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책의 저자 카렌 암스트롱은 유대교 전통의 3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 관한 권위자로 유명하다. 특히 이슬람에 관한 저서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신이 없는 종교인 불교에 대해 쓴 이책은 특이할 수 밖에 없다. 팔리어 경전들이 스리랑카에서 세계로 알려진 후 초기불교 특히 붓다 생전에 관한 연구는 전기를 맞았다. 대승불교에 의해 왜곡되고 사변화된 불교보다는 붓다 생전의 소박하기 때문에 힘이 있는 원래의 진면목에 다가가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그 이후 많은 저서들이 나왔다. 이책도 팔리어 경전을 근거로 쓰여진 책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책은 특이하다. 붓다의 생애에 관해 쓰여진 이런 류의 책은 불교 교단의 승려나 전문 불교학자가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종교학자 그것도 일신교 전통에 익숙한 저자가 쓴 이책은 불교 내부의 사람이 쓴 책들과는 다른 뉘앙스를 갖고 다른 접근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불교 내부인이 쓴 책들은 붓다의 다름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도 전통을 대척점에 놓고 그 전통의 맹점에서 붓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불교 외부인이 쓴 이책은 붓다의 같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책은 붓다가 활동한 시기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기원전 6세기는 붓다와 공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유대교를 혁신한 예언자들이 나온 시기이다. 이 시대를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로 불렀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대이다. 왜 축의 시대가 서로 교류가 없는 문명권에서 동시에 나왔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당시 축의 시대에 들어갔던 문명의 공통점은 전환기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리고 그 전환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은 지금 우리와 같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성의 시대. 공자의 중국도 붓다의 인도도 소크라테스의 그리스도 예레미아의 유대도 문명의 기초를 이루던 가치관들이 현실과 맞지 않게 되면서 불신당하던 시대였다. 인도의 경우를 보면 농업을 기초로 한 부족공동체에 적합했던 베다전통과 그 공동체의 질서에 근거한 카스트 제도가 무너지고 있었다. 상공업이 발전하고 도시가 등장하면서 과거 정착 농업공동체에 적합하던 종교 세계관은 현실과 맞지 않았고 카스트 제도에는 속할 수 없는 상인과 사업가, 은행가와 같은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족공동체에 기반한 공화제도 현실과 맞지 않게 되어 더 넓은 영역에 질서를 세우는데 적합한 왕정 그리고 왕정에 기반한 제국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과거의 가치관은 도시의 특징인 이기심과 야망, 탐욕, 경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욕망이 확대된 정복전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苦의 팔리어 둑카는 원래 괴로움이기도 하지만 원래 뭔가 어긋났다는 뜻이 더 강하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당시 사람들이 느낀 것은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이엇다고 지적한다. 그런 전환기를 살던 사람들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서는 이들이 생겼다. 당시 수 많은 현자들이 인도 문명의 중심이던 갠지스 강 유역을 돌아다녔다. 붓다 역시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붓다가 구하려 했던 새로운 비전은 당시 축의 시대를 살던 다른 현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다르다면 붓다는 그 해답을 본질적으로 깊게 들어간 것이 다르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낡아버린 주 문화의 본질을 재해석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제시했다.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였고 유대교의 예언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축의 시대의 현자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전통을 재해석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통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재해석해 원리를 추출하고 그 원리를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질로 생각해낸 것이다. 공자의 仁이 그러한 예이다. 즉 전통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 본질을 건져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한 것은 시대를 초월할 수 있었고 이후 문명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붓다에 대해 불교 내부인들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잇다. 저자는 붓다 역시 그러했다고 말한다. 붓다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는 보통 緣起라 요약된다. 요즘 말로 하면 인과법칙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 여기서 파생된 것이 실체는 없다는 무아론이고 실체가 없으니 영원한 것이 없게 되므로 무상론이 파생된다. 그러나 이런 교리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저자는 불교의 핵심은 깨달음의 핵심은 그것을 요가 달리 말해서 명상의 상태에서 직접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금욕 수행을 하기 전 붓다는 요가계열의 두 스승에게서 배웠고 요가 전통의 궁극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요가전통은 우파니샤드 전통에 기초하고 있었고 내가 곧 브라만이다 즉 내가 곧 우주라는 것을 깨달으면 열반에 이른다고 가르쳤다. 힌두교는 아직도 그런 전통을 따른다. 저자는 팔리어 경전을 통해 요가 전통에서 붓다가 無를 경험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본다. 그가 보았고 요가전통에서 본 무는 뒤에 空이라 말해지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러한 무의 경험을 저자는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신을 직접 체험한다고 했을 때 말하는 경험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명상을 풀면 다시 욕망에 사로잡히고 고에 물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붓다는 고행을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결국 붓다는 무아 즉 나라는 인격이 망상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의 근본은 자비심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삐긋하고 잇다. 물론 저자는 연기에 대해서도 말한다. 연기론의 논리적 결론이 무아론이니 꼭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무아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하고 있다. 나라는 인격이 망상이라는 것은 무아론의 내용이 맞지만 거기서 我는 '나'라는 말이라기 보다 실체를 말한다. 그리고 자비심을 핵심이라 하지만 자비심을 그런 수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 저자가 처음이다. 물론 자비심을 강조하면 왜 붓다가 교단을 만들게 되었는가를 설명할 수있고 그의 전도에 바친 45년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자비심이 깨달음의 근본이라 말하는 책은 이책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책의 저자가 불교 내부인이 아니라는데서 나오는 가치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붓다를 당시 세계사의 흐름에서 해석하고 당시 인도사람들의 마음을 설명하면서 붓다가 어떤 시대를 살았기에 그가 그런 수행을 했고 그의 가르침에 왜 인도인들이 열광했으며 어떻게 붓다를 받아들였는가를 잘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책의 가치는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대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어떤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가를 느끼게 한다는 데 있다. 평점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