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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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1953년에 태어났다. 우리 세대는 미국에 태어난 것에 특별히 감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 시절이 미국 정치와 경제사상 찾아보기 힘든 잃어버린 낙원이었던 듯하다.

무엇보다 전후 미국은 중산층의 사회였다. 소득이 대폭 늘어난 수천만 미국인들이 도시 빈민가와 농촌의 가난에서 벗어나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전에 없이 안락한 삶을 누렸고 대다수 미국인들은 물질적으로 상당히 비슷한 수준의 풍요를 누렸다. 경제적으로 균등햇던 미국은 정치적으로도 중도노선을 지켰다. 초당적 제휴가 정말로 의미있던 시절이었다.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미국이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미국은 빈부격차가 심하고 양당의 싸움으로 얼룩진 나라였다. 당시 우리는 미국이 성숙했기 때문에 두터운 ㅈ중산층이 뒷받침하는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정치적으로 평온한 상태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중산층 중심과 중도노선의 청치가 미국사회 진화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은 다시 이전처럼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양극화된 나라로 돌아갔다. 단지 돌아간 것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불평등은 1920년대만큼이나 크며 정치적 양극화도 이렇게 심했던 적이 없다.”

이책은 왜 미국이 과거로 회귀했는가, 란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경제학자답지 않게 정치라고 말한다. 전후 미국이 중산층 사회가 된 것도 그 중산층 사회가 와해된 것도 정치가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전후 미국의 중산층 사회는 “루즈밸트 행정부의 전시임금통제를 통해 몇 년이 채 안되는 기간 안에 만들어졌다.” 경제사에선 대공황에 빗대 이를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후 불평등의 확대는 “시기적으로 정치적 양극화가 먼저 이루어졌고 경제적 불평등은 그 뒤를 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시대를 만든 것은 모두 정치운동이엇다. 뉴딜이 그랬고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포함한) 운동이 그랫다. 두 운동의 공통점은 이전 시대에 반발한 소수파의 운동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주류가 되었고 시대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와 함께 백악관을 장악한 소수파가 바꾸려 했던 미국은 지금의 미국과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다. “부시 집권시기의 눈으로 바라본 뉴딜 이전 미국의 정치경제는 마치 할아버지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21세기 초의 미국처럼 뉴딜정책 이전의 미국에는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만연했다. 이름은 민주국가였으나 대다수 국민들을 대변하는 데 실패했다. 게다가 부유한 경제 엘리트들이 정계를 장악한 것도 지금과 같다. 뉴딜정책 이전의 시대는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치적 성향을 띠었다.” 저자는 그 시절을 장기 도금시대라 부른다. 19세기 후반을 말하는 도금시대처럼 뉴딜 이전 20세기의 미국도 “불평등과 부유한 엘리트 집단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지속이다.”

당연히 그런 과두정치에 반대가 없을 수 없었다. 19세기말 인민주의운동이나 20세기초 윌슨과 테디 루즈벨트의 진보주의운동의 목표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고 미국을 바꿀 수 없었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주류인) 보수주의자들은 불평등 타파를 위해 무엇인가 하라는 요구에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햇다. 즉 어떤 정책으로도 뚜렷한 변화를 느낄 정도로 국민소득을 노동자 가정으로 재분배할 수 없으며 설령 누군가 그렇게 하더라도 분명 경제를 망가뜨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황은 소수의 손을 들어주었다. 소수파에겐 언제나 위기가 기회가 된다. “우연히 시기적으로 잘 맞아 떨이진 덕분에 그들은 유권자들의 보편적 보수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다. 첫째 이유는 1929-33년의 대재난으로 부수 엘리트 집단과 그들의 이념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기회를 잡은 이전의 급진 소수파는 미국을 바꿔놓았다. “루즈벨트와 트루먼은 하증계급으로의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극적으로 성공시켜 미국을 이전보다 휠씬 평등한 사회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재편성 즉 대압착으로 미국경제는 망가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향후 세대가 누릴 경기호황의 기반을 마련했다.”

중산층 사회를 만든 것은 분명 정치였다. 루즈벨트는 부자들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 소득을 재분배했고 노조를 보호해 노동자의 힘을 키웠다. 소득재분배와 노조의 힘은 중산층 사회의 원인이엇다.

뉴딜과 전쟁의 승리는 급진 소수파의 이념에 불과했던 것에 정당성을 주었고 그들의 정책으로 득을 본 계층을 지지자로 끌어들엿다. 광범위한 뉴딜 연합의 힘은 뉴딜 이전의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보수주의자들을 체념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 미국은 뉴딜 이전으로 돌아갔다. “지금 우리는 두 번째 도금시대를 살고 있다. 전후 시대의 중산층 사회가 급격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저자가 이책에서 묻는 가장 큰 질문이다. 저자의 답은 뉴딜연합의 해체이다.

민주당의 뉴딜 연합은 “남부와 노조, 도시의 정치집단, 그리고 좌파지식인의 조합”이었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남부가 이탈해 공화당의 거수기가 되면서 뉴딜연합은 무너졌고 공화당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남부가 뉴딜연합을 버린 이유는 민주당이 주도한 민권운동 특히 인종차별철폐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링컨의 당인 공화당은 남부에서 당연히 인기가 없었고 남부연합의 당이었던 민주당을 지지했다. 거기다 가난한 남부는 뉴딜정책의 가장 수혜자로서 당연히 뉴딜연합의 핵심이 되었다. 그러나 전후 경제적 불평등이 줄어들면서 “부의 재분배를 위한 정책은 더 이상 큰 이익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민권문제를 특히 인종차별을 겨냥했을 때 남부는 뉴딜연합에서 이탈한다.

물론 남부만 민권운동에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1967년 닉슨은 오늘날 유명해진 논설 “미국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를 발표한다. 이 글은 미국의 모든 혼란을 요약하고 진보주의자들의 관용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1960년대 한창 떠돌던 말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는 과거 강도를 만난 경험이 있는 진보주의자였다. 미국인들이 법과 질서가 무너진다고 생각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민권운동이 일어났을 때 범죄율은 높아졌고 도시는 인종폭동으로 불타올랐다. “백인 유권자들에게 범죄와 폭동은 미국사회의 붕괴를 잘 드러내는 또 다른 지표와 합해졌다. 그 지표는 늘어나는 복지 의존도였다.”

공화당 소수파인 보수주의 진영에 속했던 레이건은 복지여왕이란 과장을 섞어 “복지정책에 신물난 백인 유권자들”을 대변하면서 1966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복지수혜자는 “1966년 10년전의 2배나 되엇고 1970년대 초 또다시 2배 증가햇다.”

미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히피로 대변되는 젊은이들의 반항도 문제엿다. “대항문화운동은 1964년경 일어났다. 바로 초기 베이붐세대가 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한 해였다. 청년이 된 베이비 붐 세대들은 그 어마어마한 숫자만으로도 상투적인 구세대의 문화를 깨뜨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술적인 발전도 있었다. 피임약 발명으로 이전 어느 때보다도 성적인 시도가 활발해졌다. 젊은이들의 반항으로 많은 미국인, 특히 레이건은 두려워하고 분노햇다.

미국 중산층에게 1960년대으 급변하는 사회규범은 큰 불안감을 조성햇다. 한편 국민들은 강도를 당할까 두려워했다. 실제로 위험해진 도시에서 강도사건이 많아졌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아이들이 이런 사회 기준에 동조하고 자극받아 낙오자가 될까 두려워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느는 추세였다.”

저자는 보수주의자들이 주류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불안감을 이용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원래 보수주의자들이 원한 것은 뉴딜의 무효화, 즉 장기 도금시대로의 회귀엿다. 범죄, 인종문제, 사회규범은 그들의 핵심의제가 아니엇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권력을 잡아야 했고 문화적 반발은 좋은 기회였다. “어떻게 문화적 반발을 이용해야 할지 깨우친 공화당은 이후 반발 대상을 히피와 범죄에서 낙태와 동성간의 결혼으로 바꾸고 보수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원래 보수주의는 공화당에서도 급진소수파에 불과햇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공화당을 장악한 것일까? 돈의 위력이었다.

“새로운 보수주의자라고 알려진 이들은 젊고 무모하며 언론을 잘 다루었다. 그들은 스스로 기존의 틀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다. 보수주의운동은 백인들의 반발과 공산주의에 대한 과대망상이라는 사람드르이 정서에 호소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대중적인 기반을 다졌다. 기반을 다진 보수주의 운동은 1950년대에는 ‘새로운 보수주의’라는 보잘 것없는 정치적 주변세력에서 정치계가 신경써야 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대중적 기반의 성장은 표를 모으는데 보탬이 되지 않았지만 돈줄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다른 종류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큰 도움을 받는다. 이는 바로 보수주의 운동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경제계엿다.”

복지국가의 부담은 실절적으로 거의 기업의 어깨에 떨어졌다. 유럽이나 일본에선 의료보험, 퇴직연금 등의 복지제도가 국가의 책임이었지만 미국에선 기업이 책임져야 했다. 지금과 달리 ‘외국기업과 경쟁할 필요가 없는 기업들은 추가로 발생하는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백화점 같은 중소기업 경영주 처지에서는 노조의 요구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기업들은 외국기업과 경쟁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작아서 노조가 신경 쓰지 않는 초소형 ㄱ5ㅣ업, 부부가 경영하는 영세상점 등과 경쟁해야 했다. 중소기업들은 노조의 커져만 가는 요구에 분개했고 심지어 위협적이라고 느끼기도 했다.

반노조주의자들은 경제계에서 첫 번째로 보수주의 운동의 경고한 지지기반이 되어주엇다. 1960년대부터 노조를 경멸하던 경영주들은 재정적으로 보수주의 운동을 확실하게 후원해으며 그들의 이런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1970~80년대에는 경제계가 노조와 충돌하고 심지어 노조가 무너질 정도로 보수진영이 우세해져 임금 불균형과 정당 간 힘의 균형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보수주의 운동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잡은 것은 이 돈의 위력이었다. 기업의 후원은 정치에만 그치지 않고 지식인들에게도 뿌려졌다. “1970년대에는 보수주의 운동의 지식계층은 진보주의자들이 굼도 못 꿀 정도로 확고한 이념과 재정적 기반을 마련했다. 보수주의 지지기반에는 언론사들도 있었다.” 정치, 언론, 학계, 싱크탱크를 장악한 보수주의 운동은 “어떤 면에서 1920년대 말 결과적으로 뉴딜정책을 이끈 운동과 비슷한 입장에 처했다. 이념이 만들어졌고 조직도 갖추어졌고 지식인들의 기반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권력을 얻기 위해 보수주의 위기상황이 필요했다.” 그 위기는 베트남과 이란의 위기였고 70년대 세계경제를 흔들었던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1970년대의 어두운 분위기 덕분에 보수주의 운동은 진보주의 정책이 모든 문제의 주범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강력해진 보수주의 운동은 곧 뉴딜정책의 성과를 뒤엎을 기회를 얻는다.” 이후 우리가 아는 지금의 미국이 등장했다.

"레이건은 보수주의 운동진영에서 나온 최초의 대통령이다. 레이건 이후 공화당은 더 극단주의로 흘렀다." 저자는 텍사스 공화당 지부의 강령이 보수주의 운동의 진실한 성향을 잘 나타내준다고 말한다: "주류, 담배, 화기 단속국, 의무감직, 환경보호국, 에너지부, 주택도시개발부, 보건복지부, 교육부, 상무부, 노동부는 기본적으로 폐지하고 그 외의 연방정부기관도 폐지를 고려한다. 또한 사회보장제도를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제를 폐지한다." 여기에 부유층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상속제 폐지도 있다. "소득에서 상위 10%에 속하는 부유층이 상속세의 90%를 낸다."

공화당이 이 정도로 극단화 된 이유는 무엇인가? "충성스러운 정치인에게 상을 주고 이의를 제기하는 정치인에게 벌을 주는 소수집단이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조직들이 존재한다. 이런 조직들은 순종적인 정치인이 선거에 이길 수 있도록 충분한 자금을 대고 선거에서 질 경우 피난처를 제공하며 은퇴 후에도 벌이가 괜찮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준다. 또한 이런 조직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는 정치인들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내주는 반면 반대하는 정치인들을 공격했으며 보수주의 지식인과 운동가 집단을 든든히 뒷받침해주었다."

여기에 잡지와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타임스, 폭스 뉴스와 같은 매체도 장악했다. "마지막으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로비스트와 정치인들 간의 유착관계가 있다. 보수주의 싱크탱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기업로비 그룹은 보수주의 운동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위장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공화당 보수주의자들은 로비스트들까지 장악했고 "로비활동을 장악하게 되면서 공화당의 노선을 따르는 당원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 그것도 아주 보수가 좋은 자리가 많아졌기 때문에 공화당 안에서의 충성도는 더 높아졌다.

보수주의 운동과 연계된 조직들이 다양해짐으로써 공화당원들은 중도보다는 강성을 띠는 것이 훨씬 유리해졌다. 단지 선거에서 기부금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정치인 개개인의 재정이 달린 문제였다."

그 결과 "의회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공화당 중도파 의원들은 거의 다 레이건 대통령 이전에 처음으로 당선되었거나 아무리 늦어도 공화당 내에서 깅리치를 중심으로 한 극우파의 승리를 확정한 1994년 선거 이전에 당선된 의원들이다."

그러면 왜 보수연합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가? 이들의 정책은 명백하게 소수만을 위한 것이고 대다수는 피해를 본다. 더군다나 "여론조사에 따르면 공화당은 극우화되어 가고 있지만 국민들은 약간 좌경화되었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데도 공화당은 계속 선거에서 승리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남부 백인들이 공화당을 뽑기 때문이라 말한다.

"남부지역일수록 흑인이 더 많을 수록 보수적이다. 인종이 이런 차이를 가져왔다는 결론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말 알수 없는 것은 남부의 연방의원들이 공화당으로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다. 공화당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 것은 민주당이 남부 이외의 지역데서 의석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남부에서 늘린 의원숫자는 민주당이 공화당에 넘긴 의회의석의 순손실분보다 더 컸다. 부시는 남부 백인들의 표가 없었다면 투표용지를 이용한 부정선거로도 백악관 입성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유권자들은 극우화된 공화당을 외면했고 점차 민주당으로 표심이 옮겨갔다. 그렇지만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리고 결국 의회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공화당이 남부에서 이기기 위해 인종문제를 교묘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것의 성공비결의 전부다."

물론 보수연합에 남부만 있을리는 없다. 보수주의 운동이 가치문제를 갖고 놀 수 있게 된 이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도 그 연합에 들어갔고 공화당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그러나 그들의 역할은 박빙의 승부일 때 캐스팅 보트를 휘두를 수 있다는 것 이상은 아니며 결정적인 것은 남부의 표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2006년 중간선거(그리고 이책이 나온 후 2008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을 보수주의의 몰락이 멀지 않았다는 징조라 말한다.

"인구통계 변화를 분선한 결과 민주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추세가 변하고 있다. 오랫동안 보수주의 운동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백인들의 반발심을 이용한 정치는 두가지 이유로 효력이 떨어지고 있다. 미국으ㅢ 백인들이 줄어들고 있고 백인들 중에서도 인종차별주의작 많이 줄어들고 있다.

여기서 백인이란 비라틴계 백인을 말한다. 1980년 6.4%에서 2000년 12.55로 급증한 라틴계 인구는 미국의 인종구성을 변화시킨 가장 큰 원인이다. 보수주의 운동은 흑인을 싫어하는 백인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성공할 수있었다. 그러나 이민자들에게도 적대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흑인에게 적대적이기는 어렵다. 그리고 급증하는 이민자들이 점점 정치세력화하고 있기 때문에 과거 보수주의 운동의 일등공신이었던 인종문제는 점점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미국에서 보수주의 운동이 확산될 수 잇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과거 노예제도로 인해 인종 간의 긴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이 해소되거나 정확히 말해 공화당이 이를 이용하려 할 때 더 큰 정치적 희생을 치르게 한다면 미국은 복지정책과 소득불균형 완화 정책이 좀더 강한 다른 서방국가들과 점도 비슷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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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m Smith in Beijing : Lineages of the Twenty-First Century (Paperback)
조반니 아리기 지음 / Verso Books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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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90년대에 쓰여진 저자의 전작, ‘장기20세기’에 대한 속편이랄 수 있다. 10여년 사이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전작이 쓰여졌을 때 미국은 무너져가는 제국에서 불사조처럼 부활한 제국이었다. 그러나 이책이 쓰여진 시점에선 다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제국이 분명해졌다.

전작은 제목은 패권국으로서 미국이 등장한 시대를 말한다. 스페인 제국, 네델란드, 영국이 패권국이 되었던 시대를 장기16세기, 장기17세기, 장기19세기라 부르는 것처럼 저자는 미국의 시대를 장기20세기라 부른 것이다.

다른 패권국들의 시대에 ‘장기’란 말이 붙은 이유는 그 나라들이 패권국이 된 시기는 그 시기이나 패권이 형성되어 간 것은 그보다 오래기 때문이다. 패권국은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지만 그 과정은 서로 겹친다. 영국이 패권을 쥐게 되는 과정은 네델란드의 정점에서부터 만들어졌고 네델란드의 패권이 최종적으로 무너지기 전 이미 패권국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1890년대 belle epoque라 불린 에드워드 시대는 대영제국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 정점은 회광반조와 같은 것으로 이전에 시작되었던 헤게모니의 약화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헤게모니의 붕괴는 예정된 것이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형성되어간 시절은 바로 대영제국의 정점에서부터였다. 이미 준비된 예비 패권국으로서 1차대전으로 영국의 헤게모니가 붕괴되자 바로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의 헤게모니를 설명하려면 20세기에 시선을 한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기’란 말이 붙는다.

그 미국의 장기20세기가 어떻게 끝나가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 그 책에서 저자의 목표엿다. 헤게모니는 태어나고 죽는다. 미국 이전 영국의 제국이 그렇게 사라졌고 그 이전 네델란드가 그러했고 스페인 제국이 그러했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가 사라지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국 헤게모니의 죽음은 15세기 지중해에서 시작된 유럽 세계-체제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유럽 세계-체제의 역사는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대서양에서 전 세계로 헤게모니의 범위가 확대된 과정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그 과정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 이후 더 이상 유럽 문명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나고 죽는 사이클을 설명한다는 것은 15세기 지중해에서 시작된 세계-체제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장기20세기’는 13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역사부터 설명을 시작해 그 세계체제가 본 시간과 공간을 그려나간다. ‘장기20세기’는 유럽문명의 황혼에 바치는 송가라 할 수 있다.

그 책이 출간된 1994년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 그책에서 저자는 미국이 Belle Epoque에 들어선 상태라고 진단했고 이책이 출간된 2007년까지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책이 나온 해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의 벨르 에포크는 끝났으며 패권국으로서 미국도 사라졌다. 그러면 왜 이책이 필요한가?

이책에서 저자는 ‘장기20세기’가 나온 이후 10여년 동안 미국의 패권이 어떻게 무너져가는가를 설명한다. 저자는 레이건 집권기부터 시작된 벨르 에포크 시기 미국의 세계지배를 domination without hegemony라 규정한다. 아들 부시의 군사주의를 보면 저자의 그런 규정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지배가 그렇듯이 헤게모니는 동의 위에 행사된다. 미국이 그리고 영국이 패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세기 때문이었지만 그 힘으로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세계의 모든 바다에서 제해권을 행사하면서 안전이란 공공재를 제공했다. 물론 영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지만 자기 이익과 공익이 꼭 충돌할 이유는 없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의 패배는 미국의 그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고 미국의 헤게모니는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햇다.

그러나 미국만 그런 위기를 겪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장기20세기’에서 이전의 패권국들이 어떻게 패권을 잃었는가를 다루었고 그 메커니즘을 설명햇다.

그렇다면 왜 이책이 필요한가? 이론적인 문제이다. 이책이 헌정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제기한 문제때문이다.

저자의 이론적 입장은 세계체제론이다. 세계체제론의 선언서라 할 수 있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 추천사에서 (세계체제론의 실질적인 아버지인) 브로델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들은 늘 유럽이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구축해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잇었다.” 세계체제론은 지중해에서 시작된 세계체제가 500년동안 확장되어 전세계로 확대되었다 말한다. 그러나 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지중해에서 시작된 유럽의 세계-경제는 5000년전부터 있어왔던 세계경제의 일부였을 뿐이며 지난 500년은 유럽 세계체제가 그 세계경제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규명하려는 사실의 하나는 유럽인이 무언가를 행하고 발언하기 훨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세계경제라는 것이 진작부터 있엇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파생되는 두가지 논점이 있다. 하나는 아시아, 특히 중국과 인도, 나아가 동남아와 서아시아가 1800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보다 더 활동적이엇고 또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컸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역사가들은 늘 유럽이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구축해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잇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뿐더러 반역사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유럽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구축하지 않았다. 유럽은 신대륙의 화폐로 아시아 열차에 오르는 승차권을 샀을 뿐”이고 그 다음엔 열차 전체를 사들였을 뿐이라고 프랑크는 말한다. (자세한 것은 리오리엔트를 직접보거나 이전에 쓴 리뷰의 요약을 보기 바란다)

이책은 프랑크의 의문에 대한 답이다. 프랑크가 세계체제론에 대해 지적하듯 저자의 전작 역시 유럽 세계체제보다 더 큰 세계경제는 고사하고 그 세계경제의 중심이엇던 아시아는 시야에 두지 않았다. 저자가 전작에서 13세기부터 시작하는 세계체제의 역사는 단지 세계체제의 자기확장의 역사일 뿐이며 세계체제론의 기본입장을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이책에서 저자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제기한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프랑크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시점을 19세기로 본다. 그 이유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산업혁명 때문이라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생산성 혁명이었고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성이 폭증한 유럽은 중국을 정점으로 하는 아시아를 압도하는 경쟁력을 갖게 되엇다는 것이다. 리오리엔트는 산업혁명이 왜 유럽에서 일어나고 중국에선 일어나지 않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는 프랑크가 세계경제란 개념을 5000년 역사를 가진 지구 범위의 개념으로 재정의하는 것을받아들인다. 그리고 유럽 세계-경제는 그 세계경제의 하위체제일 뿐이었다는 것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세계경제의 중심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시점이 19세기라는 것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이동의 이유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

“The subordinate incorporation of East Asia within European system, and the eclipse of the region in world production were not due primarily to the competitive edge of Western vis-à-vis East Asian, especially Chinese, economic enterprise.”

아편전쟁으로 영국은 중국의 시장을 마음대로 누빌 수 있엇다. 그러나 포함으로 열린 시장은 전쟁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영국상인들은 여전히 중국인들에게 팔 것이 없었다. 예를 들어 당시 영국의 주력상품인 면직물은 중국제의 가격경쟁력을 이길 수 없었다. “Western products and businesses did triumph in a few industries. But outside of railways and mines, the China market generally spelled frustration for foreign merchants.”

프랑크는 유럽의 패권은 산업혁명으로 얻게 된 경쟁력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산업혁명이유럽에 패권을 가져다 주었다는 주장엔 동의한다. 그러나 패권은 산업혁명으로 가능해진 군사력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편전쟁 자체가 패권을 가져다 준 것이지 아편전쟁으로 시장을 열었기 때문이 아니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나폴레옹 전쟁 때문이엇다. 1793년부터 1815년까지 지속된 이 전쟁으로 영국의 자본재산업이 탄생한다. “반실업상태의 빈민은 결코 대포나 그 밖의 값비싼 공산품을 사지 않는다. 그러나 수만명의 빈민을 육해군에 편성화고 군장비를 나눠준 결과, 유효수요가 개인소비재로부터” 정부지출로 넘어갔다. “대포시장이 확보되어 잇지 않았다면 낙후된 웨일스나 스코틀랜드에” 신식 코크스 고로를 설치할 사업가는 없다. “그들의 초기 판로는 육해군의 수요였다. 영국의 제철업이 1816~1820년 전후의 불황에 빠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전시수요 덕분에 제철업 뿐 아니라 무기류를 만드는 정밀기계 가공업, 중장비 산업 등이 발전했다. “그러나 정부의 전시지출은 또한 영국의 제철업자들에게 새로운 대형 용광로에서 훨ㅆ니 저렴하게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제품의 새로운 수요처를 찾게 했고 장래의 산업발전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도 햇다.” 전시에 태어난 자본재산업 덕분에 “증기기관의 개량이 가능했고” 대량의 전시수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규모의 경제에 도달한 자본재산업은 고품질저비용의 “좋은 조건으로 철도나 철선과 같은 결정적인 기술혁신이 일찌감치 실현될 수 있도록 했다.” (윌리엄 맥닐)

아편전쟁의 승리는 산업혁명의 승리였다. “1841년과 1842년의 아편전쟁에서 철갑을 두른 네메시스호의 기동력과 화력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괴물처럼 청군을 손쉽게 소탕햇다.” 산업혁명으로 가능해진 “증기기관과 기계제 공구들은 유럽의 군사적 우위를 결정했다. 전장식 소총의 개량(뇌관, 선조 등)만 해도 무시무시한 것이엇다. 사격속도가 한결 빠른 후장식 소통은 더욱 큰 진보를 의미햇다. 그리고 개틀링 기관총과 맥심 기관총, 경대포는 구식 무기에 의존하는 원주민들의 저항력을 완전히 일소해버린 새로운 ‘화력혁명’을 마무리지었다. 게다가 증기추진식 군함의 등장은 이미 공해상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던 유럽의 해군력이 니제르강, 인더스강, 양쯔강 같은 주요 수로를 통해 내륙까지 뻗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화력의 격차는 유럽이 비유럽에 대해 50배에서 100나 되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폴 케네디)

저자는 세계경제의 중심은 단순히 경제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세계경제는 세계체제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며 유럽으로 중심이 이동한 것은 헤게모니의 장악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쪽으로 이동했던 헤게모니가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 역시 (장ㄱ20세기에서 다루어진) 헤게모니의 사이클로 볼 때 이해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이 왜 유럽에서 일어났는가란 프랑크의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저자는 두세계-경제의 작동원리가 달랐기 때문이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차이라고 말한다.

“Trade and markets were more developed in East Asia in general, and in China particular, than in Europe, through the 18th century. The European and Chinese trajectories shared important features that were part of the Smithian dynamics of market-based growth supported by labor intensification in the advanced regions of China and Europe in the centuries preced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중국과 유럽이 공유한 the Smithian dynamics of market-based growth란 애덤 스미스가 말한 사회적 노동분업으로 생산성이 향상되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경제가 성장하는 것을 말한다. 스미스적 동학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중개되는 노동분업에 의한 것이므로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은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따라 소득이 늘고 유효수요가 늘면 시장 자체가 커진다. 시장이 커지면 노동분업과 경제성장의 사이클이 확대재생산된다.

“Over time, however, this virtuous circle comes up against the limits imposed on the extent of the market by spatial scale and institutional setting of the process. When these limits are reached, the process enters a high-level equilibrium trap.”

중국은 고차균형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유럽은 산업혁명으로 고차균형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엇다. 그 이유에 대한 프랑크의 논의를 요약하면 “In China, economic expansion created the labor surplus and capital shortage that underlie Smithian high-level equilibrium traps. In Europe, in contrast, economic expansion created labor shortage and s capital surplus. It was this opposite outcome that, according to Frank, after 1750 led to the Industrial Revolution.” (더 자세한 것은 리오리엔트를 직접 보거나 전에 그 책을 다룬 리뷰를 참고할 것)

다시 말해 중국과 영국의 운명을 가른 것 즉 Great Divergnence는 두 경제에서 노동과 자본의 상대가격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선 자본에 비해 노동이 쌌고 영국에선 자본에 비해 노동이 비쌌다. 그러므로 영국에선 노동을 절약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고 자본집약적 발전경로, 즉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영국이 산업혁명을 택했다면 중국은 요소시장의 가격에 따라 산업혁명과는 다른 발전경로, Industrious Revolution(스기하라 카오루)이 일어났다. 토지(와 자원)대 인구의 비가 악화되면서 자원제약에 반응하여 16세기부터 18세기 동아시아에선 노동집약적 기술과 노동흡수 제도가 발전한다.

Industrious Revolution “is a term first coined by the Japanese demographic historian Akira Hayami (速水融),[2] and accepted by other historians to help further explain the advent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Much of this theory deals with the spending behaviours of families in the period. It also deals with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goods.” (http://en.wikipedia.org/wiki/Industrious_Revolution)

그러나 스기하라는 Industrious Revolution을 산업혁명의 전단계가 아닌 그 자체의 논리를 가진 발전경로로 재해석한다. “as a market-based development that had no inherent developmental path opened up by Britain and carried to its ultimate destination by the United States. Against the traditional view that small-scale production lacks internal forces for economic improvement, Sugihara underscores important advantages of this institutional framework in comparison with the class-based, large-scale production that was becoming dominant in England.”

Industrious Revolution의 구체적인 모습은 가족단위(또는 마을단위)의 생산이다. 자원과 자본의 제약을 노동집약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자원과 자본을 대신하는 노동이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It mobilized human rather than non-humana resources”

영국의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Industrious Revolution에선 “an ability to perform multiple tasks well, rather than specialization in a particular task, was preferred, and a will to cooperate with other members of the family rather than the furthering of individual talent was encouraged. Above all, it was important for every member of the family to try to fit into the work pattern of the farm, respond flexibly to extra or emerengency needs, sympathize with the problems relating to the management of production and anticipate and prevent potential problems.”

사람으로 자본을 대신하는 발전경로는 유럽의 충격 이후에도 동아시아의 특징이었다고 스기하라는 말한다. 노동의 유연성이 강조되는 토요타 생산 시스템은 그 좋은 예이다. 토요타 생산 시스템이 나오게 된 배경 역시 자본보다 노동이 저렴한 환경이엇다. 자본재를 수입할 돈도 없고 수요도 크지 않았던 전후 일본에서 규모의 경제를 전제하는 자본집약적인 대량생산시스템은 적합하지 않았다. 대안은 노동이 자본을 대신하는 것이었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토요타 생산 시스템이다. (자세한 것은 다이이치 오노의 ‘Toyota Production System’을 보라)

중국의 산업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낮은 임금은 자본절약적 혁신을 가능하게 했다. 높은 생산성을 가진 미국공장들은 값비싼 자동화 시스템을 사용하지만 중국의 공장들은 이 과정을 뒤집어 생산과정에서 자본을 빼내고 노동이 더 큰 역할 을 하도록 재투입했다. 전형적으로 총 필요 자본의 1/3 정도가 줄어든다. 더 낮은 임금과 더 적은 자본의 결합은 대체로 ㄴ미국 공장 수중 이상의 자본수익을 올려준다.” (데이비드 하비)

유럽의 충격 이후 동아시아는 산업혁명을 받아들엿다. 그러나 자본과 자원은 부족하고 노동은 풍부한 동아시아의 발전경로는 Industrious Revolution과 산업혁명을 결합한 것이엇다. 스기하라는 “call this hybrid development path labor-intensive industrialization, because it absorbed and utilized labor more fully and depended less on the replacement of labor by machinery and capital that the Western path.”

그러므로 스기하라는 동아시아 르네상스는 서구의 자본집약적이고 자원낭비적인 경로가 아닌 서구의 경로와 동아시아의 노동집약적이고 자원절약적인 경로의 혼합에 의한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1950 이후 서구의 경로는 한계에 부딪혔고 서구의 방식을 배운 동아시아의 경로가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발전경로의 차이가 산업혁명 이후 서구의 부상을 낳앗으며 그 경로가 한계에 부딪힌 결과 서구의 몰락과 동아시아 르네상스의 이유라 말한다.

저자는 Industrious Revolution을 스미스적 성장, non-capitalist market-based development라 말한다(이책 제목의 이유이다) 그에 비해 산업혁명은 슘페터적 또는 맑스적 성장으로 market-based capitalist development이라 말한다.

저자가 Industrious Revolution을 스미스적 성장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경로가 시장을 통한 사회적 노동분업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에게 시장은 사회적 노동분업 자체엿다. 스미스는 중국을 ‘the natural progress of opulence’라 불렀다. 왜냐하면 중국에선 “the greater part of capital is, first, directed to agriculture, afterwards to manufactures, and last of all to foreign commerce.” 스미스가 중국의 발전경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본 이유는 그것이 부가 국가 내에서 순환되어 국가 전체가 자연스럽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스미스는 네델란드를 unnatural and retrograde라 부른다. 자본의 투입이 중국과 역순이기 때문이다. 먼저 해외무역에 투자되고 그 다음 제조업, 마지막으로 농업에 투자된다.

“Capitals employed in agriculture and retail trade have the greatest positive impact because they must reside within the country, being confined almost to a precise spot, to the farm, and to the shop of the retailer. Capital employed in the whole trade, in contrast, seems to have no fixed or necessary residence anywhere, but may wonder about from place to place, according as it can either buy cheap or sell dear.”

자본이 국내에 투자된다면 그 나라 사람들의 고용과 소득을 늘리기 때문에 국익에 대한 자본의 효과는 최대가 된다고 스미스는 말한다.

그러나 스미스가 natural이라 부른 경로는 unnatural에 압도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고차원평형의 문제이다.

시장, 즉 사회적 분업은 경제성장의 원천이다. 그러나 분업 자체로는 애덤 스미스가 stationary state 또는 고차원평형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 분업 자체는 사회의 프레임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프레임을 건드려 평형서 벗어나기 위해선 평형의 원인인 자본-노동-자원의 비율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스미스는 국가가 제도와 법을 바꿔 그 비율에 영향을 주는 방법으로 평형에서 벗어날 수 잇다고 제안했다.

애덤 스미스 시절의 동아시아와 유럽의 핵심지역은 모두 고차원평형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이후 두 지역의 reversal of fortune을 부른 것은 산업혁명이었고 산업혁명은 고차원평형을 깨는 것이엇다. 저자는 산업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유럽의 발전경로의 ‘unnatural’한 성격 때문이엇다고 말한다: “the key specificity of the European path, its extroversion, its embedding in the global market, and the ‘retrograde’ direction of its progression from foreign trade, to industry, to agriculture.”

“Smith’s ‘unnatural’ path differs from the ‘natural’, not because it has a larger number of capitalists(외향성, 해외무역, 역진성 등은 자본가들때문이다) but because capitalists have greater power to impose their class interest at the expense of the national interest.”

브로델의 말을 들어보자. “Capitalism only triumphs when it becomes identified with the state, when it is the state. In its first great phase, that of the Italian city-states of Venice, Genoa and Florence, power lay in the hands of the moneyed elite. In 17the century Holland the aristocracy of the Regents governed for the benefit and even according to the directives of the businessmen, merchants and money-lenders. Likewise, in England the Glorious Revolution of 1688 marked the accession fo business similar to that in Holland.”

저자가 유럽의 발전경로를 market-based capitalist development라 부르는 이유이다. 자본과 권력의 결합이 있을 때만 자본주의란 말을 쓸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평형의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유럽이 빠져나올 수 잇었던 것은 이 자본주의의 동학 때문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market-based capitalist development를 슘페터적(사회의 프레임에 창조적 파괴를 가할 수 있다는 의미로)이라 부르는 이유다.

권력과 자본 또는 국가와 자본가계급의 결합으로 태어난 자본주의 동학은 자본주의, 산업주의, 군사주의의 시너지라 저자는 말한다. 산업혁명은 그 구체적 결과엿다. 앞에서 보았듯이 산업혁명은 군사주의와 산업주의의 시너지로 태어났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힘으로 전쟁의 산업화에 성공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수 있엇다. 제국의 또다른 힘은 금융력(자본주의)이엇다.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제국의 해가 지지 않았고 제국의 해가 지지 않았기에 금융력 역시 커져갔다. 자본주의, 산업주의, 군사주의가 서로 positive feedback을 하는 동안 제국의 헤게모니는 확고하다. 영국이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잡으면서 유럽은 세계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잇엇다. 그러나 폴 케네디의 말마따나 제국이 overstretch될 때 즉 셋의 시너지가 negative feedback으로 돌아설 때 헤게모니는 무너진다.

영국의 헤게모니는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전 미국의 헤게모니 역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 이유를 저자는 시너지가 사라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면 왜 시너지가 positive에서 negative로 돌아서는가? 저자는 그 메커니즘을 전작인 장기20세기에서 이윤율 저하경향으로 설명한다. 이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부에서 저자는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전후 미국의 역사를 개관하면서 전작의 논리를 적용한다. 논리적으로 ‘장기20세기’의 연장이라 볼 수 있으므로 책의 나머지에 대해선 차후 ‘장기20세기’ 리뷰에서 다룰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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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반양장) - 간략한 역사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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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아래로부터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혁명은 위로부터도 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혁명을 “계급권력의 회복을 위한 프라젝트”라 정의한다. 그 혁명은 황금기의 종말에 대한 반응이었다. 2차대전 이후 닉슨 쇼크까지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로 보는 데는 좌건 우건 이견이 없다. 그러나 그 황금기가 왜 끝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를 포함해 좌파에선 그 원인을 이윤율 저하경향 때문이라 보는데 대체로 이견이 없다. 문론 좌파에서도 이윤율 저하경향이 왜 나타났는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그에 대해선 전에 리뷰한 ‘자본의 반격’과 브레너의 ‘Boom and Bubble’이 대표적이다) 저자는 그 원인보다 결과에만 관심이 있다. 원인이야 어쨌건 결과는 동일하고 신자유주의 혁명은 그 결과에 대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혁명은 사회에 embedding된 자본을 disembedding하는 프라젝트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후 “유럽에는 사회민주주의, 카톨릭 민주주의, 그리고 통제국가 등 다양한 국가들이 등장했다. 미국 자신은 자유민주주의 국가형태로 전환했다. 이런 다양한 국가형태들은 공히 완전고용, 경제성장, 그리고 시민들의 복지에 초점을 둬야 하며 국가권력은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시장에 개입하거나 이를 대체했다. 경기순환을 완화하고 합리적으로 완전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흔히 ‘케인즈적’이라 불리는 재정/통화정책들이 채택되었다. 국내평화와 안정의 보증으로 자본과 노동 간 ‘계급타협’이 주창되었다. 국가는 적극적으로 산업에 개입했고 다양한 복지체계들을 구축하여 임금의 사회적 표준을 설정했다. 이는 시장과정과 기업활동이 경제/산업 전략의 방법을 유도하는 사회적. 정치적 제약들과 규제환경의 그물에 의해 어떻게 둘러싸여 있는지 알려준다. 신자유주의적 프라젝트는 이런 제약들로부터 자본을 탈착근(disembedding)하는 것이다.”

시절이 좋을 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나누어야 할 파이가 쪼그라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전후 안정조건의 하나는 상위 계급들의 경제적 힘이 제약되면서 경제적 파이의 훨씬 더 많은 몫을 노동자들이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성장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이런 제약이 문제되지 않았다. 파이는 계속 커져갔으므로 그 파이의 안정적인 몫을 챙기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1970년대 성장이 붕괴되어 실질이자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매우 낮은 배당 및 이윤만을 받게 되면서 상위계급들은 위협을 느꼈다. 상위계급들은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해야만 햇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그들의 혁명이었다.

혁명의 목적은 당연히 이윤율의 회복이었다. 방법은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가장 쉽고 분명한 방법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이는 것이다. 저자식으로 말하자면 전후 복지국가에 embedding되어있던 자본을 disembedding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후합의의 파기엿다. 상위계급으로의 “재분배효과와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는 신자유주의화의 지속적 특징이었다.”

그러면 국가를 장악해야 햇다. “방법은 다양했다.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영향이 기업, 대중매체 그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제도들-대학, 학교, 교회, 그리고 전문가단체 등-을 통해 유푀더었다. 하이에크가 1947년에 이미 예견했던 이러한 제도들을 통한 신자유주의적 사고들의 ‘긴 행군’ (기업에 의한 후원과 기금으로) 싱크탱크의 조직, 대중매체의 장악,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의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으로의 전향등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여론을 형성했다. 이러한 운동은 그 이후 궁극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공고해졌다.” (신자유주의의 지적/정치적 계보는 복잡하다. 이책에선 개요정도만 다루어진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에 대해선 크루그만의 ‘미래를 말하다’가 쉽고 자세하게 다룬다. 영국의 경우엔 박지향의 대처평전인 ‘중간은 없다’가 볼만하다)

신자유주의자 혁명의 날자는 레이건과 대처가 국가를 장악한 해이다. 그러나 정치혁명으로서 신자유주의는 그보다 일찍 뉴욕에서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본주의적 재구조화와 탈산업화는 여러 해 동안 도시의 경제적 기반을 침식했으며 급속한 교외화는 중심 도시의 대부분을 빈곤상태로 방치햇다. 결과는 1960년대 동안 주변화된 주민들의 일부에 의한 사회적 불안, 즉 '도시 위기'로 알려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경기후퇴가 진행되면서 뉴욕 시 예산의 수입과 지출 격차는 증가햇다(수년에 걸친 무분멸한 차입으로 부채규모는 상당히 컸다)." 처음엔 뉴욕 상업은행들도 적자를 메우는 것을 도왔지만 은행들도 한계에 부딪히고 채무연장을 거부하면서 뉴욕은 기술적 파산상태에 들어간다. '포드가 뉴욕시에게: 죽어라'란 헤드라인처럼 연방정부는 지원을 거부한다. 뉴욕시로선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이때 시정부의 긴급구제를 맡은 뉴욕 은행가들에 의해 뉴욕시의 정책방향이 우회전을 한다. "공적 고용 및 교육, 공공보건, 교통 서비스 등의 임금동결과 인력 삭감으로 이어졌으며 수직자 부담금을 부과(뉴욕시립대에 처음으로 수업료 체계가 도입되었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출을 줄여야 하니 당연한 조치이긴 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뉴욕의 리버럴 정책기조가 이때부터 신자유주의화되어 고정된다. "수년 사이 뉴욕 노동계급이 일궈낸 많은 역사적 업적이 해체되었다. 도시의 사회적 인프라의 상당부분이 감축되었고 물리적 인프라(예로 지하철 체계)는 투자는 커녕 유지조차 어려울 정도로 퇴락했다. 그러나 뉴욕의 투자은행가들은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의제 적합한 방식으로 도시를 재구조화활 기회를 포착했다. '좋은 경영분위기'의 창출이 우선이었다. 이는 경영을 위해서 적절한 인프라(특히 원격통신)의 건설에 공적자원을 사용함을 의미했으며 결국 자본주의적 기업을 위한 보조 및 조세유인책과 결합되엇다. 기업복지가 사람복지를 대체했다. 시정부는 사민주의적 기구라기보다는 기업주의적 기구로 변질되었다. 투자 자본을 위한 도시간 경쟁은 시정부를 공사파트너십을 통한 도시 거버넌스로 전환시켰다. 도시경영은 점차 폐쇄된 밀실에서 이뤄졌고 지방 거버넌스의 민주적, 대의적 요소들은 사라졌다.

뉴욕 재정위기관리는 1980년대 '레이건 정부에 의해 국내뿐 아니라 IMF를 통해 국제적으로도 신자유주의적 관행을 위한 길을 선도했다. 이는 금융기관들의 위원회 및 채권소유자들의 수익과 시민들의 복지가 대립하는 경우 전자에 특혜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정부역할이 구성원 대부분의 필요와 복지를 보살피기보다는 좋은 경영분위기를 창출함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레이거노믹스는 뉴욕 시나리오를 확대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식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세계에 국가의 자리는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강한 시장과 강한 국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의 자유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몹시 회의적이다. 다수결 원칙에 의한 통치는 개인적 권리와 헌정적 자유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민주주의는 사치스럽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전문가와 엘리트에 의한 통치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민주적이고 의회에 의한 의사결정보다도 행정적 지시체계나 사법적 결정에 의한 정부를 강력히 선호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중앙은행과 같은 주요 기구들을 민주적 압력으로부터 격리하려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자유가 소유적 개인주의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소유적 개인주의의 이해관계는 공동체의 이익과 충돌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그런 사적 이익을 마음대로 추구할 자유이다. 그런 자유와 공동체가 충돌해 "집단적 개입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에 봉착할 경우" 신자유주의의 자유를 지키려면 그런 운동을 억압할 국가가 필요하다. 그런 국가는 "반대를 진압하기 위해 설득, 선전 또는 필요하다면 적나라한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폴라니가 두려워했던 점이다. 즉 자유주의적 (확장하면 신자유주의적) 유토피아 프라젝트는 궁극적으로 권위주의에 의존함으로써 유지된다. 대중의 자유는 소수의 자유를 위해 제한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서 네오콘으로의 진화는 필연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신자유주의는 축적위기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면 그 해답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얼마나 성공적이었는가?

“병든 경제의 치유에 관한 모든 수사와는 달리 영국과 미국 모두 1980년대에 높은 수준의 경제적 업적을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신자유주의가 자본가들의 기도에 대한 해답이 아님을 제시했다.

세계 전체의 성장률은 1960년대 3.5% 정도였으며 심지어 어려웠던 1970년대에도 단지 2.4%로 떨어진 정도엿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1.4%, 1.1%라는 성장률(그리고 200년 이래 거의 1%에 불과한 성장률)은 신자유주의화가 세계적인 성장을 촉진하는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확실히 인플레이션은 낮아졌고 이자율도 떨어졌지만 이는 높은 실업률이라는 희생을 대가로 한 것이었다. 국가복지와 인프라 지출의 축소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악화시켰다. 전반적으로 저성장과 소득불균등 증가의 어색한 혼합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단지 동아시아와 동남아 그리고 최근 인도에서 신자유주의화가 약간의 긍정적인 성장 기록을 보였지만 이는 전적으로 신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발전주의 국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패작인 신자유주의가 그 ‘자유’로 하려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숨은 의제는 성장이 아니라 분배엿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화의 본질적이고 주된 업적은 부와 소득의 창출보다는 재분배에 있었다.” 저자는 그 메커니즘을 ‘탈취에 의한 축적(accumulation by disposseion)’이라 부른다. 맑스가 말한 원시적 축적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 ‘탈취에 의한 축적’은 원시적 축적이 그랬듯이 강한 국가의 지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의제 중 하나였던 민영화를 보자. “공적 자산이었던 것들의 법인호, 상품화, 민영화는 신자유주의 프라젝트의 징후적 양상이다. 이의 우선된 목적은 그간 이윤가능성의 산정에서 제외되었던 영역에서 자본축적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개발하려는 것이ㅏㄷ. 모든 종류의 공적사업들(물, 통신, 교통), 사회복지(공공주택, 교육, 보건의료, 연금), 공적기관들(대학, 연구실, 감옥) 그리고 심지어 전쟁(이라크에서 정규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는 민간 용병)도 민영화되었다.

그러나 탈취에 의한 축적의 본질은 민영화보다는 금융화에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워싱턴 콘센서스에서 민영화와 항상 짝을 이루었던 탈규제(또는 규제개혁)은 사실 금융의 탈규제가 핵심의제엿다. 경제의 세계화를 위해선 금융의 세계화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햇지만 통계는 주장과는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2001년 세계금융시장의 거래량은 연간 40조달러였다. 그러나 “국제무역과 생산적 투자 흐름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액수는 8000억 달러”에 지나지 않앗다.

금융의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탈규제는 금융 시스템을 투기, 강탈, 사기, 그리고 도둑질에 의한 재분배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90년대 이후 미국에서 금융부문의 “고용은 급격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점이 얼마나 생산적인가에 관해서는 심각한 문제들이 제기된다. 금융업의 많은 부분들은 단지 금융에 관한 것일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투기 이득만이 부단히 추구되엇고 이러한 이득은 각자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실현 여부가 결정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 금융업은 미국에서 가장 이윤율이 높았다. 그 비결은 이제는 명백해졋듯이 투기였다. 그 투기가 어떻게 돈을 만들어냈는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식상장, 폰지형 사기,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 자산 파기, 흡수합병과 취득을 통한 자산 박탈, 심지어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도 전체 인구를 부채 노역자로 전락시키는 부채 부담 수준의 증대. 기업적 사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용과 주식 조작에 의한 자산 탈취 등은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의 핵심이 되엇다.

이른바 금융 및 통제기능을 하는 소위 글로벌시티들은 부와 특권의 장엄한 섬이 되었으며 이러한 운영이 가능한 장소를 제공하고자 고층건물이 치솟고 수백만 제곱피트의 사무공간이 건설된다. 이러한 고층건물들에서의 층 사이의 거래는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 맨해튼, 도쿄,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 홍콩 그리고 오늘날 상하이으 빠르게 변하는 스카이라인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 도시들이 경이로운 이유는 재분배 또는 탈취에 의한 축적의 열매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탈취에 의한 축적의 가장 현란한 묘기는 위기의 관리와 조작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금융위기는 항상 자신의 자산을 온전히 유지하면서 신용을 창출할 수 잇는 위치에 잇는 사람들에게로 소유권과 권력의 이전을 유발한다. (1997-1998년) 아시아의 위기도 예외는 아니다. 서구와 일본 기업들이 큰 승자라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현저한 평가절하, IMF에 의해 강제된 금융자유화, 그리고 IMF가 촉진한 회복의 결합은 지난 50년간 평상시에 세계 모든 곳에서 일어난 자국 소유자로부터 외국인 소유자로의 가장 큰 자산이전보다도 더 컸으며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나 1994년 이후 멕시코에서 자국 소유자로부터 미국인 소유자에게 이전되었던 것을 왜소하게 만들 정도다. ‘침체기에 자산은 그들의 적법한 소유자에게로 되돌아간다’는 멜론의 말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한계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예로 미국의 방대한 쌍둥이 적자는 “신자유주의가 자본축적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론 지침으로서 수명을 다했다는 강력한 조짐이다.” 그 이유는 탈취에 의한 축적이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이라 저자는 보는 것같다. 더 이상 뽑아낼 것이 마땅치 않은 단계에 달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책을 이번 위기 이후에 썼다면 이번 위기를 신자유주의의 사망선고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것은 뒷처리뿐이라 덧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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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무너졌다
자크 사피르 지음, 박수현 옮김, 김병권 한국판 보론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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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다보스포럼의 화두는 ‘G-Zero’란 말이었다. G-제로란 “중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같은 신흥국 세력이 날로 강해지며 국제사회의 세력이 점점 균등해지는 가운데 향후 10년 동안 뚜렷한 지도국이 없는 체제를 말한다.”

금융위기로 선진국 특히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그 빈자리를 G20이 메웠다. 1,2회 G20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 워낙 현실의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회담은 실질적 내용이 없는 말잔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위기가 수그러든 이상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현실적으로 G20을 대체할 마땅한 대안이 없다. 그렇다고 “기존에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했던 국가들은 현재 국내문제에 정신이 없어 글로벌 거버넌스를 할 여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보스포럼에서G-제로 이론을 주장한 블레머는 기존의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던 국가들이 글로벌 리더십 부재가 2013년까지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 후에는 글로벌 리더십은 지역적 리더십으로 나뉘어질 것이라 본다. “남미, 북미, 걸프 지역을 대표적인 예로 꼽았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의 경우 지역적 리더십을 발휘할 국가가 없다고 본다. 중국과 인도는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일본은 리더십을 발휘할 의지가 없다.” (매경)

이 지경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금융위기로 미국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와 함께 미국의 방식은, 신자유주의라 불리던 모든 것은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마지막 결정타일 뿐이었다. 제국의 죽음은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20세기 마지막 10년이 시작되던 순간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차원에서 완전한 패권을 장악하는 듯 보였다. 미국은 한마디로 ‘지배 권력’의 모든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미국은 걸프전을 통해 압도적인 힘을 과시한 후에 더 이상 직접적인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모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고 특히 자신의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표상체계와 담론을 강요함으로써 국제정치 공간에 헤게모니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당대에 싹텄던 희망에도 두려움에도 결코 부합하지 않았다. 오늘날 판단할 때 1990년대 초의 상황은 기만적인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진정한 단절은 1997~1999년 국제금융위기였다.”

90년대 최고의 유행어였던 세계화는 “실제로는 두가지 과정의 결합이다.” 첫째는 ‘중국과 인도의 산업혁명’이라 불러야 할 것으로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이었다. 둘째는 미국이 정의한 세계화로 데이비드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화’라 불러야 할 과정이다. 이 과정은 무역과 금융의 개방이라 요약된다.

무역과 금융의 “문호개방은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미국적 시각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다. 1985년에서 1995년에 이르는 시기는 이러한 미국의 비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다. 이 시기동안 자본 이동을 구속하는 제약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자유무역의 중요성이 WTO 같은 국제기구들의 핵심의제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미국이 주장한 문호개방의 핵심은 금융개방이엇다.

“신자유주의화는 모든 것들의 금융화를 의미했다. 이 점은 경제의 다른 모든 영역들과 국가잧이는 물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금융의 장악을 심화시켰다. 이는 또한 세계적 교환관계에 가속적인 변동을 유발했다. 의심할바 없이 생산으로부터 금융의 세계로 권력이행이 있었다. 이제 제조능력에서의 이익이 필수적으로 1인당 소득의 증가를 의미하지 않게 된 반면, 금융서비스에의 집중은 분명 소득의 증가를 의미했다.” (데이비드 하비)

물론 금융화의 소득은 소수 국가의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다. 아리기가 말하듯 신자유주의화의 시대는 미국의 Belle Epoque였다. 20세기의 벨르 에포크는 19세기 영국의 벨르 에포크처럼 금융화 덕분이었다. 클린턴 집권기 미국의 번영은 그 비결이 “미국이 세계의 다른 곳에서 금융 및 기업 운영(직접 투자 및 포트폴리오 투자)을 통해 자국으로 높은 수익률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같이 세계 여러 다른 곳들로부터의 공물(tribute) 흐름은 1990년대 미국에서 성취된 부의 상당 부분을 구성했다.” (데이비드 하비, 이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전에 다룬 ‘자본의 반격’ 리뷰와 앞으로 다룰 리뷰 참조)

“1985-1998년 동안 미국의 이데올로기적 승리의 가장 큰 특징은 금융 자유화가 실제로는 개별 이해관계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금융자유화를 잠재적인 공공재로 제시할 수 잇었다는 점에 잇다.”

그러나 1997-1999년의 금융위기는 금융자유화가 공공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었고 위기를 통제하지 못한 미국의 무능력을 보여주었다. “금융위기는 미국 헤게모니의 정당성을 뿌리째 뒤흔들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정립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위기가 도래했다.

아시아를 시작으로 러시아를 거쳐 라틴 아메리카까지 확대되었던 금융위기의 원인은 미국의 권유에 따라 도입된 자유화 정책, 그중에서도 특히 금융 자유화 정책” 때문이엇다. “이 위기의 정치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차베스나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의 성공도,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등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 국가 주권 담론과 사회적 담론을 결합한 세력의 승리도 푸틴 대통령 집권 아래의 러시아 변화도 이해할 수 없다.

미 재무부가 모든 강력한 수단을 동원했지만 위기의 논리가 시스템 통제에 대한 모든 의지를압도햇다. 한 마디로 창조주가 피조물에 먹힌 셈이다.” 재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0년에 터진 나스닥 위기와 인터넷 버블 붕괴는 신경제의 신화를 무너뜨렸다. 엔론과 월드컴 스캔들은 미국이 옹호하는 ‘거버넌스 모델’의 한계를 빠르게 보여주었다.”

“1999년부터 전개된 자유주의 이데올리기에 대한 비판도 바로 미국이 금융위기관리에서 보여준 무능력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결과다. 금융위기로 인한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적 결과들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뿌리째 뒤흔들었다.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 담론이 갑작스럽게 신뢰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2000년대 세계경제를 정의하는 글로벌 불균형을 위기의 결과로 본다. 미국이 금융위기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아시아 국가들은 국제금융의 변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된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를 위해 내수를 줄이고 극히 공격적인 무역정책을 감행했다.” 국제무역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약탈자적 전환’은 1999년과 2000년에 시작되었다. 진정한 국제무역 자유화는 각국이 합리적인 수준으로 내수를 확대하는 정책을 조정할 수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만약 어떤 국가가 의도적으로 소비를 억제한다면 이 국가의 발전 전략은 해외시장에서 자국 상품의 시장점유율을 높일 수 밖에 없다. 또 여러 국가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할 경우 그 결과는 이들 국가의 정책을 모방하지 않는 국가들에서 디플레이션과 고용 파괴로 나타난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은 것은 미국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은 국제금융 자유화로 인해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자신이 강제한 시스템의 조절국가임을 천명한 경우다. 이 경우 미국은 통화정책을 국내 정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둘째 통화정책을 계속 국내 경제정책의 도구로 사용할 경우 미국은 시스템의 조절국가임을 천명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은 자신이 만든 세계시스템의 운영을 우선시하고 국내통화정책을 조정변수로 만들든가, 통화정책의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시스템을 국내정책의 조정변수로 만들어야 한다.” 아시아국가들이 약탈자로 돌변하면서 미국의 딜레마는 더욱 심화되었고 세계시스템의 “모순이 미국에 집중된다.

미국은 전세계적 문호개방이라는 정치적 행위와 이 정치적 행위의 결과를 홀로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의 부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에 부딪차게 되었다. 일극적 세계절서를 추구하는 동시에 일극적 세계경영을 위해 다극적인 협력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전세계의 문호개방을 추구하는 동시에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본, 금융, 상품 플로우를 안정화시키지 않을 수는 없다. 이 같은 모순은 재정 약화뿐 아니라 이제 무역 약화가 결합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미국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이유로 미국경제의 실제 효율성이 지탱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경제활동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경성권력과 연성권력을 모두 보유할 수 잇는 강대국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갑작스럽게 붕괴한 것이다.” 담론의 위기는 치명적이다. “담론의 상실은 미디어가 그야말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세계에서 군사적 패배만큼이나 중요한 패배”이기 때문이다.” 헤게모니의 위기에 맞서 “미국은 군사력 즉 경성권력을 동원할 수 잇는 능력을 다시 한번 과시함으로써 자국의 헤게모니를 재천명하고자 했다. 미국은 이미 1991년 걸프전을 통해 이를 만천하에 과시한 바 있다. 이 같은 미국정책의 재군사화는 1999년 코소보 사태에서 2003년 이라크 전쟁까지 계속된다.”

미국이 재군사화란 옵션을 택한 것은 미국의 세계에 인식이 크게 바뀌엇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8년 위기 직후 미국을 사로잡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파키스탄과 인도의 핵실험을 계기로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이 비교적 가깝다고 생각했던 국가들마저 미국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전략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주엇다. 미국의 세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하게 된다. 외부 세계를 미국이라는 성지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감작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즉 1990년대의 자신만만함이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으로 변했다. 지배 국가에 대한 도전과 지배 국가의 대응 과정은 과격화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막연한 두려움은 9/11로 분명한 두려움으로 바뀐다. 그러나 테러와의 전쟁 이후 미국의 과격화는 “단순히 조지 부시 대통력을 비롯한 지도층의 신보수주의 이테올로기만의 산물은 아니다. 부시의 백악관 입성은 이 동학의 원인이라기보다 징후에 가까웠으며 기폭제라기보다 동학의 현시라고 볼 수 잇다. 그런데 이러한 군사력으로의 회귀는 정치적 군사적 이유로 인해 실패한 회귀엿다.” 그 결과는 국제무대에 중국과 인도를 신흥강국으로 올려놓았고 러시아의 부활을 이끌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은 군사력의 약화와 정치적 고립이라는 상황에 봉착했으며 미국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면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는 다보스 포럼에서 논의된 G-Zero에 동의한다. 여전히 미국은 최강이다. 그러나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끝났다. 그리고 “미래는 일극적 제국의 시기가 될 수 없다.” 미국의 헤게모니는 무너졋지만 미국을 대신할 국가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미국은 자신의 해결책을 강제할만큼 강력하지는 않지만 다른 대안적 해법들의 등장을 막을 만큼은 강하다. 미국의 딜레마는 발생 단계에 있는 질서의 위기 그 자체다. 즉 구질서는 사라졋지만 신질서가 탄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래는 “외관상으로도 다극적 동거의 시기가 되지도 않을 것이다. 다가올 미래는 분쟁과 혼란의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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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김택민 지음 / 신서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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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를 객관적으로 보면 1천년 전 중국 송조의 우위를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시아, 특히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우월한 지위는 적어도 1800년까지는 계속되었다. 세계경제의 판도 변화는 1850년 아니 어쩌면 1870년 이후에야 실제로 가시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점점 강해진다. 1750년에 세계인구의 66%를 차지하던 아시아 인구가 같은 시기 전세계 GNP의 80%를 떠맡고 있었다. 세계인구의 2/3였던 아사아인이 세계 GNP의 4/5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1/5인 유럽인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1/5을 생산했다. 아시아 특히 중국이 장구한 역사의 시간대로 본다면 극히 최근까지 그러니까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던 것이 거대한 세계경제의 틀이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2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최소한 세계경제의 중심은 중국이었다. ‘중심인 나라’란 이름이 잘 어울리는 나라였다는 말이다. 중국이 그런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왜일까? 4대문명 중에서 중국은 출발이 늦었다. 농경이나 청동기, 철기와 같은 기원전 시기의 첨단기술이 태어난 것은 중동이었고 군대와 국가와 같은 사회적 기술의 첨단을 달렸던 것도 중동이었다. 그러나 시작은 늦었지만 중동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는 것을 넘어 오랜 세월을 번영하고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군림한 것은 중국이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중국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지역은 주변지역에 대해서 계속해서 중핵적 위상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지도 못했다. 그것은 자립적인 문명단위로 발전할 수있을만큼 퇴적지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대문명이 시작된 곳은 모두 강의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지에서 만들어졋다. 그런 땅의 “토양이 원시농경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농경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원시시대에는 간단한 방법으로 경작할 수 있는 토양이 충분히 받달되어 있어야 농경이 가능했다. 땅을 갈아엎지 않아도 작물이 뿌리를 내릴 수있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비옥해야 하며 한 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관개를 하지 않아도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수분이 공급되거나 토양 자체가 수분을 보존하는 성질이 높아야만 농경이 가능햇다.”

4대문명이 시작된 나일강 삼각주,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유역의 퇴적지, 인더스강 중하류, 황하강이 만든 충적평야인 중원평야는 모두 그런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문제는 그 퇴적지의 크기였다. 나일강 퇴적지는 “중원평원의 1/10을 넘지 않을 것이다. 유프라데스/티그리스강 연안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인더스강 유역의 퇴적지도 나일강보다 결코 넓거나 좋은 조건이 못된다. 아마도 이 때문이겠지만 원시 농경문화 단계를 지난 뒤 이들 지역은 더 이상 주변지역에 대해” 우위를 유지할 수 없었고 문명 자체가 소멸되엇다. 면적의 우위는 바로 인구의 우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농경이 쉬운 비옥한 토지가 넓기까지 했기에 중국의 인구는 압도적이었다. CE 2년 중국의 인구는 “5,956만명인데 이 가운데 55.2%인 3,293만 명이 중원에 거주했다. 학자들은 당시 중국인구가 세계인구의 1/4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중원인구는 세계인구의 15% 이상이 된다. 2천년전 세계인구 백명 가운데 15명 이상은 중원에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중원의 면적은 대략 남한의 4배 정도이다. 넓기는 하지만 그 땅에 인간의 15%가 살았다는 것은 그 땅의 경제력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우위를 차지한 이유는 그 경제력 때문이며 그 땅에서 나온 상품 때문이엇다. 그 상품 중 하나는 비단이었다.

중국은 비단을 처음 만든 곳이다. 그러나 중국만 비단을 만들었던 것은 아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비교적 일찍부터 비단이 생산되엇”고 다른 지역에서도 비단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8세기 무렵 세계 비단의 95%는 중국의 중원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비단은 오늘날로 치면 자동차나 명품처럼 고가의 상품이엇는데 이런 비단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곳은 중국밖에 없었다.” 그 이유 역시 “뽕나무 재배에 적합한 비옥한 퇴적지”의 면적 때문이엇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복이면서 화였다.

“중국인들은 중원대지가 천하의 중심임을 확신하고 자부햇다. 주변민족들도 중원대지와 그 땅 위의 왕조를 동경과 외경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원대지는 실상 고난의 땅이엇고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잔혹한 땅이엇다.”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계절풍 지역인 중원평원은 농업에 유리하다. 그러나 여름에 강우량이 집중되고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게 마련이라 “가뭄 또는 홍수로 인한 재해가 기록되지 않은 해가 없다. 정확한 통계를 얻을 수 있는 1470년부터 1979년까지 510년 가운데 491년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해를 입었고 재해를 입지 않은 해는 단 19년이다.”

재해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메뚜기떼의 피해도 사서에 많이 보이는 재해이다. 중원은 지형, 기후, 토양 등 자연조건이 메뚜기가 서식하기 알맞으므로 적당한 기후조건이 되면 메뚜기떼가 대폭발하여 엄청난 재난을 일으킨다.”

기후조건이 비슷한 한반도 역시 가뭄과 홍수가 많았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큰 가뭄 때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만큼 참혹한 사태는 많지 않았다. 한국이나 일본은 기후가 비교적 습윤한데다 산이 많다. 최악의 가뭄 때에도 산에 나무와 풀뿌리는 남아 잇어 연명할 수 있고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므로 조개나 물고기로라도 연명할 여지가 있엇다.”

그러나 남한의 4배 크기의 땅 90%가 “가뭄이 든 경우, 호아하와 그 지류들이 말라버리고 들판의 농작물과 나무와 풀도 모두 말라비틀어진다. 너무 멀어 바다로 나갈수도 없다. 사서에 ‘풀부리와 나무껍질까지 다 먹어버렸고 마침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라고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넓은 면적은 가뭄의 피해만 증폭하지 않는다. 한반도처럼 홍수는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가 원인이다. “한국이나 일본의 강은 국토의 중앙에 큰 산맥이 있어 대개의 강이 산에서 발원하여 바다까지 급류로 흐르므로 홍수의 기간이 짧다. 수백mm의 집중호우가 쏟아져 심각한 홍수가 일어나고 농지가 초토화되어도 곧 물이 빠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수확이 가능하므로 최악의 재앙은 덜 일어난다.”

그러나 중원평원은 다른 나라라면 그다지 높지 않은 태산이 엄청난 산이 될 정도로 평판한 저지대이다. 그런 넓은 저지대에 “폭우가 쏟아지면 물이 빠지지 않아 수해를 가중시키며 이때 대개 황하가 범람하여 참혹한 재난으로 발전한다. 일단 범람하면 물이 빠지지 않아 농지가 오랫동안 수몰된다. 중원평원은 바다로부터 6백Km 떨어진 개봉 부근의 고도도 수십m에 불과하여 일단 물에 잠기면 좀처럼 물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그 해 농사는 끝이다.”

저자는 펄 벅의 대지에 묘사된 홍수 장면을 인용한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까지 물은 불기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다처럼 되어버렸다. 구름과 달과 반쯤 물에 잠긴 수양버들과 대숲의 그림자가 거울 같은 물에 비친 모양은 한 폭의 그름처럼 아름답고도 처참햇다. 여기저기 피난간 빈 토벽집들이 보였다. 그런 집들은 며칠 가지 않아 흙벽이 무너져 물에 섞여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작은 배나 뗏목을 타고 성 안을 오가게 되었고 다시 예전과 같이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러나 홍수는 여전히 잔잔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또 홍수가 났다. 강물은 불어 논밭 위를 해류처럼 흘러갔다. 물은 집 안까지 넘쳐들어 흙벽을 무너트리고 물 속에 잠겨 그 흔적도 찾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상의 물이 천상의 물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맹렬한 기세로 비가 퍼부엇다. 매일매일 비가 왔다. 이해는 수확이 전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물에서 죽었다. 전에 없는 기근이 마침내 닥칠 것이라고 왕릉은 생각했다. 겨울의 밀씨를 뿌릴 때가 되어도 물은 빠지지 않았다. 이래서는 내년에도 수확이 없다.”

이런 땅에 살면서 중국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이었다. “막스 베버의 주장과는 다르게 중국인들은 전근대 시기에 그 어떤 북서 유럽인들보다 더 자연계를 함리적으로 지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엇다. 다시 말해 변덕스러운 기후로부터 자유로움이엇다.” (마크 엘빈)

중국인의 그런 욕망은 정치가 안정되고 위정자들이 제 역할을 한다면 실현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시기를 중국인들은 치세라 불렀다. 치세에는 자연재해가 발생해도 최악의 사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역사에서 태평성세는 드물었다. 위정자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고 사복 채우기에 급급한 경우 큰 기근이 들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는 혹독한 시절이 된다. 이런 시기를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시절 즉 난세라 부른다.” 그리고 난세는 자연재해를 최악의 사태로 증폭시켰다.

난세는 빈부격차의 증폭과 함께 시작된다. 중국의 제국 시스템에서 빈부격차의 증폭은 필연이었다.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유목민과 건달패에게 빈주먹과 오합지중에 불과한 농민은 맛좋은 먹이에불과하다. 그 허약한 토끼에 불과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잇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단지 중앙집권의 정치권력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말해 강력한 정권이 질서를 유지해야만 그들도 외부의 침입과 소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제국이 존재해야만 백성들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고 제국이 지속적으로 치안을 유지해야만 그들 역시 小康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천하에 큰 난리가 날 때마다 그들이 ‘진명천자’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국의 평화공존은 권력과 권력 배후의 무력에 의해 유지될 따름이며 天下爲公은 통치를 유지하는 구실에 불과할 뿐 실질은 국가가 소유권을 지니고 통치권은 황제가 소유하며 정권은 절대로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기적인 선거나 집권교체 등은 아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는 제국은 물론 인민들도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관심조차 없었다. 안정과 평안을 바라는 제국의 신민들은 결코 집권 세력의 빈번한 교체를 반기지 않았다.” (이중톈)

중국의 제국은 전형적인 ‘권력사회’였다. 물론 권력은 동의에 기초한다. 벌거벗은 힘은 번거롭고 지속되지도 않지만 동의에 기반한 권력은 비용이 낮고 지속가능하다. 그 동의의 기반은 안정이란 한 가지 위에 서있었고 다른 것은 불필요햇다. 기본적인 안정만 되면 나머지는 자유란 말이다. 그것도 엄청난 자유.

권력의 본능은 생존이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선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 역대 중국의 제국이 중농억상 정책을 내세운 것은 경쟁자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이중톈은 말한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재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우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의해 무너졌다.” 중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역대 정권 상구너을 경계하고 적대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 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민간의 상공업을 억제, 탄압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정권을 세우고 공고하게 만들려면 무기와 붓, 그리고 돈에 의지해야 한다. 이 세가지는 반드시 정권의 최고 통치자의 수중에 완전히 장악되어야 한다.”

중국의 역대 제국은 그렇게 했고 천하의 권력이 국가기구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집중된 권력은 제 무덤을 파기 마련이다.

견제없는 권력인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통치집단이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수탈을 한다고 해도 백성이 그 나머지만으로 배불리 먹고 등만 따시다면 그것이 곧 치세인 것이다.” (이중톈)

자신의 무능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만들었던 만력제의 경우를 보자. 만력제의 능은 “재위시인 1585년부터 1590년까지 6년에 걸친 대공사끝에 완공되었으며 연인원 6천5백만명(오타 아님)과 은 8백만냥이 소요되었다. 6년동안 매일 3만명이 동원되었다는 말이다. 당시 명나라의 1년 조세수입이 은 1천5백만냥을 넘지 않았다 하니 은 8백만냥은 국가의 1년예산의 반이 황제의 능을 조성하는 데 소모되엇다는 말이다. 이 돈을 당시 쌀값으로 환산하면 1백만명이 6년 반 동안 먹을 양이다. 그런데 이 만력제릉도 진시황릉의 지하궁전 면적의 1/20에 불과하다.”

물론 거대한 능묘는 정치적 장치였다. “황제가 영원히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권위를 담은 칭호이듯이 거대한 궁전과 능묘도 황제의 권위를 공간적, 시각적으로 극대화해 누구도 도전할 엄두를 낼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조성된 장치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천하의 부를 한손에 움켜쥐고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던 사람들이 그 영화를 사후까지 연장하고 싶은 인간적 욕망이 거대한 능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제국은 근본적으로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 아래선 부 역시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전통시대에는 종놈이 아닌 (자기 땅을 가진) 일반농민도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봐야 세금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2,3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가뭄, 홍수, 메뚜기의 피해를 입게 되면 굶주리게 되어 얼마 안되는 땅뙈기도 몇 됫박의 곡식에 부자들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고 급기야는 몸을 팔아 남의 종놈의 신세로 전락해 평생 뼈빠지게 수고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져 지배층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할 정도이나 가난한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지만 세금은 점차 가혹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홍수, 가뭄, 메뚜기때의 재해가 일어나고 전명변까지 만연”하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가 된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난다. 대동란의 시작이다. 역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중국사에서 9번의 대동란(저자는 문화혁명까지 10번이라 말한다)이 있었다고 말한다.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태평천국의 난 등이 그것이다.

“왕조교체기의 난세는 민중봉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는 총체적인 전쟁국면이 연출되어 전체의 삶이 부정되는 최악의 난국이 형성되었다. 민중봉기가 총체적인 전쟁국면으로 발전하는 이유는 일단 한 지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민중봉기가 뒤따르게 되고 곧이어 호족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전국이 전쟁터로 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중군은 달리 생계수단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약탈을 자행하게 마련이다 농민들은 약탈을 피하기 위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어 농지는 황무지로 버려지고 생산활동이 정지된다. 전국이 전쟁터로 변한 상황에서 기존왕권은 유명무실하게 되면서 수많은 수령들이 스스로 천명을 받은 새로운 패권자임을 자칭하여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이게 되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생산기반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도처에 약탈하는 군도들이 횡행하게 되자 외부에서 양식을 조달해야 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사람들이 거주할 수 없게 되어 유랑할 수 밖에 없는데 성시를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생존을 위해 도리없이 군도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 세력이 더욱 급속히 확산된다. 또한 향촌의 주민들도 약탈을 피해 농사를 포기하고 산으로 숨거나 군도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져 농토는 황무지로 버려지게 된다. 그나마 일부 농민들이 위협을 무릅쓰고 지은 농사도 언제 약탈당할지 몰랐다. 대전란이 없을 때도 결코 식량이 풍족할 수 없는데 몇 년동안 농사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식량이 엄청난 대기근과 죽음의 재앙에 휘말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를 좀더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대전란이 있기 전과 후의 인구통계이다. 전체인구의 1/2 이상 죽어간 대동란이 최초로 발발한 기원전 3세기 말 이래 2천1백년동안 아홉번이나 있었다. 또 대동란과 맞먹거나 그보다 더 참혹했던 이민족의 침략전쟁도 네 번이나 있었다. 지역에 따라 ‘열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든가 ‘백 중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고 굶어죽은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는 말도 사실에 가까울 수 있다.

원래 민중들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굶어죽거나 얼어죽을 위험 앞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봉기했으나 그 결관느 참혹한 죽음의 세계를 연출한 것 이상이 되지 못했다. 이 같은 처참한 죽음의 세계 즉 난세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야 말로 중국역사의 숙명적 비극성이다.”

일단 대동란이 정리되고 새로운 제국이 서면 대동란으로 지배층의 숫자가 정리되면서 빈부격차가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한나라는 진나라 멸망의 원인을 교훈으로 삼아 엄격한 법치를 지양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노역동원을 자제하며 흉노에 대해서는 무력동원을 최소화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을 견지하고자 햇다. 이러한 정책은 대동란을 거치고 난 뒤 많은 민이 살상되고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변한 상황에서 생산기반을 회복하고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득이한 조치엿지만 민들은 일시 숨을 돌리고 생산력을 회복하게 되엇으며 이에 따라 국가재정도 충실해졌다.” 이때를 문경지치라 한다. 역대 3대 치세로 꼽히는 당태종의 정관지치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정책을 취한 결과엿다. 제국의 초반은 대부분 이런 치세에 속한다. 그리고 치세와 함께 2-3백년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한 사이클은 중국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농경에 기반한 제국에는 보편적인 사이클이라 할 수 있다. 단지 중국에선 그 사이클의 끝이 자연재해가 증폭되면서 더 참혹하고 더 극적일 뿐이다. 농경제국에서 관찰되는 사이클의 일반론을 보면서 리뷰를 끝내려 한다.

“안정과 내부 평화는 번영응ㄹ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 증가를 낳는다. 인구 증가는 인구과잉을 낳고 인구 과잉은 임금하학과 지대 상승, 평민들의 1인당 소득의 삼소를 가져온다.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들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감소를 겪기 시작한다. 생활수준의 하락은 불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디ㅏ. 엘리트층은 국가에 의지해 고용과 추가 수입을 얻으려고 해 국가의 지출을 끌어올리지만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빈곤해져 세수는 줄어든다. 국가의 재정이 붕괴되면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은 폭발해 민중 반란이 일어난다.

질서가 무너지면 묵시록의 네 기사, 즉 기근과 전쟁, 전염병, 죽음이 몰려온다. 그러면 인구가 감소하고 임금이 상승하지만 지대는 떨어진다. 그래서 평민의 소득은 회복되지만 상류층의 부는 바닥에 떨어진다. 엘리트층의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다운 정부의 부재는 계속 내전을 부채질한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나면 엘리트층이 얇아진다. 일부는 파벌 싸움으로 죽고 일부는 이웃과의 반몫으로 목숨을 잃으며 많은 사람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포기하고 조용히 평민층으로 떨어진다. 엘리트층 내부의 경쟁이 잦아들면 질서가 회복된다. 그러나 안정과 내부 평환느 번영을 낳아 다시 순환이 시작된다. 그래서 평화는 전쟁을 낳고 전쟁은 평화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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