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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크래프트 전집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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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계획했던 호러소설 읽기는 어느정도 목표달성을 하였다. <드라큘라>, <지킬박사와 하이드> 등을 읽었고 미흡하지만 독후감도 썼다. 작년에 목표했던 책 중에 못 읽었던 것이 메리셸리의 <프랑켄슈타인>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이었다. 프랑켄 슈타인이 공포소설 또는 19세기에 유행했던 이중적인 자아나 왜곡된 자아상에 관련되어서 읽어보려 했던 것이었으나 아직 읽지 못했다.

 

러브크래프트를 읽기로 한 것은 단연코 킹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 였다. 전집에 실린 단편들에 대한 총편은 역시 킹의 칭찬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뭘 얘기하려고 하는 지를 알 수 없는 단편들이 몇 편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장을 만들어 내는 작가의 역량이 뛰어나다. 개인적으로는 <인스머스의 저주>가 모든 면에서, 긴장감, 완결성, 가장 좋았다.

 

다른 작가들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러브크래프트는 소리 때문에 생기는 공포를 그려내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한편 달리 생각해보면, 공포라는 것은 킹의 말처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싶어하는 강박, 또는 금기에 대한 강박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들을 이용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밖에 괴물이 있고, 어떠한 유혹이 있더라도 문을 열어서는 안되는 규칙이 있다. 밖에서는 모든 소리들이 주인공을 유혹한다. 이런 경우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 손에 땀을 쥐는 순간은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무서워하고, 더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 보고싶어 진다.

 

그래서일까? 공포는 어떤 스타일의 이야기보다도 말로 쉽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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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박사와 하이드 (반양장)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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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소설의 고전들을 읽어보려는 목적으로 읽은 책이다. 이전에 브램스토커의 <드라큘라>를 읽었는데, 이 작품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은 발표시기가 비슷하다. <지킬&하이드>가 1886년이고 <드라큘라>가 1897년이니 약 10년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두번째는 앞서 얘기한 것처럼 수많은 공포소설들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드라큘라>가 수많은 뱀파이어 소설들의 원조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지킬&하이드> 또한 수많은 이중인격 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의 원조가 되어 왔다. 비단 공포물이 아니더라도 영화 <마스크>같은 코믹물 또한 '약'과 '마스크'의 차이만 있을 뿐, 한 사람 안에 존재하는 두가지 인격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두 영화 모두 같은 범주 안에 있다.   

세번째는  두 작품이 얻은 유명세에 비해서, 또는 뱀파이어와 이중인격이라는 소재에 비해서 작품이 지극히 정적이라는 것이다. 책을 펴기 전에 독자들이 상상한 뱀파이어와의 혈투나, 이리와 박쥐와 쥐들의 습격에 대한 인간들의 방어, 이성적인 지킬과 본능적이고 난폭한 하이드라는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극적이고 충격적인 반전은 없다. 아마도 이런 정적인 작품이 된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이것 또한 이 두 작품이 공통점인데, 이 두 작품 모두 하나의 시점에서 사건이 기술되지 않고, 여러주인공들의 진술에 의해서 사건이 기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시절이었고, 이 시기는 이성과 합리주의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룬 공포 소설의 두 고전은 바로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당대의 작가들이 이성과 합리주의가 갖고 있은 어떤 부분을 공포로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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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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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한 목적은 호러소설의 고전을 한번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프랑켄슈타인>,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와 같은 작품들 역시 <드라큘라>와 마찬가지로 영화로나 귀동냥으로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 뿐 실제로 책을 통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19세기에 쓴 호러소설이 뭐 특별한 것이 있겠느냐 싶어서 읽었는데, 19세기, 다윈니즘, 빅토리아시대의 정서에는 어떤 공통점이 느껴진다. 사혈법과 수혈, 빈혈과 같은 의학적인 용어들과, 이리와 쥐를 부리고, 박쥐로 변신하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불사귀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퇴치하려는 반헬싱 박사의 접근법은 이성의 힘을 철저하게 믿었던 19세기인들의 자신감이 엿보인다. 빌헤이스는 <5리터>에서 이 소설 속에 나온 수혈 장면이 외과의사인 브램스토커의 형 숀리 스토커의 의학적인 자문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것도 즐거운 일이고, 숫하게 영화화 되었던 작품의 원작소설을 읽는 것도  보람있는 일이지만, 소설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는다. 우선 너무 산만하다. 왜 작가는 일인칭이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일관되게 소설을 기술하지 않고, 여러 주요인물들의 일기와 신문기사, 편지를 통해서 이야기를 기술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조나단 하커에서 미나 하커로, 수어드 박사의 일기에서 반헬싱 박사의 일기로 옮겨 다니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독자의 집중을 방해한다.  

두번째는 주요인물들이 불사귀와 싸우는 방식이 너무 정적이라는 점이다. 이리와 쥐떼를 끌고 다니는 불사귀와 직접 싸우는 장면이 한번도 없다는 것은 독자로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리와 쥐떼가 인간들을 덮치고, 십자가와 성수로 그들이 재가 되는 장면이 한 장면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불사귀의 능력을 묘사한 보람이 있으니까. 사실 그것말고도 아쉬운 점은 많다. 아마도 이 모든 아쉬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 소설이 택하고 있는 산만한 시점과 기술방식(일기, 편지등등) 때문일 것이다. 용 빼는 재주가 있다 한들 편지와 일기를 쓰면서 어떻게 다이내믹한 장면을 묘사할 수 있겠는가! 

세번째는 이 소설의 결말이 겨우 드라큘라 백작의 관을 찾아서 죽어있는, 또는 자고 있는 그를 죽이는데서 끝난다는 점이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크게 한 번 싸우지 않을까하는 독자의 기대를 여지없이 저버린다. 드라큘라 찾고 죽이고 끝.  

참,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그건 이전에 <고스트스토리>를 읽으면서도 느낀건데 불멸을 꿈꾸는 것은 왜 '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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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앤 2012-08-0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결말몰랐었는데 ㅠㅠㅠㅠㅠ
 
고스트 스토리 - 상 밀리언셀러 클럽 7
피터 스트라우브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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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이 쓴 <죽음의 무도>를 읽고 나서 첫번째로 드는 생각은 바로 이 소설, 피터 스트라우브의 <고스트스토리>를 읽어봐야 겠다는 것이었다. 아마 다른 이들도 나와 마찬가지이리라. 이 작품을 해설하면서 이어지는 킹의 끝없는 극찬. 도대체 킹과 같은 대가가 이토록 칭찬하는 작품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 하지만 대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 반드시 재미있다는 보장은 없다. 올해 독서 목표인 '호러소설 읽기'를 생각하며 혹시나 하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시작은 알쏭달쏭하고 상황을 언뜻 파악하기 어려운, 유괴? 소아성애자? 변태 연쇄살인마? 이런 뻔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알쏭달쏭한 프롤로그가 끝나고 나면 밀번이라는 도시의 평범한 일상이 그려진다. 차우더 클럽 노인들의 일상, 그들의 평번한 사교모임, 주변사람들과 풍경들, 여기에 몇가지 암시가 더해진다. 일년 전에 있었던 차우더 클럽 회원의 죽음, 마을사람들의 복잡한 애정사, 마을에서 벌어지는 원인모를 가축들의 죽음들,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차우더클럽들의 노인들에 대한 묘사가 단편적으로 이어진다. 상권을 읽는 내내 정체를 알수 없었던 이 소설은 이야기는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이어지고,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들의 연관되고, 그들의 관련된 사건의 공통점들이 밝혀지면서 슬슬 시작된다.  

이 작품의 중반쯤 되면 킹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피 범벅이고 우당탕쿵탕 하는 공포와는 전혀 다른, 으스스하고 싸늘한 공포가 등줄기를 한번 훑고 지나간다. 과거와 현재가, 환상과 일상이 교차되고, 주인공들의 욕정과 도덕이 교차된다. 이 작품이 뛰어난 것은 과거의 사건들을 치밀하게 조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들이 겪은 과거들은 과거의 어떤 사건, 또는 어떤 인물로 수렴된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이 수렴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내지 않고, 교묘한 암시와 비약을 통해 독자가 상상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독자의 공포는 이 비논리적인 상상에서 출반한다. 덧붙여 '악'을 대면하는 이들이 보게 되는 장면에 대한 묘사 또한 압권이다. '악'이 만들어낸 환상이 주는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을 묘사하면서 곧 이어 그 풍경이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가를 꼼꼼하고 섬세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이거 작가가 실제로 본 거아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약 이 소설이 보여주는 '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장면처럼 우리를 몰아 세울 것 같다.  

하지만 독자라면 소설이 끝나기 전에 한번쯤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그런데 대체 왜 이 모든 인물들이 그 '악'에게 공격을 당하는 거냐?  여느 공포 소설들처럼 이 소설의 인물들도 숨기고 있는 '죄'가 있고 당연하게도 악'의 출현은 그들의 '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소설의 후반부에 밀번에 모인 모든 인물들이, 그러니까 차우더클럽의 노인들과 그들의 주변인물들이 겪었던 과거의 비극과 그 비극의 핵심을 이루는 '죄'가 드러난다.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인 그들의 '죄'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누구인지가 밝혀진다. 여기까지 읽고나면 그러니까 결국 과거에 죄지었으니까 이제야 벌받는거다, 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이 소설은 그런 권선징악의 구태의연한 당위로부터 훌쩍 달아난다.  

이들이 겪게 된 '악'은 과거의 욕망과 현재의 욕정, 또는 불륜, 때문이 아니다. '악'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고, 이들은 불멸의 존재이다. 이게 왜 존재하냐고? 그걸 소설가에게 물어보면 안되지. 그런 질문은 신부님이나 목사님들에게 할 것. 작가가 작품 속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악'이라는 것이 우리가 몰래 남편이나 부인이 아닌 딴 여자나 딴 남자랑 자거나, 또는 실수로 누굴 죽여놓고 얼렁뚱땅 감췄다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그보다는 '불멸'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악'이 우리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것은 것은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우리의 '편집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하와를 꼬득인 사탄의 유혹과도 같다. 하와의 악함이 불멸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해서 생겼기 때문에. 누구든 죽을 수 있는 것처럼, 누구든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불멸을 바라는 것은, 또는 불멸하는 것은 '악'이다? 아니면 '신'이거나. '악'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죽거나 혹은 싸워야 한다. 살고자 하지 않고 죽으려고 할때, 이순신 장군의 말씀같지만, '악'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갖는 삶의 공통점, 그건 바로 되돌릴 수 없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일회성이다. 그것이 '악'과 '인간'의 유일한 차이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면, 우리 삶의 모든 '죄'가 결국 '죽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긴다는 것. 불멸을 원하는 순간, 삶은 아름다움을 잃는다. 불멸의 삶은 늑대인간이나 뱀파이어나 좀비의 삶이니까.

한 해를 시작할 때 읽은 소설치고는 좀 무섭지만, 어쨌든 최고다. 근데, 좀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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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 6 - 끝의 시작 밀리언셀러 클럽 78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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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뮈는 알제리의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페스트' 대유행을 소재로 <페스트>를 썼다. 까뮈가 스토리 텔링에 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 소설을 읽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소설 <페스트>가 굉장히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까뮈만의 잘못일까? 실제로는 어떤지 몰라도 질병의 대유행을 소재로 한 소설들은 페스트말고도 몇편 더 있다. 사실 내가 읽어본 것 중에서도 여러편이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우선 생각나는 것은 주제사라마구 <눈먼자들의 도시>,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북>이다. 두 작품 모두 우울하고 단조로운 편이다. 수다쟁이 아줌가 코니 윌리스 조차도 '페스트'라는 소재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 이야기 꾼인 스티븐킹은 어떨까? 사라마구의 소설이 <페스트>의 중남미 소설 버전이고, 코니윌리스의 소설이 SF버전이라면, <스탠드>는 <페스트>의 호러버전 쯤 된다.

무대는 미국이며 캡틴트립스라는 인플루엔자로 미국인의 99.8%가 죽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거두절미하고 초반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빠른 진행은 스티븐 킹 답지만, 그 다음이 부실하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서부와 동부로 나뉘어서 선과 악으로 갈라지는 것도, 다크맨이라는 인물이 상징하고 있는 절대 악도, 악을 이루는 세력들이 무너지는 계기와 과정도 모두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1권과 2권까지 좀 집중해서 읽을 만하고, 나머지 책들은 뭔가 나오겠지하는 기대만 하다가 끝나 버린다.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캡틴 트립스라는 인플루엔자, 산자와 죽은자, 선과 악이 전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따로 논다. 인플루엔자 대유행으로 미국인의 99.8%를 죽이는 것이 이야기 전개상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그냥 전쟁이나 핵폭발로, 기상이변으로 하면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선과악의 이분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다크맨이 의미하는 것은 뭘까? 사실 이 모든 질문들은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독자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어야하고, 그래야지 이야기가 유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의 경우는 그러한 점들이 부족하다. 내가 너무 대충 읽어서 그런가?  

2011년을 호러소설로 읽는 해로 정했는데, 시작이 좋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은 '질병대유행'을 소재로 한 작품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재미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고 하나 더 질병대유행을 소재로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의견은 <페스트>의 여러 버전 중 그나마 가장 좋은 소설은 사라마구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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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e5480 2015-05-19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제사라마구는 중남미 작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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