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 배부른 세계의 종말, 그리고 식량의 미래
빌프리트 봄머트 지음, 전은경 옮김 / 알마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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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녹색혁명은 1960년대 참담한 식량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녹색혁명의 핵심은 품종개량이었다. 밀과, 옥수수, 벼에서 수확량이 뚜렷하게 많은 품종이 개발되었다. 이 품종들은 관개와 질소비료에도 훨씬 잘 반응했다. 사람들은 이 농작물들이 앞으로 전 세계 경작지의 모습을 결정하고 특히 아시아에서 대량으로 발생하는 기아에 맞서 싸우리라 예상했다.

고성능 작물은 아시아 벼 경작지의 75%, 아프리카 밀 경작지의 절반, 남미 옥수수 경작지의 2/3 이상을 차지했다.

성과는 획기적이었다. 인도의 수확량은 두배가 늘었다. 새로운 벼는 옛 품종보다 빨리 자랐고 빨리 여물었다. 게다가 1년에 두 번이나 추수할 수 있었다. 인도는 1980년대에 600만톤의 밀을 수출햇다.

그러나 인도 농부들은 예전처럼 수확의 일부를 다음 해 종자로 쓸 수 없었다. 녹색혁명 식물들은 유감이지만 최고 수확량을 한 번밖에 올리지 못햇다. 다음번 수확을 위해선 종자를 사야 했다. 게다가 이 식물들은 혼자 잘 자라지 못했다. 그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지원과 부가물이 필요했다. 그중 하나는 마을에 설치된 관개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아도 새 품종에 제때 물을 댈 수 있는 강력한 펌프였다. 또 벼를 두번 수확하기 위해서는 인공비료도 필요했다. 토양에 저장된 영양소는 두번 수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성장하는 품종개량 작물의 얇은 세포벽을 쉽게 뚫고 들어가 성장을 저해하는 곰팡이와 박테리아, 곤충과 사우기 위해 화학적 지원도 필요했다.

예전과 완전히 다른 점도 있었다. 녹색혁명에 참가하려면 글을 읽을 줄 알아야 했다. 글을 읽어야 작물에 언제 물과 비료와 농약을 주는지 언제 수확하는지 언제 땅을 다시 갈아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종자와 기술, 화학적 첨가물들을 살 돈도 필요했다. 이는 수익자의 이윤을 현저하게 떨어트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녹색혁명은 농업의 산업화를 뜻했다. 문제는 산업형 농업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첫째 문제.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산업화된 농업 역시 석유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우리는 석유를 입고 석유를 먹는다. 석유화학으로 만든 섬유가 없다면 지금같이 섬유제품의 가치가 낮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석유가 아니라면 지금처럼 식량이 싸지지 않는다. 화학비료 때문이다. 화학비료는 원래 화약을 만들기 위해 개발된 질소고정법(구체적으로는 암모니아를 만드는 제조법)을 전후 비료생산에 응용하면서 만들어졋다. 문제는 암모니아를 얻기 쉬우면서 대량으로 조달할 수 잇는 재료가 화석연료라는 것이다. 그 재료로 보통 천연가스를 사용한다. 천연가스 2를 투입하면 화학비료 1이 얻어진다. 석유의 지속성이 산업형 농업의 지속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문제. 산업형 농업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은 석유자원만이 아니다. 산업형 농업은 토지도 대량으로 소비한다.

“우리는 얇은 토양 위에 산다. 우리가 식량을 얻는 토양은 겨우 15센티미터에서 20센티미터 두깨고 지구 전체에 차지하는 면적은 11%에 불과하다. 나머지 89%는 너무 건조하거나 너무 염분이 많거나 너무 얕거나 너무 축축하거나 얼어있다.”

토양이 만들어지는 시간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토양은 북구불가능한 자원이다. “자연이 1밀리미터의 흑을 다시 만들려면 100년 이상이 걸린다. 우리가 사는 토양층의 평균두께는 150밀리미터이다. 이를 보충하려면 적어도 1만5000년이 걸린다.” 그러나 자연이 저축해온 석유를 단기간에 소비하듯이 인간은 자연이 저축해둔 흙을 단기간에 소비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경작이 가능한 땅을 ‘금 비축량’에 비유한다.

“흙이 사라지는 속도는 숨 막힐 정도로 빠른데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빨라진다. 머지않아 토양은 부족해질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 경작지의 30%가 사라졌다.” 토양침식의 극단적인 예가 대공황 시절 더스트 볼이다.

“매년 1300억 톤의 비옥한 토양이 경작지에서 씻겨 나간다. 현대식 농업이 그 원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쟁기질이 문제다. 쟁기는 경작지 토양을 뒤집고 최소한의 덮개도 없이 토양을 그대로 드러낸다. 흙이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쟁기질은 토양 위아래로 골을 내는 작업인데 이는 비가 오면 곧장 물길로 변한다. 토양은 물길을 따라 계곡으로 흘러내려가 사라진다.”

문제는 쟁기질로 씻겨내려가는 흙만이 아니다. 산업형 농업은 남은 흙조차 경작이 불가능한 것으로 바꾸고 있다. 인공관개가 문제다.

산업형 농업은 대량의 물을 필요로 한다. 그 물을 대려면 인공관개를 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게 대는 물의 양이 많을수록 토양에 더 많은 염분이 남는다. 식물의 뿌리는 삼투압으로 흙의 양분을 흡수한다. 그런데 염도가 올라간 흙은 그 삼투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관개농업에 의한 염화로 무너졋다. “소금은 이제 전 세계 경작지의 1/3을 위협한다.”

세번째 문제. 염화를 부르는 인공관개 자체도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형 농업의 거대한 물수요를 대기 위해 하천, 호수의 물을 한계까지 이용해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지하수를 대량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지하수 역시 금 비축량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지하수는 다시 채워진다. 그러나 소비되는 양이 채워지는 양을 압도한다.

네번째 문제. 기후변화는 물부족을 악화시킨다. 유럽을 예로 들면 “지중해 기후는 이미 북쪽으로이동중이다. 남쪽에는 ‘사하라’가 다가온다.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에 놓인 지역은 21세기 후반 뜨거운 오븐처럼 달아오를 수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발칸 국가들, 그리스, 터키, 북아프리카 전체와 지중해 섬들의 눈앞에 폭서가 기다리고 잇다. 북쪽이 스텝으로 변하는 반면, 남쪽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잇다. 기후변화는 북쪽으로 ‘대이동’을 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올 여름 한국에 폭우가 쏟아진 것은 기후변화의 방향 그대로이다. 동북아 지역은 아열대성 기후에 가까워지면서 이번 여름 같이 강우량이 많아지지만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선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물부족이 심각해진다.

기후변화는 물부족만으로 농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더 심각한 것은 경작 자체가 불가능하게될 것이란 점이다. 현재 곡물로 재배되는 종들이 기후변화로 높아진 기온 때문에 재배가 불가능한 지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기온이 상승하면 식량 안전도는 하락한다. 기온이 3도까지 상승하면 북쪽은 약간 이득을 보는 반면, 남쪽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다. 몇몇 지역은 더위와 가뭄으로 더 이상 옥수수를 심을 수 없다. 아시아의 쌀 생산얄은 21세기에 급감할지도 모른다. 기온이 2도만 올라가도 벼농사는 큰 피해를 입어 두 자릿수의 감소를 보일 것이다. 밀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특히 동아시아의 남쪽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산업형 농업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 대안은 소농형 농업의 부활이다. 더 이상 낭비할 석유도 흙도 물도 기대할 수 없다. 지구의 한계에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위협까지 더해지면서 산업형 농업은 더 이상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 대안은 비용이 더 낮고 낭비가 적은 소농형으로의 복귀이다. 어떻게든 자본집약적 농업을 유지할 수 여유가 있는 1세계는 모르지만 그런 농업이 불가능한 3세계에선 다른 대안이 없다. 원래 농업에 기대 잘 꾸려나가던 제3세계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이 불가능하고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이유를 저자는 1세계의 산업형 농업에 전통적 소농형 농업이 무너졌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미래에도 산업형 농업이 경쟁력을 갖기는 힘들다. 산업형 농업의 경쟁력은 자원의 대량소비 때문이엇지만 앞으로 더는 그런 자원을 싸게 대량으로 소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먹여야 할 입의 대부분은 개도국에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 입을 산업형 농업으로 감당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그들이 스스로를 먹일 농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명확하게 말하면 해당 국가들의 자립농 강화를 의미한다. 소농의 자립을 지원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미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는 농촌식 농업만이 이농 현상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대도시의 슬럼화를 막을 수 잇다.” 물론 미래의 소농은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농약과 대량의 화학비료, 양수기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미래는 기술에 달려있다. 예를 들어 현재 1톤의 곡물이 자라는 곳에서 앞으로 4톤을 기”를 수 있는 종자 같은 것이다. 그런 “종자는 학계 연구소의 선반에 이미 갖추어져 잇다.” 산업형 농업과 맞지 않아 사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외에도 저자는 여러가지 예를 든다. 염화된 땅에서도 자랄 수 있는 밀이라든가건기에 잘 견디는 옥수수, 벼멸구에 저항력을 가진 벼, 콩처럼 질소를 고정해주어 질소비료가 필요없게 해주는 나무, 등등

그러나 농업연구는 식량과잉이었던 80년대 이후 정체되거나 예산이 삭감되어 왔다. 저자는 이런 추세를 뒤집어야 한다고 말한다. 산업형 농업의 극복 역시 기술에 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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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의 시대 - 종교의 탄생과 철학의 시작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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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인은 하늘과 땅의 간극을 보지 않고 오직 그 연속성만을 보았다. 그들은 ‘저 바깥’에서 원가 신성한 것을 찾는 일보다는 이 세계를 하늘의 원형과 일치시켜 더 신성하게 만드는데 관심이 있었다. 여기 땅에서 모든 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적이고 실용적인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햇다. 일식이 일어나면 왕과 봉신들은 지단 주위에 모여 각자 정확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려는 것이엇다. 이렇게 땅은 하늘의 동반자엿다.

왕이 왕으로서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면 지상에서 하늘을 위한 ‘길이 열린다.’ 그는 도덕 즉 ‘도의 힘’이라 부르는 마법적 능력을 부여받는데 이 힘으로 적을 진압하고 충성스런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권위를 강제한다. 왕이 일단 이 힘을 가지면 왕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발휘된다고 믿었다. 왕의 힘이 강하면 땅이 부서져 꽃이 피어난다. 왕의 힘이 쇠퇴하면 백성이 병들어 때 이르게 죽고 흉년이 들고 우물이 마른다. 자연과 사회는 서로 묶여 있다.

왕은 더할 수 없이 높은 권력을 가졌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평생 천상의 모범과 일치해야 햇다. 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의 역할은 자신의 힘으로 대외 또는 국내 정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길을 따르는 것이엇다. 왕이 제의적인 의무를 정확하게 이행하면 그의 힘(도덕)이 만물을 ‘차분하고 온순하게’ 만들었다. 이런 신성한 안정 상태를 큰 평화(태평)라 불렀다. 왕은 살아있는 원형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의 아들을 모방하여 자신의 생활이 하늘의 도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축제는 신성한 사회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신적인 것에 가까이 다가가 사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남과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역할이 있었다. 그들은 일상의 자아를 떠남으로써 더 크고 더 중요한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의는 극적으로 천궁의 복제품을 창조햇다.

중국인들은 정교하게 고안된 의식의 중요성을 이해햇다. 이런 복잡한 드라마를 공연하면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을 행해 나아간다고 느꼈다. 기원전 9세기에 이르면 제의에서 경험하는 변화의 힘이 신들을 다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햇다. 우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여 우리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다른 페르소나를 맡음으로써 우리는 순간적으로 다른 존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잃는다. 제의는 참여자에게 조화, 아름다움, 신성의 전망을 제시했으며 이 전망은 그들이 일상의 혼란으로 돌아가도 그대로 남았다.

제의의 확립은 주나라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히며 뒷세대들도 이 점을 인정했다. 축의 시대 이후에 완성된 텍스트인 ‘예기’는 상나라는 영혼을 앞에 두고 제의를 두번째에 놓았으나 주나라는 제의를 앞에 두고 영혼을 두번째에 놓았다고 말한다. 상나라는 제의를 통해 신들을 통제하고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주나라는 직관적으로 제의 자체가 신보다 큰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잇음을 깨달았다.”

공자가 述而不作이라 말할 때 그가 ‘술’하는 대상은 물론 서주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유교가 종교라 불리는지 이해하려면 고대중국인의 天觀, 원형에 대한 사고를 알아야 한다. “예란 하늘의 도(經)이며 땅의 의(義)이니 사람이 해야 할 것이다”란 춘추의 말은 공자에게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었고 유효한 것이엇다.

중국인들의 원형에 대한 사고는 고대인들에게 공통된 것이엇다. 중국인들이 신과 대화하기 뼈에 문자를 썼듯이 이집트에서도 문자는 신과 소통하기 위한 수단이엇다. 고대인들에게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하늘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런 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엘리아데는 이렇게 요약한다. 고대인들은 “외계의 사물이거나 인간의 행동이거나 간에 그 자체로선 어떤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하면 사물이나 행동은 어떤 가치를 본래 가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서 실재가 된다. 그런데 그럴 수 잇는 것은 사물이나 행동이 그들 자체를 초월하는 다른 실재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 중에서 어떤 돌이 거룩한 돌이 되었다고 하자. 그 돌이 거룩하게 된 것은 그 돌이 聖顯(hierophany)이 된다든가 마나를 소유한다든가 혹은 그 돌이 신화적 행위를 기념한다든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사물은 어떤 외부의 힘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용기이다. 그 외부의 힘은 그 사람을 독특한 것으로 해줄 뿐 아니라 그 사물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인간의 행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행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자연 그대로의 육체적 여건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원초적인 행위를 재현하고 신화적 범례를 반복할 때 이다. 음식을 먹는 것도 생리작용이 아니며 결혼과 질탕한 주연도 신화적 원형을 반향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반복되는 이유는 태초에 신들이나 조상들이나 영웅들에 의해 그런 것들이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M. 엘리아데)

고대인에게 실재란 하늘의 원형(celestial archetype)을 모방한 것일 뿐이었다. 하늘의 장소를 본떠 만들어질 때 도시나 사원이나 집은 실재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티그리스강 은 아누니트 별을 그 모델로 하고 유프라테스강은 스왈로우 별을 모렐로 한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장소라든가 주의 이름을 천상의 ‘들판’ 이름을 따라 지었다. 먼저 천상의 들판을 안 다음에 지상의 지리와 그것을 동일시 한 것이다.” (엘리아데)

하늘의 따라 만들어진 장소는 ‘세계의 중심’ 또는 우주의 배꼽(Omphalos)이며 그렇기에 거룩한 장소이다. 고대인들은 누구나 자신이 우주의 배꼽, 거룩한 곳에 살고 잇다고 생각햇다. 그들은 성스러운 장소에서 성스러운 행위를 모방하며 성스럽게 살았다.

저자는 아리아인들의 성스러운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이름부터 성스러웟다.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자부심의 표현으로서 ‘고귀하다’거나 ‘명예롭다’는 의미엿다. 그들은 기원전 4500년 경부터 카프카스 초원 지대에 살았다. 아리아인들은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멀리 여행할 수 없었다. 말이 아직 가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초원 지대에 한정되엇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고 양, 염소, 돼지를 치고 안정성과 지속성을 귀중히 여겼다. 이렇다할 적도 없엇고 새로운 땅을 정복할 야망도 없었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하고 평화로웠다. 다른 고대인들처럼 자신의 내부와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경험햇다. 폭풍, 바람, 나무, 강은 비인격적인 정신이 결여된 현상이 아니었다. 아리아인들에게 인간, 신, 동물, 식물, 자연의 힘은 모두 같은 신성한 영혼의 표현이었으며 이것을 마이뉴 또는 마냐라 불렀다. 이것이 그들에게 생기를 주고 그들을 유지해주고 그들을 모두 함께 묶어주었다. 신들도 인간처럼 우주를 지탱하는 이 힘에 신성한 질서에 복종해야 했다. 이 질서가 삶을 가능하게 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유지해주고 진실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느리고 무탈한 삶은 아리아인이 최신 기술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기원전 1500년 무렵 그들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인에게서 청동무기를 배웠으며 전차를 얻었고 야생마를 길들이는 법을 배웠다. 남쪽 왕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고 돌아온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엇다. 그들은 이제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새로운 기술을 이요해 이웃을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습격과 약탈이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재미도 있고 이익도 많았다. 그들은 죽이고 약탈하며 전통적인 아리아인을 공포에 떨게 햇다. 전통적인 아리아인은 당황하고 겁을 먹었다.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삶은 엉망으로 뒤집혔고” 더 이상 우주적 질서를 따르는 성스러운 것이 아니게 되었다.

길고 긴 영웅시대가 시작되었다. “힘이 정의였다. 족장들은 이익과 영광을 추구했다. 시인들은 침략, 무모한 배짱, 무용을 칭송했다. 이전의 아리아 종교는 호혜주의, 자기 희생, 동물을 사랑하는 태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가축 약탈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햇다. 이제 습격자들이 갈망하는 신의 모범은 신성한 전사 인드라였다.”

가축 도둑들은 전사가 되엇고 전사는 명예를 아는 귀족이 되었다. 귀족의 뿌리는 언제 어디서든 전쟁이었다. 귀족이 귀족일 수 있는 것은 귀족이 귀족의 자격을 갖는 것은 목숨의 대가였다. 가장 먼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자. 남보다 앞에 서서 죽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자만이 남에게 목숨을 요구할 자격을 가졌다. 남의 앞에 설 자격이 있는 자, 귀족은 전장에서 남의 앞에 서는 자들이 그 기원이었다. 중세 유럽의 기사도는 그런 전사의 에토스가 가장 세련되게 진화한 예일 것이다.

비겁하지 않겠는가?

약자를 보호할 것인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는가?

맹세는 죽음으로 지키겠는가?

넌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었으니 이제 기사다

중세의 기사서약이다. 그 의식이 치뤄졌을 고딕 성당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맹세이다. 중세 기사도를 규정했던 가치는 명예였고 그것은 신의 영광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 외양이 어떻든 그 본질은 전사의 에토스에 있었다.

항우는 길고 긴 중국의 역사에서 전사의 에토스를 가장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항우의 관심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영웅의 업적이었다. 더구나 그는 결과(황제라는 ‘저 자리’)보다 과정(저 자리에 ‘오르는’)을 더 중시했다. 그는 원하는 바를 얻은 후에 무엇을 어떻게 누리며 살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바라는 바를 얻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진정한 영웅은 승리를 위해서보다 전투 그 자체에 더 혼신을 다하는 법이다. 어느 영웅이 하릴없이 소일이나 하며 자기 생을 소모하고 싶겠는가. 할 일이 있으며 나서서 해내는 것이 영웅의 자세이다.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중요치 않으며 그 일을 하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감정의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이요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중톈) 감정의 인간은 머리로 세상을 보지 않고 가슴으로 세상을 느낀다. 감정의 인간에게 삶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미학적이다. 그들에게 삶은 추하거나 멋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 삶의 태도를 속된 말로는 폼생폼사라 하며 고상하게는 명예라 한다.

삶의 멋이란, 명예란 항우에게 무엇이었는가는 그의 최후에서 잘 드러난다. “항우는 줄곧 백전백승이었다가 마지막 전쟁에서 참패해 체면을 구기고 집에 돌아가지도 못햇다. 그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다 지금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니 강동의 부형들이 불쌍히 여겨 나를 왕으로 삼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만나겠는가!’라고 했는데 이는 ‘낯으로 그들을 보러 가겠는가’하는 것이다. 결국 항우는 자살했다. 비록 죽음의 길 밖에 없었지만 죽음의 길도 길이다. 항우가 자살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이라 칭송하며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는 또한 ‘면목이 없다’라는 성어를 남겼으니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이중톈)

항우에게 체면 또는 명예는 목숨보다 귀했다. 달리 말해 ‘폼’이 망가지는 것은 죽는 것보다 못했던 것이다. “그는 어째서 면목이 없다고 말했을까?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외에도 사람들의 연민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항우처럼 일생동안 강함을 추구해온 인간에게 연민이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연민을 받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에게는 승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전투 그 자체였다.” 그런 미학적 인간에게 구질구질하게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천자의 자리가 아니었고 그가 원한 것은 영웅호걸의 통쾌한 삶일 뿐이었”으니 다 진 싸움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장에서 물러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다만 멋진 피날레를 연출하고 싶어햇다.” 삶을 미학적으로 살았던 항우는 그 최후에도 폼(또는 명예)을 꺾지 않았다. 그러나 그 폼, 그 명예가 어떤 명예인가가 문제이다.

‘면목이 없다’ 외에도 항우는 많은 고사성어의 원전이 되었다. 금의환향도 그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온 배경이 문제이다.

항우는 진의 수도 함양을 점령한 후 힘없는 어린 황제를 죽이고 궁궐을 불태웠고 백성을 모조리 죽엿다. “역사서에는 이를 두고 성에 모기 새끼 한 마리 없었다고 전한다 분명 아녀자와 어린애도 죽였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자 부하가 간언했다. ‘함양은 제왕의 수도입니다. 함양을 수도로 정하고 천하를 호령하십시오’ 점입가경으로 항우는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는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줄 것인가’라 말했다. 입신출세해 비단옷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항우는 황궁에서 약탈한 금은보화와 수백명의 미녀들을 수레에 태워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갔다.” (이중톈)

항우는 명예를 중시했다. 그러나 그 명예는 약자를 위한 것도 천하를 위한 것도 아닌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만 세우면 되는 폼이었고 명예였다. 그런 명예이니 그가 모르는 사람이 얼마가 죽든 상관이 없었다. “항우는 일단 성을 점령하면 성에 있는 백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으며 투항한 병사까지 생매장했다. 커다란 구덩이를 판 다음 수십만명이나 되는 사람을 며칠 밤을 새워 생매장했다.” (이중톈)

항우의 명예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명예였다. 이기적이고 쾌락주의적이고 잔인한 그런 명예는 호머가 그린 그리스 영웅들의 것이기도 하다. 알렉산드로스 역시 그런 삶을 살았다. 스승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려도 그가 전쟁터까지 끼고 갔던 책은 일리아드였다. 그에게 호머의 영웅들은 삶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영웅들의 삶을 살았다. 명성을 쫓고 과시하기 좋아하는 호머의 영웅들은 책임감 있는 통치자라기 보다는 전사였다.

“호메로스는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더 강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같다. 만일 영웅의 명예로운 행위가 서사시에서 기억된다면 그는 죽음의 망각을 극복하고 소멸할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유일한 불명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명성은 생명보다 소중하며 시는 명성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경쟁하는 전사들을 보여준다. 이 영광의 탐구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나선다. 영웅은 며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런 자기중심적인 전사들은 통치자의 모델이 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먼저 살았던 공자도 그랫고 당시는 정치철학이 완숙된 시절이었다. 당시 완성된 정치철학에서 군주란 민심을 헤아리고 천명을 받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움직인 것은 그런 정치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야망과 허영에 따라 행동했다.

물론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소수의 병력으로 쓰러트릴 정도로 유능한 전술가였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권력을 다룰줄 아는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리고 그가 능력이 있었기에 그가 이룬 정복사업의 결과 위에서 그의 사후 헬레니즘이란 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으며 로마제국이 가능했고 로마제국 위에서 기독교가 일어나고 지금의 서구문명이 태어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그러나 인간 알렉산더에게 세상은 자신의 명성과 새로운 도전 또는 모험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 항우가 제국건설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전쟁 자체에 열광했던 것처럼, 그는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트린 후 통치를 어떻게 할 것이라는 비전이 전혀 없었다. 물론 뛰어난 정치적 감각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정복자체가 당기는 것이지 통치는 지겨울 뿐이었다. 그의 사후 그의 제국이 사분오열된 것은 당연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영원한 아이로 살았다. 게다가 술주정뱅이에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이었다. 그리고 독재적인 기질이 있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영웅시대는 항우와 알렉산더 같은 전사들이 세상이엇다. 그리고 그 영웅들의 신이 그들을 닮은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아리아인은 초원 지대에서 습격을 시작한 이후로 자신들의 일상 생활의 경쟁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방향으로 제의의 형식을 바꾸엇다. 그들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전차와 강력한 청동 검을 사랑했다. 그들은 목축민이엇으며 이웃의 가축을 훔쳐서 생계를 유지했다. 가축 도둑질은 목숨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오락이 아니었다. 또한 행위에 신의 힘을 불어넣는 제의가 결합된 성스러운 활동이었다. 인도의 아리아인들은 역동적인 종교를 우너했다. 그들의 영웅은 이동하는 전사이자 전차를 탄 투사였다. 아리아 전사들은 습격과 전투에서 데바와 아수라가 벌이는 천상의 전투를 재연했다. 그들은 싸움을 할 때 자신을 넘어서서 인드라와 하나가 된 것처럼 느꼈다. 이런 제의들은 그들의 전투에 영혼을 부여했으며 지상의 전투와 신성한 원형을 결합하여 전투를 성스러운 활동으로 만들었다.”

인도 아리아인의 종교에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사촌의 종교는 영광과 공포라는 영웅의 에토스를 재연했다. “전사의 삶 전체가 식량과 부를 둘러싸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위험한 경쟁 즉 아곤이었으며 이런 경쟁은 죽음으로만 끝날 수 있었다.”

영웅시대는 달리 암흑시대라고도 부른다. “중동에서는 철의 야금 및 가공 기술이 보급됨과 더불어 기원전 1200년부터 기원전 1000년 사이에 침입과 이민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히브리인, 도리아인, 그 밖의 많은 새로운 민족이 역사에 등장하여 야만적이면서 훨씬 평등주의적인 시대를 열었다. 성서 ‘판관기’의 저자는 폭력과 유혈로 가득 찬 그 이야기를 이렇게 요약한다. ‘그때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제멋대로 하던 시대였다.’” (윌리엄 맥닐)

일리아드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미케네 문명이 무너진 후 “그리스의 암흑시대 초기에는 정치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스무 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목축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연명해나갔다. 실제 그리스 인구가 그전의 번영했던 시절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경작지도 따라서 감소했으며 당연히 식량생산도 줄었다.

농업이 시들해지자 많은 그리스인들은 유목민처럼 살았다. 머물던 곳의 목초지가 과도하게 방복되면 그 다음에는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떠나야 했다. 운이 좋으면 곡식을 경작할 땅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런 반 정착민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동할 때를 대비하여 간단한 오두막을 짖고 최소한의 집기만을 갖추고 살았다.” (토머스 마틴) 물론 그들은 떠돌며 약탈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파라오 람세스 3세는 북쪽으로부터 이집트의 변방응ㄹ 침략해온 해상 침략자들의 가공할 만한 연합세력을 기원전 1182년에 패퇴시키고 이렇게 말햇다. ’갑자기 사람들이 움직였다. 그 어떤 땅도 그들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엇다. 그들은 땅끝까지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려 들었고 그들의 정신은 자신감과 믿음으로 흘러넘쳤다.’ 이집트의 기록은 이들 바닷사람들(sea people: 암흑시대의 약탈자를 가리키는 역사용어)이 여러 다른 인종으로 구성되었다고 전핝다. 그들은 아마도 미케네 그리스, 에게 해 제도, 아나톨리아. 키프로스, 근동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통일된 민족집단을 구성하지 않았다. 그들은 본거지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 때문에 본거지를 떠나온 독립된 집단이엇다. 그들 중 일부 세력은 과거의 강력한 지도자 밑에서 한때 용병을 하던 자들이엇다. 그러다 권력과 전리품을 노려 그 지도자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일부 세력은 외국 땅에서 노략질을 하려고 먼 곳에서 온 자들이엇다. 지중해 동부를 휩쓴 바닷사람들은 여러 번에 걸쳐 파괴행위를 자행했다. 공격과 퇴각의 연쇄반응이 반복적으로 확장되는 사이클로 진행됨으로써 더 많은 약탈 집단이 파괴행위에 가담하게 되엇다. 바다사람들 중 일부는 순전히 약탈을 목적으로 했고 일부는 새로운 거주지를 찾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런 침략자 집단이 자행하는 물질적 피해는 그들이 기존의 정착사회에 끼친 사회적 혼란으로 더욱 악화되엇다. 이런 침략과 이주는 지중해의 정치적 지도와 인구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런 요란한 소동의 이유와 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잇지만 그것이 근동문명과 그리스문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토머스 마틴)

암흑시대는 그리스와 중동 그리고 인도까지 지배했다. 암흑시대가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지쳣다. “’리그베다’의 후기 시들 가운데 몇 편은 전에 볼 수 없는 피로와 비관을 표현한다. ;곤궁과 헐벗음과 피로가 나를 아프게 죄어 온다. 내 마음은 새의 마음처럼 차닥거린다. 쥐가 직조공의 실을 쏠쏠 듯 근심이 나를 갉아먹는다.’ 이런 허약한 상태는 혼란스러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던 베다 시대 후기의 특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시대의 폭력과 무자비함에 당황햇다. 전통적인 가치들은 쓸모없게 되엇고 무너졌다. 익숙한 생활방식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 들어선 질서는 무시무시하고 낯설었다. 인도인들이 삶을 ‘두카’라고 느낀 것도 당연했다. 이 말은 보통 ‘괴로움’이라고 번역하지만 ‘불만족스럽다’, ‘결함이 잇다’, ‘뒤틀렸다’와 같은 말이 원뜻에 더 가깝다.” (저자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그리스의 비극은 암흑시대의 두카에서 태어난 예술이다. “비극은 고난을 무대에 올려놓았다. 비극은 관객에게 삶이 두카라는 것, 고통스럽고, 불만스럽고, 비틀린 것임을 잊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의 비극작가들은 폴리스보다 고통받는 개인을 앞세우고, 그 사람의 고통을 분석하고 관객이 그에게 공감하는 것을 도움으로써 축의 시대 영성의 핵심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 두카를 그들 자신의 카르마의 결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외부의 신성한 원천에서 나온 것으로 경험한다. 필멸인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들은 안티고네처럼 비극을 치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노력을 할만큼 한 뒤에는 당당하게 용기를 내어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의 비관주의, 숙명론은 그리스인들이 암흑시대에 얻은 트라우마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 트라우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햇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자였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테네의 현자 솔론에게 자신의 보물창고를 보여주었다. 그러면 그 현자가 ‘부의 장대함’에 놀라워하리라 생각햇다. 그리고 크로이소스는 솔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햇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크로이소스가 아니라 한창 나이에 전사한 아테네의 어느 가장인 텔루스라고 답했다. 그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도 역시 죽은 두 형제였다. 이 형제는 마치 한 쌍의 황소처럼 자신들을 마차에 매고 달려 어머니를 마을 축제에 모셔다 드리고 나서 쉬려고 곤히 잠든 사이에 세상을 떠났다.

크로이소스는 당연히 당혹했고 분노했다. ‘정말이지 어리석은 자’ 솔론을 멀리 쫓아버렸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솔론의 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건장한 형제가 휴식을 취하다 곤히 단잠에 빠진 뒤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게 된것, 그리고 인생의 한창때 아내와 자식들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 젊은 가장, 대체 어떤 면에서 이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볼 수 잇는가?

크로이소스가 갈망했던 손에 잡히지 않는 ‘그것’을 명명하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유(eu: 좋은)와 다이몬(daimon: 신, 영혼, 악마)의 합성어인 유다이모니아(eudaimonia)는 행운이란 뜻(좋은 신, 안내해주는 영혼을 옆에 가진다는 것은 행운이므로)을 내포하게 된다. 이 말은 신성의 개념도 띠는데 다이몬이 신들을 대신해서 보이지 않게 인간을 지켜보는 신들의 사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불행한 데스데모나는 신들도 인간처럼 변덕을 부린다는 것에 놀란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불행을 뜻하는 디스다이몬을 변형한 것이다. 다이몬은 악귀 또는 악령 즉 데몬의 어원이기도 하다. 그 모호하고 불길한 어떤 의미가 유다이몬에 녹아있다. 크로이소스가 물었을 때 솔론은 운이라는 것은 아무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한 것이다.

‘크로이소스, 신이 질투도 하고 인간을 괴롭히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잇는 당신이 내게 인간사에 대해 물었고. 인생을 보자면 원치 않지만 봐야 할 것도 많고 겪고 싶지 않은 고통도 많이 겪게 되는 것이외다.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봅시다. 윤년을 빼면 25,200일로 환산되니 대략 한 인간 앞에 놓이는 것은 26,250일이오. 이 수많은 날 중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소. 그러니 크로이소스, 인간이란 자신 앞에 닥치는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을 뿐이라오. 당신이 아주 대단한 부자이고 많은 사람을 거느린 왕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없는 분명한 것이오. 허나, 당신이 내게 물은 그것은 당신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라오.’

공포를 자아내는 천둥이나 일식, 월식, 공동체 전체를 휩쓸어버리는 주기적인 역병이나 기아, 어느 부락이든 어김없이 존재하는 끔찍하게 뒤틀린 외양을 가진 남녀들, 기껏 5년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이들, 존재의 취약함을 부단히 상기시키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들. 이런 세상에서 삶이란 뭔가 추구해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견디어 내는 것이엇다. 성공적으로 잘 견디어낸 자만이 운좋고 축복받은 행복한 사람들로 간주될 수 있었다.” 솔론이 말한 텔루스는 “역병이나 약탈군에 파괴되지 않은 도시에 살면서 출산 중에 자손을 하나도 잃지 않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기도 했다ㅓ. 건강과 유복함을 누렸으며 죽어서도 “아테네 시민들은 그가 숨을 거둔 장소에 공식 장례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안겨주는” 명예로운 삶을 살았다.

솔론이 말하는 것은 “진정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 마지막 바로 죽음이다. 인간의 행운, 축복이 이제는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것이 됐음을 마지막에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좌우되는 것이므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볼 수 없다. 솔론이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크로이소스는 ‘악마의 엄청난 방문’에 맞닥드리며 비로소 솔론이 남긴 말을 깨닫는다. 아들이 이상한 죽음을 맞고 자신은 신탁을 잘못 이해해 전쟁의 재앙에 휩쓸리며 그의 왕국은 페르시아군에게 파괴당한다. 포로가 되어 장작더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살아 잇는 자는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도다’라고 외치며 솔론의 이름을 세번 부른다.” (대린 맥마흔)

축의 시대는 두카에 대한 것이며 두카의 극복에 대한 것이었다. “축의 시대의 영적 혁명은 혼란, 이주, 정복을 배경으로 이루어졋다. 어떤 사회에 전쟁과 테러가 만연한다면 이것은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준다. 증오와 공포는 그들의 꿈, 관계, 욕망, 야망에 스며든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이런 일이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이것을 극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자아의 더 깊고 덜 의식적인 수준에 뿌리를 둔 교육을 만들어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쳤음에도 깊은 수준에서는 서로 비슷한 해결책을 제시햇다는 사실은 그들이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에서 어떤 중요한 것을 실제로 발견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의 프로그램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폭력의 원인인 자기 중심주의를 없애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그 첫 프로그램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의 축의 시대는 전례개혁과 함께 시작된다. “희생제는 인도 아리안 사회의 영적 핵심이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지금도 농촌에 가면 고시레를 볼 수 잇는데 음식을 먹기 전 첫 숟가락의 음식을 조금 떠서 신에게 바치는 제의(祭儀)의 유물이다. 고시레와 마찬가지로 ‘아리아인은 신들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느라 소비한 에너지를 채워주려고 희생물을 바쳤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살기 위해선 다른 생물의 죽음 즉 희생이 필요하듯이 신도 살기 위해 그런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희생제는 중국인들의 제의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연결되었다는 원형론을 전제로 한다. 아리아인들이 초원지대에 살때는 그들의 평화로운 삶처럼 희생제 역시 평화로웠지만 아리아인들이 가축도둑으로 거듭나면서 희생제 역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9세기 무렵이 되면 아리아인은 점차 약탈보다 농업 생산물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정착인이 되면서 약탈의 악순환을 중단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통적 제의는 이런 파괴적 패턴을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다. 사제들은 희생 전례를 체계적으로 평가하여 폭력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는 관행은 제외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희생제의 핵심인 희생 즉 죽음은 내면화되었다.

“후기 베다 시대로 오면서 아리아인은 브라만, 즉 최고의 실재라는 개념을 발전시켯다. 브라만은 데바가 아니라 신들보다 더 높고, 더 깊고, 더 기본적인 힘, 우주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모든 요소득을 한데 묶어 그것들이 파편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힘이었다. 브라만은 정의되거나 묘사될 수 없엇다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브라만 밖으로 나와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제의에서는 경험할 수 있었다.”

희생제의 의미는 브라만을 느끼고 필멸자인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극복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그러나 그 자격을 얻으려면 “전리품을 들고 습격에서 안전하게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제의 개혁가들은 죽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하는 대신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였다.” 희생 제물과 제물의 제공자가 하나가 되어 “세로운 제의에서 상징적으로 죽어 신들에게 바쳐졌으며” 희생제물처럼 “불멸을 경험했다. ‘그 자신이 희생물이 됨으로써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후원자는 이제 영웅시대의 약탈자들이 만신전의 주인으로 모셨던 “인드라처럼 죽여서 불멸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제의화된 죽음을 겪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의식이 진해오디는 동안만이라도 시간을 초월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나는 하늘을, 신들을 얻엇다. 나는 불멸이 되었다.’”

여기서 개혁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필멸자가 불멸자가 된다는 것은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자신을 바치는 것으로 브라만과 하나가 되어 “그의 자아(아트만)을 재구성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의의 의미는 다음 세상에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생전에 ‘신성한 자아’를 알기 위한 것으로 바뀐다.

“전례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내면 세계의 발견”이 되었다. 사제들은 “희생제를 드리는 사람의 정신적 상태를 강조하여 그의 관심을 내부로 이끌었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신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적 이익을 얻는 것이엇다. 자의식적 반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제의 개혁자들은 선구자였다. 아트만이란 말은 점차 한 인간을 독특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본질적이고 영원한 핵심을 가리키게 되었다.”

내적 자아의 발견은 제의를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외적인 제의만큼이나 효과가 있다. 제의 지식을 아는 자는 제의에 참가하지 않고도 하늘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다. 고행자도 혼자서 적어도 자신의 신성한 아트만은 창조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순간부터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신과 동급이 되었으며 신들을 섬길 필요가 없었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열렷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적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나 인도에는 이 득의양한 자기만족이 (영웅들의) 괴물 같은 자기중심주의로 변하지 않도록 해줄 강력한 윤리적 의무가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축의 시대의 촉매는 폭력과 그 결과인 무질서엿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질서를 무너트리는 폭력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질서를 회복하려면 작은 나를 버리고(초월해) 더 큰 나를 깨달아야 된다는 케노시스가 축의 시대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사에겐 케노시스(또는 초월)란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스를 경험할 때뿐이다. 전사는 전쟁의 신 아레스에게 사로잡히면 생명의 엄청난 풀요를 경험하며 신과 같은 상태에 이르고 아르스테이아 속에서 자신을 잃고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도륙한다. 따라서 전쟁은 사람에 의미를 줄 수 잇는 유일한 활동이다.”

전사들의 라그나로크를 끝내려면 케노시스가 필요햇고 축의 시대는 케노시스의 방법론에 관한 것이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도에서 그 방법론은 자아의 발견이엇다면 중국에선 윤리의 탐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기원전 8세기, 중국의 천자는 더 이상 도덕(도의 힘)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종교도 다시 생각해야 햇다. 왕은 과거의 전례에서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제 무력한 꼭두각시가 되고 말았는데 어떻게 그의 힘을 계속 숭배할 수 있을까?” 왕의 힘은 정치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적인 문제엿다. 우주의 질서를 떠받치는 힘을 잃었을 때 질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중국에서도 그 해답은 제의전문가들이 내놓았다. “제의 전문가(儒)들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귀족 생활의 원리를 정리햇다. 군자는 봉신들의 모임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할지 어떻게 서서 사람들과 어떻게 인사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아야 햇다. 언제 이야기를 할지 언제 입을 다물어야 할지도 알아야 했다. 그때그때 정확한 옷을 입고 적절한 몸짓을 하고 적당한 얼굴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 모든 것에는 종교적 가치가 있었다. 주나 초기에 왕실의 제의는 자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되었었다. 이제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는 대평원 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를 정교한 제의 수행과 다름없게 바꾸어놓았다.

제의 개혁은 폭넓은 의미를 지니는 원칙에 기초를 두었다. 예는 전례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을 변화시킬 뿐 아니라 이런 의식에서 관심을 쏟는 자의 신성함도 높여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주술적인 개념이지만 깊은 심리적 통찰에 기초를 둔 것이엇다. 일관되게 최고의 존경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이 사람은 자신이 숭배를 받을 자격이 잇다고 느끼게 된다. 전례는 군자의 지위와 위엄을 고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조정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몰아낼 수도 있었다. 봉건제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지켜야 유지되었다. 봉신이 너무 힘이 강해지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국가의 평형을 흔들 수도 잇었다. 예는 폭력과 교만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전례는 제방이 홍수를 방지하듯이 무질서를 방지한다.’”

“제의화된 새로운 절제는 점차 중원의 제후국들에 뿌리를 내렸다. 비록 긴장된 시대엿지만 이러한 절제는 예로 표현되는 중국의 이상에 여전히 충성하는 이 오래된 읍성들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엇다. 제후국들 사이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폭력을 일정한 테두리 안에 가두어둘 수 있었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제후국의 삶은 예로서 세밀하게 규제되어 사회, 정치, 군대 생활이 주나라 조정의 정교한 제의적 의식을 닮아가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제의 개혁의 “목적은 절제와 자제로 우아한 삶을 사는 군자들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엇다.”

그러나 예는 시대를 이길 수 없었다. 예의 내용은 조화이다. 조화는 서로를 존중하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전례를 따르는 것이 사실 케노시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귀족의 제의화된 생활 양식은 귀족들에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며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쳤지만 보통의 경우 예의 특징은 자기 이익이엇다. 모든 것이 위신의 문제였다. 귀족은 특권과 명예를 선망했으며 예를 이용하여 자신의 지위를 높엿다.” 결굴 예는 형식만 남고 그 내용은 그 시대의 정신인 자기이익을 담게 되었다. 유가식으로 말하자면 質이 文을 압도했고 무질서는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형식마저도 초나라와 같은 변방의 無禮한 나라들이 무대에 오르면서 무너져 내린다. 초나라 뿐 아니라 “다른 큰 나라들도 전통의 속박을 벗어던지기 시작했다.” 이제 절제와 양보의 미덕으로 구속했던 전쟁은 달라졌다. “적을 완전히 없애는 한이 있어도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확장하려 했다. 전쟁은 과거의 위엄있는 출정과는 사뭇 달라졌다. 제의에 대한 결멸이 확산되었다. 절제의 기풍도 희미해졋다.

이것은 단순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가 아니엇다. 하늘과 땅은 상호의존적이기에 천도를 이렇게 경멸하다가는 우주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겠다고 걱정했다. 노나라의 제의 전문가들은 새로운 탐욕, 폭력, 물질주의를 신성한 제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 보앗다.

공자는 “제의의 깊은 의미를 이해했으며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면 중국 사람들을 천도로 돌이킬 수 잇다고 확신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공자의 그 확신과 함께 시작되엇다.

“이제 예는 귀족의 탐욕과 허세를 제어하지 못했다. 하늘은 무관심해 보엿다. 공자는 축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시대로부터 깊은 소외감을 느겼다. 그는 오랫동안 제후국의 행동을 관장했던 전통적인 제의를 무시한 것이 당대 중국에 만연한 무질서의 뿌리 깊은 원인이라 확신햇다. 제후들은 도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치를 쫓고 자신의 이기적인 야심을 채우느라 바밨다. 낡은 세계는 무너져 가는데 과거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공자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법은 과거에 잘 운용되었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엇다.”

그러나 공자가 해석한 전통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엇다. “과거의 종교는 하늘에 초점을 맞추엇다. 사람들은 그저 신과 영혼의 은혜를 얻으려고 의생제를 거행햇다 그러나 공자는 이 세상에 집중했다. 사실 그는 하늘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 쪽을 더 좋아햇다. 공자는 중국의 종교를 땅으로 끌어내렸다. 사라믈은 내세에 관심을 두는 대신 여기 아래에서 선해져야 했다. 그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도였다. 군자의 과제는 그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어떤 장소나 사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선의 상태에 이르렀다. 제의는 그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안내해줄 지도엿다.

공자는 인도의 현자들처럼 ‘에고 원리’를 인간이 편협함과 잔혹의 원천으로 보앗다. 사람들이 삶의 매순간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 이타적 요구에 복종한다면 덕의 아름다움에 의해 변할 것읻. 그들은 군자. 즉 우월한 인간이라는 ‘원형’을 따를 것이다. 전례는 일상적인 행동을 다른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공자는 덕이 이타주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을 처음으로 분명히 밝힌 사람이다. 공자는 (예의 근본정신인) 황금율을 처음 공포했다. 공자에게 그것은 초월적 가치엿다. 예를 완벽하게 습득하면 그가 仁이라 부른 것을 얻는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공자 이전 제의 개혁자들이 예의 형식만 구할 수 잇었고 내용은 시대의 힘 앞에 무너졌다면 공자는 시대에 맞는 내용을 제시했다. “공자는 인이 도의 힘(도덕)이며 성군들은 이것 때문에 무력 없이 통치할 수 있었다고 믿엇다 인은 마법적 효력이 아니라 정신적 효력으로 간주해야 하며 폭력이나 전쟁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잇다.

공자는 건종적 관습과 전례의 세목에 매달리는 소심한 보수주의자가 아니엇다. 그의 전망은 혁명적이엇다. 그는 관례적인 예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했다. 이것은 귀족의 존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잊는 실천을 습관으로 만들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공자는 제의에서 자기중심주의를 밀어내 제의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심오한 잠재력을 끄집어냈다. 공자는 굴종적인 순응을 장려하지 않았다. 각 상황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에 예는 상상력과 지성을 요구했다. 공자는 또 새로운 평등주의를 도입했다. 전에는 오직 귀족만 예를 따랐다. 이제 공자는 누구라도 전례를 실행하면 안회처럼 미천한 사람도 군자가 될 수 잇다고 주장햇다. 공자는 법과 질서 이상의 것을 목표로 삼앗다. 그는 인간의 존엄함, 고귀함, 신성함을 원했으며 이것은 인이란 덕을 얻으려고 매일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앗다. 실로 대담한 계획이엇다.

인은 얻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인은 엄격하지만 환희에 찬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초월이다. 동정적이고 공감하는 삶을 살면 우리 자신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안회는 예와 인이라는 지속적인 규율 덕분에 성스러운 실재를 잠깐 보았다. 이 실제는 내재하는 동시에 초월하는 것이며 안에서 어렴풋하게 나타나는 동시에 함께 벗할 수 잇는 존재이며 ‘내 위에 우뚝 서 잇는’ 것이다.

공자는 삼가는 태도로 자신이 실패자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영성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인도의 축의 시대의 다음 단계를 규정한 사람은 브라민 사제가 아니라 출가자엿다. 누가 진정한 브라민인가? 외적인 제의를 거행하는 사제인가, 아니면 어디를 가나 신성한 불(아트만)을 운반하는 출가자인가? 출가자는 축의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종교의 내면화를 처음 성취한 사람들이다. 제의전문가들은 희생제가 신성하고 영원한 자아를 창조한다고 주장했다. 희생제가 곧 아트만이엇다. 제의에는 브라만의 힘이 들어있다. 출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갔다. 출가자는 아트만을 발판으로 우주를 통합하는 힘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트만은 브라만과 동일하다. 현자가 자기 존재의 내적 핵심을 발견할 수 잇다면 자동적으로 궁극적 실재로 들어가 필멸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아트만은 이제 누구에게나 있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아트만은 이제 단순히 인간 존재에 생명을 주는 숨이 아니라 들이마시고 내쉬는 그 자체이기도 햇다. 깨달은 사람은 자기 내부에서 세상을 초월하여 위로 올라갈 수단을 발견한다. 그들은 단지 주술적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의 신비를 아는 과정에서 초월을 경험한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아트만은 희생제를 통해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행위와 경험의 규정을 받는” 것이 된다.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행동하는 방식과 처신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동이 좋으면 좋게 변할 것이다. 행동이 나쁘면 나쁘게 변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사람, 욕망이 없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욕망이 이미 충족되어 잇고 유일한 욕망이 자신의 자아인 사람은 그 핵심적 기능들이 떠나지 않는다. 그가 브라만이며 그는 브라만에게 간다.” 다시 말해 두번 다시 두카의 삶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자신이 온 우주를 포함한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현재의 이 제한된 존재에 매달려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행동(카르마)’의 교의를 듣게 된다. 이제 카르마(業)는 인도 영성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신들은 배경으로 물러나 희미해졋다. 초기의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의 인격화된 펴현인 프라자파티는 이제 평범한 구루가 되어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는 프라자파티를 지고의 실체로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들 자신의 아트만을 구해야 했다. 데바와 아수라도 이 중요한 진리를 배워야 했으며 그래서 인간과 마찬가지로 내부로 향하는 훈련을 열심히 했다.” 여기에서 다시 인도의 축의 시대는 한 단계 도약한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와 오나전히 다르고 베다 경전에도 거의 눈길을 돌리지 않는 새로운 철학이 나타났다. 이 철학은 상키아(분별)라 부른다. 인도에서 진실은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치유적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된다. 삶의 고통과 좌절을 넘어서려면 에고가 진짜 자아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강렬한 인식 행위를 통해 이 구원의 지식에 이르면 우리는 모크샤(해방)를 달성하게 된다. 상키아의 관점에서 희생제는 소용이 없다. 신들 또한 자연에 갇혀 있으니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쓸모없다. 제의하는 수단으로 하늘에서 살아남을 아트만을 구축하는 것도 역효과다. 에고-자아는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의 가장 진정한 실재에 눈을 뜨는 특별한 앎만이 영원한 해방을 가져온다. 상키아는 사실 (원형론이란) 영속철학의 전통적이고 전형적인 관점이 발전한 것이다. 사람들으 늘 천상의 모범에 몰입하기를 갈망해왔으나 상키아는 그것이 외적 실재가 아니라 내부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신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참된 자아에 눈을 떠야 절대적인 것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원형은 머나먼 신화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 있다.”

상키아는 두가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하나는 삶은 두카라는 인식이다. 두번째는 요가이다. “요가는 에어로빅 운동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긴장을 풀거나 과도한 불안을 누르거나 자기 삶에 편안함을 느끼도록 돕지도 않았다. 오히려 반대다. 요가는 에고에 대한 체계적인 공격이엇다. 오랜 시간에 걸쳐 수행자에게 정상적인 의식과 더불어 그 의식의 잘못과 미망까지 없애버리는 가혹한 수련법이엇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면 요가는 인도의 영적 풍경 안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요가는 인간이 되는 다른 방식에 입문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근본적인 정신적 변화를 의미했다.” 자기 안의 원형을 찾는 방법론인 요가는 “원형적 모범의 모방이라는 전통을 축의 시대 방식으로 새롭게 변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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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제로 - 하나된 세계를 향한 인간 운명의 논리
로버트 라이트 지음, 임지원 옮김 / 말글빛냄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이책의 주장은 ‘진화에는 방향이 있다’ 단 한줄로 정리할 수 잇다. 생물이든 사회이든 문화이든 진화는 모두 방향성이 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진화에 방향이 있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많은 상관이 잇다.

원시, 야만, 미개.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쓰면서도 그 의미 그대로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옳바르지 못한 것이(politically incorrect) 되었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어떤 사회는 높고 어떤 사회는 낮다고 서열을 매기는 것은 점점 불쾌하고 불미스럽게 여겨지게 되었다.” 서열을 매긴다는 것은 기준이 잇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기준이 옳은 것인가? “인간의 문화가 특정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옳을 수 있는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문화상대론의 입장이다.

문화상대론이 대세가 된 것은 19세기 유럽인들이 진화란 말을 오용해 자신들의 우월감을 정당화하고 자신들의 부당한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부당한 오용은 나치의 인종청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600만 유대인의 시체 앞에서 문화상대론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되었고 20세기 중반이 되면 문화의 진화라는 개념은 “거의 멸종 지경에 이른 생물의 신세가 되엇다.” 그러나 문화 또는 사회가 진화 또는 진보한다고 말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도 옳지 않은 것인가? 저자는 묻는다.

“마크 트웨인은 북미 서부에 살던 쇼숀 인디언을 가리켜 ‘지금 이 순간까지 내가 목격한 인종 가운데 가장 형편없는 인종’이라고 말햇다. 그들은 ‘촌락도 없고 엄밀한 의미에서 부족사회라고 할 만한 조직마저도 구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의 “형편없는 인종”이란 말은 정확한 말이엇다.

“미국 인디언 문화를 다룬 어떤 책은 쇼숀 인디언을 다룬 부분의 소제목을 ‘더 이상 축소할 수 없는 최소한의 사회’라 달았다. 쇼숀 인디언들에게 사회조직의 안정적인 최대 단위는 가족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남성 가장은 ‘유일한 정치 조직이며 사법체계 전체’였다. 쇼숀 인디언들은 가족 단위로 수개월씩 가방 하나 짊어지고 땅 파는 막대 하나 손에 들고 나무뿌리나 씨앗을 찾아 사막을 헤매고 다녓다.”

쇼숀 인디언과 우리 사회는 어떻게 다른가? 저자의 질문이다. 저자의 답은 이책의 제목에 나와있다. “역사가 진보함에 따라 인간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넌제로섬 게임을 하게 된다. 상호의존은 점점 확대되고 사회의 복잡성 역시 더 큰 폭으로 더 깊이 증대되어 간다.” 저자가 이책에서 하려는 말의 전부이다.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변하며 그 복잡성은 더 많은 사람과 협력(넌제로섬 게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하는 결과이다. 저자가 말하는 진화의 방향이란 복잡성의 증가를 의미한다. 역사를 볼 때 이는 법칙처럼 나타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복잡성의 증가가 법칙처럼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의 유전자에 뿌리를 두고 잇다.

“자연선택은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양한 종류의 충동을 심어놓았다. 관대함과 감사, 받은 만큼 돌려주려는 의무감, 보답하는 사람(친구)에 대한 신뢰와 공감. 그 충동은 언뜻 보기에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감상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상 상호이익을 도모하고려는 냉정하고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설계되엇다.” 따뜻한 충동의 이유는 차가운 이기심이기 때문이다. 주면 돌려받지 못한다면 즉 호혜적이지(또는 공정하지) 못하다면 따뜻함은 차가움으로 돌변한다.

“이러한 사실은 일부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실망스러운 것일 수도 잇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복잡한 사회구조를 짖한다면 이러한 특질은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 보답에 대한 인간 본성의 레이저처럼 정확한 초점은 문화 진화의 원동력이다. 본능적으로 깨우쳐진 이기심은 현대사회의 씨앗이라 할 수 잇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와 수렵채집 경제 간의 차이는 게임에 참여하는 손의 수, 그리고 그 손들의 상호의존성의 복잡하게 얽혀진 정도에 있다.”

물론 인간은 협력만 하지 않는다. 협력자도 얼마든지 경쟁자로 돌변한다. 협력은 공동체를 만든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인 인간의 공동체에는 누구에게나 돌아갈 수 없는 희소한 자원이 있다. ‘사회적 지위’이다. 사회적 지위는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는 방법 중 하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널리 채택되고 칭송받을 만한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성은 넌제로섬 게임이 아닌 제로섬 게임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천재라 불리던 사람들이 가장 창조적이엇을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보라. 모두 결혼적령기인 20대 내지는 30대였다. 예술적, 지적 창조성이 꽃피는 이유는 성적 매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저자는 사회적 지위를 위한 경쟁 역시 마찬가지라 말한다.

모순적이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은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위에 대한 경쟁에서 성공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새로운 넌제로섬 게임을 창조하는 기술을 발명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의 진화, 사회의 복잡성 증가의 이면에 인간 본성의 역설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넌제로섬 게임과 제로섬 게임을 모두 벌인다. 이 두 힘 사이의 긴장은 많은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엄청난 창조력을 낳았다.”

저자는 이런 모순을 칸트의 말을 빌려 ‘비사회적 사회성(unsocial sociability)’라 말한다. “명예, 권력, 부에 대한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동료들 사이에서 지위를 추구하도록 몰아댄다. 그 동료들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존재이지만 또한 그들을 떠나는 것 역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러한 지위에 대한 추구를 통해서 미개 상태에서 문화에 이르는 첫걸음을 내딛으며 이는 인간의 사회적 가치에 내재되어 있다.” 칸트의 말이다.

“문화의 진화를 일으키는 추진력에는 바로 권력의 추구, 남들 앞에 뽑내고 으쓱대는 즐거움, 생존을 위한 핵심적인 도구에서부터 별로 쓸데없는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물질적 대상에 대한 갈망 등도 포함된다.” 전통적 이론은 사회구조가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고도화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과 협력이 가능해진다는 말이고 그러기 위해선 많은 사람이 모여도 될만큼 ‘잉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잉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960년 인류학자인 로버트 카네이로는 아마존 정글에 사는 쿠이쿠루족에 대한 영향력 있는 논문을 발표햇다. 그들은 아마존 정글에 살면서 주식이자 타피오카 전분의 원료인 마니오크를 재배했다. 이들은 마음만 먹으면 생산량을 두배나 세배쯤 증가시킬 수잇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여가 시간을 선택햇다. 그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대성당을 설계한다든지 그밖의 일반적으로 그들이 사는 사는 터를 개선하는데 쓰는 법이 거의 없엇다.”

잉여를 만들 수 잇는 환경이 주어진다해도 잉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면 잉여는 어디서 온것인가? 저자는 인구밀도라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려면 두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값싼 운송수단과 값싼 통신수단이다. 정보와 유통비용이 작을수록 보이지 않는 손은 매끄럽고 활발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비용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넌제로섬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얻는 파이는 더 커진다. 또한 사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될수록 인구대비 교환망의 생산성은 더 높아진다. “ 비용을 낮추는 방법은 간단하다. “고객과 공급자를 모두 곁에 두도록 가깝게 밀집해” 사는 것이다. “천하태평하게 보였던 마니오크 재배자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더 나은 삶을 향한 야심이 아니라 인구밀도엿을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 국한된 것과 다른 수공예품이나 자연자원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다면 마니오크 농부들은 그와 같은 물건과 바꾸기 위해 마니오크 생산량을 늘렸을 rrejt이. 나중에 유럽인들이 멋지고 신기한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와 거래를 시도하자 그들의 마니오크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햇다”

“인구규모가 더 크고 밀도가 더 높을수록 더욱 진보한 기술과 더욱 복잡한 사회구조를 갖게 되리라고 즉 인구규모 및 밀도와 기술 및 사회의 복잡성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숭 있다.” 전통적으로 가정했던 것처럼 잉여가 먼저 있고 그 잉여를 교환하는 시장이 있고 잉여가 부양하는 사회가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시장이 먼저 있고 사회가 먼저 있은 후 잉여가 만들어졋다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잉여를 사람들이 어떻게 거래했는가이다. 시장에서 거래된, 사람들이 원한 물건” 중 상당수는 단순히 생존을 위한 기술의 산물이 아니다. 심지어 5만년도 더 전인 중기 구석기 시대에도 사람들은 물감의 원료인 쓰인황토나 황철광 결정 등에 흥미를 보였다. 그리고 중석기 시대에는 보석과 같은 ‘사치품’ 총생산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햇다. 이와 같은 지위 상징물을 얻는데 엄청난 노력이 투입되었다. 이러한 물건들은 수백 킬로미터의 거리를 넘어 거래되었다.” 시장이 만들어지고 복잡한 사회가 만들어지게 한 “원동력은 바로 지위 경쟁이 부추긴 인간의 허영심이엇다.”

생각을 자극하는 책이다. 저자는 역사는 협력과 (이기적인) 경쟁의 긴장이라 말한다. 역사는 단순한 수렵채집 사회에서 조직화된 마을로 그리고 국가와 초국적기업으로 사회의 복잡성을 높여왔다. 그것은 점점 더 큰 규모로 협력하는 방법을 찾아내고 더 복잡하고 수익성 잇는 넌제로섬 게임을 하는 방법을 찾아낸 결과라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그 넌제로섬 게임은 제로섬 게임과의 긴장에서만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잇기에 경쟁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그 경쟁에서 이기려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쟁을 위해 협력을 더 잘 할 수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혁신을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협력하게 만드는 경쟁이다.

그런 긴장은 집단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 집단간에도 있다고 그리고 그 집단간 긴장은 집단내 긴장보다 더 강력한 진화의 원동력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한 촌락의 남자들이 다른 촌락을 습격해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납치한다면 대기는 온통 제로섬 원리로 가득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란 제로섬 게임은 넌제로섬 게임을 낳는다. “도끼를 휘두르는 살기등등한 자들이 당신의 촌락을 포위하면 당신과 이웃의 관계는 즉각 넌제로섬 원리를 향해 선회하게 된다. 전쟁은 각 집단 내부 사람들 사이의 운명의 공유 정도를 높임으로써 넌제로섬 원리를 빚어내고 그것은 문화의 진화를 더욱 심원하고 광대한 사회적 복잡성을 향해 나가도록 촉진한다.” 더나아가 전쟁이란 제로섬 게임은 집단의 경계를 넘어 넌제로섬 게임이 확장되도록 한다. “공격을 막아내거나 공격을 도모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촌락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어느 한쪽에서 이러한 동맹을 맺게 되면 그 적 역시 동맹을 찾아나설 동기가 충분해진다. 이런 식으로 경쟁적으로 동맹의 수를 늘리다 보면 사회적 그물망이 밖으로 확산되면서 점점 더 많은 촌락들을 그 망안으로 엮어들이는 조직화의 ‘군비경쟁’이 벌어진다.”

전쟁은 집단의 합병과 더 큰 규모의 정치적 조직화의 방향을 설정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강렬하고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전쟁이 넌제로섬 게임을 창조한 것이다.”

협력을 위해 집단을 만들지만 그 집단 안의 경쟁이 일어나고 그 경쟁은 협력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집단간의 전쟁이란 경쟁은 집단간의 협력을 강화한다. “이러한 작용은 문화의 진화 사다리의 위쪽으로 점점 올라가게 된다. 사회조직의 균열(가족이나 촌락이나 추장사회나 국가들 사이의 마찰이 일어나는 제로섬 영역)은 점점 넌제로선 원리라는 시멘트로 채워진다. 제로섬 원리는 아래서부터 차오르는 시멘트에 의해 점점 더 조직화되어 사다리의 위쪽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낮은 수준에서는 여전히 역설적이게도 사회를 통합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이 모든 것은 칸트가 강조한 ‘비사회적 사회성’으로 귀결된다. ‘사회성’의 영역(평화가 지배하는 지리적 범위)은 수렵채집사회 이후로 엄청나게 증가해왔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정도의 비사회성을 굴복시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사회성의 굴복을 촉진한 것은 얄굿게도 대다수의 경우가 더 높은 수준의 비사회성에 의한 것이엇다. 이러한 문화진화의 동력을 다윈의 말로 하자면 ‘선택되는’ 것은 점점 확산되는 넌제로섬 원리이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주체는 대개 전쟁의 제로섬 속성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결국 전쟁을 도모하는 것은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다.”

농업 역시 저자는 그런 협력과 경쟁의 상호작용에서 태어났을 것이라 생각한다. 농업은 야생에서자란 것을 주어모으는 것보다 비용대비이익이 부족하다. 수렵채집으로 1주일 먹거리를 마련하는데는 몇시간의 노동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왜 농업이 태어난 것일까? 우선 사회적 지위 추구를 말할 수 잇다고 저자는 말한다. “원시농업사회에 진입한 수렵채집사회에서 경작된 야생 식물들은 대개 공동체 전체의 소유가 아니었다. 특정집안이나 한 가문이 그 식물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거기서 얻어지는 산물을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당연히 그 집안 또는 가문의 지위는 높아진다. 오늘날에도 “교외 주택가나 작은 촌락에서 열성적으로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은 이웃들에게 신선한 토마토나 꽃을 나누어줌으로써 동네에서 신망을 얻게된다.” 그리고 재배한 작물은 ‘진귀한 구리 방패와 교환될 수도 있었다. 농사는 가족 수준의 집단에게 보상이 주어지는 사적 사업이다. 갓 결혼한 젊은 야노마모족 남성이 작품을 심기 위해 밭을 갈고 잇다면 그는 촌락 전체의 이익을 위해 땀을 흘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종의 무리라고 할 수 있는 식량을 둘러싸고 벌어진 군비경쟁이 농업 발달을 일궈낸 것이다.”

그리고 농업은 비유적으로 뿐 아니라 말 그대로 군비경쟁의 일부였다 “원시 시대의 전쟁에서 순수한 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농업은 수렵채집보다 훨씬 큰 규모의 거주지를 지탱해줄 수 있었다. 두 촌락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농업이 거부할 수 없을만큼 유혹적인 삶의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저자는 농업이란 “사회집단 안에서 지위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 사회집단 사이의 무력 투쟁, 빈곤에 대항한 투쟁” 이 세가지로 설명된다고 말한다.

농업은 잉여를 만들고 그 잉여는 추장이나 왕, 귀족과 같은 무임승차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일부 좌파적 관점에서 말하듯 그런 무임승차가 무임승차만은 아니다. “추장사회의 착취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화폐가 없는 경제체제에서 사회가 돌아가도록 돌보는 다시 말해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하는 데 따르는 추장들의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추장들의 자원 제한에 있어써 흔히 발견되는 전술은 ‘물에 대한 지배’를 ‘사람에 대한 지배’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교과서는 말한다. 그러나 적어도 일부 경에 이 설명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댐을 건설하는 데 기여한 사람들에게 댐에 저장한 물을 댈 수잇는 땅을 나눠준 하와이 주창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단 그는 댐이 만들어지도록 할 수 잇었다. 그 다음 그는 넌제로섬 이익을 얻는 길에 도사리는 장애물, 바로 무임승자자 문제를 뛰어넘을 수 잇었다.” 물론 추장이란 존재 자체가 “어느 정도 착취를 부추기는 것이 사실이지만 공공복지에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재부분시스템의 살아있는 문맥 안에서 볼 때 (거대한) 무덤 거석, 사원 등은 기능적 요소로 나타나며 농업 생산에 대한 의식의 상화에 따라 증가되는 수확에 비해 그 비용은 미미하다.” 추장사회에서 국가까지 이어진 정치시스템의 진화는 더 큰 규모의 협력이 진화해간 역사이다.

여기서 저자는 밈이란 개념을 도입한다. 인간 사회의 진화는 교역, 농업, 전쟁, 정치 등의 밈을 낳는 진화이며 밈을 통한 진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킨스의 원래 주장과 달리 저자는 넌제로섬 게임이 만든 인간의 뇌보다 인간의 네트웤이 이루어 만드는 더 거대한 뇌(저자는 이것을 보이지 않는 뇌라 말한다), 즉 인간집단을 밈의 운반자로 본다.

“문화의 진화는 단순히 밈들이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 저 사람의 머릿속으로 폴짝폭짝 건너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임들은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건너 뛰어다닌다. 추장사회들은 서로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가장 도움이 도는 문화가 우세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밈은 자연선택에 의해 성공자의 밈으로 교체된다. 이처럼 혹독한 문화적 선택의 시험을 통과하여 살아남고 그 결과 전체 사회의 모습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온 밈들이 많은 경우에 넌제로섬 사호작용을 촉진한다는 것이 바로 이책의 전제이다.” 그러므로 밈을 바이러스와 비교하는 것은 그리 생산적인 논의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나쁜 밈은 집단의 경쟁에 의해 도태되기 때문이다.

문자와 화폐는 그런 밈의 또 다른 예라 저자는 말한다. 문자와 화폐는 정보비용과 교통비용을 확기적으로 낮추어 보이지 않는 손을 더 활발하게 만들었다. 농업과 추장, 국가 등의 밈이 독자적으로 여기저기서 발명되었듯이 문자와 화폐 역시 독자적으로 여러 번 발명된 것을 저자는 진화의 방향성을 증명하는 좋은 예라 말한다.

문자는 정보비용을 낮추어 집단을 더 쉽게 단결하게 하고 비슷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을 더 쉽게 뭉치게 한다. 과거 귀족계급이 강력한 힘을 가졌던 것은 그들이 문자를 독점했고 그 문자를 통해 단결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문자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민주화가 일어난 것 역시 같은 논리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문자와 돈과 정보기술은 “사회 안의 권력을 재분배한다.”

돈이 왜 정보기술의 혁신인지 집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돈은 개인이 과거에 수행한 노동과 그 노동에 대해 사회가 평가하는 가치를 기록한다. 한편 우리가 돈을 쓸 때 그 행위는 일종의 신호가 된다.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확인해주고 비록 간접적이긴 하나 그 정보를 당신으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잇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돈은 억압에 대한 해법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장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돈은 읽고 쓸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지배받는 중앙통제경제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준 셈이다. 만일 어떤 경제적 정보기6nf을 당신에게 유리하게 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 자신이 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노예제도, 인간의 희생. 적당한 형태의 착취 등은 오랜 시간을 거쳐 차츰 사라져갔다. 오늘날 문명은 고대의 문명보다 더욱 ‘문명화’되었다. 그리고 그 주요원인은 돈과 문자가 오랜 시간 동안 진화되어온 방식과 그 둘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있다.”

밈의 진화에 비하면 어떤 국가, 제국, 문명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이야기 거리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케네스 클라크는 1969년 BBC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지침서 ‘문명’의 한 장에서 ‘구사일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책의 전제는 서구 문명이 살아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것이다. 일부 사람들이 중세 초기를 일컬어 암흑기라고 한다. 최근에는 이는 계속해서 관심을 끌어온 주제이다. 토머스 카힐의 베스트셀러 ‘아일랜드인들이 어떻게 문명을 구했나’라는 책에서도 부각되엇다. 카힐은 아일랜드의 필사자들에게 특별한 상찬을 보냈다. 중세 초기는 그 당시로 돌아가보면 희미하고 어두컴컴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라 말한다. “설사 수도승들이 없었다하더라도 유럽은 결국 경제적 기술적 정치적으로 다시 도약했을 것이다. 중세 말기 서양문명이 다시 소생한 것이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힌 것임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밈을 주목하라’이다. 문화는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펄쩍펄쩍뛰어다니며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를 남기지만 자기 자신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미개인이 로마를 휩쓸어비리기 훨씬 점부터 로마제국의 중심은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졋다. 그곳 비잔틴의 동로마제국에서는 고전문화의 상당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유럽의 암흑기가 다 지나갈 때까지.”

더군다나 “문화적 자산, 이 귀중한 밈의 축적물은 ‘고전적 유산’과 별 관계가 없다. 밈을 내포한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기술은 소포클레스의 작품들보다 훨씬 지속력이 강하다.(소포클레스의 희곡은 대부분 사라졋다.)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잇다. 문학은 물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식탁 위에 음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다. 안티고네의 사본은 문맹수준을 넘어선 농부들 사이에서도 별 수요가 없었을 것이다. 반면 쇠 말발굽은 세계 공용의 언어인 유용성으로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아이디어가 더 유용할수록 널리 퍼져나가고 재탄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용한 아이디어의 확산이 세계의 인구를 증가시키고 더 향상된 통신과 교통에 의해 지적 상승작용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이러한 가능성이 더 커지고 그 결과 마침내 확실성에 가깝게 된다. 사회는 점점 더 크고 조밀한 뇌를 닮아가고 이 뇌의 뉴런들은 점덤 늘어나는 혁신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확산시켜 또 다른 새로운 혁신에 박차를 가한다.

이 거대한 뇌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다문화성이다. 어느 한 문화가 혼자 책임지고 밈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650년 무렵 이탈리아나 프랑스를 관찰한 사람의 눈에 들어온 세상은 ‘전면적 시스템 장애’라 부를만한 상태였다. 마치 전 세계의 하드드라이브에 충돌이 일어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관점에서는 긴급 상황이 아니엇다. 세계는 백업 카피를 만들어두기 때문이다. 쓸모 잇는 밈은 스스로를 무더기로 복제해 국지적 충돌에 대비한다.

더 넓은 범위의 문화 진화 즉 사회적 복잡도와 넌제로섬 원리의 정도와 범위가 증대되는 것 역시 멈추기 어렵다. 이와 같은 사회의 진화가 의존하는 것은 문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의 특정 작품의 우연한 보존이 아니라 기술 진화라 볼 수 잇을 것이다. 전형적으로 서양적인 특징들 이를 테면 수세기에 걸친 농노제도의 뒤를 이어 활짝 핀 개인의 자유와 같은 것도 본질적으로 기술의 부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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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탄생 - 제국은 어떻게 태어나고 지배하며 몰락하는가
피터 터친 지음, 윤길순 엮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이책은 번역서의 제목이 저자가 직접 붙인 제목보다 좋은 경우이다. '전쟁 그리고 평화 그리고 전쟁'이란 원제는 책을 읽다보면 의미가 드러나지만 책을 읽지도 않은 사람에겐 의미가 불명이다. 한때 ~~ 시대란 제목이 유행한 것처럼 xx의 탄생이란 제목이 쏟아지지만 '제국의 탄생'이란 번역 제목은 책의 내용을 잘 알려준다. 탄생과 몰락 또는 제국의 일생이란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긴 하지만 역사 상의 제국들이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몰락하는가를 다루는 이책의 제목으로 적당하다.

제국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러나 제국이란 주제를 잘 다룬 경우는 드물다. 요 몇년 동안 나왔던 책 중 그래도 가장 잘 만들어진 책으로는 '제국의 미래'를 들 수 있다. 제국은 다민족국가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제국의 핵심에는 항상 하나의 민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하나 이상의 민족이 주도권을 행사할 경우 제국은 불안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 평화롭게 분리된 이유는 제국의 주도민족이 스페인의 카스티야 민족과 오스트리아의 독일인의 둘 이상이었기 때문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불안정했던 이유도 독일인과 헝가리인의 두 민족이 제국의 주도권을 다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국은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민족을 포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국의 안정성은 다른 민족을 포용하는 관용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제국의 미래'에서 에이미 추아가 하려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20% 부족한 말이기도 하다. 에이미 추아가 두꺼운 그 책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책이 나올 당시 부시 정권의 불관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지만 역사학의 입장에서는 그리 높게 쳐주기 힘들다. 관용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관용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하고 어떤 조건에서 사라져가는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제국에 대한 일반이론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물론 에이미 추아는 역사학자가 아니고 그책의 의도가 제국의 일반이론을 세우려는 것도 아니니 그책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제국에 대한 많은 책들이 일반이론으로서의 자격을 갖춘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어 제국이면 관용이 있어야지 하는 수준의 인상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것도 아니면 기번의 기죽게 두꺼운 책처럼 몇몇 제국의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책은 지금까지 나온 제국에 대한 책 중에서 발군이다. 이책은 제국이 왜 거기서 그때 등장하고 왜 그때 망했는가에 대한 일반이론을 제시한다. 대담한 시도이다. 더 좋은 것은 그 이론이 한두페이지에로 요약할 수 있게 간단명료하면서 역사상의 제국들의 역사에 적용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이 집단을 만드는 이유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도 규모가 클 뿐 그런 집단의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제국은 어떤 집단이냐는 것이다.

저자는 집단의 기초단위로 문명을 말한다. '사람들을 무리 지을 때 많은 민족을 합쳐서 가장 넓게 무리 지은 것을 문명이라 한다. 나는 그런 존재를 민족을 넘어선 공동체라느 뜻에서 초민족 공통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문화적 차이는 서로 다른 초민족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크게 나타난다." 제국은 초민족 공동체의 변경(frontier)에서 자란다고 말한다.

왜 변경인가? 변경에선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충돌은 변경의 사람들에게 선택압력으로 작용한다. 저자가 드는 예는 다양하다. 그중 하나를 말하자면 미국은 전형적인 변경에서 성장한 제국이라 저자는 말한다. 유럽문명의 변경이 된 북미에서 미국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은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난리였다. 싸움은 거의 400년을 이어졌고 그 충돌에서 미국인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이 미국에선 인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선 유럽보다 인종차별이 심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본다.

미국과 대비되는 예는 러시아이다.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과 슬라브 농경인들의 충돌은 러시아의 정체성을 만들었고 여기서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기준은 그리스 정교란 종교였다. 로마 역시 켈트족과의 투쟁에서 태어난 제국이다.

그러면 이런 충돌이 왜 제국의 배경이 되는가? 집단역학 때문이다. 계속되는 충돌은 집단역학이 갈등보다는 협력이 우세하게 만든다. "집단마다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정도가 다르고 따라서 결속과 연대의 정도도 다르다. 이븐 할ㄷ둔을 따라 나는 이런 집단의 속성을 아사비야라고 부른다. 아사비야는 사회집단이 집단적으로 일치된 행동을 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아사비야는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변수이다. 집단마다 그 양이 다르고 집단 내에서도 그 양은 변해간다.

변경의 생존압력은 아사비야를 높이고 아사비야가 높은 민족은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이들은 제국의 핵심을 이루는 '제국민족'이 된다.

제국은 관용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관용은 변경 너머의 그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관용은 변경 안쪽의 우리란 말을 쓸 수 있는 민족들에게 적용된다. 변경 너머의 그들은 '우리'를 정의하는 정체성의 대립항이므로 관용이 적용되지 않는다. 로마인들은 관용으로 이름 높았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제국민족이 되도록 한 켈트족에 대해선 관용이 적용되지 않앗다. 켈트족을 받아들인 것은 변경이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게르만 지역으로 확장된 후이다.

아사비야란 개념은 제국의 건설만 아니라 제국의 해체도 설명한다. 제국의 건설은 변경을 밀어내는데 성공했다는 말이다. 협력을 위한 즉 아사비야를 높엿던 타자를 밀어내면 필연적으로 고수준을 유지하던 아사비야가 약화될 조건이 만들어진다. 그 충분조건을 필요조건으로 만드는 것은 불평등의 심화이다.

선택압력이 작용하던 변경에선 빈부차가 심할 수 없다. 그러나 제국이 만들어지고 전쟁이 평화로 바뀌면 통합의 단계와 분열의 단계가 반복되는 세기적 순환이 시작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국은 안정과 내부 평화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안에 미래에 혼란을 낳을 씨앗을 가지고 잇다. 안정과 내부 평화는 번영을 가져오고 번영은 인구의 증가를 낳는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는 인구 과잉을 낳고 인구 과잉은 임금 하락과 지대 상승, 평민의 1인당 소득의 감소를 가져온다. 처음에는 낮은 임금과 높은 지대가 상류층에 유례없는 부를 가져다주지만 상류층의 수가 증가하고 탐욕이 늘면 그들도 소득의 감소를 겪기 시작한다. 생활수준의 하락은 불만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엘리트층은 국가에 의지해 고용과 추가 수입을 얻으려 하고 그래서 국가의 지출은 늘어나는데 사람들이 갈수록 빈곤해져 세수는 줄어든다. 국가재정이 무너지면 국가가 군대와 경찰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면 모든 제약에서 풀려나 엘리트층의 갈등이 고조되어 내전이 일어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이 폭발해 민중반란이 일어난다.”

분열의 단계에서 빈곤의 원인인 인구과잉과 엘리트층의 과잉이 해소되고 사람들이 혼란에 넌더리가 나 통합을 바라는 마음이 강해지면 다시 통합의 단계로 들어선다.

저자는 세기적 순환의 한 사이클이 보통 2-3세기가 걸린다고 말한다. 제국은 보통 3-4번의 세기적 순환을 겪는데 그 후엔 아사비야가 완전히 소멸해 제국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로마제국이 멸망했을 때가 그런 상태라는 것이다. 침략해온 게르만족은 2-3만 밖에 되지 않았다. 최소한 수백배에 이르는 이탈리아인들이 저항하지 못한 것은 아사비야가 바닥났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중국은 4번 을 넘어서는 순환을 겪었지만 지금도 건재한 제국으로 남아있다. 그러면 중국은 예외인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제국이 3-4번의 순환을 겪고 무너지는 것은 제국이 태어난 변경이 제국이 건설되면서 초민족 공동체의 핵심이 되면서 변경이 밀려났고 변경이 밀려나면서 아사비야의 과잉 수준을 만들었던 조건이 사라졌다. 아사비야의 충전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몇번의 순환을 겪으면 재고가 바닥난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변경에서 태어난 제국이다. 중앙아시아 유목민과의 끊임없는 경쟁이 중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은 농경민족인 중국인은 유목민의 땅인 스탭을 정복할 수 없었다. 무력으로 유목민을 밀어내도 그 땅은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었고 전주인이 밀려난 자리에 다른 유목민족이 들어와 다시 변경은 부활될 뿐이었다. 중국이 수천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변경이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럽국가들의 형성 역시 변경이론으로 설명가능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스페인은 무슬림과의 변경에서 태어났고 프랑스는 이민족과 충돌한 북프랑스의 변경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은 (기독교 개종이전의) 슬라브 이민족과 충돌한 프로이센에서 태어났다. 그런 변경을 밀어낸 중세 이후 유럽 역사는 세기적 순환의 좋은 예라고 저자는 말한다.

“첫번째는 13세기 중세 전성기(통합의 단계)고 뒤이어 14세기의 위기(분열의 단계)가 왔다. 두번째 물결은 르네상스(통합의 단계)고 뒤이어 17세기의 위기(분열의 단계)가 왔다. 세번째 물결은 계몽주의(통합의 단계)고 이것에는 혁명의 시대(분열의 단계가 뒤따랐다. 네번째 물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다. 통합의 단계는 평온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시작되어 거의 20세기 내내 지속되엇다. 이 단계의 후반과 특히 1960년부터의 특징은 지속적인 가격 인플레이션이며 이것은 어떤 세기적 순환에나 일어났던 현상이다. 분열의 단계는 20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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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가 판단하기로 선생님은 성벽 밖으로 처음 나오신 것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용서하게 나의 친구여. 배움에 헌신하느라 그랬다네. 풍경과 나무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주리 않지. 성벽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를 떠나는 것이 싫다고 인정했다. 도시에서는 학생이나 다른 지식인이나 보통은 많은 사람과 함께 철학자로서의 자신의 업적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두 네트웤이 지배적이었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한 깊은 열망을 갖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는 ‘스크린’이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현대의 비즈니스 여행자처럼 소크라테스 역시 네트웤 확장이라는 희망을 품고 아테네의 심장부를 탐험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현대인들이 디지털 스크린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추구했다. 바로 타인과의 교류, 우정, 자극, 참신한 생각, 직업적이고 개인적인 성장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였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새로운 지혜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사실 그는 어떤 지혜도 애당초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사람과의 토론을 통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아테네에 머물면서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방법이라 알려진 문답법을 통해 그 토론을 주재했다. 소크라테스에게 구두 의사소통은 훌륭한 사람을 위한 핵심요소였다.” (윌리엄 파워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를 탐험하던 시기를 축의 시대라 한다. 축의 시대라 불리는 기원전 6세기는 철기시대의 새로운 기술이 농촌공동체를 바꾸고 있었다. 농부들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빽빽한 숲을 밀어내고 새로운 경작지를 얻었다. 농업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다. 그래도 생산량은 사람들의 수요를 초과했다. 남는 부분은 교역에 넘겼다. 교역은 (당시의 기준으로는) 거대한 도시를 만들었고 도시들은 무역로로 연결되었다.

“도시들은 흥미진진한 곳이었다. 화려하게 채색된 마차와 상품을 싣고 먼 땅을 오가는 상인들이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녔다. 이곳에서는 도박, 연극, 춤, 매춘, 떠들석한 술판을 볼 수 있었다. 이 대부분이 근처 시골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온갖 사람들이 시장에서 뒤섞였으며 ㅜ거리, 시청, 교외의 숲이 우거진 공원에서는 새로운 철학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도시는 낡은 신분제도를 귀찮게 여기고 귀족과 낡은 종교에 도전하는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이 지배했다. 상인, 사업가, 은행가들이 그들이엇다. 도시는 엄청난 혼란의 원천인 동시에 활력의 원천이기도 했다. 도시 거주자들은 스스로 변화의 첨단에 서 있다고 느꼈다.”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에 등장한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는 모두 새롭게 태어난 도시가 낳은 사상가들이다.

도시가 새로움과 창조의 공간인 것은 사람들이 더 이상 얼굴을 맞대고만 말하지 않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뉴욕의 경쟁력이 금융업에서 나온다고 인식한다. 월가로 상징되는 금융산업이 지금의 뉴욕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20세기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뉴욕은 문화, 예술의 메카로 발돋음해왔다., '대서양의 중심 항구'로 출발한 뉴욕이 이제는 지구 전역을 상대로 문화교류를 관장하게 된것이다.

고급문화에서 하위문화까지 뉴욕의 다양한 크리에티브 현장은 뉴욕이 세계적 문화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지켜가도록 하는 든든한 배경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 최고의 도시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일까?

크리에티브 종사자들에게 도시생활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본연의 그리고 문화, 예술의 사교적 성향 때문이다. 문화산업은 비공식적 사교 영역에서 무척 효과적이며 문화생산이라는 경제 시스템의 하부에는 사교 역학이 존재한다. 이런 사교계가 없다면 문화, 예술 산업이 성공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사교계는 문화상품과 문화생산자가 생성되고 평가받고 시장으로 전달되도록 하는 결정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문화산업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데는 지리적 조건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문화, 예술 활동은 일정 지역 즉 맨해튼과 브루클린, 퀸즈와 브롱크스에서 일어난다.

아티스트, 뮤지션, 패션 디자이너와 클럽, 미술관, 록 콘서트장이 모두 25평방마일에 모여있다. 이런 밀집현상은 뉴욕이 글로벌 트랜드의 선도자로 입지를 다지는데 중요한 이유다.

어디든 걸어서 갈 수 잇는 거리라는 이점은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과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같은 지역에 모여 살면서 일상적으로 함께 어울리며 아이디어를 주고받거나 서로 마주치는 기회"(엘지자베스 커리드), 뉴욕은 그런 곳이기에 세계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 서울을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뉴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도시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도시가 줄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가 잇다. 그러나 도시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것은 그 도시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도시가 줄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 사람을 무시했을 때 도시도 몰락했다.

예를 들어 디트로이트는 극단적으로 몰락했다.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도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포기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산업도시는 과거의 상업도시들이나 현대의 정보 시대의 수도들과는 달랐다. 산업도시의 거대한 공장들은 비교적 숙련도가 낮은 근로자들을 수십만명 채용했다. 이 공장들은 자기충족적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똑간은 제품들을 저렴하게 제공할 때를 제외하고는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저자는 도시가 도시다운 것은 언제나 연결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도시에 모인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도시와 도시 사이의 연결, 그리고 그 연결을 통해 흐르는 사람과 지식 때문에 도시는 도시다워진다는 말이다. 애초에 디트로이트가 자동차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교통요지란 잇점에서 누린 그런 ‘흐름’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트로이트가 일단 자동차 도시가 된 이후에는 그런 흐름이 끊어졌고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흐름의 단절에서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디트로이트나 그와 유사한 도시들의 회생은 위대한 산업화 이전 및 이후 도시들이 가진 경쟁, 연결, 인적자본 같은 미덕들을 포용해야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물론 디트로이트의 몰락은 자동차 산업이란 한가지 산업에만 의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뉴욕도 제조업의 붕괴로 비슷한 타격을 받았지만 부활할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는 몰락하고 뉴욕은 부활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미덕이 남아있엇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자동차 도시의 몰락은 많은 면에서 헨리 포드의 성공이 남긴 유산이었다. 도시의 재건은 디트로이트에서 찾을 수 있던 전통적 도시의 미덕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런 미덕은 교육받은 노동자, 소규모 기업인들, 그리고 상이한 산업들 사이의 창조적 상호작용을 말한다. 디트로이트는 3개의 수직적으로 통합된 방대한 회사들에서 일하는 수십만명의 미숙련 노동자들을 고용한 하나의 산업이 지배했다. 이보다 더 해로운 조합이 있을까? 단기적으로는 생산적일 수 잇었도 도시의 장기적 성공에 필요한 역동적인 경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진 못한다. 디트로이트는 성장을 장려하는 다양성과 경쟁을 질식시켯다.”

건강한 생태계가 도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이책에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어떻게 하면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할 수있는가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간단하다. 도시 생태계에 다양성을 높이면 된다. 다양성을 높이려면 사람들이 모이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다양성을 높아지고 도시의 생태계는 건강하게 유지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도시가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은 장소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도시의 에너지는, 창조성은 사람들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책은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말한다. 우선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거리 청소를 하고 치안망을 구축하는 공공서비스도 그런 노력이다. 그리고 그런 서비스가 갖춰지면 합리적인 생활비 특히 주거비용이 가능해야 한다.

따분하게 들리는가? 공공정책 교과서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책은 그런 딱딱한 주제들을 구체적인 사례와 역사를 통해 설명하면서 그런 주제들의 일상적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며 거리를 걸으면서 무심히 지나던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려준다.

예를 들어 고층건물을 짖는 것이 옳은가 보행자의 시야에 맞춘 저층으로 도시를 채우는 것이 옳은가, 교외로 인구가 이동하는 것이 환경적으로 이로운가 해로운가, 대도시가 환경을 위해 나아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왜 적절한 선택인가 등을 쉽게 실감나게 설명한다. 이책의 의미는 이런 일상적인 주제들에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는 더 큰 관점을 준다는 점일 것이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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