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또는 이건희에 관한 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이책만한 책을 보지는 못했다. 삼성에 관한 책은 둘 중의 하나이다. 용비어천가 아니면 일방적인 매도. 어느 것이든 독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이다. 혹 무협지 읽듯이 시간때우기로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어떤 현상에 대해 비판을 하든 찬양을 하든 먼저 할 일은 그 현상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왜 어떻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시중에 나와 있는 책들은 이해가 전제되어 잇지 않다. 특히 매도하는 쪽이 심한데 그런 책을 읽는 독자들이 원하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대상으로 삼성을 공격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감정의 허무한 배설일 뿐이니까. 그러나 이책은 어느 쪽도 아니다. 이책은 이건희라는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했으며 왜 그런 결과를 낳았는가란 질문에 답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저자의 노력은 상당한 설득력을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책은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시작한다. 성공한 40대의 사업가로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는 이병철과 겁먹은듯 뚱한 얼굴을 한 어린 이건희의 가족사진이다. 그 사진에서 저자는 이병철과 이건희의 부자관계를 읽어낸다. 저자가 읽은 두 부자의 관계는 일종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핵심은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라기 보다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경쟁관계를 말한다. 그 관계에서 어머니는 부자관계에서 권력의 상징일 뿐이다. 학창 시절 선배로부터 삼성 일가의 가족관계를 들은 일이 있다. 그 선배는 이렇게 삼성가족의 분위기를 요약했다. 식탁에 이병철씨와 아들 셋이 모여있다. 이병철씨가 눈을 부릅뜨고 상석에 앉아 있으면 첫째 맹희씨는 어버버 미친 시늉을 하고 둘째 창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을 감추려 한다. 셋째 건희씨는 자신이 그자리에 없는 것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자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묵묵히 식사만 한다. 이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이라기 보다는 삼성일가에서 부자관계를 상징한 것이다. 이병철씨가 아들을 자식보다는 후계자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 사람이란 평을 듣고 살았던 이병철씨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일본기업인들이 그렇듯이 사업가란 사회에 봉사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병철씨로선 자식들에게도 개인이라기보다는 주어진 권리만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무를 다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바람직한 생각이다. 그릇이 안된다면 굴지의 대기업을 맡을 자격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건희씨의 불행은 그가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직후의 혼란을 피해 3살까지 외가에서 외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라다 대구에 왔고 제대로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을 가야했던 이건희는 제대로된 사회성을 기를 수 없었다. 가족 안에서 애착감을 가질 수 없었고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던 어린 이건희는 일본에서도 조센징이라며 이지메를 당했고 못견뎌 돌아온 한국에서도 쪽바리냐며 따돌림을 당했다. 물론 이건희 자신의 내성적이고 붙임성 없는 성격이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이건희는 '오타쿠'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의 자리를 밖에서 찾을 수 없으니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고 거기에 틀어박힌 것이다. 이건희가 몰두했던 취미들을 여러가지였다. 영화, 각종 기계, 레슬링,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고 따돌리던 인간의 심리에 관해. 오타쿠가 되어 자신만의 성에 갇힌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했던 이건희에게 아버지 이병철은 애증의 관계였다. 아니 애정이라기 보다는 드려움과 존경 그리고 극복해야만 할 뛰어넘어야 할 그리고 이겨내야만 할 대상이었다. 영화 마니아를 넘어 오타쿠였던 이건희는 일본 유학시절 일본 전국시대에 관한 수십편의 사극영화를 수십번을 반복해서 보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 이병철은 오다 노부나가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천재의 그림자에 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을 것이다. 일본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전국시대의 3사람을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새가 울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오다 노부나가는 '울어라' 말하고 울지 않으면 베어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가 울도록 온갖 아양을 떨며 구슬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때까지 기다린다. 두 형이 후계자에서 밀려나고 후계자가 된 이건희에게 아버지 이병철이 원한 것은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였다. 새가 울지 않으면 울때까지 기다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되어야 했다. 마침내 이건희의 오다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새가 우는 때가 왔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이건희는 아직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이건희는 은거에서 벗어나 삼성을 장악한다. 가치경영, 일류경영, 인재중시 등 90년대 이건희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삼성은 세계일류가 되어 한국을 먹여살리는 기업이 되었다. 멋진 성공담이다. 그런데 왜 삼성은 미움을 사는가? 저자는 묻는다. 그것은 이건희에게 삼성은 성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건희가 내세운 기치중에는 윤리경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윤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같은 보편성을 갖는 윤리가 아니었던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에게 윤리는 그의 성 안에서만 통하는 윤리였다는 것이다. 마치 사무라이가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고 의리를 지키듯이 이건희의 성인 삼성이란 울타리 안에서 지켜야할 윤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벽을 쌓았기에 그 벽이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에 사람들은 삼성의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분노한다는 것이다. 재벌의 뇌물 스캔들이나 분식회계, 변칙상속등이 터질 때 그 부패건들에서 대중이 보는 것은 그들과 우리라는 선을 긋는 재벌의 생각이다. 윤리가 없으면 기업은 안으로 썩어서 무너진다. 그러나 그 윤리는 우리끼리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까지 지킬 필요는 없다. 삼성이 한국을 먹여살리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삼성 혼자만의 힘이 아니지 않은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재벌과 민중은 손을 잡았다. 그러나 위기가 지나고 나서 민중들의 삶은 나아진 것이 없지만 재벌들은 승승장구한다. 분노가 쌓이는 것이다. 삼성과 한국의 미래는 그 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결정할 것이라고 저자는 운을 띄우며 이책을 끝내고 잇다. 이상이 이책의 내용이다. 이책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당히 객관적이다. 물론 저자가 그리는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없다. 이건희 본인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건희라는 개인을 최대한 살아 숨쉬는 인간으로서 그리려 한다는 노력만으로도 이책의 존재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