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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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소설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훨씬 단순했졌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한 문장이다. 애덤 워커가 루돌프 보른을 만났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출발한 소설은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을 중심으로 두 인물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리고 참, 노상강도가 한 명 죽는다. 이 소설 속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살인'이고, 이 사건은 모든 갈등, 그러니까 워커와 보른의 헤어짐의 계기가 된다. 그나마 이 '살인' 역시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 극적인 의미가 희석되어 버린다.      

이 작품이 읽기 어려운 것은 소설의 중심에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소문들만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무엇이 소문이고, 무엇이 사실인가? '워커와 보른이 만났다'라는 단순한 이야기 위에 긴장감을 주는 것은 사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소문의 모호함이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 소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단어가 아닐 듯 싶다. 왜냐하면, 이 소문들은 누군가에서 말해지고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근친상간과, 살인과, 동성애와, 롤리타 컴플렉스로 이어지고, 일인칭으로, 때론 이인칭으로, 소설로, 녹음기로, 편지로, 일기로 기술된다, 마치 사실인양.  

금기의 단어들로 가득한 소문의 내용이 전개되고, 소설의 후반부에서 워커와 누나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기억은 해석에 불과하다' 는 <라쇼오몽>의 주제를 또 써먹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불안함은 잠시뿐. 폴오스터는 이 지점에서 이제껏 전개된 이야기에 다시 한 번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두면서 이전 소설 속에서 써먹었던, '물타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물타기'가 이전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물타기가 '소설'이라는 형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워커와 보른의 이야기가 다른 이의 이름으로 된'소설'로 출판될 것을 암시한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일뿐.    

이 책의 결말은 모호한 소문만큼이나 모호하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나면 몇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왜 사실은 안되고 픽션은 되는 걸까?  '보이지 않는' 이란 단어의 의미는 뭘까? 왜 저자를 바꿔야 할까? 왜 하필 소설일까? 물론 이 질문들의 답을 모른다고 해서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폴오스터의 최대 강점은 수많은 의문부호들로 가득한 모호함들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뛰어난 소설가이면서 완벽한 이야기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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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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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빠이 이상>이후로 읽은 김연수의 소설들이 모두 별로였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에 또 읽게 되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집들을 꾸준하게 발표하면서, 동시에 번역도 하는 것을 보면 김연수는 성실한 글쟁이임이 분명하다. 그의 소설들 역시 그의 성실함이 묻어나 있다. 이전에 몇 번 실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소설을 또 사서 읽는 것을 보면 그의 성실함이 좋은 결과, 다른 독자들은 이미 그런 좋은 결과를 보았는 지도 모른다, 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닐까 싶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의 시작부분은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또 '운동권'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대학생때 운동권이었고, 누군가는 누구랑 사랑에 빠졌고, 그러나 누군가는 붙잡혀서 곤욕을 치루고, 그다음에는 인생이 비비꼬이고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한 때 홍수처럼 쏟아졌던 운동권의 '후일담'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몇권 읽어본 독자라면 정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불 보듯 '빤'한 것 아닌가! 

이 소설 역시 그런 빤함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되면서 작가는 이런 빤한 스토리 라인에 좀 새로운 문제제기를 시도한다. 작가가 던지고 있는 의문은 그 모든 일들과 세상을 개혁하고, 대의에 목숨을 걸고, 화염병을 힘차게 던졌던 우리, 또는 나라는 존재가 '우연'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화염병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을 맞으며 지키려고 했던 모든 행위들이 어떤 역사적인 필연에 의한 것들이 아니라 단지 우연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개인들의 삶과 삶의 목표들은 지극히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과거와, 그들의 조상들의 과거와,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과거를 엮어가면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사실, 그의 답이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 답이 아주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답은 '나'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모든 행위는 '우연'이라는 공허한 근거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훨씬 더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이들의 삶이 얽혀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과 일본과 한국을 거쳐서, 또 주인공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인생역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결론이다.

역시나, 이 소설 역시 김연수의 다음 소설들을 읽을까 말까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새로운 문제제기를 시도하려는 그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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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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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의 규칙들을 제시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제목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진짜 명탐정, 또는 추리소설의 '규칙'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왠지 좀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작품 속의 단편들이 규칙에 갇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픽션이고, 따라서 탐정 역시 완벽할 수 없고, 작가 역시 완벽할 수 없다, 절대로! 이걸 모르고 있는 독자들이 있을까? 굳이 추리소설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약점들을 들추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건 마치 순정만화를 그리는 만화가가 백마 탄 왕자는 없고, 신데렐라나 캔디처럼 역경을 딛고 왕자님이나 테리우스를 만나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만화를 그리는 일과도 같다. 일종의 자학성 작품활동이라고나 할까!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자학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작가 자신이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 냉소적인데, 독자는 말할 것도 없다. 집중을 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한계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자학'의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단편은 이런 문제의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좀 더 진지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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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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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한국소설이다. 더군다나 처음 읽게 되는 신경숙 씨의 소설이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이유 아닌 이유(?)를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 소설에 대한 나의 불만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이 구태의연하다는 데에 있다.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평생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엄마, 자식들과 남편은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엄마와 남편의 의미를 깨닫는다. 이 소설은 이 이야기 틀로부터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이 소설에 감동한 다른 독자들처럼 훌쩍훌쩍 울기도 하고, '엄마'에 대해서 조금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감정이입은 모든 사람들이 알고 경험하고 살고 있는 '엄마'로 부터 시작된 것이지 소설 '엄마를 부탁해'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좀 심하게 말하면, 굳이 '엄마를 부탁해'가 아니더라도 군대간 아들을 만나러 온 '우정의 무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정의 무대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부탁해'가 기대고 있는 '엄마'라는 단어가 너무 안이하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만약 기존의 이야기들과 차이점이 굳이 찾는다면, 남편이 아닌 애인이, 엄마에게도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새로운 사실, 그러니까 엄마에게도 사생활이 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엄마와 이 소설의 화자,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시에 대체 왜 이런 시점을 택했는지 이해가 절대 안되는, 뿐이니까.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유일한 새로운(?) 시도는 아무 소득없이 잊혀진다.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집안의 중심이 되는 엄마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 그러면서 '개인'으로서의 '엄마'를 발견하는 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었다면, 엄마의 연인은 좀더 작품의 중심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 소설 속의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발휘해야 한다. 그랬다면 아마도 좀 더 새로운 '엄마'를 발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소설을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좋은 평가를 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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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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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소설의 고전들을 읽어보려는 목적으로 읽은 책이다. 이전에 브램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었는데, 이 작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은 발표시기가 비슷하다. <지킬&하이드>가 1886년이고 <드라큘라>가 1897년이니 약 10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두번째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수많은 공포소설들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드라큘라>가 수많은 뱀파이어 소설들의 원조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지킬&하이드> 또한 수많은 이중인격 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의 원조가 되어 왔다. 비단 공포물이 아니더라도 영화 <마스크>같은 코믹물 또한 '약'과 '마스크'의 차이만 있을 뿐,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두가지 인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두 영화 모두 같은 범주 안에 있다.   

세번째는  두 작품이 얻은 유명세에 비해서, 또는 뱀파이어와 이중인격이라는 소재에 비해서 작품이 지극히 정적이라는 것이다. 책을 펴기 전에 독자들이 상상한 뱀파이어와의 혈투나, 이리와 박쥐와 쥐들의 습격에 대한 인간들의 방어, 이성적인 지킬과 본능적이고 난폭한 하이드라는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극적이고 충격적인 반전은 없다. 아마도 이런 정적인 작품이 된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이것 또한 이 두 작품이 공통점인데, 이 두 작품 모두 하나의 시점에서 사건이 기술되지 않고, 여러주인공들의 진술에 의해서 사건이 기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시절이었고, 이 시기는 이성과 합리주의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공포 소설의 두 고전은 바로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당대의 작가들이 이성과 합리주의가 갖고 있은 어떤 부분을 공포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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