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지는 사람들 -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셰리 터클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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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스미노 히카게 중학교 2학년 존재감이 제로인 여자애...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다. 촌스러운 외모와 성격으로 초등학교에선 이름조차 외워준 사람이 없었고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심기일전하려고 했는데 (차에 치이려는 고양이를 구하려다 오토바이에 치었다) '고양이 밖에 안보였다' 오토바이 남자의 말. 존재감 없는 게 화근이 되어 전치 2개월짜리 부상을 입었다. 다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고 왕따를 시키는 것도 아니니 아무렇지 않..지만... (토야마 에마)

 

'나 여기에 있어'란 만화의 설정이다. 왕따, 등교거부, 니트족 등의 문제를 다룬 만화이다. 인기를 끌었던 너에게 닿기를과 마찬가지로 이 만화의 주인공 설정은 현실적이지는 않다. 존재감이 없다고 교통사고가 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2년동안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한테 졸업식 날 '너 이름이 뭐였지?'란 말을 들었던 난 꽤나 음침도가 높았던 것 같아요. 힘들어요.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때때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만화입니다."란 작가의 말처럼 "새까만 어둠의 세계에서 날 찾아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는 묻는다. 계속 이대로일까?

 

그렇지 않아! 해바라기라면 계기가 있으면 바로 친구를 사귈 수 있어! 매일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 해바라기를 봐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야(^^)"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다.  내 취미는 블로그에서 '해바라기'라는 닉네임으로 하루 한 번 찍은 사진이나 생각한 걸 적어 인터넷 일기에 공개하고 있다. 블로그는 봐주는 사람이 덧글을 주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주고 받을 수가 있다. (블로그에 달리는 덧글은) '나'를 꾸준히 지켜봐주는 소중한 마음의 지주이다." (토야마 에마)

 

그러나 그 지주는 진짜가 될 수는 없다. "현실세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동네 애듫이 숨바꼭질에 끼워줘서 이런 식으로 술래를 기다렸지. 계속 계속 기다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주질 않아서 울면서 집에 갔다. 그때랑... 똑같잖아... 기억 못하는 애는 찾지도 않지... 찾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외로워... 누군가... 누군가 날... 알아차려줘." (토야마 에마)

 

"조금 용기를 내면 세상은 변할 거야" 이 만화는 그 누군가를 찾으려는 히카케의 용기를 이야기한다.

 

이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네트웤의 세계는 블로그의 댓글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 히카케(일어로 그늘)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히카게가 그랬듯 자신을 알아차려줄 누군가를 찾아 네트웤에 로그인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를 진짜 찾아나설 작은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어주는 동시에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에 시선을 돌린다. 이런 현상은 문자 메시지의 홍수를 헤쳐나갈 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로봇과 상호작용을 이룰 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전에 없던 염려로 무생물들에게 열중한다.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실망과 위험을 두려워한다. 테크놀로지로부터는 더 많은 걸 기대하고 우리끼리는 서로 덜 기대한다. 테크놀로지는 친밀성의 설계자를 자처한다. 오늘날, 그것은 실제를 도망가게 만드는 대체물들을 제안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과 만날 때 매력적이다. 우리는 정말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외로움을 타면서도 친밀해지는 건 두려워한다.

 

"아무도 진짜 나한테는 관심없어. 다들 스타 연기자 모리카와 토모미에 대해서만 궁금해해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15살짜리) 천재 소녀 토모미 말야. 진짜 모습 따윈 필요도 없어. 말해봤자 소용없다구 모두의 머리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니까. 배우는 사람의 기억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얘기 있어. 가끔 생각해.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하고 아무도 내 짐짜 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말 그대로 거짓말쟁이인 채 잊혀져 버리게 될까 하고 나,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 은둔형 외톨이인) 카요가 되고 싶었어. 카요는 나 같았으니까. 약간이나마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않음 내가 사라질 것 같았어. 사실 난 어디에도 없고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배우 토모미라는 딴 애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바보같지?" (카와하라 유미코)

 

토모미가 하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닮은 카요란 캐릭터를 창조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루는 자신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식으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상처입었을까? 상처입은 소녀. 거짓말과 제멋대로 구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소녀. '비현실'속에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소녀는 '현실'을 의식한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지 모른다. 하루 탓이야. 비린내나고 기분 나쁜 현실을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했다. 그 한가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명랑하게 행동하고 연기하고." 사랑하고.

 

그러나 사랑이 구원일까? 시나리오대로의 사랑 밖에 모르는 토모미는 현실의 사랑도 구원일지 의심한다. "난 모르겠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두 버릴 수 있어? 사랑 얘기는 다 그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사랑이라는 계기 하나로 그 때까지 자신이 지켜온 모든 걸 전부 버리고 말지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인양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도 되는 듯. 하루는 그런 것 믿을 수 있어?" 그러나 누구나 믿을 수 없으면서 믿고 싶은 것이 그런 것이다. "하루가 믿게 해줘."(카와하라 유미코)

 

그러나 그 믿음이란게 얼마나 견고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 왜 그러셨어요? 혹시 엄마를 의심하셨어요? 그래서?"

"아니 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르겠다."

"전 들어야 해요. 저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둘러대려는게 아니고 정말 모르겠어. 어떤 말을 사용하든 다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겠다. 사랑이었다. 모든 것이 그랫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내 인생은 너무도 황폐해진다. 내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실수한적이 없는 인생이었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로 사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노력해도 사과는 서로를 더 고개들지 못하게 만들뿐이고 노력은 펼쳐진 현실으 어떤 부분도 바꾸지 못했고 위로도 격려도 내뱉는 즉시 온기를 잃고 사라졌다. 그래 사랑했었지 좀 더 많이 보고 싶고 좀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나지막한 이야기들이 즐거워서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랑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가슴까지 와 닿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십 년간 조금씩 바라 온 기억의 흔적, 애정의 잔해. 하지만 그 순간에는 잘 몰랐다. 한 번 두번... 조금씩 확실해졌지 이제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아니 움직일 마음 자체가 없어진 것같다."

"그렇다면 왜?"

"네 엄마에게 쏟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랬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 후회? 죄책감의 비뚤어진 표현? 전부 그럴듯하지. 참 이해하기 쉬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건가보다 싶어지지. 하지만 그것으로 전부냐 하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사람을 부수고 망가뜨릴 정도의 감정 자체가 남아있질 않았는데 왜? 네 엄마에게 퍼붓고 덮어씌운 것은 그 사라지고 남은 모든 감정의 부스러기나 흔적 같은 것들 아닐까 싶다." (윤지운)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진짜 같은 환상을 만든다. 디지털 연결망과 사교 로봇은 친구 맺기를 요구하지 않는 교류라는 환상을 제공한다. 우리의 네트워크화된 삶에는 서로 묶여 있는 순간에도 서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대화보다도 문자 메시지가 선호된다. 로봇이 우리를 보살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자기와 상호작용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에 의해 성격이 형성되는 가상 인간 마일로를 공개했다. 마일로를 세상에 소개하는 비디오는 강렬하게도 한 젊은이가 가상 정원에서 마일로와 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연이 끝날 때쯤엔 분위기가 무르익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젊은이가 마일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기계와 나누는 새로운 친밀감을 통해 우리 자신 및 관계가 재창조된다.

 

그러나 그런 친밀감은 진짜일까? 나에게 진정성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능력, 인간적 경험-태어나고, 가족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현실과 상실감을 아는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컴퓨터와 로봇에게는 함께 공유할 그런 경험들이 없다.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교한 일본산 로봇이 소위 돌봄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남자 친구와 맞바꿀 의향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만일 로봇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누군가 정말로 나와 함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겠어요. 앤이 찾는 것은 외로움을 가시게 해줄 위험 없는 관계였다. 각본대로 행동하는 것일뿐이더라도 즉각 반응을 보이는 로봇이 까탈스런 남자친구보다 더 나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가짜는 외로움을 없애지 못한다. 미리엄은 다른 어떤 존재와 친밀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혼자엿다.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나고 로봇한테 의지하는 동안 나는 우리 역시 그녀를 버린 거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편견없이 무생물에 애착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문득 기술적 문란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의 배경이 궁금해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과 부대까며 사는 어려움과 피로의 소리를 접한다. 우리는 인간적 취약성이 드러나는 대목마다 로봇을 대입한다. 사람은 요구가 너무 많지만 로봇의 요구는 좀더 감당이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만 로봇은 그러지 앟을 것이다.

 

스크린의 채팅도 다를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 역시 가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에서의) 그러한 정체성 연기들은 정체성 그 자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로봇공학과 네트워크한 삶이 처음 교차하는 지점이다. 온라인 연기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은 보상을 얻고픈 마음에서 온라인 삶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외롭고 고독했다면 아무것도 안 하느니 그거라도 하는 편이 나아 보였을 테니

 

그러나 저녁 나절, 네트워크 게임에서 아바타 대 아바타 대화를 하고 나면 잠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젖다가 그 다음에는 낯선 이들과의 허약한 연대 속에서 묘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에서 팔로잉을 하면서 팔로워들이 어느 정도까지 친구인가를 궁금해한다. 온라인 페르소나로 자신을 재창조하여 새 몸과 새 집, 새 직업, 새 로맨스를 부여하는데 가상 커뮤니티의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어느 순간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이 엄습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퍼뜨려나갈수록 스스로 버림을 받게 될수도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몇 시간을 접속하고 나서도 소통했다는 감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잇지 않을 때 친밀한 기분을 느낀다.

 

열세살짜지 소녀는 내게 말했다. 전화는 너무 싫어요. 음성 메일은 듣지도 않고요. 문자 메시지는 적당한 접속시간, 적당한 조종시간만을 젝5ㅗㅇ한다. 그 소녀는 현대판 골디락스다. 그 애에게 문자 메시지는 사람들을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게도 아닌, 딱 적당한 거리에 두는 수단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친밀성을 획책하는 경우엔 인간관계가 단순한 연결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손쉬운 연결이 친교로 재정립되낟. 다시 말해 사이버 친교가 서서히 사이버 고독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은 로봇에 프로그래밍된 하는 연기와 구분이 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혜민이는 신비에게 자기 자신을 제외한 '세계'와 마찬가지니까. 누군가를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간단해 원하는 것을 모조리 채워주면 되잖아. 어디로도 갈 수 없도록 고립시켜 버리는 것, 타인과 접촉하기 위한 통로, 건너가지 위한 길목. 아주 세심하게 없애버렸지. 싫든 좋든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내가 처음 혜민이를 봤을 때 그 앤 그냥 말주변이 부족하고 낯을 가리는 평범한 아이였어. 괴로운 일을 당하면 슬퍼하고 자신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울었지 하지만 점점 그 앤 울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게 되고 고개를 들고 싫은 말은 무시할 줄 알게 되고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까딱하지 않게 되었어. 강해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애는. 신비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어온 거야. 잘못한 것은 네가 아니다. 뒤틀린 것은 세상일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먼저 손을 내밀 필요가 없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속삭여 주면서. 잘 알고 있었거든 신비는. 옳다 그르다라는 것은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애가 인간에게 무지하다는 것을. 고개 돌리고 있는 사람까지 챙기려들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고 하물며 적의를 보이는 애야 말 할것도 없지.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애에게 가혹해지고 또 그럴수록 그 애는 번거로운 일에서는 눈을 돌려버렸어. 그런 악순환을 철저히 준비해왔어. 신비에게가 아니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도록 ." (윤지운)

 

시니컬 오렌지의 일부이다. 재혼으로 혜민과 남매가 된 신비는 혜민과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다. 이미 부모가 이혼해 남남이 된지 오래되었는데 법은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혜민을 곁에 둘 수 잇는 방법은 그녀에세 에덴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 만든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신비가 혜민에게 만들어준 에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묻는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정서적 삶의 지형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영위하고 싶은 삶을 제공하는가? 저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안에 들어가도 돼?"

"... 안 돼. 이 방엔 죽은 거랑 죽어가는 것밖에 못들어가. 그러니까 하루는 들어갈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 현실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하루가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나 살아있는 게 무서워. 배우가 아니면 봐줄만한데도 없는데 스튜디오가 무섭고 사람이 무서워. '살아 있어' '살고 싶어'라고 여러가지 것들이 얘기 해. 공기 속에 여러 생명이 섞여 냄새나고 무서워서 나 질식할 것같아. 그래서 난 죽은 방에서 죽는 꿈을 꿔. 영화나 책에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해피엔드는 해피엔드니까 좋겠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꿔. 내가 행복한 주인공이 된 꿈. 자물쇠를 걸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꼭꼭 잠근 후에 죽은 것들에 파묻혀. 언제나 변하지 않아. 언제나 행복한 세계. 그리고 결국엔 죽은 것들과 닮아가. 꿈도 나도. 그치만 하루 때문에 많이 망가졌어.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마!!"

"그렇담 더욱더 들여보애 줘야 해. 토모미는 살아 있어. 죽은 것들은 널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영화랑 책을 만든 건 현실의 인간이야. 난 아직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알아. 이 녀석들보다 훨씬 나. 종이나 필름을 살아 있는 세상과 바꿔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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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 -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타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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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세상이 고해라 할 때 우리는 보통 고통을 떠올린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해라 할 때 는 고통이 아니라 괴로움을 말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에 저항하면 더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긴장을 풀고 호흡을 하면서 소리내는 것을 참지 않았고 내몸이 지능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여느 동물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 몰두하면서 내게 펼쳐지는 드라마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고통을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뭔가가 바뀌었다. 아기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고통의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더 이상 호흡으로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엄청난 고통은 뭔가가 잘못되어간다는 의미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자신감은 사라졌고 긴장 없이 고통의 파도를 맞겠다는 결심은 잊혀졌다. 강렬한 출산의 순간에 나는 고통과 대립하며 완전히 교전 중이었다. 두려움과 저항으로 고통에 반응하는 것을 많이 봐온 산파는 즉각 나를 안심시켰다. ‘잘못된 건 없어요,… 모든 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단지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그녀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번 말을 반복했고 타는 듯한 고통, 폭발할 것 같은 압력, 찢김과 탈진 중에 나는 다시 깊게 호흡하고 긴장을 푸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고통일 뿐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열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붓다는 생노병사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고통을 고, dukka라 한 것이 아니다. 팔리어 dukka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고통이 아니라 뭔가 어긋났다는 말이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저자는 무엇이 고통을 괴로움으로 바꾸는지 묻는다. 붓다의 답은 무아(無我)였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타인이나 인생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나타난다. 무가치감과 소외감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우리가 지루하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무가치감의 트랜스는 삶이 고통스럽고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껴질 때 더 강하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은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이다. 붓다는 분리되었다는 그 느낌, ()라는 느낌이 문제의 근원이라 말한다.

 

우리는 가족이나 학교 친구 혹은 직장 동료 같은 소속 집단이 모두 우리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하라고 똑똑하고 매력있고 능력있고 힘있고 돈이 많아 남보다 뛰너나 보이라고 압력을 받으며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의 이유를 기독교에선 원죄라 부른다. “원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본성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생이 편안할 자격도 없다. 우리는 쫓겨난 사람들이고 만약 동산에 다시 들어가길 원한다면 원죄를 지고 태어난 자기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의 부모와 문화는 우리에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에덴 동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할 때 우리는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진다.”

 

자신이 어긋났다는 근본적인 느낌, 그것을 붓다는 고()라 불렀다. 근본적인 불안감,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끊임없이 자기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우리는 완벽한 몸과 용모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준을 만족시키려 흰머리를 염색하고 주름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직위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훈련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명상을 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워크샵에 참가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맘 편히 즐기기보다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줄이려 애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물러선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스토리를 지어내 끊임없이 자신에게 전하는 식으로 두려움과 수치심의 생생한 느낌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막연한 불안 상태로 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재난 시나리오가 흘러다닌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실패에 단단히 대비하는 태도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다를 떨면서 존재의 불안감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전략은 불안감을 없애기는커녕 강화할 뿐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괴로움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붓다는 모든 고통이나 불만족은 우리를 분리된 개별 존재로 보는 잘못된 이해때문이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기는 익숙한 생각, 정서, 행동 패턴의 집합이다. 마음은 이것들을 한데 묶어 시간이 가도 연속성을 갖는 한 독립된 개인의 사적인 스토리를 만든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나의스토리에 포함되고 나의경험이 된다. ‘가 두려운 것이고 가 욕망하는 것이다.아잔 붓다다사는 경험에 자기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습관을 -내세우기(I-ing)’나의-내세우기(my-ing)’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어떤 식으로건 자기에 속하거나 자기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의 주어를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명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흔히 경헙되는 것은 흥분, 불한, 초조, 분노 같은 감정의 파도와 끊임없는 지적과 판단, 과거 기억과 미래의 스토리 들 걱정과 계획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붓다는 지속적인 정서적, 정신적 자동반응을 폭포가 불렀다. 그 이유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 우리가 너무 쉽게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휩쓸려 가버리기 때문이다. 사람, 상황, 마음 속 생각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제로는 몸에서 일어난 감각들에 대한 반응이다. 누군가의 무능함을 참지 못하고 비난을 할 때 사실은 우리 자신의 불쾌한 감각들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마음이 끌려 열망과 환상으로 가득할 때 사실은 유쾌한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동반응적인 생각, 정서, 행동의 소용돌이는 이와 같이 감각에 대한 자동반응으로부터ㅓ 나타난다. 이들 감각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자동반응의 폭포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는 생생한 깨어있음으로부터 온전한 의식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감정의 주인이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저 일어나는 상()일 뿐이라는 것, 그 상들의 주인은 없다는 것 내가 라 부르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괴로움을 다루는 첫걸음이다.

 

느낌이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것들이 그냥 제멋대로 오고 간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감각은 난데없이 나타났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아는 인지알 수 없었다. 진동, 박동, 따끔거림을 느끼는 는 없었다. 불쾌한 감각에 짓눌린 가 없었다. 생각을 만들어내거나 명상하려고 노력하는 가 없었다. 삶은 단지 일어나고 있었고 현상들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일 때,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무가치함이란 원죄는,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벗어버릴 수 있다.

 

모든 지나가는 경험을 이 또한 마찬가지의 개방성으로 수용하자, 몸과 마음 안의 어떠한 경계나 경계나 견고함의 느낌도 사라졋다.” 내 안의 생각과 느낌도 나 밖의 세계의 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 정서, 생각은 날씨처럼 의식의 하늘에서 그저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뉴잉글랜드 가을의 아름다움에 감격했다. 나무들은 지면에서 높이 솟아 있었고 노할고 빨간 나뭇잎들은 선명한 푸른 하늘과 대비되었다. 색깔들은 내 몸을 통해 전개되는 생생하고 감각적인 삶의 일부로 느껴졌다. 바람 소리는 나타났다 사라졌고 나뭇잎은 땅으로 춤추듯 떨어졌으며 새는 가까운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전체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안의 삶처럼, 어떤 것도 고정되지도 견고하지도 막혀있지도 않았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알았다. 그 다음 복부 경련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지 자연 세계의 또 다른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통증과 압력이 땅의 단단함, 떨어지는 낙엽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는 그저 고통이 있었고 그것은 땅의 고통이었다.”

 

저자는 우리의 근원적 불안감, 원죄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라 말한다. 그저 불안감이란 느낌이 거기에있다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승찬 스님은 참된 자유란 불완전함에 대해 근심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욕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병이 들고 약해진다. 불완전함을 편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달라지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을 두려워는 데 빠져 우리 삶의 순간들을 잃어비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리가 그 순간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스토리들을 내려놓고 고통이나 욕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을 때 근본적 수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수용의 두 날개는 명확히 보기와 우리의 경험을 자비로 감싸 안기이다. 명확히 보기의 날개는 흔히 불교 수행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기술된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의식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마음챙김할 때 질주하는 생각과 긴장되어 떨이는 몸과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의식한다. 두번째 날개인 자비는 우리가 지각한 것과 부드럽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능력이다.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에 저항하는 대신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싸 안는다. 주의를 끌려는 욕구 혹은 초콜릿이나 섹스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거나 멋대로 충족하기도바 부드러움과 배려로 감싼다. 자비는 우리의 수용을 번면적이고 완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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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
게랄트 휘터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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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유죄입니다얼마전 미국의 법정에서 나온 말이다. 피고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뇌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뇌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피고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유전자를 타고 났고 그 유전자가 살인을 꺼리지 않는 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피고의 살인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이며 뇌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물학적 조건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생멸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생물이 살아온 역사에 좌우된다. 즉 생명 체계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매개에체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이다.” 인간은 타고난 한계 내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인간이 무엇이 될지는 그 한계 위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이 주제는 철학과 사회과학에선 구조와 헹위자란 이분법으로 반복된다. 그 이분법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정리했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유의지 또는 결정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배운다. 이때 어린아이 또는 노인으로서 누군가 무엇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열광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

 

우리가 누구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뇌의 뉴런들이다.

 

외향성/내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 5 factor model의 변수들이다. 최근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변수들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은 뇌의 호르몬 시스템이라 한다. 성격은 유전이란 말이 된다.

 

물론 5가지 변수로 모든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변수를 타고 났더라도 그 변수의 결정도와 그 변수가 발현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전으로 타고난 것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뇌의 건설현장에 달려있다.

 

인간의 뇌가 개인별로 고유한 특징을 띠며 형성되는 기본 원리는 실상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뇌 안에는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다. 출생 전 이미 과다한 신경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이 중 어떤 식으로든 기능적인 연결망에 편입되는 것만이 마지막에 만고 나머지는 없어진다. 평균 1/3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환경에 달려 있고 그 환경은 처음에는 가족이며 후에는 친구, 선생님 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서 복잡한 뉴런 연결과 시냅스 회로의 형태로 뇌안에 자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다른 아닌 타인과의 생생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디른 동물의 뇌와 구별되는 뇌 부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형성되고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뇌는 사회적 기관이다.”

 

Nature or Nuture, 본성이냐 양육이냐란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유의지냐 환경이냐의 논쟁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신은 그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아이의 일상 세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아이의 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삶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데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아이 자신이 열광하는 것들만이 영향을 준다. 아이들에게 이는 우선적으로 자기 몸의 기능과 동작을 조절하는 일이고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과 관계를 맺어 가는 일,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일상 세계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새로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가 열광하는 것,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바로 긴밀한 유대의 경험, 그리고 성장하고 자기만의 능력을 습득해가는 경험이다. 이 두가지는 기본 욕구로 자리잡으면서 장차 아이의 기대치를 좌우하게 되낟. 그리하여 사람은 평생 동안 유대감과 자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두 기본 욕구 중 어느 하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은 일단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도 얻으려 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리만족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제부터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원래 지녔던 열린 자세, 관계를 맺는 능력,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창조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TV 시청이나 채팅, 쇼핑,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에서 보낼 다음 휴가 여행처럼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쉽사리 중요성이 부여된다.”

 

저자는 유대감과 자유를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기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는 유대관계를 맺고 친밀해지고자 하는 욕구 다른 하나는 성장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다. 다시 말해 남들과 함께 자기 가진을 뛰어넘어 성장할수 잇을 때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을 결정하는 두가지 욕구는 서로 모순은 아니더라도 긴장관계에 있다. 남과 유대감을 갖고 소속감을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들 또 그들의 행동방식, 확신, 의견, 생각 등에 점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이 뇌 안에 생기는 새로운 회로 패턴들은 아이 몸의 경험과 지각을 통해 형성된 이전의 뉴런 연결망과 불화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를테면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처벌이나 심지어 어른들의 본보기만으로도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멋대로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생각해보라. “유아의 역우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몸 전체를 사용하려는 충동이 아직 남아잇지만 이 역시 나중에는 억제되기 마련이다. 불안과 고통 지나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들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점점 통제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어릴 적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것, 곧 자기 고유의 몸 체험, 감각 체험으로부터 차츰 멀어진다. 또 그때까지 자아를 이루던 아주 자연스럽고도 근원적인 요소들을 일제히 억누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몸 자체를 포함해 몸에서 비롯되는 욕구들은 소속감, 인정받기, 정체성 발달, 자아 개발 등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걸림돌로 여겨지면서 억압되고 분리된다. 어쨌거나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지성과 감정, 두뇌와 몸을 분리시키는 그 같은 기이한 순응과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순응의 과정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결과는 똑같다. 태어난 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쌓은 그리하여 뇌안에 자리잡게 된 경험들은 이전의 몸 체험, 감각 체험과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성경 속 이미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체험한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부딫히면서 아이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자신의 뇌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며 자신의 뇌를 만들어간다. “그 초기 경험이 그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뇌를 사용할지 뇌 안에서 어떤 연결 패턴이 형성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지를 결정한다. 이때 그들의 뇌 안에서 활성화된 회로들은 점점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미끈한 길로 변하면서 처음의 좁은 신경 길이 서서히 단단한 도로가 되고 결국에는 널찍한 고속도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고속도로는 익숙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이후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규정한다. 자연히 그것은 기존에 획득한 능력의 유용함을 입2증할 수 있는 여건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려 애쓸 것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이유는 뇌의 고속도로 때문이다. 일단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그 도로가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새 도로를 내기는 무척 어려워진다.

 

우리 삶의 경험들은 특정한 뉴럼 회로 패턴으로 뇌 안에 자리를 잡는다. 자주 하는 중요한 경험들은 뇌에 익숙한 자취를 남기고 우리의 지각과 사고, 감정, 행동을 좌우함녀서 계속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나 달달 외운 명제들, 닳도록 읽은 안내 책자며 교과서 따위가 아니라뇌에 뉴런의 네트웍으로 이루어진 고속도록 즉 각자가 품고 다니는 표상, 내적 확신, 세계 및 인간상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따르고 또 스스로 묶어 놓은 사슬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 스스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타인을 대하고 또 옷은 어떻게 입고 집은 어떻게 짓고 방은 어떻게 꾸며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맑스의 말마따나 이념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 없는 풀려나기 힘든 쇠사슬과도 같다.” “이러한 표상이 가슴과 긴밀히 이어져 있어 가슴이 찢어지지않고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게 사실이라면 결국 이들 표상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슬프고 심지어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뇌 안의 고속도로는 사용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넓고 더 튼튼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완고해지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인간은 늙어가면서 정신적으로 추해지고 무력해져야만하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릴 적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미녀서 느꼈던 기분들이 아직도 생각나는가? 믿기 힘들 정도로 만사에 활짝 열려 있었고 창조적 욕구에 불탔고 뭔가를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열광했고 눈앞에 지천으로 놓여 있던 발견거리와 창조의 재료들에 열광했다. 어린이들은 하루에도 20번에서 50번까지 이런 상태를 맛보는데 그때마다 뇌 안의 정서 충추가 활성화된다. 이런 열광의 상태는 어김없이 뇌 안에 거름뿌리개를 작동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뉴런 연결망의 성장과 재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다.

 

놀란 표정으로 아이가 묻는다.
'
엄마 저 소리가 뭐야?' 
'
종이 울리는 소리란다'
 
'
아 그게 어디있는데?'

흥분한 아이가 묻는다. 난감해진 엄마는 이렇게 얼버무린다.
'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란다.'
'
그럼 '멀리'를 보여줘 '멀리'가 어디 있는데?'
'............'
아이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
그럼 엄마 종 만들 수 있어?'” (조앤 에릭슨)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와 아이의 대화이다.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이런 질문 공세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떻게 열광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세상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기 때문이다. 조앤 에릭슨(에릭 에릭슨의 아내)은 아인슈타인이 세기의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감각의 경이를 기억하고 그 경이감을 잊지 않으면서 감각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지진아였다. 말문이 늦게 트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느렸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관찰을 강조하는 페스탈로치 학교에 들어간 후 그의 재능이 꽃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일곱살까지 어떤 단어를 가르쳐주면 그 단어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배웠다. 그러니 말을 늦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기하학이나 대수학, 연산법도 종이 위에 기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체적인 물체나 형태, 비율로 접근했다. 천재란, 창조성이란 경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조앤 에릭슨은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최초의 감각이 주었던 경이를 잊어버리고 '어 종소리'네 하고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구체성을 잃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열광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지면서 창조력을 잃는다. 

 

어린아이에게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하는 일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아면서 일상에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훌륭히 익혀 나갈수록 이 세상의 발견거리 창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중요성을 잃게 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주변 환경을ㅇ 의도대로 꾸며 가는 가운데 익숙하고 정해진 틀에 안주하게 되고 뇌가 녹슬 위험도 덩달아 커진다.” 녹스는 것은 뇌만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 “삶은 매력을 상실해버렸다.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해졌거나 똑같이 무의미해진 가운데 최적의 상태로 삶을 통제하게 되엇다. 어른들은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욕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따라서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섰던 우리가길을 잃었는가? 저자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우리가 만든 사회를 말한다.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갈수록 절감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바로 다람쥐 쳇바퀴다. 흥미로운 점은 바퀴 속에 갇힌 사람만이 아니라 바퀼르 돌리던 장본인들도 어느덧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이 길로 보냈는지 누구로부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엿는지 더 이상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완벽하게 기능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Eoansdp 그는 최적으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도달한 것 즉 거기서 얻은 성과물을 삶의 진정한 가치이자 핵심으로 여기게 된다. 도달할 목표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줄곧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목표가 없어지면 삶의 의미도 잃는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머릿속에 든 다람쥐 쳇바퀴를 보완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바로 분업 사회가 발전시킨 수많은 조직 및 관리 구조다. 조직으로 편성되고 관리 대상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할수록 고유한 가능성을 찾고 고유한 삶을 창조해가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체험할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더욱이 이런 일이 일찍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질수록 당사자는 그런 능력을 스스로 발달시키는 일에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조직 및 관리 구조라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적 쳇바퀴 속에서 일생동안 갇혀 지내게 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쳇바퀴에서 우리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며 느끼는 즐거움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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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한 경제학은 없다 - 부자들이 감추고 싶어 한 1% vs 99% 불평등의 진실
스튜어트 랜슬리 지음, 조윤정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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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월스트리트 붕괴와 잇따른 대공황의 원인을 소득의 불균형 분배에서 찾는 견해들이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사실 1920년대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저임금과 비정규직의 시대였다. 미국경제는 아주 작은 집단, 즉 부유층에게 크게 의존했다. 당시 상위 24000가구의 소득이 하위 600만명 소득의 세배였다. 고도한 소득 불평등은 경제혼란을 낳은 두가지 요인을 만들어냇다. 첫째 요인은 미국 경제의 수요가 산업과 농업에서 이루어진 생산성 증가를 지탱할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임금증가가 생산성의 비약적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자 생산성-임금격차가 큰폭으로 확대되엇다. 소득은 생산되는 소비재의 꾸준한 증가보다 한참 뒤떨어졌고 그 과정에서 이윤이 증가했다. 구조적 빈곤, 비정기적 고용, 저임금은 미국이 소비능력 없는 소비사회엿다는 것을 의미했다. 재고가 쌓였고 주문기록은 줄었으며 확신에는 금이 갔다.”

 

연도를 2000년대로 바꾸고 구체적인 수치를 약간 고친다면 오늘날 미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상위 1%의 재산이 1976 19.9%에서 2007 34.6%로 상승했다. 이는 대공황 이전 시기에 마지막으로 볼 수 있었던 재산 집중도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런 수치를 산출한 근거가 된 조사자료는 초갑부들의 보유재산규모를 실제보다 낮추어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재산 집중 현상은 두가지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첫째 최상위층의 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반면, 충하위층 소득근로자의 보수는 계속 하락했다.” 소위 말하는 양극화이다. 양극화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성인 2%가 전 세계 가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다.”

 

양극화는 경제안정에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균형을 흔들었다. 이런 변화로 야기된 경제혼란은 부와 고용창출을 위한 국가 경제의 토대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이런 암적 성장은 결국 국가 경제를 파괴했고 국경선 너머로 파급되어 경제 회복력을 약화시키고 불안정에 대한 국제적 방어력을 무너뜨렸으며 경제 불균형과 더 큰 혼란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능 장래를 불러왔다. 임금인상이 지체되자 구매력이 초과 생산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했다. 소비자 수욧가 계속 감소하면서 경제의 수레바퀴는 궁극적으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히 임금 하락이 가장 심했던 영미에서는 개인 대출을 대폭 허용해주었고 이로써 서민들은 생활비 뿐 아니라 주택도 마련할 수 있엇다.” 그리고 그 빚잔치의 결과는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양극화에 의한 수요력의 감소는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증폭시켰다. 물론 양극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한세대 동안 지속된 문제이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불안정성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올려놓았다고 미셀 아글리에타는 말한다.

 

“1997년 말의 아시아 위기는 세계경제 전체에 치명타를 가했다.” 위기에 몰린 아시아 국가들에서 내수가 격감햇다. 태국부터 한국, 일본까지 내수 감소로 질식상태에 빠진 아시아 기업들은 해외 판매가격의 대폭인하를 받아들였내수부진을 강력한 수출 증대로 상쇄했다.” 한국의 경우 “1997년의 위기 이전에 GDP 35% 수준이었던 수출이 오늘날에는 60% 수준에 달한다. 생산활동의 증대는 평가할만하지만 소득증가는 상대적으로 미약햇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 2007)영미권의 이데올로기적 드라이브에 의한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아시아에서 양극화가 진행된 원인이었다.

 

아시아국가들의 덤핑수출은 세계에 디플레이션 충격을 전파했다.” 그 충격을 대부분 흡수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디플레이션 충격이 전파되면서 기업들은 가격을 낮출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엇다. 수익율이 현저하게 하락햇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아글리에타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위기를 디플레이션 충격에 따른 이윤율의 악화되었다고 말한다. “내수 부족은 필연적으로 세계수요를 압박하게 되었고 글로벌 경쟁을 격화시켰다. 위기로부터 타격을 받았던 일본과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그리고 독일에서는 구조적 초과저축과 구조적 투자침체가 발생했고 이는 세계경제 전체에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과 인도가 세계무역 무대에 등장하면서 구조적 초과 생산능력이 완성되었다. 세계적으로 기업들의 시장지배력 상실이 지속되면서 달리 말해 고객들의 교섭력이 크게 증대되면서 중대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객들이 가격을 결정하게 되엇다는 것이다. 수요가 둔화되는 시기에는 가격이 정체되거나 심지어는 비용감소에 앞서 하락함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렇게 해서 디플레이션 환경의 구축에 필요한 첫번째 주춧돌이 놓이게 되었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위기 이전에 쓰여졌지만 아글리에타의 분석은 이번 금융위기의 구조적 원인을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한 세대 이전, 7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역시 마찬가지 구조적 위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브레너는 말한다. “브레너는 전후에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한 일본과 독일 같은 후발 선진국이 시장을 지배하던 미국과 경쟁하게 되면서 1970년대부터 장기침체가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그는 후발국의 값싼 상품이 세계시장을 잠식하고 미국의 경쟁력이 하락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투자를 새로운 산업으로 적절히 이동하지 못하고 가격경쟁을 통해 일본과 독일을 따돌리려 했기 때문에 과잉생산과 과잉설비가 재생산되면서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을 초래해 장기불황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잉생산과 과잉설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환율조정을 통해 미국 제조업의 상대비용을 줄이려 했기 때문에 이윤율 하락이 일본과 도일로 확산되어 장기침체가 지속되었다고 브레너는 주장했다. 다시 말해 재정적자와 무역수지 적자로 고통받던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약한 달러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미국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지만 일본이나 독일은 이 합의로 인한 미국과의 환율조정으로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는 장기침체가 지속되엇다는 것이다.” (이강국/장시복)

 

영광의 30년이 왜 끝나고 신자유주의 시대가 왜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브레너의 이론에 대해선 논쟁이 많다. 그 중의 하나는 뒤메닐, 레비(자본의 반격)의 것으로 경쟁격화로 이윤율저하 경향이 온 것이 아니라 생산성 저하 때문이었다고 반론한다. 이유야 어쨌건 70년대 이후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은 두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경영혁명으로 80-9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리엔지니어링, 구조조정 등이 그것이다. 당시 경영혁명의 타깃은 중간관리층으로 관리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생산현장이 아니라 관리부문의 효율을 높여 이윤율 저하경향을 상쇄하는 것으로 컴퓨터의 광범위하게 도입이 그 수단의 하나였다. 이윤율저하를 상쇄하는 방법은 이외에도 임금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0년대 이후 실질소득이 정체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이윤율은 1980년대 초에 저점에 도달했고 그 이후로는 상승햇다.”(뒤메닐/ 레비) 그러나 축적, 즉 투자는 회복되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 축적률의 회복에도 불구하고 이윤율의 상승경향이 자본축적의 회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뒤메닐/ 레비) 금융화 때문이다.

 

금융화는 이윤율 저하경향으로 촉발된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이었다. “위기의 첫 십년 동안 지배계급의 수익은 크게 감소했다. 이윤이 감소했고 배당형태로 주주에게 지불되는 몫고 감소했다. 또한 인플레이션은 보유된 채권의 가치를 감소시켰다.” (뒤메닐/ 레비) ‘1979년의 쿠테타는 그에 대한 대응이었다. “인플레이션이 금융수입과 자산을 갉아먹었으므로 이러한 손해를 멈출 필요가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졋던 당시에는 누가 어떤 손해와 이득을 보더라도 인플레이션을 막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였다.” 그러나 축적률은 금리인상 훨씬 이전부터 하락했고 그것은 이윤율의 하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금리상승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자를 지불한 이후의 이윤율을 낮게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임금이 이윤율에 미치는 압박은 완화되엇지만 동시에 고금리정책의 지속은 위기의 악영향을 1990년대까지 지속시켰다.” (뒤메닐/ 레비)

 

고금리기조로의 전환을 1979년 쿠테타라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금융 헤게모니의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미국과 유럽에선 의도적으로 금리가 억제되었다. 금융으로 분배되는 몫을 줄여 산업자본과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79년 이후 분배의 비율은 역전되엇다.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 시대는 자본수익성이 높은 시기였지만 그것은 기업의 이윤율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대부자와 주식소유자의 관점에서 볼 때 수익성이 높았덕 것이다. 기업들은 자본소유자에게 이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이자와 배당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이 시기는 기업들에게는 비용이 많이 드는 금융의 시대엿다. 1970년대의 이윤율 하락은 우선 인플레이션의 상승으로 이어졋다. 실질금리가 낮아지고 심지어 마이너스로 되자 부가 대부자로부터 비금융기업으로 이전했고 이자로 지불된 만큼의 금액이 그대로 비금융기업으로 되돌아왔다. 배당은 가장 낮은 수준이엇다. 1980년대에는 상황이 반전되엇다. 금융은 자신들의 수입과 투자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이에게 미치는 비용이 얼마이든 간에 인플레이션을 막고 이윤에 대한 주주의 권리를 회복하기로 결정햇다. 따라서 축적률은 하락했고 위기와 실업이 심화되엇다.” (뒤메닐/레비)

 

금융 헤게모니의 회복, 즉 신자유주의 이후 임금과 이윤 사이의 소득 분배에 영향을 주는 임금의 단체교섭은 사실상 사라졌다. 주주의 영향력이 주주를 위한 가치창조, 즉 주주가치라는 지배원리에 따라 제도화함으로써 부가가치의 분배에서 주주들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엇다. 주주가치가 기업 경영 규범으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갖게 됨에 따라 기업은 오로지 주식시장의 전횡 하에 놓이게 되었다. 주주가치는 금융과 경제 간의 연관을 가장 긴밀하게 만드는 제도이다. 이러한 주주가치로 인해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단절되어버린 임금상승률은 현저하게 하락했고 소득분배의 불평등도 확대되었다. 한편으로는 주주들의 대단히 높은 수익률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소득의 미약한 증가로 저축/투자 균형이 깨졌다. 기업들은 높은 수익률을 올리면서도 투자에는 대단히 인색해졌다. 가계들이 차입을 많이 하는 나라에서는 가계들만이 수요를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된 반면, 가계차입의 유인이 결여된 나라에서는 가계들이 빈약한 경제성장의 희생양이 되었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잭 웰치가 말했듯이 주주가치가 규율을 도입해 기업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주장은 헛소리일 뿐이었다. 주주가치는 파이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어떻게 나누는가의 문제엿다. “주주가치는 이윤극대화와 일치하지 않는다.” 주주가치는 이윤이 어떻게 배분되는가 라는 정치적 성격을 띠는 목표들에관한 것이다. “주주권력은 학문적으로 아첨하여 말한다면 현금흐름(cash flow) 토해내기를 강요한다.” 주주가치는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라 배당의 극대화를 강제한다.” 배당의 극대화의 다른 말은 주가의 극대화이다. 주주가치를 강요하는 금융은 주가 극대화를 위해 채무 레버리지의 증가, 자사주 매입, 경영진에게 스톡옵션 등 과도한 인센티브의 제공 및 기업인수합변 거래의 공표 등과 같은 금융조작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금융조작은 예외없이 기업의 경제적 성과와는 어떤 연관도 없으며 오히려 이윤이 생산적 투자에 사용되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본다면 주주 권력은 단순히 현 주주들의 지배적인 영향력만을 의미ㅗ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식시장을 매개로 모든 잠재적인 주주들 전체에 대한 기업의 종속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적대적 주식공개매수가 주주 주권의 관점에서 볼 때 선()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주주가치 극대화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이윤을 사용하는 현 경영자들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된 노림 대상이 되는 기업은 경영상태가 나쁜 기업이 아니라 경영상태가 좋아서 주가의 전횡에 복종하지 않는 기업이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주주권력, 또는 금융 헤게모니의 확립은 정치적 사건으로만 가능하다. 기업 지배구조에서 주주를 제외한 다른 stakeholder 노조, 기술관료층의 견제가 사라졌을 때만 주주가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이자율이 급격하게 인상되엇던 198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햇다. 자본비용의 상승은 전반적인 비용축소를 위해 노동비용응ㄹ 낮추려고 애쓰던 기업들로 하여금 급격한 구조조정을 시행하도록 유도했다. 기업의 수많은 기능들이 외주로 빠져나갓다., IT 신기술이 널리 사용되면서 기업조직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ㅜ두터운 기술관료적 구조를 가진 피라미드형 위계구조는 네트워크형 구조로 바뀌었다. 이러한 구조볂퐌으로 기업의 경영 엘리트 특히 금융 엘리트의 권한이 강화되엇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주주가치는 기업 지배구조에서 세력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리스크의 분담도 연전시켯다. 이윤은 경기변동에 따라 변동하는 소득으로 방치되는 반면에 주주의 소득은 보호ㅗ받는다. 리스크는 생산성과 임금의 연동고나계의 단절, 실업 및 고용불안정을 통해 임노동자들에게 전가되엇다. 따라서 거시경제적 일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안정적이고 높은 ㅅ구준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역동적이 수요가 존재해야 한다.” 세계화는 그 수요를 보장하기 위한 대책이었다. “세계화는 선진국들이 1990년대 초에 만들어진 워싱턴 컨센서스의 원리에 따라 자신들의 경제 운용방식, 기술과 자본을 신흥국들에 이식하는 일방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엇다. 그 반대급부로 선진국들은 신흥국들에서의 활발한 내수 증가 덕분에 시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 위기로 그 논리는 철저하게 깨졌다. 이제 신흥국들은 수요처가 아니라 공급처가 되어 그들의 초과생산능력을 선진국들로 지속적으로 쏟아내고 이에 따라 선진국들에서도 초과 생산능력이 유발되어 공산품가격이 하락 압박을 받았다. 수요가 미약한 증가세를 보이는 임금소득으로부터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다. 주주와 경영 엘리트의 소득으로부터 이러한 수요를 기대할 수는 있겠으나 이들의 소득 총량은 총수요의 빠른 증가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딜데라에 대한 대답은 금융 세계화의 또 다른 측면인 강력한 신용 확장력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는 주주가치의 요구를 실현시켜줄 수 있는 수요를 가계신용에서 찾았다. 이 과정은 미국에서 절정에 달했다.” (미셀 아글리에타/로랑 베레비)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그러나 저자는 금융위기의 원인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대공황의 경우 경기하강은 충분히 완만했다. 적절한 통화조치가 있었다면 하강 추세를 완화할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공황을 재앙으로 만든 것은 불평등의 두번째 요인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투기붐이엇다. 임금상승이 생산성 증가보다 둔화되는 동안 부자들은 더 많은 재산을 모았다. 갑부들의 재산이 풍선처럼 부툴어 오르자 묻지마 투기 열풍이 불었다. 돈이 자산으로 쏟아져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부동산 다음은 주식이엇다. 이 고전적인 투기 거품은 낮은 금리, 대출기준의 완화, 은행에 대한 허술한 감독에 의해 부추겨졌다. 케인즈 역시 소득격차의 확대를 1920년대 금융불안의 중요원인으로 보았다. 그는 저소특층이 부자들보다 소득의 더 많은 부분을 소비하는 반면(부자들은 한계소비성향이 낮다) 부자들은 투기성향이 높기 때문에 과도한 소득불평등은 금융불안과 경제 붕괴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했다. 서로 다른 소득 집단 간의 소비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소득의 상위층 집중이 심화되면 전체적인 수요수준이 저하된다. 수요 감소 문제에 대한 케인즈의 해법은 투자를 유지하고 소득을 재분배하여소비성향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일정한 고용률을 유지하는데 더 적은 규모의 투자가 요구될 것이다.’ 경제의 동력이 소수의 경제력에 과도하게 의존한 탓에 1929년의 경우와 같은 갑작스런 충격은 그 뒤의 소비, 저축, 투자 수준에 비정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부자들이 발을 빼 주식을 처분하고 투자를 중단하자 경제의 소득창출력은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역사는 놀랍도록 반복되었다. “2008년에서 2009년 전 10년간은 많은 점에서 1920년대를 놀라울 만큼 닮았다. 두 기간 모두 상위층의 소득 집중도가 상당히 높았다.” 불균형이 낳은 과잉자금은 또다른 불균형을 낳았다. 고삐 풀린 글로벌 자금의 물결이 신속한 수익을 찾아 세계를 들쑤시고 다녔으며 대부분은 결국 런던과 뉴욕으로 흘러갓다. 정처없이 세계를 또도는 핫머니 가운데 부와 고용을 창출하는 지속적인 투자처로 들어가는 돈은 거의 없었다ㅓ. 돈은 헤지펀드, 사모펀드, 기업인수, 원자재(역자는 상품으로 번역하나 commodity의 역어론 원자재가 더 적합하다), 부동산으로 몰렸다. 이로 인해 자산가격과 기업가치가 크게 솟구쳤다. 이제 거래와 기업구조조정은 새로운 부를 창조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부를 이전하는 매우 복잡한 메커니즘이 되엇다.”

 

신자유주의가 부의 창조가 아니라 분배를 위한 파괴일 뿐이엇다는 예가 주주가치이다. “주주가치 추구가 실패의 긴 자취를 남겼다. 미국의 경우 엔론 파산의 원인을 거꾸로 추적해 보면 실적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밖에 모르는 기업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은 과도한 중역의 보수가 매우 큰 원인 중 하나다. 영국은 신속한 수익 창출에 대한 집착이 투자 부족과 국가 경쟁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다른 경쟁국과 비교했을 때 영국은 배당금과 중역의 보수가 자본투자보다 훨씬 우선시되엇는데 이런 관행은 중장기적으로 주주나 회사에 이익이 되기 힘들다. 왜곡된 우선 순위 탓에 기업 중역들ㅊ은 미래보다는 주주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는데 집중했고 그 같은 상황은 영국의 장기적 산업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주주가치를 외치는 시티가 얼마나 큰 폐해를 끼치는가는 보다폰의 경우에서 잘 드러난다. 보다폰은 세계에서 가장 큰 이동통신망을 운영하는 이동통신 사업자로 어느 면으로보든 매우 성공적인 회사였다. 1990년대 말 보다폰이 공격적인 팽창주의 전략을 취한 것은 시티의 압력 때문이었다. 보다폰은 만네스만 매입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기업인수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데 2,000억 파운드를 쏟았다. 그럼에도 보다폰은 2000년에 이르러 시장 가치가 850억 파운드로 곤두박질 쳤다. 2010년 보다폰의 가치가 원래보다 엄청나게 줄어들자 시티는 새로운 요구를 했다. 사업철수라는 반대전략을 취하라는 요구였는데 사업부문을 미국, 프랑스, 폴란드에 팔아버리라는 얘기였다. 그 모두가 단기 수익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보다폰의 전 경영진은 기업인수로 엄청난 보수를 받았는데 이제 와서 세계 최고의 기업을 쪼개겠다는 것은 장기적인 사업 측면에서 말이 안되는 일었다.”

 

칼라일의 제일은행 인수로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사모펀드는 금융화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1990년대 사모펀드는 (영국) 민간 부분 노둥인구의 /120을 고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수치가 1/5이다. 이러한 규모 확장은 지난 20년간 폭발저긍로 증가한 과잉자금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사모펀드의 규모확장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제일은행이나 외환은행을 외국 사모펀드에 팔면서 기대한 것은 선진 경영기법의 도입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이다. 사모펀드에 마법은 없다. 어디까지나 최대한 단기간에 최대의 이익을 내는 것이 목적인 사모펀드에겐 기업은 돈덩어리일 뿐이다. “사모펀드는 무엇보다 기존의 회사자산을 팔고 비용을 줄이며 납품업체를 짜내고 다시 자금을 끌어들여 가능한 한 많은 현금을 뽑아낸 다음 회사를 다시 팔아 치우는 방법을 누렸다. 수익실현과정은 보통 재무, 경영 구조조정에 필요한 2-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인수된 회사는 본질적으로 현금인출기 취급을 받았다. 여기서 빼낸 돈으로 먼저 (회사를 인수하는데 동원한) 부채를 청산하고 거래에 자금을 댄 자들에게 보상을 해주었다. 그 같은 행동이 기업이나 직원 혹은 지역 노동자들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영국에서 3번째로 큰 백화점 데븐햄스 체인을 인수한 컨소시엄은 최고경영진을 새로 배치하여 3년간 개인기업(비공개기업)으로 운영했다. 컨소시엄은 백화점의 자산을 매각하여 채무를 변제했는데 매장을 다시 임대하느라 임대비용이 크게 증가했다. 컨소시엄은 또한 다시 몇차례 대출을 받아 상당한 현금을 뽑아냈다. 재무적 구조조정 결과 그룹은 20억 파운드의 부채를 떠안았다. 백화점은 주된 자산을 잃는 동시에 거액을 저당 잡혀야 했다. ‘자산 수탈(단기 현금흐름을 위한 자산 매각)’은 인수 때 발생한 채무를 변제하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이사회는 이렇게 생긴 빚 때문에 백화점의 개보수를 위한 자본 지출을 큰 폭으로 삭감해야 했다. 이러한 자본 지출 감소는 사보펀드 효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데븐햄스가 2006년 다시 주식시장에 나왔을 때 195펜스의 주가로 거래되었다. 2011년 초 주가는 60펜스로 떨어져 주주가치의 엄청난 손실이 야기되었다 데븐햄스가 비틀거리고 주주들이 큰 손실을 회사를 사들인 그룹은 30개월동안원래 투자액의 세배를 벌여들였다. 자금 재대출, 비용삭감, 자본지출 삭감, 부동산 매각 그리고 2006년 회사의 2/3를 팔아서 번 수익으로 가능햇다.”

 

“1930년대 대공황이 발생하기 전에도 비슷한 파괴 메커니즘이 작동햇다. 1920년대 후반 특히 미국에서는 가처분 소득이 감소하고 이윤이 증가하고 상류층 재산이 크게 불어났다. 곧이어 200ㄴ년대 처럼 엄청난 투기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몰려들고 부채 수준은 크게 증가햇다. 소수에게만 이익이 되는 지속불가능한 경제모델은 이렇게 세계경제 붕괴의 조건만 조성했을 뿐이다. 그뒤 세계는 1929년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1930년 중반부터 반세기 가까이 부의 고도한 집중을 꾸준히 억제햇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1929년의 붕괴를 조성한 조건이 다시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위기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세계의 초갑부들은 금융위기 초기에 잃은 재산을 단기간에 되찾았다. 2011년 초 그들의 재산은 2008년 기록했던 최저점에서 원래 수준으로 돌아왔다. 대서양 양쪽의 은행가, 금융가,. 기업의 중역은 계속되는 경제혼란의 영량을 받지 않았다. 금융위기가 절정을 이룬 2009년 월스트리트의 평균 보너스는 사상 최고액에 근접했다. 포브스는 2010 10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가 1,210명이라고 발표햇다. 이는 2007년보다 28% 증가한 기록적인 숫자였다. 이들의 재산을 모두 합할 경우 2007 3 5,000억 달러에서 2010 4 5,000억 달라로 증가했다. 1,000명이 약간 넘는 개인들이 미국 경제 생산의 1/3에 해당하는 자산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교훈을 얻지 못한 이유는 대공황 직후와 달리 금융 과두체제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돈이 없었다면 오바마는 선거에서 패했을 것이다. 금융계는 오바마가 대선에서 승리하자 그가 다른 전직 대통령처럼 그 대가로 그들의 이익에 봉사할 것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금융과두세력의 지배는 위기를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원인이며 나아가 더 놀라운 사실은 이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신속하게 요구되는 개혁들을 막고 잇다는 것이다. 예전과 다를게 없었다. 생산의 분뱋를 볼 때 여전히 이윤에 많은 몫이 돌아갔고 임슴-생산성 격차는 계속 확대되는 경향을 띠었다. UBS수익성 황금시대는 끝나지 않고 위기를 넘어서까지 계속되었다. 월스트리트 은행들은 2009 550억 달러의 수익을 기록하여 사상최고수준에 도달햇고 200억달러가 넘는 보너스를 지금했다. 영미경제는 지금 일자리를 만들어줄 투자 붐이 아니라 또 다른 파괴적 투기 활동의 파도에 휩쓸려 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투기활동은 또다시 자산 거품을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이 두 나라의 경제는 점점 더 절벽으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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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3.0 - 무엇이 세계 인류 공존을 방해하는가?
판카즈 게마와트 지음, 김홍래.이영래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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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은 아니지만) 세계를 규정했던 단어를 들라면 세계화 이외에는 마땅한 것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세계화는 세계를 정의하는 단어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와 무게는 과거처럼은 아닐 것이다. 그 단어의 내용을 정의했던 미국의 헤게모니와 함께 세계화 역시 달라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책이 말하려는 것은 이 시점에서 세계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2008년의 엄청난 불황으로 많은 사람들은 시장과 세계화에 대한 믿음을 재고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위기 이전의 틀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들리는 것은 예전에 들어본 노래들이다. 세계화의 열혈 지지자들은 현재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규제가 철폐된 시장에 대한 비전을 버리지 않았다. 잠깐 동안의 공황 상태가 지난 후 시카고 대학에 있는 밀턴 프리드먼 신봉자 대부분이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문제는 시장의 간섭에 충분히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유 시장이라는 밭을 잘 갈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시장의 마법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시장의 실패가 별 일 아니라는 식으로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한 유명 저널리스트가 2010녀ㅛㄴ 다보스 포럼의 분위기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생각해보라. ‘정치, 경제 지도자들이 여기에 모였다. 2008년의 붕괴에서 자유시장이 실패했으며 새로운 체제는 규제와 개입이 좀더 강화된 형태가 될 것이라는 점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문제는 그 좀 더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이다. 이에 대해선 어떤 합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를 그리기 위해 저자는 실제 세계화가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생각해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과거에는 세계화와 규제 철폐를 연계시키고 이 두 가지를 연속체의 한쪽 끝에 위치시켰으며 그 반대편 끝에는 규제와 강력한 국경을 놓았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저자의 생각을 바꿔놓았다. 세계화의 실상은 실제 그 연속체의 끝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체의 중간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세계는 평평하다고 하지만 실제 세계는 국겅과 거리에 다라 울퉁불퉁하다. 그리고 평평하지 않은 세계가 현실적이며 바람직한 세계화의 모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얼마전의 식량위기를 예로 든다. “2007년 초에서 2008년 중반 사이 공황 매수 덕분에 국제 쌀 가격은 세 배로 폭등했다. 10여 개 이상의 쌀 수입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아이티의 경우에는 정부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유시장과 자유가격을 설교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굶을 수 잇는 자유를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부가 개입해서 국내 쌀 가격을 관리해야 한다. 국제적으로 교역되는 쌀 생산량은 전체의 5%에 불과하다. 이런 쌀 시장의 깊이를 깊게 만들면 널뛰는 가격변동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쌀은 실패하기도 쉽지만 시장이 국가 간 통합 강화를 통해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통합과 규제는 양자택일이 아니란 말이다. 통합과 규제가 함께 있는 것이 세계화된 시장의 현실이며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그런 세계화의 모습을 월드 3.0이라 부른다. 저자는 세계는 평평하다는 프리드먼(저자는 이것을 월드 2.0이라 부른다.)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오늘날 세계의 진짜 상태는 반()세계화 상태이다. 여기에서의 이란 50%가 아닌 부분적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10에서 25%라고 해두자. 이 수치는 월드 2.0이 예상하는 완전한 세계와와 큰 격차가 있다. 물론 세계화 지지자들도 완전한 세계화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세계가 평쳥하지 않다면 내일은 그렇게 될 것이다.” 파월 전 국무장관의 말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아니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저자는 우선 여러가지 통계를 검토하면서 세계화가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국경을 넘는 우편과 전화는 각각 1% 2%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전화와 우편물은 국경을 넘지 않는다. 인터넷도 국경을 넘는 것은 17-18%에 불과하다. 미국 뉴스 보도의 10%만이 국내와 관련없는 것이다. 무역은 이보다는 높지만 (GDP 비중) 29% (2008)에 달했지만 부가가치 기준으로 수정해보면 세계에서 생산되는 가치 전체(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그친다.” 국경을 넘기 쉬운 돈 역시 마찬가지이다. “세계 총고정투자의 약 90%는 국내 투자이며 벤처 캐피탈의 15에서 20%만이 본국 밖에서 이용된다. 또한 주식시장에서 외국투자자들이 소유한 부분은 20%에 불과하다. 국경을 넘는 은행 예금과 국가 채무의 소유는 각각 25% 35%에 가깝다. 이것은 위기 이전의 자료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금융의 열기가 한창일 때조차 자본의 국제적 이동성은 생각보다 활발하지 않았다. 모든 유형의 시장에서 나타나는 실제 국제화의 수준이 월드 2.0이 상정하는 수준에 크게 못 미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터무니없는 차이이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저자는 국경, 차이, 거리를 말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은 경비가 없는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이다. 그 국경을 가로지르는 교역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쌍무무역관계로 아직 미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보다 그 규모가 더 크다.” 그러나 (미국과 캐나다 간에 FTA가 조인된 해인) 1988당시 캐나다 내의 여러 주 사이의 상품교역강도는 미국과의 교역강도보다 22배 높았다.(자국편향배수)” FTA 이후 1990년대 중반에 그 수치는 12에 머물렀고 현재는 5에서 10사이로 추정된다. 수출비중이 높고 경제통합이 높은 EU회원국인 독일의 경우를 보자. “2002년 독일 연방의 주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교역이 다른 EU 국가들과의 교역보다 4-6배 많았다.” 세계시장과의 통합정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스페인의 경우 그 차이는 더 심하다. 옆 나라인 포르투갈과는 12, 일본과는 150에 이른다.

 

이런 차이는 국경의 위력이다. 저자는 캐나다의 젤리빈 업체가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거치는 절차를 예로 든다. “라벨링을 예로 들자. 캐나다에서는 영양 성분을 표시할 때 숫자와 측정 단위 사이를 한 칸 띤 ‘5 mg’처럼 한다. 그렇지만 ‘5mg’처럼 여백 없이 표기해야 가농의 젤리빈은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두 나라는 1일 영양소 기준치도 다르게 계산한다. 예를 들어 미국 소비자를 위한 젤리빈 포장은 그 제품이 미국인 1일 철분 섭취 규정량의 몇 %를 제공하는지 발혀야 하며 그 비율조차 캐나다와 약간 다르다.”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요식행위의 예는 끝도 없다. 게다가 행정적 장벽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거리, 환율 등 장벽은 많고도 많다.

 

저자는 이런 차이를 거리의 법칙이라 정리한다. 국경으로 만들어진 차이는 문화와 언어의 거리에 의해 증폭된다(“공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의 경우 그런 관련성이 없는 유사한 국가쌍보다 평균요역량이 42% 많다.” 예를 들어 미국 외 단 한나라에서 영업을 하는 모든 미국 기업을 보면 그 나라가 캐나다인 경우가 60% 10%는 영국이다.”). 그리고 두 지역간의 지리적 거리가 1% 증가하는 경우 교역은 1% 감소한다. 문화적 거리, 행정적 거리, 지리적 거리, 경제적 거리의 4가지를 CAGE 체계란 모델로 저자는 정리한다.

 

월드 3.0은 거의 모든 흐름이 거리에 따라 하락하며 여러 종류의 경계에서 불연속적으로 감소한다고 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여전히 사람들은 국경 안에서 살아가고 시장도 국경 안에서 돌아간다. 세계화란 국경이란 세포막 사이의 흐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세계화 비판론자들이 말하는 문제들이 과장되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세계시장으로의 통합은 글로벌 독점을 낳을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독점보다는 경쟁의 격화를 보여준다. 세계화의 정도가 높고 규모의 경제가 지배하는 자동차업계에선 예전부터 손으로 꼽을 정도의 업체만 살아남을 것이라 예견되어 왔다. 그러나 실상은 국가 간 통합은 전반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경쟁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심화시켰다.” 업계의 예측과는 달리 정상에 있는 기업들의 업계 생산량 점유율은 1970년 이래 감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유율 감소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2010년에는 자동차 업계의 6대 기업이 세계 자동차 생산의 50%를 차지했다. 1970년대에는 5개 기업이, 1950년대에는 2개 기업이 1920년대에는 한 개의 기업인 포드가 세계 자동차 생산의 대부분을 책입졌다. 집중의 연대기로는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동차산업보다 세계화 정도가 낮은 다른 업계에서도 집중보다는 경쟁의 심화란 양상은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시장은 지역적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저자의 용어로 하자면 거리의 법칙, 또는 CAGE 시스템이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에 세계가 평평하지 않기 때문읻.

 

그렇다면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위기는 시장의 통합이 시스템 리스크를 높였기 때문이다. 전염은 분명 일어난다. 그러나 이 역시 거리의 법칙이 작용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스가 국가 재정을 둘러싼 전면적 위기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전 세계적인 문제라기보다 유로존의 문제였다 테킬라 효과로 불렸던 멕시코의 1994년 금융위기는 브라질을 비롯한 주변 국가에 확산되었고 1997년의 아시아 금융위기는 태국에서 시작해 인도네시아 이후에는 아시아 대부분에 확산되었고 마침내는 1998년 러시아에 타격을 입혔다.” 이번 금융위기의 위력은 미국이란 금융허브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조차도 아시아권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고 뉴욕과 긴밀하게 연결된 대서양권에 전염은 집중되엇다. “전염 중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리에 영향을 받고 장기적인 추세로 보면 통합은 꼭 거시경제적 불안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있다. 이러한 재앙의 탓을 모두 자본 흐름에만 돌려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금융위기는 높은 외채 비율, 환율 신축성의 부족, 국내 금융시장 결함 등의 원인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금융 세계화 그 자체가 지난 30여년 동안 세계가 빈번하게 겪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금융 세계화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즉 규제가 문제란 말이다. “국제 자본 흐름 개방에는 장점과 단점이 뒤섞여 있다. 국가가 자본 시장을 개방하더라도 선호하는 흐름(외국인 직접투자, 주식)과 선호도가 떨어지는 흐름(부채)이 잏고 여기에 따라 극적인 변동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 유연성을 보유할 수있다. 자본이 시장 경제에서 공기와 같은 존재라면 그 공급을 전적으로 금융시장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

 

이런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제기는 정치적이다. 대니 로드릭은 이 문제를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라 요약한다. “우리에게는 세가지 대안이 있다. 첫째 이따금 세계경제로 비롯되는 경제적 사회적 충격을 무시하고 국제거래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것이 있다. 둘째, 국내에 민주적 정통성이 확립되기를 기대하며 세계화를 제한하는 것이 있다. 셋째 국가주권을 희생하면서 세계화된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잇다. 이 세가지 대안은 세계경제의 정치적 트릴레마를 정확하게 반영한다. 즉 우리는 하이퍼글로벌라이제션, 민주주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 잘해야 두가지를 잡을 수 있을 뿐이다.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과 민주주의를 잡으려면 민족국가를 포기해야 한다. 민족국가를 유지하면서 하이퍼글로벌라이제션을 추구하려면 민주주의를 잊어야 한다. 민족국가에 민주주의를 결합하고 싶다면 깊은 세계화에는 이별을 고해야 한다. 세가지 대안이 이렇게 가혹할 정도로 서로 상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령 세계경제가 완전히 세계화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거래비용이 사라지고 국경은 상품, 서비스, 자본의 교환에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민족국가가 이런 세상을 버텨낼 수 있을까? 민족국가들은 경제적 세계화와 상인 및 해외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데만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국내규제와 조세정책은 국제표준에 일치시키고 가능한한 세계경제통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구조화될 것이다.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서비스는 국제시장의 원활한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다. 게임의 규칙이 세계경제의 요구에 휘둘리면 국가경제에 관한 정책결정은 제한될 수 밖에 없다. 나는 민주주의와 민족자결권이 하이퍼글로벌라이제션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사회적 합의를 보호할 권리가 있고 이러한 권리가 글로벌 경제의 요구와 충돌할 때 물러서야 할 것은 후자다.” (대니 로드릭)

 

저자는 이 의견에 의문을 던진다. 논리 자체는 맞다. 그러나 하이퍼글로벌라이제이션이 가능한가 의문이기 때문이다. “월드 3.0 그리고 현재 수준의 통합을 고려할 때 국경 뒤에 피난처를 마련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실제로 만약 1930년대의 과잉반응이 시장자본주의의 대규모 실패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어떤 지침을 얻을 수 잇다면 현재의 가장 큰 위험은 이런 종류의 대피 수단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배경과 외적 통합이 내적 규제를 배제하기보다는 오히려 대체한다는 사례를 볼 때 단순히 둘 사이의 긴장에만 집중하는 것은 역효과를 낳을 뿐이다. 현실이 부분적으로 세계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규제 ‘그리고’ 토합을 위한 거대한 영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로드익은 정책 트릴레마는 틀리지 않앗다. 다만 거의 모든 측면에서 현실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저자는 구체적인 증거로 race to the bottom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든다. “선진국에서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은 저가경쟁으로 지장을 받을 것이란 우려에도 불구하고 OECD 국가들의 전체 사회복지지출은 평균 1980년의 GDP 16%에서 2005년에는 21%로 증가했다. 심지어 미국정부를 상대로 로비에 지출된 공식적인 비용은 1999년에서 2009년 사이에 150%나 증가했다. 정치가들이 정책에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이런 현상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Powerless State는 신화일 뿐이다

 

“월드 1.0(베스트팔렌 시스템을 말한다)과 2.0의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통합과 규제의 문제를 바라보면, 둘 사이의 영역 싸움으로 뭉뚱그려지기 쉽다 따라서 월드 3.0으,ㄴ 필수적인 수성요소가 된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세계화와 규제 완화를, 국경의 높은 장벽과 그 내부의 규제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Skdmnl 경우 2007년 식량 위기로 인해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국경 간의 통합에 유리한 증거가 더욱 뚜렷해졌던 상황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이 경우는 진정 두 가지 독특한 선택의 차원, 즉 통합과 규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 그들 모두를 고려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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