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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 델 토로 - 타로카드 & 한글 가이드북
토마스 히조 지음, 송민경 옮김, 기예르모 델 토로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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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고 델토로의 느낌이 잘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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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목표는 호러소설들을 읽는 것이었다. 스티븐 킹의 <스탠드>에서 시작해서, <죽음의 무도>를 읽었고, <죽음의 무도>에서 극찬했던 피터 스트라우브의 <고스트 스토리>를 읽었다. 만약 이 책을 올해 후반에 읽었다면 아마도 이 책이 올해의 책이 되었을 것같다. 비단 공포 소설로 국한시키지 않더라도 이 책의 완성도와 긴장감은 최고 수준이다. 오늘하루가 어제와 같고, 그래서 지겹고, 뻔한 내일이 올 것이라고 믿는 (아마도 방학 중인 학생들이 그 대상일 듯 싶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고 한 동안 지방 파견을 나가게 되었고, KTX를 자주 타게 되면서 고전 소설들, 예를들면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니나>안톤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을 읽으려 시도하였으나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고전을 읽는 것은 항상 힘든 일이다. 왜 그럴까? 지방 파견동안에는 몇번의 특강과 가을에 진행된 14시간짜리 강의 준비를 위한 책들을 읽었던 것 같다. 

 

사랑이 문학의, 아니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의 한가운데로 온 것은 언제 부터일까? 그리고 사랑이 차지하고 있는 이 위치는 영원한 것일까? 집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2011년 여름 동안에 내가 가장 그리워 했던 것은 '집'이 었던 것 같다. 집과 아내와 아이들과 등등등.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이 더 감동적이지 않았나 싶다. 2011년 올해의 책은 앙드레 고르의 <D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책 속에서는 삶과 사랑과 글과 글쟁이에 대한 명문들로 가득하다. 언젠가 '집'과 포근한 '삶'이 그리울 때 다시 한 번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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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내 이글루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었다. 한달에 한 명정도가 댓글을 남기는 것 같다. 그나마 가끔씩 들어오던 사람들도 최근에는 급격히 뜸해졌다. 내가 포스팅을 뜸하게 해선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작년이나 올해나 포스팅 수는 비슷하다. 원래 모든 것은 유행을 타는 법이다. 하물며 인터넷처럼 유행에 민감한 매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몇년 전만 해도 이메일 주소도 없었던 내가 이글루와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포스팅을 정기적으로 하는 성실한 블로거가 된 것처럼, 없던 것들은 생기고 생긴 것들은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것들은 시들해질 것이다. 이제 어쩌면 포스팅은 한물 간 유행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웹공간 속에도 '세월'이 흐르기 때문이다. 

포스팅을 시작한 2007년 부터 2011년 독서계획을 밝히는 지금까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조금씩 변했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젠가 더 이상 포스팅을 하지 않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팅이 시들해진 순간에도 난 어딘가에서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웃고 있을 것이고,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체를 이용해서 글을 올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부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내 생활과 도저히 뗄 수 없는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 그리고 다시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것, 언젠가부터 시작된 이 지루한 반복이 나에게만 즐거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운영하는 블로그에 들어가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양의 책을 읽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글을 써낸다. 내 경우를 말해보면 2002년 이후로 내가 알라딘 서점에 올렸던 서평은 270편이 조금 넘는다. 270권에 대한 독후감을 쓴 것이다. 하지만 270편이면 알라딘 서점에서 아주 평범한 블로거에 속한다, 적어도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알라딘 서재의 블로거 중 '만두의 추리책방'을 운영하는 '물만두'(필명)는 1800편이 넘는 독후감과 1500편이 넘는 게시물을 올렸다. 물론 엄청난 수의 게시물이지만 이 블로거 또한 숫자 상으로는 가장 많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굳이 물만두의 블로거를 언급하는 것은 그의, 아니 그녀의 게시물이 앞으로 더이상 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2010년 12월 13일 지병이었던 봉입체근염(inclusion body myositis)을 앓던 중 사망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녀가 자신이 죽기 한달전인 11월 17일까지도 무언가를 읽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만두에게 책과 글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세상의 '변화'와 웹공간의 '세월'을 얘기하다가 너무 멀리까지 왔다. 그녀의 얼굴을 알지 못했던 수많은 블로거들처럼 나또한 그녀의 블로그에 조의를 표했다. 그녀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그녀의 글에 너무 감동을 받았다거나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녀가, 그러니까 '물만두의 추리책방'이라는 인터넷상의 공간이, 책읽기와 글쓰기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책과 글이라는 것이, 그녀에게 그리고 그 둘을 끊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삶을 견딜 수 있는 위안과 구원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힘든 삶이든 평범한 일상이든 간에. 다시 말해서 세상의 변화와 웹공간의 유행이 아무리 거세게 요동친다 할 지라도, 그리고 그 요동치는 세상을 사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팍팍하다 할 지라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위안과 구원이 필요하며,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물만두라는 블로거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비록 물만두 자신이 쓰는 포스팅은 끝났지만 그녀의 서재에 추모의 글들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의 명복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동안에 늘 위안과 구원이 함께 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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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을 뽑아야 겠다고 생각한 것 이년 전 부터 였다. 우선 2008년에는 (책이 나온 해와 상관없이)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이 책을 뽑은 이유는 하나는 저자의 의견이 신선하고,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고, 무엇보다도 아주 쉽고 친절하게 잘 쓰여진 책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이라는 분야가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라는 것도 한몫했고, 장하준이 역사를 통한 증명을 택한 것도 한 몫했다.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가 얘기한 것처럼, '경제'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한 하는 것은 흔한 방식이 아니다.  

 

 2009년에 뽑은 올해의 책은 트루만카포티의 <인콜드블러드>였다. 아마도 2009년은 이 책때문에도 그렇지만, 하드보일드 소설의 해로 기억될 것같다. 그해에는 유난히 하드보일드 소설들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저자가 택한, 취재 후 재구성이라는 독특한 작업방식 때문에도 인상적이고, 일가족 살해라는 엄청난 재앙의 배후에 놓인 하찮은 살해동기 때문에도 인상적이다. 저자가 이 책의 주제는 이것이다라고 제시하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이 전하는 세계관은 책 제목처럼 cold bloody 하다. 덧붙여 내가 읽은 박현주씨가 번역한 책 중에 최고다.    

 

2010년은 거의 소설만 읽은 해인 것 같다. 올해 가장 좋았던 작가라고 하면 스티븐킹을 뽑겠다. <캐리>처럼 황당한 소설 뿐아니라 <쇼생크감옥과 리타헤이우드>, <스탠바이미>처럼 감동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다니! 그래서 올해의 책의 강력한 후보는 <스탠바이미>였다. 하지만 무릎 수술 때문에 병원에서 입원해 있던 중에 읽었던 <핑거스미스> 때문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상상을 뛰어 넘는 반전, 치밀하고 탄탄한 이야기 구성,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놀라운 디테일. <핑거스미스>는 이 모든 것을 갖춘 소설이다. 그래서 결국, 올해의 책은 <핑거스미스>로 정했다.  

 

축하해요. 세라워터스, 물론 내가 알아주는 것 말고는 어떤 상금도 어떤 권위도 없는 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축하의 박수, 짝짝짝! 

내 마음 속의 책장에 한권 더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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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이었나? 알라딘을 이용하던 초기에 <당신들의 천국>에 관한 서평을 쓴 적이 있다. 결론적으로는 <당신들의 천국>이 갖고 있는 주제의식이나 정서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재미가 없다는 얘기를 썼던 것 같다. 물론 아직도, 그 이후로 대 여섯번 더 읽어봤음에도, 이 소설이 그닥 재미있는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은 크게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요즘에는 '재미'가 아닌 '의미'를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이 질병을 새로운 방식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얼마전 고인이 된 이청준은 질병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쓴 작가이다. 절대적인 작품 수 자체도 많은데다가 그 중에서 질병을 소재로 한 작품도 많이 썼으니, 아마도 질병을 소재로 가장 많은 작품을 쓴 한국작가가 아닐까 싶다. 

그가 흔하게 쓰는 질병들을 크게 구분하면 세가지 정도가 될 것 같다. 첫번째는 정신이상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은 열림원에서 나온 소설집<소문의 벽>에 모두 실려있다. '소문의 벽'의 박준이 앓는 진술기피증과 전짓불 공포증, '조만득씨'의 주인공의 병인 망상성 정신분열증, '황홀한 실종'의 윤일섭의 가학성유희욕과 기피증, <겨울광장>의 완행댁은 병명을 알 수 없는 정신병은 이 소설집에 나온 이들이 앓고 있는 질병 목록이다.이다. 두번째는 복통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청준의 데뷔작인 <퇴원>은 자아망실이라는 병과 위궤양을 앓고 있는 인물을 다루고 있으며, <귀향연습>의 주인공인 지섭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을 앓고 있다. 이청준 소설의 복통은 단식, 허기, 공복과 연결되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씌어지지 않는 자서전>과 <조율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연결될 수 있다.  세번째는 <당신들의 천국>이 다루고 있는 나병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초기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통치자의 윤리와 같은 당시 정치적 상황에 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초판에 붙힌 김현의 평론은 이러한 이들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봐도 이러한 해석에 별로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 알레고리 소설이 아닌 질병, 환자, 의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새로운 측면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질병을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들 중에 이 소설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선적으로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질병이 나병(또는 한센씨병)이라는 사실에서 부터 찾아야 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수잔손택은 중세시대의 나병환자는 사회적 타락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회적 텍스트,  타락의 사례이자 상징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인 조백헌 원장은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나병이 갖고 있는 은유와 맞서는 의사인 셈이다. 의학을 소재로한 기존의 작품들이 질병 자체가 사회적, 개인적 병리를 상징하게 되는 알레고리로 이용하거나- 이청준도 이러한 방식을 자주 사용하였다- , 아니면 질병을 고치거나 질병 때문에 죽는 것에 관한 서사를 택하였다. 하지만 <당신들의 천국>이 택한 것은 질병과 환자를 격리하고 통제하는 서사인 것인다. 이 소설 속에서 나병은 사회병리를 압축하고 있지도 않으며, 이 소설 속의 인물들중 어느 누구도 나병으로 인해서 죽지 않는다. 원장이 부임하는 날 두 명의 환자는 섬을 탈출하고 한민이라는 청년은 자살한다. 결국 원장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나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소록도를 배경으로 <당신들의 천국>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섬을 통해서 드러나는 나병의 질병관리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소록도의 역사는 이러한 질병관리 시스템의 역사이기도 하다. 기존의 평자들이 이 소설을 정치적 알레고리 소설로 보았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질병관리 시스템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병원이 정치적이며, 권력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는 것은 내버려두고, 죽는 것은 강제하라 laissez vivre, faites mourir"는 전시대의 명제는 "죽는 것은 내버려 두고, 사는 것은 통제하라 laissez mourir, faites vivre"로 바뀐다. 푸코는 19t세기에 특징적인 것이 생명에 대한 권력이 관심이라는 점을 언급하면서 군주가 갖는 '칼의 권리'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리였다면 19세기의 정치적 권리는 '죽게 내버려 두고 살게 만드는' 권력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병과 같은 전염병의 역할은 이러한 질병들이 갖는 집단적 차원이 권력의 관심을 개인의 신체에 관한 문제에서 인구의 문제로 확장시킨 것이다.  <당신들의 천국>은 나병에 관한 소설이면서 나병을 관리하는 시스템에 관한 소설이다. 주인공인 조백헌 원장을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그리지 않고 나병 환자들을 관리하는 행정가인 병원장으로 그려낸 점과 이들이 놓인 시간적 배경이 혁명정부 시절이라는 점은 푸코가 언급했던 살게 만드는 생체권력의 모습을 문득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을 한국 소설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한다. <당신들의 천국>은 아마도 한국 문학 최초로 '생체권력'에 대해서 얘기한 작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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