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언어 - 당신의 DNA는 안녕하십니까?
프랜시스 콜린스 지음, 이정호 옮김 / 해나무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책은 개론서나 입문서가 아니라 유전학 분야가 지금 어디까지 가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다. 대개 이런 류의 책은 그 분야의 문외한에게는 암호문에 가까울 수 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재 그 분야의 첨단을 보여주려다 보면 기본적인 것은 건너 뛰게 마련이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기초적인 유전학 지식이 있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책의 내용은 이런 식이다. 구글의 공동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은 DNA 검사를 단지 오락거리로 생각했다고 한다. 브린은 아내 앤 위지키가 창업한 트웬티스리앤미사의 첫번째 천제 유전체 규모의 검사 대상자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가족들에게도 이 검사를 받으라고 추천했고 어떤 DNA 구역이 그의 친척들과 같은지 아는 것을 즐겼다. 그는 어떤 질병이나 상태에서는 위험도 예측치가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았지만 다른 질병들에서는 약간 낮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내는 세르게이에게 유전자 LRRK2의 특정한 유전적 변이를 살펴보라고 했다. 그러자 상황이 완전히 돌변했다. 세르게이의 어머니는 파킨슨병이 있는 것으로 진단을 받았고 최근의 한 연구는 LRRK2 유전자의 희귀 돌연변이가 나이가 들었을 때 걸리는 신경질환 파킨슨병을 아주 높은 위험도로 유발한다는 것을 밝혔다. 트렌티스리앤미 사가 유전검사로 쓰는 DNA 칩에서 도출된 데이터를 자세하게 들여다 본 그는 자신과 어머니가 바로 그 LRRK2 유전자 변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는 더 이상 유전검사가 그냥 하는 오락거리가 아닌게 되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성격을 갖게 하는 D4 유전자라든가(스프링) 영국의 언어장애를 가진 가계를 연구하다 발견한 언어능력과 관련된 유전자라든가 인문서적을 읽다보면 유전학의 발견들이 심심치 않게 언급된다. 이책은 그런 발견들이 주된 내용이다.

 

그러나 저자가 의사인만큼 심리학 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에서 언급되는 내용들보다는 의학과 관련된 내용이 주종을 이루며 그런 발견들이 누적되면서 어떻게 의학혁명을 이루어가는지가 이책의 주제이다.

 

이책에서 말하는 유전자는 우리가 흔히 보는 인문서적과는 달리 이런 것이다. “단백질은 여러 역할을 한다. 신체 구조를 구성하고 방어 면역 체계에 작용하며 때로는 화학작요을 촉진하는 촉매로 쓰이기도 한다. 단백질은 촉매로서 생물체의 성장과 기능을 통제한다. 유전 체계에서 하나의 유전자에 의해 합성된 단백질이 다른 유전자에 단백질을 형성하도록 또는 단백질 합성을 가로막도록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달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의 작용을 조절한다. 또한 유전자는 자신을 더 이상 형성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단백질을 만들기도 한다.” (폴 에얼리, 앤 에얼리)

 

앞에서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에게 파킨슨병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도 이런 유전자의 메커니즘을 말한다. 다른 병도 마찬가지이지만 파킨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변이도 여러가지인데 그중 알파 시뉴클레인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양성 변화로 보이는 단일한 아미노산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이다. 이 변화만으로도 돌연변이를 보유하는 사람들에게는 파괴적인 질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세르게이 브린의 가족에게 파킨슨병을 경고한 소비자 유전자검사는 게놈 프라젝트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저자가 10여년전 그 프라젝트에 참여할 때만 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놈 프라젝트 이후 많은 발견이 축적되었고 검사비용이 낮아지면서 가능해진 서비스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이러한 검사들이 단지 전체 DNA 분자의 1% 10분의 1에 해당하는ㅁ 것만 검사할 뿐이고 정보를 주는 질병이나 상태의 수도 단지 12개 정도이다. 가까운 미래에 질병과 상태의 수는 급속하게 증가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가 유전체의 나머지 부분에서 비밀의 문을 여는 것처럼 거의 매주 발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저자는 이런 검사를 의학혁명이라 부른다. “이 혁명은 그동안 모든 사람에게 들어맞는 단일 규격의 옷과 같은 의학의 전통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유일하고 고유하며 특별한 형질들을 가진 한 개인에게 맞춤을 제공하는 강력한 전략으로 변화시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광범위한 주장들을 떠받치는 상세한 과학적 사실들은 아직도 진화하고 있다. 하나의 획기적인 패러다임 변화는 그 초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의학혁명이란 가타카의 미래가 온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유전학 기술 중에는 영화에서 처럼 유전자를 바꾸는 것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가까운 미래에 그런 기술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무나 불완전하고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혁명이란 병의 진단과 치료이며 그 메커니즘은 단백질 설계도로서의 유전자이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약품이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서 개발되었다. 가능성 있는 치료법으로 탐색되었던 화합불들은 세균, 곰팡이, 혹은 식물들에서 유래한 천연화합물이었다. 그리고 이것들중 단지 소수만이 임상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전자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을 알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우면서 더욱 포괄적인 디자이너 약물접근법은 약품을 만드는 특정한 과녁을 먼저 정의한 다음에 수천수만의 후보약품들을 스크리닝해서 승자가 되는 물질을 찾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저자가 연구한 경우인 낭포성섬유증은 단일한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해 생기는 질병이다이 질병은 이자(췌장)에 낭포나 섬유성 상처들이 생겨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능력이 상당부분 상실된다. 이자에서 분비하는 효소들을 환자의 식단에 넣어주지 않는다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리게 된다. 가장 중요하게는 환자의 허파가 크게 손상된다. 허파에 점성도가 높은 분비물이 축적되어 반복적인 감염이 일어나고 결국 허파조직이 파괴되어 어린 나이에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낭포성섬유증의 원인은 CFTR 유전자의 돌연변이이다. 유전자의 철자 하나가 잘못 쓰여진 것만으로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경우이다. 체내에 소금과 물의 수송에 문제가 일어나고 허파, 대장, 이자 분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낭포성섬유증을 위해 개발된 디자이너 약물은 이 문제를 분자수준에서 교정한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의학혁명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적절하게 해독된 당신의 DNA는 컴퓨터화된 의료기록의 일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어 건강의료 제공자들이 약물 처방, 진단 및 질병 예방에 대한 다양한 결정을 내릴 때 유용화게 사용할 것이다. 당신이 아프면, 개인에게 적절하게 선택가능한 치료법들-상당수가 인간 유전체의 새로운 이해로부터 유래한 치료법-이 존재하게 되어 몇 년전에 적용가능했던 것들보다 더욱 효율적이면서 부작용이나 독성은 적을 것이다. 이러한 많은 치료법들이 바로 알약 형태일 것이고 아주 일부는 유전자 차체가 약품 같은 유전자 치료일 것이다. 일부는 심지어 당신의 피부 세포나 혈액 세포를 때어내 당신의 몸이 필요로 하는 예를 들어 당뇨병에 필효한 이자 세포나 파킨슨병에 필요한 뇌세포로 전환시키는 세포치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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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결단 - 위기의 시대, 대통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닉 래곤, 함규진 / 미래의창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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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책의 성격을 한마디로 하자면 미국정치사이다. 이책의 내용은 미국정치사의 흐름을 바꾼 대통령의 결정을 13가지 골라 그 결정이 이루어진 시대적 배경과 그 배경에서 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고 어떻게 그 결정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는가를 케이스 스터디로 파고 든다.

 

실질적으로 미국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만든 링컨의 노예해방령이라든가 고립주의 국가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진로를 바꾸게 한 파나마운하 건설, 2차대전 참전, 원폭투하, 아폴로 계획, 인권법, 닉슨의 중국방문, 레이건의 악의 축 등등이 이책이 다루는 주제들이다. 모두 미국이란 국가의 방향을 바꾼 결정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후기에서 말하듯이 그런 결정적 순간들이 13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베트남 전쟁이라든가 닉슨의 경우 브레튼우즈 체제의 포기 같은 것들이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예이다, 그러나 이 얇은 책에서 미국사를 다 다룰 수는 없고 별 의미도 없다.

 

이책의 초점은 최고위 의사결정자로서 대통령이 정세를 어떻게 이해했었고 그 정세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가와 같이 짧은 지면에 재미있게 상황을 잘 간추려 요약하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그 대통령의 성격과 그의 치적등, 그 시대를 잘 요약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면서도 잘 간추려진 정보량으로도 상당하다.

 

여기서는 13가지 중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린든 존슨의 사례를 소개한다.

 

미국정치사에서 마키아벨리스트를 꼽으라면 아마도 린든 존슨이 가장 좋은 예이다.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 존슨은 의회정치의 진수를 배울 시간과 기회가 많앗다. “ 샘 레이번 하원의장이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같은 유명한 사람들을 멘토로 삼고 교훈을 얻어 정부의 각종 스위치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유리하게 누르고 당길 수 있는지에 대해 맛본 다음 존슨은 다듬어지지 않은 정치운영능력이 서서히 권력을 향한 강한 열망으로 변해가는 과정에 매료되었다.

 

정치가로서 그의 자산은 나이만이 아니었다. “나는 정치에 대해 하루 18시간 이상을 생각해본 적은 절대 없다. 잠은 자야 하니까.” 그의 말은 사실이엇다. “그는 그 누구보다 오직 한가지에만 몰두하던 사람이엇다.” 정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시간과 집중력은 그의 명성을 높여갔다. “존슨은 워싱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그보다 먼저 이곳에 20년 동안 있었던 사람들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존슨의 의원시절 초기를 설명하는 말이다.”

 

상원에 들어갔을 때 그는 원내대표가 되었고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지도자급에 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그 어떤 입법이나 합의도 존슨의 승인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젠하워 대통령조차도 국내문제에 관한 일을 처리하하기 위해서는 이 텍사스주 상원의원의 환심을 사야 했다.

 

존슨이 빠른 속도로 리더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나 운이 아니었다. 그는 상원에서의 힘은 단 한가지에 기초한다는 것을 빠르게 파악했다. 바로 인적관계였다. 존슨은 동료의원들의 이해관계, 욕망, 필요를 이해하는데 자신의 온힘을 쏟았다. 또한 그들의 상황과 관련된 모든 것에 통달함과 4동시에 자신을 그들의 구미에 맞게 조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각양각색으로 바꾸는 변신과 모방의 달인이 되었다. 북부출신의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는 남부출신 특유의 느릿한 말투가 딱 부러지고 사무적인 억양으로 바꿔었다. 이와 달리 서부출신 의원들과 대화할 때는 소탈하고 경쾌한 스타일로 말했다. 그러나 남부출신 동료의원들 앞에서 존슨은 그들과 다름없는 듬직한 동요의원이었다. 그는 그들 앞에서 깜둥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했고 서빙하던 흑인종업원을 종종 비하했다. 이런 일은 존슨이 이에 반감을 가진 다른 사람 앞에서는 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남은 자리는 이제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닿을 듯하면서 닿을 수 없는 자리엿다. 그가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린든 존슨의 정치경력은 두 가지 상충하는 요소가 만들어냈다. 하나는 남부출신이라는 태생적 요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의 정치력을 끝없이 넓히려는 욕망이다.

 

존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1964년 선거가 있기 전까지 20세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남부 야심가들에게 대통령직은 닿을 수는 없었으나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운 자리였다. 이유는 강력한 인종차별이었다. 대부분의 북부와 서부 사람들에게 남부의 인종차별과 야만적 폭력은 그것이 가진 폭력성만큼이나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남부출신들은 국가지도자 혹은 적어도 비중있는 인사가 될 자격이 없다는 선입견이 온 나라에 팽배했다.”

 

존슨 자신은 인종주의자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그는 연민어린 눈으로 흑인과 히스패닉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이것은 당시에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행동이었고 누군가의 눈에는 파격으로 비치기까지 햇다. 존슨이 소수자와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가졌던 진심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주민 대다수가 히스패닉인 지역에서 젊은 교사로 일하던 시절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교사들과 다르게 행동했다. 그 약속은 바로 멕시코계 미국인 아이들도 앵글로색슨계 백인 아이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엇다. ‘나는 그들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일깨우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을 앞날에 대한 열망, 관심, 신념으로 가득 채워주려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남부인이란 꼬리표는 위력적이엇다. 1956년 전당대회에서 존슨은 야심차게 대통령후보로 지명받고자 햇다. 그러나 북부대표들이 그에게 남부 후보란 꼬리표를 붙이자마자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교훈을 얻었다. “존슨은 이제 오직 자신의 이미지를 자유주의자들의 눈에 맞게 바꾸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엿던 민권법을 지지하는 일이엇다.”

 

야망의 첫걸음으로 그는 케네디의 러닝메이트로 나섰다. 8년 후에 대선후보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회는 더 빨리 왔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것이다.

 

케네디 임기 중이었던 “1963년 초 남부 흑인들의 권리에 무엇인가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압력은 절정에 달해있었다. 온 나라가 폭동, 소방호스, 경찰의 전투견, 곤봉, 휘두르는 모습들이 담긴 영상들로 몸살을 앓았다.”

 

뭔가 해야했고 케네디는 하기는 했다. 그러나 미지근한 조치만 취했다. “그는 민권법의 실패가 자신의 모든 입법의제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남부의 반발때문에) 재선에도 치명적이라는 사시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인이기에 존슨은 달라야 햇다. 대통령에 취임한 존슨에게 민권법 입법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의제였다. “이 시점부터 그는 완전히 민권법 이슈에 전념했다.” 다가올 1964년 선거에서 이기려면 그래야 했다.

 

존슨에겐 선거만이 아니라 자신이 후대에 어떻게 평가될지에 대한 생각 역시 큰 역할을 했다. ‘나는 링컨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는 대통령이 될거야!”

 

“’누군가는 전 세계에 과시할권력을 원하며 대통령 찬가를 듣습니다. 또 다른 이는 특권을 얻기 위해 권력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가난한 사람과 흑인에게 주기 위해 권력을 잡았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가식일까? 아니면 허심탄회하게 드러낸 진심일까? 아마 둘 모두 조금씩 들어있을 것이다., 존슨은 흑인차별이 존재하던 남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받아야 했던 끔찍한 차별에 항상 가슴 아파했다. 분명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이 존슨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가 왜 타협이 가능했음에도 당대 가장 해곃하기 어려운 문제에 모든 것을 걸었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마키아벨리적인 책략이 진정한 관심과 열정으로 주도권을 잡고 나라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직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대가는 컸다. “그는 앞으로 수십년 동안 민주당이 남부 선거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존슨의 생각은 적중했다. 수년 동안 남부의 주들은 민주당의 보루에서 공화당의 요새로 변해버렸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공화당의 신보수주의가 미국을 지배하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위대한 사회란 구호로 존슨이 대표했던 민주당의 뉴딜 연합은 “남부와 노조, 도시의 정치집단, 그리고 좌파지식인의 조합”(폴 크루그먼)이었다. 그러나 이 연합에서 남부가 이탈해 공화당의 거수기가 되면서 뉴딜연합은 무너졌고 공화당 지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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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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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바가바드기타의 해설서이다. 그러므로 이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전에 바가바드기타가 어떤 책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누구나 이름은 알지만 그 책이 무슨 책인지 아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바가바드기타는 마하바라타의 일부이다. 예기의 일부인 중용과 대학을 따로 떼어 독립된 책으로 읽는 것처럼 마하바라타 중 일부를 떼어 독립시킨 경우이다. 그러므로 바가바드기타를 이해하려면 원래 있었던 마하바라타란 책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일리아드, 오딧세이와 비교되는 마하바라타는 인도의 2대 서사시 중 하나이다. 이 서사시가 성립된 시기는 축의 시대가 끝나가던 기원전 500년경이다. “이야기의 천체 윤곽은 기원전 4세기말에 확립되었을 것이다. 축의 시대의 결정적 텍스트들이 사제와 출가자들의 저작인 반면 이 서사시는 크샤트리야 전사 계급의 에토스를 반영한다.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에 일어난 종교혁명의 에토스는 아힘사,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아직도 원시시대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시절의 기억이 남아있던 당시로선 전사들의 악의적인 폭력은 새로운 것이엇고 폭력과 함께 열린 영웅시대도 인간에겐 낯선 것이었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영웅시대 이전 아리아인들의 종교는 수렵채집인과 초기 농경민들의 종교가 그러했듯이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카렌 암스트롱) (아이슬러가 말하는) 협력의 원리가 지배하던 시절, 그리스 신화에서 말하는 황금의 시대였다. 그러나 스티브 테일러가 말하는 자아폭발 이후 협력의 원리는 지배의 원리로 바뀌었고 그들은 약탈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종교도 변했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아리아인 카우보이들은 싸우고 죽이고 강탈하면서 자신들이 무력으로 세계질서를 확립한 인드라를 비롯한 호전적인 데바들과 하나라고 느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검을 사랑햇다. 그들은 목축민이었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 생계를 유지했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아 사회의 영적 핵심이엇다. 그러나 희생제는 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과거 초원지대의 평화로운 제의는 가축 도둑의 위험한 생활을 반영하여 훨씬 호전적이고 경쟁적으로 변햇다. 아리아인의 희생제는 미국 북서부 원주민 부족들이 거행하는 포틀래치의식과 비슷해졋다. 부족민은 자신의 노획물을 과시하며 많은 짐승을 도살하여 호사스러운 희생잔치를 벌였다. 공동체가 필요 이상의 동물이나 작물을 축적하면 이런 잉여는 태워야 햇다. 늘 이동하는 유목민 집단이 잉여 생산물을 보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미 이 지역에 만연해있던 폭력이 희생제 때문에 더 증가했다. 희생제가 끝나면 라자는 가축이 남지 않았으므로 재산을 채우려고 다시 습격을 시작했다.” (카렌 암스트롱)

 

광란의 영웅시대가 지나고 아리인들도 정착해갔다. “경제는 약탈보다 농업생산물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 약탈과 대응 약탈이라는 파괴적 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데 점차 합의가 이루어졋던 것같다.” (카렌 암스트롱)그 합의는 기원전 9세기의 전례 개혁으로 나타났고 인도에서 축의 시대를 열었다. 전례개혁의 목적은 희생제에서 폭력을 없애는 것이엇다. 폭력에 대한 반감은 점차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발전한다.

 

악의적 폭력은 비대해진 자아에서 자라난다. 그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이다. “호메로스는 두 시에서 전쟁이 주는 흥분, 동지애의 기쁨, 아리아스테이아-전사가 승리의 흥분에 사로잡혀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되어 앞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상태-의 영광을 찬양한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멸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6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풍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리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카렌 암스트롱) 전형적인 자아폭발(이 개념에 대해선 자아폭발리뷰 참조)의 심리상태이다.

 

자아폭발 즉 타락의 결과로 권태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가 되었고 우리 자신이 비현실성에 대한 인식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권태는 우리의 경험에서 사실성을 제거하는 둔감화기제가 작동한 결과 발생한다. 이로 인해 세상은 어슴프레하고 절반만 사실인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실제로 아무 것도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고 흥미를 끌지도 못하며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잇는 것조차 없어 보인다. 그리고 비현실감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퍼져 나가는 끊임없는 생각의 수다의 결과이다. 전쟁은 이 권태와 비현실감을 덜어주려는 시도의 한 방법으로 발달했을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전쟁은 권태와 무목적성의 공포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오락 내지는 운동으로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으르도  중요해졌다. 이것이 왜 전쟁 발발이 특히 전장에 나가 싸워야 할 젊은 남성에게 그토록 자주 축하할 만한 일이엇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1차대전의 개전이 그에게 얼마나 활기를 띄게 했는지 정확히 묘사한다.” (스티브 테일러)

 

파스칼의 말마따나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머무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소위 영웅들이란 자들의 폭력은 그 불행의 증상이었다. 9세기 인도의 종교혁명은 그 불행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란 깨달음으로 발전한다. “그들은 분리된 자아인식을 초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자아가 초래하는 고통을 초월할 수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파니샤드가 주장하는 세계관은 타락한 세상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가정, 즉 우리가 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인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으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스티브 테일러)

 

우파니샤드에서 시작되어 붓다에서 절정에 이른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영웅의 가치들을 깡그리 부정했고 거짓된 자아의 파생물인 무의미한 폭력을 부정했다(아힘사). 영웅시대, 그리스사에선 암흑시대라 부르는 시절을 다루는 마하바라타 역시 그 시대에 대해 부정적이다. “서사시 내내 유디슈티라는 필사적으로 외친다. ‘크샤트리아의 다르마보다 더 악한 것은 없다.’ 전쟁은 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피의 희생제가 아니었다. 잔혹행위였다.” 호메로스와 달리 마하바라타의 저자는 영웅을 기리지 않는다. “이 서사시의 이야기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으며 불명예스러운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하바라타는 그 폭력의 시대, 불의의 시대가 어떻게 끝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주제로 한다. “영웅시대가 폭력적인 결말에 다가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희생제의로 질서를 회복해야 했다. 바로 전투가 이런 희생제였다.”(카렌 암스트롱)

 

종교 혁명 이후 전사들은 림보로 밀려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세상의 다르마에 묶여 있기 때문에 출가자나 요가 수행자들에게 감담할 수없었다. 그러나 밝은 베다 신앙은 자신들을 지탱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낡은 신앙은 때때로 악마적으로 보였다.” (카렌 암스트롱)

 

그렇다면 왕이나 전사는 공동체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거나 죽여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이행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아힘사라는 이상을 존중할 수 잇는가? 축의 시대의 종교혁명은 그들에게 곤혹스런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카렌 암스트롱) ‘마하바라타는 이 딜레마에 대한 고민이며 바가바드기타는 그 고민에 대한 크샤트리아 입장에서의 대답이었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질문과 함께 시작된다. 나는 왜 싸워야 하는가? “아르주나는 적군으로 대면한 친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스승들을 둘러본다. 그러고는 그들을 죽여야만 하는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아르주나의 그 결심이 왜 틀렸는가를 크리슈나 신이 설득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아르주나가 싸워야할 전쟁은 따지고 보면 흑백이 명확하지 않은 동족상잔의 지저분한 싸움이다. “! 왕권의 행복에 대한 탐욕 때문에 친족을 죽이려고 애쓰는 이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려고 우리가 마음먹었다니! 만약 이 전쟁에서 무기를 손에 든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이 무장하지 않은 채 저항도 하지 않는 저를 죽인다면 그것이 저에게는 더 편할 것입니다.”

아르주나는 무엇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면서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참된 기준을 알지 못한다고 절규한다.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가르침은 아르주나가 그 무너진 기준을 다시 세울 수 있게 하는 목적을 가질 뿐이다. 회색지대에 놓인 아르주나가 진실한 가르침을 절실하게 필요로하 는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대화는 그 기준에 대한 물음이자 대답이다.”

 

싸움은 상대가 있다. 영웅시대의 전사는 상대는 고려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영광과 자신이 얻을 전리품만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아르주나는 그 상대를 보아야만 했다. 자신의 사촌, 친구, 스승들이 상대였으니. 싸움의 상대, 타자를 발견했을 때 그는 묻는다. 왜 싸워야 하는가? 이 폭력의 의미는 무엇인가? “크리슈나여, 싸우기를 원하여 정렬한 저의 이 친족들을 보고 나니 제 사지는 맥 빠지고 입은 바싹 마르며 제 몸은 전율하고 털끝이 곤두섭니다. 손에서 간디바()가 미끄러져 떨어지고 살갗이 따끔따끔거리며 심지어 서 있을 수조차 없고 제 마음이 빙빙 도는 듯합니다.” 그에 대해 크리슈나가 한 조언의 요점은 마음이 문제란 것이다.

 

라즈니쉬의 해석은 이렇다. “무가치한 자신의 의무가 잘 실행된 타인의 의무보다 낫다로. 자신의 의무 속에서 죽는 것이 낫다오.’ 여기서 자신의 의무와 타인의 의무가 나온다. 아르주나는 무사이기 때문에 무사로서의 자기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기타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 자신에게 일깨우려는 노력으로 가득한 경전이다. 자신의 본성을 억누르지 말고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다. 크리슈나는 그에게 자기 본성이 무엇인지 계속 상기하면서 본성을 따르는 행동이 무한한 자유를 준다고 가르친다.”

 

아힘사는 보편윤리일 뿐이다. “비폭력은 비본적인 것일 뿐 중요한 것은 아니다. 크리슈나는 보편적인 윤리보다 계급의 윤리가 우선된다고 가르친다. 기타에 나타나는 고민은 이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 그런데 아르주나는 무사가 아닌가. 무사는 반드시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야만 한다. 무사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크리슈나는 이 고민에 대해 확실한 해결책을 내놓는다. 아르주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무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사의 폭력은 업을 쌓는 것일 필요가 없다. 마음의 문제란 말이다. 여기서 기타는 3가지 요가를 제시한다. “기타에서 요가한 정신을 수련하여 보다 더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사람의 길을 가리킨다. 그 세가지 요가는 지혜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의 요가로 불린다.” 지혜의 요가는 요가학파나 불교의 승려들이 하는 기존의 요가를 말한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기타에서 새롭게 제시된다.

 

행위의 요가란 행위를 하되 행위의 결과에 신경 쓰지 말고 행위 자체에 몰두하는것이다. 이것이 기타의 핵심이다. “기타는 행위를 추종하는 것도 아니고 행위를 배척하는 것도 아닌 행위를 추종하면서도 배척하는 새로운 대안을 가르친다. 1의 길도 아니요 제2의 길도 아닌 제3의 길을 가르친다. 1의 길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2의 길은 속세를 떠난 승려들처럼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길이다. 그리고 제3의 길은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혼합한 길이다. ‘그대의 특권은 행위 자체에 있을 뿐 전혀 결과들에 있지 않다오. 행위의 결과를 행위의 수단으로 삼지 마시오,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시오. 3의 길은 행위를 하면서도 행위의 결과를 얻지 않는 길이다. 일상인으로서 이 사회를 유지한채 살면서 마치 고행자처럼 절제하는 삶의 길이다. 아르주나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싸우려고 하니 친족을 마구잡이로 죽여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고 하니 무사의 의무를 져버려야 한다. 이에 크리슈나는 무척 간단한 해법을 제공하는데 즉 싸우면서 싸우지 않는 법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엉터리가 아니라 현실에서 충분히 실현가능한 방법이다. 이 방법이 행위의 요가이다. ‘행위에서 무행위를 볼 수 있고 무행위에서 행위를 볼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지혜로우며 제어된 채로 모든 행위를 한다오.’ 인도의 역사에서 행위와 깨달음은 앙숙 사이였다. 둘은 결코 어울릴 수 없었다. 경이롭게도 기타는 이 둘을 절묘하게 화해했다. 행위의 요가는 행위의 구출이었ㅎ고 동시에 깨달음의 확장이엇다.”

 

좋다. 그러나 행위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필요한 것이 사랑의 요가이다. “신이 행위를 하는 이유가 되고 근거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 모든 행위의 이유를 따지고 따지면 마지막에 신이 있다는 것이다. 신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이유이기에 항상 신을 생각하면서 행위를 하라.” 이 대목은 힌두교의 혁명이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등장이 획기적이었던 것처럼 힌두료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획기적이다. 인도의 종교사에서 붓다의 등장이 한번의 종교개혁이었다면 기타에서 크리슈나의 등장은 또 한번의 종교개력이었다. 인도고대종교에 대항하여 붓다가 영원불멸의 형이상학을 무너뜨렸다면 크리슈나는 그 속물스러운 세속의 신학을 무너뜨렸다. 무엇에 대한 개혁일까? 고대 인도의 브라흐만 종교에 대한 개혁이었다. 고대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제식이나 제의에 미쳐있었다. 그들은 제식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제식을 통해 신의 축복을 얻을 수 있고 비가 오게 할 수있고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다. 제식만능주의의 시대였다. 그래서 그들은 속물스러웠다.”

 

그러나 기타에서부터 새로운 풍경이 등장한다. 하나. 여러 신을 숭배하지 않고 최고신만ㅁ을 숭배한다.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가 그 대상이다. . 최고신은 인간에게 공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 . 최고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진심어린 마음으로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 즉 사랑뿐이다. 인간이 신에게 바쳐야 하는 것은 오로지 감정 뿐이다. 브라흐만 종교에서 사제들만 독점하던 그 어려운 언어는 이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과 감정의 언어로 대체되었다.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말한다. 먼저 신에게 지고한 사랑을 행하는 자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궁극의 비밀을 알려주는 자이다. 궁극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크리슈나에게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수있다는 것이다.”

 

행위의 요가에서는 현재 내가 하는 행위가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고민하지 말라고 한다. ? 미래의 결과는 나의 몫이 아니고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을 생각하면서 현재의 행위에 충실하고 있는 나의 삶은 그 자체로 신에게 구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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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전쟁 - 중국 vs 미국,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프랑수아 랑글레 지음, 이세진 옮김 / 소와당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에피소드가 두 가지 잇다. 하나는 (2008) 8월초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벌인 짧은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9 15일 리먼 브러더스 파산이다.” 두 에피소드는 탈냉전 시대의 종식을 보여준다.” (캘리니코스) 두 에피소드 중 리먼브러더스 파산은 이해하기 쉽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무너졌다는데는 별다른 이의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와 그루지야의 전쟁은 설명이 필요하다.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탈냉전시대는 미국 헤게모니의 정점처럼 보였다. 그 시절 미국의 세계전략 중 하나는 러시아를 봉쇄해 다시는 과거와 같은 슈퍼파워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러시아는 다시 부활했다. 물론 러시아가 옛 소련이나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옛 제국의 영역에서 러시아 중심의 제도적 구조와 지리적 관계구조를 새로 창출하고 있다는 말이 옳다. 세계수준에서 러시아는 이 새로운 지역적 파워를 이용해 미국이 우위를 잃고 있는 세계체제에서 일정한 구실을 하고 싶어한다.”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은 러시아의 그런 전략이 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뒷배를 봐주던 그루지야에 전쟁을 걸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쟁은 미국의 권력이 쇠퇴하는 훨씬 더 장기적인 지정학적 과정의 한 단계라 캘리니코스는 말한다.

 

부시 2세 정부가 추진했던 세계적 프라젝트를 논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 프라젝트의 재앙적 실패야말로 여러모로 오늘날의 세계정세를 만든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부시 2세의 프라젝트는 부시 1세와 빌 클린턴 정부의 노선을 더 과격하게 추진한 것이라 이해람이 가장 적절하다. 부시 부자와 큰린턴은 모두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이 되긴 했지만 세계의 경제력 분포가 바뀌면서 전보다 미국경제의 비중이 축소되고 동아시아의 비중이 확대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시 부자와 큰린턴 모두 2차대전 이후 확립된 국제 공조체제를 유지, 확대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굳히려 했다. 그러나 부시 2세정부는 미국의 양대 비교우위인 펜타곤과 달러의 힘을 부시 1세나 클린턴 정부 때보다 더 일방적이고 공격적으로 휘둘렀다.” (캘리니코스)

 

달러는 이번 위기로 무너졌다. 그리고 펜타곤도 이라크에서 무너졌다. “프리드먼이 쌍둥이 위기라 부른 2008년의 위기 때문에 부시의 프라젝트는 더욱 엉망이 돼 버렸다. 우선 부시 정부는 캅카스 지역에서 러시아를 도발해 또 다른 역풍을 자초했다. 냉전 종식 후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한가지 핵심은 러시아가 약해진 것을 틈타 유럽연합과 나토를 동유럽으로 확장해 러시아를 포위하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 깊숙이 확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전략은 그루지아에서 러시아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군사력의 한꼐를 보여주는 징후일 뿐 아니라 지난 70년간 미국이 구축하고 점진적으로 확장해온 초국적 자유자본주의공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징후로 읽혔다. 지금은 오직 미국만이 진정한 글로벌 파워다. 그러나 그 때문에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자신의 역량을 더 넓게 분산해야 하고 폴 케네디가 제국의 과잉확장이라 부른 위험에 노출되었다. 러시아는 바로 미국의 과잉확장위기를 기회로 활용할 수 있었다. 금융위기로 미국의 헤게모니는 더욱 금이 갔다. 그것은 이라크의 재앙 이후 또 하나의 엄청난 상징적 타격이다. 잘 나간다던 영미식 자본주의가 별안간 자폭하면서 세계경제까지 함께 끌어내렷으니 말이다.” (캘리니코스)

 

금융위기는 더 직접적으로 미국의 패권을 약화시켰다. 앞으로 미국정부는 경제위기에 대처하느라 정치적, 경제적 자원을 소진하게 될 것이고 다른 문데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 (캘리니코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는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 왜 일까? “위기가 닥쳤을 때 다른 경제체제들이 대부분 미국보다 훨씬 더 큰 타격을 입엇기 때문이다. 미국을 가장 소리 높여 비난하던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는 완전히 찌그러졌다.” (닐 퍼거슨) 미국이 약해졌지만 그 약해진 미국조차 상대할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은 앞으로 수십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경제대국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캘리니코스) 미국은 과거 그들의 경쟁우위를 보장해주엇던 것을 아직 잃지 않았다. 그 힘 덕분에 미국은 19세기 말에 비스마르크가 건설한 독일처럼 될 잠재역이 있다. 당시 독일은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서로 맺고 잇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를 각각의 주요 국가와 맺은 유럽의 정직한 중재자였다. 말하자면 독일은 유럽 국가 체제의 허브였다.” (자카리아)

 

자카리아의 말은 미국은 경제위기로 약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국가 체제 속에서 극점을 차지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관리되는 강대국들의 합창곡을 계속 지휘할 수 있을” (캘리니코스)이란 말이다. 그러나 그 합창곡은 갈수록 불협화음이 될 공산이 크다. 그 이유는 미국이 중심에 있었던 그 허브의 그물망이 찢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캘리니코스 그루지야 사태를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만 그 그물망을 찢고 나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이다. 그리고 그것은 충돌의 전주곡이라 이책의 저자는 본다.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조짐은 중국에 엄청난 여파를 남겼다. 바로 중국이 자신의 힘을 깨닫는 계기가 된 것이다. (2010년 기준) 2년전부터 중국은 모든 영역에서 오만하게 자국의 힘을 시험해보고 있다. 영유권 분쟁 같은 쓸데없는 위신 세우기에 힘들 쏟는 것도 그 예이다. “중국은 세계경제위기를 계기로 자신의 패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확신은 과거의 패권국이나 패권국 후보들과는 심리적 배경이 아주 다르다고 저자는 본다. “중국인들에게 지금의 성공은 단순한 발전이 아니라 일종의 복수다. 200년간 세계최고의 자리를 감히 찬탈했던 서양인들에 대한 복수이다. 오늘날 중국의 성공은 민족주의적 상처를 달래기는커녕 더욱더 그 상처를 자극한다. 그러한 성곡이 강대국이 되겠다는 의지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과거에 누렸던 번영의 공백기는 이 정도 성공에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신흥강국들이 그렇듯 중국도 현재 세계의 패권을 쥔 미국이 자신의 앞길에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마땅히 누려야 할 위상을 누리고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하게 미국이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9세기 말에 독일이 영국이라는 당시의 강대국에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포위 컴플랙스는 평범한 중국인뿐 아니라 중국지도자들에게도 있다.”

 

저자는 그 콤플렉스가 피행망상이라 치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 뿌리는 미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40년전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중미수교 40여년은 ‘9’로 끝나는 해마다 조금씩 더 복잡하고도 애매한 관계로 발전해왔다. 상대에 대한 감탄과 멸시, 상호필요와 성가신 의존성으로 이루어진 관계그 관계의 시작은 서로의 필요 때문에 시작되었다.

 

베트남에서 발을 뺄 궁리만 하던 닉슨에게 중국은 좋은 카드가 되어 주었다. 하노이를 지원하는 소련을 고립시켜 소련에게 타격을 주고 하노이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협상을 시작할 수 잇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은 좋은 카드였다. 점점 사이가 나빠지던 소련 대신 손을 잡을 상대가 되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베이징은 미국과의 화해에서 유익한 교훈들을 끌어냈다. 우선 중국은 미국과의 알력 관계를 경험하면서 중국 밖의 세상을 다루는 법을 익혔다. 미국과의 관계는 중국에게 불리할 것이 없었다. 닉슨과 키신저의 태도는 중국인들에게 중국없이는 강대국도 제구실을 할 수없다는 생각을 굳혀주었다. 심지어 미국 대통령은 자기 나라에서 재선에 성공하기 위해 중국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중국은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덩샤오핑은 미국의 기술력과 대기업들이 필요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중미관계는 그 성격 자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중국입장에서나 미국입장에서나 소련이라는 곰을 궁지에 몰기 위해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적 계산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 관계는 중국입장에서 자존심을 끊임없이 건드려 댔다. 앞에선 중국만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뒤로는 반역도당, 대만에 무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선거때만 되면 베이징에 날아와 사진을 찍고 돌아간다. 만리장성에 찍은 사진은 세계의 리더라는 이미지를 팔아 표를 사는데 그만이기 때문이다. 닉슨도 그랫고 카터도 그랬으며 중국을 빨갱이라 욕하던 레이건도 그랬다.

 

정말 우끼는 건 매년 최혜국대우를 갱신할 때이다. “중국의 대미 수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미국의 최혜국 대우연례 갱신은 봄마다 빠지지 않는 코미디엿다. 이 코미디의 1막은 클린턴이 위협을 하고 미 의회가 적의를 드러내면 중국이 초조해한다. 2막에 들어가면 로비가 기승을 부린다. 1973년에 중국에 진출한 미국 주요기업들의 모임으로 설립된 미중무역전국위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단체들이 알력을 행사한다. 반체제 투사 몇 명 감싸겠다고 중국시장을 막아버렸다가는 미국 재계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있다고 경고를 하면서 말이다. 3막에 들어가면 미국 행정부가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한해 더 갱신해주고 그들의 후퇴를 감추기 위해 중국인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 식이다. 그러나 현실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을 십분 활용하는 미국기업들에게 클린턴이 그러한 특혜를 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처음 수교를 할 때만 해도 중국은 강대국으로 미국을 대우해주었고 미국도 중국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갈수록 미국은 중국을 아이 다루듯 인권이 어떠느니 설교를 늘어놓는다. 말만 그렇게 하는게 아니다. 은하호 사건같이 남의 상선을 불법으로 나포하고 나서는 자신들이 주장하는 혐의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 밝혀져도 사과하나 없다. 힘 없는 것이 죄다.

 

은하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새로운 두려움을 기정사실화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독불장군 노릇을 하며 도발을 계속하리라는 두려움이엇다. 물론 소련의 붕괴로 중국은 무거운 부담 하나를 덜었다. 그러나 소련이 사라지자 천하는 미국의 것이 되었다. 이미 2년전에도 워싱턴은 걸프전을 자국의 이익에 이용한 바 있었다. 경제분야에서 중국은 이제 자국의 힘을 확신하고 상승국면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외교분야에서 중국인들은 유일한 강대국, 그들이 전략적 수단을 써볼 여지가 없는 대상을 상대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혼란에 빠진 지금 미국을 상대하기 위해 누구에게 기대며 누구와 동맹을 맺는단 말인가? 자유주의 질서와 미국의 지배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서방사회를 안심시킨 반면 중국을 더욱 불안으로 몰아넣었다.”

 

1999년 베오그라드 중국대사관을 오폭한 사건은 중국을 드디어 폭발하게 햇다. “베이징에서 반미시위가 일어났다. 천안문 민주화운동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였다. 1949년 이래 중국의 민족주의가 이처럼 대대적으로 폭발하기는 처음이엇다. 중국의 반미운동은 중국이 서양 특히 미국에 얼마나 깊은 원한을 품고 잇는지 잘 보여주었다.” 그 사건은 중국인들의 상반된 두 감정, 즉 치욕의 한 세기에서 얻은 열등감과 위대한 제국의 유구한 역사에 뿌리내린 극도의 오만함을 자극했다.”

 

이후 두 감정 중 오만함이 더 두드러지기 시작한다. “200년대 초 중국은 과거 1850년대에 이미 이룩했던 높은 생활수준을 되찾는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20%수준이었?. 중국 역사상 생활수준이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때는 1975년 문화대혁명시기였는데 당시 중국의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서양의 7.5%에 불과했다. 이러한 경제성과는 중대한 전략적 변화, 특히 미국과의 관계에서의 입장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중국은 자율권을 얻엇다. 더욱 결정적인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있다. 중국은 서양의 경제모형과는 다르지만 효율성이 결코 뒤떨이지 않는 경제모형을 만들어냈다는 자각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경제적 상승은 워싱턴 합의를 활용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초에 자국의 힘과 성공에 대한 중국의 자각은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이러한 계시와 자기에게 투사하는 이미지 덕분에 중국은 전방위적 외교에 나서게 된다. 이때 베이징은 중국의 약진이 불어일으키는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해 서양을 향한 새로운 컨셉의 선전공작을 편다. 화평굴기 즉 평화적 부상론이 바로 그것이다. 그 메시지의 의미는 명백하다. ‘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지 말라. 우리가 언제나 차지했던 그 위상을 되찾게 되더라도 세계의 안정을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관계는 2008년 역전되는 듯했다. “중국은 미국을 호되게 후려친 글로벌경제위기를 희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이 불황은 중국이 세계무대에 나서서 미국을 무릎 꿇릴 기회였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미국이 그동안 지은 죄대로 벌을 받는다 여겼다.” 그러나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니었다.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서 중국도 나름 호되게 당해야 햇다. 이후 중국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달라진다. 더 이상 겁낼 필요도 없고 덕분에 피까지 봤으니 할말은 하고 살아야 했다.

 

2009“4월 중순 중국중앙은행자 저유샤오촨이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는 1971년 이후로 계속 변동하고 잇는 달러를 기분으로 하는 현 통화체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저우샤호촨의 발언은 국제 금융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중미관계가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미국의 세계경제 지배를 중국이라는 도전자가 정면으로 반박했다고 봐야 한다.” 그의 발언의 진의는 이런 것이었다. “달러화 때문에 자기네들이 가진 금융채권의 위험도가 커지고 그렇기 때문에 달러를 국제기준통화로 삼는 체제를 지지할 수 없다.” 다들 하는 생각이지만 중국은 이젠 그럴 말을 해도 될 때라고 본 것이다. 중국의 도발은 그외에도 여러 외교채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오바마는 집에 난 불 때문에 중국과 불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모른 척 넘어가기만 했다.

 

미국과 중국은 충돌할 수 밖에 없는가? 현재로선 터무니 없다. 군사력이란 체급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국방비는 5년마다 두배로 불어나고 잇다. 베이징의 국방예산이 워싱턴의 국방예산을 뛰어넘는데는 10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2020년에는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 해도 미국의 힘으로 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은 엄청난 적자의 제약에 매여 있으므로 중국의 전진을 저지하는데 필요한 투자가 부담스럽다.”

 

물론 체급이 같아진다고 싸우란 법은 없다. 더군다나 전통적으로 중국은 정복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역사를 살펴보건대 단기간에 군비를 확충하고서 정작 그 군비를 사용하지 않었던 나라는 없다. 나라가 닫혀 있을 때에는 자국의 안보에만 집중했다. 대만과 티벳에 대한 집착은 포위 콤플렉스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은 20년전부터 크게 개방되엇고 중국은 자국 영토를 둘러싼 광대한 바다를, 석유와 원자재가 이동하는 전략적 경로를, 그리고 이러한 성장의 귀중한 동력을 공급하는 국가들을 주시할 수 밖에 없다. 중국이 개방을 하기 전에는 이 나라의 주요한 이익지역은 대만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이 지역은 동심원을 그리며 크게 확장되엇다. 중국이 자국에 없지만 꼭 필요한 상품의 수입에 의존하면 할수록 그 지역은 더욱 확장될 것이다. 해외에서 취득하는 광산, 기업, 인프라등의 자산이 늘어날수록 그러한 자산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미국도 자기네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야 할 때에는 폭력을 동우너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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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남경태 옮김 / 예지(Wisdom)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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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많은 고고학자들은 기후변동이 인간사회를 변화시켯다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기후변동이 농경이나 문명 같은 중대한 발전의 주요한 원인이라 보는 환경결정론은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금기엿다.” 결정론은 언제나 극단성 때문에 오류로 증명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환경이, 기후변화가 무시되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생존을 위한 농경의 역학이다. 12천여년전 농경이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춥고, 습하고,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가 교대되는 주기 속에 살아왔다. 생존을 좌우하는 것은 농작물의 생산량과 다음해에 파종할 씨앗의 양이었다.”

 

인간도 먹어야 사는 동물이다. 인간 역시 먹이의 증감에 따라 인구가 결정된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먹이의 증감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기후의 변동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기후의 변동이 식량의 증감에 영향을 주는 정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능력을 취약성의 정도라 본다.

 

나는 인간이 장단기적 기후변동에 점점 더 취약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기후변동에 대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비용도 커졌다. 수만년 동안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ㅆ고 모두 수렵과 야생식물의 채집으로 살았다. 생존하려면 기동력이 더 뛰어나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했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후의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를테면 무리 전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든가 무리의 일부를 나누어 다른 지역으로 보낸다든가 원치 않는 음식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취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농업이 시작된 것 자체가 기후변화와 취약성의 정도를 높이는 사이클 때문이었고 역사는 그 사이클이 계속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농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중동지역이다.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3000년 이후 서남아시아는 온난한 환경으로 바뀌면서 도토리를 품은 참나무 숲이 크게 늘었다.” 식용식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임시 근거지에 살지 않고 제법 큰 규모의 영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도토리와 피스타치오를 많이 수확했다. 그 두 견관는 무엇보다 저장이 용이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는 한 장소에서 오랜기간 머물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풍요에는 대가가 따랐다.” 도토리를 먹을 수 있게 가공하는데 막대한 노동력을 지출해야 했다. 일곱시간을 투여한 뒤에야 가족이 며칠 먹을 음식재료를 만들 수 있었다. 도토리가 주식이 되면서 공동체의 생활이 달라졌다.” 긴 노동을 할 정주지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식량공급이 안정적이 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소폭의 기후변동에도 매우 취약한 한계환경을 유발했다. 그들은 환경적 취약성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기원전 11000년경 마침내 심한 가뭄이 닥쳤다. 북미에서 빙하가 녹은 민물(아가시호)이 대량으로 래브라도 해로 방출되엇다. “아가시의 녹은 물은 명분 농도가 짙은 멕시코 만류의 위로 떠올라 일시적으로 뚜껑처럼 작용하면서 난류가 식어 가라앉는 것을 막았다.” 대서양 순환이 멈춘 것이다. “추위는 1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1천년의 기간을 영거 드리아스기라 부른다. 북쪽이 다시 빙하로 변하고 대서양 순환이 차단되자 멀리 서남아시아에 즉각 기후변화가 일어났다.

마지막 빙하기처럼 차가운 역선풍이 다시 불었다. 서남아시아는 1천년동안 길고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리고 숲이 사라졌다.그러나 사회적 유연성과 기동성의 고전적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오랜기간 평안하게 살았던 결과 촌락 인구는 300~4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인구 밀도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시절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영구정착지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식량사정만 더 악화될 따름이엇다.” 많은 촌락이 버려졌다.

 

물론 처음부터 버려진 것은 아니다. 뭔가 방법을 찾으려 했고 기원전 10000년경부터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식물을 재배하여 수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터키 동부에서 외알밀의 재배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닭과 나비나물도 마찬가지엿다. 그밖에 에머밀, 완두콩, 렌즈콩, 아마 등도 아주 짧은 기간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그정도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엔 부족했다. 사람들은 흩어졋다.

 

흩어진 곳에서 ,들은 야생 식물의 채집을 보충하기 위해 재배 실험을 계속했을 것이다. 몇 세대가 지나자 경작된 밭의 산출량이 늘기 시작했고 이 임시 전략은 곧 온전한 농경으로 변모했다. 영거 드리아스기가 끝나고 온난화가 재개되자 농경은 생활의 기둥이 되었다. 이윽고 기원전 9500년경 버려졌던 언덕에 새롭고 전혀 다른 거주지가 탄생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도 돌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농부가 되었기 때문이다.농업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농업과 함께 취약성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경작 가능한 밭, 습지, 사구가 많으나 대부분은 염분이 섞인 황량한 사막이다. 강우량은 거의 없다. 자연의 극단적인 힘들이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 모진 겨울바람, 사나운 폭풍, 게다가 강물이 범람해 삽시간에 촌락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지역이 그렇지는 않았다. ‘기원전 10000~기원전 4000년에 이 지역은 여름 기온이 높았고 강우량도 많았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강우량은 지금보다 25~30% 많았을 것이다. 강우량의 대부분은 여름 몬순에서 나왔는데 강우의 상당 부분이 증발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습기의 양은 일곱 배나 많았다. 소빙하기가 끝나고 갑자기 온난화가 재개되자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목축을 병행하는 농경사회들이 퍼져나갔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최초의 거주지가 등장한 것은 소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5800년경이었다.”이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의 삶은 “1천여년 동안 작고 분산된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800년경 기후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실은 1천년전부터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지역에 있었던 추세였다. 지구표면의 일사량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서남아시아 몬순의 여름 강우량이 줄었고 경로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는 양도 줄었을 뿐 아니라 시기도 늦게 내리기 시작해 빨리 그쳤다. 여름의 범람은 수학이 끝난 뒤에 발생했고 규모도 훨씬 작아졌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우량에 상당히 의존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관개시설에 의존해야 했다. 잉여식량은 없어졋고 오히려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농업이 시작되기 전이나 농업이 막 시작된 무렵이라면 방법이 있었다. 이동하는 것이다. 실제 메소포타미아인들도 그렇게 대응했다. 농업을 버리고 유목민이 되거나 고지대로 옮겨가 농업을 계속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눌러앉아 수렵채집을 농업과 병행했다. 그러나 농업덕분에 늘어난 인구가 너무 많았다. 성공이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해법은 사회조직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1년 내내 관개가 필요했다. 수로를 통해 귀중한 물을 주변의 사막으로 돌릴 수 있는 위치의 더 큰 도시나 마을로 전략적이고도 현명한 이주를 감행했다. 우르처럼 성장하는 도시는 인간생활의 요충지가 되었다. 관개시설은 엄중하게 감독했다. 새로운 유형의 관리가 신전의 창고에 배치되어 농작물 생산량과 곡식 비축량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때까지 물공급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관심사였으나 도시의 힘이 강력해짐에 따라 사정도 달라졌다. 수확기가 되면 신체건강한 모든 사람이 밭에 나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농작물을 수확했다. 많은 관리들이 수확된 농작물을 세금으로 거두어 (가뭄에 대비해) 정부 식량창고에 비축했다. 사람들은 점차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 대가로 곡식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기후사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그러나 사회조직을 바꾼 대응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기원전 3100년경 남부 도시들은 세계최초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수메르 문명은 경쟁이 심한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었는데 각도시들은 고도 조직된 후배지를 거느리고 이웃한 도시들과 영토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각 도시들은 관개수로를 단단히 방비했다.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었다. 도시가 생존의 수단이 되자 전역에서 도시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기원전 2800년 무렵에는 수메르인의 80%이상이 도시에 살았다.”

 

도시화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었고 그것은 성공했다. 그러나 한가지를 해결했지만 동시에 취약성의 수준을 더 높였다.

 

기원전 2200년경 북쪽 멀리에서 대규모 화산분출이 일어났다. 지중해 동부의 방대한 지역에 그뒤 278년동안 지속될 가뭄이 시작된 시기였다. 아나톨리아 고지에는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강은 더 이상 범람하지 않았다. 가뭄은 비옥했던 하부르 북부 평원을 사막으로 바꿔놓았다.”

 

도시화는 이런 수준의 변화에는 견디지 못했다. “농업경제는 비틀거리다 이내 붕괴했다. 기원전 2000년경 도시에 사는 수메르인의 수는 50%를 밑돌았다.”

 

생존에 중요한 것은 규모다. 석기 시대의 소규모 무리는 새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여 그곳에 최대한 머무는 방식으로 가뭄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농경촌락은 이웃 촌락에서 비상식량을 얻거나 교역 관계를 통해 알려진 물사정이 나은 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르 같은 대도시는 혹독한 가뭄의 파급효과로 인해 꼼짝없이 대규모 탈주와 기근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었던 탓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소규모 재앙은 거뜬히 방어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으나 대규모 재앙에 대해서는 오히려 취약성이 더 커졌다.”

 

취약성의 사이클은 판돈이 더 올라가 로마시대에 재현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 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저자는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 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 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로마의 장점은 3가지, 즉 잘 조직된 군대. 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 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 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 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잠재적 격변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더구나 그 위험성은 지구를 온난하게 하고 극단적 기후변동의 가능성을 증대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 때문에 더욱 커졌다. 만약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으면서 그 많은 물이 북대서양으로 흘러들어 영거 드리아스기처럼 멕시코 만류가 갑자기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유럽은 수십년쯤 지나면 북극권 기후가 되지 않을까? 기후는 문명의 형성을 돕지만 자비로운 방식으로 돕지는 않는다. 충적세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덕은 인간 사회를 압박하여 적응하거나 사멸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10000년경 영거 드리아스기에 서남아시아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경우처럼 성공적인 적응도 있었지만 가뭄으로 멸망한 티와나쿠처럼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예전의 많은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드물게 일어나는 대규모의 재앙에 취약하며 단기적 가뭄과 이례적인 호우 같은 작고 평범한 압박에 대처하는 능력만 나아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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