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디케이드 -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년이 시작되었다
조지 프리드먼 지음, 김홍래 옮김, 손민중 감수 / 쌤앤파커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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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미국 대통령을 위한 군주론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렇듯이 이책은 통치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말하려 한다. ‘군주론은 권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행사하는가를 말한다. 당연히 그 독자는 권력을 가진 군주이다. 이책의 독자 역시 권력을 가진 자, 그중에서도 미국의 대통령을 독자로 한다. 그러나 그 독자의 성격은 미묘하게 다르다. 이책의 저자는 미국 내의 권력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제국의 권력을 논한다.

 

미국은 내가 저력(deep force)라 부르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저력이란 최고의 균형잡힌 힘이 되어야 한다. 균형잡힌 힘이란 경제력과 군사력, 정치력이 적절하게 상호보완적 총합을 이룬다는 의미다. 들어 유럽은 경제력은 있지만 군사력은 미약하고 토대도 얕다. 튼튼한 뿌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균형잡힌 힘을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미 구소련이 붕괴된 이후 세계적 패권 다툼에서 미국과 경쟁할 국가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미국은 이런 상태를 좋아하든 말든 그리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냉전을 극복하고 국제적인 패권국가로 떠오른 동시에 세계적인 제국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로마제국이나 대영제국과 달리 미국의 지배구조의 비공식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국은 대양을 통제하며 경제는 전 세계총생산의 25%를 차지한다. 미국인들이 아이팟이나 새로운 식도락거리를 만들어내면 중국과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공장과 농장은 체계를 개편하여 새로운 주문을 충족시킨다. 이는 19세기 유럽열강들이 중국을 지배하던 수법이다. 그들은 절대로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으며 공식과 비공식의 구분에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중국을 개조하고 약탈했다. 미국은 상대국가에게 이익을 줄 때나 위협할 때만 한 발짝 움직인다. 이런 힘은 큰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지만 본성적으로 적댁감을 불러일으킨다. 미국은 상업공화국이다. 이는 미국이 교역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엄청난 부는 자원과 미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세계와 단절된다면 그것조차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이 규모와 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자신이 제국이라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라 저자는 말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제국의 전략은 힘의 균형과 divide and rule로 정리된다. “다음 10년을 위한 미국의 정책에 필수적인 항목들 중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균형 잡힌 세계전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제국과 100년전 대영제국의 사례를 통해 배운 것처럼 말이다. 이들 구세대 제국주의자들은 주력부대를 동원해 세계를 지배하지 않았다(여기서 저자는 부시 2세의 거창한 실패를 암시한다). 대신 여러 국가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상황을 조성한 뒤, 어떤 국가가 저항을 선동할 경우 주변의 다른 국가들을 통해 그 국가를 상대했다.”

 

패권국의 지상목표는 자신의 패권을 위협할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제국의 패권 역시 경쟁자가 없어야 한다. 자신과 대등한(세계적 차원은 아니더라도 지정학적 요충지에 한정된다 하더라도) 상대는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가 이책에서 제안하는 전략은 이렇다. “다음 10년 동안 미국은 이런 시도들 (저자는 부시의 헛짓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발생한 고갈과 혼란에서 회볷하는 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그 첫번째 단계는 지역적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는 지중해부터 힌두쿠시 산맥에 걸쳐 현재 미군이 개입하고 있는 주요 지역들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지역에는 세 개의 고유한 지역적 힘의 균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랍-이스라엘, 인도-파키스탄, 이란-이라크 사이의 균형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균형은 모두 무너졌다. 이스라엘이 균형의 한 축이 된 것은 저자가 말하는 힘의 균형 전략의 전형적인 예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유대인의 로비 라든가 어떤 음모 때문이 아니라 제국의 본능때문이었다. 냉전시절 중동에서 소련과 힘의 균형을 만들어야 할 때 불행히도 이집트, 시리아 등 지역의 핵심국가들은 소련을 선택했다. 미국으로선 이스라엘을 키워 균형을 맞추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웃의 아랍국가들이 제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며 심지어는 그 지역에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저자는 이제 이스라엘은 미국의 짐일 뿐이라 말한다. 일찌감치 손을 썼어야 하는데 내버려둔 것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과 거리를 둘 때이다. 나머지 두 균형 역시 미국 때문에 무너졌다.

 

파키스탄은 아프카니스탄 전쟁 덕분에 약화되었다.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이 사실은 하나의 실체이며 양측이 다양한 인종과 부족을 공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치적 국경선은 벌 의미가 없다는 좀더 근본적인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필연적으로 파키스탄으로 확대되어 내부 갈등을 촉진한다. 이는 파키스탄을 약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알카에다와의 전투를 돕고 아프카니스탄에 주둔한 미군에게 협조하라는 압박을 받은 파키스탄이 얼마나 분열되느냐에 따라 인도와의 대치상태가 붕괴되고 그 지역에서 인도가 핵심새력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최우선 전략은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파키스탅을 만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라크와 이란의 균형 역시 미국 때문에 무너졌다. “그 지역에서 오직 두 나라만이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강력한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그 두 나라는 바로 이란과 이라크다.” 그러나 이라크는 미국이 무너뜨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이란을 인정하라고 제안한다.

 

이란은 이미 지역 내에서 지배적 세력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란이 이웃에게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막을 필요가 없다. 이란의 영향력이 보여줄 양상들은 지역적 계획에 대한 재정적 참여, OPEC의 원유생산량 쿼터 설정,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의 내정 등과 같은 범위 안에 있다. 약간의 절제만 보여준다면 이란은 자신들의 원유가 시장에 도달하는 것을 보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우월한 위치와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다.”

 

이란은 몇천년전의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아직도 자랑한다. 그런 나라가 실제 원하는 것은 그 지역에서 목에 힘을 주는 것 정도이니 그냥 인정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란은 서남아시아란 더 큰 체스판에서 다른 말을 사용해 충분히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터키가 그 답이다.

 

이란에 대한 평형추 역할을 감당하고 지역 내에서 잠재적인 장기적 세력이 될 역량을 갖춘 유일한 국가는 터키다. 그리고 터키는 미국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앞으로 10년 내에 그 지위에 도달하게 된다. 아랍 세계는 시아파 이란을 상대하는 데 필요한 대변자를 지속적으로 물색하며, 오스만제국 시절 터키가 아랍을 지배했던 쓰라린 역사에도 불구하고 수니파 터키는 최고의 후보자가 된다.” 이란과 터키의 대립은 오스만제국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새삼스러운 견해는 아니다.

 

미국과 장기적인 협력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바로 터키다. 게다가 그들은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에게 매우 가치있는 동맹자가 될 수 있다. 이는 러시아의 욕망에 대한 차단막 역할을 수행고 있는 발칸반도와 카프카스 지역에서 특히 터키의 엯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책의 내용이 감이 잡힐 것이다. 제국황제의 논리이다. 그러나 이책은 황제만 봐야하는 것은 아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어떤지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의 생각은 황제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위치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보기에는 충분한 책이다. 예를 들어 부시 2세의 이해할 수 없는 정책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저자의 해석을 들어보자.

 

흔히 레이건과 부시 2세를 극단주의자라 생각한다. 그의 정책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관념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시의 감세정책이라든가 재정팽창정책 등은 (레이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공급주의 경제학의 극단론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지 W 부시의 논리는 지정학과 미국 내부의 정치에서 출발햇다. 그는 이슬람 전사들과 전쟁 중이었다. 그러나 군사개입에 따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려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경제를 자극하여 조세 수입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원했다. 이론에 따르면 군사비 지출과 세금감면, 낮은 금리가 어우러질 경우 경제가 팽창하여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충분한 정도로 세수가 증대된다. 만약 이런 공급 측면에서의 도박이 실패하더라도 부시는 2004년 대통령 선거 이전에 감행했던 증세가 정치적 기반을 약화하지 않은데 따른 이점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또 그는 선거가 끝나고 전쟁이 종결됐을 때 자신이 경제적 불균형을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전쟁이 얼마나 오래 갈 것인지 얼마나 격렬하게 전개될지를 지독할 정도로 과소평가했던 거시다. 그 결과 부시와 연준은 경제적 불균형을 바로잡는 문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세웠던 경제정책에 계속 발목 잡힌 채 대통령 직무수행에 제약을 받았다.’

 

단무지로 통했던 레이건이 사실은 똑똑했던 것처럼 부시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러면 애초에 왜 전쟁을 시작했는가? 역시 지정학이 문제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빈 라덴의 목표는 이슬람권을 하나의 신정국가로 되돌리는 것이엇다. 그러기 위해선 기존의 체제를 흔들어야 하는데 빈 라덴의 분석에 따르면 이슬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에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목표들을 달성하기에는 그들의 지지가 너무 미온적이고 불충분했다.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적어도 한 곳,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수의 중요한 이슬람 국가에서 폭동을 유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의 대중들이 그들의 정부를 압도적인 힘과 확고한 장악력을 가진 존재로 보는 한, 그것은 실현불가능했다.”

 

그래서는 그는 미국을 흔들기로 햇다. 그가 보기에 이슬람권 정부의 힘은 미국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그 정부들은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고 빈 라덴의 바람은 미국조차도 취약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부가 강력하다고 생각하는 이슬람인들의 인식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문제는 9/11이 이슬람의 심리를 겨냥한 것이엇지만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미국인들의 심리였단 것이다. 실질적으로 알카에다는 미국에게 전략적 위협이 될 수 없다. 그냥 귀찮은 모기일 뿐이다. 그러나 미국인들 사이에 울려퍼진 심리적 경보음으로 인해 미국 정부가 당면한 전략적문제는 복잡해졋다. 침투력이 강하고 뿌리 깊은 불안감이 발생했을 때 정부는 반드시 이에 대처해야 하며 최소한 결정적 행동을 취하는 흉내라도 내야한다. 이 시기에 부시는 미국의 번영에 관한 국민적 자신감의 위기상태를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알카에다는 9/11 테러가 이슬람 세계에 미칠 영향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이 부시에게 가할 정치적 압박을 고려하지 못하는 착오를 저질렀다그 결과는 별 쓸모도 없는 땅인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재빠른 공격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성공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완벽한 실패이다. 그럼 왜 부시는 그런 재앙 속으로 걸어들어갔는가? 저자는 중동의 지정학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하려면 아랍 동맹국들의 협조가 필요햇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심혈을 다해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이 좀 더 적극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도록 압박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중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힘을 행사하는 전략을 구사하려 했다. 이것이 이라크 침공에 깔린 논리다. 군사적 행동은 즉각적인 결과를 초래하여 새로운 전략적 현실을 창조한다. 이런 현실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협하여 자국의 유전지대로부터 며칠 거리에 미군 기갑부대를 배치하는 상황으로 이어졋다. 그럼으로써 미국은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시리아, 터키, 이란과 접해있으며 중동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국가인 이라크를 장악햇다. 이라크를 통제하게 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단기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애초의 의도는 외부로 힘을 과시하기 위한 기지로서 이라크를 이용하는 것이었음에도 보유한 모든 전력을 이라크 내부에 집중해야만 햇다. 점령의 실패는 전쟁의 성격마저 바꿨다. 전쟁의 목적이 이라크 자체로 바뀌었으며 궁극적인 목표 역시 중동지역에 새로운 전략적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적절한 시기에 미군을 철수하는 것이 되었다.”

 

재미있다. 그러나 저자의 분석이 옳은가? 그건 따져봐야 한다. 저자의 주장이 맞으려면 미국의 경제력이 군사력을 떠받칠 정도로 미래에도 튼튼해야만 한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의 헤게모니의 끝이라 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의견은 틀렸다고 본다.

 

대공황 이래로 이처럼 파멸적인 사태는 없었다는 식의 말이 자주 반복된다. 그러나 이는 3중으로 틀린 말이다. 2차 대전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붕괴가 세 번이나 더 있었다. 이것은 다음 10년을 예측하는데 중요하다. 왜냐하면 2008년의 금융위기와 비교할만한 대상이 대공황뿐이라면 미국이 가진 힘에 대한 나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이런 종류의 위기가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었다면 대공황과 비교하려는 주장이 지닌 의미는 줄어들 것이며 2008년의 금유위기가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게 된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힘이 쇠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정도 규모의 힘은 순식간에 붕괴되지 않는다. 한때 거대국가였던 독일과 일본, 프랑스, 영국의 국력이 쇠퇴한 것은 부채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으로 경제가 황폐해지고 전쟁이 남긴 부산물 중 하나인 부채가 양산됐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오일쇼크 직후 70년대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다. 저자의 입장은 이번 위기는 그냥 덩치만 큰 평범한 경제위기일 뿐이란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번 위기가 헤게모니의 붕괴로 해석되는 이유는 위기 자체의 규모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징후이기 때문이다.

 

헤게모니 붕괴의 조짐은 저자가 언급한 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The great stagflation of the 1970s was deeply affected by the parallel crisisi of American hegemony which ensued from the escalation of the Vietnam War and eventual US defeat. As for the Reagan-Thatcher neo-liberal counterrevolution, it was not just, or even primarily, a response to the unsolved crisis of profitability but also-and especially-a response to the deepening crisis of hegemony” (Arrighi 2007)

 

신자유주의가 왜 70년대에 등장했는가에 대한 좌파의 설명은 이윤율저하 경향에 대한 자본의 반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기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적이엇다고 말한다. 아리기는 50-60년대의 황금기는 군사 케인즈주의 때문이엇다고 본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그 시스템에 과부하를 걸어 무너트렸다. “’Stepped-up Vietnam War spending’ is said to be the reason for the sudden acceleration of price inflation in the US which, between 1965 and 1973, slowed down but did not stop the growth of real wages, This acceleration of inflation, in turn, is held responsible for the weakening of the competitive position of American manufacturers” 베트남 전쟁의 시기는 우연히 이윤율 저하 경향의 시기와 맞물렸고 “the costs of the war not only contributed ro the profit squeeze, but were the most fundamental cause of the collapse fo the Bretton Woods regime of fixed exchange rates and the precipitous devaluation of the US dollar that ensued.” (Arrighi 2007)

 

달러의 평가절하는 이윤율저하 경향의 부담을 경쟁자인 일본과 독일에게 전가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리기는 원래 닉슨 쇼크의 목적은 베트남 전쟁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엇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과거 제국들처럼 미국 역시 전쟁비용의 압박 때문에 헤게모니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At least intially, the liquidation fo the gold-dollar exchange standard did seem to endow the US government with an unprecedented freedom fo action in tapping the resources of the world simply by issuing its own currency.” 그러나 디폴트를 선언하거나 실질적으로 디폴트인 화폐의 평가절하를 시도했던 이전의 제국들처럼 미국 역시 헤게모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고 오히려 헤게모니의 위기를 더 악화시켰을 뿐이다. 1979--82년의 통화주의 반혁명은 바로 이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엿다고 아리기는 본다.

 

영국은 제국을 유지하는 돈과 병력을 모두 인도에서 끌어다 썼다. 해외에 무력투사를 할 때 영국이 동원한 병사도 인도인이엇고 그 투사의 비용도 인도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병력과 자신의 돈으로 제국을 유지했다. 베트남 전쟁은 그런 시스템의 문제를 폭로했다고 아리기는 말한다.

 

1970-82년의 통화주의 반혁명은 바로 그 제국의 비용과 관련된 것이라 아리기는 말한다. “The main reason why the monetarist counterrevolution was so strongly successful in reveresing the decline in US poweer is the it brought about a massive rerouting of global capital flows towards the US and the dollar.” 에드워드 시대 영국의 Belle Epoque는 자본수출 덕분이엇지만 1980년대 이후 미국의 Belle Epoque는 자본수입 덕분이엇다는 말이다. “An escalating foreign debt enabled the US to turn rhe deteriorating crisis of the 1970s into a belle epoque wholly comparable to, and in some respect far more spectaculr, than Britaion’s Edwardian era.”

 

그러나 자본수출의 금융화이든 자본수입의 금융화이든 금융화는 일시적인 해결일 뿐이다. 왜냐하면 금융화는 위기의 압력을 핵심에서 주변으로 전가하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라 아리기는 말한다. “Over time, financial expansions tend to destabilize the existinf order through processes that are as much social and political as they are economic. Economically, they systematically diveret purchasing power from demand-creating investment in commodities (including labor-poweer) to hoarding and speculation, thereby exacerbating realization problems. Politically, they tend to be associated with the emergence of new configurations of poweer, which undermine the capacity of the incumbent hegemonic state to turn to its advantage the system-wide intensification of competition. And socally, the entail the massive redistribution of rewards and social dislocations, which tend to provoke movements of resistance and rebellion among subordinate groups and strata, whose setablished ways of life are coming under attack.”

 

신자유주의 또는 금융화는 헤게모니 위기에 대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그 해법은 언제나 일시적이었고 지속가능하지 않았다고 아리기는 말한다. 그리고 이번 위기는 다시 아리기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엇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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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그 거대한 행보 - 레이 황의 거시중국사
레이 황 지음, 홍광훈. 홍순도 옮김 / 경당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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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를 악인, 유비를 선인으로 말하는 것은 정사의 입장에선 분명 왜곡이다. 정사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의 입장에서 기술하며 조조를 나쁘게 그리지 않았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봐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조를 나쁘게 보는 관점이 공식화된 것은 삼국지연의에서였다. 그리고 경극에서도 조조는 악인이다. 관객들은 조조가 이길 때면 한숨을 쉬고 유비가 이기면 기뻐했다. 왜 그랬을까?

 

대다수 중국인은 우주가 언제나 어떤 조화를 유지하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인가 나쁜 일이 벌어지기라도 하면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그에 상응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어왔다. 위진남북조의 분열기에는 바로 조조가 그런 사람에 해당된다.”

 

그러나 조조는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뛰어난 정치가가 아닌가? 지금으로선 조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가 잔인한 면이 있었고 모략을 쓰기는 했지만 도덕과 정치를 분리해서 보는 관점에 익숙한 지금 사람들에겐 그런 것으로 조조를 탄핵하는 것은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비친다. 난세를 끝낸다는 목적을 위해선 권력을 잡고 권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깨끗한 일이 아니다. 고고한 척하면서 손을 더렵히지 않고 어떻게 대의를 이룬단 말인가? 말로 천하를 바로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조조는 비난하고 유비는 찬양하지만 유비 역시 조조 못지 않게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조조를 나쁘게 본 것은 민초들만이 아니었다. 유비를 정통으로 보고 조조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관점은 송대 성리학자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유교적 질서를 무너트린 사람이라 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 중에도 이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첸무가 그런 예이다. 중국의 역사편찬 전통을 오늘에[ 되살린 대가로 여겨지는 그조차 조조의 찬탈행위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황제제도 아래에서 자연적인 질서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행해지는 일방통행이었다. 만약 군주 스스로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오직 군주만이 우주의 지고무상한 도덕과 지혜를 구현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3제로는 군주가 하급계층의 사정을 상세하게 알 수는 없다. 더욱이 그토록 광대한 영토 안에서 상충하는 숱한 이해관계가 모두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궁중의 황제라는 자리에는 신비로운 이미지가 있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황제는 그야말로 책임있는 중재자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황제가 학식이 풍부하고 사리에 밝은 백관들에게 기대한 것은 다만 자신에 대한 신앙심일 뿐이었다. 만약 백관들 모두가 자기억제와 겸양의 미덕을 가장 큰 신조로 견지하고 잇었다면 그 어떤 충돌도 해결화지 못ㄹ할 것이 없고 또 극복하지 못할 기술상의 어려움도 결코없었을 것이다. 조조의 잘못은 거친 방법으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도 잇지만 대중이 굳게 믿는 신화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언행을 서슴지 않은 데도 잇다. 첸무는 국가는 원래 정신적인 산물이다;라고 말했다. 고대 중국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을 관리하는데 따른 기술상의 어려움 때문ㅇ사회적 가치의 총체로 삼을 수 있는 세습군주제를 시행해야 했다. 이는 나름 일리 있는 것이다.”

 

중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뭉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적 통일이었고 그 문화의 가치는 군주가 상징햇다. 그러나 조조는 제국의 기초에 있는 군주의 신성함을 모독했고 제국의 뿌리인 정신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조조를 비난한 것은 그런 이유이다. 조조는 내용에 관심이 있는 실용주의자엿지만 제국을 떠받치는 것은 내용이 아닌 형식이었고 그 형식을 무시한 조조는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저자는 조조가 비난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중국의 한계였다고 본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중국은 언제나 실질보다는 형식을 앞세우는 관료주의의 영향 아래에서 정치적인 국가가 되었다.” 저자는 그 시작을 주나라의 봉건제도라 말한다. 주공이 창안한 주나라의 시스템에서 핵심은 봉건제도와 종법을 결합했다는 것이다. 단순히 봉건만으로는 원심력이 작용해 오래가는 시스템을 만들 수 없다. 주나라의 시스템이 수백년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고 후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이유는 공적 시스템을 가족제도와 묶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었다는데 있다. “훗날 유교라고 일컬어지게 된 이 평화공존의 관념은 공자 스스로도 인정한 것처럼 문왕과 주공에 힘입은 바 크다.” 공적 시스템에 사적 시스템을 결합해 안정성을 확보하는 아이디어는 이후 유교의 정치적 비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진관다오는 이러한 시스템을 종법적 와 봉건적 의 동형구조(종법일체화 구조)라 말한다. 유교 禮制의 핵시은 종법제도이다. 그러나 유교는 그 종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비틀었다. “종법제의 외형적 틀은 유지하되 그 내용에는 질적 전환이 있었다.” 원래 종법이란 귀족들의 친족관계를 규정하는 틀이다. 유교 이전의 귀족이란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와 마찬가지로 무사 귀족이었다ㅓ. “갑골문에서 친족을 뜻하는 이 깃발과 화살의 표상임은 시사적이다. 제후를 뜻하는 역시 화살()을 든 인간()을 표상한다. 고대 세계에서 족은 전투집단이었고 제후한 이 전투 집단의 장수, 사령관이었다. 유교에서 이루어진 종법의 질적전환의 핵심은 군사적 친족주의에서 윤리적 친족주의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군사적 친족주의로서 종법제의 핵심은 군사적 지배체제의 계승원리였다. 그 시기의 예란 그러한 군사적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의례에 다음 아니었다. 그러나 공맹에 의해 재정비된 예제의 핵심은 오히려 이 군사적 성격을 탈색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적 질서 안에서 군왕과 가부장은 더 이상 군사적 지도자, 자의적 절대자일 수 없다. 부자와 군신의 관계는 군사적 질서가 아닌 윤리적 질서에 의해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전통 속에서 전통을 변환시켜야 한다. 전통의 이름으로 전통을 바꾸어야 한다. 이 노선은 현실에 아주 잘 들어맞았다. 역사 속에서 유교의 승리를 보장해준 원천이었다. 친족주의의 핵심은 벤자민 슈우러츠가 고대중국에서 정립된 문명적 정향이라 강조했던 조상숭배다. 이 정향은 고대로부터 워낙 깊이 자리 잡은 것이었기 때문에 유교의 윤리적 변형조차 이 정향 위에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상래)

 

맹자는 양주와 묵적에 대해 단호한 태도로 추호의 융통성도 보이지 않은 채 아비도 임금도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짐승과 같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타협의 여지를 인정하지 앙ㄶ는 태도에 대해 오늘날의 독자들은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이해된다. 농민대중 속에 기층조직을 꾸리는 방법으로 혈족의 단결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엇다. 여기서 당연회 도출되는 결론은 가부장적인 의미의 세급군주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혈연관계에 멀고 가까움이 있듯이 남에 대한 호의도 반드시 친소(親疏)의 구분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개인이 사사로운 이익을 기준으로 행동한다거나 남들을 모두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호소력이 있을 수 잇겠집만 고대중국에서는 오히려 현실성 없는 주장이엇다; 우선 법률 면에서 중대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왕조시대를 통틀어 중국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형법을 변함없이 유지햇다. 그 형법은 친족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질서를 지탱하는 한편, 형법의 범위 내에서의 정당한 행동을 옹호한 것이다. 유교를 신조로 하는 통치자들은 법률을 제정하면서 남자의 지위를 여자보다 높게 정했고 연소자보다 연장자의 권위를 더 세워주었으며 학식있고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일반 서민보다 더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그들은 분명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에 부합된다고 여겼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이 제도에서 비롯된 안정과 질서는 일찍이 해외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유교의 승리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었다. 조상숭배를 윤리화해 천하를 장악했지만 바로 이 승리는 진관다오가 초안정구조라 불렀던 친족질서()와 국가질서()大一統 체제의 항구적 보수성의 근거가 된다.” (김상래) 그러나 이 시스템의 안정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었다. “그것은 평균적 민중의 최소한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최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햇다. 조직이 단순하고 능률이 낮은 이 정치체제는 탄력성이 결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힘도 부족했다.” 그 시스템은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위한 것이었지 시스템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시스템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중요했고 의례적인 것에 치우치고 실질보다는 형식적인 것에 더 집착하는 태도는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그 뒤로도 수천년이나 이어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저자는 논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중국의 경우 지난 십수 세기에 걸쳐 지속된 기본적인 요소는 2세기에 이미 갖춰져 있엇다. 장기적으로 보면 당시의 중국이 정치적으로 조숙했던 것은 하나의 큰 성취엿다. 그러나 중국인들 역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햇다. 표면상으로는 기원전에 벌써 이 같은 체제가 존재한 점에서 보면 국가의 조직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층은 아무래도 조잡하여 성장과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후세의 기준으로 보면 더욱 그러했다.” 중국경제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과대성장국가론이라 할 수있다. 문명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본다면 국가와 사회, 경제가 균형을 이룰 때 그 성장잠재력이 크다. 그러나 중국은 기원전에 이미 제국이란 정치시스템이 완성도 높은 수준에 올랐지만 사회와 경제는 그 수준을 따라갈 수 없엇다. 이 때 문제는 시스템의 불균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제국이 망하고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 200년이란 짧은 간격으로 반복된 이유를 간단하게 이렇게 정리한다. 제국이란 정치 시스템은 한대 이래로 축적된 농업적 재력이 일단 안정상태에 이르자 이를 저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제도상으로 이를 더욱 강화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문명의 시스템은 저수준의 균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낮은 수준의 균형에 제국 시스템이 최적화되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결국 전체적으로 중국문명이란 시스템은 저효율일 수 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이렇다. “중국의 전통적인 관료정부는 부담은 많은 반면에 실효는 적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적당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관료정부도 납세자인 수백만 또는 수천만의 가난한 농민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청렴하지 않으면 아되었다. 자기억제와 상호존중을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많은 분쟁을 사전에 억누르는 역할을 했다. 혈연관계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회질서에 만략 법에 의한 제재규정이 마련된다면 개인의 권리와 소유권 등을포함한 많은 법해석상의 유연성을 배제하게 된다. 그래서 정부는 각 종족에게 그 구성원들을 가르치고 다스릴 수 잇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덕분에 관료조직은 행정적으로 많은 부담을 덜 수 잇었다. 이와 함께 시가의 창작이나 경학의 연구에 능했던 관료들은 자신의 직무에 엄밀하게 임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는 법을 적용하는 면에서도 적용되었다. 그들은 대체로 각 지역의 특수성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최소한의 공통요소를 전국적인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문인관료의 모든 관직은 사실상 호환될 수 있었으며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추상적인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다스릴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시정방향은 고려되엇지만 그 밖의 특수한 상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이허한 체제가 부적절하다는 것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실제에 들어맞지도 않았다. 이는 교통과 통신 등 당시의 문화기술 수준보다는 중국 특유의 광대함과 복잡함이 이를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명백하다.”

 

저효율의 시스템이 수천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서 제국은 있어야만 했고 제국의 존재 자체가 중요기 때문이다. “맹자의 생존시기는 진시황의 통일과 불과 50년도 안 떨어졌지만 그는 이미 법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중앙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찬동했다.” 법가와 유가가 다른 것은 방법일 뿐이지 목적은 아니었다. 맹자와 법가가 동의한 목적이란 국가의 폭력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폭력이 하나의 국가에 모아질 때 가능했다. 그러나 제국이 필요한 이유는 내란이란 폭력만이 아니었다. 제국이 성립한 후에도 중국이 제국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프론티어이다. “중국의 농경민과 변방의 유목민은 2000년에 걸친 항쟁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유목민족의 위협은 기원전 3세기부터 대단히 심각했다. 이간은 국면의 전개는 중국의 중앙집권화를 촉진햇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있다. 그것은 제3의 지리적 요인으로 작용하여 중국 농업사회의 관료기구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아래에 놓이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이중톈은 이렇게 정리한다. “정권을 공고히 유지하는 데 능한 것은 역시 농경민족이다. 농업생산은 정성들여 조심스럽게 가꾸어야만 하며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다. 천시, 지리, 인화가 중요하며 과도한 무력 사용은 결코 농경에 이롭지 않다. 그래서 춘추전국 시대에는 가을이 되어야 출병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는 농업생산을 보호하는 한편 무력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농경민족은 무력보다 권력에 더욱 치중했다. 비록 권력의 남용으로 농업생산이나 소농경제에 적지 않은 피해를 주었지만 그 폐해는 무력의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니 두가지 폐해 가운데 그나마 가벼운 쪽을 택하는 것이 당연하다.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다면 농경민족은 暴民을 택하느니 暴君을 택한다. 차라리 신하로서 황제에게 복종하지 비적들에게 자신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집권의 국가제도는 중국과 같은 농경민족만 생각해낼 수 잇다. 농경민족은 문명 시대로 진입하면서 권력사회 심지어 권력집중사회를 건립해야만 한다. 무력사회에서 권력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은 일종의 진보이다. 사회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원가가 확실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권력은 일종의 비전형적 폭력이다. 굳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잇으며 심지어 폭력으로 실현할 숭 ㅓㅄ는 목적까지 달성할 수 잇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자원 지배와 부의 분배에 관한 방식은 결국 무력을 사용하는 쪽에서 자본이 덜 드는 권력 쪽으로 향하게 된다. 과거에 자원을 지배하고 부를 분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햇다. 맹자 이루상에서 땅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들이 들판에 가득하고 성을 다투는 전쟁으로 죽은 이가 성 안 가득햇다고 한 것은 그 대가가 널마나 참혹한지 말해준다. 그런데 이제는 강압적인 것에서 연착륙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저 호령이나 문서 하나만으로도 행위가 금지될 수 있으니 이 어찌 효율적이라 하지 않겠는가? 집권과 통일은 역사의 요청이었으며 진과 한은 역사의 요구에 부응한 집행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국은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올리기도 했다. 제국은 의 대일통구조 위에 세워졋다. 제국이 안정적이려면 그 구조가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안정과 질서는 대가가 있었다. 사회를 그 구조에 맞도록 끼워맞춰야 한다는 말이다. 유학자들이 상업을 적대시한 것은 바로 그때문이다. 상업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문제는 그 자유가 제국의 권력과 호환되지 않는다 점이다. “어떤 권력 집중 사회나 권력 집중에서 전제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는 민간자본이 규모를 키워가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 제국과 맞먹는 재력 사회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과 왕국은 이처럼 민간자본으로 형성된 재력사회에 무너졋다. 중화제국의 통치자들은 상공업에 대해 거의 본능적으로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었다. 중농억상이란 말이 제국의 역사에서 그치질 않았다. 진 왕조 건립 초기에 진시황은 천하의 부자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켰다. 감시 삼독을 위해서였다. 한나라는 건립하자마자 억상정책을 시행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진이 굴기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당시 재부가 나라에 필적할만한 거상대고에게 많은 덕을 입었다. 그래서 상인의 세력이 막강해져 나라와 임금을 세우고 조정을 좌우할 지경에 이르렀다. 말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면 말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가능하다. 민간에서 운영되는 상공업에 대해 억제와 탄압을 가함으로써 제국은 자신의 생존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이중톈)

 

결국 안정은 저효율을 대가로 얻어졌다. 그러나 저효율은 폭력의 통제란 최소한의 존재이유 조차 버겁게 만든다. “제국은 본질적으로 수탈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비록 이러한 수탈이 통상 비폭력 또는 비전형적 폭력으로 표현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탈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제국의 몸통에 기생하는 흡혈동물인 통치집단이 만약 수탈을 하지 않는다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기생이라 말한 까닭은 그들이 세금을 징수한 후 현대국가의 정부처럼 납세자에게 세금에 상응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끊임없는 욕망을 채우는데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수탈을 하지 않기를 기대할 수 없다. ‘좋은전제는 그나마 괜찮다고 하는 개명 전제이고 가장 좋은수탈 역시 그저 제한적인 수탈에 불과하다.” (이중톈)

 

그러나 제국의 안정은 엘리트의 숫자를 늘린다. 늘어난 엘리트는 자신들이 기생하는 국가를 통해 자신들의 몫을 더 늘리려 한다. 결국 제국의 수요를 감당하기엔 제국 때문에 저효율로 유지되는 사회가 견딜 수 없다. 줄어드는 자원을 놓고 엘리트들의 경쟁이 격화되면 엘리트들은 귀족화되면서 제국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이 과정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은 제국의 탄생리뷰 참조)

 

엘리트들의 자원과점, 즉 토지겸병은 중국의 역사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징병과 징세의 기초가 되었던 점은 우선 그 공평성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중국 농촌에 단일하고 균일한 초석을 다짐으로써 관료조직의 통제가 용이하도록 만들었다. 한 제국은 효()와 염(, 청렴함, 재물을 탐하지 않음)이라는 덕목을 강조했는데 이는 당시의 조정이 문치를 통한 응집력을 중시한 반면 경제적인 번영을 꾀할 뜻은 없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같은 조직과 구조는 토지의 집중현상으로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토지겸병은 우선 제국의 세수기반을 무너트려 제국의 최소 존재이유를 무너트린다. 그뿐 아니라 황제의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전해짐으로써 전국이 일원화되는 것이 전제정부의 일반적인 체제인데 만약 지방귀족 세력이 강해지면 이러한 체제는 그만큼 흔들리게 된다. 조씨가 한나라를 대신하고 사마씨가 위나라를 대신함으로써 전면적인 붕괴위기는 일단 넘길 수 있었지만 그 근본원인이 해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부분은 진관다오의 초안정구조론의 핵심이다. “구조형태상으로 말하자면 중국 봉건사회는 종법일체화의 구조엿고 그것은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은 왕조의 안정기에 작용했는데 그것은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 세가지의 하위 시스템을 강력히 통제하여 상호 적응시키거나 또한 신구조의 성장과 맹아의 상호결합 과정을 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절 메커니즘은 조직교란력의 증대를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지니지는 못햇다. 조직교란력이 일정 정도 증대하면 지주의 농민에 대한 착취는 필연적으로 한도를 넘어서서 국가는 대농민반란 가운데 붕괴되었다. 이때 두번째의 조절 메커니즘이 작동했다. 한편에서는 종법일체화 구조가 왕조회복의 거푸집(유전자)을 제공하고 또한 대동란이 조직교란력을 소멸시켜 왕조회복의 가능성도 생겨났다. 다른 한편 대동란이 생산력의 축적을 가로막고 새롭게 생겨나는 맹아를 파괴함으로써 사회는 원래의 구조로 되돌아갔다. 이렇듯 두가지 조절 메커니즘이 번갈아 작용력을 발휘하며 사회구조의 거대한 안정성이 유지되었다. 이들 두 가지 조절 메커니즘을 갖추고 있는 것이 초안정시스템이다.” (진관다오)

 

저자는 제1제국(저자가 진한시대를 가리키는 말)이 사라진 위진남북조의 300년이 제국의 본질을 잘 드러낸다고 본다. “이 시대의 역사는 종합적인 구심력이 없는 대신 넓게 뻗어나갔다는 데 특징이 있다.” 진관다오가 말하는 종법일체화 구조에서는 다양성이 살아움직일 수 없다. 제국의 넓은 땅은 나름의 사정이 있고 사람도 사정이 있다. 그러나 제국이란 틀은 그 모든 다양성을 제국이란 대패로 밀어 같게 만든다. 그러나 300년이란 분열기는 그 다양성을 해방시켰다. “당이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룬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잇다. 우선 장장 3백여년에 걸친 동란이 한 원인이다. 위진남북조는 369년이란 세월 동안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생산했으며 나름의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력이 없었다면 수의 창업 토대도 마련되지 않았을 것이고 대당의 성세도 존재할 수 없엇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 태종 시절의 이른바 정관지치는 그 열매를 따먹은 것에 불과하다.” (이중톈)

 

그러나 당 왕조에서도 시스템의 불균형이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유가의 전통적인 왕조는 일종의 조직이었을뿐 아니라 실제로 하나의 규범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둬야 한다. 그런 까닭에 전통적인 왕조는 면밀하고도 빈틈없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는 못햇다. 당왕조가 지방관리의 임면권을 확립한 이후로 공문서가 증가햇다. 그러나 문서처리는 갈수록 형식화되었고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한다든가 유목민족에 대한 대책이라든가 수재나 한재에 대책, 황무지 개간 등의 행정에서 더 이상 실질적인 정책이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시스템의 불균형을 언급한다. “근대 서양의 상황과 비교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제도화된 사적인 이익이 정부와 대등한 지위를 가질 만큼 보장되지 못햇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그러한 이익을 보장받기 위해 개인이 정부에 도전할 수도 있었고 정부에 서비스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들도 부분적인 행정비용은 부담해야 했다. 여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잇는 대등한 위치의 민간조직이 없었던 당나라의 관료기구는 전적으로 관료의 명예라는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하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듯햇지만 모든 것이 산만했고 형식화된 상급의 행정기구는 언제나 일을 얼버무리거나 책임회피에 급급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체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위에서 아래로 압력을 가하는 도리밖에 없엇다. 요컨대 전제정부는 전제권력자의 선택을 벗어날 수 없다. 중국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지방조직이나 기술적인 설비 면에서 미처 규모도 갖추기 전에 대제국의 통일이 실현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상위계층과 하위계층 사이에 중간계층이 형성되지 않음으로써 오로지 전제군주가 자기 나름의 결단으로 이 결함을 보완하려고 했다.”

 

당 왕조가 멸망한 요인은 도덕의 타락도 기율의 전면적인 해이도 아니었다. 바로 왕조의 창업 당시 갖추어졌던 조직이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관료들의 형식 위주의 통제도 절절히 조정될 수 없었던 것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왕조의 말기에 철저한 지방분권이 이루어져 군벌할거의 국면을 맞이했다.”

 

저자는 문제를 수량관리의 부재라 요약한다. 언듯 중국의 제국질서는 합리성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합리성은 목적적 합리성일 뿐 그 목적적 합리성을 구현할 도구적 합리성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제국의 위정자들이 수량관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혼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어떤 곳의 창고에는 그야말로 물품이 넘쳐나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물자부족을 보고하는 경우가 허다햇다. 송대의 재정보고에서는 을 단위로 하는 곡물, 을 단위로 하는 동전, 疋을 단위로 하는 비단이 호환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용품의 가격은 지역마다 달랐고 어떤 때는 같은 지역이라도 시간과 계절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햇다 관방의 기록은 실질적인 교환율이 거의 세금징수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음을 인정하면서 그에 따라 백성은 호소할 데가 없는ㅊ지엿다고 서술하고 있다. 징세자와 세무관리가 서로 대립할 경우에는 세액을 각지의 정채진 액수에 따라 겨둘 것인지 실제상황에 맞추어 신축적으로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징수해야 할 세목과 이미 징수된 세목이 혼동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미 소실되거나 면세된 재물조차 징세대장에서 좀처럼 삭제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복식부기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전 서양에서도 발생했지만 송대의 경우처럼 그렇게 놀랄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저자는 안록산의 난 이후 절도사들에 의해 제국이 사실상 분할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하북성 동남쪽에 잇던 성덕진 관할하의 4개주는 100년이 넘도록 왕씨 일족의 세력 범위 안에 잇었다. 이를 불안정한 징표라 할 수는 없다. 위박진의 하진도는 829년 군사들의 추대를 받은 뒤 비로소 중앙정부에 의해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의 관할하에 있던 7개주는 오늘날의 하북과 하남 사이에 걸쳐 있었다.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민심을 많이 얻어 그 직위를 자손에게 물려줄 있었다. 이러한 예는 곧 징세능력을 가진 자가 그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는 고금불변의 원칙을 실증해준다. 지역의 다양성이 추상적으로 만들어진 제국의 일반체계를 능가하게 될 때 제국의 통제범위는 이전보다 줄어들지만 행정의 효과는 이전보다 높아졌다. 중국은 여전히 소규모 자작농이 주체를 이루는 국가엿다. 다만 개인의 경작규모와 지역별 생산력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새로운 세입은 주로 상업과 농업, 양조업, 광업, 내륙교역 등에서 얻을 수 잇었으며 심지어 화폐의 주조로도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과거처럼 관념적인 계획으로 국가를 운영하거나 지방호족이 좁은 지배영역을 확장하여 독립왕국을 형성할 수 있었던 때와는 달랐다. 군벌의 할거는 실로 그런 특수상황에 대한 역사의 답이었다. 이는 중앙정부가 전국에 걸쳐 일률적으로 세율을 적용하는 제도와는 다른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즉 해당지역의 실력자인 세습군벌이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세금도 각 지역의 실정에 맞추어 납세자의 능력에 따라 분담하도록 햇다. 행정적인 면에서도 그 지방의 실정을 더욱 중시할 수있게 되엇고 지역의 개발도점차 촉진되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호남에 있었던 마씨 일족은 차 산업을 발전시켜 수출까지 했고 전씨 일족은 절강에서 수리사업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왕씨 일족은 복건에서 대외무역을 크게 장려했다. 이와 같은 성취는 과거의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으로서는 원만하게 이루어내기 힘든 것이었다. 중앙집권적인 관료조직은 대체로 지역간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된 쪽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전체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햇다. ”

 

송 제국은 그런 발전을 배경으로 성립한 제국이다. 그러나 송 제국 역시 근대국가에서 볼 수 잇는 수량관리가 가능한 도구적 합리성이 없었다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

 

당이 멸망한 후 510국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일어난 송 왕조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모병제로 군사를 조달한 왕조였다. 조광윤은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엇다. 이는 정책상의 역점이 정통을 중시하는 추상적 원칙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는 점과 중농정책에서 새로이 상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수동적인 지배에서 능동적인 지배로 전환되었다는 점 등을 말해준다. 이렇게 하여 송제국에는 한때 신선한 기풍이 감돌았다. 경제적인 면에서 송 왕조는 중국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도시가 번창했고 내륙의 운하에는 선박들이 빈번히 오갔으며 조선업도 비약적으로 성장햇다. 국내외의 교역량이 전에 없이 높은 수준에 달랫다. 동전의 유통은 그 뒤의 어느 왕조도 깨지 못할 신기록을 세웠다. 정부의 장려로 광업과 제련업도 크게 발전했다. 방직업과 양조업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군벌할거 시대의 발전을 바탕으로 송 왕조에서 제국의 시스템을 바꿔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송 왕조는 강력한 국가 아직 사회적으로 준비가 미흡한 상태에서 서둘러 금융관리 시스템 기술을 행정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왕안석의 신법은 그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안석의 신법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비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갖고 잇었다. “오늘날의 고나점에서 왕안석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실로 경이로움을 느낄 뿐이다. 우리보다 900년이나 앞선 시대에 이미 경제관리에 따른 국사의 처리를 제도화하려 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더구나 그 범위나 심도는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엇다. 신종 조욱에게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국고가 충분해질 수 잇다고 말했던 그는 이미 신용대출의 방법이 경제성장을 자극할 수 잇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산성이 증대되면 비록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더라도 그만큼의 증세효과를 거둘 수있다는 확장론적 안목은 분명 전통적인 경제안목과는 다른 것이엇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송 제국의 재정기구를 상업적인 성격으로 전환하려면 금융의 통제방식이 적절히 정비될 필요가 있었다. 송금통지서, 선하증권, 보험증권, 해손의 규정, 선박저당대차, 모험대차증서, 합자계약, 어업권 등이 모두 입법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아무런 장애없이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산상속이나 파산, 담보물 취득권 상실, 사기, 횡령 등에 대한 규정도 상업사회의 유동적인 상황과 서로 부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금전으로 통괄해야 이허나 것이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내륙 상업구조의 실상은 이 같은 요구를 충족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농업부문에서 자본축적을 이룰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은 조건이 지속되는 과정에서는 서비스와 관련된 사업이 생겨날 수가 없었고 발전할 수도 없었다. 통행료를 내는 국도도 건설되지 않앗고 정규적인 우편업무도 부재했다. 소송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민법의 발전도 지체되었다.” 이전과 이후의 제국들처럼 송나라가 전국적으로 일치된 국면을 보일 수 잇었던 것으 문화적 응집력에 서 발전한 사회규범 때문이지 금전의 힘과 그에 따른 교환성 때문이 아니었다.” 왕안석의 신법은 다만 시대의 모순을 드러내는 사건이엇다. 중국의 정치적 통일은 그 수준이 국내의 경제조직을 훨씬 앞서 있었고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양쪽 모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평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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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라더 2012-02-26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경과 글씨 색이 너무 닮아있어서 읽기 힘들어요. ㅠㅠ

Lulu 2012-02-26 19:34   좋아요 0 | URL
그건 알라딘에서 설정합니다 ^^; 불편하시면 http://blog.naver.com/qrat 에서 보시면 될겁니다.
 
슈퍼내추럴 -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
그레이엄 핸콕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지하 동굴에서 안내원이 손전등을 껐을 때의 효과는 엄청나다. 한 방문객은 이렇게 회상했다. ‘갑자기 모든 감각이 멈추고 수천년의 시간이 무너져 내린다. 그보다 더 짙은 어둠은 겪어보지 못햇다. 그건 뭐랄까, 완전히 넋이 나가는 경험이었다. 동서남북 어느 쪽을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방향감각은 모두 사라지고 태양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어둠 속에 서 있게 된다.’ 대낮처럼 밝은 의식이 꺼지고 나면 떠나온 지상세계의 모든 금심과 요구들포부터 아득히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17000년전 구석기시대 조상들이 꾸며놓은 이 동굴 중 첫번째 동굴에 이르기까지 방문객들은 지하 20미터에 위치한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경사진 굴속을 24미터쯤 더듬더듬 내려가야 한다. 그때 안내원이 갑자기 손전등을 천장에 비추면 거기 그려진 동물들이 마치 바위 속에서 불쑥 나타난 것처럼 드러난다. 움직이는 동시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들소, , 사슴, 황소 때들의 행렬 뒤로 불룩한 배와 길고 날카로운 뿔을 가진 낯선 맹수 한 마리가 거닐고 있다.” (카렌 암스트롱)

 

유럽의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그때서야 발견된 이유는 그 동굴들이 접근이 힘든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페슈메를 내부의 통로와 회랑은 비교적 드나들기 쉽고 안전하게 재정비되었지만 고대인들은 낭떠러지를 오르고 좁은 통로를 기어가는 등의 위험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이곳에 한번 들어왔다 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와 의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리라.”

 

동굴은 분명 그만한 어려움을 겪을 가치가 있는 곳들이다. “페슈메를은 자연이 이루어낸 최초이자 최고의 경이 가운데 하나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의 광경을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신비로운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계속해서 걷다 보니 몽환적인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떤 다른 우주, 난쟁이와 요정이 사는 딴 세상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왜 거기다, 그 힘든 곳에다 그림을 그렸는지는 오랫동안 수수께끼였다. 이 책은 그 수수께끼에 관한 책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가 처음 발견된 것은 1879년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에서였다. 그러나 그 벽화는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조작되었다는 혐의만 씌워졌다. “아마추어였던 사우투올라의 발견은 당시의 고고학계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그의 일생을 망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알타미라의 가치에 대해서 제법 정확한 가설을 세웠음에도 사우투올라에게는 세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는 그가 (고고학계의 주류인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인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알타미라 동굴이 (프랑스가 아닌) 스페인에 있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그가 (교수가 아닌)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는 것이었다.”

 

주류였던 프랑스 고고학계는 어떤 증거를 내놓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과학적인 방법론에 기초해 학계가 인정할 만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것이야말로 선사시대 동굴벽화에 관한 최초의 저술이며 오늘날로 따지면 노밸상 감이라 할 업적이었지만 가뜩이나 매몰찬 학계의 증오만을 더더욱 불러일으켰을 뿐이었다.” 프랑스에서 발견된 것이었다면, 프랑스인이었다면 교수였다면 인정받을 일이엇지만 학계는 외부자의 것은 인정하지 않았고 그를 사기꾼으로 몰았다. 결국 사우투올라는 홧병으로 죽는다.

 

그후 유럽 곳곳에서 동굴벽화가 발견되면서 결국 프랑스 학자들도 알타미라를 진짜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후 한 세기 가까이 그들은 도대체 그 벽화가 무슨 의미인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프랑스 학자들은 몇가지 이론을 내놓기는 했다. 그 벽화가 토템을 그린 것이란 이론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무시해야만 성립되는 이론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선사학의 교황(학맥의 중심에서 교수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잇던)이 내놓은 것이란 이유만으로 수십년동안 통용된다. 그가 죽은 후 결국 이론은 페기되고 애니미즘적인 사냥주술을 위한 그림이었다는 이론이 나오지만 당시 그들이 사냥한 동물과 그려진 동물은 달랐다. 역시 폐쇄적인 학파의 리더가 제시한 이론이란 이유만으로 도전받지 않다 그가 죽자 폐기되었다. 그후에도 몇가지 이론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반박되었고 고고학계는 벽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냥 벽화를 분류하고 숫자를 부여하는 의미없는 작업만 계속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미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떤 장면을 기록할 때마다 기록자는 먼저 그것을 해석해야 했다. 가령 어떤 것을 춤추는 장면으로 분류하면 곧이어 그것이 상상적인 것인지 제의적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이는 기록자가 어떤 그림을 쓱 쳐다보기만 해도 그것이 무엇을 묘사한 장면인지 알 수 있다는 식의 전제를 깔고 잇는 셈이다. 결국 통계에서 해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석으로 통계를 만드는 셈이었다.’ 남아프리카의 험한 산과 들을 헤매던 루이스-윌리엄스는 결국 이런 식의 연구가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과 정력의 낭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분노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연구한 산족의 암벽화와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비교하면서 느끼게 된 흥미에다 기존의 무의미한 연구방법에 대한 분노와 좌절로 이제껏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접근을 시도할 수 있었다.”

 

산족은 부시맨으로 알려진 !쿵족의 친척이다. !쿵과 달리 산족은 19세기말 유럽인들에게 의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냥당하기 전까지 수만년동안 암벽화를 그려왔다. 그들이 그린 암벽화는 유럽의 후기 구석기 동굴벽화와 매우 유사하다. 루이스-윌리엄스는 산족이 암벽화를 무슨 의미로 그렸는가를 알면 유럽의 동굴벽화도 의미를 알 수 있다는데 착안한다. 그 단서는 19세기에 작성된 민족지였다. “산족문화에 관한 19세기의 기록은 노트로 100여권, 12000여 페이지에 달했다.”

 

민족지의 기록은 암벽화가 샤먼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기-(산족의 샤면)이 그린 방대한 암벽화는 산족이 믿는 특정한 초자연적 영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묘사한 것이었다. 산고 사회에서 기-텐은 영의 세계와의 접촉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이 지닌 초자연적 능력()이란 유체이탈을 통해 영의 세계에 다녀오는 것을 말했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대부분의 고대 종교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와 비슷한 내용을 샤머니즘적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어떠한 문화에서건 샤먼은 변성의식상태를 초래하고 제어하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변성의식상태란 흔히 트랜스라 불리는 의식상태이다. 산족은 길고 격렬한 춤을 통해 트랜스로 들어갔지만 아마존의 샤면은 아야후아스카란 식물의 DMT 성분을 이용해 트랜스 상태로 들어간다.

 

샤머니즘 자체는 단순히 어떤 신앙체계나 의도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트랜스에 돌입하기 위한 기술인 동시에 그로 인한 체험을 통해 어떤 사건을 해석하고 행동의 지침을 얻는 기술이다. 샤머니즘에 따르면 다른 세계, 다시 말해 저승은 우리의 물질세계 너머에, 배후에, 위에, 아래에 즉 어디에나 존재하며 그곳에는 비록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지만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덕을 베풀 수는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산다. 대부분의 사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물질세계에만 머물기 때문에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임무는 오로지 샤먼에게만 주어진다.”

 

루이스-윌리엄스는 유럽에서는 12000년전까지, 남아프리카에서는 100년까지 그려졌던 벽화들이 모두 샤먼이 트랜스 상태에서 본 것을 그린 것이라 말한다. “아프리카의 산족이 남긴 암벽화와 유럽의 후기 구석기시대 암벽화가 다르리라는 것은 사실 누구나 예상할 수있다. 오히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무척 닮았다는 점이며 바로 이 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유럽의 벽화와 산족의 암벽화에 공통으로 나오는 주제는 여러가지이다. 가령 지그재그, 나선형, 물결문양, 격자문양. 체크문양, 거미줄, “사다리 문양을 비롯해서 스페인의 알타미라와 엘 카스티요에서 발견되었던 문양 중 상당수가 역시 남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되며그 추상적인 문양들이 구상화에 겹쳐져 그려진 양식도 유사하다. 그뿐 아니라 선사시대 동굴미술의 수수께끼는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 즉 서로 다른 종의 특징을 결합한 키메라나 머리나 다리나 꼬리가 여러 개 달렸거나 혹은 괴물처럼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후기 구석기 시대 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암벽화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주요개념을 요약하면 이렇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지닌 인간, 혹은 완전히 동물로 변신한 인간,

동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몸에 창이나 화살을 맞은 인간,

다른 동물로 변신한 동물, 혹은 두 개 이상의 종들의 혼합종으로 변신한 동물,

기이한 외모를 지닌 동물과 완전히 낯선 동물,

기하학적 문양

단순히 텅 빈 캔버스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침투적인 암벽 표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나타나는 이런 공통점의 열쇠는 트랜스 상태에서 본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라 루이스-윌리엄스는 말한다. “루이스-윌리엄스의 신경심리학 이론은 변성의식상태에서 나타나는 6가지 형상, 7가지 원칙, 그리고 3단계 과정으로 이루어진 모델인 셈이다. 1단계에서는 체험자가 오로지 내시현상(안내섬광이라고도 하며 신경학적인 구조 때문에 보이는 기하학적 문양)만 경험한다. 2단계에서는 체험자가 내시현상을 도상적 형태로 (가령 지그재그 모양을 뱀의 형태로0 변화시키려고 시도한다. 3단계에서는 체험자가 일종의 소용돌이나 회전터널에 둘어싸인 느낌을 받는다. 소용돌이의 가장자리는 마치 TV 화면처럼 사각형의 격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화면으로부터 도상적 환각이 생성되고 나중에 가서는 내시현상이 도상적 환각(즉 진짜 환각)으로 대체된다. 가령 들소인간과 같은 반인반수 혼합의 형상 같은 경우 (환각제를 이용한) 현대인 실험 참가자들도 트랜스의 제3단계에서 종종 목격하는 것으로 그때는 영상들이 현란하게 결합되어 체험자는 기묘한 환각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가령 신경심리학 연구의 선구자인 클뤼퍼는 메스칼린을 직접 복용한 뒤에 어떤 사람의 머리에 고양이 털이 수북하게 자라더니 곧이어 사람의 머리가 고양이 머리로 바뀌는 광경을 보았다고 기술했다. 이처럼 반인반수를 목격하거나 혹은 스스로가 반인반수로 변하는 듯한 경험은 환각제 실험에서도 종종 보고된다. 어느 해시시 체험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우 생각을 했더니 내가 갑자기 여우로 변신해 있었다. 긴 귀와 부숭부숭한 꼬리가 눈앞에 보였고 나 자신이 해부학적으로 완전한 여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선사시대의 반인반수는 (종전에 주장된 것처럼) 의식용 의상이라기보다는오히려 환각이라고 해야 더 잘 설명되는데 왜냐하면 거기에 뭔가 비현실적인 특징이 분명히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에게 이 환각은 신경계 즉 변성의식상태를 통해서 서로 다른 도상적 이미지가 결합된 형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러므로 루이스-윌리엄스는 변성의식상태로부터 유래한 종교가 이후 미술의 발생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의 특색은 선사시대 미술가들에게 신경학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들은 그림을 발명할 필요도 없엇고 단지 모래 위나 부드러운 동굴 벽에 투사된 머릿속의 이미지를 거기에 고정시키면 그만이었다. 바로 거기서부터 미술의 역사가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후기 구석기 유럽과 남아프리카 암벽화의 구도는 이런 공통점이 잇다. 지평선과 같은 원근법적 구도를 완전히 무시한 채 마치 붕붕 떠잇는 것처럼 비례가 맞지 않는다. 암벽 표면이 그림의 배경이 아니라 도상들 사이에 드리워진 휘장이나 막처럼 여기고 사용한다.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이 겹쳐진다. 이런 구도는 트랜스 상태에서 보는 것이 그렇기 때문이다.

 

첫번째 단계로 화가가 동굴이나 암벽 은신터에서 변성의식상태에 들어간다.

두번째 단계로 그들은 동굴이나 암벽 은신처의 벽과 천정 뒤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듯한 환각을 체험한다. 이때 환각은 여러 개가 서로 겹치며 나타나고 여기저기 떠오른 듯하며 비례나 위치는 완전 무시된다.

세번째 단계로 트랜스 상태가 지나가면 화가는 자신들이 본 환상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동굴이나 암벽 은신처의 벽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을 영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로서 확립하거나 기념한다.”

 

접근하기 힘든 곳에 벽화를 그린 이유는 그곳이 트랜스 상태로 들어가 신성과 만나는 성소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루이스-윌리엄스의 이론이다. 그러나 루이스-윌리엄스는 그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벽화로 그려진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할 뿐이다. 저자는 거기서 더 나아가 트랜스 상태에서 그들이 본 것이,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가란 질문을 한다.

 

샤머니즘은 트랜스에서 보는 초자연이 실제로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우리의 현실에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과학자들은 이런 생각 자체를 환각으로 치부하지만 사실 과학은 환각이 어떤 작용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조차 규명하지 못하며 특히 신경학에서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수준 이상으로 더 멀리 나아가지도 못한 상황이다. 결국 샤머니즘의 핵심-우리의 정신이 다른 층위의 현실을 경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지금의 현실에 어떻게든 이바지할 수 잇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과학에 반대되는 것ㅇ리다. 과연 그렇한 실체는 근거가 없는 의식상의 허구에 불과할까? 샤먼들의 증언과 서구인의 환각제 실험에서 매우 유사한 결고가 나온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환각제를 통해 우리가 트랜스로 돌입할 수 있다는 그 현상 자체의 의미를 묻는다. 먼저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와 올더스 헉슬리의 이론을 검토한다.

 

이산화질소를 이용해 트랜스 상태에 들어간 후 윌리엄 제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정상적으로 깨어 있는 의식, 혹은 합리적 의식은 여러 의식의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하며 마치 영사막처럼 얇은 차단막 뒤에는 그와 다른 잠재적인 의식의 형태가 존재한다.”

 

환각제를 여러 번 복용했던 헉슬리는 두뇌와 신경계와 감각기관의 주 기능은 생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거적으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감압밸브의 역할을 한다. 이런 기관은 우리가 무가치하고도 부적절한 지식의 무더기에 압도당하거나 혼란을 느끼지 않게끔 우리가 언제든지 인식하고 기억할 수 있는 지식은 대부분 차단함으로써 오로지 실질적으로 유용한 소수의 특별히 엄선된 지식만을 남겨둔다.”

 

이를 환각제 LSD를 처음으로 합성한 호프만은 이렇게 달리 말한다. “우리가 LSD의 영향 아래에서 또다른 현실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두뇌, 즉 수신자의 채널이 생화학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이ㅏㅆ다. 이때 수신자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현상과는 다른 즉 그에 상응하는 또다른 파장에 맞춰진다. LSD와 다른 다른 환각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자아라는 수신기의 채널을 바꿔줌으로써 현실의식의 변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트랜스에서 경험하는 것은 또다른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은 장구한 세월 동안 인간에게 알려졌고 지금도 알려지고 있으며 그 예로 저자는 샤머니즘 뿐 아니라 UFO 피납자들의 경험을 예로 든다. UFO 피납자들의 증언은 대개 외계존재에 납치되어 하늘에 떠 있는 우주선(혹은 수중이나 지하)로 끌려가 고통스럽고 불쾌한 체험을 한 뒤에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는 것이다.”

 

UFO 피납자들을 연구한 정신의학자 존 맥은 이 현상을 트라우마적 사건에 수반된 정신장애의 일종으로 규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피랍자에 대한 심리학적 검사에서도 이들이 주장하는 경험이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장애에서 비롯되엇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실제 무언가를 경험한 것이다. 그 경험이 무엇인가가 문제이다. “외계인 피랍현상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의 범주 자체가 서구의 주류 과학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가시적 물질세계에 관한 것도 아니고 결코 우리의 세계 안에서 드러날 것같지도 않다는 점이다.”

 

UFO 피납자들이 말하는 항목 중 하나라도 경험한 사람은 전체의 2%이다. UFO 피납자들은 환각제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트랜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 저자는 설명한다. 전체 인구의 2%가 그런 사람들이며 UFO에 피납되었다는 주장은 샤먼이 트랜스에서 경험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피랍자는 ;떠오른상태로 UFO까지 끌려갔다고 주장하며 샤먼들은 입문 단계에서 대부분 하늘을 날았다고 증언한다.” 공통점은 많다. “‘뭔가 바늘처럼 날카로운 것이 비스듬한 각도로 목을 찔렀다.’ ‘외계인이 30센티 길이의 바늘에 손잡이가 달린 도구를 들고 왼쪽 귀 아래에서 두개골 쪽으로 찔렀다.’ ‘30센티는 되는 금속기구가 콧속을 통해 두뇌로 약 15센티나 삽입되어 뭔가를 부숴가면서 내 두뇌에 도달하려 했다.’” 이 증언들을 샤먼들의 환각체험과 비교해보자. “’입문자는 종종 검은 악마 셋에게 붙잡혀 온몸이 조각조각 잘리고 머리가 창에 찔리며 살점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진다.’ (야쿠트족) ‘영은 입문자에게 창을 던져 목 뒤를 뚫고 혀를 지나 입으로 나오게 한다.’ (아룬다족, 호주) ‘머리에는 뱀을 한마리 집어넣고 코에는 마법의 물체를 꿴다.’ (와라뭉가족, 호주)”

 

저자는 샤먼의 환각 체험과 유사한 것으로 서구의 요정도 마찬가지라 말한다. 그외에도 많은 종교사의 사건들이 샤먼의 환각 체험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3세기의 마니교 창시자인 마니는 자신이 열두 살때부터 번갯불과 함께 나타난 천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슬람교도들은 예언자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의 내용을 계시받았다고 믿는다. 기독교의 사도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하늘에서 빛과 목소리에 그만 땅에 떨어져 사흘동안 눈이 멀었다. 바울의 회심사건이야말로 샤먼의 입문과정과 유사하다. 원시 기독료도 가운데 그노시스파는 특별한 종류의 사물의 본성에 관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는데 이때 그런 지식은 가르침이 아니라 계시를 통해 입문자에게 전해진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근본적으로 환상이며 영혼은 오로지 환각상태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현실을 볼 숭 있다고 주장했다. 잔 다르크는 영의 세계이며 그곳의 초자연적 거주자들과 직접 의사소통함으로써 기적적으로 왕과 조국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사가 아니라 악마의 목소리를 들었단즌 교회의 판정에 의해 처형당했다.” 교회에 의해 마녀로 몰린 여성들의 경우도 중상모략만은 아니며 샤먼 현상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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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떻게 끝나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박병철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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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우주 여행자가 태양계로 접어들어 세 개의 행성을 발견했다. 그 중 하나는 크기가 지구와 비슷한데 대기의 주성분은 질소이고 이산화탄소가 조금 섞여 있으며 산소는 전혀 없다. 두번째 행성은 이산화탄소로 이루어진 걸쭉한 대기가 지표면을 두텁게 덮고 활화산과 간헐천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가. 세번째 행성은 조금 작은데 대기가 엷고 육지 표면에서 얕은 호수가 여기저기 눈에 뜨인다. 이 세개의 행성에는 모두 미생물이 번창하고 잇다. 이것이 30억년전의 태양계의 모습이다. 첫번째는 지국이고 두번째는 금성, 세번째가 화성이다. 30억년 전만 해도 금성과 화성이 지구보다 더 살기 좋은 행성이었다. 금성은 처음 생성된 후 거의 10억년 동안 바다가 있었고 운석의 집중 충돌기 뒤에 생명체가 형성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따지고 보면 지구는 생명체에게 가장 이상적인 환셩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구는 생존가능한 환경의 극단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명이 있는 행성은 지구뿐이다. 그 이유를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란 말로 설명한다. “생명체와 물질 환경은 하나의 결합된 계로 진화해왔으며 이로부터 기후와 화학성분을 샌존에 적절한 상태로 유지하는 자체제어능력이 개발되었다. 러브록은 지난 수십억년동안 지구에 도달한 태양 에너지가 25%나 증가했음에도 대기의 온도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그는 불안정한 기체인 대기 중 산소가 지각 속의 광물과 빠르게 결합하여 사라져야 함에도 오랜 세월 동안 대기의 성분이 변하지 않았다는 점도 신기하게 여겼다. 강물이 바다에 계속 유입되고 있음에도 바다의 염분 농도가 세포 활동에 적절한 값을 유지하는 것도 신기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러브록은 어떤 거시적인 계가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안정된 상태가 유지된다고 결론지었다.” 러브록은 자체제어능력을 가진 이 시스템을 가이아라 불렀고 생명체가 그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생명체는 지구의 환경 자체를 바꿔왔고 자신에 맞게 그 환경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생명의 미래는 영원할 것같지는 않다. 물론 50억년 후 태양의 수명이 끝날 때 지구도 사라질 것이고 지구가 사라질 때 생명이 남아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생명의 종말은 그전에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태양 때문이다. 태양계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태양은 25% 더 뜨거워졌다. 지금까지는 그 변화에 지구의 시스템이 적응할 수 있었고 생명이 살 수 있는 조건으로 평형을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앞으로 5억년동안은 온난화가 가속되면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적으로 지구 온난와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하지만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이동하려면 아직 멀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앞으로 한참 동안 증가할 것이란 이야기다. 앞으로 이산화탄소가 바다로 유입되면서 대기 중 농토가 감소하면 나무를 비롯한 식물들은 더 이상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된다. 그후로 지구에는 악재가 계속되낟. 얼음층이 녹으면서 적도 지방에 홍수가 덮치고 따뜻해진 바닷물은 성층권까지 증발하고 지구는 서서히 말라간다. 지구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할 것이다. 그대로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고 심해 바닥의 퇴적층에 저장되었던 이산화탄소까지 대기에 유입되어 온난화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결국에는 이 기체마저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앞으로 35억년 후에 어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바싹 마른 바위 외에는 가져갈 게 없을 것이다. 지구의 일생을 펼쳐놓고 보면 시작과 끝이 매우 비슷하다. 메마른 불모지에서 시작하여 활기찬 생명으로 우글대다 다시 메마른 불모지로 끝난다. 지구의 일생을 십억년 단위로 펼쳐보면 대륙이 나타나고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생명 활동에 필요한 수준 이하로 떨어지고 바닷물이 끊어오르고 지표면이 바싹 구워지면서 완전히 소독되고 지구가 죽음의 나선운동을 시작하면서 태양에 빨려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천문학자들은 지구의 미래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

 

대멸종은 여러 번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공룡을 쓸어버린 운석충돌이다. 그리고 지금이 또 한번의 대멸종 시기라 학자들은 본다. 인간이 환경을 바꾸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생태계가 거기에 적응할 시간이 부족하고 종들은 빠르게 사라진다. 종들이 사라지는 속도는 과거의 대멸종과 맞먹을 정도이다.

 

인간이 대멸종을 불러올 수 잇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된 것은 과거에 멸종직전에 갔던 사건 때문이었다. “9~135000년전 아프리카 대륙은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화석에서 채취한 DNA를 분석해보면 당시의 인구수에 심각한 병목현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잇는데 학자들은 그 무렵의 인구가 2,000명 내외까지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멸종직전의 인류는 뇌의 용량을 키우고 더 영리해지는 방법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자신이 부른 대멸종도 넘길 수 잇을지는 의문이다. 물론 인간이란 종 자체가 멸종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

 

문명이 살아남는다면, 지구상에서 생명 자체가 멸종하기 전에 우주로 나가 생명을 퍼트릴 수 잇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생명을 영원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우주 자체도 끝이 잇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시간이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로 장구할 뿐이다.

 

별은 우주가 어렸을 때 사방에 퍼져있던 기체로부터 탄생햇다. 빅뱅이 있고 약 140억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의 기체는 사라졋고 늙은 별들이 자신이 지닌 기체의 일부를 외부로 방출하고 잇다. 이 기체는 우주 초기의 가벼운 기체가 아니라 핵융합을 거쳐 개조된 무거운 기체이다. 외형상으로는 재활용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효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이 재활용 사이클은 완전히 멈출 것이다. 결국 끝까지 남는 것은 적색 왜성이다. 이들은 거의 1조년 동안 핵융합을 근근히 유지하면서 간신히 빛을 발할 것이다. 10조년이 지나면 드디어 적색왜성까지 모든 연료를 소진하게 된다.” 은하의 모든 별이 죽은 후에도 연성계를 이룬 죽은 별들이 합쳐져 다시 핵융합반응을 일으키는 별이 되는 간간히 일어날 수 있으니 “100조년 후, 또는 그보다 먼 미래에도 은하수에서 별이 생성될 수 있다. 그래도 은하수는 빛의 상당부분을 잃는다. 지금은 4000억개에 달하는 별들이 빛을 발하지만 100조년 후에는 100개 남짓한 왜성들이 핵융합 한계 온도를 간신히 넘긴 상태에서 희마하게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별의 시대는 이것으로 끝이다. 자연은 은하수의 에너지 효율을 서서히 저하시켜 종말로 몰고간다.” 그리고 물질 자체도 사라질 것이다. “10 100승년이 지나면 양성자는 모두 붕괴되고 별들도 사라지고 블랙홀도 모두 증발한다. 남는 것은 뉴트리노와 전자, 양전자, 그리고 관측가능한 우주보다 파장이 긴 광자들뿐이다. l기에 일어나는 모든 물리적 과정은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우울한 미래이다. 현재의 천체물리학에선 우주는 무한히 그리고 더 빨리 팽창할 뿐 다시 수축할 것으로 보지는 않으니 엔트로피를 리셋할 이벤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주는 식어가면서 죽은 상태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은하가 완전히 증발하려면 100*10억년쯤 걸린다. 이것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이해하기 위해 시간 스케일을 다시 조정해보자. 100조년을 1년으로 간주할 때 우주의 나이 137억년은 10시간에 해당된다. 이제 시간을 더 앞축해 은하가 모두 증발할 때까지 거리는 시간을 1년으로 잡아보자. 그러면 이 달력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빅뱅은 1우러1일 새벽 0시에 있었고 지금 우리는 그로부터 13초분의 1이 지난 시점에 와있다. 제야의 종이 이제 막 울리기 시작하는 새해 벽두이다. 마술 같은 사건으로 가득 찬 이 우주에서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그게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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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자유 시장과 복지 국가 사이에서
토니 주트 지음, 김일년 옮김 / 플래닛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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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독재와 함께 하지 않을까?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1945년 연합국이 승리를 거둔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불황과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 에서 떠나지 않앗다. 전후의 시급한 과제는 이 엄청난 승리를 자축하고 나서 전쟁 이전의 일상응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1914년에서 1945년 사이에 겪었던 경험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게 해줄 방법을 찾는 것이엇다.”

 

‘1984’는 전후 유럽의 분위기를 가장 잘 나타낸 작품이다. 48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아내를 잃고 자신의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오웰의 절망에서 태어났지만 개인적인 불행보다는 전체주의는 언제든 가능하다는 아마도 전체주의가 미래일 것이라는 절망이 더 컸다. “수백개 사단을 거느리고 동쪽에 버티고 있는 붉은 군대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에서 득세하고 있던 공산당과 노동조합.” 국무장관 마셜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본 광경이다. “마셜 플랜은 2차대전 이후의 상황이 1차 대전 히우에 벌어졌던 사태들보다 더 나쁜 결말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산물이엇다.”

 

히틀러가 몰락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그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일부 국외자들은 더러 최소한 그는 독일인들에게 일자리를 되돌려주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트탈린이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었든 간에 최소한 그는 소련을 대공황으로부터 지켜 냈다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기차가 제 시간에 맞춰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무솔리니에 관한 농담조차 그 행간에는 다음과 같은 항변이 담겨 있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두번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으로 문명을 되돌리는 일은 가능해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했던 사람은 바로 메이너드 케인스였다. 영국의 클레먼트 애틀리, 프랑스의 드골, 그리고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에 이르기까지 당대 혁신적인 법안의 통과를 이끌었던 일련의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케인스 역시 천성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당대 대부분의 주요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케인스에게 매우 익숙했던 평화로운 시절에 태어난 노신사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충격적인 대격변의 시절을 겪은 자들이엇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로 돌아갈 수는 없었고 그 시절의 가치를 그대로 되살리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전간기에 자본가들은 이미 스스로 자기 이익을 최선으로 지켜낼 능력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뭔가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그일은 국가가 해야할 일이었다.

 

그 결과 아주 역설정인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에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불릴만한 변화들 덕분에 자본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전후 초창기에 정책 논쟁은 도덕적인 성격을 띠었다. 실업, 인플레이션, 그리고 농민들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지를 내팽개치고 극우정당으로 달려가게 만든 농산물 가격폭락 등은 단지 경제적 쟁점이 아니었다. 성직자에서부터 세속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당시 모든 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문제들을 공동체의 윤리적 일관성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간주했다. 모두가 국가를 믿었다. 이는 전후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과 얼마 전에 경험했던 끔찍한 공포를 두 번 다시 겪고 싶어하지 않았고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의 자유를 제한하는데 기꺼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한세대를 프랑스에선 영광의 30년이라고 불렀고 이 시절의 정점에서 맥밀런 수상은 이렇게 장담했다. “’이렇게 좋은 시절은 앞으로 다신 오지 않을거요.’ 그가 옳았다. 극단주의 세력이 다시 부상할지 모른다는 우려는 자취를 감추었다. 서양은 번영과 안녕의 황금시대에 들어섰다. 거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편안한 거품에 파묻혀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을 누렸고 희망찬 시선으로 미래를 기대했다.”

 

전후 사회민주주의의 기적은 보편주의란 마술에 의해 성취된 것이었다. 중간계급의 공포와 불만이야말로 파시즙ㅁ을 권좌로 불러들인 원동력이었다. 중간계급을 민주주의 지지자로 돌려세우는 일은 전후의 정치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 보편주의의 마술이었다. “중산층은 더 이상 소득에 견주어 혜택을 받지 않았다.” 이전에 복지란 중산층에겐 단지 돈만 내고 자신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젠 무상교육에서부터 무료 혹은 저가로 제공되는 의료 혜택, 공공연금, 실업보험에 이르기까지 노동자, 빈민층이 누리는 것과 똑같은 혜태ㅑㄱ을 누렸다.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유럽의 중산층은 1960년대에 이르면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1914년 이후 그 어트 때보다 높아졋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저자는 영광의 30년이 가능했고 무려 한 세대동안 잘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고 말한다. 지적 혁명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맹신과 사직인 이익 추구가 항상 공익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완전히 끝장났다. 두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람들 대부분은 일상생활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전시경제는 전쟁이란 목적을 위해 온 나라를 전쟁기계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그러면 평화를 위해서도 같은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시장은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 그 빈틈을 메워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특히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란 분배의 개념이엏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규제받지 않는 경쟁이 낳은 결과에 분개햇다. 그들은 급전적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더 나은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해줄 가치들을 되찾으려 했다. 베아트리체 웹 같은 영국의 초기 사회민주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를 공교육, 공중보건서비스, 의료보험, 공원과 운동장, 노약자와 실업자에 대한 공적지원 등으로 규정했다. 정부가 이러한 일들을 맏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대미문의 것이엇다. 2차대전 이후 사회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재정을 운용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임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영광의 30년은 그 자신의 영광 때문에 무너졌다고 저자는 말한다. 영광의 30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공동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위해 국가가 나서야 된다는 합의였으며 국가에 대한 신뢰였다. 그러나 국가의 성공은 자신의 무덤을 팠다고 저자는 본다.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자들에게 복지국가와 그 제도들은 과거의 딜레마에 대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일상적인 삶의 조건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지는 지루한 일상 그 이상이 아니었다. 60년대 중반에 대학에 입학한 베이비붐 세대는 다른 시절을 겪어보지 못했다.” 복지국가의 합의는 중간계급의 동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 직후 그 동의의 이유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은 복지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지적 혁명을 뒤집어놓았다. “위대한 이상을 품고 1960년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는 결국 자유주의를 파괴해버렸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그 세대의 일원인 케밀 파야의 말이다.

 

더군다나 영광의 30년의 성과 자체가 그 시절을 가능하게 했던 지형을 부수어놓았다. “중간계급에게 실제로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든지 간에 뉴딜의 개혁정책들과 스칸디나비아의 사회민주주의, 영국의 복지국가는 모두 육체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지지에 우선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1950년대 내내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는 지속적으로 파편화되면서 감소했다. 전통적인 공장 노동자와 광부, 그리고 운수업 종사자에 대한 좌파의 집착은 자동화와 서비스업의 부상, 그리고 여성 노동자의 증가로 더 이상 설자리를 찾지 못했다.”

 

정치기반이 흔들리는 가운데 중간계급도 변했다. “워싱턴에서부터 스톡홀름에 이르기까지 지난 시절의 개혁가들은 모두 정의, 기회균등 혹은 경제안정 같은 목적을 공유했고 이러한 목적은 공동의 노력으로만 달성할 수있다고 확신했었다. 지나치게 억압적인 하향식 통제와 조정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이런 문제접들을 사회정의를 위한 비용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비용을 기꺼이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정의란 목적이 이미 이루어진 시절만 경험한 젊은 세대에게 그런 목적은 더 이상 호소력이 없었다. 대신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그 시대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잡았다. ‘네 멋대로 하라’ ‘감정을 해방하라’ ‘전쟁 대신 사랑을 하자이러한 목표들은 본질적으로 사적인 목표일 뿐 공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하다. 60년대의 정치는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으로 전개되었다. 개인적 정체성, 성 정체성, 문화적 정체성 들 정체성의 문제가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이러한 정체성의 정치란 급진주의적 정치의 파편화와 맥이 닿아 있었고 다문화주의란 그럴듯한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 좌파가 된다는 것은 자기본위적인 자기개발적인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자신만의 관심사에 매몰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였다. 전후 수십년간 이어져온 합의는 붕괴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그러나 확실히 부자유스러운 합의가 사적 이해관계의 절대성을 둘러싸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위너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란 통칭되는 우파의 탄생은 그들의 적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70년대 중반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기존 패러다임이 국가의 적극적 개입과 공동선의 추구였다면 새로운 세계관은 마거릿 대처의 악명 높은 명언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이다.”

 

정부가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이고 사회따위는 없다면 국가의 역할 역시 다시 한번 조정자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되어야 햇다. 이제 정치가가 할 일은 개인들의 삶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엇다. 케인스식 합의와 비교해보면 사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숭 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의 기능이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게 하는 수단을 제공하는 데 그친다면 그런 자본주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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