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 진정한 개인의 행복을 찾은 동양 지식인들의 내면 읽기
김시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음악의 모티브가 그렇듯, 책의 첫머리는 그 책의 톤을 결정하게 마련이다. 논어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얼핏 보면 논어는 두서없이 되는대로 그러모은 잡탕 어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연히 논어에도 편집자가 있고 편집자의 의도가 있다.

논어의 첫머리에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구절을 놓은 것은 되는대로 하다보니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첫장이 책 전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편집자는 그 장을 머리에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학이편 1장을 어떻게 주석하는가를 보면 주석자의 의중을 읽을 수 있다.

학이 1장에 대한 주석으로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리쩌허우와 박재희의 해석이다. 그중에서 박재희의 해석은 1장을 논어에 대한 선언적 의미로 읽는다.

박재희는 공자의 생애에서 보거나 중국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을 세운 목적에서 보거나 그리고 그에게 배우려 한 제자들의 목적으로 보나 1장은 공자학당의 정치적 선언서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학이시습지에서 학의 대상은 당연히 정치학이 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방법이 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다음 구절 '유붕이자원방래'에서 붕은 불알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같이 하는 정치적 동지를 말한다. 곳곳에서 정치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오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세번째 인부지이불온 은 그 정치적 뜻의 좌절을 말한다. 남들이 우리의 정치적 뜻을 알아보고 써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우리는 분노하고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는 군자니까!

논어의 모든 구절이 그렇듯 박재희의 1장 독해만 정답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맥락에서 1장을 읽어야 한다는데는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다. 소라이가 말하듯 논어는 제도사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박재희의 독법이 맞다면 논어의 근본 구분은 군자/소인이 된다.

군자의 원래 의미는 귀족을 말했다. 공자가 말한 군자나 그 이전의 군자나 모두 정치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공자가 재정의한 군자는 자리에 걸맞는 능력을 갖춘 자이다. 큰 자리에서 "큰 것을 쓰는 만큼 그에 맞는 인격이 따라야 하고 큰 것을 쓰는 만큼 그것을 쓰는 사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큰 사람인 군자는 작은 사람인 소인과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작은 사람인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큰몸(大體)을 따르면 큰 사람이 되고 작은 몸(小體)을 따르면 작은 사람이 된다.

공도자가 물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큰 몸을 따르고 어떤 사람은 작은 몸을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귀와 눈의 기능은 생각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외부의 사물에 의해 가려진다. 귀와 눈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 귀와 눈은 외부 사물에 이끌려가게 된다. 이와 달리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데 있다. 생각하면 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ㅁ마음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 큰 것을 확고하게 세우면 작은 것이 큰 것을 빼앗아가지 못한다. 이거쇼이 큰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맹자 - 고자 상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멋진 말이다. 인간의 모든 것을 버리더라도 생각한다는 것만 남는다면 그는 인간이란 말이다.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이후 서양철학의 톤을 결정햇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이고 이성의 존재이니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다르게 규정한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감정의 톤을 갖는다. 합리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도 그 감정의 일종이다. 합리적 존재자라 하지만 그 합리성이란 특수한 감정의 일종일 뿐이다. 하이데거 식의 인간 이해는 동양에선 적어도 중국에선 낯설지 않다.

"혜시가 말했다. 사람이면서 정이 없다면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도가 사람에게 얼굴을 주고 하늘이 사람에게 형체를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라 아니 할 수 있습니까?

혜시가 말했다. 이미 사람이라고 한 이상 어찌 사람에게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장자 - 덕충부

여기서 情이란 초코파이의 정이 아니다. 희노애락의 칠정, 감정을 말한다. "고대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생각한 '정'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었다. 아니 '정'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었다."

"'性'이란 타고난 경향이요 情이란 그 性이 움직이는 바탕이요, 欲은 情의 사물에 대한 감응이다." 순자 - 정명

순자의 정에 대한 정의이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지향성은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欲으로 해석된다. 현상학에서 인간의 의식은 언제나 무언가 대상을 향한다. 그것이 외물이든 내물이든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인간의식의 본질이다. 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면서 훗설은 칸트의 물자체란 딜레마를 해소해버렸다. 하이데거는 지향성을 불교적인 欲으로 재해석하면서 지향성의 본질을 감정, 또는 중국식의 情으로 재정의했다.

그러나 고대중국에서 정은 문제가 된다. "정이란 모든 외물에 대해 감응하는 몸의 반작용 모두를 가리"켰다. 그러나 그 외물에는, 적어도 사람에게는, 두가지가 있다. 심리학이 말하는 식으로 하자면 인간에게 외물은 그냥 외물과 사람이 있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 또는 7정은 파충류 시절부터 내려온 본능에 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진화했다. 동정심같은 것이 그것으로 맹자가 말하는 4단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7정만 있다면 인간은 이기적 차원에만 머물러 사회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은 이타적 차원을 갖게 되었고 이 역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性은 7정과 함께 4단도 포함한다는 맹자의 말은 옳다.

문제는 4단이 7정보다 약한 본능이란 점이다. "신유학에서 말하는 이기론 혹은 성정론은 결코 이성 대 감성 혹은 이성 대 욕망의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해 그것은 오히려 똑같은 정인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한 논의다. 즉 보다 문화적(사회적이라 보는 것이 옳겠다)으로 고양된 감정(理-4단)을 키워 상대적으로 원초적이고 격렬한 정(氣-7정)이 초래할 수 있는 부조화를 극복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안은 성인에게는 희노애락의 정이 없다고 하는데 그 논의가 매우 치밀하였다. 종회 등 당시의 유명한 논자들이 모두 하안의 학설을 추종했다. 그러나 왕필은 이에 동의하지 안고 성인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것은 神明이고 보통 사라과 같은 것은 五情이라고 하였다. 신명이 뛰어나기에 늘 마음이 조화로워 어떤 상태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오정이 같으므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감정이 없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지닌 정은 다른 사람처럼 감응흐면서 그에 얽매이지 않는다. 오늘날 사람들은 얽매이지 않는 것을 감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 생각했다." 삼국지 -하소왕필전

왕필은 논의는 맹자가 군자(성인)와 소인을 구분한 논리와 연결된다. 소인도 군자도 자신의 정에 충실하게 산다. 저자는 소인이든 군자든 자신을 위해 살기에 모두 이기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군자와 소인은 이기적으로 사는 방식이 다르기에 구분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옛날 사람들은 제 몸을 위해(爲己) 공부했는데 요즘 사람은 남을 위해(爲人) 공부한다." 논어 - 헌문

공자는 위기 즉 이기를 위인 즉 이타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말한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주자는 이 장을 이렇게 풀이한다. "자신을 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공부하는 것이고 남을 위한다는 것은 인정받으려고 공부한다는 뜻이다."

"우리 같은 소인들에게는 뜨끔한 이야기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오로지 출세와 취직을 위해 공부하는게 우리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주희의 성리학은 다른 말로 도학 혹은 성학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성학이란 곧 위기지학 즉 스스로가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학문을말한다. 그런데 주희는 성학의 교본이라 할 '근사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대부가 닦아야 할 학문이다' 공자가 말하는 위기지학이란 바로 국가의 관직에 있는 사람 혹은 적어도 그런 위치에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닦아야 하는 것이다."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 해서 테레사 수녀같은 이타적 인간이 되기 위한 학문이 아니란 말이다. "동아시아 전통에는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의 대립이란 없다. 이타적이란 말은 사실 보통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우리가 공자나 주희, 퇴계나 율곡 같은 인물을 성인이라 추앙하겠는가." 테레사 수녀같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들은 우리 소인들과 달리 '자신을 위하는' 방법마저도 우리와 달랐기 떼문이다".

"그런데 이런 걸 두고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시커먼 중형차 안에 계신 분께서는 '이기적'인 게 아니라 '몰상식'한 것이라거나 '방종'한 것이고 해야 한다. 법률적으로는 '위법'이라ㅏ고 하는게 맞다. '이기적'이란 말을 그렇게 쓰는 것은 무식한 것이ㅏㄷ.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이기주의'는 근대 서구문명의 치초가 되는 대단히 의미있는 사상이다.

이기주의를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라고 읽어서는 안된다.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기주의자와는 관계없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니 우주로 내보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공자나 그를 추종한 유학자들이 '수많은 몸들의 집합'인 백성을 위해 스스로 성인이 되어 올바른 인간의 길을 열려고 한 것은 그러한 개개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윤리학적 이기주의'라고도 볼 수 잇다. 그것이 지금 우리식의 표현으로는 ';큰 사람의 이기주의'이며 그런 노력과 실천을 공자는 '위기'적이어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렇듯 공자는 이기주의에 대해 부정적이 않았고 소인을 소인답게 하는 利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공자가 주자가 소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할 때도 많았다. 그건 무슨 이유였을까?

"인간은 누구나 이로운 것을 추구한다. 왕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이익을 대부는 자신의 집안을 그리고 선비와 서민은 제 한 몸의 이익을 생각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왕이나 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공자나 주희가 '소인'을 극단적으로 욕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대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소인철럼 사는 인간을 욕햇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도 소인의 시대인 지금도 (대인을 위한 책인) 논어가 쓸모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인은 소인을 잘 알아본다. 그리고 소인이 대인의 자리에 앉았을 때 대인이 어떻해야 하는가를 논어를 보며 알자는 것이다. 우리는 소인이 대인인 척하며 산 장구한 역사를 겪어왔다. 무능한 군자, 덕도 없는 군자, 다시 말해 소인에 불과한 위군자들. 그런 자들을 알아보고 그런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논어를 보며 배우자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아래와 같은 경우 때문에 저자는 지금도 논어를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의 유학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라의 중추인 지식인이자 예비 관료들인 유생들이 직업이 없었다.! 선비는 장사를 할 수도 없었고 물건을 만들어 팔 수도 없었다. 농사도 사대부의 할일은 아니었다. 율곡이 해주에서 생계를 위해 호미를 만들어 팔았을 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율곡의 선택은 그만큼 예외적이었고 체모가 손상되는 일이었다.

貧富有命이니 貨利에 有情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자기 검열과 사회적 시선으로 의식해온 사람들이다. 그 빈자리는 아내들이 감당해야 했다. 바느질과 길쌈. 식구들의 밥을 벌기만 했는가, 봉제사 접빈객에 가정의 경제를 도맡아 하느라 주부의 수명이 단축되었다. 아내가 죽으면 상실의 그리움보다 고생시킨 회한 플러스, 앞으로 식구들 데리고 살 일이 막막하여 슬피 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적은 기록도 숱하다. 식솔을 팽개치고 세운 도덕이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선비들도 직업을 가졌어야 했다. 다산은 헛기침을 접고 학당이라도 열어 아이들이라도 가르치라 권했다. 사대부들의 유일한 직업은 정치와 행정, 즉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관료가 되는 것도 떳떳한 직업이 아니다. 우선 누구도 거기 취직할 자격을 갖추기 힘들었다. 과거가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다. 거기 사적 관심과 이해를 철저히 배제한 성인의 인격을 갖추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다’고 나설 파렴치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 높은 기준으로 다른 집안. 다른 지역, 다른 당파 사람들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관직에 임하는 그 포부의 스케일이 자못 컸다. 사대부가 정치라는 직업을 맡는 취지는 자잘한 사무를 처리하고 제도를 가다듬는 데 있지 않고 ‘이 땅에 인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는 데 두었다. 이 이 험준함 때문에 자부가 심하고 명망이 무거운 사람일수록 정치라는 직업을 택하기를 꺼렸고 물러나 비판에 주력하는 것으로 책임을 대신했다.

그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정치’에 취업한 사람들은 정작 그 직책에 걸맞는 지식과 기술이 부족했다. 이 실무적 노하우는 주자학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주자도 짧은 기간 행정을 맡았지만 그는 주로 재야에서 당대의 군사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한 사람이다. 건설에 필요한 학문과 비판에 필요한 학문은 서로 다르다.

사대부들은 본령인 정치에 나아가서도 군사나 재정, 생산에 관련된 업무를 맡기면 체모를 깎는다 하여 화를 냈다. 그들이 선호한 직책은 세자의 교육이나 임금과의 학문 토론 그리고 정무에 대한 비판이었다. 훈수하기는 얼마나 신나겠는가. 밖에서는 천하를 들었다 놓을 수 잇지만 안에서는 반걸음을 떼기도 험난하다.

그 진흙탕에서 뜻있는 사람들은 혹은 다치고 혹은 절망하여 한사코 물러나고자 했다. 물러나면서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 같은 ‘은둔 권위주의’는 그들이 추앙하는 만세의 성인 공자의 지향과는 아무래도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도통은 항거자와 은둔자를 축으로 하여 이어져왔다. ‘무능과 도덕은 자주 이웃한다!’ 山林이란 이런 재야 군자들의 집합적 이름이었다. 이상을 외치고 도덕을 선점한 사람들이 정치에 개입할 때 그 폐단은 상상외로 심각하다. 무능한 ‘군자’가 권력을 주리 때의 위협과 혼란을 직접 겪은 정조는 이렇게 말했다.

‘소인은 물정에 밝지만 군자는 사리에 어둡기 쉽다. 사람들은 소인이 나라를 그르친다 알지만 군자가 더 큰 병폐를 끼친다는 것을 모른다. 소인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은 바로잡을 수 잇지만 군자가 재주도 덕도 없이 당면한 현실에 어둡다면 나라에 독을 끼치는 것이 누구나 알 숭 ㅣㅅ는 소인의 폐단보다 더 심하다.’” (한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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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아도 괜찮아 - 독한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남는 법
카야마 리카 지음, 김정식 옮김 / 모벤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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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플루엔자 가치들은 전혀 새롭지 않다. 그것들은 사유재산제가 도입된 기원전 1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1970년대 이래 그런 가치들이 사방에 널리 실재하며 그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어권 국가 대다수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삶을 소득, 소유, 외모, 명성 등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근원적인 욕구를 만족하는데 걸림돌이 되어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나는 10년전 25세의 미국인이 우울증에 시달릴 가능성이 1998년 당시 1950년보다 세배에서 열배나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1950년대 관점으로 보면 오늘날 평범한 미국 어린이가 느끼는 불안은 병적인 수준이다.

그 이후 많은 미국 작가들 그리고 영국 작가들이 나를 따라 그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관심을 갖는 것이 행복이긴 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현상들, 이를테면 우리가 정서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다거나 절망, 좌절, 분노 등이 우리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기 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법,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서만 끊임없이 늘어놓고 있다. 나는 행복이란 즐거움과 유사한 것으로 공상적이며 일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해지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라는 옛 격언에 동의한다. 행복을 입증하는 증표로 고통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행복을 들먹이는 거짓 약속 대신 우리가 왜 그렇게 혼란에 빠져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이기적 자본주의'라 부르는 불쾌한 정치경제학이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퍼트렸다. 이 바이러스는 1970년대 이후 정서적인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 선진국에서 정서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비율은 소득 불균형에 비례해 증가하고 있다. 이기적인 자본주의는 선진국에서 불평등의 주원인이다." (올리버 제임스)

소위 자기계발서라는 책들의 주제를 보자. 성공을 말하고 부자를 말하며 행복을 말한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하고 돈을 얻으면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해서 행복할까? 직장에서 정상에 오르고 거대한 부를 이루는 사람들은 특정한 유형이 있다. 그러나 그 유형은 절대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책들은 현실의 반짝이는 면만 보여주고 정작 그들이 그렇게 된 진짜 원인은 말하지 않는다.

“남편감으로 어떤 사람이 좋으냐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은 문화와 관계없이 무엇보다도 친철함과 공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도 상당히 중시한다. 그러나 친절함과 공감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과 충돌한다. 여성들이 이 두개의 서로 엇갈리는 가치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현실적인 문제다. 여성에게 화려한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삶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대니얼 네틀)

지위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앤디 그로브 식으로 말하면) '미친' 놈이다. 'Only the paranoids suvive' 어느 분야든 정상에 남는 자는 그 목표에 미쳐야 한다. 그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충분한 사람만 정상에 오른다. 맑스의 신조처럼 “남이 뭐라 건 네 갈길을 가라.” 그런 각오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착함'과는 거리가 멀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희생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억만장자들의 기본적인 특징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부의 추구를 즐긴다는 것이다. 상을 받는 것보다 이겼다는 만족감 그 자체가 그들을 보통의 슈퍼리치의 대열로 이끈 원동력이다. 자수성가한 억만장자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에 무관심하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사는 모습이 소박하다. 샘 월튼과 워렌 버핏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력으로 사치스러운 토지를 사들이는 것을 거절한 사람들이다. 로스 페로와 필 얀슈츠는 그리 비싸지 않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만족했으며 해마다 최신 모델을 찾지도 않는다. 다른 슈퍼리치들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물질적 욕망을 쫓기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햇다." (마틴 프리드슨)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부와 지위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지 그 혜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적다. 돈을 쓰기 위해 버는 것이 아니라 돈 그 자체를 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런 사람인가? 부와 지위를 진심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각오를 해야 한다. "(포츈 500 리스트에 오른 거부) 웨인 휘젠거는 하루에 20시간을 그의 독창적인 사업인 쓰레기 수거사업에 투자한 사람이다.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야구를 하며 노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딱 한 번 딸아이가 연극하는 것을 봤을 뿐이다. 함께할 수 있는 추억읃 나는 모두 놓쳐버렸다. 거부가 된다는 것은 결코 좋지만은 않다. 만약 누군가 나처럼 모든 것을 팽개치고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조금 남겨두라고 충고하고 싶다.' 사실 대부분의 억만장자들은 너무 많은 것을 일에만 쏟아 붓고 그 가족들은 그것을 견뎌내고 있다.' (마틴 프리드슨)

그런 삶을 원하는가?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오랫동안 환자들을 보아온 저자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불안해하며 자신을 괴롭혀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5살 난 여자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하루에도 몇번씩 딸에게 ‘착한 해가 돼야지! 이게 뭐니!’라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고 하소연이다. ‘말씀하신 그런 ‘착한 아이’란 어떤 아이죠?’ 대학원을 나와 대기업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는 그 이지적인 엄마에게 물었다. ‘착한 아이요? 착한 아이가 뭐냐고 하심… 요즘 같은 시대엔 척척 알아서 공부하는 아이, 라이벌에게 지지 않는 아이겠죠, 물론 좋은 대학에도 가고…’ 이것저것 물어보니 아무래도 그 집 딸아이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것같았다. 예를 들면 영재교실에서 단체 체조 시간이 시작되면 다른 아이에게 양보하다 보니 꼭 맨 뒷줄에 서버린다. 또 엄마가 영어를 가르쳐 주고 있자면 ‘앵순이 밥 줘야 하는데…’라면서 애완용 잉꼬를 돌보려고 한다. ‘못된 아이에요, 제 딸은…’ ‘음…. 오히려 아주 착한 아이 같은 같은’ 그러자 그녀는 놀란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말햇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희 남편도 성격이 워낙 소극적이라 모처럼 좋은 회사로 옮겨도 좀처럼 출세를 못해요. 딸아이가 남편의 나쁜 점만 닮았다고 남편한테 화를 낸 적도 여러 번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제 남편도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남에게 양보하고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아이가 착한 아이가 될 수 없는 세상는 어떤 곳일까? 저자는 뭔가 잘못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마음씨 곱고 배려심 깊고 경쟁 상대를 밀어내는 것이 서투른” 그런 사람은 착해빠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이런 세상은 어떤 곳일까? 그 세상이 이상화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자.

남의 사정을 배려하는 마음 때문에 망설이고 주저하는 우유부단한 사람은 쓸모없고 단칼에 무 자르듯 ‘결단력’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러나 “망설이는 사람, 결정 못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생각의 깊이가 풍부하다.

자기주장이 없고 남의 말을 자르면서까지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면 줏대없는 쓸모없는 사람인가? 그러나 자기주장이란 “감정을 억제한 객관적, 이론적 말하기가 기본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을 몸에 익힌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다보니 자기주장이란 “무턱대고 비판적이 되거나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 오로지 자기주장만 하는 격이 되어버린다.” 적극적이니 자기주장이니 하지만 과연 그 ‘하고 싶은 말은 어쨌든 말하”는 사람만 제대로 된 사람인가?

세상은 그 세상에 사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해야 한다. 그러나 성공만 말하고 부자만 말하고 출세만 말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은 오직 한 유형만 말한다. 그러나 ‘이기적 자본주의’에 맞는 사람의 진짜 모습은 어떤 것일까?

“병원에 오자마자 무조건 ‘어쨌든 빨리 해줘요!’라고 요구하던 여성 환자가 있었다. 요즘은 별 요구없이 자신의 순번대로 기다려 진료를 받는 그녀를 보고 “예전에는 왜 그렇게 서두르셨습니까?’라 물었다. 그러자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그녀는 이렇게 말햇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초조해 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저희 회사는 개인의 실적에 따라 업무고과가 매겨지는 곳이라 직원 모두 밥 먹을 새도 없이 시간에 쫓겨 가며 조금이라도 더 실적을 올리려 열심입니다. 그런 상황에 내몰리다보니 저도 우울증에 걸린 거겠지만요. 병원에 와서 30분 이상 기다리고 있으면 지금쯤 회사에서는 모두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텐데란 생각이 들면서 초조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갑자기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지금 이 순ㄱ5ㅏㄴ에 나만 혼자 도태되는 건 아닌가 불안해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되곤 했죠…’ 결국 그녀는 우울증이 회복되어 감에 따라 ‘나 먼저’에서 ‘먼저 하시죠’로 바뀌어갔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직장에서 ‘나 먼저’ 타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마치 눈감으면 코 베어갈 듯한 일상 가운데에서 어쨌든 ‘경쟁에서 이기고 싶다. 주변 사람들보다 먼저 나아가지 못하면 패배다’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밀어내기 경쟁, 앞질러 따돌리기 경쟁’이 마음에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가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는 이상 ‘먼저 가시죠’라고 말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염려가 가능한 ‘먼저 가세요’ 주의의 사람들은 어린애 같은 자기애를 졸업하고 성숙한 인격을 획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분별력 있는 사람’ ‘마음씨가 착한 사람’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전체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 사회’라고 일컬어진다. ‘눈에 띄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어린애 같은 자기애적 가치관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절반쯤은 병적인 자기애적 인간이 위세 등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나 먼저’라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은 사실은 미숙하고 연약한 사람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자신 없음이 가득하면 할수록 더욱 ‘내가 말한 것은 옳아’ ‘모두가 내 의견을 따르는게 당연해’하며 계속 허세를 부린다.

자기애적 인간에게는 큰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의 요구에 긑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좀 더 이기고 싶다. 좀 더 눈에 띄고 싶다는 욕구에는 이걸로 만족이라는 종결점이 없다. 무언가 이루었어도 다음엔 이거라고 다음 욕망이 치밀어 오른다. 물론 언젠가는 바란다 해도 실현 불가능한 한계 중의 한계가 찾아오지만 그때 그들은 커다란 실망, 좌절, 분노를 한꺼번에 느끼게 되어 허탈감이나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이기적 자본주의의 인간형은 저자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미숙함 이상이 아니다. 착한 사람은 무시당하고 이용당할 뿐이라며 착한 아이를 못된 아이로 보도록 엄마를 몰아세우는 세상. 뭔가 잘못 돌아가는 세상이라 저자는 본다. 배려, 용서, 관용 등 오랜 역사에서 인격의 성숙으로 보아온 가치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세상. 이런 세상이 얼마나 갈까?

성공과 출세라는 가치 하나로 온 세상을 재며 그 당근을 내세워 결과만, 효율만, 성과만 외치는 세상에서 사람은 쉽게 지쳐버린다. 그 세상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을 줄이고 합리화, 삭감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면 인간의 마음에는 반드시 무리가 생긴다. 본래 가장 오래 무리없이 일하는 것은 오히려 언뜻 봐 효율이 나쁘거나 쓸데없는 시간을 빈둥빈둥 보내며 생활하는 사람 쪽이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은 본인이 계속 해나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누그러들게 하는 힘도 갖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그 비즈니스맨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는 지금까지 사내에서 최고의 실력을 인정받으며 동기들 가운데서도 확실히 가장 일을 잘 해냈습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몇배나 일을 해치웠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동안 아무리 많은 일을 처리했다 해도 2년이나 직장을 쉬어버려서는 뭘 위해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분명 지금 다시 복직한다 해도 저보다 무능한 사원을 없을 테니 곧 해고 대상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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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세기 -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
니얼 퍼거슨 지음, 이현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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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4월 4일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당했다. 아이오와의 초등학교 교사인 제인 엘리엇은 학생들에게 그의 암살 사건에 대해 설명해주고 싶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줄곧 인종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달 전 ‘이달의 영웅’으로 뽑횐 킹 목사의 암살 사건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다음날 그녀는 학생들이 편견에 대해 확실히 실감하길 원했다. 그녀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두 집단으로 분류했다. 갈색 눈의 아이들과 푸른 눈의 아이들이었다. 그런 다음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충격적인 선을 했다.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이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두 집단은 분리되었다. 푸른 눈의 학생들은 교실 뒤쪽에 모여 앉아야 했고 갈색눈의 학생들은 푸른 눈의 아이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쉬는 시간을 추가로 더 길게 즐 길 수 있었다. 푸른 눈의 학생들은 멀리서도 눈 색깔을 구분할 수 있도록 목에 특별한 칼라를 달았다. 두 집단은 쉬는 시간에 함게 어울리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엘리엇은 학생3들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고 엄청난 충격을 바ㅏㄷ았다. “아이들은 갑자기 심술궂어졌고 친구들을 차별하고 못되게 굴었다. 정말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갈색 눈의 아이들이 푸른눈의 친구들을 놀리고 경멸하기 시작하면서 우정이 급속도로 파괴되었다.”

다음날 엘리엇은 교실에 들어가 자신이 틀렸다고 말했다. 사실은 갈색 눈이 더 열등하다는 것이엇다. 푸른 눈의 아이들은 환호했고 갈색눈의 아이들에게 달려들어 목에 달았던 칼라를 붙여주었다.

열등한 집단에 속하게 된 학생들은 스스로에 대해 슬프고 나쁘고 심술궂고 멍청하다고 묘사했다. 한 소년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쁜 쪽에 속해 있을 때는 나한테 세상 나쁜일이란 나쁜 일은 다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수한 집단에 속하게 되자 학생들은 즐겁고 착하고 독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엘리엇의 실험은 학생들에게 편견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주었다. 잔인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지 15년 후 엘리엇의 학생들은 그때의 경험이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털어놓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생히 기억하는 레이 한센은 ‘그것은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심오한 경험이었다’라고 말했다. 수 긴더 롤랜드는 ‘때로 나는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잠시 생각을 멈추고 3학년 때를 떠올린다. 그러면 차별을 당한다는 게 어떤 기분이지 깨닫게 된다.’” (칩 하스, 댄 하스)


차별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란 것을 엘리엇의 학생들은 깨달았다. 특별할 것 없는 초등학생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우슈비츠에서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그리고 고대 그리스와 중국에서 인간이 해왔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이웃을 ‘어버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라 경멸하는 의미로 바바리안이라 불렀다.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열등한 인간이었다. 그 이웃은 그리스인들이 야만을 헤맬 때 인류 최초의 문명을 만든 사람들인데 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쓰레기’들을 청소한 사람들은 엘리엇의 학생들과 다를 것 없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아우슈비츠에서도 르완다와 보스니아에서도 악은 평범했다. “대량학살과 거기에 비교할만한 집단 폭력에서 우리는 광기와 사악함을 보고 이런 일을 어떤 사람들(‘피에 굶주린 세르비아인’)이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나 라트코 믈라디치처럼 미친 사람 또는 그 집단의 비정상적인 성격 탓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이런 설명들은 대량 살상이 인간 세계의 ‘정상적인’ 작동이 아니라 돌발적인 지진이나 화산폭발처럼 비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하면서 안심시키는 힘이 잇다. 그러나 우리가 바람직한 사회적 결과를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산물로 보면서 동일환 인간 본성이 만드는 어두운 면을 외면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 인간이 가진 증오와 폭력의 능력도 분명히 우정과 협력의 능력과 똑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협력을 통해 힘든 추수를 해 냈고 적을 방어했고 땅과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이웃 집단을 살육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개인이 가진 이타적인 본성은 역설적으로 집단으로 인해 생겨난다. 개인이 개인을 돕는 행위로만 보아서는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개인들이 뭉쳐서 사회를 이루고 집단 단위로 경쟁한 결과로만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에 대한 가장 명백한 사실 하나는 그것을 저으이하고 특징을 부여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집단의 구성원은 뭔가를 공유하는데 이것은 국적일 수도 있고 피부색 복장 나이 거주지역 말투 등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집단을 싫어핟나는 공통점만으로ㅓ도 집단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표지들은 심리적인 힘을 행사해 많은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차별하며 피부색이나 종교., 옷 따위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만든다. 민족주의적 증오, 인종주의적 혐오, 또는 다른 문화에 대한 증오는 사회적 역설이다. 사람들을 불화하게 하는 이런 힘이 협력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마크 뷰캐넌)

물론 보스니아와 같은 일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를 정의하던 질서가 무너질 때, 그 질서를 재규정해야 할 무질서가 떠오를 때, 무질서가 흩어놓은 집단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때 보스니아와 같은 일은 일어난다.

“강한 민족적 증오의 주요 원인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다른 민족들이 어떤 이유로 사업이나 거래를 하지 못하게 되면서 민족 간의 사회적 연결이 무너져 통상적인 사회역학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경제가 혼란스럽거나 내전이나 혁명이 일어나 건전한 사회적 상호작용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신뢰할만한 사람들을 구별하기 위해 원시적인 메커니즘에 매달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평판을 알아보기 위해 정교한 판단의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은 무력해지고 조악한 인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국외자와 외국인, 다른 인종의 사람들이 갑자기 위험 인물들로 보인다.” (마크 뷰캐넌)

이책은 홀로코스트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전간기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경제의 낙관주의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다’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100년전에도 상품과 자본, 노동이 영국으로부터 지구 끝까지 자유로이 이동하는 비슷한 방식의 세계화가 찬양받았다. 그러나 1914년 세계화의 첫 시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이슬람 지역에서 세르비아인의 과격한 테러로 깜짝 놀랄 충격을 안기며 끝났다.” 1차대전이 끝나고 전전의 질서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썼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벨르 에포크라 불리며 세계의 질서를 규정했던 세계화는 위태로웠으며 1차대전과 함께 사라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폐허는 질서의 진공 상태에서 회복되지 않았다.

2차대전은 제국이 사라진 진공지대를 채울 공기, 질서를 만들려는 시도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 질서는 다민족이 공존했던 과거의 제국일 수 없었다. 제국이 무너진 폐허에 세울 질서는 이질성의 조화가 아닌 동질성의 통합이 선호되었다.

“세계대전은 경제적 변동성에 의해 촉발되었다. 세계경제가 30년 동안 대변동을 겪은 이유는 1차대전에 의해 세계화가 방해받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호황, 불황, 이 모든 경제적 변동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불안을 가중시켯고 기존 제국들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민주주의 국가들을 위협했고 인종 간의 반감을 고조시켰다. 또한 터키, 러시아, 일본 독일 같은 제국 국가의 등장에 길을 열어주었는데 각국은 민족 동질성과 위계질서를 병적일 정도로 갈망했다.”

나치의 인종청소와 스탈란의 테러는 그러한 동질성과 위계질서의 프로젝트였다. 좌든 우든 유럽이든 아시아든 파시즘이 불관용의 폭력을 휘두른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폭력이 인종(또는 민족)을 청소한 덕분에 “20세기 전반의 주요 전장이었던 유라시아 동서 분쟁지에서 민족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2차대전 당시와 그 이후 인종 청소로 소수 민족 수가 크게 줄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가 동질화되었다.”

그러나 그 폭력의 무자비함과 불관용 때문에 대동아공영권과 제3제국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역사상 성공한 제국은 모두 관용(또는 포용) 위에 세워졌다. 제국은 타자의 협력 위에서만 성공한다. 그러나 자기 집단만의 이기심 외에는 타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었던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은 타자의 협력을 원천봉쇄해버렸다.

1942년까지 독일과 일본의 제국은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적은 그들과는 원래부터 ‘체급’이 달랐다. 인구와 경제규모에서 추축국의 몇배를 가볍게 넘기는 세 제국의 체급은 두 신생제국이 애초부터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승승장구할 때만 해도 잔인함과 오만함에도 불구하고 힘에 이끌린 기회주의자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물량전에 밀리기 시작하자 협력은 배척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들의 몰락과 함께 ‘제국의 시대’는 황혼을 맞았다.

“100년전 서양은 세계를 지배햇다. 100년 동안 유럽 제국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거듭한 뒤, 서양은 더 이상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었다. 100년전 서양과 동양의 경계선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근방에 위치했다. 이제 그 경계선은 유럽의 모든 도시를 관통하는 듯하다(저자는 이슬람 이민자를 말하고 있다). 이는 이 새로운 단층선을 따라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만약 ㅜ20세기의 역사가 지침이라면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이 같은 종교, 같은 유전자는 아닐지라도 같은 언어를 공유하며 상당히 잘 통합되어 있는 곳에서도 이 연약한 문명 체계가 급속히 무너질 수 잇다는 얘기다. 또한 20세기는 경제적 불안정이 그러한 반발의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 점도 증명했는데 20세기 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복지 국가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 이유는 살아가기 어렵거나 빈부의 차가 커지면 소수 민족 집단들을 적대적으로 바라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20세기 중반 최악의 학살이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칸 반도, 만주 같은 곳에서 발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발생한 과격한 폭력 사태는 더 다양한 지역으로 옮겨 갔는데 과테말라에서 캄보디아까지 앙골라에서 방글라데시까지 보스니아에서 르완다까지 그,리고 최근에는 수단의 다르푸르까지 확산되었다. 제국이 쇠퇴하면서 분쟁이 일어난 곳이나 힘의 공백 지대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하는 정권이 기회를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 민족 통합과 경제적 변동성, 쇠퇴하는 제국, 이 세 요인은 치명적ㄹ인 공식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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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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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여러가지 이유로 무너진다. 이 책은 그 중에서 한가지, 환경파괴로 무너진 문명만을 다룬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현재 우리의 문명이 무너진다면 환경파괴로 무너질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이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며 지금을 생각해보자는 의도로 쓰여졌다.

그러나 그런 주제를 다루는 책은 많다. 그 많은 책 중에서 이책은 시장에서 독보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책의 구성에 있을 것이다. 저자의 전작인 ‘총 균 쇠’처럼 이 책은 간단한 가설을 제시하고 그 가설을 여러 사례에 적용해보면서 그 가설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가설을 증명해나가는 형식이다. 역사학자의 방식이라기 보다는 과학자의 서술이다. 저자가 역사학자가 아닌 생물학자이니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서술방식 덕분에 두꺼운 책이 명료해지고 의미가 분명하기에 재미있어진다.

저자의 가설은 단순하다. “과거 사회의 붕괴는 약간의 차이가 잇지만 큰 줄기에서는 유사한 과정을 밟은 듯하다. 인구 폭발로 관개 시설, 이모작, 계단식 밭 등 농산물 생산을 늘리기 위한 집약적인 수단을 동원해야 했고 처음 선택한 우량한 땅에서 주변의 땅까지 농지를 확대해야 했다. 점점 늘어나는 굶주린 배를 채우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처럼 지속불가능한 수단의 동원으로 환경 피해가 뒤따랐고 그 결과 주변에 개발한 농지가 다시 버려졌다. 식량 부족과 굶주림, 부족한 자원을 두고 다툰 민족들 간의 전쟁, 환멸을 느낀 민중의 모반 등이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결국 기아, 전쟁, 질병 등으로 인구가 줄었다. 대신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의 다양성에서 전성기 때의 힘을 상실했다. 소련의 몰락을 생각해보면 충분하다. 과거 사회들은 인구 수와 힘에서 정점에 이른 후 급속히 기울어졌다. 이런 급속한 몰락은 주민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죽거나 다른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복잡계 이론에 따라 저자의 가설을 다시 설명해보자. 사회를 열린 시스템이라 생각해보자. 사회란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외부에서 에너지가 계속 들어와야 한다. 그 에너지의 유입경로를 경제라 부른다. 에너지의 유입량이 늘어나면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사회의 규모도 늘어난다. 규모가 늘어나면 에너지는 그만큼 더 필요하다. 문제는 환경이 그 사회가 필요한만큼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저자는 다양한 과거 사회를 분석하면서 많은 사회들이 환경의 한계 이상으로 에너지를 뽑아내면서 경제가 무너졌고 경제의 붕괴는 사회에 충격을 주고 정치에 충격을 준다. 시스템이 이 충격을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이르면 갑작스런 파국이 오고 사회는 붕괴하면서 시스템은 카오스로 돌아간다.

시스템에 충격이, 다시 말해 스트래스가 가해진 상태에서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파국은 올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대책을 만든다면, 그 대책이 성공한다면 파국은 오지 않는다. 또는 다른 사회와 교역으로 환경이 제공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져올 수 있다면 파국은 오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복잡계 이론에서 말하는 시스템의 개념으로 사회를 분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가설은 위와 같이 재해석해도 무방하다.

저자는 자신의 가설을 다섯가지 변수로 정리한다. 예를 들어 마야의 경우를 보자. “사회적 붕괴 요인으로 제시한 다섯가지 요인 중에서 마야 사회는 네가지 조건을 충족한다. (첫째) 그들은 삼림 파괴와 그에 따른 (토양) 침식으로 환경을 홰손햇다. (둘째) (환경파괴에 더해진) 기후 변화, 즉 가뭄도 마야의 붕괴에 한 몫을 햇다. (셋째) (악화된 자원사정 때문에 일어난) 마야 사회 내에서의 내홍도 큰 역할을 햇다. 끝으로 정치, 문화적 요인 특히 왕과 귀족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쓰지 않고 (악화된 자원사정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경쟁적으로 전쟁을 치르고 기념물 건립에만 몰두한 것도 마야를 붕괴로 몰고 간 중대한 원인 중 하나였다. 다섯 사지 요인 중 남는 것은 외부 사회와의 우호적인 교역이다. 그러나 이 요인은 마야 사회의 부침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한 듯하다. 흑요석, 옥, 황금, 조개껍질 등을 수입하기는 햇지만 흑요석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반드시 필요한 수입품이 아니었다.”

이책은 마야와 같은 과거 사회만 다루지는 않는다. 문명의 붕괴를 다룰 때 빠질 수 없는 이스터 섬이나 마야 등을 다루는 부분은 이책의 반 정도에 불과하다. 오히려 르완다 내전이나 아이티, 도미니카 공화국, 호주와 같은 동시대의 사회를 분석하는 지면이 약간 더 많다. 이책의 관심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의 분석틀은 과거 사회에도 현재 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강한 설명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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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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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이러한 시스템을 ‘복잡계’라 부른다. 시스템 내부의 역동성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들고 대부분은 예측마저 거부하기 때문이다. 생태계든 주식시장인든 복잡계의 변화는 대개 완만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과도 같은 사건이 연달아 빠르게 진행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복잡계는 외부에서 관리하거나 설계하기 극도로 힘들다. 또한 뉴튼이나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전적인 접근법의 물리학으로는 복잡계를 설명할 수 없는데 전통 물리학은 세상을 기초 단위로 쪼갤 수 있으며 이런 요소들로 모든 것을 조합할 수 있다ㅓ는 생각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복잡계 과학자들은 ‘복잡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창 밖 내다보기!’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구름, 산, 강 들이 한데 뒤섞여 우리 세계의놀라운 풍경을 만드는 모든 것은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대다수 물리학자들이 의지하는 에너지 법칙이나 운동법칙으로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설명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저변에 숨은 보다 복잡한 논리로 도약해야 한다. 다소 반항적인 물리학자들은 이런 유머를 자주 인용한다. 축산농가가 젖소의 우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이론물리학자를 고용했다. 그 물리학자는 농장을 방문해 농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후 몇 년간 소식이 없던 그가 어느 날 답을 찾아냈다며 돌아왔다. “이렇게 가정해봅시다. 구형(球形)의 소가~~” (조슈아 쿠퍼 라모)

저자는 둥근 소의 세계를 ‘평범의 왕국’이라 말하며 울퉁불퉁 살아있는 소의 세계를 ‘극단의 왕국’이라 말하며 극단의 왕국은 검은 백조의 세계이다.

저자는 두 왕국의 차이를 러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인새으이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적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의 믿음은 수정을 강요받는다.”

러셀의 비유는 귀납법의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칠면조의 논리에는 문제가 없다. 천일 동안 먹이를 받아먹었으니 천 하루 째에도 그럴 것이라는 칠면조의 생각은 관찰을 통해 얻은 증거와 그 증거가 뒷받침하는 논리의 결과이다. 그러나 칠면조의 논리는 “가치가 0이 아니라 마이너스이다.” 세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칠면조의 논리가 성립되는 영역을 저자는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칠면조의 논리가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저자는 ‘블랙스완에 대비하라’에서 우리의 세계를 확률분포에 따라 4분면으로 나눈다. 칠면조의 논리는 세개의 분면에서 잘 또는 그럭저럭 문제없이 작동한다.

저자는 이 세개의 분면을 평범의 왕국이라 부른다. 이 왕국에선 평균의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왕국에선 천 하루째의 극단적 사건은 나머지 천일의 사건들의 평균에 묻혀 의미가 없어지는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확률분포를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이라 한다.

정규분포에서 평균을 벗어난 값은 평균과의 차이가 클수록 확률이 희박해진다. 그러므로 평균은 세계의 ‘기대값’이 되며 확률적으로 세계의 현상은 그 기대값의 근사치라 생각할 수 있으므로 세계의 불확실성은 고려할 필요가 없어진다.

“최대값이 평균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변수를 다룰 때에는 가우스적 접근법(정규분포)을 충분히 채택할 수 있다. 큰 폭의 변동을 낮추는 요인이 있다거나 큰 관측값을 막는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 환경은 평범의 왕국에 속한다. 평형상태에서 벗어나더라도 곧바로 이를 (평균으로) 되돌리는 강력한 복원력이 존재한다면 역시 가우스적 접근법을 채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가우스적 접근법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런 까닭으로 대부분의 경제학이 평형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평형 개념은 여러 이점을 갖고 잇지만 그중에서도 경제 현상을 가우스적으로 간주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창 밖의 세계’는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확실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바람대로 세상이 확실하기를 바란다. ‘무의미한(부조리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뿐이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의미 즉 확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문제다. 세상이 그렇지 않고 우리의 지식이 틀렸다면 그뿐이다. 시지프스처럼 세상이 끝날때까지 돌을 올리건 말건 그 사람의 문제니까.

문제는 그 시지프스들이 자신의 바위를 ;과학’같은 그럴듯한 말로 꾸밀 때이다. 시지프스들이 세상이 그렇다고 생각하며 그린
지도에 따라 우리가 행동할 때 그럴 때 세상은 불확실한 것에 그치지 않고 위험해진다. 그런 지도는 없느니만 못하다. 저자는 그에 대해 ‘질병’이라고 의사가 일으킨 질병이라고 지적힌다.

“의학에 대해 생각해보자. 의학이 생명을 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밖에 안되었다. 사망률 하락은 치료 발전보다는 위생 의식의 등장이나 항생제의 발견으로 인한 측면이 더 크다. 의사들은 통제라는 착각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한 선택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오랜 시간 많은 환자들을 죽였다.

치료자에 의해 야기된 피해를 의미하는 醫)因)性에 대한 연구는 널리 알려지지 안ㅇㅎ았다. 나는 의인성이 의학계 밖에서 사용된 사례를 보지 못했다. 의인성은 계몽주의에 의해 과학이 오만해진 이후 재발견되었다. 안타깝게도 조상들이 더 잘 알았다. 우리가 지식의 한계와 대가를 알지 못한다면 지식으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 계몽주의 이후 과학은 운 좋게도 물리학 화학, 공학에서 잘 작동했다. 그러나 과확에 의해 어떤 피해가 발생할 수 있고 실제로 어떤 피해가 발생햇는지에 대한 과학적 의인성 연구를 수행하면 우아함을 포기해야 한다.” 세계는 우아하지 않다. 세계가 우아하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우아함의 대가로 우리는 위험해지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1874년 12월 오스트리아 학파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는 다섯번 째 노벨 경제확상을 수상했다. 하이에크는 자신의 수상 소감문 제목을 ‘지식의 허울’이라고 지었다. 그의 연설문은 비단 경제학적 관점에서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듯 취급하고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 개념인 듯 다룬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행동은 없을 것이가고 하이에크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햇다. “훨씬 광범위한 분야에서 과학적이라는 외양을 갖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이로 인해 파생될 장기적 위험을 걱정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일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고 싶은 말은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한 지도로 그리는 그런 위험한 태도를 갖지 말자는 것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에서 플라톤을 2권에서 맑스를 공격한다. 포퍼가 그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불확실한 세계를 확실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다. 저자가 공격하는 위험한 태도 역시 대상은 동일하다. 저자는 포퍼의 선례를 따라 그런 태도를 플라톤적 태도라 부른다.

“어떤 목적지와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지도를 혼동하는 경향, 즉 순수하고 정교한 형식에만 초점을 맞추는 태도를 나는 그의 사상(성격)에 따라 플라톤적 태도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태도는 수학의 삼각형, 사회적 개념, 유토피아(‘원리에 따른’ 청사진으로 세워진 사회), 민족성 등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플라톤적 태도가 우리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으면 우리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대상이나 무너가 깔끔하지 않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은 도외시해 버리게 된다.”

저자는 그런 플라톤주의자들을 헛똑똑이 더 심하게는 로크의 미치광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태도에 반대하며 자신의 태도를 회의적 경험주의라 부른다. 그러나 플라톤적 태도는 우리의 본성이다. 그런 태도를 버리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저자는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자’고 말한다.

“작은 교훈이란 이렇다. 인간은 안간다워야 한다. 인간답다는 것에는 자기 일에 지적으로 어느 정도 자만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자. 이런 사실에 부끄러워하지 말라. 언제나 판단을 유 보하겠다고 애쓰지도 말자. 자기 견해를 갖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예견을 피하지도 말자. 이제까지 내가 늘어놓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바보가 되지 말라고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서 바보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거창하고 위험천만한 예측에 쓸데없이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를 위협할 지 모른 ㄴ 거창한 주제도 멀리하자. 작은 일에 바보가 되어도 좋지만 큰 일에는 금물이다. 경제 예측가나 사회과학 분야의 예측가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그들은 단지 연예인일 뿐이다). 다만 놀러가는 날의 날씨는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돌아오는 휴일의 나들이를 위해서 날시 예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맞아야 한다. 그러나 2040년 사회보장 상황에 대한 정부의 전망치는 귀담아듣지 말아야 한다. 이야기가 그럴듯한가가 아니라 잘못되었을 경우의 해악이 얼마만한가를 기준으로 믿음을 분류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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