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지는 사람들 - 테크놀로지가 인간관계를 조정한다
셰리 터클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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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스미노 히카게 중학교 2학년 존재감이 제로인 여자애...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다. 촌스러운 외모와 성격으로 초등학교에선 이름조차 외워준 사람이 없었고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심기일전하려고 했는데 (차에 치이려는 고양이를 구하려다 오토바이에 치었다) '고양이 밖에 안보였다' 오토바이 남자의 말. 존재감 없는 게 화근이 되어 전치 2개월짜리 부상을 입었다. 다들 일부러 그러는게 아니고 왕따를 시키는 것도 아니니 아무렇지 않..지만... (토야마 에마)

 

'나 여기에 있어'란 만화의 설정이다. 왕따, 등교거부, 니트족 등의 문제를 다룬 만화이다. 인기를 끌었던 너에게 닿기를과 마찬가지로 이 만화의 주인공 설정은 현실적이지는 않다. 존재감이 없다고 교통사고가 나기는 어려우니 말이다. 그러나 "2년동안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한테 졸업식 날 '너 이름이 뭐였지?'란 말을 들었던 난 꽤나 음침도가 높았던 것 같아요. 힘들어요. 리액션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때때로 고독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드리는 만화입니다."란 작가의 말처럼 "새까만 어둠의 세계에서 날 찾아주는 사람을" 원하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는 묻는다. 계속 이대로일까?

 

그렇지 않아! 해바라기라면 계기가 있으면 바로 친구를 사귈 수 있어! 매일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런 해바라기를 봐주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야(^^)" 그 대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온다.  내 취미는 블로그에서 '해바라기'라는 닉네임으로 하루 한 번 찍은 사진이나 생각한 걸 적어 인터넷 일기에 공개하고 있다. 블로그는 봐주는 사람이 덧글을 주기도 하고 이런 식으로 주고 받을 수가 있다. (블로그에 달리는 덧글은) '나'를 꾸준히 지켜봐주는 소중한 마음의 지주이다." (토야마 에마)

 

그러나 그 지주는 진짜가 될 수는 없다. "현실세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동네 애듫이 숨바꼭질에 끼워줘서 이런 식으로 술래를 기다렸지. 계속 계속 기다렸어...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주질 않아서 울면서 집에 갔다. 그때랑... 똑같잖아... 기억 못하는 애는 찾지도 않지... 찾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알아... 알고 있어... 하지만 외로워... 누군가... 누군가 날... 알아차려줘." (토야마 에마)

 

"조금 용기를 내면 세상은 변할 거야" 이 만화는 그 누군가를 찾으려는 히카케의 용기를 이야기한다.

 

이책에서 저자가 그리는 네트웤의 세계는 블로그의 댓글을 삶의 버팀목으로 삼는 히카케(일어로 그늘)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히카게가 그랬듯 자신을 알아차려줄 누군가를 찾아 네트웤에 로그인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를 진짜 찾아나설 작은 용기를 내지는 못한다.

 

우리는 관계를 맺어주는 동시에 관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테크놀로지에 시선을 돌린다. 이런 현상은 문자 메시지의 홍수를 헤쳐나갈 때도 일어날 수 있으며 로봇과 상호작용을 이룰 때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전에 없던 염려로 무생물들에게 열중한다. 같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겪는 실망과 위험을 두려워한다. 테크놀로지로부터는 더 많은 걸 기대하고 우리끼리는 서로 덜 기대한다. 테크놀로지는 친밀성의 설계자를 자처한다. 오늘날, 그것은 실제를 도망가게 만드는 대체물들을 제안한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인간적 약점과 만날 때 매력적이다. 우리는 정말 상처받기 쉬운 존재다. 외로움을 타면서도 친밀해지는 건 두려워한다.

 

"아무도 진짜 나한테는 관심없어. 다들 스타 연기자 모리카와 토모미에 대해서만 궁금해해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15살짜리) 천재 소녀 토모미 말야. 진짜 모습 따윈 필요도 없어. 말해봤자 소용없다구 모두의 머리 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니까. 배우는 사람의 기억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얘기 있어. 가끔 생각해.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까 하고 아무도 내 짐짜 모습을 모르는 채 거짓말 그대로 거짓말쟁이인 채 잊혀져 버리게 될까 하고 나,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 은둔형 외톨이인) 카요가 되고 싶었어. 카요는 나 같았으니까. 약간이나마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렇지 않음 내가 사라질 것 같았어. 사실 난 어디에도 없고 제멋대로에다 거짓말쟁이인 배우 토모미라는 딴 애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 바보같지?" (카와하라 유미코)

 

토모미가 하루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닮은 카요란 캐릭터를 창조한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루는 자신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서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식으로 해답을 얻을 때까지 얼마나 상처입었을까? 상처입은 소녀. 거짓말과 제멋대로 구는 것으로 자신을 지키는 소녀. '비현실'속에서만 자신을 지탱할 수 있었던 소녀는 '현실'을 의식한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말았는지 모른다. 하루 탓이야. 비린내나고 기분 나쁜 현실을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했다. 그 한가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억지로 명랑하게 행동하고 연기하고." 사랑하고.

 

그러나 사랑이 구원일까? 시나리오대로의 사랑 밖에 모르는 토모미는 현실의 사랑도 구원일지 의심한다. "난 모르겠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자신을 모두 버릴 수 있어? 사랑 얘기는 다 그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달라져 사랑이라는 계기 하나로 그 때까지 자신이 지켜온 모든 걸 전부 버리고 말지 그렇게 하는 게 잘하는 것인양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라도 되는 듯. 하루는 그런 것 믿을 수 있어?" 그러나 누구나 믿을 수 없으면서 믿고 싶은 것이 그런 것이다. "하루가 믿게 해줘."(카와하라 유미코)

 

그러나 그 믿음이란게 얼마나 견고할 수 있을까?

 

"엄마에게 왜 그러셨어요? 혹시 엄마를 의심하셨어요? 그래서?"

"아니 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모르겠다."

"전 들어야 해요. 저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둘러대려는게 아니고 정말 모르겠어. 어떤 말을 사용하든 다 그럴듯하다는 생각도 들고 또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모르겠다. 사랑이었다. 모든 것이 그랫다고 말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시점까지는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내 인생은 너무도 황폐해진다. 내 선택에 자신이 있었다. 실수한적이 없는 인생이었고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잘못된 일일리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서로 사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노력해도 사과는 서로를 더 고개들지 못하게 만들뿐이고 노력은 펼쳐진 현실으 어떤 부분도 바꾸지 못했고 위로도 격려도 내뱉는 즉시 온기를 잃고 사라졌다. 그래 사랑했었지 좀 더 많이 보고 싶고 좀더 오래 함께 있고 싶어서 나지막한 이야기들이 즐거워서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사랑했었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에 마음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것도 가슴까지 와 닿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저 십 년간 조금씩 바라 온 기억의 흔적, 애정의 잔해. 하지만 그 순간에는 잘 몰랐다. 한 번 두번... 조금씩 확실해졌지 이제 어떤 일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아니 움직일 마음 자체가 없어진 것같다."

"그렇다면 왜?"

"네 엄마에게 쏟아낸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랬다. 잃은 것에 대한 상실감? 후회? 죄책감의 비뚤어진 표현? 전부 그럴듯하지. 참 이해하기 쉬워,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건가보다 싶어지지. 하지만 그것으로 전부냐 하면 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다. 사람을 부수고 망가뜨릴 정도의 감정 자체가 남아있질 않았는데 왜? 네 엄마에게 퍼붓고 덮어씌운 것은 그 사라지고 남은 모든 감정의 부스러기나 흔적 같은 것들 아닐까 싶다." (윤지운)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진짜 같은 환상을 만든다. 디지털 연결망과 사교 로봇은 친구 맺기를 요구하지 않는 교류라는 환상을 제공한다. 우리의 네트워크화된 삶에는 서로 묶여 있는 순간에도 서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대화보다도 문자 메시지가 선호된다. 로봇이 우리를 보살펴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자기와 상호작용하는 사람을 알아보고 그 사람에 의해 성격이 형성되는 가상 인간 마일로를 공개했다. 마일로를 세상에 소개하는 비디오는 강렬하게도 한 젊은이가 가상 정원에서 마일로와 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시연이 끝날 때쯤엔 분위기가 무르익어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은 젊은이가 마일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기계와 나누는 새로운 친밀감을 통해 우리 자신 및 관계가 재창조된다.

 

그러나 그런 친밀감은 진짜일까? 나에게 진정성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볼 수 있는 능력, 인간적 경험-태어나고, 가족을 가지고 죽음이라는 현실과 상실감을 아는 것-을 공유하기 때문에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컴퓨터와 로봇에게는 함께 공유할 그런 경험들이 없다. 사람들이 그런 환상에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정교한 일본산 로봇이 소위 돌봄 행위를 할 수 있다면 남자 친구와 맞바꿀 의향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만일 로봇이 그런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누군가 정말로 나와 함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겠어요. 앤이 찾는 것은 외로움을 가시게 해줄 위험 없는 관계였다. 각본대로 행동하는 것일뿐이더라도 즉각 반응을 보이는 로봇이 까탈스런 남자친구보다 더 나아 보인다고 했다.

 

그러나 가짜는 외로움을 없애지 못한다. 미리엄은 다른 어떤 존재와 친밀하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실은 혼자엿다. 아들이 자기 곁을 떠나고 로봇한테 의지하는 동안 나는 우리 역시 그녀를 버린 거라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편견없이 무생물에 애착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 문득 기술적 문란이란 말이 생각난다. 이 시대의 배경이 궁금해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과 부대까며 사는 어려움과 피로의 소리를 접한다. 우리는 인간적 취약성이 드러나는 대목마다 로봇을 대입한다. 사람은 요구가 너무 많지만 로봇의 요구는 좀더 감당이 가능한 수준일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만 로봇은 그러지 앟을 것이다.

 

스크린의 채팅도 다를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 역시 가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온라인에서의) 그러한 정체성 연기들은 정체성 그 자체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로봇공학과 네트워크한 삶이 처음 교차하는 지점이다. 온라인 연기는 방향감각의 상실을 불러올 수 있다. 당신은 보상을 얻고픈 마음에서 온라인 삶을 시작했을지 모른다. 외롭고 고독했다면 아무것도 안 하느니 그거라도 하는 편이 나아 보였을 테니

 

그러나 저녁 나절, 네트워크 게임에서 아바타 대 아바타 대화를 하고 나면 잠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에 젖다가 그 다음에는 낯선 이들과의 허약한 연대 속에서 묘하게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페이스북이나 마이스페이스에서 팔로잉을 하면서 팔로워들이 어느 정도까지 친구인가를 궁금해한다. 온라인 페르소나로 자신을 재창조하여 새 몸과 새 집, 새 직업, 새 로맨스를 부여하는데 가상 커뮤니티의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 어느 순간 철저하게 혼자라는 느낌이 엄습할지도 모른다. 자신을 퍼뜨려나갈수록 스스로 버림을 받게 될수도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몇 시간을 접속하고 나서도 소통했다는 감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전혀 관심을 기울이고 잇지 않을 때 친밀한 기분을 느낀다.

 

열세살짜지 소녀는 내게 말했다. 전화는 너무 싫어요. 음성 메일은 듣지도 않고요. 문자 메시지는 적당한 접속시간, 적당한 조종시간만을 젝5ㅗㅇ한다. 그 소녀는 현대판 골디락스다. 그 애에게 문자 메시지는 사람들을 너무 가깝게도 너무 멀게도 아닌, 딱 적당한 거리에 두는 수단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친밀성을 획책하는 경우엔 인간관계가 단순한 연결 수준으로 떨어질 수있다. 그렇게 되고 나면 손쉬운 연결이 친교로 재정립되낟. 다시 말해 사이버 친교가 서서히 사이버 고독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은 로봇에 프로그래밍된 하는 연기와 구분이 되지 않게 된다. 우리의 두려움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

 

"혜민이는 신비에게 자기 자신을 제외한 '세계'와 마찬가지니까. 누군가를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려면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간단해 원하는 것을 모조리 채워주면 되잖아. 어디로도 갈 수 없도록 고립시켜 버리는 것, 타인과 접촉하기 위한 통로, 건너가지 위한 길목. 아주 세심하게 없애버렸지. 싫든 좋든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내가 처음 혜민이를 봤을 때 그 앤 그냥 말주변이 부족하고 낯을 가리는 평범한 아이였어. 괴로운 일을 당하면 슬퍼하고 자신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울었지 하지만 점점 그 앤 울지도 않고 고민하지도 않게 되고 고개를 들고 싫은 말은 무시할 줄 알게 되고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까딱하지 않게 되었어. 강해진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 애는. 신비가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어온 거야. 잘못한 것은 네가 아니다. 뒤틀린 것은 세상일뿐이다. 그러니까 너는 먼저 손을 내밀 필요가 없어.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속삭여 주면서. 잘 알고 있었거든 신비는. 옳다 그르다라는 것은 살아가는데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그애가 인간에게 무지하다는 것을. 고개 돌리고 있는 사람까지 챙기려들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고 하물며 적의를 보이는 애야 말 할것도 없지.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애에게 가혹해지고 또 그럴수록 그 애는 번거로운 일에서는 눈을 돌려버렸어. 그런 악순환을 철저히 준비해왔어. 신비에게가 아니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도록 ." (윤지운)

 

시니컬 오렌지의 일부이다. 재혼으로 혜민과 남매가 된 신비는 혜민과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다. 이미 부모가 이혼해 남남이 된지 오래되었는데 법은 그런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혜민을 곁에 둘 수 잇는 방법은 그녀에세 에덴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우리의 두려움이 만든 테크놀로지의 세계는 신비가 혜민에게 만들어준 에덴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저자는 묻는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의 정서적 삶의 지형을 재구성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영위하고 싶은 삶을 제공하는가? 저자의 답은 부정적이다.

 

"안에 들어가도 돼?"

"... 안 돼. 이 방엔 죽은 거랑 죽어가는 것밖에 못들어가. 그러니까 하루는 들어갈 수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나 현실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하루가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나 살아있는 게 무서워. 배우가 아니면 봐줄만한데도 없는데 스튜디오가 무섭고 사람이 무서워. '살아 있어' '살고 싶어'라고 여러가지 것들이 얘기 해. 공기 속에 여러 생명이 섞여 냄새나고 무서워서 나 질식할 것같아. 그래서 난 죽은 방에서 죽는 꿈을 꿔. 영화나 책에서 사라져 없어질 때까지 해피엔드는 해피엔드니까 좋겠구나 생각했어. 그래서 꿈을 꿔. 내가 행복한 주인공이 된 꿈. 자물쇠를 걸고 들리지 않는 것처럼 살아있는 것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꼭꼭 잠근 후에 죽은 것들에 파묻혀. 언제나 변하지 않아. 언제나 행복한 세계. 그리고 결국엔 죽은 것들과 닮아가. 꿈도 나도. 그치만 하루 때문에 많이 망가졌어.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마!!"

"그렇담 더욱더 들여보애 줘야 해. 토모미는 살아 있어. 죽은 것들은 널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영화랑 책을 만든 건 현실의 인간이야. 난 아직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지만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알아. 이 녀석들보다 훨씬 나. 종이나 필름을 살아 있는 세상과 바꿔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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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임 -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타라 브랙 지음, 김선주.김정호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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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은 다르다. 세상이 고해라 할 때 우리는 보통 고통을 떠올린다. 그러나 불교에서 고해라 할 때 는 고통이 아니라 괴로움을 말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

 

진통이 시작되었을 때 고통에 저항하면 더 나빠질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긴장을 풀고 호흡을 하면서 소리내는 것을 참지 않았고 내몸이 지능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여느 동물처럼 생각을 하지 않고 몰두하면서 내게 펼쳐지는 드라마에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고통을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로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뭔가가 바뀌었다. 아기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고통의 수준이 급격히 상승했다. 더 이상 호흡으로 다스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엄청난 고통은 뭔가가 잘못되어간다는 의미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자신감은 사라졌고 긴장 없이 고통의 파도를 맞겠다는 결심은 잊혀졌다. 강렬한 출산의 순간에 나는 고통과 대립하며 완전히 교전 중이었다. 두려움과 저항으로 고통에 반응하는 것을 많이 봐온 산파는 즉각 나를 안심시켰다. ‘잘못된 건 없어요,… 모든 게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단지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그녀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번 말을 반복했고 타는 듯한 고통, 폭발할 것 같은 압력, 찢김과 탈진 중에 나는 다시 깊게 호흡하고 긴장을 푸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고통일 뿐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을 열고 그것을 수용할 수 있었다.”

 

붓다는 생노병사란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고통을 고, dukka라 한 것이 아니다. 팔리어 dukka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고통이 아니라 뭔가 어긋났다는 말이다. “붓다는 우리가 경험에 연연해하거나 저항할 때,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원할 때 괴롭다고 가르쳤다.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움은 선택이다.’

 

저자는 무엇이 고통을 괴로움으로 바꾸는지 묻는다. 붓다의 답은 무아(無我)였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타인이나 인생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느낌과 함께 나타난다. 무가치감과 소외감은 여러 형태의 고통을 일으킨다. 사람들이 우리가 지루하거나 어리석고 이기적이거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를 거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는다. 무가치감의 트랜스는 삶이 고통스럽고 통제를 벗어났다고 느껴질 때 더 강하다.”

 

무가치하다는 느낌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며 불완전하다는 것은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이다. 붓다는 분리되었다는 그 느낌, ()라는 느낌이 문제의 근원이라 말한다.

 

우리는 가족이나 학교 친구 혹은 직장 동료 같은 소속 집단이 모두 우리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을 배운다. 성공하라고 똑똑하고 매력있고 능력있고 힘있고 돈이 많아 남보다 뛰너나 보이라고 압력을 받으며 서로 경쟁한다.” 우리는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 증명의 이유를 기독교에선 원죄라 부른다. “원죄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본성 때문에 우리는 행복할 자격이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생이 편안할 자격도 없다. 우리는 쫓겨난 사람들이고 만약 동산에 다시 들어가길 원한다면 원죄를 지고 태어난 자기를 구원해야 한다. 우리의 부모와 문화는 우리에게 뭔가 근본적인 잘못이 있다는 가르침을 통해 에덴 동산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우리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내면화할 때 우리는 무가치감의 트랜스에 빠진다.”

 

자신이 어긋났다는 근본적인 느낌, 그것을 붓다는 고()라 불렀다. 근본적인 불안감,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전술을 구사한다. “끊임없이 자기개선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우리는 완벽한 몸과 용모에 대한 대중매체의 기준을 만족시키려 흰머리를 염색하고 주름을 제거하고 끊임없이 다이어트를 시도한다. 직장에서는 더 좋은 직위를 얻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훈련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명상을 하고 목록을 작성하고 워크샵에 참가한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맘 편히 즐기기보다 우리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과 비교하며 그 차이를 줄이려 애쓴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물러선다.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스토리를 지어내 끊임없이 자신에게 전하는 식으로 두려움과 수치심의 생생한 느낌에서 벗어나려 한다. 우리는 막연한 불안 상태로 살기 때문에 머릿속에는 시도 때도 없이 재난 시나리오가 흘러다닌다.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관리하고 실패에 단단히 대비하는 태도라는 착각을 일으킨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과 수다를 떨면서 존재의 불안감을 잊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전략은 불안감을 없애기는커녕 강화할 뿐이다. 불안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괴로움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붓다는 모든 고통이나 불만족은 우리를 분리된 개별 존재로 보는 잘못된 이해때문이 말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기는 익숙한 생각, 정서, 행동 패턴의 집합이다. 마음은 이것들을 한데 묶어 시간이 가도 연속성을 갖는 한 독립된 개인의 사적인 스토리를 만든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나의스토리에 포함되고 나의경험이 된다. ‘가 두려운 것이고 가 욕망하는 것이다.아잔 붓다다사는 경험에 자기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습관을 -내세우기(I-ing)’나의-내세우기(my-ing)’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과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어떤 식으로건 자기에 속하거나 자기에 의해 야기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의 주어를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명상하기 위해 눈을 감았을 때 흔히 경헙되는 것은 흥분, 불한, 초조, 분노 같은 감정의 파도와 끊임없는 지적과 판단, 과거 기억과 미래의 스토리 들 걱정과 계획의 끊임없는 연속이다. 붓다는 지속적인 정서적, 정신적 자동반응을 폭포가 불렀다. 그 이유는 그 강력한 힘에 의해 우리가 너무 쉽게 이 순간의 경험으로부터 휩쓸려 가버리기 때문이다. 사람, 상황, 마음 속 생각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실제로는 몸에서 일어난 감각들에 대한 반응이다. 누군가의 무능함을 참지 못하고 비난을 할 때 사실은 우리 자신의 불쾌한 감각들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마음이 끌려 열망과 환상으로 가득할 때 사실은 유쾌한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동반응적인 생각, 정서, 행동의 소용돌이는 이와 같이 감각에 대한 자동반응으로부터ㅓ 나타난다. 이들 감각이 인식되지 않으면 우리 삶은 자동반응의 폭포에 휩쓸리게 된다. 우리는 생생한 깨어있음으로부터 온전한 의식으로부터 우리의 가슴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감정의 주인이 없다는 것, 그것들은 그저 일어나는 상()일 뿐이라는 것, 그 상들의 주인은 없다는 것 내가 라 부르는 것은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괴로움을 다루는 첫걸음이다.

 

느낌이 생각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자. 그것들이 그냥 제멋대로 오고 간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졌다. 감각은 난데없이 나타났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아는 인지알 수 없었다. 진동, 박동, 따끔거림을 느끼는 는 없었다. 불쾌한 감각에 짓눌린 가 없었다. 생각을 만들어내거나 명상하려고 노력하는 가 없었다. 삶은 단지 일어나고 있었고 현상들이 마법처럼 나타났다.”

 

그냥 있는 대로 받아들일 때,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무가치함이란 원죄는, 세계와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벗어버릴 수 있다.

 

모든 지나가는 경험을 이 또한 마찬가지의 개방성으로 수용하자, 몸과 마음 안의 어떠한 경계나 경계나 견고함의 느낌도 사라졋다.” 내 안의 생각과 느낌도 나 밖의 세계의 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 정서, 생각은 날씨처럼 의식의 하늘에서 그저 왔다갔다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뉴잉글랜드 가을의 아름다움에 감격했다. 나무들은 지면에서 높이 솟아 있었고 노할고 빨간 나뭇잎들은 선명한 푸른 하늘과 대비되었다. 색깔들은 내 몸을 통해 전개되는 생생하고 감각적인 삶의 일부로 느껴졌다. 바람 소리는 나타났다 사라졌고 나뭇잎은 땅으로 춤추듯 떨어졌으며 새는 가까운 나뭇가지에서 날아올랐다. 전체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안의 삶처럼, 어떤 것도 고정되지도 견고하지도 막혀있지도 않았다.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세상의 일부임을 알았다. 그 다음 복부 경련을 느꼈을 때 나는 그것이 단지 자연 세계의 또 다른 일부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계속 주의를 기울이는 사이, 내 안에서 일어났다가 지나가는 통증과 압력이 땅의 단단함, 떨어지는 낙엽과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는 그저 고통이 있었고 그것은 땅의 고통이었다.”

 

저자는 우리의 근원적 불안감, 원죄 역시 그렇게 받아들이라 말한다. 그저 불안감이란 느낌이 거기에있다고 받아들이라 말한다. “승찬 스님은 참된 자유란 불완전함에 대해 근심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욕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병이 들고 약해진다. 불완전함을 편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달라지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을 두려워는 데 빠져 우리 삶의 순간들을 잃어비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인가? “우리가 그 순간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신의 스토리들을 내려놓고 고통이나 욕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을 때 근본적 수용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진정한 수용의 두 날개는 명확히 보기와 우리의 경험을 자비로 감싸 안기이다. 명확히 보기의 날개는 흔히 불교 수행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기술된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의식의 특징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마음챙김할 때 질주하는 생각과 긴장되어 떨이는 몸과 도망가고 싶다는 욕구를 의식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조절하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의식한다. 두번째 날개인 자비는 우리가 지각한 것과 부드럽고 호의적인 방식으로 관계하는 능력이다. 두려움이나 슬픔의 감정에 저항하는 대신 아이를 보듬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신의 고통을 감싸 안는다. 주의를 끌려는 욕구 혹은 초콜릿이나 섹스에 대한 욕구를 비난하거나 멋대로 충족하기도바 부드러움과 배려로 감싼다. 자비는 우리의 수용을 번면적이고 완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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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 - 세계적인 뇌과학자가 우울한 현대인에게 보내는 감동과 희열의 메시지
게랄트 휘터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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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뇌가 유죄입니다얼마전 미국의 법정에서 나온 말이다. 피고가 살인을 한 것이 아니라 뇌가 살인을 했다는 말이다. 황당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근거가 없지는 않다. 뇌과학의 설명에 따르면 피고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유전자를 타고 났고 그 유전자가 살인을 꺼리지 않는 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피고의 살인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유전이며 뇌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묻는다.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허용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 생물학적 조건이 우리 안에서 무엇이 일어날지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생멸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생물이 살아온 역사에 좌우된다. 즉 생명 체계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매개에체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해 나가야 한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잘못이다.” 인간은 타고난 한계 내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나 그 인간이 무엇이 될지는 그 한계 위에서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자유의지의 문제이다. 이 주제는 철학과 사회과학에선 구조와 헹위자란 이분법으로 반복된다. 그 이분법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정리했었다. “인간은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대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유의지 또는 결정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우리는 닥치는 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배운다. 이때 어린아이 또는 노인으로서 누군가 무엇을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에 관심을 갖고 그리하여 그리하여 열광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

 

우리가 누구 누구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나는 어떤 사람이라 말할 때 그 내용을 정의하는 것은 뇌의 뉴런들이다.

 

외향성/내향성, 신경성, 성실성, 친화성, 개방성, 5 factor model의 변수들이다. 최근 심리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변수들은 유전적으로 결정되며 유전으로 결정되는 것은 뇌의 호르몬 시스템이라 한다. 성격은 유전이란 말이 된다.

 

물론 5가지 변수로 모든 사람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변수를 타고 났더라도 그 변수의 결정도와 그 변수가 발현되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유전으로 타고난 것이 어떻게 구체화되는가는 뇌의 건설현장에 달려있다.

 

인간의 뇌가 개인별로 고유한 특징을 띠며 형성되는 기본 원리는 실상 아주 간단하다. 애초에 뇌 안에는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다. 출생 전 이미 과다한 신경세포가 만들어지는데 이 중 어떤 식으로든 기능적인 연결망에 편입되는 것만이 마지막에 만고 나머지는 없어진다. 평균 1/3이 사라진다.” 그리고 무엇이 살아남을지는 환경에 달려 있고 그 환경은 처음에는 가족이며 후에는 친구, 선생님 등 사람으로 이루어진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서 복잡한 뉴런 연결과 시냅스 회로의 형태로 뇌안에 자리를 잡는 가장 중요한 경험은 다른 아닌 타인과의 생생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디른 동물의 뇌와 구별되는 뇌 부위는 타인과 관계를 맺는 경험들이 쌓이면서 형성되고 구조를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는 사회적 산물이며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최적화되어 있다. 뇌는 사회적 기관이다.”

 

Nature or Nuture, 본성이냐 양육이냐란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자유의지냐 환경이냐의 논쟁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맑스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신을 만들기 때문이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신은 그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이 인간 자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도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아이의 일상 세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아이의 뇌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아이가 삶의 과제를 헤쳐 나가는데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 즉 아이 자신이 열광하는 것들만이 영향을 준다. 아이들에게 이는 우선적으로 자기 몸의 기능과 동작을 조절하는 일이고 이후에는 가장 중요한 애착 대상과 관계를 맺어 가는 일, 그리고 점점 복잡해지는 일상 세계를 하나하나 발견하고 새로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아이가 열광하는 것,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그것은 바로 긴밀한 유대의 경험, 그리고 성장하고 자기만의 능력을 습득해가는 경험이다. 이 두가지는 기본 욕구로 자리잡으면서 장차 아이의 기대치를 좌우하게 되낟. 그리하여 사람은 평생 동안 유대감과 자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계를 추구한다. 두 기본 욕구 중 어느 하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찾는데 실패한 사람은 일단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라도 얻으려 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리만족이라 불리는 것인데 이제부터 그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사람이 원래 지녔던 열린 자세, 관계를 맺는 능력,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창조욕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TV 시청이나 채팅, 쇼핑, 아니면 남태평양 바다에서 보낼 다음 휴가 여행처럼 실제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쉽사리 중요성이 부여된다.”

 

저자는 유대감과 자유를 다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두 가지 기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하나는 유대관계를 맺고 친밀해지고자 하는 욕구 다른 하나는 성장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 자유롭고자 하는 욕구다. 다시 말해 남들과 함께 자기 가진을 뛰어넘어 성장할수 잇을 때 인간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 행복을 결정하는 두가지 욕구는 서로 모순은 아니더라도 긴장관계에 있다. 남과 유대감을 갖고 소속감을 갖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들은 타인들 또 그들의 행동방식, 확신, 의견, 생각 등에 점점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데 이로 인해 아이 뇌 안에 생기는 새로운 회로 패턴들은 아이 몸의 경험과 지각을 통해 형성된 이전의 뉴런 연결망과 불화를 일으킬 소지가 크다. 이를테면 몸을 움직이고 싶은 욕구가 처벌이나 심지어 어른들의 본보기만으로도 제약을 받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멋대로 뛰어다니며 괴성을 지르는 아이를 생각해보라. “유아의 역우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몸 전체를 사용하려는 충동이 아직 남아잇지만 이 역시 나중에는 억제되기 마련이다. 불안과 고통 지나친 기쁨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들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점점 통제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적응과정을 거치면서 어릴 적 자신의 사고, 감정, 행동에 주로 영향을 끼쳤던 것, 곧 자기 고유의 몸 체험, 감각 체험으로부터 차츰 멀어진다. 또 그때까지 자아를 이루던 아주 자연스럽고도 근원적인 요소들을 일제히 억누르기 시작하면서 아이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간다. 몸 자체를 포함해 몸에서 비롯되는 욕구들은 소속감, 인정받기, 정체성 발달, 자아 개발 등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걸림돌로 여겨지면서 억압되고 분리된다. 어쨌거나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야말로 지성과 감정, 두뇌와 몸을 분리시키는 그 같은 기이한 순응과정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순응의 과정이 개별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든 간에 결과는 똑같다. 태어난 후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쌓은 그리하여 뇌안에 자리잡게 된 경험들은 이전의 몸 체험, 감각 체험과 모순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성경 속 이미지는 대다수 사람들이 사회화 과정에서 체험한 내용을 아주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환경과 부딫히면서 아이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관심에 따라 자신의 뇌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며 자신의 뇌를 만들어간다. “그 초기 경험이 그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뇌를 사용할지 뇌 안에서 어떤 연결 패턴이 형성되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지를 결정한다. 이때 그들의 뇌 안에서 활성화된 회로들은 점점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미끈한 길로 변하면서 처음의 좁은 신경 길이 서서히 단단한 도로가 되고 결국에는 널찍한 고속도로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고속도로는 익숙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이후 그 사람의 사고와 감정, 행동을 규정한다. 자연히 그것은 기존에 획득한 능력의 유용함을 입2증할 수 있는 여건을 자꾸만 만들어내고 지속시키려 애쓸 것이다.”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이유는 뇌의 고속도로 때문이다. 일단 고속도로가 건설되면 그 도로가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새 도로를 내기는 무척 어려워진다.

 

우리 삶의 경험들은 특정한 뉴럼 회로 패턴으로 뇌 안에 자리를 잡는다. 자주 하는 중요한 경험들은 뇌에 익숙한 자취를 남기고 우리의 지각과 사고, 감정, 행동을 좌우함녀서 계속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나 달달 외운 명제들, 닳도록 읽은 안내 책자며 교과서 따위가 아니라뇌에 뉴런의 네트웍으로 이루어진 고속도록 즉 각자가 품고 다니는 표상, 내적 확신, 세계 및 인간상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애쓰고 따르고 또 스스로 묶어 놓은 사슬처럼 거기에 매달려 있다. 그렇다. 스스로 묶어 놓은 것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어떠해야 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세상에 잘 적응하고 어떻게 타인을 대하고 또 옷은 어떻게 입고 집은 어떻게 짓고 방은 어떻게 꾸며야 한다는 것에 관해 정해진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맑스의 말마따나 이념은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 없는 풀려나기 힘든 쇠사슬과도 같다.” “이러한 표상이 가슴과 긴밀히 이어져 있어 가슴이 찢어지지않고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게 사실이라면 결국 이들 표상은 감정과 결부되어 있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고통스럽고 화가 나고 슬프고 심지어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뇌 안의 고속도로는 사용한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넓고 더 튼튼해진다. 나이가 들수록 더 완고해지고 환경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인간은 늙어가면서 정신적으로 추해지고 무력해져야만하는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어릴 적 여기저기 헤집고 돌아다미녀서 느꼈던 기분들이 아직도 생각나는가? 믿기 힘들 정도로 만사에 활짝 열려 있었고 창조적 욕구에 불탔고 뭔가를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열광했고 눈앞에 지천으로 놓여 있던 발견거리와 창조의 재료들에 열광했다. 어린이들은 하루에도 20번에서 50번까지 이런 상태를 맛보는데 그때마다 뇌 안의 정서 충추가 활성화된다. 이런 열광의 상태는 어김없이 뇌 안에 거름뿌리개를 작동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뉴런 연결망의 성장과 재족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다.

 

놀란 표정으로 아이가 묻는다.
'
엄마 저 소리가 뭐야?' 
'
종이 울리는 소리란다'
 
'
아 그게 어디있는데?'

흥분한 아이가 묻는다. 난감해진 엄마는 이렇게 얼버무린다.
'
저 멀리서 들려오는 거란다.'
'
그럼 '멀리'를 보여줘 '멀리'가 어디 있는데?'
'............'
아이는 타협안을 내놓는다.
'
그럼 엄마 종 만들 수 있어?'” (조앤 에릭슨)

흔히 볼 수 있는 부모와 아이의 대화이다. 부모를 난처하게 만드는 아이들의 이런 질문 공세는 아이들이 세상에 어떻게 열광하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이 세상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세상은 경이이기 때문이다. 조앤 에릭슨(에릭 에릭슨의 아내)은 아인슈타인이 세기의 천재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감각의 경이를 기억하고 그 경이감을 잊지 않으면서 감각에 따라 구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지진아였다. 말문이 늦게 트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느렸다. 그러나 감각을 통한 관찰을 강조하는 페스탈로치 학교에 들어간 후 그의 재능이 꽃피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일곱살까지 어떤 단어를 가르쳐주면 그 단어를 반복해서 소리내어 읽고 다른 사람이 그 단어를 발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배웠다. 그러니 말을 늦게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기하학이나 대수학, 연산법도 종이 위에 기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체적인 물체나 형태, 비율로 접근했다. 천재란, 창조성이란 경이라는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라 조앤 에릭슨은 말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는 최초의 감각이 주었던 경이를 잊어버리고 '어 종소리'네 하고 무심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감각의 구체성을 잃어가면서 세상에 대한 열광을 잃어버리고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지면서 창조력을 잃는다. 

 

어린아이에게는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 하는 일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아면서 일상에 적응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법을 훌륭히 익혀 나갈수록 이 세상의 발견거리 창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들은 점점 중요성을 잃게 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주변 환경을ㅇ 의도대로 꾸며 가는 가운데 익숙하고 정해진 틀에 안주하게 되고 뇌가 녹슬 위험도 덩달아 커진다.” 녹스는 것은 뇌만이 아니라 삶 자체이다. “삶은 매력을 상실해버렸다.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해졌거나 똑같이 무의미해진 가운데 최적의 상태로 삶을 통제하게 되엇다. 어른들은 내면의 잠재력을 발휘하겠다는 의욕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따라서 사는 데 무엇이 중요한지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찾아 나섰던 우리가길을 잃었는가? 저자는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며 우리가 만든 사회를 말한다. “성과를 강조하는 현대 사회의 구성원들이 갈수록 절감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바로 다람쥐 쳇바퀴다. 흥미로운 점은 바퀴 속에 갇힌 사람만이 아니라 바퀼르 돌리던 장본인들도 어느덧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누가 자신을 이 길로 보냈는지 누구로부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엿는지 더 이상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최대한 완벽하게 기능하기를 원할 따름이다. Eoansdp 그는 최적으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도달한 것 즉 거기서 얻은 성과물을 삶의 진정한 가치이자 핵심으로 여기게 된다. 도달할 목표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줄곧 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목표가 없어지면 삶의 의미도 잃는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한다. 머릿속에 든 다람쥐 쳇바퀴를 보완하고 더욱 강화하는 것이 바로 분업 사회가 발전시킨 수많은 조직 및 관리 구조다. 조직으로 편성되고 관리 대상이 되는 경험을 자주 할수록 고유한 가능성을 찾고 고유한 삶을 창조해가는 존재로서 스스로를 체험할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더욱이 이런 일이 일찍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질수록 당사자는 그런 능력을 스스로 발달시키는 일에 훨씬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조직 및 관리 구조라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사회적 쳇바퀴 속에서 일생동안 갇혀 지내게 된다.” 우리 자신이 만든 쳇바퀴에서 우리는 일상 세계를 발견하고 만들어가며 느끼는 즐거움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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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 현대사회의 딜레마들에 불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 로이 지음, 허우성 옮김 / 불광출판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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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향한 진군은 우리 이웃, 사회, 나라와의 따스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어냈고 소외와 혼란이라는 불편한 암류를 완전히 제거했다. 전쟁의 매력은 이것이다. 전쟁은 그 파괴와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에서 갈망하는 것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목적, 의미, 삶의 이유를 준다. 전장에 있으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채우는 피상성과 권태가 뚜렷해진다. 전쟁은 우리를 고귀하게 해준다.”

 

9/11 사태 때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몰고 돌진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영적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난민촌에서 미래에 대한 별 희망도 없이 점점 쇠약해지는 것이나 TV 채널 서핑에 빠져 있거나 상점에서 쇼핑하는 것에 비해 얼마나 의기양양한 대안인가? 영적 투쟁은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는 영웅적 정체성을 부여한다. 위험하고 혼란스럽고 격렬한 바다(현대사회)에서 종교는 형안의 항구에 내린 닻이다. 깊고도 거의 초월적인 의식수준에서 그들(종교 테러리스트)은 자신들의 삶이 통제에서 벗어났음을 감지한다. 그리고는 그 혼란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느끼면서도 자신들 역시 그 혼란의 희생자라 생각한다. 그런 세계에서 종교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개인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종교적, 인종적, 국가적 공동체보다는 위험에 처한 자신의 개인적 자아에 주로 관심을 쏟는다.”

 

그들이 느끼는 무의미함은 성()의 차원이 세속화된 이 세계에서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저 폭력적인 종교운동에도 일리는 있다. 그들이 공유하고 있으며 우리 또한 그들과 공유하는 기본 문제는 다른 종교들이 제기하는 위협이 아니라 이데돌로기가 아닌 체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세속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인데도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세계인 것처럼 가장ㄴ다는 점이다.”

 

세속주의는 아주 독특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성과 속이란 대립개념은 성의 증발 때문에 태어났다. “성속의 구별은 우리의 결핍감을 달래기 위한 더욱 개인적인 길이었다. 루터는 신앙을 내면화하고 신의 거룩한 영역을 세속의 저 높은 곳에 투사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서로 연속한다는 중세의 세계관은 무너졌다. , 둘 사이에서 새롭게 해방된 공간은 새로운 것, 곧 세속적인 것을 창조햇다.” 왜 이것이 문제인가? “세속세계에는 뭔가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즉 세속세계에는 우리의 결핍감을 이해하고 해소할 효과적인 방법이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영적 문제이다.”

 

그 결핍감을 기독교에선 원죄란 말로 설명했고 여러 종교들이 그것을 설명하고 처리할 방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세속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더 이상 그런 처리는 가능하지 않다. “나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많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하고 때로는 죽음을 육체적으로 덜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잇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공허에 대한 해답은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세상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 줌심의 바닥없는 구멍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가 갈망하는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라는 방식은 우리의 삶의 잘못되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전쟁은 우리의 개인적인 결핍을 묶어서 그것을 외부의 적에게 투사하는 단순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근본적인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더 나은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저자는 방법을 불교가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런 결핍감, 뭔가 없다는 느낌, 내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우리의 잘못된 자아 감각이 갖는 어두운 면으로 본다.” 즉 고(dukka)이다.

 

고의 요점은 돈이 많고 건강한 사람들조차도 근원적인 불만, 곧 부단히 괴로운 불편(dis-ease)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고란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요가도 자이나교도 그외 수많은 (불교의 입장에서) 외도들 모두 고의 문제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고를 자아감각과 연결시킨 것이 불교의 진정한 업적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는 자아가 바로 고이다

 

연기란 말은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구성된다는 말이다. 자아감각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아에 대한 나의느낌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런 무상한 과정들은 다른 과정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로부터 분리된 자아감각을 발생시킨다. 만일 그 심리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을 모두 제거한다면 그것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가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의 중심에 나 있는 텅빈 구멍은 우리를 매우 괴롭힌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은 [우리 자신과] 일치시킬 것도 매달릴 것도 없다는 말이다. 즉 내가 라는 건 구성된 느낌으로서의 자아가 근거 없는 것이고 그 근거 없는 자아가 비실재성과 불안전성(insecurity)이라는 근본적인 느낌의 출몰로 괴로움을 겪는단 말이다. 자아감각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안정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無我란 말의 요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실재감을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느낌으로 경험한다.” 문제가 있다는 그 느낌, 그 불편함이 바로 고의 내용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우리는 그 불편함을 억압하려 한다. 결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불편함, 자신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느낌, 결핍감을 메우기 위해 뭔가에 매달리려 한다. 그 뭔가가 전쟁이 되고 돈이 되며 명성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란 결핍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돈은 우리가 그것으로 어떤 것이든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집단 속에서 우리가 실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명성 역시 비슷하다. 만일 내가 정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면 그만큼 나는 정말로 더 실재한다. 그러나아무리 돈이 많아도,  많은 사람들이 주목한다 해도 우리의 결핍감이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욕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 실재의 가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갈망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지배햇다. 르거나 그들은 실제로 안전하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을 통제하지는 못햇다. 권력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자는 가장 지독한 편집광이 되고 만다.”

 

내가 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우리는 不善하게 된다. 불교가 말하는 三毒, “탐욕, 악의, 망상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아주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 있는 동기들이다.” 그것을 불교에선 이라 말했다. “나의 자아감각이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있다면 업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 그 자체이다. 중요한 건 내 존재를 바꿈으로써 곧 내가 습관적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재구성함으로써 내 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업을 바꾸어야 하는가? “내가 만일 탐욕, 악의, 망상에 따라 움직인다면 다른 사람을 조종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런 행위는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킬 뿐 아니라 나 역시 그들로부터 더욱 분리된 존재라고 느끼게 한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나의 자아라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방어하고 띄우기에 바쁘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잘못된 자아 감각을 강화한다. 내가 (삼독의 반대인) 관대함과 자비로 움직일 때 나는 여유를 갖고 마음을 열며 덜 방어적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반응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모두를 위해 고를 줄이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불교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하다. “우리가 텅 비어 잇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 그것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 문제를 키운다.” 무아의 요점은 자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자아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기에 제거는 불가능하다.”

 

고는 일반적으로 고통으로 번역되지만 기본적인 불편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고란 무언가를 성가셔하는 깨닫지 못한 마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장 근본으로 불교에서 강조하는 바는 고와 자아 사이에 연관관계가 잇다는 통찰이다. 내가 살아가고 잇는 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잇다고 자아가 느끼는 것, 바로 여기에서 가장 깊은 좌절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런 분리감은 환상이며 실제로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망상이다.”

 

그러나 불교의 통찰은 새로운 질문으로 바꿀 필요가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지옥에 좌선만 하는 사람을 위한 특별 장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지옥으로 치닫는 바깥세상에 무관심한 채 자기자신에게만 빠져서 방석에 앉아 좌선을 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삼독 역시 집단적으로 작동하는가? 집단자아가 있다는 말은 집단적인 탐욕, 집단적인 악의, 집단적인 망상이 존재한다는 의미인가? 이런식으로 질문을 던지면 답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현재 경제제도는 탐욕을 제도화하고 군사주의는 악의를 제도화하며 기업화된 대중매체는 망상을 제도화한다. 이와 같은 제도화된 삼독의 본성을 깨닫는 일을 우리가 영적 수행의 결과로 얻은 개인적 깨달음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제로 방석 위에서 좌선하여 얻는 개인적 깨달음은 그러한 사회적 깨달음으로 보완될 때까지는 불완전하다. 보통 개인 차원에서 달성하는 확장된 의식을 수행의 목표로 떠올리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집단 망상을 걷어내어 사회, 경제, 생태에 관한 이분범에 감춰진 실체를 폭넓게 이애해야 한다. 개인의 고와 집단의 고가 같이 간다면 오늘의 거대한 사회, 경제, 생태적인 위기는 동시에 영적인 도전이며 그러하므로 그에 요구되는 대응에도 영적인 요소가 들어있다는 결론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불교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 저자는 본다.

 

내면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무임을 본다. 그것이 지혜이다.

바깥을 바라볼 때 나는 내가 모든 것임일 안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은 맴돈다.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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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력 - 위기에서 살아남아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서바이버 자질 매뉴얼
앨 시버트 지음, 이경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유명한 사진기자 앨리슨 라이트는 라오스의 밀림 속 도로에서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너덜너덜해진 팔에선 피가 철철 흐르고 몸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폐와 횡경막을 다쳐 숨을 쉴수도 없었다. 그 상태에서 상체의 힘으로 버스 밖으로 기어나와 누웠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은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고 떠들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수련한 요가와 명상을 떠올리며 고통을 견뎠다.

 

그녀가 치료를 비슷한 것을 받기까지는 14시간이 걸렸다. 그날 밤 헬기가 자신을 수송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접하자 이제 죽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앨리슨은 모든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고통에 항복하자 모든 아픔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졋다. 그녀는 갈 준비를 했다. 사선을 넘나드는 경험을 한 후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게다가 전에는 몰랐던 압도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사랑이엇다. 이러한 감각이 그녀의 결의를 더 확고하게 해주었다. 한동안 호흡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놀랍게도 태국으로 가는 긴 여정이 끝났을 때까지 그녀는 살아있었다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을 때 그녀는 등과 골반, 갈비뼈가 골절되었으며 내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튀어나왔고 비장이 파열되었고 횡경막에는 구멍이 났고 폐는 액체로 가득했다. 마취도중 숨이 멎어 외과의사가 겨우 살렸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을 통제했다. 그녀는 살아남았다. 생존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뇌는 고통을 차단했다. 그래서 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까지도 말이다. 이런 마음 자세로 상황에 맞춰 적응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생존 전략과 태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와 모든 것을 놓아버리겠다는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앗다.”

 

이런 사례를 들으면 보통 놀란다. 감탄한다. 그리고 평범하지 않은 슈퍼맨의 이야기라 치부하기 마련이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딴 세상의 이야기란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일을 겪고 이겨낸 사람들은 당신과 별다를 것없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 말한다. 단지 그들의 습관이 달랐을 뿐이다.

 

이것은 살아남아야 할 때 살아남을 수 있도록 삼라만상과 관계를 맺는 생활방식에서 비롯되낟./ 앨리슨은 일찍이 경험했던 다양한 일이 위기에 당당히 맞설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켰다고 술회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습관적인 방식이 위기나 비상사태에 직면해 서바이버가 될 가능성과 밀접한 관련이 잇다는 얘기다.”

 

저자는 그 습관을 3가지로 정리한다.

 

1.     상황에 대한 정보를 재빨리 흡수한다.

2.     뭔가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3.     가능한 행동이나 반응 등 뭐든 고려한 준비가 되어 있다.

 

저자가 말하는 서바이버의 습관은 요즘 흔히 말하는 회복탄력성과 유사하다. 저자가 말하는 3가지를 보통 하는 말로 하자면 호기심, 자신감, 유연성이라 할 수 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재빨리 반응하는 사람은 위기에 움추려들지 않는다. 익숙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평소에 호기심을 갖고 주변을 살피면서 정보를 분석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정보와 경험이 많고 그런 습관 덕분에 갑작스런 상황이라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에 맞춰 자신을 바꿀줄 아는 유연함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회복탄력성과 내용은 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한 자질을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말하는 서바이버 자질세렌디피티 자질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세렌디피티는 그냥 행운이 아니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도 아니다. 예리한 통찰력을 발휘해 사건을 행운으로 바꾸는 능력이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불운이 될지 행운이 될지 아니면 꽝이 될지는 그 사람이 그 사건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에 달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정부가 당신의 예금을 빼앗고 사업체를 몰수하고 당신과 가족을 집에서 강제로 내쫓고 트럭에 태워 멀리 데려간 후 이제부터 그곳에서 살라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이 이야기는 1941년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일어난 실화다.

 

나이토 가족은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 근교로 강제 이송되었다. 가장인 히데 나이토는 실의에 빠졌다. 그는 모범적인 시민이었다. 오랫동안 도자기를 수입하는 사업해왔다. 가족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미국 정부가 그들 가족이 가진 것을 전부 빼앗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16세였던 빌 나이토는 가족이 처한 상황을 직시했다. 그는 아주 작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빌은 형 샘과 닭을 키워 달걀을 팔기로 했다. 다행히 사업이 커져 온 가족이 달라붙었다. 4년동안 달걀을 팔아 생계를 꾸렸다. 닭통은 채소와 맞바꿨다. ‘닭이 갈수록 많아져 닭장을 큰 걸로 두 개나 지었습니다. 바닥은 콘크리트였어요! 바닥을 콘크리트로 깐 닭장을 생전 처음 본 이웃 농부들은 깜짝 놀랐죠!’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후 나이토 형제의 유산에는 다른 개발업자들은 건드리지도 못한 대형 재개발 프로젣트도 호함되었다. 열개가 넘는 사업체와 수많은 건물을 소유한 빌 나이토는 이렇게 말한다. ‘고생을 해야 꿈을 꿀 수 있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상상력을 자극했고 가능한 해답을 찾도록 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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