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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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이 왜 무너졌는가에 대해선 많은 말들이 있어왔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다. 문제는 왜 로마제국이 그것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을 막지 못했는가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로마제국 자체의 문제 때문에 그랬다. 둘째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막기엔 로마제국 자체의 역량이 부족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생적 원인과 외생적 원인 두가지라 할 수 있다.

 

내생적 원인으로 보는 대표적인 견해는 기번의 것이다. “에드워드 기번은 잘 알다시피 서로마제국 멸망의 원인을 내부적 요인에서 찾았다. ‘로마의 쇠퇴는 터무니없는 거대함이 빚어낸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결과였다. 번영의 이면에는 부패 요소가 만연해 있었고 파괴의 원인은 정복의 크기로 증대되었다. 그러다 세월 혹은 재난에 의해 인위적 토대가 허물어지자 그 비대한 구조물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

 

기번의 견해는 덕의 상실이라 요약할 수 있다. 로마는 지배계층의 자제력과 같은 덕 때문에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성공은 그 덕을 깎아내렸다. 지배층의 타락과 함께 성공의 원인이엇던 덕은 사라졋고 제국은 무너졌다. 기번의 논리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기번이 멸망의 원인으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그 논리의 연장선이앋. “기독교의 교리논쟁으로 로마제국에 내분이 일어났고 수도승이 될 것을 권장함에 따라 사회지도급 인사들의 정치참여가 줄어들었으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정책을 옹호하여 로마의 전쟁기계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5세기 서로마제국의 붕괴는 동로마의 상황과 반드시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로마제국은 6세기에도 존속했고 나아가 융성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서로마 시스템 속에서 죄악으로 간주된 모든 요소는 동로마에도 있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동로마가 더 기독교적이었고 교리논쟁도 더 심했다. 동로마는 또 서로마와 같은 경제적 토대 위에서 서로마와 같은 정부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동로마는 살아남았고 서로마는 멸망했다. 따라서 그것만을 보더라도 제정 후기 서로마의 시스템에 고유의 내적 결함이 있어 스스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다는 식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4세기까지도 로마제국의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잇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팍스 로마나의 본질은 로마화였고 로마화가 제국 시스템의 근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제국이 수립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의 피지배민족은 그들의 모국어외에 제국의 두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런 현상은 특히 부유층에서 두드러졌고 초기만 해도 어느 정도 필요에 따라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곧 제국의 많은 도시들에서 라틴어 문법학자들이 급속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학교들을 시작으로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유사교육기관이 제국 전역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4세기 무렵에는 제국 어디서나 문법학자로터 라틴어 교육을 받는일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의 바탕이 되는제국의 발전, 즉 가장 근본적인 변화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탈리아 이외의지역에 로마의 농촌과 도시를 닮은 풍경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로마와 로마 원로원을 무색케 할 절도로 광범위한 정치사회가 조성되었다. 라틴어와 라틴 문학이 로마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로마의 가치쳬게 전반을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고 거기에는 그런 교육만이 올바른 인간-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월한 인간-을 양성할 수 있다는의미가 담겨 있었다.” 올바름, 우월함의 기준은 정치였다.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란 의미이다.

 

로마화로 방대한 지역의 주민 모두가 로마인이 된 것이다. 로마는 더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나 이용가능한 문화적 개념이었다. 그로써 로마제국의 성공에 따른 가장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새로이 로마성을 획득한 로마인들이 정치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초대형 국가가 만들어내는 힘과 이익의 분배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문법학자에게 7-8년동안 교육을 받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지 않았다. 상당량의 돈이 드는 그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지주계급이엇다. 로마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이들이었다.

 

로마제국은 부유한 지주층만이 시스템에 진입할 수 잇었다. 제정 초기에 그 집단ㅇ속하려면 (지자체의 실권을 쥔) 참사회원이 될 정도의 토지와 개인적으로 문법학자를 두고 자녀를 교육할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것은 상당한 수입을 필요로 했다. 정치에 적극 참여한 지주층은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의 태반은 아직도 정치참여에서 배제된 농부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초라한 수확에 세금이나 터무니없이 매기는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마라타쿠르레니라는 이름의 산적 때는 제국의 징세원을 가장하여 농부들 재산을 갈취하는 식으로 북부 시리아에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의 행위가 먹혀들었다면 국가의 세금징수가 어떠했을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제국 인구의 태반은 시스템의 혜택으로부터 베제되거나 혹은 사소한 ㅎ택밖에 받지 못했다, 그것은 로마제국은 언제나 상류층의 이익 위주로 움직였다. 로마제국은 인구의 5%도 안되는 사람들이 부의 80% 아니 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의 중심에 바로 법으로 지주층의 소유권을 인정하고 보호해준 중앙정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실제로 로마법의 상당부분은 재산문제에 관련돼 있었다. 기본적 소유권, 소유권의 활용방법(매각, 장단기 임대, 소작을 주는 일 등) 그리고 혼인 재산계약, 상속, 증여 등을 통해 세대 사이에 이루어지는 6재산의 양도 같은 문제가 그런 것들이었다. 서슬퍼런 로마의 형법도 소유권 보호에 단단히 한몫을 하여 좀도둑 이상의 도둑질은 거의 사형으로 다스렸다. 훗날 로마 못지않게 농업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불평등한 토지분배에 기반을 둔 영국의 양반도 이와 비슷했다. 제인 오스틴이 사랑, 결론, 재산 양도에 관한 고상한 소설을 쓸 무렵의 영국도 도둑질한 자는 채찍형(10페니까지) 낙인형(4실링 10페니까지 교수형(5실링 이상)에 처했다.”

 

대체로 국가는 정부기구의 모든 분야에서 속주 지주계급의 행정력에 크게 의존했고 징세문제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세금의 효율적 징수는 지주계급의 세금납부 의지에 달려있었다다.” 무산자들이 막대한 수적 우세의 이점을 누리는 상황에서 모종의 다른 기구가 그것을 막지 않았다면 그 상황은 분명 부의 재분배로 이어졌을 것이다. 4세기에 이 모정의 다른 기구는 지난 몇세기와 다를 바 없이 로마국가였다. 지주들 뒤에는 그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집행하여 수적 열세를 만회하게 해줄 능력을 지닌 국가가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지주들이 로마 시스템에 참여한 방식은 조구받기식 등식에 입각한 것이엇다. 지주들이 국고에 돈을 넣어주면 국가는 엘리트 지위의 기반이되는 그들의 부를 보호해주었다. 4세기에는 받는 비율이 주는 비율을 훨씬 웃돌았다.”

 

로마제국은 지주를 위한 지주에 의한 지주들의 국가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여전히 4세기까지도 그 시스템은 지주들을 위해 잘 돌아가고 있었고 지주들의 지지는 확고했다.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는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기독교가 제국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관점도 설득력이 없다. 로마제국은 언제나 종교와 이데올로기적 통합을 쉽게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로마 제국주의는 로마야말로 주신들에 의해 세계를 정복하고 문명화할 운명을 지녔다는 일관된 신조를 펼쳐왔다. 신들은 로마제국에 인류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라는 사명을 부여했을 뿐아니라 활제를 직접 뽑고 영감을 불어넣는 일에도 관여했다. 국가와 신의 관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신속히 그리고 놀랄 만큼 쉽게 조정되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주신은 기독교 신이 되엇고 기독교로의 개종과 구원이 인류가 구가할 최상의 상태로 여겨졌다. 제국이 세상에서 신의 뜻을 집행하는 신의 도구라는 주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달라진 것은 신의 종류엿다.”

 

저자는 모든 문제는 지정학의 문제였다고 말한다. 동로마에 비해 서로마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양제국이 맞닥뜨린 서로 다른 운명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 동로마가 소아시아로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기다란 띠 모양의 비옥한 속주들을 북동쪽의 침입자로부터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다. 반면에 서로마는 위태롭기 짝이 없는 라인강과 도나우강으로 이어진 국경지역을 지켜야 했다.”

 

그런 조건은 제정 초기부터 같았지 않은가? 문제는 3세기에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라 저자는 말한다.

 

제국의 기초는 군사력이다. 제국이 건설될 수 있는 것도 제국이 유지되는 것도 제국이 멸망하는 것도 군사력에 달렸다. 군사력이 강하면 제국을 건설할 수 있고 군사력이 충분하다면 제국은 유지되며 군사력이 약해지면 제국은 무너진다. 제국의 운명은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모든 힘이 그렇듯 무력은 상대적이다. 그 무력이 강한지 충분한지를 결정하는 것은 지정학적 환경이 결정한다.

 

로마의 위기는 3세기에 찾아왔다.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로마제국의 지정학적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산 왕조으이 탄생은 결코 현대 이라크와 이란 역사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사산 왕조의 흥기로 로마는 100년 동안 그럭저럭 유지하고 있던 동방에서의 헤게모니를 완전히 상실했다. 로마제국의 전략적 위치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친 것이다. 페르시아의 새로운 초강대국 사산왕조는 3세기에 로마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주저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4세기 로마인들에게 제국의 안전에 가장 큰 위협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두말없이 동방의 페르시아를 지목했을 것이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로마제국의 능력을 쥐어짜게 만들었다. “로마는 동방의 적을 상대하면서 제국의 다른 국경들도 방어해야 하는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런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4세기 말 로마는 몸집도 불어나고 체질도 바뀐 새로운 군대를 조직햇다.”

 

전략적 환경의 변화는 정치의 중심을 원로원에서 군대와 관료층으로 옮겨놓앗고 정치의 무대를 로마에서 국경에 가까운 변경도시로 옮겨놓았다. “제국의 정치적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곳은 더 이상 로마의 원로원이 아니었다. 제국의 운명은 국경지역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기동야전군의 사령관과 제국 수도의 고위관료들이 좌우했다.” 지정학적 압력이 증가한 결과였다. 군대는 언제나 로마 정치게임에 끼어왔지만 그 비중은 더 높아졋다. “군대와 정치의 놀라운 협조체계는 로마제국의 권력의 지형도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로 인해 군대. 황제, 관료들이 이탈리아를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황제도 여러 명 필요해졋다.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은 라인강 국경지역과 너무 멀고 트리어와 밀라노는 동방과 너무 멀어 황제 한 사람이 3대 국경지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었다. 징치적으로도 황제가 한곳에서만 부를 베풀어서는 그 많은 군지휘관과 관료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제위 찬탈의 위험이 상존했다. 3개 지역 군대 모두 황제에게 공정한 떡고움을 기대했다. 따라서 황제 한 사람이 장기간 단독 지배를 하면 반드시 분란이 일어났다.”

 

3세기의 위기로 로마의 정치구조는 급변했고 늘어난 군대와 관료는 제국의 재정에 압박을 가했다. “학자들은 제정 후기 로마군 병력을 40만명에서 60만명 사리오 본다. 그보다 규모를 낮춰 잡는다 해도 3세기 초에서 4세기 중반 사이 로마군은 애초의 30만명에서 10만명이 늘어나 최소한 40만명은 되었을 것이다. 로마의 재정지출 비붕이 가장 큰 항목은 언제나 군비엿다. 따라서 군비가 1/3만 늘어나도 제국이 거둬들여야 하는 세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재정압박에 시달린 제국은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재정개혁에 들어간다.

 

국가개조의 효과는 그 즉시 나타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 3세기 말에 로마는 전략의 안정화를 어느 정도 기할 수 있게 되엇다. 동방전선의 증강된 병력에 급여를 지급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들어선 뒤로 로마가 재무구조의 안정을 기하는데만 무려 5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또 그 과정을 감독하느라 중앙 행정기구도 몹시 비대해졋다.”

개혁은 성공적이엇다. 개혁 이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협은 저지되었고 동방은 안정되엇다. 그러나 마른 수건까지 쥐어짠 그 개혁으로 제국의 재정력은 한계에 달한 상태가 된다. 한계에 달한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응할 수 없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로마의 영토확장은 라텐 문화와 야스트로프 문화라는 두 물질문화권의 중간지역에서 멈추었다., 두 문화는 일반적인 삶의 55ㅓㅇ격에서 몇가지 중요한 차이저을 보였다. 로마에 정복도기 전 유럽의 라텐 문화권은 마을 그리고 도시라고 해도 좋은 그보다 조금 규모가 큰 거주지를 형성했다. 그 문화권의 일부 지역에서는 주화가 사용되기도 했고 문자해독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도 그가 정복한 라텐 지역들 가운데 적어도 몇몇 부족 특히 갈리아 남서부 지방의 아이두이족들 사이에 복잡한 정치조직이나 종교조직이 보현화되더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이것은 라텐 문화권이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전사, 사제, 장인계급을 부양할 식량생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와 달리 야스토르프 문화는 낙농업을 영위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는 생활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주화도 사용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문맹이었으며 서기 1세기까지도 번듯한 거주지는 물론 마을조차 형성하지 못했다. 분화된 경제활동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게르마니아와 대체로 일치한다. 이런 경제권에선 투자효율이 절대 좋을 수 없다. 무력은 공짜가 아니다.

 

중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국은 농업과 목축을 겸하는 중간지대에서 농업에 의존하여 안정을 기하려는 경향이 짙다. 중간지대의 현지 생산력만으로는 주둔군이 필요로 하는 군량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르마니아는 정치적으로 심하게 분열돼 있어 로마에 정복된 비옥한 지역의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에서 배제된 것은 군사적으로 강대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라텐 문화권과 야스트로프 문화권은 기후학적으로 볼 때 지중해성 기후대와 대륙성 기후대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로마제국의 팽창과 멸망을 기후대의 변화란 변수로 해석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페이건은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로마의 장점은 3가지,즉 잘 조직된 군대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브라이언 페이건)

 

대륙성 기후대의 확장과 함께 그에 맞는 야스트로프 문화권의 게르만족이 남하한 것이라 페이건은 해석한다. 물론 단순히 기후의 변화만으로 게르만족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세기에서 5세기까지 유럽의 게르만족은 인구는 큰폭으로 증가했다. 인구 규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식량인데 게르만족의 경우 농업혁명으로 곡물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인구가 증가한 것이다.” 곡물생산의 증가는 다른 경제분야도 촉진해 철의 생산, 도기, 유리, 귀금속 제품 의 생산 등도 증가했다. 4세기 무렵 게르마니아에선 경제혁명이 일어났다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혁명은 사회혁명으로 이어졌다. “게르만 유럽에는 지배적인 사회 엘리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제혁명은 사회적 분화를 촉진했다. “경제혁명으로 창출된 부는 고르게 분배되지 않고 특정 집단에 편중돼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근대의 산업력명이나 최근의 세계화로 창출된 부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부는 집단 사이에 치열한 경쟁을 유발했을 것이다. 또한 그 부가 막대할 경우 그것을 차지한 집단은 기존 권력구조와는 다른 새로운 권력구조를 창출했을 것이다.” 그 결과 정치적으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게르만족은 서서히 몇몇 집단으로 통합되어 갔다. “게르만 동부나 서부 모두 새로운 부가 증가하자 종주권을 차지하기 윟나 쟁탈전을 벌였고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군대도 필요해졋다. 그 과정에서 4세기 게르마니아의 특징인 보다 규모가 큰 정치연합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4세기까지도 게르만족은 위협이 아니었다. 켈트족과 마찬가지로 단합할 줄 모르는 특성때문이다. 고만고만한 크기의 정치연합에 그친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에서 병력을 제공하는 동맹자이거나, divide and rule의 전략에 따라 로마의 계략에 따라 자기들끼리 싸우는 장기말일 뿐이엇다.

 

그러나 훈족과 함께 모든 것이 변했다. 동쪽에서 훈족이란 당구공이 날아오면서 하나씩 하나씩 게르만족을 서쪽으로 밀어냈다. 게르만 부족이 하나씩 서로마의 영토로 들어올 때마다 제국은 납세자들이 학살당하고 농토가 황폐화되어 세입을 잃었고 게르만족이 영토를 차지하면서 납세자를 뭉텅이로 떼어주어야만 했다.

 

로마가 상대해야 했던 외부의 무장세력은 총 11만에서 12만명 정도였다. 이 외부침입자들이 불러일으킨 원심력 때문에 5세기 말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 신생왕국으로 하나둘씩 분열돼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세력을 개별집단으로 헤아려보면 각 집단의 병력은 수십만명이 아닌 수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압도적 병력이 아니다. 375년 서로마는 적어도 30만의 병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그것이 바로 서로마제국 붕괴의 실상을 보여주는 요소가 될 수있다. 서로마제국은 13세기 몽골족의 침략을 받은 중국과 달리 한순간의 정복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만족들은 당초 자신드르이 정주지를 세울 정도의 군사력만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로마제국의 힘을 소진시켰고 그로ㅓ부터 독립왕국을 수립하는데는 적어도 2-3세대의 기간이 걸렸다.”

 

로마제국은 일시적인 상실이거나 영구적 상실이거나에 상관없이 영토를 잃을때마다 국가의 생혈인 세수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그에 따라 제국이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도 크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서서히 제국은 말라죽어야 했다.

 

동로마는 서로마가 그냥 죽게 놔두지는 않았다. 40%의 병력을 항시 페르시아 전선에 묶어두어야 하고 그외의 변경도 방어해야 하는 형편에서도 할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할만큼은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서로마를 지키기엔 턱없이 부족햇다. 4세기에 이미 한계까지 올라간 재정부담은 서로마는 물론 동로마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한계는 제국 붕괴에 필요요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5세기 서로마제국은 만족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제국이 흔들리자 제국의 기둥인 속주의 지주들 또한 불편한 진실에 맞닥뜨려야 했다. 국력의 약화는 그들이 지니고 있던 모든 기득권을 위태롭게 했다. 토지에 기반을 둔 지주들로서는 새로운 지배세력과 손을 잡는 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도모할 수 있는 길이었다.”

 

로마에 이어 유럽에 등장한 제국, 즉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이 9세기 말에 붕괴하는 과정은 서로마제국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카롤링거 왕조의 위대한 정복이 이루어진 뒤에도 항상 재원부족에 시달렸고 그런 상태가 2-3세대 넘게 지속되었다. 프랑크 제국은 특히 서로마제국을 500년동안 떠받쳐준 요소였던 재분배적 과세권을 결코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지방 엘리트들의 지원을 얻는 일에 중앙의 돈을 스게 되어 국가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지방엘리트들은 프랑크 제국 수립 후 100년만에 자치를 도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때로는 격렬한 투쟁 없이도 그것이 수월하게 얻어졌다. 몇세기 동안 보유했던 조세기반을 외부세력에게 빼앗긴 서로마제국과 달리 프랑크 제국은 통제할 자산이 처음부터 적었기 때문에 재정의 파탄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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