.

 

헤겔이 청년기에 프랑스혁명 때문에 열광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헤겔, 훨더린, 쉘링 등 젊은 날의 친구들이 튀빙엔의 학창시절에 자유의 나무를 심고 혁명가를 부르며 그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또 학창시절에 프랑스혁명에 관한 금지된 저술들을 읽는 것에 몰두하는 어떤 비밀 클럽의 핵심이기도 했다. 이러한 열광은 그 당시 독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의 프랑스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열광의 분위기에 속하는 것이다. 헤겔의 특별한 위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오랫동안 흔들리지 않고 이 혁명의 역사적 필연성에 집착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 혁명 속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기초를 탐지했다는 점에 있다.” (루카치 청년헤겔 I’)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의 입장은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위기 이후에 나폴레옹 체제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생성되는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이제 그것의 사상적 표현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헤겔이 지금 자신의 고유한 철학 체계에 대해 내리는 독특한 평가는 그의 철학이 새로운 세계사적 시대의 시초를 철학적으로 총괄한다는 생각이다.” (루카치 청년헤겔 II’) 그러므로 정신현상학을 쓸 당시 헤겔은 자신이 종교개혁 이래 이성과 현실의 화해가 마침내 실현되는 현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본 것은 개인(멜로디 악기)의 자유 그 그리고 그 자유가 구현되는 사회(나머지 악기들)가 화음을 이루어 웅장한 음악을 울릴 수 있다는 비전, 프랑스 혁명이 보여준 것은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는 비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신현상학이 쓰여지고 영웅 교향곡이 쓰여진 바로 그 때부터 불가능해졌다. 헤겔이 심은 자유의 나무는 말라죽을 운명이엇다.

 

맑스의 세대가 본 것은 적대적이고 천박한 세계였다. 그러나 윗 세대의 비전을 물려받은 맑스는 현재의 비이성적이고 혼란한 세계는 필연적으로 파멸할 것이라 믿엇다. 그 결과로 질서정연하고 잘 통제되는 자율적인 사회(정신현상학과 영웅 교향곡이 그린 세계)가 도해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잇었다. 그것은 모든 문제들을 종결짓고 모든 어려움을 녹여 버리는 저 무한하고 절대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었다. 다시 말해 16,17세기 사람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적 믿음에서 그 후에는 과학의 진리와 프랑스 대혁명의 원리 및 독일 형이상학자들의 체계들에서 찾아낸 것과 유사한 해방감을 가져다 주는 믿음이었다. 이들 초창기 합리주의자들을 광적이라 부를 수 잇다면 같은 의미에서 맑스 또한 광적이엇다.”

 

맑스를 선배들과 구분하는 것은 그의 종합에 있었다. “맑스 이론의 독창성은 지금까지 종종 의심을 받고는 했다 그러ㅏ 그의 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독창적이다. 맑스 이론을 독창적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고 결합함으로써 그때까지 해결되지 않거나 심지어는 형식화도 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 과학적 이론을 일컬어 말할 때의 그런 의미에서다. 맑스가 추구한 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진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저서에서 진리를 발겨하면 그는 자신이 새로 종합한 이론 속에 그것을 결합하려 애썼다. 그의 사상의 기본 방향이 모습을 갖춘 파리 시절에는 특히 그랫다. 결과에서 독창적인 것은 어느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고 중심가설이앋. 중심가설이 각 구성요소를 나머지 모든 구성요소들과 걸합시킴으로써 부분들은 단일한 체계의 전체 안에서 전제와 결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맑스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잘 알려진 경험적 용어를 사용하여 명료하면서도 통일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대답들에서 자연스럽게 명확한 실천적 지침들을 이끌어 냇다. 이것이 그의 이론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엿다맑스의 종합은 헤겔에서 시작된다.

 

헤겔 철학이 뿌리내릴 만한 토양은 고전주의 시대의 믿음과 어법에 대한 반발이 점차 커지는 과정에서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시작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은 18세기에 이르러 하나의 확고한 흐름이 되었다.”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어법은 계몽주의였다. 계몽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어법은 뉴튼 역학이었다. “과학분야의 성과들은 자연스럽게 사회현상을 해석하고 삶을 이끌어가는 데 적용되었다.” 문제는 이 어법이 역사를 고려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자연의 많은 시스템들은 균형점을 갖고 있다. 당신이 지금 표면이 매끄럽고 둥글며 밑바닥이 원형인 큰 유리그릇과 고무공을 가지고 잇다 하자. 그릇의 가장자리에다 공을 놓고 손을 떼면 한동안 공은 앞뒤로 움직이면서 빙빙 굴러다니다 결국 그릇 밑바닥에 멈춘다. 그 순간 공은 균형 상태에 놓인다.” (바인하커) 문제는 균형 시스템에선 역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릇 안에서 공이 굴러다니는 것을 비디오로 찍었다 하자. 그 비디오를 리버스로 재생해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컵이 깨진다든가 씨앗에서 싹이 튼다든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선 역사가 매우 중요하다역사가 있는 것은 가역적이지 않다. 뉴튼 역학의 어법으로는 비가역성을, 역사를 설명할 수없다.

 

자연과학, 정확히는 뉴튼역학의 어법을 인간세계에 적용하려는 것은 헤겔에게 과학적 독단주의의 구현으로 보였다. 볼테르나 흄이 이해한대로 역사를 과학적 규칙들에 따라 기술한다면 역사적 사실들은 엄청난 왜곡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단 하나의 참된 정의는 그 사물의 개벌적 역사에서 볼 때 왜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물질적 조건은 1세기나 8세기, 15세기에도 거의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후대의 이탈리아인들과는 대단히 달랐고 르네상스 시기의 이탈리아인들은 당시 쇠퇴 일로에 있던 이탈리아가 잃어버힌 특징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과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이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조건들은 역사적 변화, 진보와 반동, 영광과 쇠퇴으 원인이 될 수 없다. 각 시대는 이전 시대로부터 새로운 무엇인가를 물려받는다. 발전의 원리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론의 토대인 규칙적인 반복의 원리를 배제한다.”

 

헤겔은 역사의 역학을 구성하기 위해 의인화를 시도했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적 특성을 가리키는 개념 즉 사고와 선택의 목적, 논리, 성질 등을 모든 문화와 민족에다 옮겨놓았다. 헤겔은 그것을 이념 혹은 정신 등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특정한 민족들과 문명들의 발전과정 즉 의식을 갖는 전체로서의 우주의 발전과정의 동기이자 동적 요소라 말했다.”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우리는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모든 행위를 하나의 연속적인 합목적적 활동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 것으로 본다. 우리는 그의 생애의 여러 단계에서 끌어온 수많은 자료의 영향을 받으며 이러한 자료가 모여 그에 관한 우리으 정신적 초상을 만드는 것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라든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관한 우리의 개념도 마찬가지라 보았다.”

 

헤겔은 역사를 그린다는 것은 운동 중인 시대의 초상화를그리는 것이라 보았다. 그 초상화, 즉 정신, 이념은 헤르더의 집단정신이란 모호한 개념에서 발전한 것이다. “특수한 것, 구체적인 것, 분화된 것, 개별적인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의 가장 생생한 표현을 찾으라는 이러한 명령, 즉 역사를 사진가나 통계학자의 눈으로 보지 말고 전기 작가나 화가, 그리고 리얼리즘의 눈으로 보라는 이러한 명령은 독일 역사주의의 독특한 유산이다. 이 학설은 오늘날에는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한 세대 전체에는 이 학설이 기존 생각의 변화를 알리는 징후인 동시에 그러한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특정 시기와 장소에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고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를 민족이나 시대의 전형으로 보곤한다. 우리는 또한 특정 시대나 민족 혹은 심지어 행위를 르네상스, 프랑스 혁명, 독일 낭만주의, 빅토리아 시대 등의 정신의 표현으로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널리 존재하는 사회적 태도에 대해서도 그 나름의 적극적인 인과적 속성의 인격을 부여하는 습관이 잇는데 이러한 습관은 바로 이 새로운 역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라는 말을 재정립한 헤겔은 당대의 신조가 되엇고 인문학의 언어를 정의했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말하는 그 정신이 무엇이냐이다. “헤겔은 하나의 문화적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유와 행위는 그 시기의 모든 현상에서 드러나는 동일한 정신이 그 내부에서 활동함으로써 결정된다고 단언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문화 정도가 되겠다. 그러나 문제는 헤겔이 역사는 정신의 역사라 한 것에 있다. 포이어바흐는 모호한 신비주의일 뿐이라 공격한다. “그 이유는 헤겔의 이념이라는 것이 이념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의 동어반복적 재구성이 아니라면 그것은 단지 기독교의 인격신을 다른 이름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말하는 것과 달리 역사의 원동력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의 총합이라고 선언한다.” “여전히 관념론자였던 맑스는 기독교의 본질을 읽고 독단주의에서 깨어났다.”

 

이후 파리에서 맑스는 헤겔주의와 프랑스의 사회이론들,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종합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맑스는 역사적 구조에 대한 이론, 즉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들 사이의 형식적 관계들에 관한 이론은 헤겔에세서 이끌어냈지만 요소 자체에 관한 내용은 생시몽과같은 프랑스인들에게서 얻었다.

 

예를 뜰어 생시몽은 경제적 관계의 발전이 역사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엇다.” 그리고 푸리에와 시스몽디는 이전으 모든 계급투쟁은 재화의 부족으로 발생했지만 앞ㅇ로의 계급투쟁은 기계적 생산수단의 발달과 그에 따른 풍요한 재화의 생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계급투쟁을 막을 수 잇는 것은 국가의 개입 뿐이다. 국가는 자본을 축적할 권리와 생산수단의 소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스몽디는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나오기 훨씬 전에 이미 그러한 정책을 주창한 인물이엇으며 복지국가를 예언한 선구자였다.” 맑스는 경제적 관계의 우위와 분배의 문제라는 두가지를 모두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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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배와 칼 - 여성의 관점으로 본 인류의 역사, 인류의 미래
리안 아이슬러 지음, 김경식 옮김 / 비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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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레스테이아는 가장 자주 공연되는 그리스 비극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오레스테스가 어머니를 살해한 이유로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아폴로 신은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오레스테스를 변호한다. ‘어머니란 자기 아이라고 불리는 자의 부모가 아니다. 단지 새로 심어져 자라나는 씨앗의 보육자일 뿐이다.’ 오직 아버지만이 자녀들과 관계 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여신 아테네는 나를 낳은 어머니는 없다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결혼을 제외하고 나는 항상 진심을 다해 남성과 내 아버지를 따른다라고 덧붙인다. 그때 코러스-옛 질서를 대표하는 에우메니테스 혹은 분노의 신-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젊은 신들아, 너희 가 옛법을 짓밝고 내 손안에 있던 법을 찢어발기다니라고 외치고 아테네 여신은 결정적인 표를 던진다. 오레스테스는 어머니를 살해안 죄를 모두 용서받는다.”

 

이 비극의 발단은 선단을 움지이기 위해 순풍을 얻기 위해 아가멤논이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제물로 바친 것에서 시작된다. 돌아온 아가멤논을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단죄한다. “그녀는 아가멤논을 죽인 명분에 대해 물론 개인적인 슬픔과 증오도 있었지만 희생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이 있는 씨족의 우두머리로서 내린 결단이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간단히 말해 그녀는 모계 사회에서 정한 규범에 따라 행동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이 있는 여왕으로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저자는 오레스테이아란 고전극에서 모계 문화가 부정당하고 부계 문화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시점을 읽어낸다. “클리타임네스라 사선이 정의로운 결단이었다느느데 수긍하게 한 다음 그녀의 딸이 잊혀지고 그녀의 유령이 사라지고 마침내 사건이 완전히 잊혀지는 지점까지 이른다. 그때 여성은 이미 주장할 권리도 자질도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클리다임네스트라 같은 막강한 존재가 딸이 살해당하는 도발적인 상황에서 복수할 권리가 없다면 과연 어떤 여성에게 그런 권리가 있겠는가?”

 

이 고전극에서 저자가 읽는 것은 공동체 사회 혹은 가계가 여성을 중심으로 이어졌던 씨족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체제에서 남성이 재산과 여성을 사적으로 소유하게 된 변화이다. “아테네 인들은 오레스테이아를 통해 과거 분노의 여신 퓨리와 운명의 여신들이 굴복당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후 남성 지배 질서와 새로운 규범이 확립되었다.” 그 굴복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다. 절대적인 폭력에 압도당한 결과였다. 패배한 신들은 아크로폴리스 아래 동굴로 피신했다. 그때 아테네 여신은 그들에게 아테네에 머물라며 설득했다. 그 와중에도 아테네 여신은 변함없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은 친족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되풀이했다. 비굴해진 그들은 아테네 여신을 도와 최고 권력자인 제우스와 아레스가 통치하는 이 도시를 지키는일에 봉사하헸다고 약속한다.”

 

아버지가 딸을 죽여도 방관해야 하고 어머니와 자식은 가족이 아니라 말해도 인정해야 했다.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이것이 이책의 질문이다.

 

고고학자 김부타스는 신석기, 청동기 시대에 남동 유럽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화집단들의 집단적 동질성과 성취를 인정하면서 고대 유럽 문영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7000년전 남동 유럽에 살았던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는 윈시 정착민이 아니었다. 기원전 7000년경에서 3500년경 사이에 초기 유럽인들은 복합적인 종교 기구와 정부 기구들을 만들었고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청동이나 금으로 장식품이나 도구를 제작했으며 특히 문자로 보이는 기호를 개발했다.”

 

당시 근동의 문명들과는 독자적으로 발전한 고대 유럽 문명은 근동과 마찬가지로 평화로웠고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였으며 가부장제가 아닌 모계 사회로 남녀차별이 없었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표현하지 않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예술에서는 무장한 군대, 잔임함, 폭력에 기초한 권력을 이상화한 주제가 없다. 이 시대에는 고매한 전사들혹은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없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사슬에 묶어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영웅 정복자나 노예제를 묘사한 증거도 없다. 또한 초창기와 가장 원시적인 남성 지배 사회의 정복자들이 만든 유물과 달리 유독 여신을 숭배한 신석기 사회에서는 특이하게도 사치스럽게 꾸민 족장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모든 곳에서-사원과 집에서, 벽화에서, 항아리에 새겨진 장식 문양들에서, 입체 조각상에서, 진흙 입상에서 얕게 양각한 세공품에서- 자연에서 모방한 상징적인 배열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다시 여신 숭배와 연관되어 삶의 아름다움과 신비에 대한 경외심과 놀라움을 증명해주었다. 여신의 몸은 탄생과 기적과 윤회, 재생같이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신성한 성배로 표현된다. 신석기 예술에는 여신으로 의인화된 생명체들이 상징하는 화합의 주제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 우주를 지배하는 최고 힘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물질적이고 영적인 양분을 공급하며 심지어 죽은 뒤에도 아이들을 자신의 우주적 자궁으로 다시 데려간다고 믿는 신성한 어머니다.”

 

신석기 예술이 보여주는 세계관은 정복하거나 약탈하고 노략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구를 가꾸고 물질적, 영적 자원을 공급함으로써 만족스런 삶을 추구한다. 전체적으로 신석기 예술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비로운 힘의 주된 기능이 복종을 강요하고 처벌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고 축배를 들고 접대하는 것이라는 세계관을 담고 있다.”

 

선사시대는 마치 절반 이상이 찢어지거나 없어진 거대한 퍼즐같다. 완전하게 재구성하기는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조각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우리가 갖고 잇는 조각들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을 막고 조각이 들어맞는 진정한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장벽은 인간관계의 차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사시대 문화에서 인간관계의 전형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이다. “더 크고 강한 어른인 어머니는 분명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ㄷ더 작고 약한 어린아이보다 우월화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열등하다거나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힘은 억압과 특권, 두려움이 아닌 책임고하 사랑으로 승화되어 사회를 안정시켰다.” 여신으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세계관은 우리에게 익숙한 사회조직돠는 매우 다른 사회조직을 반영하는 것이 분명하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마찬가지로 파악되엇다. “싢롸적이고 고고학적 증거들은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 팽배했던 정신 중 가장 특기할만한 특징은 인간과 자연이 하라나는 일체감을 자각한 것이라는 시실을 알려준다. 이것이 신석기 시대와 크레타  인들이 여신을 숭배한 본질적인 이유였다. 고대사회에서는 우주를 지배하는 힘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양육하는 어머니라고 여겼다. 그런 만큼 남성신들이 추구하는 인과응보의 관념보다 심리적 사회저긍로 안정감을 주엇다. 수천년동안 서구역사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성모 마리아가 상징하는 동정적이고 자비로운 어머니에게 매달려 끈질기게 숭배함으로써 안정을 추구햇다. 다른 역사적 수수께끼처럼 이 끈질긴 숭배 역시 선사 시대에 수천년동안 여신을 숭배환 오랜 전통의 문맥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신석기 문명은 크레타에서 절정에 이른다. 크레타 사회에는 “’삶의 모든 영역이 창조와 조화를 가져다주는 자연의 여신을 향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다. 크레타는 역사 기록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대등한 동반자로서 조화를 이루어 줄겁게 지낸 마지막 세상같다. 크레타 문명의 예술적 전통에 유유히 빛나는 것도 바로 조화의 정신이아. 플라톤은 크레타 문명이 미적 가치와 우아함, 역동성에서 또한 삶의 유희와 자연과의 거리에서 매우 독특했다고 강조한다. 어떤 학자들은 미노아 인들의 생활상을 설명하면서 호모 루덴스의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잇다고 지적한다. 다른 학자들은 크레타 문명을 감수성’ ‘우아한 삶’ ‘아름다움과 자연의 사랑같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한다. 크레타 섬을 연구해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말로 감탄과 충격을 나타낸다. 그들은 동화 같은 세상에 대한 동경이나 이 세상에서 우아한 삶을 가장 완벽하게 누린 곳같은 표현으로 이 문명을 찬양했다.”

 

크레타 사회는 다른 고대 고등 문명 세계와는 달리 부를 공평하게 나누었다. 플라톤은 이 점을 지적하며 심지어 농부조차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던 것같다. 지금가지 발견된 어떤 집에서도 아주 가난했다는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기본경제는 농업이 중심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축 사육과 산업, 그리고 무엇보다 무역-거대한 상업 선단을 타고 전 지중해를 항해하며 무역을 장악했다-이 경제발전에 크게 공헌하면서 가치를 더했다. 사회조직은 처음에는 모계 씨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중앙집권화되엇다. 크레타에도 부유한 지배계층이 있었지만 그들이 거대무장세력을 소유하며 권력을 유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남자와 여자 모두 운동과 스포츠에 참가했고 유희로 즐겼다. 음악, 노래, 춤을 향유하면서 삶을 더욱 즐겼다. 행진, 잔치 등 공식 행사가 잦았고 극장이나 원형 경기장에서는 종교의식을 마치면 곡예가 공연되엇다. 또한 유흥과 종교가 뒤섞이곤 했는데 크레타인에게 종교의식은 즐거운 행사였다. 종교는 여가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크레타 문명에서는 삶이 창조와 조화의 근원인 자연의 여신에 대한 열렬한 믿음으로 충만했다.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독재를 싫어하며 법을 존중했다. 지배층조차 개인적인 야망을 품는 일은 드물엇던 같다. 어디서도 작자의 이름이 새겨진 예술품을 보지 못했고 지배자의 행적을 기리는 기록 한 줄 본적이 없다. 크레타 예술은 권력이 지배, 파괴, 억압 등과 동의어가 아닌 사회를 반영한다. 크레타 사회에서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휘두르거나 위협을 가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남성 지배자인 엘리트에게 복종을 강요하기보다는 모성의 책임감과 동일시되는 점이 많다. 바로 이것이 공동 협력 사회를 특징짓는 권력의 정의다.” 그리고 이 시대 다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강력한 남성 지배자를 표현한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왕좌를 차지했던 사람이 여성이었으리라 가정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여성이 예술품과 공예품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는 중심 주제였으며 특히 공적인 영역에 주로 나타났다. 기원전 3500년경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사회계층 구분이 엄격해지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추락했다. 미노아에서도 도시화가 진행되고 ㅅ하회계층이 존재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여성의 지위도 변함없엇다.”

 

다른 모계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성의 지위가 높다는 것은 성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웠다는 말이다. “성을 폭력보다 더 죄악시하는 현대 종교적 교리의 지배적 패러다임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스포츠와 춤에 대한 열정, 창조성, ,리고 삶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개방된 성 문화가 삶에 깊숙이 스며 크레타인들이 자유와 평화와 조화를 지향햘 수 있었던 듯하다. 아놀드 하우저가 말했듯이 미노아 문화는 그 정신이 동시대 다른 문화의 정식과 근본적으로 달랏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크레타 문명은 고대 유럽 문명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 문명은 아리아인들에 의해 잃어버린문명이 되었다.

 

7000년전 근동에서 고대 신석기 문화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압박이 거셌던 듯하다. 침략이나 자연재해 혹은 때때로 두 재앙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증거도 보이는데 엄청난 파괴와 대대적인 피난이 따랐을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오래된 도자기 그림 양식이 사라지는 등 신석기 문화는 서서히 붕괴하더니 마침내 후퇴와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혼란이 격심해지는 동안 꾸준히 발전하던 문명은 완전히 멈췄다. 이후 2000년이 훨씬 더 지나고 나서야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문명이 등장한다.”

 

김부타스는 그 단절의 이유를 쿠르칸족의 대이동이라 말한다. 인도-유럽어족의 조상인 이들의 침략과 뒤따르는 문화적 충격 그리고 인구 이동은” 3차례 일어났다. “1차 대이동은 기원전 43000년에서 4200년 사이, 2차대이동은 기원전 3400년부터 3200년에, 3차 대이동은 기원전 3000년부터 2800년에. 그들은 강력한 남성 사체와 전사들의 인솔하에 전쟁의 남성신과 함께 이동했다. 그리고 인도의 아리안족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정착한 히타이트와 미타니족, 아나톨리아의 루위족, 동부 유럽의 쿠르칸 족, 그리스의 아케이아 족 그리고 나중에 동참한 도이스족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정복지에 자신들의 이념과 생활방식을 강요했다.” 셈족도 그 대이동의 하나였다.

 

아리안과 셈족 두 종족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사회적, 이념적 체제 구조다. 두 종족은 모두 지배 중심 체제에 기초한 사회였다. 남성 지배와 남성적 폭력, 그리고 위계질서가 분명한 권위적 사회였다. 또한 그들은 처음 서구 문명에 기반을 놓았던 사회와는 달리 생산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가 아니라 훨씬 더 효과적인 파괴력을 바탕으로 물질적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이렇다할 기술도 문화도, 문명이라 부를 것도 없는 야만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야금술도 주변의 농경인들게 배웠다. 그 농경인들에게 구리 도끼는 나무를 자르는 도구였지만 이들에겐 사람의 목을 자르는 무기가 되고 힘의 상징이 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럽의 농부들에게 파괴기술은 사회적 특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쪽 사람에서 올라온 무리뿐 아니라 북쪽 메마른 땅에서 내려온 전쟁을 좋아한 무리에게 파괴력은 중요하고 유용한 권력이엇다. 철기가 인간의 역사에서 치명적인 역할을 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이제 철기는 일반적인 기술 발전의 도구가 아닌 죽이고 약탈하고 노예를 만드는 도구가 되엇다. 김부타스는 가늘고 날카로운 청동 도끼, 준보석으로 만든 철퇴, 전투용 도끼, 부싯돌 화살촉 등과 함께 청동무기가 등장한 것은 우연히도 쿠르칸 족이 이동한 경로와 일치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파괴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갔던 고대 유럽의 고고학적 풍경은 이제 몰라볼 정도로 변햇다. 김부타스는 수천년동안 이어지던 전통이 단절되고 도시와 마을은 붕괴되고 훌륭한 그림이 새겨졌던 도가기는 사라지고 사원도 프레스코화도 조각도 가징도 문자도 모두 사라졌다.’고 지적햇다.

 

야만적인 침략자긍릉 그들에게별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집, 사원, 뛰어난 공예품과 예술품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햇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노예로 사로잡혔고 운이 좋으면 달아났다. 이후 역사에서 인구 이동은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살아있는 전쟁무기가 새로 도입되었는데 바로 무장한 기마병이다. 당시에 그들은 오늘날 탱크나 비행기보다 더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쿠르칸족이 파괴를 서슴지 않으며 이동한 흔적을 좇으면서 전사-족장의 무덤을 발견하고 그안에서 무덤 주인을 둘러싸고 있는 희생당한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의 유해, 동물 뻐 르리고 무기들을 출토햇다.”

 

전쟁이 잦아지면서사회의원리는 평등에서 지배로 바뀌었다. “남성이 공동체를 지배했고 그 결과 여성들은 사회적 지위를 잃었다. 나아가 이전 시대에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던 여성 입상이 이후에는 더 출토되지 않았다. 과거의 이념은 바뀌었다. 모계 중심에서 부계 중심으로 사회구조가 바뀌엇다. 이제부터 잡종문화가 김부타스가 부르는 현상이 등장한다. 이 문화는 남아있는 고대 유럽 문화를 복종시키고 쿠르칸 족의 유목 경제와 부계 혈통의 계층화된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잡종문화는 이전 문화보다 기술적 문화적으로 훨씬 뒤떨어졌다. 이제 경제는 주고 가축 사육에 의존했고 고대 유럽의 기술이 잔류하고 있어 도가지는 놀랍도록 모양이 비슷했지만 질이 나빴다.”

 

쿠르칸 족의 말발굽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곳에서도 문화충격이 나타낫다. “점차 날카로운 칼로 지배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생명을 지키고 부양하는 능력을 대신했다. 무장한 정복자들은 초기 공통 협력 문화를 단절시켰고 겨우 파멸을 면한 사회들도 변화의 흐름을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크레타 섬은 대륙과 바다로 떨어진 덕에 참화를 비켜갔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플라톤이 증언하듯 지진과 해일로 크레타는 멸망햇고 그 잔해에 아케이아인들이 들어선다. “크레타의 종말은 본토에서와 비슷하게 시작되었다. 아케이아인이 지배했던 미케네 기간 동안 크레타 예술은 소극적이고 자유롭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을 걱정하며 강조했다. 아케이아인에게 영향을 받기 전까지 크레타인들은 죽음과 장례 제의를 중요시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아케이아인 엘리트들은 달랐다. 아케이아인들은 문명화된 미노아 양식에서 많은 부분을 취하기도 햇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삶보다 죽음에 ㅇ릭숙했다.”

 

과거의 잔해에서 재조립된 미케네 마저 또다른 쿠르칸인인 도리아인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후 그리스 본토와 주변 섬들 그리고 크레타에서 고도로 발달했던 문명은 서서히 사라졌다. 이 시대를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른다.

 

고대신화들은 기록되지 않은 이 시대의 변화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에 대해선 자아폭발리뷰에서 다루었다)이 그 예이며 헤시오도스의 타락 이야기도 그 중 하나이다.

 

암흑시대가 끝날 무렵 살았던 헤시오도스는 한 때 황금종족이 있었다고 주장햇다. ‘좋은 것은 모두 그들이 차지햇다. 풍요로운 땅은 맣은 과실을 무한정 쏟아냈다. 평화롭고 평안한 가운데 그들은 땅을 가꾸었고 가축을 사육했다. 그 모습은 하늘에서 신들이 내려다보기에도 사랑스러웠다.’ 헤시오도스가 순수한 영혼들, 악을 물리치는 사람들이라 일컬었던 이 종족 이후에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은의 종족이 나타났고 다시 그들은 은의 종족과 전혀 다른 재료로 만든 창에서 튀어나온 무섭고 힘센 청동의 종족으로 대체되었다. 헤시오도스는 이 민족이-청동기시대의 아케이아 인이라 알려진- 전쟁을 들여온 과정을 설명하면서 모두가 슬퍼하는 아레스의 죄스런 작업이 그들의 주 관심사였다’;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앞선 두 종족과 달리 평화를 추구하는 농경민이 아니엇다. ‘그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 마음은 단호하고 정복당하지 안는 돌처럼 냉혹했다.’ 헤시오도슨 ㄴ 아케이아인과 그들이 정목한 미케네 인들의 자손들을 독립된 네번째 종족으로 구분하면서 이들은 먼저 있었던 종족보다 더 정의롭고 고상했다고 덧붙ㅋ였다. 그들은 본래 타고났던 야만서을 어느 정도 벗고 고대 유럽인들이 누리던 더 문명화된 관습을 많이 채택했다. 이 무렵 다섯 번째 종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헤시오도스 시대에 이미 그리스를 ㄹ지배하고 있었다. 헤시오도스는 이들의 후손이었다. 그는 내가 다쇼ㅓㅅ 번째 종족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떤 사람은 다른 도시를 강탈화곤 한다. 옳다고 주장할 수 있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이제 경건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다섯번째 철의 종족은 도리아인들이었다.

 

우리가 문명의 시작이라 알고 잇던 수메르 문명은 야만인들의 정복 이후에 태어났다. 인도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으며 이집트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고 그리스 문명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들 문명은 그들이 파괴한 이전 문명의 잔해를 모아 복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을 뿐이다. 그들 문명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사회적 기술실제 지배 중심 사회 이전에만들어진 것들이다. , 정부, 종교, 문자, 야금술, 건축기술, 도시, 예술, 문학, 제의, 상하수도, 광장, 신전과 같은 도시계획 등 모두 지배와 전쟁과 무관했던 문명에서 태어났다. 신화는 문명의 선물을 준 것이 남성신이 아닌 이전 문명의 신들인 여신이라 인식한다. 실제 농경, 직조기술, 도자기, 문자 등 물질적 기술의 대부분은 여성이 발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옥한 초승달 지대뿐 아니라 이집트나 유럽에서 발견된 증거들을 살펴보면 여성을 정의, 지혜, 지성과 연관 짓는 일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칼을 든 야만인들과 함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오레스테이아가 공연되던 시절까지도 쿠르칸족에게 정복당한 선주민들의 후예들은 이전 사회가 어떠했다는 기억이 생생했다. 야만인들의 폭력이 낳았던 암흑시대가 끝나고 문명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문명에서 다시 살릴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지배와 그 지배의 수단인 폭력을 부정하는 평등주의와 평화주의였다.

 

자손이 어머니를 따라 계보를 잇고 여성이 씨족의 우두머리그리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존경받는 제사장이었던 사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 부계 혈통과 함께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은 분명 부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를 살해한 아들이 처벌받지 않는 것을 아이스클로스의 에우메니데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결코 이해할 수 없ㅇ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상할 수도 없고 정말로 신성모독적인 일은 우주를 지배화는 최고권력이 무장한 복수심에 가득찬 신들로 의인화되고 인간들이 일상적으로 살인과 약탈, 강간을 저지르는데도 그 신들이 묵과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그런 일을 명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은 바뀌어야 했다. 신의 이름으로.

 

지배 중심 체제가 옛 공동 협력 체제 위에 포개어져 두 체제가 함게 지속되는 것은 엣 체제가 다시 힘을 얻을 가능성이 있단 점에서 대단히 위험했다. 모계 씨족 사회의 우두머리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땅을 관리하는 옛 사회 경제 체제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새로운 엘리트 지배층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성들에게서 의사결정권을 빼앗고 동시에 여 사제들에게서 영적 권위를 빼앗았다. 심지어 피정복민들은 익숙한 모계 전통을 빼앗기고 부계사회에 적응해야 햇다. 실제로 고대 유럽,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가나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한줌의 정복자들은 새로운 부를 만들어내기보다는 정복지에서 부를 파괴하거나 빼앗음으로써 지배력을 획득했다. 이제 군사력과 위협으로 경제적 부를 분배하는 통로를 조절할 사람을 정해야 했다. 지위를 정하는 것은 사회조직을 유지하는 확실한 원칙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 위에 나머지 절반인 육체적으로 더 강한 남성이 올라선 것에서부터 모든 인간관계가 이 유형을 따르기 시작했다.”

 

먼저 지배자가 된 야만인들은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고대인들은 미토스와 로고스로 세상을 이해했고 각각은 다른 진실을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미토스를 통해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수용하고 혐오해야 하는지 신이 정한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배운다. 또한 사람들은 의식과 제의를 통해 신성한이야기에 참여한다. 그 결과 그 이야기들이 추구하는 가치들은 ㅇㅇ인간정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신성한 불면의 진리로 인정받으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사회의 원칙을 평등에서 지배로 바꾸는 것은 천붕지열의 변화이다. 그런 변화를 정당화하려면 미토스를 장악해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도 나오듯이 헤브루 족과 훗날 기독교도, 회교도들은 사원을 무너뜨렸고 벌목으로 신성한 숲을 파괴했으며 이교도 우상들을 살해했다. 또한 영적 파괴도 함게 감행했다. 책을 불사르고 이단자를 처단함으로써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거나 개종했다. 고대 사제들이 신성한 이야기들에 행사했던 중앙집권화된 통제방법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종교나 국가의 검열이나 대중매체의 방해공작을 제외하면 오늘날에는 매우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대중이 읽고 듣는 것을 매우 제한했다. 주로 공인된 견해만 읽고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공인된 이념에 위협이 되는 주장은 결코 전파할 수 없었다. 수천년 동안 사회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는 고대 사제들이 이용한 영적교육이다. 고대 사회에서 사제는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필수 요소였다. 그들은 민중을 지배하고 강탈했던 남성 엘리트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남성 엘리트였다. 사람들은 점차 폭력적이고 위계질서에 기초한 남성 지배 사회를 정상적이고 옳은 것으로 믿기 시작했다.”

 

수천년 전에 고대 유럽을 유린했던 쿠르간 족과 마찬가지로 남쪽 사막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을 휩쓸었던 헤브루 족은 전쟁의 신, 곧 사납고 질투심 많은 야훼 혹은 여호와를 찬양하는 신앙을 동반했다. 구약성서를 통해 우리는 여호와가 파괴하고 약탈하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실제로 이 명령들이 충실하게 수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헤브루 사회도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들과 마찬가지로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모세의 종족 곧 레위 족이 지배했다. 코나트 혹은 코헨 집안의 몇몇 엘리트가 사회를 지배햇다. 그들은 아론에게서 지위를 물려받은 사제들이었고 실질적인 권력을 소유했다. 구약성서를 보면 그들은 여호와에게서 직접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성경학자들은 바로 이 사제 엘리트 계급이 그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화와 역사를 다시 작성하는 일을 상당 부분 담당했다고 주장했다.구약성서에서 폭력과 권위주의, 남성 지배라는 지배 중심 사회의 외형을 완성하고 지지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유럽과 소아시아에서 대규모 파괴를 자행했던 쿠르간 족이나 다른 인도-유러피언 침약자들처럼 고대 헤브루 족도 남성 지배 체제가 엄격한 사회를 세웠다.”

 

그들의 지배를 축성한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우상이 되어야 했고 부정되어야 했다. 특히 지배 원리를 부정하는 옛 체제의 미토스는 더더욱 부정당해야 했고 그 주인공들인 여신은 사라져야 했다. 예를 들어 상직적으로 공공연히 신성시된 성경에서 여신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여성을 보호화고 남성이 여성에게 가한 부당한 처사를 복수해줄 신성한 힘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유대교 이전 고대 헤브루 종교는 사회에는 폭력의 지배를 선언하고 가정에선 가부장제를 선언한다. “구약성서에서도 나타나듯이 남성 지배계급은 새로 만든 법률에서 여성을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이 아닌 남성의 소유물로 정의한다. 처음에 여성은 아버지에게 속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출산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남편이나 주인에게 속하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구약을 보면 여자의 정절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남성 가부장의 재산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 “신명기 22 28절과 29절 사이에는 만일 남자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동침하여 정을 통하던 중 발각되면 남자는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50세켈을 주고 그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처녀가 아니라면 그녀는 더 이상 그녀의 아버지가 보상받을만한 가치 있는 재산이 못 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가치를 상실하게 만든 남자가그 값을 물어야 하고 그녀를 가져가야 된다는 말이다.

 

신명기 22 13절에서 21절은 더 노골적이다. “남자가 자기 부인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그 녀를 미워하고심지어 그녀를 제거하고 싶어하는 사건을 다룬다. 만약 신부의 순결이 만족스럽게 증명되지 않는다면 남편은 원하는대로 그녀를 제거할 수 있다. 법률에서는 그 여성을 그녀의 아버지가 사는 집 문 앞으로 데려가라 그러면 도시 남자들이 그녀가 죽을 때까지 돌로 칠 것이다.’가고 명시한다.”

 

죄없는 자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간통에 대한 율법이다. 간통자는 둘 다 죽이도록 되어 잇다. 그 이유는 도둑(다른 남자의 재산을 훔친 남자)을 처벌하고 훼손된 재산(남편에게 불명예를 안겨준 아내)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여전히 중동에서 살아있다. 소위 명예살인이 그것이다.

 

다른 예를 더 보자. “판관기 19장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사제는 처녀인 딸을 만취한 폭도에게 내어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상류층 레위 족 출신인 남자가 손님으로 왔다. 베냐민족 깡패 한무리가 손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위협했다. 분명 폭행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때 집주인 남자가 나서며 잠깐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여기 내 딸이 있고 이 아이는 처녀요. 그리고 저 손님의 첩도 여기 있다오, 내가 그들을 글어낼 테니 그들을 욕보이든 어지하든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오. 대신 이 사람만큼은 해치지 마시오.’라며 부탁했다.이 이야기는 볗ㄹ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인듯 대수롭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그 뒤에 이야기가 좀더 진행되면 손님이 첩을 데리고 깡패들 앞으로 나가고 그들이 그녀를 행음하고 밤새도록 욕보이는내용이 나온다. 나중에 그녀는 자기 주인이 잠든 문지방 앞에 엎드린채 쓰러졌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다여자를 주인은 그만 일어나서 가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죽은 뒤엿다.

 

딸과 첩의 신뢰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집단 성폭행과 힘없는 여성을 살해한 잔인한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어디에도 동정하는 말 한마디 없으며 도덕적으로 분노하거나 격분하는 언급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딸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처녀성과 목숨까지 희생하겠다고 제안한 아버지에게 아무 법적 제재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레위 족 남자의 부인이라 할 수 있는 여성을 집단 성폭행하고 고문하고 결국 살해했으리라 추정되는 깡패들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책은 겉으로는 성스런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괴상망측한 도덕성을 전제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아버지와 남편들에게 이끌려 강간당하거나 폭행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죽임을 당하도록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것을 합법화할 뿐 아니라 가해자를 처벌하려 하지도 않고 심지어 비난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선행으로까지 추겨세워진다. 롯에 과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롯은 당연하다는 듯 처녀인 두 딸을 집을 방문한 두 남자 손님을 위협하는 깡패들에게 내어준다. 이것은 당시 널리 용인되던 관습이었던 듯하다. 여기에서도 위법에 대한 언급은 없다. 딸들이 분노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오히려 롯을 찾아온 두 손님은 하나님이 보낸 천사로 밝혀진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이 살려준 유일한 의인이었다.

 

다른 사람을 노예로 하는 것도 당연하고 오히려 자랑일 뿐더러 여성을 심지어는 자기 딸까지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보는 그런 사회는 신의 이름으로 세워진 사회였다. 그 신이 명령한 사회에선 권위에 불복하고 독자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구하는 일을 가장 큰 죄악으로 간주하여 매우 엄하게 다스리지만 동료를 죽이고 노예로 삼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약탈하는 일은 묵인한다. 전장에서 벌어지는 살상은 성스러운 일로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전리품을 얻기 위해 약탈을 일삼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강간하며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일 역시 성스럽다고 용인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에서 나중에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신성국가에서 전쟁과 전제적 지배, 여성의 예속화는 새로운 지배 중심의 도덕성과 사회적 핵심이 되었다. 간단히 말해 문화적 진화의 행로를 성공적으로 돌림으로써 이후 현실은 완전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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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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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왜 무너졌는가에 대해선 많은 말들이 있어왔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문제는 왜 로마제국이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막지 못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로마제국 자체의 문제 때문에 그랬다. 둘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기엔 로마제국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생적 원인과 외생적 원인 두가지라 할 수 있다.

 

내생적 원인으로 보는 대표적인 견해는 기번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잘 알다시피 서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내부적 요인에서 찾았다. ‘로마의 쇠퇴는 터무니없는 거대함이 빚어낸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의 이면에는 부패 요소가 만연해 있었고 파괴의 원인은 정복의 크기로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월 혹은 재난에 의해 인위적 토대가 허물어지자 그 비대한 구조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

 

기번의 견해는 덕의 상실이라 요약할 수 있다. 로마는 지배계층의 자제력과 같은 덕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성공은 그 덕을 깎아내렸다. 지배층의 타락과 함께 성공의 원인이엇던 덕은 사라졋고 제국은 무너졌다. 기번의 논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번이 멸망의 원인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의 연장선이앋. “기독교의 교리논쟁으로 로마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수도승이 될 것을 권장함에 따라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정치참여가 줄어들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책을 옹호하여 로마의 전쟁기계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동로마의 상황과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로마제국은 6세기에도 존속했고 나아가 융성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시스템 속에서 죄악으로 간주된 모든 요소는 동로마에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로마가 더 기독교적이었고 교리논쟁도 더 심했다. 동로마는 또 서로마와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서로마와 같은 정부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로마는 살아남았고 서로마는 멸망했다. 따라서 그것만을 보더라도 제정 후기 서로마의 시스템에 고유의 내적 결함이 있어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4세기까지도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잇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팍스 로마나의 본질은 로마화였고 로마화가 제국 시스템의 근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피지배민족은 그들의 모국어외에 제국의 두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은 특히 부유층에서 두드러졌고 초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필요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곧 제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라틴어 문법학자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학교들을 시작으로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유사교육기관이 제국 전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4세기 무렵에는 제국 어디서나 문법학자로터 라틴어 교육을 받는일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는제국의 발전, 즉 가장 근본적인 변화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탈리아 이외의지역에 로마의 농촌과 도시를 닮은 풍경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로마와 로마 원로원을 무색케 할 절도로 광범위한 정치사회가 조성되었다. 라틴어와 라틴 문학이 로마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로마의 가치쳬게 전반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고 거기에는 그런 교육만이 올바른 인간-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는의미가 담겨 있었다.” 올바름, 우월함의 기준은 정치였다.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의미이다.

 

로마화로 방대한 지역의 주민 모두가 로마인이 된 것이다. 로마는 더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이용가능한 문화적 개념이었다. 그로써 로마제국의 성공에 따른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새로이 로마성을 획득한 로마인들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초대형 국가가 만들어내는 힘과 이익의 분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문법학자에게 7-8년동안 교육을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다. 상당량의 돈이 드는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주계급이엇다. 로마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들이었다.

 

로마제국은 부유한 지주층만이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잇었다. 제정 초기에 그 집단ㅇ속하려면 (지자체의 실권을 쥔) 참사회원이 될 정도의 토지와 개인적으로 문법학자를 두고 자녀를 교육할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상당한 수입을 필요로 했다. 정치에 적극 참여한 지주층은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의 태반은 아직도 정치참여에서 배제된 농부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수확에 세금이나 터무니없이 매기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마라타쿠르레니라는 이름의 산적 때는 제국의 징세원을 가장하여 농부들 재산을 갈취하는 식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행위가 먹혀들었다면 국가의 세금징수가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제국 인구의 태반은 시스템의 혜택으로부터 베제되거나 혹은 사소한 ㅎ택밖에 받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은 언제나 상류층의 이익 위주로 움직였다. 로마제국은 인구의 5%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의 80%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의 중심에 바로 법으로 지주층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준 중앙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마법의 상당부분은 재산문제에 관련돼 있었다. 기본적 소유권, 소유권의 활용방법(매각, 장단기 임대, 소작을 주는 일 등) 그리고 혼인 재산계약, 상속, 증여 등을 통해 세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6재산의 양도 같은 문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서슬퍼런 로마의 형법도 소유권 보호에 단단히 한몫을 하여 좀도둑 이상의 도둑질은 거의 사형으로 다스렸다. 훗날 로마 못지않게 농업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불평등한 토지분배에 기반을 둔 영국의 양반도 이와 비슷했다. 제인 오스틴이 사랑, 결론, 재산 양도에 관한 고상한 소설을 쓸 무렵의 영국도 도둑질한 자는 채찍형(10페니까지) 낙인형(4실링 10페니까지 교수형(5실링 이상)에 처했다.”

 

대체로 국가는 정부기구의 모든 분야에서 속주 지주계급의 행정력에 크게 의존했고 징세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세금의 효율적 징수는 지주계급의 세금납부 의지에 달려있었다다.” 무산자들이 막대한 수적 우세의 이점을 누리는 상황에서 모종의 다른 기구가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그 상황은 분명 부의 재분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4세기에 이 모정의 다른 기구는 지난 몇세기와 다를 바 없이 로마국가였다. 지주들 뒤에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집행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하게 해줄 능력을 지닌 국가가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주들이 로마 시스템에 참여한 방식은 조구받기식 등식에 입각한 것이엇다. 지주들이 국고에 돈을 넣어주면 국가는 엘리트 지위의 기반이되는 그들의 부를 보호해주었다. 4세기에는 받는 비율이 주는 비율을 훨씬 웃돌았다.”

 

로마제국은 지주를 위한 지주에 의한 지주들의 국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4세기까지도 그 시스템은 지주들을 위해 잘 돌아가고 있었고 지주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가 제국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관점도 설득력이 없다. 로마제국은 언제나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쉽게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로마 제국주의는 로마야말로 주신들에 의해 세계를 정복하고 문명화할 운명을 지녔다는 일관된 신조를 펼쳐왔다. 신들은 로마제국에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라는 사명을 부여했을 뿐아니라 활제를 직접 뽑고 영감을 불어넣는 일에도 관여했다. 국가와 신의 관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신속히 그리고 놀랄 만큼 쉽게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주신은 기독교 신이 되엇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구원이 인류가 구가할 최상의 상태로 여겨졌다. 제국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신의 도구라는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신의 종류엿다.”

 

저자는 모든 문제는 지정학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동로마에 비해 서로마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제국이 맞닥뜨린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동로마가 소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기다란 띠 모양의 비옥한 속주들을 북동쪽의 침입자로부터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서로마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이어진 국경지역을 지켜야 했다.”

 

그런 조건은 제정 초기부터 같았지 않은가? 문제는 3세기에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제국의 기초는 군사력이다. 제국이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제국이 유지되는 것도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군사력에 달렸다. 군사력이 강하면 제국을 건설할 수 있고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제국은 유지되며 군사력이 약해지면 제국은 무너진다. 제국의 운명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힘이 그렇듯 무력은 상대적이다. 그 무력이 강한지 충분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정학적 환경이 결정한다.

 

로마의 위기는 3세기에 찾아왔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산 왕조으이 탄생은 결코 현대 이라크와 이란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사산 왕조의 흥기로 로마는 100년 동안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던 동방에서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제국의 전략적 위치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것이다. 페르시아의 새로운 초강대국 사산왕조는 3세기에 로마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주저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세기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두말없이 동방의 페르시아를 지목했을 것이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로마제국의 능력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로마는 동방의 적을 상대하면서 제국의 다른 국경들도 방어해야 하는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4세기 말 로마는 몸집도 불어나고 체질도 바뀐 새로운 군대를 조직햇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정치의 중심을 원로원에서 군대와 관료층으로 옮겨놓앗고 정치의 무대를 로마에서 국경에 가까운 변경도시로 옮겨놓았다. “제국의 정치적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곳은 더 이상 로마의 원로원이 아니었다. 제국의 운명은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기동야전군의 사령관과 제국 수도의 고위관료들이 좌우했다.” 지정학적 압력이 증가한 결과였다. 군대는 언제나 로마 정치게임에 끼어왔지만 그 비중은 더 높아졋다. “군대와 정치의 놀라운 협조체계는 로마제국의 권력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군대. 황제, 관료들이 이탈리아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황제도 여러 명 필요해졋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은 라인강 국경지역과 너무 멀고 트리어와 밀라노는 동방과 너무 멀어 황제 한 사람이 3대 국경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징치적으로도 황제가 한곳에서만 부를 베풀어서는 그 많은 군지휘관과 관료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제위 찬탈의 위험이 상존했다. 3개 지역 군대 모두 황제에게 공정한 떡고움을 기대했다. 따라서 황제 한 사람이 장기간 단독 지배를 하면 반드시 분란이 일어났다.”

 

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정치구조는 급변했고 늘어난 군대와 관료는 제국의 재정에 압박을 가했다. “학자들은 제정 후기 로마군 병력을 40만명에서 60만명 사리오 본다. 그보다 규모를 낮춰 잡는다 해도 3세기 초에서 4세기 중반 사이 로마군은 애초의 30만명에서 10만명이 늘어나 최소한 4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재정지출 비붕이 가장 큰 항목은 언제나 군비엿다. 따라서 군비가 1/3만 늘어나도 제국이 거둬들여야 하는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재정압박에 시달린 제국은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재정개혁에 들어간다.

 

국가개조의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3세기 말에 로마는 전략의 안정화를 어느 정도 기할 수 있게 되엇다. 동방전선의 증강된 병력에 급여를 지급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들어선 뒤로 로마가 재무구조의 안정을 기하는데만 무려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또 그 과정을 감독하느라 중앙 행정기구도 몹시 비대해졋다.”

개혁은 성공적이엇다. 개혁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은 저지되었고 동방은 안정되엇다. 그러나 마른 수건까지 쥐어짠 그 개혁으로 제국의 재정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가 된다. 한계에 달한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의 영토확장은 라텐 문화와 야스트로프 문화라는 두 물질문화권의 중간지역에서 멈추었다., 두 문화는 일반적인 삶의 55ㅓㅇ격에서 몇가지 중요한 차이저을 보였다. 로마에 정복도기 전 유럽의 라텐 문화권은 마을 그리고 도시라고 해도 좋은 그보다 조금 규모가 큰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 문화권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화가 사용되기도 했고 문자해독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도 그가 정복한 라텐 지역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부족 특히 갈리아 남서부 지방의 아이두이족들 사이에 복잡한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보현화되더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라텐 문화권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전사, 사제, 장인계급을 부양할 식량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와 달리 야스토르프 문화는 낙농업을 영위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생활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주화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문맹이었으며 서기 1세기까지도 번듯한 거주지는 물론 마을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분화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게르마니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런 경제권에선 투자효율이 절대 좋을 수 없다. 무력은 공짜가 아니다.

 

중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는 중간지대에서 농업에 의존하여 안정을 기하려는 경향이 짙다. 중간지대의 현지 생산력만으로는 주둔군이 필요로 하는 군량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아는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어 로마에 정복된 비옥한 지역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서 배제된 것은 군사적으로 강대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텐 문화권과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기후학적으로 볼 때 지중해성 기후대와 대륙성 기후대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로마제국의 팽창과 멸망을 기후대의 변화란 변수로 해석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페이건은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로마의 장점은 3가지,즉 잘 조직된 군대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브라이언 페이건)

 

대륙성 기후대의 확장과 함께 그에 맞는 야스트로프 문화권의 게르만족이 남하한 것이라 페이건은 해석한다. 물론 단순히 기후의 변화만으로 게르만족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유럽의 게르만족은 인구는 큰폭으로 증가했다. 인구 규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인데 게르만족의 경우 농업혁명으로 곡물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곡물생산의 증가는 다른 경제분야도 촉진해 철의 생산, 도기, 유리, 귀금속 제품 의 생산 등도 증가했다. 4세기 무렵 게르마니아에선 경제혁명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혁명은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 “게르만 유럽에는 지배적인 사회 엘리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혁명은 사회적 분화를 촉진했다. “경제혁명으로 창출된 부는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 집단에 편중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근대의 산업력명이나 최근의 세계화로 창출된 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부는 집단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그 부가 막대할 경우 그것을 차지한 집단은 기존 권력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출했을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게르만족은 서서히 몇몇 집단으로 통합되어 갔다. “게르만 동부나 서부 모두 새로운 부가 증가하자 종주권을 차지하기 윟나 쟁탈전을 벌였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군대도 필요해졋다. 그 과정에서 4세기 게르마니아의 특징인 보다 규모가 큰 정치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4세기까지도 게르만족은 위협이 아니었다. 켈트족과 마찬가지로 단합할 줄 모르는 특성때문이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정치연합에 그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에서 병력을 제공하는 동맹자이거나, divide and rule의 전략에 따라 로마의 계략에 따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장기말일 뿐이엇다.

 

그러나 훈족과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동쪽에서 훈족이란 당구공이 날아오면서 하나씩 하나씩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게르만 부족이 하나씩 서로마의 영토로 들어올 때마다 제국은 납세자들이 학살당하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세입을 잃었고 게르만족이 영토를 차지하면서 납세자를 뭉텅이로 떼어주어야만 했다.

 

로마가 상대해야 했던 외부의 무장세력은 총 11만에서 12만명 정도였다. 이 외부침입자들이 불러일으킨 원심력 때문에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신생왕국으로 하나둘씩 분열돼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세력을 개별집단으로 헤아려보면 각 집단의 병력은 수십만명이 아닌 수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압도적 병력이 아니다. 375년 서로마는 적어도 30만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서로마제국 붕괴의 실상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있다. 서로마제국은 13세기 몽골족의 침략을 받은 중국과 달리 한순간의 정복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만족들은 당초 자신드르이 정주지를 세울 정도의 군사력만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로마제국의 힘을 소진시켰고 그로ㅓ부터 독립왕국을 수립하는데는 적어도 2-3세대의 기간이 걸렸다.”

 

로마제국은 일시적인 상실이거나 영구적 상실이거나에 상관없이 영토를 잃을때마다 국가의 생혈인 세수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라 제국이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제국은 말라죽어야 했다.

 

동로마는 서로마가 그냥 죽게 놔두지는 않았다. 40%의 병력을 항시 페르시아 전선에 묶어두어야 하고 그외의 변경도 방어해야 하는 형편에서도 할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할만큼은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마를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햇다. 4세기에 이미 한계까지 올라간 재정부담은 서로마는 물론 동로마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한계는 제국 붕괴에 필요요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5세기 서로마제국은 만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제국이 흔들리자 제국의 기둥인 속주의 지주들 또한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국력의 약화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위태롭게 했다. 토지에 기반을 둔 지주들로서는 새로운 지배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마에 이어 유럽에 등장한 제국, 즉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이 9세기 말에 붕괴하는 과정은 서로마제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카롤링거 왕조의 위대한 정복이 이루어진 뒤에도 항상 재원부족에 시달렸고 그런 상태가 2-3세대 넘게 지속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특히 서로마제국을 500년동안 떠받쳐준 요소였던 재분배적 과세권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방 엘리트들의 지원을 얻는 일에 중앙의 돈을 스게 되어 국가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지방엘리트들은 프랑크 제국 수립 후 100년만에 자치를 도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격렬한 투쟁 없이도 그것이 수월하게 얻어졌다. 몇세기 동안 보유했던 조세기반을 외부세력에게 빼앗긴 서로마제국과 달리 프랑크 제국은 통제할 자산이 처음부터 적었기 때문에 재정의 파탄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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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 -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 이야기
페르낭 브로델 지음, 김홍식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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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브로델의 경력은 이 질문과 함께 시작했다. 아날 학파 이전까지 역사학의 대상은 사건들이었다. 브로델은 정치와 외교를 비롯한 사건 중심의 역사를 고집하던 기성 소르본학파에 강력하게 반발했고 그의 휘하에 젊은 역사학도들이 모여들어 아날학파 2세대를 형성했다. 브로델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 즉 장기지속을 역사학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 방법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로델은 역사를 시간지속의 변증법이라 표현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이 둘 사이에는 활발하고 밀접한 대립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우리 역사가들이 보기에 이러한 대립이야말로 사회적 실재의 핵심에 존재하며 다른 어느 요소보다도 중요하다. 우리의 세계를 파악하려면 세계를 움직이는 갖가지 힘과 조류, 움직임의 계층적 질서를 정의;해아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합쳐서 다시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연구하는 각 순간마다 오래 이어지는 움직임과 짧은 움직임을 구분해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역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과거의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생기면 오랜 시간 관성을 얻은 힘과 새로 등장한 힘 사이에 충돌과 반목이 생기기도 하고 절충과 타협이 일어나기도 한다. 옛것을 유지하려는 힘은 긴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고 새것으로 바꾸려는 힘은 짧은 시간대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역자는 이런 예를 든다. “쓰레기를 분리수거한지는 얼마 되지 않으니 재활용 기준에 다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은 짧은 시간의 힘이고 아무렇게나 버려 한꺼번에 매립하는 것은 오랜 시간의 힘이다. 한동안 분리수거 체계가 확대되는 듯하더니 얼마전부터 각 생활거점에서 분리수거한 쓰레기들도 중간처리과정에서 다시 섞여 매립장으로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처음에는 짧은 시간의 힘에 밀리는 듯했던 오랜 시간의 힘이 다시 승리하는 형국이다.”

 

브로델은 이렇게 역사를 시간의 지속에 따른 레이어로 나눠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통 우리 눈에 잘 띄고 우리의 관심이 쏠리는 대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새로운 것들, 즉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브로델은 그러한 단기적 시간대에 주목하는 역사를 표층의 역사라 본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후에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장기지속하는 심층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고 본다.” ㅜ심층의 역사는 밑바닥에서 표층의 역사를 떠받치고 또 제약하면서 천천히 밀고 나가는 육중한 힘을 행사하는 실체라고 브로델은 생각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의 역사는 아날 학파에서 장기지속이란 말로 통일되어 쓰인다. 장기지속은 사회과학에서 흔히 말하는 구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이 말하려는 것은 어떤 시스템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것은 무언가의 결합이고 건축물과 같은 모습이겠지만 그보다는 시간이 흘러도 마모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언가의 실재를 뜻한다.”

 

브로델은 표층을 조건짓는다는 의미에서 심층을 장기지속하는 감옥이라 부르기도 한다. 심층이 구조와 다른 점은 시간만이 아니다.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은 기든스 말하는 practical consciousness와 비슷하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행동은 수천 가지에 달하지만 아무도 결정할 필요없이 그것들 스스로 완수된다. 사실 이러한 일상적 관행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내 생각에 인류의 삶은 절반 이상이 일상생활에 묻어서 굴러간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수없이 많은 행동이 뒤죽박죽 누적되고 무수히 되풀이되면서 우리 시대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습관적 행동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도록 도와주기도 하고 옥죄기도 하면서 우리가 사는 내내 우리를 대신해 결정한다.”

 

기든스는 무의식이란 용어를 재정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실상 우리가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자동화된 루틴을 말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핸들을 돌리고 브레이크와 액셀을 왔다갔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운전하면서 의식하는 것은 전화도 받고 잡담도 하고 음악도 듣는 의식의 표층에 떠있는 행동들이다. 그러나 갑자기 핸들이나 브레이크가 이상할 때 의식(discursive consciousness) 아래에 가라앉아 스스로 돌아가던 운전 루틴이 의식의 표층에 떠오른다. 일상어법에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의식 표층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기든스는 이것과 (의식으로 떠올릴 수 없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구분하여 불러야 된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기든스는 사회과학에서 구조라 부르는 것들이 자리잡는 곳이 바로 그가 practical conscioussness라 부르기를 제안한 곳이라 말한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시스템과 다르다. 시스템은 지금 여기에 실제하는 것이며 구조는 그 시스템을 짜기 위한 재료에 가깝다. 그가 구조라 부르는 것은 소쉬르가 말하는 langue에 가깝다. 언어의 통사, 음운구조, 의미론들이 그렇듯, 기든스가 말하는 구조는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인 시간위에 형성된다.

 

브로델이 장기지속을 심층 또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기든스와 비슷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가 심층, 무의식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오래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수백년 전의 과거는 아주 오대된 것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며 현재로 흘러온다. 마치 아마존 강이 엄청난 물줄기에 토사를 실어 대서양으로 쏟아내는 모습과 비슷하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물질생활이란 편리한 용어로 파악하려는 내용이다. 물질생활은 인류가 이전의 역사를 지나오는 동안 자신의 삶 아주 깊숙한 곳에 결합ㅎ해온 것이다. 마치 우리 몸속의 내장처럼 깊숙한 곳에 흡수되어 잇는 삶이다. 그래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권을 써나가는 길잡이다.”

 

여기서 브로델이 말하는 심층으로서의 물질생활은 기든스가 구조에 대해 말하듯 이중성(duality)을 갖는다. 하나는 조건으로서 구속하는 의미, 둘째는 구조 자체를 만들어내고 또 움직이는 거대한 동력을 뜻하는의미이다. 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장기지속은 곧 구조를 뜻한다라고만 아해하기 곤란한 딜레마 같은 것 있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누적되어 형성되는게 구조라면 그 런 구조를 만들어내는 오랜 세월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 세월의 무게와 그로부터 형성된 구조가 아무리 무겁고 단단하더라도 세대를 거듭하는 긴 시간대의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역사를 창조하는 원동력은 어느 한두 세대의 행위나 그들이 처한 조건을 뛰어넘는 훨씬 장기적이고 심층에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읽힌다.”

 

역자는 장기지속에 한가지 의미가 더 있다고 말한다. “브로델은우리는 심층의 역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으로 비추어 볼뿐입니다.’라고도 말한다. 장기지속이라는 개념은 역사를 기술하는 내용이나 결과라기보다는 역사를 기술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또 한 그러한 방법으로 찾을 수 잇는 여러가지 비체계적인 재료를 가리키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무언가의 구조랄지 어떤 역사의 법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낟. 오히려 그렇게 찾아낸 여러가지 재료에서 읽어내야 할 과제가 구조나 법칙이 될 것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베버의 이념형을 도입한다. “그의 핵심논지는 이 세상에 언제 어디서나 즉 시공을 초월해 적용가능한 보편타당한 모덿은 없다는 것이다. 즉 모델은 관찰자가 눈여겨본 사회 환경에서 추출한 실재를 반영해 만든 일종의 가설이고 설명체계인데 다른 시간과 공간에 얼마나 잘 적용되는지 시험해봐야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델을 배에 비유하는 브로델은 일단 모델이라는 배를 만들면 역사적 시공의 물줄기에 띄워보는 시험항해를 한다고 말한다. 시험항해란 모델이 상정하는 실재, 즉 사료를 찾아 검증하는 일이다. 여기서 브로델은 역사적 시공의 구체성에서 이탈하는 보편타당한 모델을 배격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장기적인 연속성을 찾아 나서지 않고 단기적 사건에만 주목하느 태도도 배격한다. 브로델은 모델의 내용보다 모델을 활용하는 방법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잇다. 또 모델과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왕래를 위해 정밀한 개념의 모델보다는 되도록 많은 사실을 담아 비교해볼 수 있는 다소 느슨한 모델을 역사서술의 준거로 삼았다고 이애할 숭 ㅣㅆ다. 브로델이 역사 기술에 활용하는 모델들이 엄밀한 개념 정의 면에서 느슨한 혹은 과소결정된 것들이라는 점을 알아두는 것은 분량이 엄청난 그의 저서를 읽어나갈 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15-18세기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공속에서 자본주의란 것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서 브로델은 두개의 모델을 시험한다. 첫째는 물질생활-시장경제-자본주의란 삼층집 모델이다. “브로델은 물질생활을 물질문명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러한 삶의 차원들은 아무 말 없이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지만 이것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토대이다. 또 아주 오랜 세월동안 장기지속하면서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삼층집에서 일층에 위치함은 바로 그런 의미다. 물질생활은 거의 다 자급자족에 가까운 사용가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브로델은 자급자족에서 탈피해 교환가치의 문지방을 넘으면서부터 경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경제생활이 시갖된다. 여기서부터 삼층집의 일층 위로 이층이 올라서기 시작한다.”

 

브로델이 말하는 경제생활은 교환의 세계란 제목의 2권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그 내용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과 그리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 본다.

 

역자는 처음엔 브로델이 경제생활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라는 두층으로 나눤다고 본 것같다고 한다. 그러다 경제와 시장경제를 같은 것으로 보고 자본주의는 별개의 한층으로 본 것으로 생각이 바뀐 것같다고 생각한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다른 이유로 브로델은 중국을 예로 든다. “기초적 시장 단계에서 가장 놀라운 형태로 시장을 조직한 곳은 분명 중국이다. 시장이 거의 수학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한 지리에 바탕을 두고 조직되었다. 가령 장이 서는 읍내나 작은 도시를 백지 위에 찍은 점이라 치면 그 주위로 뺑 돌아가며 여섯에서 열개의 마을이 위치한다. 이 마을들은 모두 농부가 읍내 시장에 갔다가 당일 내에 돌아올만한 거리에 자리잡고 잇다. 윌리엄 스키너는 중국농총의 생존을 결정하는 곳은 촌락 자체가 아니라 촌락을 아우르는 시장권이라고 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이와 같은 읍들도 도시를 적절한 거리에서 감싸며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도시의 위성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브로델은 중국은 자본주의가 없었다고 말한다. 교환의 상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브로델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이 교환의 상층이다.

 

“18세기까지 시장경제자본주의이 두형의 활동은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 무렵까지 인류가 영위하는 생활의 대부분은 여전히 거대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생활속에 잠겨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실재는 화려하고 섬세하지만 비좁은 층위에 속해 있었고 경제샐활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 뿐 아니라 보통 상업 자본주의라 일컫는 구체제하의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전체를 장악하지도 못했고 마음대로 주무르지도 못했다.”

 

브로델은 삼층집 모델을 이렇게 묘사한다. “시장경제는 그 본성상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역할에 불과하니 전체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19세기 이전에는 광대한 일상생활의 대양이 아래쪽에서 시장경제를 떠받치고 있었고 자본주의 메커니즘은 두번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위쪽에서 시장경제를 조작햇다. 즉 시장경제는 이 두층 사이에 끼어 있는 하나의 층에 불과했다.”

 

그러면 왜 브로델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나누어 보는가?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반시장적이기 때문이라 브로델은 말한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투명해서 놀랄만한 사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 각자가 거래에 관한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잇고 이익도 항상 왠만한 정도엿기 때문에 사전에 개략적인 계산이 가능했다. 읍내에서 열리는 시장이 이러한 교환의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거래는 다르다. “중개인이 끼어들게 된다. 이 중개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상품을 사재기하고 재고 물량을 조작해서 시장을 교란하거나 지배하고 가격에 영향을 미쳤다.”

 

브로델은 교환의 세계는 수직적 위계로 나뉘어진다고 본다. “대체로 아래층에 속하는 동네에서는 시장경제의 모습처럼 투명한 경쟁이 이루어진다. 그 수직 사다리의 위로 올라갈수록 이러한 시장경제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교환의 영역이 펼쳐진다는 것이 브로델의 논점이다. 이 상층영역에서는 소수의 덩치 큰 선수들이 영악한 술수와 힘을 휘드르며 법규와 규볌을 우회하거나 무시하고 높은 이익을 독차지한다. 브로델은 경쟁의 힘이 작용하지 안ㅇㅎ는 이 별세상 같은 교환의 상층부를 반시장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역의 활동을 도저히 시장경제로 봐줄 수도 없고 경쟁과 규범이 아니라 독점과 지배가 힘을 행사하는 곳이니 시장경제와는 정반대라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영역이 예나 지금이나 산업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자본주의란 실체가 존재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브로델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곳에선 소의 시장경제의 핵심법칙인 경쟁이 별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다음로 상인이 누렷떤 두가지 이점을 들 수 잇다. 하나나는 상인이 끼어들면서 생산자와 최종적인 상품 수요자의 관계가 끊어짐에 따라 시장의 양쪽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상인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많았다. 다른 하나는 그의 주된 무기인 현금이 항상 수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과 소비 사이에 기다란 상거래망이 형성된다. 이러한 상거래가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분명히 그 효율성 덕분이엇다. 특히 대도시에 물자를 공급하는데 효율적이었고 그 덕분에 정분에 정부 당국의 양해를 얻거나 적어도 규제를 느슨하게 풀어주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거래 경로가 아주 먼 장거리로 늘어날수록 그만큼 통상적 규제와 간섭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쉬워졌고 자본주의적 과정이 더욱 선명하게 발생하게 된다. 자본주의적 과정은 원거리 무역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원거리 무역은 원하는대로 활동할수 있는 자유공간 그 자체였다.” 자유공간은 초과이윤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두둑한 이익에서 상당한 규모의 자본이 축적된다. 특히 원거리 무역은 소수의 사람들만 참여했으니 자본축적이 빠르게 진행됐다. 이런 사업에는 아무나 참여할수없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든 기독교 세계에서든 이러한 자본가들이 군주와 가까운 사이였고 국가에 협조하면서 또 국가를 이용하는 존재엿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오래전 아주 일찍부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섰고 해외 상거래 중심지의 상인들과 손발을 맞추며 거래했다. 또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게임을 왜곡할 수천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들은 지식, 정보, 문화 면에서 누리는 우위를 바탕으로 주변에서 값나가는 것이면 무엇이든 장악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진보의 동력이라 볼 수 없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오히려 모든 것이 물질생활의 거대한 등판을 딛고 서 잇다. 물질생활이 팽창하면 모든 것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장경제는 물질생활을 희생시키면서 그 자신은 빨리 팽창하고 또 자신의 관계망을 확장한다. 이렇게 시장경제가 팽창할 때 자본주의는 항상 이득을 본다. 나는 기업가를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의 해결사인 양 내세우는 슘페터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어디까지나 결정적인 것은 전체의 운동이며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우선은 그 밑에서 받쳐주는 경제를 바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제국시대 중국정부들이 자본주의를 용인하지 않았고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엇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독점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그것은 힘의 논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국가와 한 몸을 이룰 때에만 즉 자본주의가 국가가 될 때만 승리한다.” 자본주의는 권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권력이 될 수 없을 때 자본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 “명나라와 청날 때의 중국이 그러한 경우이다. 중국만큼 선명하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구체제의 프랑스 왕정도 그러한 경우이다. 프랑스 왕정은 상인들에게 특권적 역할을 주지 않았고 귀족으로 구성되는 지배적 위계를 가장 중시했다.”

 

자본주의가 권력현상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지의 역사 자체가 증명한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서구에서 개인이 홀로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았지만 역사는 똑 같은 교훈을 되풀이해 보여준다. 즉 개인의 성공은 언제나 악착스럽게 재산과 영향력을 야금야금 키워가는 신중하고 세심한 가문의 자산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재산과 권세가 축적되는 과정을 눈여겨보면 유럽에서 봉건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봉건체제에서는 영지를 차지하는 영주들의 가문이 혜택을 누렷다. 가장 기본적 재산인 토지를 봉건 영주들끼리 나워 갖는 것이 부를 안정적으로 할당하는 형태이기도 했고 봉건 사회의 맥락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이기도 햇다. 부르주아지는 수백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특권계급에 붙어 기생했다. 그들 가까이에 서식하면서 그들의 실수와 사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이용해 이 특권계급의 재산을 빼앗아간다. 그러다 결국 그들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스스로 특권계급이 된다. 이러한 유형의 사회는 봉건 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해 여전히 절반은 봉건적인 채로 남아있기 때문에 소유권과 사회적 특권이 비교적 잘 보호되기 마련이다. 그만한 지위에 오른 가문들은 비교적 별 탈 없이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소유권은 신성불가침으로 취급된다. 그래야만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을 벗어나면 그런 특권의 안정성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엿다고 브로델은 말한다. 중국의 경우는 과거제도 때문에 특권계급의 문호가 열려 있었고 사회적 이동성이 훨씬 컸다. 특권계급이 되면 재산을 모으게 되지만 그 재산이란 것 유럽에서처럼 커다란 가뭊ㄴ을 일으킬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더욱이 재산이 아주 많거나 권세가 큰 가문은 원칙적으로 국가의 감시를 받는 표적이 되엇다. 국지적으로 상인과 부패한 관리가 공모하는 일이야 늘 있었지만 중국의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확산에 적대적이엇다.중국의 진정한 자본주의는 중국 밖에서만 존재했다. 예를 들어 동남아 군도에서는 중국 상인이 완전히 자유를 누리며 행동하고 군림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는 수직적 위계를 필요로 한다. 즉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성공하려면 일정한 사회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자본주의에 필수불가결한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사회적 질서가 어느 정도 안정적이어야 하고 국가가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이거나 아니면 허약하거나 호의적이여야 한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다. 모든 것이 다 갗춰졌을 때 자본주의가 당도한다. 달리 말하면 수직적 위계라는 문제 자체는 자본주의 너머의 문제이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문제이며 자본주의가 출현하기에 앞서 존재하며 자본주의를 통제한다.”

 

이렇게 본다면 맑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이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은 생산양식인가?” 브로델은 자본주의란 용어 자체를 마지 못해, 달리 쓸 말이 없기에 쓸 뿐이다. 아마도 그런 물음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대답을 한다면 자본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요소들을 스스로 번식해가는 독자적인 생산양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역자는 그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브로델은 자본주의라는 것은 생산양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라고. 브로델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생산양식의 바깥보다는 위에 존재하면서 생산양식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존재. 즉 그가 말하는 최상층의 존재일 것이다. 따라서 브로델은 19세기 들어 자리를 잡은 산업자본주의가 진짜 자본주의이고 이전의 상업자본주의는 가짜 자본주의라고 생각하는 시각에 반대한다. 상업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없었으며 19세기 이전이든 이후이든 19세기 중에든 금융자본주의, 산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는 늘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 말한다. 어디에서 높은 이익이 생기느냐에 따라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우선적 분야나 투자가 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3층집 모델을 지리적 공간에 횡적으로 펼치고 그 공간에 중심부-중간부-주변부라는 계층적인 지배-종속 관계를 더하면세계-경제(World-economy 역자는 경제계란 번역어를 제시한다.) 모델이 된다. “중심부에도 자본주의-시장경제-물질생활의 삼층집이 있고 중간부와 주변부에도 각각 삼층집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브로델의 논의를 따라가보면 결국 중심부의 최상층에 위치한 자본주의가 경제계 전체를 조직하는 힘을 발휘화는 곳이 된다.”

 

삼층집 모델과 경제계 모델로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본 후 브로델은 자본주의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로 세가지이다. 첫째 자본주의는 여전히 국제적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차원과 세계적인 규모에서 존재한다. 적어도 세계 전체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현재 자본주의가 처한 커다란 관심사가 무엇인가? 바로 이 세계주의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법에 근거한 것이든 관행에 근거한 것이든 여전히 독점에 의존한다. 독점이라는 문제를 놓고 격렬한 반대가 빗발쳐도 자본주의는 집요하게 독점을 유지한다. 조직이 여전히 시장을 우회하고 있다는 말이 오늘날에도 들여온다. 이런 문제가 정말로 새로운 사실이라고 여긴다면 잘못된 것디다.

 

셋째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는 결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결코 자신의 완벽한 시스템 속에 이 두 가지-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다 주워 담지 않는다. 앞에서 물질생활과 시장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로 구분하는 삼중 구조를 제시했다. 이 모델은 서로 다른 것을 구분하고 설명하는 놀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 대한 브로델은 총평은 이러하다. “최악의 오류는 자본주의를 경제 시스템이라고만 여기고 그 이상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질서를 이용해 생존하고 애초부터 육중한 상대자였던 국가와 대등한 지위에서 맞서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또 사회구조를 지탱해주는 문화의 역할도 이용한다. 소수의 특권으로서 존재하는 자본주의와 사회와 능동적으로 공모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질서의 한 실재이고 정치질서의 한 실재이기도 하며 문명의 한 실재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는 경제 영역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그 실체는 인접한 영영과 그 영역들에 침투한 모습을 비추어 보지 않고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고 그때에야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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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의 끝 - 지구에게 문명과 인류의 생존에 대해 묻다
다이앤 듀마노스키 지음, 황성원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지난 2세기 동안 세계경제는 폭발적으로 증가햇다. 이것은 자연계를 극단적으로 쥐어짜는 경제 빅뱅과도 같았다. 폭발적인 성장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이에 대해 사람들은 종종 인간의 천재성과 기술적, 제도적 혁신이 자신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성장을 일으킨 것이라 답한다.”

 

저자는 경제학자들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역설적이게도 주류 경제학자들은 직업적으로는 물질적 문제에 대해 생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주로 인간의 독창성과 기술을 가지고 모든 것을 심지어는 극단적인 기후변화마저 극복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가정 때문에 물리적 실재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자유롭다. 노벨경제학상 수장자인 로버트 솔로가 인간의 독창성 덕분에 경제는 자원고갈을 대체할 수 있는끊임없는 대체재를 발견할 수 있고 이로써 세상은 결국 자연자원없이도 잘 굴러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모든 살아 있는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는 꾸준한 에너지 흐름으로 스스로를 유지한다.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를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1인당 에너지의 양은 많아진다. 산업시대에 들어 경제성장과 에너지 소비증가는 괘를 같이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근대산업은 에너지와 원료를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했고 그 결과 투자한 에너지 양에 비해 더 많은 경제성장을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는 효율성 증가보다 더 빠르게 팽창햇다. 경제성장은 에너지 투입량에 비례했다는 말이다.

 

에너지가 이렇게 퍼부어지듯 유입되지 않았더라면 예를 들어 세계인구가 20세기에 네 배로 증가하는 일은 업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농업용지의 양은 겨우 1/3 증가했지만 수확량은 6배 늘었다. 이것은 식량생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놀랍게도 ‘80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산업시대는 모든 측면에서 오색창연한 시대였다. 지하에 매립되어 있던 화석연료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것과 같았다. 산업문명의 유례없는 힘은 이런 유산이 화염 속에 사라져갈 때 만들어진 상상을 뛰어넘는 막대한 불길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두 세기는 성대한 잔치였다. 어마어마하게 해방되고 들떠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고 믿을만한 근거가 너무도 많은 그런 야단스런 잔치 말이다.”  잔치의 끝은 두가지로 찾아올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느린 죽음과 기습.

 

저자가 느린 죽음이라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것이다. 더 이상 태울 것이 없어질 때 불길은 꺼질 수 밖에 없다.

 

높은 에너지 수요와 복잡성은 한 쌍을 이룬다. 미생물들은 산소가 풍부한 대기를 만들어내고 진화를 통해 호흡하기 시작하면서 높은 에너지 흐름과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산소를 호흡하면서 당분 분자 하나당 18배나 더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엇다. “산소가 없었다면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는 녹색 미생물 찌꺼기엿을 것이다. 게다가 산소의 증가. 빙하기와 폭염의 난폭한 반복과 함께 생겨난 기후 불안정은 진화를 촉진해 5 7500만년에서 5 2500만년 전 사이에 복잡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생명의 형태를 폭증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캄브리아기의 폭발이라고 하는 지구 생명체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다.”

 

경제라는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 경제는 매우 복잡한 시스템이며 이런 복잡성은 지속적인 에너지 처리량을 바탕으로 한다. 개방 시스템에서는 에너지 사용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고 복잡성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그러나 경제의 산소인 에너지(석유)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점점 더 많이 투입되다가 어느 순간 흐름이 중단되거나 감소한다면 우선 경제성장이 멈출 것이고 그 다음에 성장은 역전될 것이다.” (크리스 마틴슨) 복잡계의 붕괴가 시작되는 것이며 무질서 상태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 붕괴의 정도는 성장속도에 비례할 것이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기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오존 구멍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남극의 오존구멍은 지난 60년간 전 지구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지구상에서 엄청난 도약을 했고 행성차원의 새로운 지위를 얻었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운명의 관문을 지나 지구와 전례없는 관계를 맺었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다. 오존 구멍은 최소한 지구 시스템을 정상적인 작동 범위 밖으로몰아가다보면 극적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의문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오존층에 구멍을 낸 프레온 가스는 오존층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던 시절에 발명되었고 당시엔 아무 해가 없는 기적과 경이의 화학물질이라 불렸다. 그러나 오존층과 프레온의 관계가 이론적으로 규명되었을 때 현시대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이 생성 시스템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세상의 작동원리에 대한 근대적 이해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과학혁명 이후 서구문화는 과학이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없이 개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동적인 자원이라고 단정한 자연에 대해 훨씨니 더 큰 통제력을 갖게 해줄 것이라는 가정 아래 지식과 권력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제 이 보다 더 잘못된 사고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오존 구멍은 단순한 경악의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를 훨씬 뛰어넘는 일이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창공의 이 구명이 엄청난 오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구의 대기 중에 축적된 아주 적은 양의 인위적인 화학물질 때문에 생겼다는 점이다. 북미보다 더 큰 크기의 오존층을 파괴한 CFCs와 다른 합성물질에 함유된 염소의 총량은 피피앰도 아닌 피피비로 측정해야 할 정도로 적은 양이다.오존 구멍과 관련된 이야기는 세계의 본질에 대한 위험천만한 잘못된 가정들로 이어진 역사다. 이것은 그동안 발명된 화학물질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가장 위험한 것으로 밝혀지는 과정을 그리고 잇다. 과학자들은 처음에 위험 가능성을 조사햇지만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햇다. 나중에 오존층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난 뒤 선도적인 과학자들은 이 위험이 과대평가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몇 달 뒤 남극 상공의 엄청난 구멍이 발견되었다. 과학자들은 오존 구멍을 예측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멍이 나타났을 때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자는 오존 구멍의 교훈을 이렇게 정리한다.:“복잡계라는 난폭할 만큼 비선형적인 세상에서 아주 사소한 위협이 막대한 규모의 파괴를 빠르게 몰고왔다.” 그러나 이처럼 복잡하고 비선형적인 시스템의 반응 방식에 대해 과학은 무지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우리는 이제 막 지구를 이해하기 시작햇다.” 그러나 근대 문명은 지구 시스템을 정상적인 작동 범위 밖으로 밀고 가면서 예측불가능서이 지배하는 치명적인 게임으로 우리를 몰아넣는다. 그러므로 전 행성 차원의 시대에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사고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하며 미래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더 나쁜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속에서는 인간의 생존마저 보장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가 재앙인 이유는 단지 몇도 기온이 올라가기 때문만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지구온난화가 예측불가능한 난폭한 비선형성을 부활시켰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은혜로운 기후의 시기에 출현했다. 이 은혜로운 긴 여름은 지난 1 1700년 가운데 유례없는 안정기였다. 그러나 인류가 이 행성 전체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이제 이 온후한 시기는 끝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을 것이란 가정 아래 지구온난화를 생각한다. 몇도 올라가더라도 그 과정이 선형적인 점진적인 과정이라 생각하며 관리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들어 지구온난화는 가난한 자의 문제란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과연그럴까? “정책전문가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출 것이라 얘기한다.” 그러나 저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 본다. 그런 생각이 맞으려면 온난화된 세계는 지금까지와 비슷한 논리로 움직일 것이라는, 그렇기에 지금도 통하는 수단이 그때도 통할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즉 기후변화도 관리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연은 복잡계라는 것이다. 복잡계는 선형적으로, 점진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특히 기후는 난폭할 정도로 비선형적으로 변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과학사학자 스펜서 위어트의 회상에 따르면 갑작스런 기수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40여년 동안 사고의 영역 밖으로 내딛은 일련의 위대한 발걸음 때문이었다. 1950년대에 가장 급진적인 제안은 주요한 기후 변동이 수만년이 아이나 몇천년 안에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1960년에 이르러 브뢰커와 그의 동료들은 거대한 전 지구적 기후 변동이 ‘1000년안에있었다는 증거를 발표했다. 그 뒤 과학자들은 빙핵을 연구하면서 기후시스템이 누적되어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불쑥 뒤바뀐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급격한기후변화는 이제 아무래도 한 세기거나 아니면 ‘10정도의 짧은 기간을 의미한다.” 빙핵의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과학자들은 이동, 점프, 비틀거림, 지체, 깜박임, 흔들림, 극적인 기후 반전 같은 이야기들이 숨막힐듯한 속도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지구가 마치 위엄있고 우아한 숙녀처럼 왈츠를 추듯 빙하기로 접어들었다 빠져나온다는 오래된 관점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했다. 빙핵에서 얻은 가장 놀라운 통찰은 급격한 기후변화가 정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길고도 변덕스런 기후의 역사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는 정말 보기 드물게 온난하고 안정된 기후의 축복을 받은 약 12000년에 속한다.”

 

지구온난화의 진정한 의미는 만년 정도는 더 갈 수 있었던 그 예외를 다시 변덕스러운 정상으로 되돌렸다는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 지구적 변화의 권위자인 윌 스테펜은 지구의 평균온도가 섭씨 5도 범위에서 요동을 치면 지구시스템은 새로운 상태에 접어들고 근대문명은 붕괴할 것이라고 믿는다. 빙핵은 우리가 이 행성의 기초적인 과정에 끼어들면서 자초한 위험을 지구온난화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용어법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가 대기를 정상 작동범위 밖으로 밀어내면서 겪는 가장 큰 위험은 열이 아니라 기후변화다. 기온이 점점 올라다는 것도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지만 기후변화는 단속적인 도약이라는 상태에 정상적으로 도달했다. 복잡한 현대 사회를 가능케 했던 이 길고도 고요한 여름이 끝나가면서 우리는 행성수준의 위기 상황에 맞닥뜨린 상태다. 우리는 지속적인 변화와 놀라움, 불안정 같은 것들로 가득한 시대에 성난 야수가 반격하고 잠자는 괴물이 다시 눈뜰 수도 있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가능할지 현재로선 의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이미 재앙을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첫째 지금 당장 나타나는 온난화현상은 50년전에 쌓인 탄소때문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엔 시차가 있기에 지금 당장 탄소를 줄이더라도 그 효과는 먼 미래에 나타난다. 둘째 이미 기후격변의 스위치는 켜졌기에 탄소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더라도 정상으로 돌아간 괴물을 다시 잠재우기엔 늦었다. “우리는 이미 문턱을 넘었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생존 가능성 전략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미래를 살아갈 이들을 위해 곤란함을 없애버리고 안정을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한다. 한 가지는 지구의 물질대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인간의 활동을 줄이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다른 하나는 이런 붕괴로 발생할 수 있는 재난에 가까운 결과들에 취약해지는 인간 시스템 상의 경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표들은 행성의 세기에 살아남기 위한 기초라 할 수있다.”

 

기후 시스템이 복잡계인 것처럼 인간의 문명도 복잡계이다. “문명은 승리라기보다는 거래였다. 농업 덕분에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전문화된 삶의 형태로 가는 문이 열렸다. 농업을 통해 발생한 잉여농산물 덕분에 일부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는 노동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생필품을 구하느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어진 사람들은 성직자나 장인, 관료, 징세관이 되거나 아니면 침략자로부터 땅과 곡식을 지키는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회들이 점점 정교해지고 복잡성이 늘어났다고 해서 변덕스러운 기후를 감당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복잡한 사회는 레게 가수 지미 클리프가 경고한 종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바로 힘들게 온 것일수록 더 힘들게 망한다. 윌리엄 맥닐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이 늘어날수록 취약성 또한 고조되는 이러한 유형을 문명의 이면이라 설명한다. 이는 집단적인 노력과 도구 사용을 통해 지표면의 형태와 자연의 균형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대가. 문명은 진보라는 고전적인 설명은 최근 1000년동안 인간이 갈지자를 그리며 불규칙한 경로를 지나왔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맥닐은 우리의 기술과 지식이 늘어날수록 점점 더 큰 규모로 승리와 재난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묘하고도 역동적인 균형을 인류 역사의 특징으로 꼽는다. (기후격변과 문명의 취약성의 인과관계를 설명한) 페이건과 마찬가지로 그도 이와 같은 사회 복잡성의 증가 때문에 우리의 삶이 더 안전해졌다는 생각을 의문시한다. 테인터 또한 사회가 복잡성의 경로를 택하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해서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장기적으론 더 취약해질 수 밖에 없다고 믿는다.”

 

기후격변이 다가오는 이 떼 복잡성이란 기준에서 지금의 문명은 최고 수준에 올라있다. 과연 지금 수준의 복잡성에서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화를 보자. “오늘날 제조업자드은 세계 전역에 상품 생산 과정을 분산해놓앗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 지구적 자원 공급 및 생산조직은 예외적일 정도로 높은 안정성을 요구한다. 안정성보단 경제적 효율성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 전 지구적 시스템은 필수재의 여분을 남겨놓는 방식을 버리고 원재료와 필수요소들을 미리 갖고 있을 필요없이 필요할 때 공급하는 적기생산 공급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이런 식의 세계화는 특히나 요즘처럼 불안정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시대에 위험한 변화다. 세계화는 인류를 단일한 무리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인류의 생존을 보장해주었던 전략을 되돌리고 있다. 인류는 오랜 세월 여러 지역을 광범위하게 돌아다니며 생활하다 다양한 기술과 자원을 가지고 대체로 자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상태에서 세계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대규모 재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졌다. 인류는 대부분의 역사에서 수많은 배를 타고 폭풍 속을 항해앴다. 오늘날 세계화를 통해 우리 모두는 현대적이고 효율적이지만 앞에 놓인 위험에 취약한 타이태닉호의 승객이 되었다.”

 

생태학자들은 지나친 통합으로 시트템 전반이 내외에서 비롯된 혼란에 취약해지는 것을 과잉응집이라 부른다,. 생태학자이자 선도적인 행위이론가인 홀링에 따르면 이렇게 심하게 상호연결된 상태의 시스템은 어떤 사고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상태. 동시에 구적인 취약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이름ㅇ로우리 자신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인간계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험난한 기후변화의 시기에 우리는 조직된 인간의 삶에 필요한 기본 서비스와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자원을 모두 잃을 것이다. 여기에는 식품과 운송시스템 유지에서부터 물 공급원을 확보하고 죽은 자를 매장하는 일까지 수많은 것이 망라된다. 효율성보단 복원력을 우선시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래의 변화에 대응하는 사회적 역량인 적응가능성을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불안정한 지구에서 생존의 비밀은 무엇인가? 레빈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잉여와 다양성 기록 모듈식 구조다. 이 전략은 효율성을 쫓는 세계화의 추진력과는 완전히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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