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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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적 어버이를 장례 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버이가 죽자 바로 들어 골짜기에 버렸다. 다른 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이리가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빨아먹고 있었다. 이마에 진땀이 나고 흘겨는 보나 차마 바로 보지는 못했다. 땀이 난 것은 다른 사람의 눈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의 중심이 얼굴과 눈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와 흙과 풀로 덮었다” (맹자, 등문공 )

 

예의 하나인 장례가 어떻게 생겼을가에 대한 맹자의 추리이다. 맹자의 상상이 사실일리는 없고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맹자의 이야기가 그렇듯 이 이야기에는 묘한 울림이 있다. “맹자가 말하는 것처럼 장례가 없던, 장례라는 관념 자체가 없던 옛사람들 마음의 구조는 어떠했을까? 부모의 방치된 시신을 보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우리 주변의 동물들이 지금도 그런 것처럼,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마에 땀이 나고 차마 정면으로는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분명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순간, 엄청난 충격, 혼란, 죄의식이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살아 있는 부모가 바로 곁에 느껴졌을 것이다. 들판 쑥덩굴에 버렸던 그 몸뚱이, 죽은 어미자기도 모르게 이마와 등줄기와 손에 진땀이 흐르고 괴로웠을 것이다. 갑자기 내면에 발생한 이상한 감정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죽은 어미? 죽은 아비? 어디에? 분명히 죽고 없는 부모가 여기 이곳에 느껴진다. 기억의 단순한 잔영이 아니다. 땀과 충격, 희미한 죄의식이 그를 흔들었다. 감관적, 물리적 세계 밖의 또 다른 차원이 인간의 의식 안에 불쑥 출현한 것이다. 맹자의 땀 이야기는 종교성의 근원을 생생한 몸의 반응으로 설명한 아주 특출한 사례이다. 우리 도덕의 기원은 몸에서 우리 몸의 땀에서 시작되었다. 축의 시대에 탄생한 보편윤리, 세계종교의 공통적 핵심은 무엇인가? 그 바탕에는 맹자의 땀에서 시작된 종교성의 원형이 있다. 그 종교성은 감관세계, 물질세계를 상대화햇다.” (김상준)

 

유교가 종교인 이유는 초월에 있다. 지금 여기에선 죽은 어미를 흙으로 덮어주어야 할 어떤 이유도 나오지 않는다. 장례의 이유는 지금 여기를 넘어선 초월, ()에서만이 만들어진다. 물론 초월은, 성은 축의 시대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성의 탄생이 보편윤리, 세계종교를 출현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 카렌 암스트롱이 말하듯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의 공통점은 폭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기독교의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한다.”

 

축의 시대에 등장한 세계종교들에는 모두 그 당시 세상에 만연했던 폭력의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을 기독교는 사랑으로 불교는 자비로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유교를 정치종교로 만들었다.

 

맹자의 땀은 철저한 타자, 가고 없는 존재자에 대한 윤리적 부채감이다. 여기서 폭력과 전쟁에 대 한 철저한 반대가 나온다. 폭력의 주인인 군주에 결연한 비판과 견제의 마음이다. 아울러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강직한 태도다. 천하게 바르지 않게 될까 걱정하는 天下爲公의 마음, 우환의식이다. 마음에 그치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지만 않았다. 현실의 중앙에서 천하위공을 실현하려고 했다. 여기에 유교의 핵심이 있다. 군주와 대면하고 국가의 중심으로 들어갔다. 유교는 국가의 폭력성을 밑으로부터 통어하려 했다. 국가의 주인인 군주를 윤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군주주권을 내파 즉 안으로부터 해체했다.” 그 내파의 논리가 성왕론이었다.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윺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이다.” (김상준)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러한 인식에는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부당하다는 의식 자체에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옥이라는 초현세적 계기를 구성하여 현세의 불완전성을 초월적 논리 틀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다. 유교에서 이러한 초월적 조정 놀리는 어디에 있는가? 유교는 이 문제를 두가지 축으로 풀었다. 첫째는 성인 군주라는 이념의 창출이고 둘째는 예의 강조다.” (김상준)

 

유학자는 유교란 정치종교의 사제였다.”겉으로 보면 유교에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교회가 없고 타 종교에 비할 사제 신문이 없는 것같다. 그러나 유교의 그러한 특성들이 오히려 정치와 윤리(종교)간의 갈등을 유교정치 내부로 끌어들여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유교는 정치와 윤리 간의 갈등이 유독 강했던 특이한 정치종교였다. 유교정치에서 고도로 발전한 간쟁의 전통은 강력한 정치적 윤리종교로서의 유교의 특징을 잘 표현한다. 정치적 행위 자체 특히 군주에게 윤리적 이상을 간하는 정치 행위에 종교적 사명을 걸었던 종교는 유교가 유일하다. 죽음을 불사했던 유교 간쟁의 전통은 종교적 현상으로 다만 고도의 정치적 윤리종교로서 유교를 이해할 때만 설명될 수 있다. 유교에서는 유자가 타 종교의 사제 역할을 수행했다.” (김상준)

 

이책은 조선에서 그 사제 역할을 했던 선비에 대한 품인론이다. 선비를 평가하려면 그들이 목숨을 걸었던 그 신념체계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그들의 신념인 유교는 당대의 보편적 세계관이기도 했으므로 선비를 평가할 때 적절한 기준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비들의 성적표는 낙제라 저자는 말한다.

 

유교를 국시로 내건 조선의 건국은 국가의 폭력, 전쟁과 착취를 뿌리뽑자는 이상에 따랐고 한국 최초의, 그리고 아마도 세계사에 유래가 드문 이념에 근거한 혁명이었다. 그 혁명은 유교의 말로 하자면 천하위공의 실현이 그 목적이었다. 그 혁명을 주도한 유학자들, “선비는 사회의 주도층으로서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느끼는 자들이며 그들의 최대 관심은 개인적 욕망을 이겨내고 자신과 타인이 다 함께 생을 실현할 수 있는 공동의 선인 공적 의로움 즉 공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선비의 모든 덕목은 공의, 즉 천하위공의 각론이다.

 

그러나 조선의 실제는 어떠했을까? 그 선비들이 만든 조선은 차별의 나라(노비, 서얼, 여성),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먼저 차별의 나라를 보자. 君君臣臣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공자의 정명론이다. 유교에서 올바른 사회란 이름이 이름다운 것 즉 명과 분이 일치하는 명분론에 맞는 세상이다. 김시습의 말을 들어보자. “명분이란 사람에게 중대하다. 주역에 이르기를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서 건곤이 정해졌고 (인간세상도) 높고 낮음이 펼쳐져 귀천의 위계가 정해졌다고 했다. 그러니 명분은 누구도 범할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명이라 이르는가? 천자, 제후, 공경대부, , 서인이 그것이다. 무엇을 분이라 이르는가? 상하, 존비, 귀천이 그것이다. 이미 이름()과 구분이 있는데 또 그것을 예로써 절제함이 없으면 기강과 법도가 저절로 유지될 수 없으며 명분의 실상도 한갓 빈 그릇이 되어 다스릴 수 없다. 이로써 천자는 제후를 제어하고 제후는 공경대부를 제어하고 공경대부는 사와 서인을 다스린다.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을 부리고 천한 사람은 귀한 사람을 따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은 마치 눈과 머리가 손발을 움직이는 것과 같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이 나무밑둥과 뿌리를 호위하는 것과 같다. 이런 후에야 상하가 서로 돕고 본말이 서로 지지한다.”

 

지금의 평등이란 가치를 들이대고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당시 세계의 현실에선 그리 이상할 것 없는 논리이다. 문제는 선비들의 나라 조선은 그 명분론 조차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정명론을 말했을 때 군과 부는 신과 자에 대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었다. 신과 자가 떠받들 가치가 있을 때 그 상하관계는 명실상부하게 되며 이름에 걸맞는 관계가 된다. 그러면 선비들은 지배계급으로서 이름에 걸맞았는가? 저자는 아니라 말한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론이엇지만 그 명분은 자신들만을 위한 차별의 나라를 만드는데 악용되었을 뿐이라 저자는 말한다.

 

다산의 말을 들어보자. “신이 엎드려 생각하니 인재를 얻기 어렵게 된지 오래입니다.. 온 나라의 영재를 다 모아 발탁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영재의 8,9할을 버리다니요? 온 나라의 인민을 육성시켜도 오히려 인재가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운데 하물며 그 8,9할을 버리다니요? 상민이라고 버리고 중인이라서 버리고 평안도와 함경도라서 버리고 황해도와 개성과 강화도라서 버립니다. 강원도와 전라도에서도 절반을 버립니다. 서얼도 버립니다. 북인과 남인은 버리지 않는다지만 오히려 버리는 셈입니다. 버리지 않는 것은 벌열집안 수십뿐입니다.”

 

서얼의 차별은 밥그릇 싸움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본산인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서얼 차별은 원래 주자가례를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과정에서 파생되었지만 끊임없는 서얼 허통 운동에도 불구하고 차별이 지속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파싸움과 마찬가지로 결국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을까?

 

노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노비는 조선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반까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조선 전체 인구의 30% 이상이 노비였다. 이런 특이한 노비제도와 너무 많은 노비인구는 같은 동아시아에서도 유독 조선에서만 나타난 기현상이엇다. 선비들은 노비제도의 유용성을 역설하는데 적극적이었다. 정당화를 넘어 조선의 선비들은 노비 보유를 늘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비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전통과 유교가치 사이에 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늘 노비 소유주의 입장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이 입장에선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농업만이 유일한 산업인 조선에서 토지와 노비만이 생산재였고 노비와 땅은 많을수록 좋았다. 그러면서 양반들은 우리나라의 노비법이 비록 중국하고는 다르지만 예의와 염치를 중시하는 우리라나의 풍속은 사실 이 노비법 때문에 가능합니다라고 합리화했다. 예의와 염치는 차치하고 노비제의 비인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노비가 늘면 양반들은 좋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재정은 파탄날 수 밖에 없다. “16세기에는 상민보다 노비가 더 많아지는 현상이 심해져 16세기 초부터 이미 조선 조정에서는 세금을 징수할 대상으로서 양인인구 곧 수세원을 심각하게 상실하기 시작햇다.”

 

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양반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 세금이란 언제나 아랫것들이나 내는 것이니. 그런데 그런 무임승차는 대다수가 세금을 낼 때나 가능하다. 그러나 토지와 노동력이란 생산재를 축적하면서 양반들은 그 대다수를 소수로 만들었고 자신들의 무임승차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버티다 못한 국가가 양반도 세금 좀 내라면 양반 체통에 그런 것을 어떻게 하냐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고 별의 별 논리를 동원해 자신들의 무임승차를 정당화했다. 전형적인 기생귀족의 모습이다.

 

천하위공이란 말의 어디에도 그런 정당화는 가능하지 않다. 결국 어느 종교의 사제들이든 부패해갔던 것처럼 양반들도 부패해갔을 뿐이다.

 

선비가 권력을 장악한 조선은 부유한 양반들에게는 병역 면제와 감세의 특권을 주고 가난한 농민과 천민에게 갖가지 의무를 지운 나라였다. 그럴지라도 외부로부터 경제적 잉여가 유입되는 경제구조라면 나라도 재정이 넉넉하고 민생도 안정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시종일관 국내에서 생산해 국내에서 소비하는 자급자족 국가였다. 이렇다 할 해외무역이 없는 탓에 물화의 입출입이 미미한 조선에서는 특권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조적으로 총체적 가난에 허덕일 수 밖에 없었다. 개항직전 청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량은 청나라 상대로 약 300만원, 일본을 상대로 약 12만원 정도였는데 이 무역총액은 당시 조선의 국내총생산의 2%^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규모였다.

 

조선이라는 파이 자체를 키우는 방향의 경제 관련 개혁안이 나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하늘이 내려준 유한한 물산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가 조선시대 내내 조정에서 벌어진 경제관련 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에서 생산한 재화만으로 배분을 한다면 그것은 제로섬 게임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 이전보다 더 많은 배분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 그만큼 손해를 봐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와 저지른 패악은 왜군보다 더 심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 원인 중 하나는 당시 일본이든 중국이든 동남아이든 동아시아 어디서든 통용되는 은을 가지고 와도 조선에선 살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굶지 않으려면 약탈할 수 밖에.

 

임진왜란 전후의 일본만 보더라도 조선보다 더 부유했다. “1624년에 일본을 다녀온 강홍중 역시 에도에 이르는 거리 풍경의 묘사를 통해 국가의 경제력과 관련 인프라에서 이미 일본이 조선보다 크게 앞섰음을 글로 남겼다. 조선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동아시아에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들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왜 그런 한심한 상태를 내버려두었는가? 그 이유는 여러가이이겠지만 상업을 말리(末利)라 경멸한  유교의 이념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크다. 상업이 안된다면 조선이라는 전체 파이를 어떻게 키울 수 있었을까? 민생을 책임져야 할 사대부라면 당연히 이런 고민을 했어야 마땅한데 조선의 사대부 선비들은 벌로 그렇지 않았다. 선비들이 권력을 독점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조선의 경우가 유일한데 바로 그 조선이 가장 가난한 나라였으니 이게 우연일까? 특히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과 일본의 거리 풍경과 경제력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16세기를 지나면서 그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은 이른바 사림 곧 선비들이 권력을 장악한 바로 그 시기였다. 이런 타이밍은 우연일까?”

 

등용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 제자에게 공자는 먼저 부유하게 할 것이라 햇다. 그 다음 예를 가르칠 것이라 햇다. 배가 고픈데 예를 지키라 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재력가인 양반들이야 안빈낙도하는 시늉을 하고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곶간에서 인심난다. “가난하고 배고픈 백성들에게 밥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난하고 배고픈 것을 감수하고 그저 예로서 참으라 할 뿐이었다. 맹자도 맹자 백성을 먼저 배불리 먹인 후에야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항산항심) 했음에도 말이다.”

 

선비들의 치인(治人)은 낙제를 면치 못한다고 저자는 총평한다. 그럼 왜 이런 한심한 성적이 나왔을까? 중이 고기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의 지배계급들도 모두 양반들과 별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기생귀족이 되었을 때 그 국가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거기서 한가지를 더 보아야 한다. 그들은 정치종교의 사제들이었다. 그들을 평가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면 종교적 측면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게 추앙했던 조광조를 예로 들어보자.

 

“조광조는 타고난 자질이 정말로 아름다웠으나 학문의 힘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시행한 바가 너무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사업이 끝내 실패하고야 말았다. 만약 학문의 힘이 이미 갖추어지고 덕성의 도량이 완성된 뒤에 벼슬길에 나와 세상일을 맡았더라면 이룩한 바를 쉽게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퇴계의 조광조에 대한 평이다. 실제 조광조의 문제가 뭐였는지 에두르는 이 말만으로는 퇴계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퇴계가 지적한 것은 책상머리 관념론이었을 것이다. 조광조는 실제 그런 사람이엇다.
 

“중종 13 '오랑캐의 수장인 속고내가 국경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와서 사냥중.' 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속고내는 원래 조선에 투항을 하였던 여진족 추장인데 그 뒤에 변심하여 갑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혼란을 틈타 다른 여진족 역시 공격에 가담해 변방이 어지러웠다. 보고를 들은 조정은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속고내를 잡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당시 부제학이었던 조광조는 중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왕의 움직임은 신중해야 합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은 뒤에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속고내가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고 다만 사냥하러 왔을 뿐인데, 기습하여 사로잡는단 말입니까? 도적처럼 행동하여 기습한다면 의리에 맞겠습니까? 속고내가 죄가 있다면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영의정 정광필이 조광조의 말은 유학의 도리에는 맞지만 변방의 일은 해결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군주가 오랑캐를 대하는 데는 변경을 충실하게 하고 백성을 넉넉하게 하여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고, 저들이 먼저 변경을 소란하게 하여 적이 우리에게 침범하면 부득이 대응하되, 서서히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본디 사리에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의 병력을 살피고 헤아려야 하며 가벼이 움직여서는 불가한데, 하물며 명분 없는 일까지 해야 합니까? 신은 변방의 일만 일으키고 국가의 체면만 크게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병조판서 유담년이 화가 나 중종에게 말했다. “ 밭을 가는 일은 남자 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를 짜는 일은 여자 종에게 물으라는 옛 말처럼 이번 일에는 소신의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중종은 훈구파를 무시하고 조광조의 사림파 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중종 때 조선의 변방은 편할 날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국경을 지키는 조선군은 번번이 패배하였고 중종 18년 여진정벌전을 계획하였으나 허공교전투에서 조선토벌군이 패배하였다.
 

조광조의 궤변은 성왕론이란 이론으로 보면 말이 된다. 공자가 모든 별들이 븍극성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왕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의 덕이 높다면 저절로 정치는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가 그런가? 성왕론의 요점은 사실 그런 글자에 있지 않앗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 잇는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어느 때 세존께서 조용히 명상하고 계실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해서 통치할 수는 없는가?’

 

그때 악마가 이렇게 말했다 존귀하신 분이여! 세존이 직접 통치하십시오.” (쌍윳타 니카야)

 

자비와 비폭력은 붓다의 기본적 가르침이다. 성자의 길과 정치의 길은 언젠가는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 ‘죽이지 않고 죽이게 하지 않고 승리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슬퍼하게 하지 않고 법에 의한 통치는 붓다가 꿈꾼 이상적인 통치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인류의 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전쟁은 벌어지고 사람들은 고통을 받는다. 붓다는 이런 세상의 모습에 사무치게 슬퍼하였으리라. 그런 비장한 슬픔이 이 짧은 일화에서 전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을 정법으로 통치한다면 이런 비참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붓다의 심중에 오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자가 가는 길에 커다란 장애가 된다. 게다가 이런 장애물은 성자의 길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장애물을 넘어서 갔다. 정치의 길은 대체로 혼탁한 길이다. 붓다의 청정행과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었을 것이다. 붓다는 의연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나카무라 하지메)

 

붓다도 불가능한 길을 누가 갈 수 있을까? “성인이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초탈한 사람일 것이고 군주라면 현세의 권력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유교의 예 역시 마찬가지이다. 바른 방향과 바른 자세와 바른 순서에 따른 움직임, 우주의 숨결에 따른다는 순전히 자동적인 절문(節文)의 행위만으로 도대체 상쟁하는 폭력적 현실이 어떻게 다스려진다는 것일까? 이 질문 그리고 이 질문에 내포된 역설에 대한 숙고는 우리를 곧바로 유교의 핵심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심원한 교의의 중심에 안티노미가 있듯 유교 교의의 중심 즉 성왕과 예의 이념에도 역설이 존재한다.” (김상준)

 

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우 3대이다. 유자들이 3대를 성스럽다고 했다. “그들에게서는 한 점의 분노도 한 점의 폭력도 한 점의 허영도 한 점의 증오도 없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김상준)

 

불가능하다. 가능해도 효과는 없다. 정조의 한탄을 들어보자. “지금 나는 君師의 지위에 있으므로 사도(師道)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유학을 밝히고 세상에 가르침을 부식시키며 깨우치게 하고 이끌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습속은 점점 어그러지고 선비들의 기풍은 옛날만 못하며 크게 변화되어 가르침을 따르는 효과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는가?” 결국 정조는 헛되이 과로사했다. 정조가 성왕이라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유교의 기준으로 근접했다고는 할 수 있다. 그런 정조도 성왕론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가능하지도 않고 효과도 없는 성왕론은 왜 유교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가? 그것이 유교의 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의미가 있고 그렇기에 유교는 종교다.

 

성왕론의 근거라는 3대는 사실 조작되었다. “한 흥미로운 연구는 시경, 서경, 춘추의 오리지널 텍스트가 현재 남아 있는 그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자료였고 이 오리지널 텍스트들은 원래는 결코 유교만의 경전이 아니라 다양한 학파들의 공동재산이었음을 설득력있게 입증했다.” 유자들은 그것을 유교의 윤리적 가르침의 시각에서 부적절하거나 불필요한 부분들을 잘라내고 버리고 지웠. 그 기준의 핵심은 폭력의 탈색, 그리고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이 남게 된 폭력에 대한 정당화”(김상준)였다. 유자들은 역사를 술이부작해 성왕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공자의 데미안이었던 무왕이 은을 정벌할 때 기록은 유자들의 편집에는 이렇게 나온다. “은나라의 앞의 변정들이 뒤로 돌아 달아나니 그 창끝이 뒤의 병사를 찔렀다. 피가 흘러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그 피는 폭군의 병사들이 달아나면서 서로 찔러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피는 성스럽고 정의로운 무왕과 그의 군사의 창에 찔려 흘러나온 것이 아니었다! 강처럼 흐른 피를 닦아내는데 텍스트의 저술자들이 겪었을 당혹감”(김상준)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학파들의 저술에 남은 단편들로 미뤄보면 실제 역사는 유가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판이하다. ‘시자가 전하는 무왕을 보자. ‘무왕은 친히 주왕의 간신인 악래의 입에 활을 쏘았고 또 친히 주왕의 목을 칼로 쳐 손을 피로 적셨고 그 피를 벌컥대며 마셨다(또는 그 살점을 생으로 먹었다) 그 순간 무왕은 한 마리 맹수와 같았다.”

 

유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팩트가 아니었다. 그들은 폭력이 범람하던 그들의 현재와 긴장을 일으킬 기준점이 필요했다. 그들은 천국을 역사 속에 창조했다. “이 긴장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부당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초월적 조정 논리를 만들기 위해 유자들의 초월적 조정 기관은 이 세계 밖의 어떤 곳이 아니라 요순우탕이 살았던 바로 이 세계내에 존재하며 요순우탕의 그 완벽한 모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유교에서 예란 성왕들이 세상을 다스렸던 행이 양식을 말한다. 예란 우주의 질서 또는 도의 무의의 결에 맞게(節文)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예란 이 불완전환 세계의 배경에서 항상 살아 실현되는 우주의 올바른 질서에 자신과 나라를 맞추어 나가는 행위양식이다. 유교에는 현세와 내세라는 구분은 없었지만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라는 두개의 우주, 두개의 현세가 병존했다. 두개의, 그러나 뫼비우스의 띠처럼 한 줄로 연결된 우주, 유교에서의 윤리적 긴장은 이 두개의 우주 사이에서 발생한다.” 유자들의 성왕론은,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김상준)


“뭐 좀 안다는 놈들이 세상을 위한다며 나서지 못하게 하라.” 노자의 말이다. 조광조의 학문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조광조는 군사문제에 괘변을 늘어놓기에는 전략적 식견이 모자랐다. 그는 성(당위)을 속(현실)과 구분해 읽지 못했다. 그가 꿈꾸었던 이상인 왕도정치도 그러했다. 그는 성과 속이 만날 때의 긴장을 읽지 못했고 그 긴장의 전위차에서 일어나는 스파크를 보지 못했다. 그가 그 스파크에 타죽은 것은 당연하다.

퇴계가 조광조를 평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하려던 것은 조광조는 스승이 없이 혼자 책만 보다 망했다는 것이다. 유교는, 주자학은 책을 통해 수입되었다. 그러나 장자가 말했듯 책이란 성인의 똥찌꺼기일 뿐이다. 그 책에서 읽어야 할 것은 글자가 아니라 행간이다. 행간을 읽는데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전통을 따라 내려온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face to face로 전해진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스승이 없었다. 스승이 없이 종이 위의 까만 것만 읽었을 때 그것은 근본주의가 된다. 무슬림들처럼.

 

대다수의 무슬림에게 아랍어는 2언어이지 모국어가 아니다. 모국어는 언제나 실제 삶에 뿌리를 둔다.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아랍어란신성한 언어 현실에서 분리될 밖에 없다. 아랍어를 2언어로 하는 무슬림은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기때문에 그들의 현실과는 무관한, 언어로만 구축된 허공을 떠도는 추상적인 사고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에게는 발을 딛고 땅이 있어야 한다. 모든 의미는 위에서만 이해할 있다. 그러나 대다수 무슬림들의 종교는 그렇게 없기에 관념적인 극단주의가 피어났다.

 

모국어가 아닌 한문으로 생각해야 했던 선비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관념적 근본주의의 예로 저자는 사대주의를 든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조선 사대부의 명나라 인식은 현실적이자 조건부였다. 명나라와 관련해 어떤 결정을 내릴 때에는 항상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익 여부를 조목조목 따지고 나서 이익이 있다고 판단이 될 때에만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사림들, 선비들이 집권한 후 사대주의는 관념론이 된다.

 

우리는 임진왜란 때 자발적으로 분연히 떨쳐 일어난 의병 활동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행동으로 받아들인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선 사회에서는 의를 위해 일어난 의병을 난신적자를 처단하기 위해 일어난 무리로 정의했는데 난신적자란 바로 尊尊의 의리를 저버리고 (명나라) 천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삼아 출범한 조선왕조에서 춘추의 의리는 곧 천자가 주재하는 천하질서에 순복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임란때 의병은 중국 천자를 위해 일어난 것이지 조선의 왕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후금을 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려는 광해군에게 비변사 당상관들이 차라리 전하게 죄를 범할지언전 천자에게는 죄를 범할 수 없다는 말을 버젓이할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3학사는 불사이군을 외치다 죽었는데 여기서 군은 조선왕이 아니라 명나라 천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논리상으로는 조선 선비들의 생각이 맞다.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것은 중국의 천자이고 조선의 왕은 그 천자에게서 인정을 받았을 뿐이지 천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 논리상으로는 의의 대상은 조선 왕이 아니라 중국의 천자가 되어야 한다. 후금군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척화파들이 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를 저버릴수는 없다고 말한 논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의리의 대상이 중국천자였던 예는 조선이 유일하다.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그런 예는 없었다. 조공을 받는 중국도 조공을 바치는 명목상의 제후국도 그 관계를 명실상부한 실제로 보지는 않았다. 오직 조선만 말과 현실을 혼동했다.

 

얼치기 근본주의자들이 만든 나라 조선, 그 나라가 차별의 나라, 특권층의 나라, (작당하는) 소인배의 나라, 가난한 나라, 사대주의의 나라, 허례허식의 나라가 된 것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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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예술에 관한 한 자명한 것은 없다는 것이 자명하게 되었다아도르노의 미학이론첫머리이다. 서문도 없는 이책의 처음은 미학의 대상이 모호하게 되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Today it goes without saying that nothing concerning art goes without saying, much less without thinking. Everything about art has become problematic: its inner life, its relation to society, even it sright to exist.”

 

그게 뭐가 문제인가? 딱 보면 아는 그런 예술이란 나이브할 뿐이다. 그런 예술을 잃어버린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 대신 무한한 가능성을 얻지 않았는가? 얼핏 옳게 들린다. 20세기의 예술은 그 어느 시대에도 가능하지 않았던 다양성을 자랑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실험해왔다. 실험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아도르노는 이렇게 반박한다. “What looked at first like an expansion of art turned out to be its contraction. The great expanse of the unforeseen which revolutionary artistic movements began to explore around 1910 did not live up to the promise of happiness and adventure it had held out. What has happened instead is that the process begun at that time came to corrode the very same categories which were its own reason for being.”

 

다양성은 예술의 자율성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다양성은 자유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사회로부터의 자유라는 것이 문제였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예술은 청중 또는 관객을 전제로 했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청중(또는 관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타자를 전제로 하는 예술은 대중예술이라 불린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타자로부터의 자유이다.

 

자유를 얻은 예술을 난해해진 동시에 무가치해졌다. 자유로워지면서 즉 사회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면서 예술은 이해받을 필요가 없어졌고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지, 타자에게 자신의 존재할 이유를 주장할 근거도 없어졌다.

 

난해함이란 자유의 선언이다. 나는 너에게 이해를 구할 이유가 없다는 선언이다. 난해함은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20세기 예술은 대중을 잃었기에 예술되었지만 예술이 되면서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예술이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맑스주의도 대중을 잃어버리면서 존재이유를 잃어버렸다: “맑스주의 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경우라야 비로소 그에 적합한 지평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대중 혁명운동이 존재하지 않거나 좌절당하면 맑스주의 이론 역시 어쩔 수 없이 기형적이 되거나 퇴화한다.” NLR 편집장이었던 페리 앤더슨의 말이다.

 

앤더슨의 서구 맑스주의 연구란 책은 왜 이렇게 서구 맑스주의는 난해하게 되었는가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색깔이야 어쨌든 맑스는 사회과학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다. 그 아버지들 중 맑스는 특별하다. 그의 색깔이 아니라 문체에서. ‘그렇다고? 어디 그말이 맞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러 이러 하게 되는데 결론은 이렇게 되지 않는가?’ 맑스의 논쟁 스타일은 상대의 주장을 일단 받아들이고 그 주장에 따라 논의를 확장한다. 그리고 그 논리의 확장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가를 보여조는 식이다. 그 결론은 논쟁의 상대방도 웃게 만든다. 맑스의 문장은 읽는 재미가 있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알기쉬움은 서구 맑스주의에선 사라졌다. 앤더슨은 그 이유를 독자의 상실에서 찾는다.

 

경제이론이나 정치이론에서 서구 맑스주의가 쌓은 지적 업적은 사실상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경제와 정치 어느 분야이든 중요한 저작이 출판되지 않았다.” 서구 맑스주의의 무게 중심은 철학으로 근본적인 이동했다. 루카치로부터 알뛰세까지, 코르쉬에서 콜레티에 이르는 전체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그 전통 내에 전문적인 철학자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는 점이다.”

 

실천이 살아있던 1차대전이전 2인터내셔널 시기에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닫ㅇ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대학에서 사회주의를 떠드는 교수 사회주의자강단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경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을 정치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대학에 자리잡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차대전 이후 맑스주의이론은 전적으로 대학에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당에서 대학으로의 후퇴, 왜 후퇴했는가? 그 이유를 앤더슨은 레닌의 말을 빌려 정리한다. “올바른 혁명이론은 진정한 대중 그리고 진정한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을 때라야 비로소 최종적인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맑스주의 이론의 진보는 그 시대가 처한 물질적 생산조건-그 시대의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실천-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앤더슨은 말한다.

 

서구 맑스주의의 난해함 다시 말하자면 그 불모성은 혁명운동의 소멸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왜 혁명운동이 소멸되었는가? 이책의 저자는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 때문이엇다고 말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오고 독일 사민당이 창당될 무렵만 해도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종말은 기정사실로 보엿다. 당시는 대공황의 시기였고 그것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장기불황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은 ‘It’s hard time’이란 말을 인사말처럼 썼다.

 

시대가 그랬기에 “1890년대 초 맑스주의자들은 대략 10년 안에 자본주의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고 생각했다. 이렇게 10년 정도의 비교적 잛은 기간이라면 맑스주의 정당의 임무는 예견된 그날을 준비하며 노동자들을 조직화해 대비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오지 않았다. 1890년대 자본주의는 기사회생했다. 대공황의 원인은 1970년대 세계자본주의가 그랬듯이 이윤율저하경향이 문제엿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을 재창조해냈고 부활에 성공햇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맑스주의자들의 대응은 초기기독교도들과 비슷했다.

 

초기기독교도들은 정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그날을 미래로 미뤘다. 맑스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말로 올지 안 올지도 알 수 없는 그날을 막연히 준비하면서 하고한 날 맑스 책 세미나나 하는 집단이 종교집단이지 정당인가? 그럴 수는 없다.”

 

첫번째 반응은 맑스주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엿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입으로는 임박한 혁명의 그날을 이야기하면서 일상에선 그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상에서의 소박한 정치활동을 할 뿐이엇다. 막상 투쟁목표로 내건 것을 보면 기껏해야 일반적 참정권의 보장, 8시간 노동제, 언론, 출판의 자유, 지방자치권 등 김빠지는 것들이다. 이런 일반적인 민주주의의 요구들이 도대체 거창한 사회주의 세계관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해명이 없다. 베른슈타인은 당의 이론과 실천의 어처구니없는 괴리를 지적하면서 이제 공염불이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 혁명주의의 수사학을 걷어치우고 의회에서 다수석 점유를 통한 현실적인 권력 장악과 현실개혁에 집중하자고 호소한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운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예언이 현실을 빗나갔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 경제학은 더 이상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당시 유럽 사회주의정당의 현실을 공식화한 것에 불과했다. 사회주의정당에서 혁명은 수사에 불과햇다. 저자는 볼세비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에 대한 대응이었고 베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수정주의였다고 말한다.

 

맔스주의의 지적파산에 대해 지적으로(맔스주의식으로 말하면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은 레닌이엇다. 그의 제국주의론은 왜 자본주의가 붕괴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해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보듯 볼세비즘은 실패했다

 

사민주의 역시 실패였다. 1차대전 후 영국의 노동당,독일의 사민당 등 각국에선 좌파정당들이 집권당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우왕좌왕했을 뿐이다. 방향을 알려주던 교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교조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조를 대신할 무엇을 찾지도 못한 가운데 오로지 일상의 정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공허한 혁명이란 수사대신) 윤리적 이상의 차원을 강조하고 이것으로 사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강조할 뿐, 윤리적 이상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상을 사회 전체에 설득하는 구체적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운동이 힘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니 혁명이란 공허한 수사를 놓을 수는 없었다.

 

교조없는 실천과 실천없는 교조가 결합된 기묘한 꼴당시 상황을 정리한 말이다(‘정치가 우선한다’)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괴리하고 당의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정체성이 뒤죽박죽으로 모순된 상황에서는 국민 전체는 고사하고 노동자들이라도 이끌 수 있는 강력한 지도력이 나올 턱이 없었다.”

 

저자는 당시 유럽 사회주의를 무능이란 한마디로 정리한다. 맑스를 대신 할 이론도 변해버린 상황에 맞는 실천도 실패한 말 그대로 맑스주의의 파산이엇다.

 

저자는 수정주의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로 비그포르스의 사민당을 말한다. 흔히 그렇듯 진정한 혁신은 변방에서 일어났다

 

맑스주의의, 좌파의 지적 파산에 대한 비그포르스의 혁신은 두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베른슈타인이 주장하듯 정당으로서 좌파정당의 힘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오고 그 이상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는 것이 좌파정당이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내용에 대해 베른슈타인은 분명하지 않았다. 비그포르스는 그에 대해 분명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내걸어야 할 윤리적 이상은 추상적이고 애매한 상식이 아니라 바로 노동계급의 삶의 현실 속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윤리적 이상을 온 사회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과정이 바로 노동운동이며 사민주의운동이다.” 좌파정당도 현실의 정당이며 현실의 정치를 해야한다. 현실의 정당으로서 현실의 정치로서 구체성을 말한 것이다.

 

비그포르스는 이상 역시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그포르스는 사민당이 노동자들과 온 사회성원 들 앞에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베른슈타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부정한 베른슈타인은 사민주의 운동에 목표 따위는 없으며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끊임없는 운동뿐이란 입장었다. 그러나 비그포르스에게 사민주의 운동은 노동자가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그들이 마음 속에서 간절히 열망하는 윤리적 이상을 추출해 모든 사회성원의 동의를 얻은 가운데 그러한 윤리적 이상을 담은 사회의 모습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최대한 총체적으로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궁극적인 유토피아는 아닐지라도 노동운동과 사민주의가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현해내고자 하는 잠정적 유토피아는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혁신인가? 비그포르스가 본 것은 생산의 주체이면서 그 대접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의 현실이엇다. “노동자들은 도처에서 정신적, 육체적 궁핍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차별과 경멸을 받았으며 생산현장에서는 그저 자본가와 경영자의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비그포르스는 그런 현실에 대해 산업민주화를 말한다. 이전까지는 산업국유화가 좌파의 구호였지만 1차대전의 국가통제경제는 국유화가 대안으로서 끔찍하다는 실증이 되었다. 더군다나 맑스주의의 지적 파산은 국유화에 대한 지적 정당화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더군다나 스웨덴 사민당에선 당시 이론적 혁신이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소유권이란 사실 그다지 관계가 없는 혹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이런저런 권리들의 다발에 불과하다. 자본가가 기업에 대해 갖는 소유권 안에는 이윤을 챙길 권리, 경영자를 선임할 권리, 기업의 전략과 운영방침을 결정할 권리, 노동자를 고용, 해고할 권리, 가격을 결정할 권리 등 수많은 권리가 들어있다. 이 많은 권리의 다발인 소유권을 사회가 일거에 빼앗아 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 사회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별쭝난 인격체이기에 어느날 갑자기 이 권리들을 일사분란하게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사민당의 소유권 개념에 대한 혁신은 스웨덴 사민당이 좀더 현실적이면서 구체적인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형태를 착상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소유권 다발을 조금씩 하나하나씩 제한하고 빼앗아 오면서 경제와 사회에 대한 자본 권력의 전횡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있다는 것이다.

 

소유권 개념의 혁신은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와 함께 이후 스웨덴 사민당의 방향을 결정한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얼마든지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하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임노동의 폐지가 아니다. “그의 산업민주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사가 협조하면서 노동이 경영에 참여하는 공동결정의 구상에 가깝다.” 산업구조를 바꾸면 노동자를 차별하는 온갖 사회제도도 사라지게 된다. 노동자를 사회의 가장 소중한 생산의 주체로서 대접하는 공동체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평등한 사회성원으로 통합될 것이다.” 산업민주주의 덕분에 스웨덴 사민당은 추상적 이론과 공상적 유토피아에 기대지 않고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민주의 경제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었다.”

 

비그포르스의 산업민주주의가 등장하고 현실정치에서 힘을 얻은 것은 대공황 덕분이엇다. 비그포르스는 산업민주주의를, 사민주의의의 이념을 나라살림의 계획이라 불렀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은 변함없지만 그 방향은 착취와 같은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이 아니라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를 효율적으로 조직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비효율성에 맞춰졌다. 그러자 사민당의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도 풀렸다. 이러한 방향 전환 덕에 당이 이제까지의 무능력과 무정책의 한계를 벗어나 나라 살림과 산업 전체의 효율적 조직이라는 목표에 맞추어 다양한 정책을 만들어낼 있었다. 이제 사민당은 예전의 사민당이 아니었다. (1932) 선거에서 정교한 경제이론의 논리와 구체적이고 명확한 정책했으며 그 내용은 특정 집단이나 이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바람에 정확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민당 당원들의 운동은 신바람이 났고 곳곳에서 돌풍이 일어났다. 이후 1976년까지 44년이나 이어진 사민당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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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땀 성왕의 피 -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3
김상준 지음 / 아카넷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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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많이 들어본 말이고 많이 해온 말이다. 그러나 그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했을까? 지금도 그렇지는 않겠지만 지난 한 세기 그말을 할 때 우리는 한 없이 작아졌다. 세계의 변방에 불과한, 별볼일 없는 나라. 세계지도를 펴놓으면 한 없이 작아질 뿐인 나라. 스스로는 호랑이라 우기지만 사실은 겁많고 별볼일 없는 토끼일 뿐이라 속으로 되뇌이던 나라.세계 속의 한국을 정의하던 감정은 열등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지도의 중심은 태평양이 아니라 대서양이었으니까.

 

우리는 가운데에 태평양이 그려진 세계지도를 보고 자랐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을 가본 사람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미국이나 유럽에 가서 보는 세계지도는 영국 그리니치가 중앙에 온다.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이다. 그런 지도에서 한국은 쉬렉의 대사처럼 far far far away (‘겁나 먼이라 번역되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far east 어디에 처박힌 변방이라 부르기도 힘든 나라일 뿐이다. 그들로서야 당연한 지도이고 당연한 생각이다.

 

그러나 우끼는 것은 우리 스스로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입장에서야 우리는 far east에 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왜 그말을 그대로 번역해 극동이라 말했는가?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초가집도 없애고~~’ 과거는 부정하고 잊어야 할 무엇일 뿐이었다. 단군 이래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자던 새마을운동은 우리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전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풍물놀이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그런 전통문화가 많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그런 과거를 부정하고 경멸하며 없어져야 할 것으로 규정했다. 사라진 것은 초가집만이 아니라 초가집에 살던 문화도 함께였다. 그때 없어진 것이 식민지 시절 없어진 것을 월등히 넘어선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는 과거는 부정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시절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떳떳하게 세계 속의 한국을 외치고 나아가 한국 속의 세계를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이다.

 

한세대 전만 해도 ‘Japan as No.1’이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세계제일은 커녕 세계의 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이지만 흔히 비전의 상실을 말한다. No.1이란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따라가지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다 따라잡고(catching up) 나니 방향을 잃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비전을 잃어버렸기에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되고 어쩌면 30년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성장동력이 바닥났다, 경제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10년을 허송세월했다. 흔히 하는 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이겠지만 일본처럼 비전의 상실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이상 서쪽을 보아봤자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답을 찾을 때이다. 이책의 저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었던가? 오직 동아시아만이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따라갈 길이 남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근대화(솔직치는 서구화)의 길은 사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왜냐하면 그 길은 13세기 중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근대화의 핵심어인 근대란 개념은 거의 베버의 정의를 따른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성은 합리성이며 근대화는 합리화의 과정이다. 베버가 여기서 말하는 합리화의 내용은 보통 도구적 합리성으로 이해된다. “한 마디로 집약하면 전 사회의 합리화이고 그 기본축은 1. 합리적 자본주의, 2. 합리적 법-행정체계 3. 합리적 사회분화이다.”

 

베버에 따르면 그러한 합리화는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in the West, in the West only)’만 일어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합리화의 과정으로서 근대화를 도구적 합리성이 관철되는 과정으로만 보지 않는다. 저자는 근대성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도구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 베버의 두가지 합리성 모두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도구적 합리성으로만 보더라도 근대화 과정은 서구, 오직 서구에서만일어난 것도 아니고 서구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다. 서구에서 근대화가 일어난 것은 먼저 송제국에서 일어난 합리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서구는 후발자의 이점을 이용하여 다른 문명의 근대적 요소를 빠르게 흡수하였고 특정한 역사적 국면(여기서 저자는 리오리엔트에서 프랭크가 지적한 시점을 염두에 두는 것같다)을 이용하여 특정한 역사적 국면을 이용해 본격근대로 진입하는 계기를 앞서 포착하였을 뿐이다.’

 

물론 본격근대(High Modernity)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근대성의 시작은 서구가 아닌 13세기 중국이었다. 이 시기를 본격근대가 시동하는 장기16세기와 대비해 초기근대(early modernities)가 시동한 장기12세기라 부른다.

 

초기근대의 최초 표출양상은 서유럽이 아니라 중국 송원 연간의 사회경제적, 정치문화적 전개 양상에서 풍부하게 발견된다. 그 특징은 정대주의적 통치권의 확립과 비판적 권위를 확보한 학인-관료집단의 형성,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농촌수공업의 성장, 수력양수기, 수력풀무, 대형방적기 등의 기계발명과 코크스 (강철) 제련 등 철강 부문에서의 혁신 등에서 보이는 다양한 기술혁명과 초기공업화, 도시, 교통, 화폐 및 무역 영역의 인프라 발전이다. 그 기반은 송대에 이루어졌고 몽골제국은 그 성취를 흡수하여 당시로는 가공할 수준의 전쟁, 행정, 건설, 교역 역량을 갖춘 세계체제를 구축했다.”

 

대원제국과 함께 처음으로 실제적인 세계화가 시작된다. “’ 16세기의 결과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출현했다면 유라시아의 12세기의 결과는 몽골세계제국, 즉 팍스 몽골리카였다. 유럽의 긴 16세기가 그렇듯 송원 연간의 긴 12세기 역시 세계적인 변화의 시대였다.”

 

팍스 브리태니카와 팍스 아메리카나가 본격근대를 전 세계로 확장했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송조에서 시작된 초기근대를 전세계로 확장했고 그 바탕 위에서 장기 16세기가 가능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팍스 아메리카나와 팍스 몽골리카는 분명 닮아있다. 몽골 전통의 초원의 군사력에 유라시아 세계 최대 중화의 경제력을 합체시키고 게다가 종래부터 몽골과 공생에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무슬림의 상업권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경제 지배하는 신방식이었다. 현대풍으로 말을 바꾸면 쿠빌라이의 신국가는 군사 초대국이며 경제 초대국임과 동시에 초대형의 통상입국이 된다.”

 

본격근대만 폭력으로 세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초기근대 역시 폭력으로 세계화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세계화가 그랬듯이 팍스 몽골리카 역시 하드웨어만 강했던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역시 강했기에 가능했다. 그 소프트웨어는 송조에서 시작된 근대성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면 그 초기근대는 어떻게 가능했는가? 장기 12세기와 장기 16세기의 결과인 세계화는 베버의 도구적 합리성 개념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 12세기가 왜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장기 12세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근대성이란 개념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베버를 깨기 위해선 다시 베버로 돌아가야 한다. Return to Weber!

 

저자는 지금까지 베버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고 본다. 베버 이론체계가 해결하려는 모순을 파악한 경우가 드물다고 저자는 본다.

 

TRIZ 이론에 따르면 혁신은 모순의 극복이다. 예를 들어보자. 90년대초 까지만 해도 하드 디스크의 용량은 80MB가 최대였다. 어느 업체에서 “200MB를 상용화하겠다고 했다. 3-4개월이 지난 후 연구원은 열심히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기록용량을 올리려면 기록이 정확해지지 않는다. 데이터 저장 시 에러가 너무 많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러를 줄여 기록의 정확성을 높이면 용량이 작아진다. 그래서 하드디스크의 헤드부분의 길이를 조절하거나 하드디스크의 기록 플래터 모양을 최적화 하는 등 각 부분의 개선과 최적화로 목표를 달성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해 8“IBM 왓슨 연구소에서 획기적인 하드디스크 저장 원리를 개발하여 년말까지 1GB 하드디스크 양산이 가능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다음 날 연구원은 인터넷에 발표된 IBM의 새로운 저장방식을 이해할 수있었다. IBM의 방식은 정확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저장용량을 10GB까지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이후 이 방식은 업계의 표준이 되었고 수많은 업체들이 로열티를 주고 그 방식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원은 이렇게 되뇌었다. ‘이렇게 간단한데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김효준)

 

IBM의 방식은 플래터를 여러장 쓴다는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용량과 정확성의 기술적 모순은 간단하게 해결된다. 모순을 해결한 IBM의 방식이 업계 표준(dominant design)이 되었듯이 학계의 표준(dominant design) 역시 모순과 관련이 있다.

 

물론 이론은 공학과는 다르다. 공학의 현장이 모순의 해결이라면 이론은 모순의 파악과 관련이 있다. 현실의 근본 모순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것이 이론이다. 그 모순이 근본적이고 화해불가능할수록 이론의 힘은 강력하다. 저자는 베버의 이론체계 역시 모순과의 대결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순이 무엇이엇는지 베버의 사후 잊혀졌다고 저자는 본다.

 

베버의 사회적 행위이론의 핵심은 행위 동기의 이원성, 그 이원성의 화해불가능한 대립성을 강조한 점에 있다. 그 대립이란 행위의 수단합리적 성격과 가치합리적 성격 간의 대립이며 물질적 이해와 이념적 이해 간의 대립이다. 이러한 행위 동기의 적대적 이원성에 관한 이론은 베버 사회이론의 또 다른 특징인 정치와 윤리 간의 영원한 갈등이라는 문제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베버에게 물질적 이해(또는 수단합리성)와 이념적 히애(또는 가치합리성)는 근본적으로 화해불가능한 동기이다. 그 근원에서 볼 때 전자는 현세적 이해추구인 반면, 후자는 구원의 이해, 즉 피안적 이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경제-정치 영역과 후자는 종교-윤리 영역과 관렫된다. 이 양 가치의 대립이 화해부가능한 이유는 종교-윤리적 정의는 현세 존재 자체의 부정의한 성격과 근본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이다.”

 

베버의 모순은 물론 베버가 발견한 것은 아니다. 이성과 오성을 분리한 칸트의 발견이었다. 칸트에게 도덕은 현실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 요청되어야 한다. “베버의 이념적 이해 개념은 칸트가 말한 도덕적 이해관심 또는 실천이성의 진정한 동기에 준하는 개념이다. 칸트는 정념의 경향성과 무관한 요청인 도덕성이 또 하나의 이해관심과 옹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철학적으로 풀이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주학의 개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유학을 풍미했던 理氣論을 베버의 전철수(switchman)’ 이론이나 칸트의 도덕동기론으로 풀이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왜 윤리적 요구인 가 현세적 인과고리의 논리인 의 형상을 빌려 또는 기를 타고() 나타나는가에 있었다. 칸트 역시 욕구능력이 감각에 의존하는 경향성의 원환에 갇힌 인간존재에게 도덕적 동기가 경향성으로 드러나는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했다. 칸트에게 도덕동기란 기를 탄 이와 다르지 않다. 이와 기, 성과 속, 양자는 항상 얽혀 있었다.”

 

베버라면 떠오르는 말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일 것이다. 베버의 이론체계에서 그책은 종교사회학이란 거대한 프라젝트의 작은 사례연구일 뿐이었다. “베버 종교사회학의 주제는 다양한 가치합리성의 존재양식에 관한 분석이다.” 이는 기의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기의 초월이기 때문이다. 기 즉 속, 또는 차안에 대해 이 즉 성은 피안이다. 베버는 성이 어떻게 속의 세계에서 태어날 수 있었는가를 파고들었고 속의 세계, 차안에서 태어난 피안, 성의 세계를 세계윤리종교라 불렀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 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야스퍼스가 말한 축의 시대는 베버의 종교사회학 연구에 기초한다. 저자는 축의 시대에 근대성의 원형이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근대는 성과 속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가의 문제라 말한다.

 

저자는 축의 시대를 성이 속을 통섭(encompass)하는 세계로의의 전환이라 요약한다. “통섭이란 원리에 의한 통괄적 포섭을 의미한다. “유럽 중세 카톨릭의 교황정치, 유교의 성인 정치, 불교의 전륜성왕정치, 힌두교의 브라만-푸로히다 정치, 이슬람의 이맘-울라마 정치는 역사적으로 각각 다르게 현상하지만 성이 속을 통섭했다는 구조에 있어서는 상동이다. 성이 속을 통섭하는 세계질서의 기원은 막스 베버가 말하는 고대 세계윤리종교의 출현과 맞물린다. 세계윤리종교의 탄생과 함께 의식과 제도의 차원에서 세계성과 초월성이 출현하고 그 결과 현존질서가 최초로 의문에 부쳐졌다. 이러한 점들은 세계윤리종교의 공통된 특징이다.”

 

물론 이때 처음 종교가 출현한 것도 성이 탄생한 것도 아니다. 보편종교는 성의 위기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 에덴동산이나 노자의 소국과민은 모두 고대도시, 고대국가가 출현하기 이전의 상황을 말한다. 도시와 국가는 예나 지금이나 고도의 인위와 작위의 산물이다. 착취와 전쟁이 체계화, 대규모화한다.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방법론들이 고도화된다. 고대과학, 고대재정, 고대행정, 고대병참의 술과 학이 발전한다. 이러한 연상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세속화라 불러야 마땅하다. 마술적 힘으로 가득한 신화적 세계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세속적 힘과 이해관계, 욕망의 계량학과 함수관계가 새로운 군주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기축시대를 전후했던 상황은 근대가 출현했던 상황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 상황을 위기로 인식한 결과가 보편윤리, 세계종교엿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초월의 탄생이란 점에서 이 시기를 원형근대성이 태어난 시기라 말한다. 세속화, 즉 근대는 (내용은 다를지라도) 보편성의 합리화, 즉 기를 초월한 이가 기를 압도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들어 기든스는 근대성의 본질을 구체성을 탈피한 추상체계의 운동으로 본다. 그가 근대성의 핵심으로 보는 시공간 거리화는 power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disembedding되는 abstraction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시공간 거리화로 나타나는 권력은 구체적 의 세계에서 추상된 로서, 초월로서 작동한다. 기로부터 독립한 이의 발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과정이다. “근대성이 해방시킨 과학기술과 물질적 생산력은 애초에 혁명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비전과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돌파가 없다면 불가능했다.”

 

저자가 고대 윤리종교에서 읽어낸 근대의 원형은 초월이다. 그리고 축의 시대에 탄생한 초월 즉 성의 본질은 폭력이 촉발한 윤리의식이엇다. “야스퍼스는 이 시기에 인류가 최초로 윤리적 감각을 갖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란 주어진 현세의 현상과 힘 자체를 회의하고 초월하는 반성력이다(기든스는 reflecxivity를 근대성의 핵심으로 본다). 이러한 윤리적 각성은 현세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이러한 각성 이후에는 현세적 사실과 윤리적 초월 간에 팽팽한 긴장이 발생한다.” 칸트가 말했듯이 윤리는 현실에서 주어지 않는다. 윤리는 현실을 초월한다. 저자가 말하는 근대의원형이란 눈 앞의 주어진 시공 안의 현실과 시간 밖의 시간’, ‘공간 밖의 공간에서 오는 이념 사이의 윤리적 긴장관계였다.”

 

유교를 유교답게 하는 근본적 안티노미는 폭력과 성스러움의 화해할 수 없는 긴장이었고 그 긴장의 집약은 성왕론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성스러운 임금의 교의 즉 성왕론은 유교이념의 핵심일 뿐 아니라 유교정치체제의 근간이다. 유교의 예란 이러한 이념과 체제를 작동시키는 행동원리다. 성스러운 임금이라는 교의에는 강한 역설이 배어 있다. 어떻게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 현세의 군주가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일 수있는가?” 성왕론은 성과 속의 긴장이며 나쁘게 말해 반사실적인 픽션일 수 밖에 없다. 성왕론의 근거 자체가 픽션이었다.

 

성왕론의 근거는 요순이다. “서경의 요임금 묘사에서 우리는 전쟁, 질투, 패륜, 음모, 갈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한 점 폭력의 티끌조차 존재하지 않는 션세의 군주에 대한 묘사는 참으로 전례를 찾기 어렵다. 유교적 안티노미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모아진다. 요순이 성스러운 이유는 신화적 영웅들의 성스러움과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한없이 선하고 한없이 부드럽고 한없이 검약하고 한없이 백성과 혈육을 사랑한다. 이것이 유교의 창건자들이 바라던 군주의 모습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폭력의 흔적을 유자들이 제거한 결과일 뿐 실제 역사는 어디서나 그랬듯 폭력의 역사였다. 고대국가가 성립하던 시절 중국 역시 다른 문명권과 마찬가지로 영웅시대였고(영웅시대에 대해선 축의 시대리뷰 참조) 전쟁귀족의 시대였다. “회남자에서 요임금의 모습은 무인 군주에 가깝다. 여씨춘추에는 요임금의 모습은 여러 종족들 간의 치열한 투쟁의 존재와 이 투쟁에서의 최종적 승자로서 나타나고 있다.”

 

성왕론의 요순은 조작된 이미지이다. “유교의 창건자들은 폭력에 대한 윤리적 혐오감이라는 전혀 새로운 감성을 중국 문명에 최초로 이념적으로 체계화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념은 현실에 없었다. 과거에도 없었다. “공자는 요순을 주자는 공맹을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아브라함을 보았고 루터와 칼뱅은 다시 구약의 예언자들을 보았다. 인도의 개혁 사상가들은 늘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로 돌아갔다. 그들은 현재에 없는 현재., 즉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현재에 업는 것이므로 과거를 빌려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았던 까닭은 그들이 살고 잇는 현재가 너무나 많은 부조리와 폭력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에 없는 현재를 보는 그들의 비전은 현존하는 시공의 인과 안에서는 탄생할 수 없다. 현실 질서의 인과의 밖, 시간의 밖의 시간의 차원이 없다면 인류문명의 결정적인 톨파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이념의 탄생이야말로 윤리적 각성, 초월적 긴장의 탄생을 말해준다. 무엇인가 부당하고 잘못되었다는 의식이 내포되어 있다면 초월적 계기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세계윤리종교들은 성과 속의 대립 위에 태어났다: “불의가 존재하는 무질서의 우주와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않는 질서의 우주그러나 유교는 특이하게도 그 성과 속이 모두 현세에 있다. 다른 종교들이 내세적 초월주의였다면 현세적 초월주의인 유교는 정치종교였다. “유학자들은 정치현실을 떠날 수 없다. 그들의 성인 군주는 하늘이 아닌 현실에 있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당대의 현실군주의 모습 속에서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왕응ㄴ 비현ㅅ길이자 당위적 현실이다. 그들의 군주를 성왕에 가깝게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엄숙하고 신성한 명령이다. 이 명령을 이행하는 일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다.” 그 긴장의 핵심은 왕권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였다.”

 

막스 메버의 말마따나 모든 국가의 본질은 폭력의 합법적 독점에 있다. 더 줄여 이야기하면 국가문제의 핵심은 폭력이다. 유교 성왕론 안에는 국가에 대항하는 국가라는 유토피아적 신화가 감추어져 있다. 유교는 국가폭력의 주인인 현실 군주를 절대적으로 평화로운 무결점의 요순 임금이라는 신화로 꽁꽁 묶었다. 유교의 국가 이념이 잇다면 그것은 폭력 없는 구가다. 폭력 없는 국가체제, 그리고 국가간 체제가 가능한가? 그것은 이미 국가 너머의 국가요 국가 간 체제일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그랬고 유교가 성왕론으로 그랬듯이 현실을 초월한 성의 이름으로 속을 컨트롤한 시기를 저자는 통섭 I의 시대라 부른다. “통섭 I의 세계에서는 성의 영역이 물적 현상계를 물샐틈없이 감싸면서 통섭하고 경고하고 계도하고 잇다고 믿었다. 물적 현상계는 그를 통섭하는 성의 영역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그림자와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단계에서 성과 속은 비록 분별되지만 같은 거소, 같은 시공을 나누어 쓰고 있었다. 물론 성의 압도적 위에서였다. 그래서 높은 곳, 하늘의 공간적 이미지가 어느 문명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햇다.”

 

저자는 우리가 말하는 근대성은 통섭I의 세계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축의 시대와 함께 인류는 고등문명의 세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근대성의 세계를 통섭II의 질서라 부른다.

 

통섭I의 질서는 막대한 긴장을 수반했다. 그 진장의 근본적 원천은 베버가 통찰했던 바와 같이 현세적 질서가 초월적 질서에 의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성속 통섭의 틀 자체가 강한 긴장의 원천이 되엇다. 그 긴장의 내가 결과 통섭II의 질서가 출현했다. 베버의 종교사회학과 역사사회학은 그러한 통섭관계에서 비롯한 역사적 제도적 긴장응ㄹ 강조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유럽에서 발생한 통섭 전환(통섭I에서 통섭II로의 역적)에 대한 하나의 뛰어난 사례분석이다. 통섭전환의 예는 유럽의 종교개혁이다. 중세 카톨릭 교황정치는 성이 속을 통섭하는 전근대 모럴폴리틱의 유럽적 표현형태였다. 개신교는 현세의 질서 자체를 신성화한 중세 카톨릭 교리에 반발했다. 예정설은 현세 인과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중립화했다. 그 결과 신성함의 근거는 내면화된다.”

 

저자는 그러한 통섭전환이 중국에선 장기12세기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송원연간에 관찰되는 초기근대의 증거들은 이 시기가 한당으로 이어졌던 중구의 고대제국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던 시기였다는 점에 있다.” 위진남북조와 510국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세습귀족체제는 무너지고 사대부 계층이 등장한다. “성의 구현이었던 황실, 조정의 질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신성함의 지위를 독점하지 못한다. 조정만이 아닌 재야가 공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공 개념의 함의 자체가 현실 체제의 황통의 정당성을 초월하는 보다 높은 수준의 보편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하버마스가 말했던 부르주아 공론장의 유교적 표현 형태를 읽을 수 잇다. 아니 근대적 公觀은 중국에서 일찍이 선취되었다공권력을 분점하던 귀족의 몰락하면서 송 이래 중국에서 성립한 절대주의적 황권이란 바로 이러한 황제 아래 전 인민의 평등(月印千江 萬川明月)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상황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 절대주의란 16세기경 유럽에 등장하는 절대주의 체제와 비견된다. 근대주권의 초기 형태 역시 동아시아에서 선행하고 있었다.”

 

주자학은 이런 시대의 이념이었다. 주자학의 이기론은 이와 기를 나눈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한당 시기까지 중국적 사유에서 이 양자는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다. 세계는 (유교), (불교) (도교)의 신성함 속에 잠겨 있었다. 즉 성이 속을 통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정주학에서 세계는 기로 이루어지고 기에서 가 분리된다. 정주학에서 이는 내면화된 윤리 개념이다. 이제 이는 기의 바다 속에서 힘써 탐구하여 찾아야만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제 자연과 사회질서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것으로 표상되지 않고 그 곳에서 작동되어야 할 이의 원리가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종교개혁 이후 신이 인간의 내면으로 숨었듯이(Hidden God) 이는 기의 바다에 숨어 버렸다. 숨은 신이 찾아야 할 대상이듯 이는 기의 바다에서 찾아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초기근대는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장기12세기의 오랜 결과가 누적된 것이었다. “이슬람과 당 제국이 흥기했던 7,8세기는 주요 문명권을 연결하는 세계교역망이 사상 최초로 전면화된 시기다. 광대한 이슬람권의 형성으로 중국과의 교역통로가 안정되었고 동남아의 번영으로 바닷길 무역로 역시 안정되었다. 송대의 도약은 당대에 형성된 세계교역망의 임팩트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시 세계화의 네트웤에서 당제국은 7세기 이후 번성했던 이슬람 제국과 함께 당대에 가장 거대했을 뿐 아니라 잘 조직되고 효율적인 정치체였고 대외문명교류에도 열린 태도와 자신감으로 적극적이엇다. 당시로는 최상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세계 도처의 최선의 주요 문명적 문화적 자양분들이 국제적 네트웤의 여러 매듭들을 따라 그 핵심 허브인 중국으로 모여들 수 있었고 그것이 송대에 집중적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런 자양분이 뿌려진 토양이 귀족이 몰락한 신분적 상황이었기 송대의 초기근대혁명이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황제 아래 모두 평등한 상황은 사회적 잠재력의 해방을 불렀고 이러한 변화는 후일 유럽의 15-16세기 초기근대와유사했다. 이 시대의 이념이었던 주자학은 대원제국이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만들었다. 보편성을 갖춘 세계제국으로서 초기근대라는 시대에 맞는 주자학의 보편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미조구치 선생은 북송 시대 정명도의 天卽理라는 언명의 혁명성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하늘(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초월적이거나 혹은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신의 이성으로 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사건이라 했다.” 천즉리 이전 중국의 세계관인 “‘주재자적인, 운명론적인 하늘에서 법칙적인 하늘로의 변화였다. 송대 이전 고대의 중국인은 하늘을 도(天卽道)라고 생각했고 그 도를 주재자적인 그래서 만물의 밖에 있는 초월적 실체로 생각했다. 따라서 인간은 각각 초월적인 그 도에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고고 한다. 반면 정명도의 천즉리는 인간세계의 일을 포함한 우주자연의 현상이 어떤 법칙성 가운데 있고 그 법칙성은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고 보는 새로운 우주자연관이다라고 풀이했다. 정주학은 기즉 속 우선의 교의였다. 따라서 정주학이 최초로 정립한 이기론은 통섭I이 아니라 통섭II와 원리가 같다.”

 

저자는 주자학의 천즉리 또는 이기론이 태어나기까지의 배경을 이렇게 정리한다. “통섭II의 질서란 일종의 세속ㅎ솨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세속화한 통섭I의 질서가 뿌리에서부터 크게 흔들리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중국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던 유라시아의 세계화 상황이 그런 것이었다. 당연히 믿어왔던 신성한 질서의 체계가 흔들리고 이내 거침없이 무너져갔다. 이미 남북조시대에 천즉도의 확고한 믿음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와 쾌락주의, 허무주의가 만연했다. 천은 다만 물질적 세계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일 뿐이라는 사상도확산되었다 여기서 속을 물샐틈없이 통섭하던 성의 질서에 균열이 가고 이어 조각나기 시작한다. 속의 세계가 성의 통제를 벗어나 꿈틀러기고 올라온다. 이러한 혼란과 방황의 이행기에 다른 문명의 종교와 문화가 홍수처럼 밀려든다. 夷狄은 군주가 되고 세상은 蠻戎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러한 상황인식에서 정주학은 정초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명은 조각나 흩어진 성의 체계를 다시 이어 보다 견고한 형태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과업이엇다.”

 

이상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말하고 하는 근대성의 재정의를 살펴보았다. 이후에도 저자는 유교적 근대성의 완성형으로서 조선후기의 유교정치를 자세하게 분석한다. 그러나 이책의 기본적인 요점은 이상에서 제시되었다고 보므로 여기서 줄일까 한다.

 

개인적으로 이책은 올해 읽었던 책중에서 최고의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의미있게 보았던 프랭크, 아리기, 암스트롱 등의 논의를 종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틀로 마감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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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최전선 - 지구의 극한으로 떠나는 실험 물리학 여행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김연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이책을 논평할 입장은 아니다. 이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책은 물리학의 첨단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첨단이라는 것이 물리학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대한 것이니 물리학 전공도 아니고 물리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하기야 그것이 나만 그런 것은 아니다. “조지와 그레이시는 기나긴 우주여행을 끝내고 드디어 지구로 귀환하여 오랜만에 휴식을 즐겼다. 이들은 술집에서 만나 우주여행에 관한 대화를 나누면서 지구의 포근함을 한껏 누릴 수 잇었다.조지는 바텐더에세 자신이 늘 마시건 파파야주스를 달라고 하면서 그레이시를 위해 토닉워터를 탄 보드카를 추가로 주문했다. 그런데 조지가 막 시가를 한 모금 빨아들이던 순간, 시가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서도 시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조지를 보고 놀란 그레이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조지가 앉아 있던 의자 뒤편의 카운터에 문제의 시가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시가가 대체 왜 저지기 있지? 내 뒷머리를 뚫고 지나간 건가? 그러나 뒤통수에 구멍은 없었다. 조지는 유리잔에 담겨나온 파파야주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떠 있는 얼음조각들이 마구 출렁대면서 서로 정신없이 부딪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레이시의 보드카 잔에 있는 얼음조각들은 더 격렬하게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둘이 잔을 바라보는 사이에 얼음조각 하나가 유리잔의 옆면을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졋다. 유리잔은 멀쩡했다. 조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우주공간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 이런 말도 안되는 환상이 보이다니…” 그들은 술집을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술집에서 나올 때 통과한 문은 사실 진짜 문이 아니라 견고한 벽에 문처럼 그려놓은 그림이었다.”(브라이언 그린) 이 해괴한 풍경은 양자역학이 연구하는 소립자의 세계를 의인화한 것이다. 에너지이면 물질이기도 한 소립자 세계에선 순간이동을 하거나 벽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일상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인만은 이렇게 말햇다. “상대성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12명뿐이라는 기사가 뉴스로 보도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고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논문을 세상에 발표하기 전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어었던 시절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논문이 공개되고 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12명은 분명 과소평가된 수치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나는 현재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잇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자신 잇게 말할 수 있다.” 파인만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당연함은 이책이 소개하는 세계에선 더하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물리학의 표준이 된 이후 물리학의 과제는 두 표준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까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책이 다루는 것은 그 두 이론의 통합이란 물리학의 화두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양자역학의 해괴한 세계가 우주론의 규모로 확대된 세계이다. 초끈이론은 그 해괴한 우주를 설명하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이다. 그러나 많은 물리학자들이 불평하듯이 초끈이론은 실험으로 증명되지 않고 있다. 초끈이론은 우주의 통합이론이 되려는 야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끈 이론이 원하던 대단원은 그 기미조차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부 물리학자들의 경우 점점 우주의 모든 것을 몇 개의 방정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있다. 끈 이론 자체는 실험적으로 증명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많은 물리학자들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끈 이론의 효과를 고려하는 게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쓸 결심을 한 것은 학회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이런 말을 했을 때였다. “제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현재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끈 이론입니다. 끈 이론으로 관측 가능한 과학을 만들 수 있을까요? 오직 실험만이 이 막다른 골목을 뚫고 나갈 것입니다.” 현재 물리학의 현실을 저자는 이렇게 요약한다. “이론 물리학자들은 현재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된 상태다. 아이디어는 넘쳐나고 어림짐작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다.” 물리학이 활력에 넘치던 시절, 멀리 갈 것도 없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태어난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물리학의 위대한 발전은 이론이 실험과 보조를 맞췄을 때 이뤄졌다. 때로 이론이 먼저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그 반대이기도 했다. 실험 물리학자들과 이론 물리학자들은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양자역학을 만들어 가면서 서로 경쟁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론과 실험이 공동연구를 펼쳤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두 분야 모두에 풍요로운 때였다. 그러나 활기찼던 이 상호작용은 현재 고착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론과 실험이 따로 노는 현재에서 저자가 이책에서 물으려는 것은 이것이다. “우주론과 입자 물리학의 다음 세대 실험이 이론을 현실에 정박시킬 수 있을까? 이책은 그 답을 얻기 위한 도전이다.” 저자는 그 답을 얻기 위해 실험물리학의 최전선을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빈다. 이책은 저자가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 찾아다니며 확인한 실험물리학의 현재를 기록한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책의 저자가 찾아다니며 기록한 것은 현재 물리학에서 해결하려는 문제들을 알고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저자가 어떤 답을 찾으려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에 이책은 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단순한 기행문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이책은 남극점의 절대적 고요와 바이칼호의 겨울, 폐광의 절대적 어두움, 사막의 적막함 같은 장소들에 관한 훌륭한 기행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책이 전제하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을 따라 읽는 것 자체가 힘들다. 최소한 앞에서 인용한 브라이언 그린의 책 두권 정도는 읽었다면 어느 정도 이책을 따라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던지는 그리고 저자가 찾아가는 장소에서 만나는 실험물리학자들이 왜 그런 오지의 난관을 이기고 그런 실험을 하려는지 그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책은 권할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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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자다 - 왕멍, 장자와 즐기다
왕멍 지음, 허유영 옮김 / 들녘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장자 내편에 대한 주석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주석서와는 다른 구성을 보인다. 이 책의 구성은 장자 본문을 따라가면서 본문에 대한 코멘트를 더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그 코멘트는 김용옥을 떠올릴 정도로 상당히 장황하다. 김용옥을 닮은 것은 양만이 아니다. 내용도 그렇다. 표지를 보면 ‘왕멍, 장자와 즐기다’란 말이 있는데 광고문구로 적당히 붙인 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저자는 장자라는 책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자라는 저자를 읽어내려 한다.

근대 이전에 성립된 주석서들은 자신의 의견을 자제하고 문구 자체의 의미를 밝히는 형식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석은 자구 대 자구로 본문이 한줄이면 그 아래 두줄로 축자적으로 붙이는 형식이다.

그러나 저자는 책 자체의 글자 하나 하나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자신이 장자라는 책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 대만이나 본토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백화 번역이 달린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본문을 달아놓고 번역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엄청난 의역을 한다. 그리고 나서 엄청난 길이로 ‘설’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본문을 전부 싣지도 않고 자신의 ‘설’로 연결이 되면 본문을 생략하기 까지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장자라는 책 자체보다는 왜 장자가 이런 말을 했는가를 묻는다.

새로운 형식이다. 분명 이책의 체제는 내편 6편의 주석 형식이다. 그러나 그 형식과는 달리 이 책의 내용은 장자라는 책에 대한 전반적인 입문서에 가깝다.

그러면 저자가 읽어낸 장자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저자가 읽어낸 장자의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것은 루루티아(ルルティア)의 음악이다.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마도 일렉트로니카의 등장이 아닐까 싶다. 일렉트로니카는 신디사이저가 보급된 1970년대에 성립했다. 지금은 공기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간단하게 키보드라 불리는 신디사이저는 음악에 혁명을 일으킨다. 구체적으로는 바로크 음악의 부활이었다.

클래식이라 하면 구체적으로 하이든 이후의 고전파를 말한다. 고전파 이후의 음악은 고전파에 의해 정립된 작곡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고전파 이전의 바로크 음악과 고전파 음악은 사운드 레이어의 구성법이 달랐다.

서양음악의 사운드 레이어는 4개로 이루어진다: 리드, 백그라운드, 레퍼런스, 패턴. 밴드 구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리드는 멜로디 레이어로 보컬이나 기타 등의 멜로디 악기를 말한다. 백그라운드는 리드 레이어의 화음을 연주하는 레이어로 역시 기타나 피아노 등의 화음악기와 백코러스를 말한다. 레퍼런스는 토닉과 기준이 되는 레퍼런스 화음의 레이어로 베이스 기타를 말한다. 패턴은 드럼이나 신디사이저로 어택감이나 공간묘사를 담당한다.

고전파 음악에선 리드 레이어를 중심으로 일치된 진행을 만든다. 그러나 바로크 음악에선 4개의 레이어가 서로 독립된 진행라인을 갖는다. 그런 진행을 대위법이라 한다. 댄스뮤직으로 출발한 일렉트로니카는 바로크적 진행을 부활시킨다.

댄스홀에선 화음진행이 아니라 리듬이 중요하며 대위법적 진행이 더 어울린다. 결국 일렉트로니카에선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진행을 음악의 중심으로 삼아 분위기와 리듬감을 강조하게 된다. 4개의 레이어가 일치된 협화음적 진행이 아닌 대위법적 진행을 갖는 바로크적 논리는 80년대 드림 팝, 노이즈 팝 90년대 트립합, 고딕 메탈의 혁신을 일으켰다.

멜로디 진행과 독립된 대위법적 진행으로 모호해진 공간과 사운드 윤곽은 불안정한 느낌을 만들어 앰비언트와 같이 꿈꾸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거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처럼 슬픔, 분노 등 부정적 정서의 배경을 만드는데 적합하다.

보통 루루티아의 음악를 '환상적이다' '신비감과 광기가 느껴진다'고 한다. 이런 인상은 바로크적 논리의 연출효과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곡의 분위기가 만드는 이미지이다. 루루티아의 음악에서 우선되는 것은 사운드가 만드는 '분위기'이며 분위기는 레이어의 대위법적 관계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바로크적 논리의 문제는 멜로디 라인이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댄스뮤직이면 모를까 아시아에선, 거의 멜로디만 듣는 아시아인들에겐 그런 음악은 호소력이 없다.

루루티아 음악의 특징은 바로 바로크와 고전파의 절충이다. 보컬이 아예 없거나 존재감이 약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과 달리 보컬의 존재감이 강하고 멜로디가 아름다운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는 보컬과 하위 레이어의 긴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루루티아 음악의 매력 역시 그 긴장관계에서 나온다.

작곡가가 아닌 보컬로서의 루루티아는 특이하다. 그녀는 숨을 내쉬고 바로 삼키듯, 맑고 가는 달콤한 음색으로 언제나 소곤거린다. 웅얼거리듯 소곤거리는 것은 지금, 여기의 사건보다는 여기가 아닌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하는데 적합하며 자기주장이 약하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라져간 것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며 깨질 것 같은 덧없는 아름다움이다. 그녀 음악의 신비감은 이러한 보컬의 정서에 하위 레이어의 윤곽이 불분명한 텍스쳐가 대비되어 만들어진 효과이다. 그러나 바로크적 텍스쳐가 만드는 분위기에 멜로디 라인의 통일성이 더해져 만들어지는 아름다움은 그녀가 원용한 앰비언트나 스칸디나비아 메탈에선 보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그 통일감은 환상이다.

루루티아 음악의 정서와 사운드는 스칸디나비아 메탈에 가깝다. 시끄럽다는 말이다. 메탈의 정서가 그렇듯 루루티아 음악의 배경은 탐욕과 위선, 광기, 잔인한 폭력의 세계이며 그런 세계에 대한 분노, 슬픔, 절망, 좌절을 표현한다.

보컬과 백그라운드 레이어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멜로디로 표현하고 부정적 세계는 레퍼런스와 패턴 레이어의 어두운 노이즈로 표현한다. 루루티아 음악의 의미는 레이어의 긴장관계에서 만들어진다. 문제는 세계에 대한 정서를 표현하는 멜로디 레이어, 즉 보컬이다.

루루티아는 속삭인다. 보통 팝에서 whisper라 말하는 것으로 보사 노바에 잘 어울리지만 하위 레이어가 두껍고 시끄러운 메탈에선 묻혀버리는 목소리이다.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해법은 프로듀싱이다. 바로크적 텍스쳐에 묻히지 않게 편집한다는 말이다. 라이브로 들을 수는 없는 음악, 그것이 루루티아의 음악이며 루루티아의 음악이 환상인 이유이다.

저자는 장자의 세계가 그와 같은 환상이라 본다.

장자의 첫편은 소요유이다. 논어의 학이편 1장이 그렇듯 중국 고전에서 처음에 오는 장은 그 책 전체를 규정한다. “장자가 주는 첫인상은 ‘소요’라는 두 글자로 함축할 수 있다. 장자는 일생동안 줄곧 소요에 이르는 길, 즉 인간 내면의 초탈과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소요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 상태이자 개인이 사회와 집단의 관념적 구속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면 정신세계의 자유와 독립을 의미한다. 이것은 근현대에 서양에서 들어온 개인주의 관념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소요는 사회와 집단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가치판단에 대한 주관적인 해방 또는 일시적인 망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주관적인’ 해방과 ‘일시적인’ 망각이 장자가 지금까지 읽혀온 이유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그 해방과 망각은 아Q정신과 닮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살다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패배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 이유 없이 구박을 당하고 모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루쉰(魯迅)의 소설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Q는 그런 상황에서 매우 독특하게 대처한다. 시골에서 날품을 파는 아Q는 마을 사람들에게 자주 멸시당하고 이유 없이 맞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는 늘 패배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당한 멸시와 패배를 아주 간단한 방법을 통해 승리로 바꾸어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한다. 아Q가 애용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하나는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이유 없이 자신을 때린 사람보다 자기가 훨씬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자신처럼 지체 놓은 사람이 하찮은 인간들을 상대해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한다. 무서워서 상대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생각하고는 자신의 패배와 굴욕을 잊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앞의 방법과 반대로 자신을 완전히 낮추는 방법이다. 자신은 형편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모욕을 당하거나 그런 패배를 당할 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Q가 애용하는 세 번째 방법은 자신이 당한 패배와 모욕을 자기보다 약하고 못한 존재에게 전가시키는 방법이다. 강자에게 뺨 맞고 약자에게 분풀이 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아Q가 늘 얻어맞고 모욕을 당하면서도 늘 즐겁고 낙천적인 것은 이처럼 현실의 패배와 굴욕을 그 나름의 조작법을 통해 정신적인 승리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Q는 늘 패배하지만 늘 승리자이다.” (이욱연)

장자는 어렵다.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배운 사람 그것도 엄청나게 배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2천년이 넘도록 읽혀온 이유는 장자가 정신승리법을 말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실에서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선 한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들, 특히 글 읽는 지식인들은 장자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거대함과 웅대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승리법의 최고봉이 아닌가. 정신적인 승리가 아니라면 어디에서 이렇게 확실하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춘추전국시대부터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 쓰이지 못하면 한평생 허송세월하고 어저다 운이 좋아 높은 벼슬에 앉는다 해도 느닷없이 재앙이 닥쳐 하루아핌에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곤 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여러 차례 남에게 모함을 당하기도 하고 큰 뜻은 품었으나 재주가 변변찮고 운이 없는 탓에 가난과 실의에 빠져 시름겨운 한세상을 살다 가기도 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온전히 정신적이고 완벽하게 무조건적인 승리조차 얻을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장자가 기재이고 독특한 논리로 훌륭한 글을 썼다 해도 그의 글을 읽다보면 ‘아Q 정신’이 응집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울 것은 없는 말이다. 중국혁명 직후 장자는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중체서용이니 떠들며 너희가 힘은 셀지 몰라도 우리는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는 식으로 현실의 패배, 정신의 승리를 말하며 중국을 말아먹은 아큐정신의 궁극이라는 논리였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논리가 살아남지는 않았다. 눈 감고 아옹하는 아Q가 되기에 장자는 지나치게 똑똑한 사람이었고 현실을 비참할 정도로 철저하게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장자가 보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가?

“노담의 제자 백구가 제나라에 도착하자 형벌을 받아 기시된 시체를 보았다. 시체를 밀어 바로 누이고 조복을 벗어 덮어주엇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곡하며 말했다.

오 그대여! 천하에는 피살자가 많은데 그대가 먼저 당했구려! 말끝마다 도둑질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하지만 영욕으로 핍박하니 이런 병통이 나타났고 재화가 한곳으로 모이니 이런 쟁투가 나타났다. 지금은 사람을 몰아 세워 병들게 하고 사람을 모아 싸우게 하고 사람의 몸을 곤궁하게 하여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재물을 위해 간계를 부리고 지혜롭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고 어려운 일을 시키고 감내하지 못하면 죄를 주고 무거운 임무를 맡기고 다하지 못하면 벌을 주고 먼 길을 가게 하고 이르지 못하면 죽인다. 그러므로 부득이 민(民)은 지혜와 힘을 다해 꾀로 죄를 모면하려 한다. 무릇 힘이 부치면 꾀를 쓰고 지혜가 부족하면 도둑질을 하는 것이다. 도둑이 횡행하는 것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옳은가?” (장자 잡편 칙양)

이런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제자백가 모두가 물었던 질문이다. 제자백가의 아버지라 해야 할 공자는 성인의 질서로 돌아가자(복례 復禮)를 말하면 지배층의 질서를 바로잡아 천하를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나 논어 미자편의 5장에서 7장까지 나오는 은자들은 공자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탁한 물이 도처에 도도하게 범람하는데 누가 바꿀 수 있겠는가? 그대는 나쁜 사람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란 은자들의 조롱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햇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어른과 어린이의 질서를 폐기할 수 없는데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폐기할 수 있겠는가? 자기 한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사회관계를 파괴한 것이다. 군자가 벼슬하는 것은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도의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 (리쩌허우의 해석)

공자와 은자들의 차이는 세상이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엿다. “새나 짐승과 함께 살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의 무리가 아니면 누구와 함께 하겠느냐? 천하가 태평하다면 내가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신념을 지키기 위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에서 공자 자신이 항상 말한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사람다움이란 뜻인 인(仁)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러나 은자들은 동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는 사회의 근간인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와 신하는 오늘날 상급자와 하급자라는 직무상의 관계이고 그 원칙은 의(義), 즉 공평하고 정직하며 공적인 일을 받들고 법을 지키며 편을 들어 사사로움을 도모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속이거나 아랫사람을 억누르지 안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은 가정 중심의 가치관이다. 사랑에 그치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서 피차에 언제나 돕고 이끌어주며 관용하고 양해하며 어른을 높이고 어린이를 어루만져주는 것” (리쩌허우) 공자가 하려한 것은 그런 당연한 도리가 천하에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자와 그를 조롱한 은자들이 살던 시대는 그것이 당연할 수 없는 시대엿고 시대가 그렇다는데 공자와 은자들은 이견이 없었다.

논어에서 공자는 자신을 조롱하는 은자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은자들은 그런 공자를 조롱하며 공자가 되돌아가자는 성인의 질서(예)를 조롱했다. 그 은자들은 도가 계열의 선구였을 것이다.

그 은자들의 맥을 잇는 노자는 전쟁과 살육, 착취와 억압은 권력의 본성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권력이란 것 자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러나 “노자는 사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부정하지 않았다. 입신출세를 철저하게 부정한 것은 장자가 처음일 것이다.” 치국의 도를 말하던 제자백가와 달리 장자는 “완전히 상반된 길의 극단에 있었다. 그는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을 모조리 부정했다. 왕후와 귀족을 부정하고 학문을 추구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도 부정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모델로 삼은 것은 왕후도 제자백가도 아니요 곤이나 붕새, 이백이나 베토벤 같은 천재도 아니었다. 바로 작디작은 뱁새와 두더지였다. 천재형 지식인들이 정신적 우월감을 느끼며 세상을 업신여기고 잘난 척했다면 장자는 자신에 대한 기준을 보이지도 않을만큼 낮춰서 뱁새와 두더지 같은 마음으로 세속의 명리와 권력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소요와 자유를 추구했다. 그는 밖에서부터 먼저 출발하지 않고 내부에서 먼저 모든 명리를 부정하고 세속에서 멀리 떨어져 화를 피하고 근심을 멀리했다. 세속에서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얻기 위해 추구하는 모든 수단을 멀리했다. ‘자기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로움, 만족감, 다른 사물과 환경에 대한 무관심 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인정하지 않았다. 장자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한 것은 자기 앞에 놓인 현실에 대한 무력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소요는 절망이다.

공자가 천하를 유세한 것은, 도를 다시 세우려 한 것은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다. 장자를 읽어보면 장자는 유가계열에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공문에서 장자는 출중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글에 엿보이는 “강한 자신감, 강한 자부심, 강한 사명감”은 천하를 논하는 유가 선비의 태도이다. 주자를 비롯한 송유들은 노자는 싫어해도 장자는 좋아했다. 자신들과 뿌리가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왔을 때 천하는 무도(無道)했고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알아주는 이가 없어 번번이 실패했고 결국엔 자살과 모험, 정신적 해탈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사람은 위험한 모험을 하든가 자신의 지혜를 숨기고 어수룩한 것처럼 핻동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편 전체를 통해 장자가 바라보는 공자에 대한 시선은 따뜻하다. 그러나 공자의 주장에 대해선 냉정하다. 공자의 논리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결코 추상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당시의 시대에 부적합하다고 생각해서 나온 것이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비극적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결과를 분명히 알 수 있는 형국에서 한발 물러설 줄 모르니” (왕보) 지혜라 할 수 없다.

흔히 불난 집의 비유를 들어 공자와 장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웃에 불이 났으면 물 한 통 가져다 뿌린다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자는 마땅히 뿌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도리니까. 그러나 장자는 그것은 의(義)도 인(仁)도 아니라 말한다. 그것은 동정일 뿐이며 자기만족일 뿐이라는 것이다. 장자라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냥 앉아 있겠다고 말한다. 장자는 냉정하다. 이 차가움을 장자는 ‘무정(無情)’이라 말한다. 대붕이 되어 소요하는 것은 무정해야만 할 수 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세의 자잘함은 보이지 않을 때 소요는 가능하다.

무정을 말할 때 친구 혜시는 정(고대 중국에서 정은 감정을 말한다)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 논박한다. 혜시가 옳다.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물 한 통 뿌리는 수고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인(仁)하지 않다. 인(仁)은 손익계산이 아니라 사람이면 마땅히 느끼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인(仁)할 수 있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장자는 공자의 말을 잘 알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仁)해서는 천하의 불을 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불을 끄려는 마음 자체를 없애야 한다. 사람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무정이란 말은 소요란 말은 철저한 절망의 표현이다.

언뜻 장자의 소요, 좌망, 무정 등은 불교의 해탈, 무욕, 무아 등과 닮았다. 실제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장자의 개념을 빌려 불교를 이해하고 불경을 번역했다. 그리고 선불교는 도가식으로 불교를 이해한 결과였다.

그러나 장자의 소요를 불교의 열반이라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문이다. 그렇게 이해하기에는 장자의 논리에 자기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다투지 않고 논쟁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논쟁하고 다투었고 한편으로는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으로 홀로 앉아 세상의 모든 외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잊어버리는 ‘좌망(坐忘)’을 주장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모든 걸 꿰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와 현란한 언변, 웅대한 기백을 과시하며 자신을 드러내 자랑했다. 이런 글이 마른 고목 같은 몸과 식은 재 같은 마음에서 나왔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기과시욕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고 열정으로 잔뜩 격앙된 상태라야만 이런 글을 쓸 수 있다. 장자는 세속을 거부하고 거듭 반복해서 초월하고 또 초월하는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들에0서 수신제가평천하라는 이상을 하찮은 것으로 조롱하고 비웃었고 입신출세하려는 이상을 부정했다. 그랬던 장자가 왜 뒤에서는 ‘응제왕’을 통해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제왕과 유토피아에 대해 논했단 말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비(非) 제왕과 무(無) 제왕을 쓰든가 최소한 망(忘)제왕을 썼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결국 장자의 소요란 자발적인 은퇴가 아닌 강제된 유배였다. 유배된 장자가 쓴 글을 저자는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천하 속에서 천하를 떠나는 장자의 글은 ‘사변적 기능보다 심미적 기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은 철학이 괴로운 처지에 빠진 인간을 위해 찾아낸 아름잡지만 힘없고 속이 텅 비어 있는 열매와도 같다.” 장자의 글은 “훌륭하지만 읽는 이를 탄식하게 하고 감탄하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씁슬한 건 어쩔 수가 없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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