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마, 팔레스타인
홍미정.서정환 지음 / 시대의창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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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리아 리바넨시스 혹은 마운트 레바논이라 불리는 지중해 동부 해안은 천년이 넘도록 12개 이상의 종파와 인종과 신조의 온실 노릇을 해왔다. 마치 마법이 지해하는 듯한 완벽한 온상이엇다. 레반트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중심을 두고 잇었다. 거래는 명료한 계약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졋고 상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평화를 숭상했다.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 사이에도 긴밀한 소통이 유지되었다. 온갖 종파의 기독교도들, 모슬렘, 드루즈교도, 소수의 유대교도 등이 이 지방이 품고 잇는 종파들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관용적 태도를 베푸는 것이 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발칸 지방 사람들은 목욕하길 꺼리며 툭하면 싸움질이니 우리는 얼마나 개명한 사람들이냐고 나도 학창시절에 교실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 평평상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햇고 역사는 개선과 관용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이 여겨졌다.

이 지역은 세계 모든 곳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극히 세련된 생활양식과 활발한 경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처럼 온화한 기후를 자랑했으며 지중해 저 멀리 높은 곳의 눈 쌓인 풍경도 볼만했다. 스파이, (금발) 창부, 작각, 시인, 마약상, 모험가, 도박 중독자, 테니스 선수, 아프레 스키 애호가, 상인 등등 온갖 인간들이 모여들어 이곳의 문화를 형성햇다. 이 지역은 ‘낙원’일 뿐 아니라 흔히 하는 말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적의 교차점이기도 햇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유대인들이 몰려오기 전 이웃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그런 문화에서 살았고 아직도 그들은 그런 문화를 지키며 산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슬람이란 이성과 갈등하는 신화도 아니엇고 욕망과 갈등하는 도덕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권해야 할 선도 아니고 스스로를 옭아매야 할 규범도 아니었다. 하루 다섯번 꼬박꼬박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이런 것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마라 아버지가 전자의 경우라면 사마라는 후자다. 사마라는 무신론자다. 라마단 기간에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가 하면 술과 여자를 두루 좋아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아버지와 약간이라도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햇고 아들과 맞담배를 피우면서 밤 늦도록 아들의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레바논에서처럼)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종교가 문제시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용의 문화는 레바논처럼 높은 교양수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런 전통은 높은 교육수준으로 나타난다. “팔레스타인의 교육수준은 주변 아랍국보다 훨씬 높다. 세계문맹률 순위에서 시리아, 이집트 등은 모두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문맹률 8.9%로 79위를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에는 비르제이트, 알쿠즈, 알나자, 베들레헴, 헤브론 대학 등 여러 대학이 있는데 이중 비르제이트와 알쿠즈 대학은 각종 순위조사에서 중동지역 10대 대학에 들 정도로 학술적 성과가 높은 곳이다.”

0%에 가까운 문맹률을 자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생각하면 이는 위업이다.

“헤브론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가장 큰 공장이 어디인지 수소문한 끝에 노동자 47명을 고용하는 알샤르크 전기회사 공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전선과 철사, 용접봉 따위를 제조하는 이 소박한 공장의 관계자는 ‘우리 공장이 2008년에 무려 800만 셰켈(약 2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자랑했다. 이 정도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기업에 속한다.

2009년 현재 국내총생산이 128억 달러, 1인당 GDP는 2,900달러 정도다. 공장도 없고 중동에서는 흔한 석유도 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가장 정확한 표현은 딱히 먹고살게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경제가 이 모양인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의 경제적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쥐게 되었다. 즉 팔레스타인에서 공장 하나를 짖는다든지 원료와 완성품을 수입, 추술하는 데 일일이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거의 허가를 해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경제가 악화되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후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실업률이 2배 가까이 늘었고 1인당 소득도 20%나 줄었다. 지금 팔레스타인 경제는 더 나빠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여 점령촌을 확장하는가 하면 수원지마저 독차지했다. 팔레스타인과 외국, 가자-서안, 서안-동예루살렘 간의 사람과 물자 이동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저자들은 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경제파괴는 오슬로 협정 이전으로 올라간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어떤 자원도 인프라도 없는 가자의 좁은 땅으로 쫓겨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그들이 쫓겨간 곳까지 쫓아가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성경구절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을 “장작을 패고 물을 긷는 사람”으로 만들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했고 이스라엘 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지역산업의 발전을 방해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에 경제적으로 종속되게 만들었고 정치적 독립의 경제적 기반을 제거했다.

가자는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사라진 세계에서 고전적인 식민착취가 부활한 예이다. 점령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착취의 도구이자 상징이었다. 2005년 가자 인구 140만 중에서 8천명에 불과한 유대인들은 토지의 25%, 경작지의 40%를 차지했고 수자원의 대부분을 통제했다. (이상 The Economist의 기사 요약)

“그동안 이스라엘은 ‘점령촌 보호’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Settlement’를 정착촌으로 옮겨 싣는 언론도 있는데 그보다는 정령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점렴촌에 사는 유대인들은 쉽게 말해 극우주의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0.1%나 될까 말까 한 이들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신들의 땅으로 믿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옛날부터 서안지구의 아무 곳에서나 막무가내로 컨테이너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먹고 자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정부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고요.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보내 경비를 서 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진짜 집과 기반시서을 건설하게 되죠. 기왕에 군대가 있으니 군사시실도 만들고요. 그러다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접근이 금지되는 겁니다. 혹시 그쪽을 취재하실거라면 점령촌 사람들을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국인들도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가용자원이 안 그래도 적은 곳에서 생산수단을 뺏긴 팔레스타인인들은 절대적 빈곤과 상상할 수 없는 궁핍에서 살아야 했다. 80%는 하루 2달러가 안되는 돈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직도 가자의 생활조건은 문명에 대한 모욕으로 남아 있다. 이스라엘의 지배가 끝나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없다.

경제의 목을 죈 이스라엘의 지배 덕분에 “팔레스타인 역제는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잇다.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시구, 유엔개발계획 같은 유엔 산하원조기구와 세계은행, 적신월사 등 각종 경제, 인도주의기관에서 팔레스타인에 지원하는 돈은 매해 10억달러를 넘는다. 예르ㅜㄹ 들어 팔레스타인의 교사와 의사들은 난민구호사업기구가 아니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한 학교나 의료원에 출근한다.유엔기구와 유엔산하기관 외에도 라말라 시에만 약 1700개의 정치, 사회, 교육, 여성, 문화 등 각 분야 NGO들이 설립되어 있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팔레스타인에서 NGO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대기업만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그러나 원조는 팔레스타인의 자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조는 “기간산업 대신 식량, 의료, 교육 부분에만 직접적으로 편중되게 지원함으로써 그 자원의 배분을 놓고 팔레스타인 내부가 분열되게 조장했다. 또한 원조 이후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책임감있게 감시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자치정부의 부패를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 정권이 등장하는데 일조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바로 사망하는 원조경제체제로 묶어두었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고립시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서 ‘교육은 받아서 무엇 하나’하는 뿌리 깊은 회의와 무기력감에 젖어 있다. 팔레스타인 교육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팔레스타인 교사가 쓴 글을 발견하고는 먹먹했던 일이 떠오른다. ‘학생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잇다는 ‘희망’을 말해야 할 때 교사로서 가장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저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최소한의 몸부림이며 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존권의 문제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최소한의 생존을 말할 뿐이다. 여전히 그들에겐 레반트의 전통인 관용은 살아있다.

“나는 팔레스타인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할 수 잇는 폐쇄적인 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듯이 그 신이 창조한 모든 다른 사람, 다른 종교도 종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유대인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쫓아낸 뒤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이슬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형제처럼 같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주었노라 계속 우기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라고 선언하고 다닌다. 이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가 정통이고 우월하다는 쪽, 다른 종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 자신의 국민들이 타인을 핍박하는 데 마약과 같은 종교적 동기를 활용하는 쪽 국가 전체가 종교적 근본주의에 기운 쪽은 이스라엘이 아닐까.”

구약에서 말하는 신이 약속한 땅이란 주장 자체도 문헌비평학적으로 보면 의심스런 주장이다 (신의 역사 1 리뷰를 참조) 그러나 그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온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유대인이 그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현재 유대인 대다수는 바빌론 시대나 로마제국 기대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고 전해지는 유대인과는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다. 현대 유대인들은 중세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즉 기원후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제국의 힘야르족과 8세기 중반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제국의 카자르족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특히 카자르 후손인 유대인들은 현재 세계 유대인들의 약 80% 이상을 구성하는 아슈케나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이디시어의 파생어이며 성서 히브리어의 어휘 일부만 사용한다. 이디시어는 독일어가 혼합되기는 했지만 문장과 음운체계에서 슬라브어족에 속한다. 더 나아가 기원후 1세기에 로마가 점령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대규모 이민자가 없었다.”

시온주의 자체가 근거없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1000년 이상 그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시온주의는 독선일 뿐이다. 그것도 억지의 독선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독선의 실체는 미국의 전략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이스라엘 없는 중동’을 가정해보자. 2차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자리한 나라들은 어떻게든 이 질서에 편입되었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등 근대적 국가로 거듭나던 중동 각국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동에서는 민족주의나 이슬람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었는데 이런 중동이 서장세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호의적으로 재편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도 교두보가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이런 성격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평화란 본질적으로 힘의 균형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받쳐주는 한 미국에서 수입한 성능이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는 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잇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고 있다. 중동을 “더는 힘으로 제압할 수없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 해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이후 중동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정치,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가능한 넓힌다면 ‘더 먼 미래에 과연 이스라엘은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짋문에 이전처럼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침내 평화롭게 살 수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이전보다 더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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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역사 - 왜 상식은 포퓰리즘을 낳았는가?
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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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에서 인(人)이란 글자는 원래 천자를 말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인(人)이란 말은 제후들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고 공자의 업적은 인(人)을 사(士)계급까지 넓힌 것이다. 인(人)이란 말의 역사는 중국에서 정치적 권리가 어떻게 확산되었는가의 역사이다.

인(人) 즉 사람이란 말은 오직 정치적 권리를 가졌을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사람은 인이 아닌 민(民)이라 불렸다. 민(民)의 자형은 꼬챙이로 눈을 찌르는 모양이다. 민에게 요구되는 것은 의무 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정치적 권리를 가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은 평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평등’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남보다 더 평등한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누가 온전하게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가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달랐다. 왕과 제후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었던 고대중국에서 德이라 불리었던 그 기준이 실제론 혈통이었다면 공자 이후로는 능력이었다. 그에 비해 고대 로마에선 재산이 기준이었다.

“Only money made a high political career possible. Patrician blood had long become a liability. Money. It ruled the world. Without it, a man was nothing. Money. How to get it? How to get enough of it to enter the Senate? Dreams, Lucius Cornelius Sulla! Dreams!

Money again. Money, money, money. Though power entered into it too. One should never forget or underestimate power. Which drove which? Which was the means, which the end?” (Colleen Mccullough, ‘First Man In Rome’)

로마 이후에도 유럽의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재산이 기준인 것은 의회민주주의가 자리잡았던 근대영국과 식민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에 관한 논쟁이 벌어질 경우 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개인의 부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식민지의 휘그당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또 유권자로서든 아니면 공무원으로서든 그 자격의 기준은 똑같이 부였다. 투표권에 관한 영국인의 사고에서는 오직 소득을 낳을 토지를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독립적인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립적인 사람들만이 공동체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서 판단을 건전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산이 없거나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여성만 아니라 어린이와 노예, 소작인, 하인, 장인, 도제들은 스스로 정치적 결정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걸린 문제에서 특히 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우리에겐 낯설다. 우리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누구에게나 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면 당연히 권리가 있다고, ‘인권’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이란 개념은 최근의 발명이다. 인간이 있어온 시간의 대부분 동안 인권이란 알려지지 않았고 사람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러나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람이면 다 같은 사람이다. 역사적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평균을 벗어난 비정상이라 할만한 시대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우리의 시대는 비정상이 되었는가? 이책이 묻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답을 한 가지 개념의 역사에서 찾는다.

‘영국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화는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의 신화다. 이는 이미 17세기부터 주창되었지만 19세기에 수차례의 정치개혁을 거치면서 비로소 확신되기에 이르렀다. 전제정 밑에서 신음하는 우상 숭배적인 대륙사람들과 달리 자유를 만끽하는 독특한 ‘섬나라 인종’이라는 이미지는 잉글랜드가 개신교 국가로 선회한 튜더 시대까지 소급되지만 ‘자유롭게 태어난 잉글랜드인’이라는 명제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사건은 명예혁명(1688)이었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이 차지하는 위상에 맞먹는 영국의 명예혁명은 의회와 왕정 같은 영국의 오랜 제도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져왔다.” (박지향)

그러나 그 믿음은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얻은 것이다. “1700년경 런던은 적대심으로 상처 입은 도시였다.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과 정치혁명은 불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사법적 또는 신학적 전문성을 자랑하던 유서 깊은 중심지들에 대한 불신과 진리 탐구와 의사결정의 낡은 방법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었다.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가 아주 힘들었다.”

길고 긴 내전을 낳았던 권위에 대한 불신은 사상적 차이를 인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용인하는 관용을 낳았다. “대화는 관용과 질문하고 토론하는 능력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화의 상대를 인정하는 관용은 “서로 옳다는 주장들 사이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적어도 희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영국인들이 어느날 갑자기 관용을 배운 것은 “어렵게 얻은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표현의 자유가 영국의 기본적인 요소로 정착”되었다.

문제는 불신과 자유 덕분에 태어난 “산만한 도시 세계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다양성” 위에서 어떻게 질서를 세울 것인가였다. “영국의 상류층과 중산층의 입장에서 볼 때 혁명 후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극단적 다원론을 누그러뜨릴 초법적 방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해와 오해를 구분하고 기본적인 사상들에 대한 의견일치를 어느 정도 촉진하되 그 모든 것들을 종교적 관용과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안에서 이루는 것이 급선무였다.”

유력한 해법으로 ‘상식’이 제시된다. 공동체의 누구나 공유하는 상식은 “공통의 정체성이 세워질 최소한의 권위가 되어줄 것으로 보였다. 그럴 경우 폭넓게 받아들여진 핵심적인 가정들을 바탕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과도한 개인주의와 정치적 증오, 당파성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다. 정치역역에서 상식의 적이 ‘당파성’과 ‘이해관계’라면 종교에서 경멸해 마땅한 상식의 적은 ‘광신’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을 그 모든 적들에 맞설 성채로, 또 불필요하게 학식을 자랑하거나 사변적이거나 난해하거나 광적인 것에 맞설 성채로 높이 평가했다.” 극단주의자들에게 한 세기를 끌려다닌 사람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식은 “토론의 한계를 그어” 의견충돌이 낳을 “적개심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여겨졌다.”

상식이 한계를 긋는 구체적인 방식은 이런 식이었다. 극단으로 흐르는 이상주의자들과 달리 보통사람들은 “현실의 상식적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그들보다 우수한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여기서 상식의 옹호자들은 세상 실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정확히 말하는 본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보통사람들을 옹호”하면서 ‘상식의 적’들을 공격했다. “과연, 상식의 가치에 대한 암묵적 동의는 18세기 첫 몇 십 년동안 휘그당의 과두체제와엘리트 사회의 결속에 필요한 토대가 되었다.”

더 이상 정부나 교회가 검열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식이 검열관의 자리를 차지한다. “상식의 옛날 개념이 개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심판관과 검열관’이었다면 이제 그 개념은 문화적 규제의 수단으로 일반화되고 집단화된다. 상식은 표현에 대한 형식적 규제를 철폐했다고 자랑하는 모든 사회들의 특징이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구조적 검열이 되었다.”

문제는 그 상식의 누구의 것이냐, 이다. 물론 상식은 인민(people)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은 상식을 배울 수는 있지만 부족하다고 여겨졌고 가난한 자들도 상식이 적은 것으로 여겨졌다. “18세기 초에는 상식도 심미안처럼 노력 여하에 따라 키울 수 있는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미덕으로 불린 상식의 소유자는 “합리적이고 착실하고 멋을 알고 덕을 갖춘 중류층과 상류층 사람들로 이뤄진 예의 바른 대중”과 같은 뜻이었다. 상식의 옹호자들은 상식의 적(실제로는 그들의 정적)을 상식의 소유자인 인민의 편에서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인민은 상상의 산물일뿐 시골과 도시의 골목에서 만나는 현실의 인민이 아니었다. 상식의 이런 비현실성 때문에 결국 상식의 주창자들의 의도와 달리 상식은 상식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분쟁의 중심이 되었고 조화를 위해 고안된 개념이 정쟁의 무기가 되었다.

이런 추상성 때문에 상식(common sense)은 프랑스어권에서 양식(bon sens)로 변형된다. 사전적으로 영어의 상식과 불어의 양식은 거의 호환가능하다. “양식은 기본적인 추리능력과 일상적인 식별능력으로 정의되었으며 몽테스키외가 표현했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받아들여질 기본적인 진리들을 얻게하는 ‘사물들을 서로 정확히 비교할 줄 아는 능력’으로 여겨졌다.”

양식을 가진 사람, 교양인(homme de bon sens)이 누구인가가 문제이다. 교양인은 “사물들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이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정의상 (상식의 소유자인) 영어의 people과 다를 이유는 없다.

그러나 “18세기 영국에서 상식이 검열법이라는 정교한 도구가 없는 가운데 공동체의 규범을 유지하면서 단속의 기능을 수행할 것을 약속했다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과 비슷한 양식이” 사회적으로 공유된 상식을 공격하고 해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영국의 맥락에서 보면 상식은 사람들이 사물들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격려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상식의 프랑스어 상대인 양식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외양 밑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뒤엎기 위한 노력으로 넌센스를 드러내는 인간의 잠재력을 의미했다.”

영국의 상식과 대륙의 양식이 달라진 이유는 정치적 맥락이 달랐기 때문이다. 질서를 세우려던 영국과 달리 구체제의 “프랑스는 여전히 관습이 보통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사는 준칙의 원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런 국가였다. 암묵적 일치에 의존했던 ‘만민일치’는 근대초기 유럽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신성불가침한 규칙의 원천이었다.관습은 임금과 고용조건에서부터 부채의 엋산까지 근대초기 경제적 삶의 중요한 측면을 모두 결정했다. 또한 계급구조를 떠받쳤다. 당연히 종교적 관행도 지배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전한 상식 즉 양식은 관습의 넌센스를 드러내고 공격하는 무기로 쓰인다.

“오늘날 우리가 포퓰리즘이라 부르는 선동적 정치 스타일은 그 시대의 정치이론은 (상식과 양식이 대표하는) 계몽운동 문화의 다양한 갈래들이 결합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합의 폭발력이 처음으로 증명된 것은 미국혁명에서 였다.

페인이 ‘상식’이란 책자로 주장했듯이 미국혁명의 이념은 상식과 양식이 결합이었다. 페인은 미국인들에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설득했다. (양식) 국가 정체성에 변화를 줘야할 뿐 아니라 집단 상식이 자신들을 통치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상식)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과 양식의 결합은 “인민주권이란 공화주의 개념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현실에 구현하는 것을 실험하도록 햇다.” 저자는 이 “예상치 못한 결혼”이 “민주주의 상식”을 낳았다고 말한다. 페인이 교묘하게 만들어낸 ‘상식의 이중성’ 덕분에 “1776년이 다 가기 전에 이미 상식은 새로운 형태의 인민통치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이 형태의 통치에는 인민들이 각자 타고난 실용적이고 건전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통해 주권자가 되지만 그들의 판단력은 상식에 의해 정의되고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영국의 상식도 프랑스의 양식도 그랬듯이 “상식을 대효한다고 지나치게 주장하고 나서는 곳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린다. 상식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거나 상식에 호소한다는 주장은 초기에 ‘양식’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잘 알았듯이 바탕에 기만을 깔고 있다.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서 진정으로 대중적인 것은 거의 없다. 어느 것이든 절대로 보편적이지도 않으며 폭넓게 교감이 이뤄지지도 않았다. 상식도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것들만큼이나 추상적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나 사회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희생을 바탕으로 득을 본다. 무엇보다 상식을 상기시키는 것은 논쟁을 부른다. 그것은 곧 상식이 정치적이라는 뜻이다.”

그 이유는 칸트가 말하듯이 “상식은 진리의 법정과는 거리가 한참 멀”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상식은 지식주장에 요구되는 비판적 조사를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적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또 대중의 판단도 협잡꾼들만 영광을 누리게 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은 정치질서에 대한 비전을 낳은 것이 아니라 (포퓰리즘이란) 정치 스타일을 낳았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상식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기둥 중 하나로 남아 있는 포퓰리즘의 인식적 토대이며 또 포퓰리즘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민주주의의 영원한 위협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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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 - 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G. 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 말글빛냄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튜더왕조란 말은 몰라도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 둘 만큼 대중문화의 사랑을 받은 왕도 없다. 튜더왕조는 아버지인 헨리8세와 딸인 엘리자베스 1세의 왕실계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인지도면에서 둘 중 하나를 꼽으라면 엘리자베스 1세보다는 아버지인 헨리8세가 압도적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인지도가 높은 이유는 영국이 변방으로 보잘 것없는 약소국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계기를 마련한 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업적도 황당한 아버지 앞에선 무색해진다.

남자 아이를 갖고 싶다고 이혼하기 위해 온 유럽을 뒤흔들고 종교개혁까지 한 왕. 그렇게 이혼하고 결혼해 놓고는 마누라를 처형한 왕. 황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는 왕이다. 황당의 극의를 보여준 왕인 만큼 영화와 소설, 역사의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얘기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얘기거리가 많기는 그 딸들인 매리 여왕과 엘리베자스 여왕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두 여왕에 대한 책도 영화도 많고 많다.

이책은 그 세사람을 모두 다룬다. 그렇다면 이책은 그 많고 많은 책들과 어떻게 다른가? 워낙 책들이 많이 나왔으니 한두권쯤은 읽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책들과 이책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이책은 그 세 사람이 속한 왕실계보 즉 튜더왕조에 대한 책이다. 이책은 그 세 사람에 대해서도 다루지만 그 세사람의 시대를 묶어 하나의 전체로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튜더왕조가 등장한 시기는 중세가 끝난 시점이다. 12세기 르네상스부터 영국을 지배한 플랜태저넷 왕조가 백년전쟁의 패전과 그 패전의 후유증으로 일어난 장미전쟁으로 무너지고 그 전쟁의 폐허와 함께 중세가 끝난 시점이 튜더왕조의 시대였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은 귀족의 수를 격감시켰고 귀족의 약화와 함께 영국에선 절대왕정이 일찍 시작될 수있었다. 한 왕조를 연 사람답게 헨디7세는 특별했다. 그러나 그의 특별함은 눈에 띄지 않는 특별함이었고 덕분에 그에 대한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의 특별함이란 중세말기라는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헨리7세의 과제는 “영국의 왕관을 귀족의 일개 분파 이상이었던 이전의 지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왕은 단순히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해야 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잉글랜드의 왕은 ‘국왕이자 황제’라기보다는 ‘동등한 자들 중의 제일인자’에 불과했다. 장미전쟁은 농업, 목축업, 산업, 무역에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별 손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군주제에 해단 신뢰를 손상시켰다. 왕은 무능해보였고 모든 신민들의 권리를 보호할 능력이 없어 보이거나 보호할 의사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옥스퍼드 영국사)

헨리7세는 그 과제를 해내는 위업을 이룬다. 이책의 저자는 그 이유를 헨리7세가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엇기 때문이라 말한다. “현재 그에게 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의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데 아마 당시에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스워스 전투 이전까지 그의 인생에는 극적인 순간들과 위기의 순간들이 종종 있었지만 그 자신이 그런 시련을 원한 적은 없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조용히 보냈다. 그에게 왕위를 안겨준 전투에서조차 그가 했던 일은 농아나 마네킹도 할 수 있을만한 역할이엇다. 헨리는 공격당했고 헨리는 보호받았고 헨리는 왕관을 얻었다. 어떤 장면에서도 그는 수동적인 역할만 했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큰 업적을 이루었다. 기질적으로 그는 중세의 모험심 넘치는 전사황보다는 현대의 유능한 기업간부에 더 가까웠던 것같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언제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는 군사적인 영광을 조금도 중시하지 않았으며 유럽의 유력 가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명성을 남기지 못했지만그가 무대를 세운 덕분에 그의 아들과 그의 손녀가 거의 1세기 동안 차례 차례 활략을 보일 수 있었다.”

튜더시대는 절대왕정의 시대로 불린다. 헨리7세는 절대왕정을 실현했고 그가 실현한 토대위에서 그의 자손들이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업적은 악전고투의 결과였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군주정은 흔들리고 있었고 귀족들은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재정은 파산상태엿다. 그는 군주의 권력을 세우고 귀족과 교회를 복종시키며 재정을 확립한 것은 헨리7세의 업적이다. 그런 아버지를 둔 것은 헨리8세의 행운이엇으며 동시에 불운이기도 햇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이 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었다. 헨리는 행운이 따랐다. 그는 역사상 가장 운이 좋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그가 누린 행운은 대부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헨리7세는 잉글랜드의 왕권을 과거 수대에 비해 훨씬 더 확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국고를 금으로 가득 채웠고 백성들은 평화로운 시대가 가져다주는 혜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그 익숙함, 당연함이 문제였다. 주어진 모든 것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헨리8세는 아버지가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것은 물과 공기처럼 얼마든지 낭비해도 상관없었다.

헨리8세는 “아무도 못 말릴 정도로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고 모든 중요한 문제에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평생동안 계속 유지되었다. 그는 그냐말로 폭군의 자격을 제대로 갖춘 한심하고 위험한 살인광이엇다. 헨리처럼 자만심이라는 높은 벽 안에 갇힌 사람은 고마움과 같은 건강한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또 그런 사람은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의 운명은 거의 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고 그에게 일어나는 행운은 모두 우주에 대한 신의 위대한 설계를 이루는 과정이며 나쁜 일은 모두 신이나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외의 무언가가 우주의 법칙에 어긋났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가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헨리8세의 황당함은 그런 감사할줄 모르는 오만함 때문이었다.


"국왕은 혹시 재채기라도 하면 국사를 내려놓고 스스로 쉬는 날이라고 정하고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비가 잦아들면 정원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겼다."

"국왕이 잠을 설친 건 사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렇게 땅이 꽁꽁 얼어붙었으니 사냥개가 움직이기 어럽지. 사냥개들이 나갈 수 없었을 거야. 양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게 아니야."

"자네가 인내심을 갖고 우리 군주를 모실 수 있을까? 군주가 낮에 올린 서류에는 서명도 않는 채 자정이 다 되도록 브랜든하고 술을 마시고 킬킬대면서 노래나 부르고 있을 때 자네가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자네가 국왕을 채근할 때 국왕이 이제 잠이나 자야겠다고, 내일은 사냥을 갈 거라고 말한다면 인내심을 보일 수 있을까? 국왕을 모실 기회가 온다면 국왕을 있는 그대로 쾌락을 추구하는 군주로 받아들여야 할 거야."

아버지가 물려준 관료들이 있었기에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즐길 수 있었다. “그의 곁에는 헨리7세 통치 말기에 정부고관이었던 충성스럽고 유능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들은 모두 그들이 관리했기에 그들의 군주는 마음껏 사냥과 음악과 춤을 즐기고(그는 악기 연주와 작곡에 재능이 있었다) 마상 창시합, 도박, 테니스, 수집, 궁전 개축 등에 관심을 쏟았다.” 그는 전형적인 중세귀족이었다. 그는 아버지 덕에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했고 당연한 것을 마음껏 낭비했다.

중세귀족에게 궁극의 오락은 전쟁이다. 전쟁의 영광을 위해 헨리는 아무 득도 없는 전쟁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그의 사치와 전쟁취미에 그의 아버지가 이룩한 재정은 파탄에 빠진다. 그러나 재정위기도 헨리의 취미를 그만두게는 하지 못했다.

"그대는 세금때문에 이 나라가 쓰러질 거라는 이유를 들어 내가 전쟁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지. 전쟁에 나가는 군주를 지원하지 않을거라면 나라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을 한 루이 14세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을 벌여 프랑스의 재정을 파멸로 이끌었고 결국 그 재정상태 때문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만든 루이 14세. 그에게 전쟁은 자신의 영광을 위한 놀이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헨리8세에겐 전쟁도 사랑도 사냥과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왕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왜 가지면 안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왕의 이야기가 어디로 흐르겠는가? 사랑 이야기로, 앤 이야기로,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으로 흐를 것이다."

"추기경은 국왕이 직접 편지를 쓰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늘 말했다. 다른 국왕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심지어는 교황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그랫다. 직접 편지를 쓰면 많은 게 달라질 경우라도 국왕은 절대로 직접 편지를 쓰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앤 불린은 왕이 직접 쓴 편지를 받았다.

사랑의 불장난에, 덧없이 사라질 감정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왕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켰다. 당신은 이제 마흔이고 (왕의 꿈에 나타난) 형은 당신에게 어른이 되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당신은 아서 왕에 대한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연극으로 상연했나요? 가면극은 얼마나 많았고 가장행렬은 또 얼마나 많았나요? 종이 방패와 나무칼을 들고 등장했던 배우는 또 얼마나 많았나요?" (이상 힐러리 맨틀 ‘울프홀’에서 인용)

영국의 정상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왕에게 나라는 그의 소유물일 뿐이었다. 그의 소유물일 뿐이니 그 나라는 자신의 욕망에 봉사해야 하는 도구일 뿐이며 그는 그 소유물에 대해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었다.

그런 왕에게 사랑은 사냥이나 마찬가지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한때의 유희였다. 전쟁 역시 더 거창할 뿐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다.

헨리8세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메리, 엘리자베스는 아버지가 벌려놓은 뒷치닥거리를 하느라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가 망가트린 재정문제를 해결해야 했으며 그가 사랑의 불장난 때문에 일으킨 종교개혁 때문에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합해야 했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이책은 헨리8세의 변덕이 왜 어떻게 그런 문제를 일으켰는가를 헨리8세의 행동을 따라 자세히 설명하고 그가 일으킨 문제들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상세히 살핀다. 이책은 반 이상의 지면을 그에 할당한다.

그리고 나머지 반에선 그 문제들이 그의 아들과 딸들의 치세에 어떤 문제를 일으켰고 그 문제들 때문에 그들이 악전고투해야 했던 상황을 설명한다.

이책은 영국사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왕이란 개인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본격적인 역사서보다는 전기에 가깝다. 가령 이런 서술은 이책에서 보기 힘들다.

“튜더 시대는 영국사의 한 분수령으로서 앵글로-아메리카 정신에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신성한 전통, 고유한 애국심, 식민시대 후기의 침울함 등이 합쳐져 이 시대를 진정한 황금시대로 과대평가하게 햇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신화보다 더 복잡하고 더 흥미롭지만 덜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튜더 시대 잉글랜드가 지닌 잠재적 힘은 사회적, 경제적, 인구적인 것이엇다. 그러므로 만일 이 시기가 황금시대엿다면 이는 기본적으로 1500년에서 엘리자베스 1세의 사망 사이에 일어난 상당한 인구성장이 가용자원의 양, 특히 식량공급을 초과성장하여 맬서스주의적 인구위기를 초래할 정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근과 질병은 분명히 튜더 시대 경제를 저해했으나 14세기의 경우처럼 경제의 토대를 무너뜨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 인구증가로 인한 노동력과 수요의 증ㄱ5k는 경제성장과 농업의 상업화를 자극하고 무역과 도시의 부활을 고무하고 주거의 혁명을 가져왔으며 특히 런던에서 영국식 예절을 세련화했다. 그리고 튜더 시대 영국인들 사이에서 새롭고 활력 있는 태도 특히 종교개혁 사상과 칼뱅주의 신학에서 유래한 개인주의적 태도를 조장했다.” (옥스퍼드 영국사)

그러나 이책은 충분히 왕조사라 불릴만하다. 그 이유는 100년이 넘는 튜더왕조의 시대를 묶는 문제가 무엇이었는가가 이책의 주제이기 때문이며 그 주제를 제대로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서에선 무시되기 마련인 왕이란 개인에 주목하고 개인이 어떻게 시대를 규정햇는가를 이해하는데 주목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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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읽는 CEO - 나를 바꾸는 창조적 파괴 읽는CEO 인물평전편 3
아키야마 슌 지음, 박화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일본 전국시대의 세 영웅이다. 이들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울지 않는 두견새’를 흔히 말한다: 울지 않는 새는 죽인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든다,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이에야스. 이 이야기에서 새를 일본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오다 노부나가란 사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노부나가는 말수가 적었다. 노부나가가 내뱉은 말이라고는 고작 ‘그러한가’ 또는 ‘하는 수 없군’이 전부엿다고 한다. 물론 말 대신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행동 하나 하나가 암울하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행동을 분석하다 보면 마치 심연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처럼 혼란스러워진다. 노부나가의 목표와 의도, 행동의 동기와 이유, 계획과 가능성을 가늠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의 행동을 지탱하는 삶의 원리와 방법, 원칙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탄식이 절로 나온다.”

노부나가는 살아있을 때도 죽은 후에도 이해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천재이기 때문이라 흔히 말해진다. 천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한다. 자신이 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을 천재는 견디지 못한다.

노부나가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신들을 불신하고 경멸햇다. 노부나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그에 못지 않았다. 노부나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두려워 하거나 멍청이라 치부하는 둘 중 하나엿다. 어린 시절 그의 별명은 ‘오와리의 멍청이’였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는 밝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해받지 못했기에 그는 말이 없을 수 밖에 없엇다.

그러나 저자는 노부나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이상의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히데요시의 매력이 현실성에 있다면 노부나가의 매력은 비현실성에 있다. 그에게는 본보기가 없었다. 그의 비현실성을 이상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이상은 항상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부정한다.”

또다른 천재였던 나폴레옹은 천재를 이렇게 정의한다. “전술을 짤 때에는 모든 기회를 잘 계산해야 한다. 우연조차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고려해야 한다. 결코 실수해서는 안도니다. 소수점 이하의 작은 차이로도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천재는 객관적 판단력과 빠른 두뇌 회전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창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객관적 판단과 빠른 두뇌회전력이 필요하며 그중에서도 임기응변 능력이 단연 으뜸인 까닭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임기응변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사람에게 신기해 보이는 우연도 천재에게는 현실일 뿐이다.”

저자는 노부나가의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능력이었다고 그 능력이 노부나가의 비현실성이었다고 말한다.

나폴레옹처럼 노부나가의 전술은 새로웠고 상식을 뒤엎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의 가신들은 그를 불신했다. 아버지의 사후 가신들이 노부나가 대신 그의 동생을 옹립하려 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 가신들과 10여년간 내전을 치루어야 했다.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자는 필요없다. 이유 불문하고 오직 나를 믿는 자만 내 뒤를 따르라!’ 선두를 달리는 노부나가만이 상징이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따라올 병사들을 조직하고 훈련했다. 인간은 힘을 얻기 위해 일족이나 주변 인물을 포섭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을 적대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반감시켯다. 다시 말해 자신을 깍아내린 것이다. 노부나가는 다른 사람들의 힘을 철저하게 부정햇다. 나폴레옹은 힘이 곧 진실이라 했다. 노부나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이 가진 본연의 힘을 되찾으려 애썼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을 사람들을 끌어안아 봐야 그것을 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말을 믿을 사람들만으로 조직을 꾸렸다. “노부나가는 자기 삶의 원리를 부정하거나 모욕하는 자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설사 피를 나눈 형제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엇다. 이것이 노부나가 삶의 신조엿다.” 집안싸움을 하던 시절 그의 병력은 고작 700명이었다. 가신들이 가진 병력보다도 턱 없이 작앗다. 그러나 그는 그 병력으로도 언제나 이겼다. “나중에 노부나가의 병사들에게 그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한 인간의 말이 이렇게 절대적인 힘을 지닌 예를 노부나가 외에는 찾아볼 수없다 노부나가의 촌철살인하는 한마디는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이는 그와 함께 운명을 같이한 병사 700~800명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노부나가는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관철시켰고 병사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의 말이 곧 법임을 가슴 깊이 새겼다.”

노부나가에 대한 절대적 신뢰는 행동과 결과엿다. 그는 항상 선봉에 서서 돌격했고 말을 하느니 행동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는 승리라는 결과로 자신을 증명했다. 저자는 그런 노부나가를 ‘강직함’이란 말로 정리한다. “강직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위엄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눈빛으로 나폴레옹의 강직함을 느꼈으며 노부나가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강직함만이 인간의 정신을 이끌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노부나가는 강했다.”

노부나가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그와 같은 사람은 적어도 일본사에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노부나가가 살았던 시대 때문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센고쿠 시대의 일본인은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요컨대 개개인이 힘과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뮈든 도전하고 실험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형 또는 새로운 삶의 지평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가공할 에너지가 분출된 시대기도 하다. 사람들은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당시 일본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기 전이므로 본보기로 삼을 견본이 없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센고쿠 시대를 일컬어 ‘문명의 대경험’이라고 했다. 일본의 문명은 센고쿠 시대를 겪으며 밑바닥부터 개조되었다. 그 누구도 미래를 확실하게 장담할 수 없었으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의식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불확실한 시대였다.”

저자가 노부나가와 비교하는 나폴레옹 역시 그런 시대의 자식이다. 그런 시대였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천재가 나타날 수 있었고 울지 않는 새는 죽이고 우는 새로 바꿀 수 있엇다. 노부나가가 울게 하려던 새는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울지 않았고 노부나가는 그 일본을 죽이고 새로운 일본을 창조했다. 저자는 노부나가가 일본을 창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천하’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

“신겐은 가문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사람은 돌담, 사람은 성’이라는 말을 남몄다. 이는 그의 가치관을 잘 반영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과 자신을 중십ㅁ으로 한 국토의 번영과 영토 확대를 위해 전쟁을 치렀다. 즉 그의 전쟁원리는 일족의 번영과 확대에 있었다.

이와 달리 노부나가는 계속해서 본거지를 새로운 곳으로 옮겼다. 이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과 자기 가문을 부정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천하’ 또는 ‘천하포무’라는 사상은 자기 가문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이와 달리 신겐에게는 가문을 부정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가 과연 천하포무의 뜻을 품었을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주변의 작은 분국을 흡수하여 자기 영토를 넓히는데 혈안이었다. 그들에게는 천하라는 개념이 없었다ㅓ. 설사 그들의 손에 천하를 쥐어준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을 것이다. 천하를 대상으로 자아를 확대,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센고쿠 시대를 이끌어갈 참신한 사상이며 현실적인 이념이지만 굳이 모든 것을 걸면서까지 천하를 향해 질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노부나가는 전쟁의 천재였다. 그러나 센코쿠 시대에 그만 전쟁의 천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처럼 천하를, 일본을 무대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그들이 노부나가에게 이길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라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노부나가의 군대는 노부나가의 ‘천하’라는 비전에 이끌렸기에 천하제일의 군대가 될 수 있었지만 노부나가의 경쟁자들은 단지 자신의 가문을 위한다는 것 이상을 제시하지 않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노부나가는 센코쿠 시대의 해방자였다. 천하포무는 정의와 불의의 관념을 타파하는데서 시작된다. 노부나가는 기묘한 원석을 자기 내부에서 꺼내어 보여주었다. 반노부나가 동맹군은 특권을 유지 강화하려는 자와 빼앗긴 특구너을 회복하려는 자,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려는 자 등 서로 목적이 다른 무리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구심점은 물론이고 어떠한 이상도 없었다. 이와 달리 노부나가군에게는 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노부나가라는 하나의 이상이 존재했으며 이것이 통일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시대의 해방자가 되려는 노부나가를 히데요시는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노부나가 군의 대다수가 그렇듯 “히데요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의 전통적 질서와 계층을 무시한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이 있었ㅎ기 때문이다.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이야말로 홀로 앞장서서 새롭게 개척하려는 세계이며 그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새로운 세계의 창조영역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자기장은 노부나가 독재 아래 있는 일종의 공화제라는 느낌을 준다. 즉 천하포무는 노부나가라는 자기장의 천하제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 자기장은 노부나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히데요시는 노부나가를 대신해 그 자기장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노부나가 덕분에 한낱 하급무사 출신에 불과했던 자신이 자유를 얻어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으므로 히데요시도 노부나가만큼은 진심을 다해 섬겼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 군에 들어가면 자기도 해방되어 좀 더 새로운 힘을 발휘할 수 잇다고 생각했다. 이에야스 시대에 넓은 소유지를 확보한 다이묘 대부분이 노부나가 밑에서 입신양명의 뜻을 이룬 자들이다. 그들의 으뜸이었던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자로서의 노부나가와 계승자로서의 히데요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다. 노부나가는 산업, 교통, 유통, 무역의 진흥과 정신세계의 자유를 목표로 일관된 정책을 펼쳤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부나가의 머릿속에 새롭고 바람직한 일본의 모습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이다. 이것을 실현하려고 노부나가는 끊임없이 노력햇다. 그가 말하는 천하포무는 단순한 천하통일이 아니라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상없이는 천하통일도 무의미하다. 이는 훗날 모모하고 터무니없는 조선출병을 단행한 히데요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히데요시에게는 정복원리와 해방에 대한 어떤 이상과 기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해받지 못하는 것은 노부나가의 운명이었다. “노부나가에게는 전쟁과 평화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오로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러기 위해 때로는 전쟁이 불가피했으며 때로는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노부나가의 전쟁은 가문을 번영시키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전쟁은 천하포무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일국을 넘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쇼군이 되어 일본을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다. 명예심을 과시하려는 것도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기가 열어갈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고 그뜻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노부나가는 전쟁으로 변화를 추구했으며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매진했다. 이는 자아의 현실과 시대의 현실, 즉 현재를 철저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노부나가가 꿈꾸는 천하포무였다. 그의 정신세계에서 현재는 항상 새롭게 창조되었다. 노부나가는 천하의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곧바로 질주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를 포함한 그의 부하들은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노부나가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비현실성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노부나가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개방하고 보편화하려는 의도를 바탕으로 무명장수를 등용하고 이제 막 이렁서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쓰나가 히사히데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부나가처럼만 하면 된다는 말이지?’하고 쉽게 생각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쉬운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노부나가만큼 따라가기 힘들고 이해하기 힘든 인물도 없다. 실제로 노부나가를 따라가려다 보면 또 하나의 노부나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부나가를 거울로 삼아 자기 모습을 비춰보게 된다. 다시 말해 노부나가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을 찾아내고 그것에서 노부나가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노부나가가 선두에 서서 미노를 공략할 때까지만 노부나가와 추종자들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 그들은 자기 운명을 노부나가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눈앞에는 천하라는 광대한 무대가 펼쳐졌다. 천하라는 관념은 노부나가의 견해와 대략 일치하므로 각자 원하는 자아상을 노부나가라는 거울에 비춘다. 그런데 이를 통해 노부나가의 그림자를 지우기 시작하여 결국 그와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골은 점점 깊어진다.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독재자의 기질을 드러냈다. 그는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적들은 경멸하고 자기를 추종하는 아군은 신뢰했다. 그런데 아군이라도 자기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노부나가를 대신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접하고 날카로운 투시력과 성찰력을 발휘할 부하가 없었으므로 그는 스스로 독려하며 모든 것을 직접 부딪쳐 깨달음을 얻어야 햇다. 노부나가와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 사이에 침범하기 어려운 고독의 영역이 발생하고 점점 확대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팽이같이 혼자서 빠르게 돌아가는 인간 주변에는 고독의 영역이 필연적으로 형성되는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이야 천하포무라는 노부나가의 구상을 익히 알고 잇으나 당시 사람들에게 노부나가의 싸움은 목적도 끝도 없는 전쟁으로 보엿다.” 그것은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은 전쟁을 좋아하여 복고왕정과 자유주의자들에게 ‘코르시카의 식인귀’란 공격을 받았다. 탈레랑은 나폴레옹이 전쟁의 천재임은 인정하나 정치가나 외교가로서는 낙제생이라고 비평했다. 또 그는 잇달아 승전보를 터뜨리는 나폴레옹에게 진지하게 충고햇다. ‘승전국은 패전국에게 관대한 손길을 보내고 동맹세력의 일원으로 만들어 되풀이되는 패배로 상실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정책을 펼쳐햐 한다.’ 이러한 정책을 실시한 대표적인 인물이 히데요시다. 그러나 노부나가와 나폴레옹은 이 같은 방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로서는 근접하기 어려운 뭔가 다른 계산이 있었다. 융통성 있는 히데요시의 방식이 천하를 통일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나 노부나가가 이루려던 천하포무와 차이가 있다. 노부나가는 밑바닥부터 현실을 변화시켜 세상을 새롭게하고자 했다. 고바야시 히데오의 ‘고흐의 편지’에서 인용해보자.

‘고흐의 머릿속은 무한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자기만의 새로운 양식을 얻으려는 노력으로 늘 복잡했다.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향이었던 모양이다. 잠깐의 휴식도 잠도 허락하지 않고 뭐라 이름을 부여하기 어려운 힘이 그를 지배하며 부추기는 것처럼 보였다.

노부나가의 전쟁은 무한성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며 양식을 얻으려는 노력, 또는 전쟁과 정치의 이음매다. 여기서 양식은 전쟁의 스타일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양식, 평범한 인간의 양식을 탐구하려 했던 것이다. 이 무렵부터 노부나가와 가신들 사이에 미세한 단절이 생긱기 시작했다.

그의 목적은 체제변혁이었다. 그는 현실을 깊이 파헤쳐 요소들로 분해한 뒤 이를 변화시켜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려 했다. 새로운 형태가 어떤 것인지 백성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노부나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부나가에게 자신의 시책을 나폴레옹이나 메이지 신정부의 시책과 대조해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는 누구도 본보기로 삼지 않았다. 끊임없이 현실을 파헤쳐 새로운 현실의 형태를 끌어내려고 했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려고 했으므로 그야말로 독창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있다. 그래서 부하들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인생 오십년
천하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은 것
한 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그 누구인가

노부나가가 부르던 노래이다. 이해받지 못한 주군에 대한 모반이 끊이질 않았다. 자신이 부르던 노래의 50세를 채우지 못한 49세에 노부나가는 총애하던 부하 미쓰히데의 손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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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 길을 잃다 - 대형 개발에 가려진 진실과 실패한 도시 성형의 책임을 묻다
김경민 지음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외젠 앗제는 공공기관이 고객인 상업사진가였다. 그의 일은 어디까지나 고객이 지정한 건축물과 풍경을 찍는 것이었고 그 결과물은 유리원판으로 십여장씩 개인 고객들에게 백여장씩 공공기관에 팔려나갔다. 그가 하는 일은 그와 같은 일을 하던 다른 동료들처럼 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특별햇다.

앗제는 “20세기 사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진가들 자신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영혼이 없는 상업사진이라 치부하기엔 “그의 작품의 아름다움은 당혹스럽다.” 앗제는 기록을 남긴다는 의뢰의 목적대로 파리를 찍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가 찍은 파리는 ‘앗제의 파리’라 불린다. 앗제의 파리는 “동적이며 만져질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앗제의 이미지를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그 안으로 빨려드는지 관찰해보라. 우리는 사진의 공간을 소유하고 이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진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앗제의 사진은 “위안과 놀라움과 감동을 선사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매혹시키는 법은 없다.” 앗제는 무대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만 찍었기 때문이다. 앗제에게 도시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무언가를 소비하며 정신적인 휴식을 찾는 공간”이엇다. 그러나 앗제가 찍은 사진은 그 도시의 드라마 자체가 아닌 드라마의 배경인 미장센이었다. 건물에 사는 사람과 그들의 삶보다는 그 배경인 건물을 찍엇고 사람들이 사고 소비하는 자체보다는 그 대상인 상품들과 그 상품이 놓인 진열장을 찍었다. 무엇이 그를 그런 배경에 몰두하게 했을까?

더군다나 앗제의 사진작업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옛날을 다루는 영화에 보면 커다란 삼각대 위에 올려진 카메라에 고개를 쳐박고 천으로 얼굴까지 가리고 찍는 사진사를 볼 수 있다. 앗제가 들고 다닌 사진기는 그런 사진기엿다. 건물을 찍기 위해선 그런 커다란 사진기가 필요했다. “큼직한 뷰 카메라와 그에 딸린 올망졸망한 가방들을 끌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일이 얼마나 힘든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예순여덞이란 나이까지 앗제가 헤라클레스 같은 괴력을 내야 했던 이유는 아마도 소유욕이었을 것이다.

“’저는 옛 파리(Vieux Paris)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소유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옛 파리의 모습은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사실과 다르다. 앗제의 파리는 보행자. 노동자 계급, 좁고 지저분한 안뜰을 감추고 있는 전기 산업화 단계의 별볼 일 없고 미천한 파리엿다 ‘다른 사람들’의 파리가 아니더라도 그저 보통 사람들의 파리일 뿐이다.” (이상 Gerry Badger ‘외젠 앗제’에서 인용, 요약)

그가 찍은 보통 사람들의 파리는 “오스망과 황제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든 간에 ‘위험한 계급’과 불건전한 가옥과 산업을 도심에서 추방하는 일”(데이비드 하비)때문에 밀려나 사라져 버릴 운명에 놓인 것들이었다. 오스망이 만든 “널찍한 거리를 거니는 부르주아의 파리나 부르봉 왕조의 파리는 앗제의 진정한 관심 밖이었고 그의 거대한 계획과는 무관햇다.”

“오스망의 업적은 근대 도시계획의 위대한 전설이 되었다. 황제의 지원을 업고 자본과 노동의 잉여를 광대한 공공사업계획으로 흡수하는 수단으로 무장한 그는 수도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공간적 틀을 재조직할 일관성 있는 계획을 고안했다. 오스망은 ‘다양한 지역적 상황을 충분히 적절하게 조화시킬 수 잇도록 상세하면서도 전반적인 계획’을 추구햇다. 도시공간은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되고 다루어지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한다. 도시공간의 전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때문에 오스망은 대도시 지역 내 공간질서의 합리적 진화를 위협하는 불균등한 개발이 진행되던 근교를 병합하기 위해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1860년대에 그는 끝내 승리했다.” (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의 수도’)오스망의 승리 덕분에 우리는 모두가 아름답다 말하는 오늘날의 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

“발터 벤야민에서 미셸 푸코에 이르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오스만의 도시 계획이 프랑스혁명 이후 폭동과 소요의 중심이 된 파리를 권력의 입장에서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한다. 거미줄같이 복잡한 골목길로 흩어지는 군중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미로를 없애고 대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겉으로 내세운 대로 건설의 목표는 비좁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한 파리를 개방적이고 위생적이고 편리한 도시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파리 시민들에 대한 일상적 감시의 효율을 높이고 신속하고 용이하게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였다는 것이다. 오스만 이전의 ‘오래된 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기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다양한 모습의 매력적 파리를 파괴했고 그 결과 파리는 영혼이 없는 도시가 되었다고 한탄한다.” (정수복)

앗제에게 사진은 권력에 밀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파리의 영혼에 대한, 상상적 소유였다. “그것은 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자’하는 개인적인 추구이고 두번째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정치적인 소유, 즉 자기가 속한 계급에게 프랑스의 문화를 되찾아 주고자 공공 문서 보관소에 조심스럽게 자기만의 소리를 불어넣는 행위를 가리켰다. 그러므로 앗제의 광범위한 테마는 여러 평자들이 결론지었듯이 단지 프랑스 문화유산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것이 지닌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뛰어난 감수성과 감각있는 눈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다. 앗제의 작품이 지니는 정령숭배적 경향이나 우울증, 사랑스러움 등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해줄 인물, 그의 삶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다. 이점이 앗제가 지닌 진정한 가치이며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시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사진작업을 해온 모든 작가들에게 그가 남긴 유산이다.” (Gerry Badger)

그러나 앗제의 유산이, 앗제의 파리가, 무엇이었건 역사의 승자는 오스망의 유산이고 오스망의 파리였으며 그의 파리는 이후 전설이 되어 모든 도시계획의 모범이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영혼이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오스망과 앗제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오스망에게 파리는 제국의 수도다워야 했다. 그런 파리에서 “저소득층이 모여사는 슬럼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유행했던 도시미화운동은 오스망의 모범생이었다.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도시미화운동은 “열악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중산층 이상의 계층은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불결해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고 유럽도시가 주는 낭만이 미국에도 필요하다는 유럽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유행했던 사회다윈주의는 “도덕의식과 시민의식이 부족한 열등한 저소득층 때문에 도시가 열악해졌다”고 암시햇다. “도시는 윤리적 질서가 있어야 하고” 시민은 마땅히 지역사회의 윤리적 가치를 공유하고 “시민의식과 시민문화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의 주거환경을 아름답게 바꾼다면 저소득층 주민들을 계도할 수 있다고 보았고 아름다운 도시건설에 매진했다. 도시는 아름다운 환경과 함께 그 기능이 원활해야 긍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한다고 믿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선 “도심에 사는 저소득층 주거지”는 사라져야 햇다. 그렇게 사라진 공간에 “그들은 넓은 오픈 스페이스와 고대로마식 기념물인 거대한 건물, 아름다운 거리 조형물, 공원”을 새웠다. 오늘날 센트럴 파크를 중심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뉴욕은 그때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뉴욕은 ‘그들만의 도시’가 되었다.

“런던과 파리에 공원이 건설되자 뉴욕에서도 거대한 공원이 바람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고 아직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넓은 지역을 공원용으로 남겨두었다. 센트럴 파크가 건설되어 모양새를 갖추고 매력적인 모습을 띠게 되자 이 공원은 자석처럼 주택가를 북쪽으로 끌어들이는데 일조했다. 뉴욕의 부자들이 센트럴 파크 근처에 정착할 무렵 그들은 정말 굉장한 부를 자랑햇다. 센트럴 파크는 위치상의 이유로 인해 초기에는 주로 부자들만 찾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부자들의 핍스 애버뉴로의 이주가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은 핍스 애비뉴의 공원 쪽에 저택을 짓기 시작햇다. 많은 수의 대부호들이 이곳에 와 살면서 다른 지역에서 축적한 재산을 향유했다. 뉴욕의 오페라하우스에 박스석을 보유하는 것, 센트럴 파크에서 타고 다닐 마차를 소유하는 것, 핍스 애비뉴에 저택을 가지는 것 그리고 뉴포트에 루이 16세 시대 건축양식의 휴일용 별장을 두는 것이 네바다에서 온 은광왕들과 여왕들, 피츠버그에서 온 철강황, 시카고에서 온 곡물왕,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철도왕, 클리블랜드에서 온 석유왕들이 지닌 야망의 절정이었다.” (마크 기로워드)

아름다움은 공짜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대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 오스망의 파리는 아름답지만 프랑스인들은 그 아름다움의 대가를 지금도 치뤄야 한다.

“파리의 거리를 따라 나란히 서 잇는 그 많은 5층짜리 건물들이 선사하는 기적적인 통일감을 즐기는가? 그것 역시 오스망의 작품이다. 오페라 거리는 어떠한가?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의 그 모든 화려함 아래에는 깨끗한 물을 쓰레기로부터 분리해주는 하수시스템이 놓여있다. 이 역시도 오스망 덕분에 생긴 것이다. 1853년부터 1870년까지 오스망은 파리에 있는 건물 절반 이상을 없앴다. 오스망은 사실상 도시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파괴햇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사람들에게는 건물이 필요하다. 도시는 건품을 새로 짓거나 증축함으로써 성장하고 도시가 건물을 짖지 않을 때 사람들은 도시의 인접성이란 마술을 경험하는 것을 방해받는다. 도시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도시의 일부를 파괴해야 한다. 파리를 보존하기 위한 오스망의 현대적 욕구는 과거 적정한 돈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었던 파리를 오늘날 부자들만 즐길 수 있는 부티크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파리의 역사는 그곳에서 무일푼으로 성장기를 보냈던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가득하지만 오늘날 어떤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 중심부에서의 생활을 감당할 수있는가? 장소가 건설활동을 과도하게 제한할 경우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물가는 꾸준히 오르는 스테그네이션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도시의 역사가 도시를 구속한다면 도시는 그 가장 위대한 자산인 ‘개발능력’을 잃게된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몰론 오스망의 제자들은 역사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제자들은 오스망에게서 아름다움이란 가치만 빌렸고 오스망의 수제자였던 미국의 도시미화운동은 “태평양을 건너 인도와 아프리카의 영국식민지까지 전해졌다.” 그리고 “20세기 중반에는 파시즘 정권의 도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무솔리니 치하의 로마 그리고 나치 정권의 베를린 개조계획은 기본적으로 도시미화운동을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파시즘과 오스망(그리고 그 제자인 도시미화운동)은 같은 시선으로 공간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시선이라는.

그러나 권력의 시선으로 재편된 공간의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시각효과”일뿐이엇다.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는 영혼이 빠져있었고 외모만 아름다운 성형미인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없는 공간의 성형으로 영혼도 치유한다는 전제가 잘못된 것이다.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가 아름다워졌다해도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무시되고 도시개발의 피해가 저소득층에 집중되었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매력있는 세계 도시 서울
한강을 서울의 도시 브랜드로
한강을 도시발전 전략의 거점으로 서울의 도시혁신촉진
고품격 시민 문화 창조
상징적 건축물 조성을 통한 서울의 이미지 제고
밤이 더 아름다운 한강 야경 연출
모뉴먼트”
서울시의 ‘한강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의 키워드들이다. 어딘가 많이 들어본 것이다. 60년대 이후 미국에선 포기한 도시미화운동의 키워드를 반복하고 잇다. “도시미화운동 방식이 태동한 역사적 배경과 그 진행 방식이 21세기 서울에서 재현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강공원을 단장하고 접근성을 높여 시민들에게 편의를 제공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8개 정비 구역이 기본적으로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으나 주민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서울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는 점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재개발과 달리 서울시가 배제하려는 사람은 저소득층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8개의 정비구역은 압구정동과 동부이촌동, 반포의 고소득층 주거지역에서 일반 서민들이 사는 지역까지 모두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서울시는 일방적인 계획안을 발표했고 주민들의 반발은 거세다. 2009년 9월 강남구청이 압구정 주민 6천명을 대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98%가 반대했다. 가끔 일간지에 압구정 주민들이 ‘공공성’ 회복에 반대한다는 뉘앙스의 기사들이 실린다. 여기서 무엇이 ‘공공성’이냐는 것이다. 기존 아파트를 철거하고 오픈 스페이스와 공원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공공성’이 될 수는 없다. 오픈 스페이스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거주민일 것이다. 그들은 본인이 거주하는 초고층 주상복합건물에서 내려다보는 한강의 절경과 공원의 쾌적함을 매순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픈 스페이스를 즐기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아파트를 구입해서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제값을 지불하고 즐기기 때문에 진정한 공익은 간접적인 수혜자들이” 가끔 지나며 느끼는 심리적 안정감과 쾌적함이 전부이다. “오픈 스페이스를 늘려 공공성이 획적으로 증대될 거라는 서울시의 주장만큼 공공성의 양이 엄청나게 증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라는 이름 뒤에 제값을 지불하고 사는 중산층 이상의 고소득층이 공공성의 혜택을 받는다면 이것이 과연 얼마나 공익일 수 있는가”

강북 뉴타운 계획에서 서울시가 말하는 공공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울시는 ‘강북에 고품격 주거환경과 교육여건을 조성하여 지역간 격차를 해소하고 삶의 질을 개선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뉴타운을 만들면 주민의 소득이 올라가는가? 계획의 비밀은 추방이다.

“시범지구와 제2차 뉴타운지구의 주민구성을 보면 세입자가 전체의 72.53%에 이른다. 특히 영등포 지역 뉴타운은 전체 세대의 86.8%가 세입지다. 뉴타운지구 주민의 월평균 가구 소득은 187만원으로 서울시 전체 평균 303만원의 2/3 수준이며 세입자 가구 중 순자산 4000만원 이하는 66.6%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저소득층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소득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오르지 않는 이상 아파트 입주자격을 얻는다 한들 입주비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임대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함에도 비중은 17%를 넘지 않는다. 오히려 임대아파트가 없는 지역조차 있다.

기존 거주민의 낮은 소득수준과 신규공급된 아파트가 중대형 위주인 점을 볼 때 기존 거주민이 재정착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2007년 자료에 의하면 뉴타운 재정착률은 17.1%에 머문다. 따라서 지역격차해소라는 목표는 기존주민들의 소득향상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층 주민들을 중산층으로 바꿔치기함으로써 격차해소를 줄이는 것이다.

뉴타운 정책의 목적이 기존 거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음을 밝혔는데도 현실에서는 기존 저소득층의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중산층타운으로 변모하고 잇다. 구청 입장에서는 중산층이 들어옴으로써 주택가격이 상승하고 주변상권이 활성화되어 자신의 수입인 세금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에 내심 이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의 22개구가 뉴타운을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누구를 위한 고품격이며 누구의 삶의 질인가? 한세대 전에 끝난 냉전을 우리는 아직도 살고 있듯이 우리는 100년전의 도시계획 패러다임에 따라 아직도 살고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도심재개발과 도심을 관통하는 고속도로 건설은 대규모 강제이주를 동반햇다. 피해자의 상당수는 흑인을 비롯한 저소득층이었다. 집에서 쫓겨난 그들을 받아줄 정부의 임대 아파트 수는 매우 한정되어서 입주가 아주 힘들었다. 그야말로 흑인 저소특층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엇다. 언론사의 보도는 재개발의 부정적인 측면에 비판적이라기보다 재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에게 동조적이었다. 이는 저소득층 주민들의 대규모 이전을 전제로 한다는 점과 임대료 상승의 폐단으로 저소득층이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서울에서 진행되는 뉴타운 개발의 폐해와 비슷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도시계획은 달라졋다. “미국의 주택 재개발의 과거 모습은 현재의 우리와 많이 닮았지만 현재 모습은 매우 달흐다. 단적인 예는 공공조직이 주민의 이익을 대변하여 공공 디벨로퍼로서 도시재개발 사업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국의 공공기관은 주민을 대변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에게 주민은 계획을 통보해주어야 하고 단지 설명해주어야 하고 동의만 해주면 되는 수동적인, 권리가 없는 ‘대상’일 뿐이다.

“도시개발구역이 지정되기 2년 전에 일방적으로 서부이촌동 아파트를 편입한 계획안을 발표한 것은 지역 커뮤니티의 이익을 수호하는게 아니라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도시계획 절차상의 문제 되에도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개발사업자를 선정하는 절차를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하는 절차가 없다는 걸 알게된다.

우리나라와 비교해 미국은 개발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놓았다. 뉴욕시의 경우 개발행위는 세단계를 거치는데 첫째 단계인 지역주민협의체에서 개발에 대한 승인을 얻어야 시 의회와 시장의 승인을 얻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따라서 뉴욕의 디벨로퍼들은 지역주민협의체의 승인을 얻기 위해서 지역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러면 한국에선 어떤가? “공무원들을 사석에서 만나 개발사업활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이 환지방식(개발 후 토지를 주는 방식) 대신 수용방식(돈을 주고 주민을 내보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개발방식이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역주민이 개발과정에 개입하면 번거롭기 때문에 주민의 참여를 막아버린다는 것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목소리를 내는 지역 커뮤니티가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지역 커뮤니티는 말 그대로 지역주민들의 모임이다. 다만 미국의 지역 커뮤니티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지역 커뮤니티에 많은 지역 주민이 참여하며 교육, 범죄, 경제활동, 그 밖의 사회 이슈 등 지역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 따라서 매우 자연스럽게 지역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 리더가 된다. 또한 이들은 부동산 개발이라는 특수한 목적으로 모인 게 아니어서 우리나라의 주택조합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의 조합은 주택개발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위해 뭉친 것이지 자녀들의 교육이나 지역의 경제 활동 활성화, 범죄 같은 이슈에 대해 묻고 토론하는 집단이 아니다. 어찌보면 미국에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이유는 미국의 장점인 민주주의의 역사에 뿌리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특정 이슈에 대해 주민들이 의견을 교류함녀서 타협점을 찾고 합리적 선택을 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된 것이다.”

한국 공무원의 눈에 주민은 ‘대상’일 뿐인 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시민이 시민인 이유는 그들이 집단을 이룰 때이다. 그런 시민이 없을 때 국가의 눈에는 사람이란 없다. 마음대로 움직일 숫자만 있다. ‘사람들이 없는 도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도시의 영혼은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 모인 커뮤니티이다. 그러나 서울에는 영혼이 있는가? 아니 있었던 적이 잇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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