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착각. 5840.82분의 1의 확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비행기 안의 수많은 좌석 중에서 하필 내 옆자리에 앉게 된다. 그녀의 웃음, 약간 벌어진 치아의 틈. 어느 순간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그녀를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운명이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 내가 이런 운명적 사랑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정말 그녀가 과연 나의 '줄리엣'이나 '엘로이즈'일 수 있을까? 혹은 그녀와 내가 타고 있는 이 비행기 안이 운명론적 사랑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과연 캐퓰릿가의 무도회장이나 중세의 수도원이 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낭만적 운명론을 확신하는, 또는 확신하고 싶어하는 한 철학자의-이십대의 철학 전공자라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것 같지만- 사랑의 문장은 대답할 수 없는 수많은 물음표를 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단지 작가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질문이 많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본래 사랑의 과정이라는 것이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부호 투성이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의 사제조차도 피할 수 없었던 큐피드의 화살이 철학자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나 보다. 알랭 드 보통은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운명적 사랑이라는 화두를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다. 하지만 원래 이런 낭만적 운명론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했던 단어는 그것이 5일간의 짧은 문장이든, 아니면 평생을 걸쳐 써내려 가야하는 긴 문장이든 간에 '죽음'이나 '비극'이라는 끔찍한 단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독약과 칼로 문장을 완성하였고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거세와 탈속(脫俗)으로 문장을 완성시켰듯, 작가 역시 '실패한 자살시도'라는 단어로 자신의 문장을 완성시킨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끝은 새로운 연인과 함께 또 다른 문장을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사랑'이라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감정 상태를 논리적 언어로 차분하게 풀어 나가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반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소 현학적이지만 섬세한 감정 묘사와 분석 역시 이 책을 좋아하는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랑의 실패를 헤쳐 나오는 작가의 인생관이 굉장히 건강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는 '사랑의 끝=자살'이라는 자아 도취적 등식에 손을 들어주지는 않았으니까.
김영하는 존경할 만한 소설가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평가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확실히 한국 소설이 갖고 있는 무거운 주제, 달리 말하면 근엄함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김영하는 최인훈이나 황석영 같이 분단이나 이념을 주제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에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그의 첫 장편소설도 그랬듯이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근엄한 주제에 대하여 여전히 무관심하다. 소설집 어느 곳에서도 이념의 상흔이나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 따라서 그는 존경받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존경받는 작가라는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에조차 무관심한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는 작가이고 재능있는 작가임에는 분명하다. 그의 소설들은 아주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하다. 자판기 커피만큼이나 자극적이고 홍콩 느와르만큼이나 흥미진진하다(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을 보았던가!).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다. 그의 소설들은 '작품'이라기 보다는 '읽을거리'에 더 가깝다. 때로는 추리소설('사진관 살인사건')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괴담('흡혈귀')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면서 그의 소설들은 '읽을거리'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한다. 이 소설집은 다양한 종류의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들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극장으로 비유하자면 대 여섯 개의 개봉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라기 보다는 동네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동시상영 영화관에 가깝다. 또 음식점으로 비유한다면 전통 한식집이라기 보다는 모듬김밥, 참치 김말이 주먹밥, 온갖 종류의 사발면의 전시장인 24시간 편의점에 더 가깝다. 사람들이 항상 멀티플렉스 영화관만 찾는 것도 아니고 늘 정통 한식만을 먹고 싶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음침한 동시상영 영화관에서 약간은 불온한 일탈을 꿈꾸고 싶을 때도 있고 24시간 편의점에서 아주 달작지근한 캔커피와 함께 사발면의 자극적인 국물 맛을 즐기고 싶을 때도 있는 법이다. 감상과 음미가 아닌 단지 자극의 소비를 위해서 그 곳을 가끔씩 찾는다. 따라서 나는 김영하의 소설을 읽지 않는다. 단지 소비할 뿐이다.
거의 한 주 이상 푹푹 찌는 무더위가 계속된다. TV와 신문에서는 연일 더위를 피하기 위한 갖가지 다양한 방법을 제시하기 바쁘다. 거기서 제시한 모두를 다 해 보고 자신에게 가장 맞는 것을 찾는 순간 여름이 다 가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그것도 더위를 피하는 일종의 방법인지도 모르지만 난 고전적인 방법이 좋다. 뭐냐하면 추리소설을 읽으며 열대야로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약간의 머리(포와로 식으로 말하면 '회색빛 뇌세포')를 쓰며 보내는 것. 이게 내가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하면서 확실한 피서법이다. 코난 도일도 좋고 아가사 크리스티도 좋다. 단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작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앞서의 작가들은 뭘 읽고 뭘 안 읽었는 지 잘 모르는 탓에, 읽다 보면 '어! 이거 범인이 OOO잖아!'하는 허탈한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뭘 읽지? 전통적인 추리 소설 작가가 아니면서 탄탄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 이런 생각을 하며 떠오른 것이 폴 오스터와 그가 쓴 추리소설 '스퀴즈 플레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서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스퀴즈 플레이' 역시 폴 오스터 답다는 것이다. 빠른 전개. 장면과 장면사이의 화려한 도약. 개연과 우연의 절묘한 조화. 비록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작가로서의 그의 역량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협박편지를 받은 야구선수 채프먼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사립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의 전개 속도는 거의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직구 속도 정도 된다. 고전적인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논리적이지 않은 추리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우연을 필연적인 운명으로, 환상을 현실로 둔갑시키는 작가의 재주는 탐정의 비약과 추측을 논리적인 추리로 둔갑시켜 버린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폴 오스터다운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절정에 이르러 주인공이 아들과 함께 야구를 보는 장면이다. 아니, 탐정이 범인은 안 잡고 왠 야구? 더 이상을 말하는 것은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실례가 되기 때문에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자. 참, 잊은 게 있다. 스퀴즈 플레이는 메이저리그에서 그리 흔하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다. 다른 제목을 제쳐놓고 굳이 이 제목을 쓴 이유가 뭘까? 이걸 이해하는 게 이 소설의 모든 비약적인 추리를 이해하는 해답이다.
어둠이 내려 주위가 캄캄해지면 굶주린 맹수가 기다란 산길을 따라 여행하는 나그네의 목숨을 노리고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은 전생의 복수를 꿈꾼다. 자정이 넘은 시간의 으슥한 지하 주차장처럼, 또는 막다른 골목처럼 숲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다. 어둠이 내린 숲은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공간이다. 하지만 꼭 그런가? 물론 숲이 반드시 두려움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상상의 숲에서는 나무 사이로 반짝이는 날개가 달린 요정들이 날아다닐 수도 있고 천년 된 불로초가 들꽃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해 줄 행운아를 기다리며 조용히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숲은 두려움의 공간일 뿐 아니라 무한한 상상이 가능한 신비스런 공간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홀드스톡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숲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시킨다. 그 숲 속에 신화 속 인물들이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괴물도 존재하고 역사 속의 영웅들도 존재한다. 이러한 작가의 상상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미사고의 숲이다. 비록 책 해설은 미사고가 신화(myth)와 이미지(imago)의 합성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미사고라는 말은 낯설게 들린다. 융의 집단 무의식이니 어쩌니 하는 말도 왠지 말장난처럼 들린다면 무릉도원쯤으로 생각하면 상상하기 쉽지 않을까. 시간이 흐름이 왜곡되어 아무도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무릉도원 말이다. 여기 살인과 사랑이라는 요소를 추가한다면 훨씬 더 미사고의 숲에 가까운 무릉도원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훌륭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여기까지다. 소설의 진행은 후반으로 갈수록 특별한 사건도 없이 굉장히 느리고 차분하다. 왜 형은 죽어야하고 동생은 살게 되는 지, 도대체 귀네스는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설명은 없고 암시만 구구절절하다. 사실 지루하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표현일 듯 싶다. 참신한 설정은 빛나지만 세밀한 진행이 부족하다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는지. 예고편만 거창한 영화처럼 말이다. 6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몇 년 전 산울림 극장에서 본 '고도를 기다리며'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부조리극이라는 말이 풍기듯 왠지 난해하고 알쏭달쏭한 말 투성이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굉장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연극이었다. 항상 그렇진 않지만 예상이 빗나가는 것이 가끔은 즐거울 때가 있다. 그런데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 또한 과연 즐거운 일일까? 고전에 속한 희곡들이 대개 그렇듯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 또한 대단한 인내 없이는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고전 중에 읽기 어려운 작품을 꼽으라면 첫 번째로 꼽히지 않을까 싶다. 혹시 대학에 막 입학하여 지성인이라는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이 책을 택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지루한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의 장황한 대사 때문에 이런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요소를 갖고 있는 고전들은 수두룩하고 책을 읽겠다고 맘먹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감수를 하는 부분이다. 그런 작품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이 어려운 원인은 정작 다른 데 있다. 이 작품을 읽기 힘든 진짜 원인은 지루한 이야기라고 할 만한 이야기조차도 없다는 것이며 거기에 무의미한 대화가 이 작품의 난독(難讀)에 더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고도를 기다린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사실 이 작품의 위대함은 위의 질문에 대한 답 속에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내포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전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은-소설이나 희곡이나 뭐든 간에-처음과는 다른 어떤 결말을 향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예를 들면 착한 인물이 결국에 가서 나쁜 사람이 되거나 아니면 그 반대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실은 어떤 결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무의미한 행위와 지리한 일상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고도를 기다리며' 속에는 '이야기'가 없다기 보다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형식'이 없다. 브레히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예술의 목적인 카타르시스를 부정하면서 이성의 예술이라는 혁명을 이룩했다면 베케트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방식을 부정함으로써 무의미의 혁명을 시도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의미를 통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그의 혁명적인 이야기 방식을 보여준 대표적인 작품인 셈이다. 마치 절대로 읽지말아 달라고 당부한 것 같아 한마디 덧붙인다면,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것이 최악의 선택일 것이라는 것은 단지 내 개인적인 예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은 언제든 빗나갈 가능성이 있다. 몇 년 전의 경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