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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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앞의 두권을 작년에 읽고, 아마도 작년 초였던 것 같다, 최근에 3권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두권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말랑말랑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무겁고 음울하다는 것이다. 이 소설만큼 음울하다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소설도 없을 것이다.  

 

사실 1,2권을 읽은지가 일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앞의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책의 설명에 나와있듯이 이 세권의 책은 서로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그러니 앞의 내용을 전혀 몰라도 된다는 것. 3권은 소설 속의 시간 상으로도 가장 나중에 일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3권은 루카스와 클라우스, 그리고 어머니, 이 들 셋의 애증을 보여준다.

 

루카스는 자신의 쌍둥이 형제인 클라우스와 어머니를 찾으러 다닌다. 3권은 이들이 헤어지게된 이유와 이 들 가족이 겪은 비극을 건조하게 들려준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다. 루카스는 어머니가 쏜 총에 맞아 부상을 입고, 클라우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인 아버지의 '그녀' 집에 머물게 된다. 루카스는 재활원에 맡겨진 후 행방불명이 되고, 클라우스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다. 어머니는 끊임없이 루카스를 그리워하고, 루카스는 결국 클라우스의 집에 오지만, 클라우스는 루카스가 자신의 형제임을 부인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감정적이지 않고 관조적이며, 설명하지 않고 기술한다, 마치 소설 속에 그려지는 장면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그리는 작가의 냉정함이 섬찟하다. 소설을 다 읽고나면, 비록 앞의 이야기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소설의 이야기가 어떤 우화처럼 느껴진다.

 

누구나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있다. 하지만 오래되어서 단짝처럼 지냈던 형제처럼 친근할 것만 같은 '과거'의 실체는 고통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에게 얘기한다. 너는 내 과거가 아니었다고. 아니, 어쩌면 이런 구조는 나치 점령국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과도 비슷한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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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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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도 비슷한 내용의 독후감을 쓴 적이 있는데, 다시 그 생각을 하게 된다. 19세기는 다윈의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시대이고 그리고 그것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이성의 힘이다. 아마도 당대의 사람들은 '이성'으로 '신성'조차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성'이 '신성'에 도전한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조물주가 세계와 세계에 속한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자신의 분신인 아담에게 그 모든 것들의 이름을 짓도록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기원이 되는 종이 있다는 사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시기에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만한 공포 소설들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브램스토커의 <드라큘라>, 메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덧붙여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읽은 러브크래프트의 공포소설 까지!

 

이성과 공포라...... 언뜻 잘 연결이 되지 않는 것 같지만, 원래 극과 극은 통하는 법. 우리의 공포는 사실 우리의 앎으로부터 출발한다. 좀 이상한 논리로 풀자면, 모든 두려움은 무지함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무지함'을 견디지 못하는 이성 때문이다. 결국 알고자 할 수록 두려움은 더 커지는 법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이런 맥락에 있다.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아름다움을 원하는 것은 죄다. 수많은 공포소설 속의 악이 불멸을 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젊음과 자신의 아름다운 초상에 관한  오스카와일드의 괴담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늙음은 필연이고 젊음은 찰나이다? 아니면 삶은 유한하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성형 붐과 늙지 않는 여배우들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경박한 걸까? 만약 오스카 와일드가 이 시대에 살아다면 성형수술로 파멸해가는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모든 사실들 보다도 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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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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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무지하게 어렵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성>, <소송>과 장편 뿐 아니라 <변신>이나 <시골의사>와 같은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무지하게 어렵고 한없이 지루하다, 장편의 경우에는 더더욱! 두번째는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불안'이다. 카프카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불안은 때로는 어떤 걱정이나 근심이기도 하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존재에 대한 무력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불안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어보면 그의 예민함과 불안의 기원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과 아버지가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에 관한 내용을 가득하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또 카프카가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면에서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아버지로서의 '나' 자신과 카프카의 아버지가 크게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에서나,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이든 간에, 아래사람들이 보기에 윗사람들은 모순으로 가득해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카프카가 발견한 것은 모순된 아버지라기 보다는 모순으로 가득찬 현대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 모순적이고 난해한 소설들을 쓰지 않았겠는가! 의사 역시 마찬가지로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이다. 환자를 고칠 수록 돈을 벌지만, 그래서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병을 통해서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의사들의 목표가 왠지 진실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의사들 중에 여기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아마도 산부인과 의사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기가 많을 수록, 물론 적당한 수준까지만, 의사나 환자나 모두 행복하니 말이다. 산모는 환자가 아니니까.

꼼꼼하고 세심하게,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것처럼, 조목조목 써내려간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보여준 불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카프카가 묘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난해함과 불안함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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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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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사람들에게 <공중곡예사>를 추천해주고 나서 들었던 말중에 하나는 '너무 길다' 였다. 너무 길다? 사실 절대적인 분량으로 보면 그리 긴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보다 긴 소설이 얼마나 많은가! '길다'라는 표현을 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하다'는 것이고 지루하다는 것은 군더더기가 많다는 뜻이다. 십여년전에는 주위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최근에 수업 때문에 다시 읽어보니 그 이유를 좀 알 것 같다. 그 사람들 말마따나 좀 '길다'.

주인공은 당대 최고수인 사부를 만나 비장의 권법을 배운다. 권법을 배우는 데에 뭐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밥하고, 밥먹고-제자가 밥먹을 때 방해하는 사부는 꼭 등장한다-, 빨래하고, 청소하고, 물길어오고 등등등. 비장의 권법을 가르쳐 준다고 했는데, 훈련이란게 맨날 그 모양이다.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자질구레한 가사업무(?)에 익숙해질 즈음에 사부의 경쟁자가 등장한다. 사부는 경쟁자와 결투 중에 죽고, 제자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절치부심한 주인공은 사부를 죽인 원수와 운명의 한 판 승부를 벌인다. 현란한 손놀림, 발놀림, 드디어 필, 살, 기. 모두 다 알다시피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하늘로 붕 떠올라 공중에서 한 합을 겨룬 후에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먼저 주인공이 털썩 무릎을 꿇는다. 원수의 얼굴이 천천히 클로스 업 된다. 그가 씨익 웃는데.....헉, 입에서, 피가! 그리고 반대편의 주인공이 서서히 힘겹게 일어난다. 주인공이 승리한 것이다. 

월트가 공중부양술을 터득하여 공연을 하고, 사부를 죽인 외삼촌 슬림에게 복수하는 순간까지 만을 놓고 보면, <공중곡예사>는 어렸을 적 숱하게 봐왔던 중국 무협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듯 하다. 근데, 슬림은 죽었는데, 원수를 갚았는데, 끝날 때가 됐는데, 이 소설은 그 곳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월트는 슬림이 속했던 조직의 보스 밑으로 들어가고, '미스터 버티고'라는 술집을 차리고, 야구 선수 디지를 협박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고, 결혼하고, 늙고, 폐인이 되고...... 모든 무협 영화가 끝난 지점에서 이 소설은 다시 시작한다. 마치 무협영화의 지루한 후일담을 읽는 듯한 기분이다. 원수를 갚은 주인공은 하산하여 술집을 차리고, 속 깊은 옆집 아가씨와 결혼하고, 그들을 쏙 빼닮은 애들을 낳고, 아이들과 손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하지만 이런 후일담을 구구절절 얘기해주는 무협영화는 없다. 어떤 무협영화도 주인공이 원수를 갚은 후에 어떤 삶을 살다가 죽었는지를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왜냐고?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주위사람들이 이 소설이 지루하다고 한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익히 알고 있던 무협 이야기의 종착역에서 다시 출발하는,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공중부양술의 영웅 월트의, 험난하면서도 초라한 인생후반부가 너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하지만 이 소설의 지지부진해 보이는 보너스 트랙(?) 덕택에 <공중곡예사>는 '원더보이' 월트의 모험담이 아닌 '인간' 월트의 성장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변모한다. 아마도 작가가 이런 '변모'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알려준, 비범한 일들 속에 존재하는 평범한 진리가 아닐까 싶다. 다른 소설 속에서 폴오스터가 보여줬던 것 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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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4 사계절 1318 문고 24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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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도 우선 토끼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맘에 걸린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 그것도 아니라면 늑대나 곰과 같은 힘세고 멋진 맹수들도 많은데 왜 하필 토끼일까. 그리고 하나 더! 환타지라니! 근데 표지가 영...... 환타지 소설의 책표지라면 뭔가 의미심장하고 알쏭달쏭하고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횅한 풀밭과 아무 특징없는 토끼 한마리라니. 이 책에 대한 수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첫인상이 주는 불안감 때문에 1권만 샀다. 재미없으면 팔려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으면서도 결국 읽기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토끼가 주인공인 환타지라는 것이 대체 어떤 걸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귀엽고 겁많고 소심할 것만 같은 토끼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환타지는 어떤 것일까. 우선 슈퍼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초인적, 아니 초묘(?) 적인 토끼의 신비한 탄생, 여우와 개와 고양이와 인간을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능력을 갖게 된 토끼가 만들어어 내는 갖가지 영웅담! 근데 이건 너무 빤하잖아. 아마 애들도 이런 이야긴 시시해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마법에 걸린 토끼 공주와 왕자님과의 사랑이야기는 어떨까?  계모인 마녀의 마법에 걸려 토끼가 된, 물론 이것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같지만, 공주는 사랑하는 이의 눈물이 닿는 순간 마법에 풀리게 된다. 마녀가 풀어 놓은 늑대에게 쫓기던 토끼 공주는 우연이 왕자님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리고 여차저차 해서 이 둘은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또 여차저차해서 마녀를 물리치게 되고, 그리고? 뭐 그냥 둘이 잘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근데 이것도 영......  

1권을 읽고 나서 느낀 첫번째 생각은 이 소설 속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환타지'는 없다는 것이다. 표지 그림이 아주 잘(?) 보여주듯 이 소설이 보여주는 환타지 속에는 들판과 토끼 밖에 없다. 헤이즐, 파이버, 빅윅, 스트로베리, 댄더라이언 등등의 토끼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단지 풀을 뜯고, 엘릴(토끼어로 토끼들의 '적')을 피해서 도망다니고, 짝짓기를 위해서 암토끼를 찾아다니는 게 고작이다.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물리적 능력이래야 기껏해야 고양이를 혼내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들포드 마을을 떠나 워터십 다운에 정착하는 토끼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아니, 풀뜯고(토끼어로 '실플레이'), 도망다니고, 굴파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진진한 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언뜻 생각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지극히 '토끼'스럽다는 점이다. 앞서 내가 얘기한 슈퍼 토끼와, 마법에 걸린 토끼들와, 왕자와 공주님 이야기는 토끼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힘센 악당들을 물리치고,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마법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인간들의 '환타지'라면, 엘릴들로부터 꾀를 내어 달아나고, 짝짓기를 할 암토끼를 찾아 목숨을 걸고, 힘센 토끼(운드워트)로 부터 자신의 마을을 지켜내는 이야기가 바로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다.  

하지만 만약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가 인간들의 것보다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슈퍼맨과 공주님과 마녀가 사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속에 나오는 토끼들처럼 미래를 불안해 하고, 수많은 적(경쟁자)들을 피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워터십 다운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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