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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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는, 제목부터 반체제적인 혐의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 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들여다보는’ 행위 때문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백골과 함께. 어둔 방에 눕는 순간 방은 ‘우주’로 변하고 ‘소리’처럼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마치 ‘별헤는 밤’의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가을로 가득한 하늘’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가을 속의 별들로 가득 차 있는 하늘은 곧 ‘또 다른 고향’ 속의 ‘우주’가 된다. ‘나’는 방에 누워서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이 눈물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짓고 있는 백골과 나,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있지만 내가 우는 것인지 백골이 우는 것인지 여전히 알 지 못한다. 왜냐하면 백골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백골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또 다른 고향>의 ‘백골’은 <자화상>의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눈물짓는’ 슬픈 일인 것이다. ‘나’가 꿈꾸는 ‘자화상’은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백골’의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혼’, 또는 ‘지조 높은 개’의 모습이다. 시인은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 개’에게 쫓기는 것이 어둠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개가 ‘나’를 쫓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가 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고 어둠 속에서 고작 곱게 풍화작용이나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가 ‘아름다운 혼’이 되거나 ‘지조높은 개’의 쫓김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이다. ‘백골’을 떨쳐버리는 것, <또 다른 고향>에 가는 것은 그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194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詩 ‘별 헤는 밤’의 정경은 그가 처한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기만 하다. 가을 하늘에는 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나’는 언덕에서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표현처럼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나’처럼 ‘아무 걱정도 없이’ 시를 읽게 된다. ‘나’는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서 ‘가을 속의 별들’을 ‘아무 걱정도 없이’ 다 헤일 것 같지만 결국 이 일을 완벽하게 끝내지는 못한다. 뒤의 내용을 참고로 한다면, ‘나’는 별을 헤는 행위를 끝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별’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만드는 것이 ‘나’의 원래의 목적이다. 좀 다르게 말한다면, 별을 헤는 행위는 곧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나’가 별에 붙이는 이름들은 추억, 사랑, 쓸쓸함 같은 단어들로 시작해서 어느새 ‘어머니’로 연결된다. ‘어머니’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인명(人名)들의 첫 단추이면서, 모든 인명(人名)들을 생각나게 해 준, 일종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 별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소학교 때 친구들과 이국 소녀들의 이름들을 거쳐 강아지나 토끼같은 동물들, 아마도 여기 등장한 동물들은 ‘나’가 누이와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속의 주인공들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시인들의 이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문득, 갑자기 쏟아져 나온 이름들, 또는 의미들의 홍수 끝에 ‘나’는 이들이 ‘아슬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이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어머니’마저도 ‘멀리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내게 남아있는 이후의 당연한 순서는, 또는 별을 헤는 이 ‘의식(儀式)’의 마지막은 당연히 ‘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언덕의 흙으로 덮어버린다. 시인은 이 행위의, 흙을 자신의 이름에 덮어버리는 것,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나’는 결국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된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 부끄러운 것일까? 나? 나의 이름? 벌레가 된 ‘나’는 ‘나의 별에도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름 위에 덮힌 흙 위에서 풀이 자랄 것을 고대하며.


윤동주의 시(詩)를 오래 간만에 정독해서 읽었다. 꼭 한 가지만 얘기해야 겠다. 윤동주에게 이육사와 같은 저항시인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여전히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읽는 일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오히려 윤동주 시인이 저항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시와 생애가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한, 순백의 시를 쓰는 이들도 감옥에서 죽어야 했던 그 시대는 도대체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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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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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선생님께


언제부터인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은행알들이 구릿한 냄새를 풍기며 동네 철부지들마냥 좌충우돌 교정(校庭)을 굴러다닙니다. 아침마다 의외의 한기(寒氣)가 이부자리 밑으로 삐죽 나온 발바닥에서 느껴집니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어느덧 시월의 끝자락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하늘에는 달이 둥글고 땅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두루 원만하다는 한가위도, 이젠 철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속에서도 스무 번의 가을과 스무 번의 한가위가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가을과 앞으로 있을 그보다 더 수많은 가을, 얼핏 보면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가을에서 그 다음 가을로, 그 다음 가을에서 다시 처음의 가을로. 하지만 ‘바깥’의 시간은 그 나름대로 조금씩, 아주 천천히 흘러갑니다. 비록 육안으로 시간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굵어지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도 이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흘러갔을까요?


“87년이 저물면/88년이 밝아오고/88년이 저물면/89년이 밝아오고......(387쪽)”


‘스무 번째 옥중 세모를 맞으며’에서 그려진 ‘그곳’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의 시간은 벽과 벽 사이에 멈춰 있다가 해가 바뀌면 아침이슬과 함께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무릉도원의 시간처럼 ‘그곳’을 나오는 순간 갑작스런 도약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곳’은 시간이 멈춰 버린 곳, 아니, 좀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들이 흘러가지 못한 채 벽 속에 갇혀버린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선 아무도 성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아무도 성장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멈춘 시간들이 이따금씩 갑작스럽게 도약합니다. 선생님이 구속될 때의 나이 또래인 젊은 친구들이 베푼 ‘장인 영감 대접’과 같은 사건 속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들마저 없다면 벽 속에 갇혀버린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시간들은 모두 증발해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 십년이라는 세월이 이 두툼한 편지들을 관통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두툼한 편지들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이십년 동안 일어났던, 다사다난했던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외연(外延)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응시를 통해 끊임없이 투명해져가는 한 무기수의 개인사적 내면(內面)이었습니다.

그 내면 풍경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존재하는 소박한 풍경소(風景素)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이면 기상나팔보다 먼저 따갑게 지저귀는 참새소리가 있습니다(142쪽). 봄이 소복이 담겨있는 미루나무 가지 끝의 까치집이 있습니다(150쪽). 흙 한줌을 소유하고 있는 5월 창가의 팬지꽃과 열두 시의 날개를 조용히 열어 수평이 되게 하는 나비가 있습니다(151쪽). 9월 중순, 캘린더 속에는 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타고 있는 이월화(二月花)보다 더 붉은 홍엽(紅葉)이 있습니다(158쪽). 햇빛 한 줌 챙겨줄 단 한 개의 잎새도 없이 동토(凍土)에 발목 박고 풍설(風雪)에 팔 벌리고 서있는 겨울나무가 있습니다(315쪽). 하지만 이 모든 풍경소(風景素)들이 알록달록한 현실의 풍경으로만 보이지 않고 때때로 무채색의 관념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기수라는 외적인 조건, 혹은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삭막한 본질 때문일 것입니다. ‘기다림’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는 순간 일상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해집니다. 어떤 결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를 견디는 것이 일상의 전부가 되어 버릴 때 ‘서사(narrative)’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선생님의 편지를 읽는 동안 문득, 엉뚱하게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떠올렸습니다. 의미 없는 의미와 이야기 없는 이야기, ‘기다림’이 숙명이 되어 버린 인물들의 희비극. 분명 베케트의 작품 속의 두 인물이 기다리는 ‘고도’는 ‘바깥’에서 오는 것입니다, 황량한 무대 위의 유일한 무대 장치인 나무 너머에서. 그 순간이, 찰나(刹那)이건 영겁(永劫)의 세월이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가 죄수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연이나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아마도 죄수들의 ‘고도’는 ‘바깥’ 세상이나 ‘바깥’의 자유였겠지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이십 년동안 계셨던 ‘그곳’의 ‘고도’ 역시 ‘바깥’이라는 곳, 혹은 ‘바깥’이라는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그 어떤 총체적인 것’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선생님께서 ‘바깥’으로 나오셨던 1988년이라는 시점으로부터 거의 이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그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깥’에 계십니다. 혹시 그 시간동안 ‘그곳’에서 꿈꾸셨던 ‘고도’를 ‘바깥’에서 만나셨습니까? 물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고도’는 ‘바깥’, 나무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 황량한 무대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니까요(280쪽).


2006년 10월 31일

선생님의 편지를 읽은 어떤 독자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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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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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들에게 ‘강의’라는 단어는 슬라이드 상영을 뜻하는 것이고, 슬라이드의 양은 강의자의 지식의 양을 의미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록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만, 슬라이드의 양과 학생들의 반응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슬라이드의 양이 늘어날수록 강의실은 조용해진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자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사실 요즘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은 내용과 상황에 관계없이 일단 슬라이드만 내려오면 양쪽 눈이 감기면서 의식수준이 떨어지는 파브로프의 조건반사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 직업병이다, 불치(不治)의.

‘강의’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겨울 것이라는 선입견은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학창시절의 경험 때문이리라. 하지만 곰곰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꼭 그 이유 때문만도 아니다. 차례에 나와 있는 이 책에 소개된 동양 고전들의 목록을 보자! 자그마치 열권이 넘는다. 한 두 사람의 저서를 지정해서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 열 명이 넘는 동양 사상가들의 저서를 오백 쪽 남짓한 책에서 모두 ‘강의’를 하겠다니! 이건 마치 동양고전에 대한 ‘수박겉핥기’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난 ‘강의’를 읽었다. 왜?


몇 년 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던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는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강의자의 독특하고 명쾌한 해석과 동, 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듣는 사람들에게 동양고전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모호하고 불분명했던 동양철학에 대한 의문들은 햇빛이 안개를 쓸어가듯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강의는 끝났다. 하지만 텔레비전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동양고전들에 대한 ‘열광’도 끝나버렸다. 이상하게도 ‘강의’가 끝나고 난 후에 내게 남은 것은 동양고전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아니었다. 화려한 지식의 잔치가 끝난 뒤에 오는 허탈함. 하지만 ‘강의’라는 책이 어쩌면 이걸 해결해줄 지도 모른다는 것, 이게 이 책을 읽게 된 나름대로의 이유다. 


도대체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하며, 왜 하필 ‘강의’라는 형식이 필요한 것인가? 동양고전들에 대한 ‘강의’가 필요했다면 다른 전문가들의 책들도 많은데 굳이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사실 치열한 현대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저자의 이전 저서를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그가 하고자 하는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가 결코 지식의 전달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가르치기’ 위해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기’ 위해 강의한다. 이 책의 제목으로 붙어있는 ‘강의’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대화, 혹은 의사소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설명한 책들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저자가 눈높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 방대한 지식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해 동양고전에 대한 ‘열광’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다. ‘열광’은 텔레비전 강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저자의 책 속에서는 항상 이런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는 강의한다. 무엇에 대해서? 동양고전들? 물론 표면적으로는 동양고전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그게 아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도(道)라는 것은 길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동양고전을 살펴보는 것은 과거를 성찰(省察)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성, 찰, 결국 그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글자이다. 나와 내가 속한 세계를 반성하며 살피는 것. ‘강의’ 속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성찰’의 대상은 다양하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세계를 지배했던, 혹은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역사적 전망일 수도 있으며, 인(仁)과 덕(德)같은 인간관계의 가치들일 수도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은 절대로 이런 ‘성찰’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순대국밥을 한 그릇 먹더라도 전문집을 찾아 가서 먹어야 ‘진짜’ 순대국밥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요즈음은 ‘전문’의 전성시대다. 점심 한 끼를 해결하는데도 ‘전문’을 따지는 마당에 의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문’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열광은 의학을 ‘전문기술’로 환원시켜버렸고 의사들을 단지 전문기술자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평생을 걸어야 하는 의학이라는 길(道)이 단지 몇 가지 '전문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사실 의사와 전문기술자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 밖에 없다.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들어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찰’이라는 단어, 혹은 행위이다. 뚱딴지같지만 이것이 여태껏  대답하지 않고 있던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한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이다. 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그 기술과 기술이 속한 주변세계를 반성하며 살펴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전문기술자가 아닌 의사가 될 수 있다. 의학도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제목은 '과학은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한다'에서 착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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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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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김수영 시 전집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읽었다. 물론 현재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숙제라는 것이 아마도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91년 민음사 판 김수영 시전집을 읽다가, 어떤 시는 너무 좋아서 학생수첩에 깨알같이 적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어떤 것이든 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여기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사실 민음사판 김수영 시전집을 읽을 당시 수많은 한자어로 인해 해독의 곤란을 겪었던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독이 어려운 시들과 알 수 없는 한자들의 조합. 사실, 그 시전집을 읽고 있던 시절이 꼭 즐거웠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건 김수영 평전을 읽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감격적이다. 최하림의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묘사들은 그의 시전집에서 파편화된 채 제시되었던 그의 삶의 조각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 평전의 가치는 한 인간의 삶을 천천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조각들은 이런 식으로도 맞춰지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는 왜 죽었을까? 아니, 어떻게 죽었을까? 그가 살아 있다면 한국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사실 역사 혹은 개인사에서 이런 식의 가정이나 의문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늘 생기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전을 꼼꼼이 읽는다 해도 이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추측과 공상의 나무들만 무성해질 뿐이다.

교통사고,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 운명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삶은 무서우리 만치 공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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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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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5월하면 떠오르는 것은 콧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웃고 있는 두 아들의 얼굴이 나온 사진이다. 2005년 4월, 대전 자운대((紫雲帶)를 떠나는 가족들의 등 뒤엔 이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병산이 우두커니 서 있었고 백목련과 자목련 나무들이 찻길을 따라서 길게 늘어서 있었다, 마치 배웅하러 나온 행렬처럼. 서울 아파트 입구에는 주먹만한 하얀 목련꽃들이 군데군데 환하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아파트는 자운대의 아파트보다 훨씬 높았고 하늘은 훨씬 더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파트 주차장에는 붕붕카를 타고 노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에 낮게 떨어지는 햇빛에 번쩍거리는 커다란 차들만이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백구(白狗)처럼 빽빽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큰 애는 가끔씩 자운대에서 놀던 동무들이 그립다는 말을 했고 나와 아내는 큰 애의 그리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목련꽃이 환하게 피어 있던 봄날 내내 나와 아내는 아무 이유 없이 우울했다. 큰 애는 유아원을 다니기 시작했지만 5월이 되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큰애와 작은 애 모두 꼬박 두 달 동안을 앓았다. 때론 기침을 하면서, 때론 눈물과 콧물을 쏟으면서, 때론 결막염 때문에 눈꼽이 잔뜩 낀 눈을 부비면서 두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내가 말했다, 자운대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것 같다고.

소설집 <브로크백 마운틴>속에는 열 한편의 단편이 들어있다. 내용과 길이가 다양한 이 열한 편의 단편들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와이오밍’과 ‘남자’, 언뜻 생각하기에 이 두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문장들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광활한 와이오밍의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자들의 우정? 아니면 거친 자연에 도전하는 남자들의 불굴의 도전정신과 용기? 하지만 작가 애니 프루는 이 단어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결시킨다. 작가는 와이오밍에 펼쳐져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속에서 사는 이들이 겪어야 하는, 또는 겪을 수밖에 없는 황량하고 냉엄한 현실을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설 어디에도 아름답고 푸근한 자연은 등장하지 않는다. 애니 프루가 그려낸 와이오밍은 거칠고 혹독하다. 등장인물들은 이런 와이오밍을 견디지 못하며 그 속에서 좌절하고 버려진다. 애니 프루의 작품 속에서 더 이상 ‘남자’는 ‘사나이’와 동의어가 아니다. 열한 편의 단편들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세계 속에선 ‘의리’도 없고 ‘정의’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망과 욕정뿐이다. <진창>의 주인공 다이아몬드는 차속에서 동료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동료의 아내를 겁탈하고 <블러드 베이>에 등장하는 카우보이들은 멋진 가죽 부츠를 얻기 위해 얼어 죽은 시체의 다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낸다. 그래서 이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다소 냉소적이다. <목마른 사람들>에 등장하는 차사고로 불구가 된 라스무센 틴슬리의 끔찍한 모습과 <진창>에 등장하는, 로데오 도중 머리를 다친 후 삼십 칠 년 동안 매일같이 안장을 닦고 있는, 혼도 건쉬는 ‘사나이’가 되지 못했던 ‘남자’들의 비참한 말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열한 편의 단편 중 마지막 작품이자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브로크백 마운틴>은 ‘사랑’과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와이오밍’과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네 가지 단어가 머릿속에서 금방 정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정리해보자, 이 소설은 ‘남자’들의 ‘사랑’과 ‘와이오밍’의 ‘기억’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니스 델 마와 잭 트위스트는 얼핏 보기에 여느 작품에서 등장했던 주인공들과 전혀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이들은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미래에 대한 아무 전망도 없는 스무 살의 시골 청년들이고, 예절에 서툴고 말은 거칠며 금욕적인 삶에 익숙한 양치기들일 뿐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사랑’이란 것은 욕정이나 욕망과 구별이 되지 않는, 아니 구별될 수 없는 모호한 관념이거나 도시에 사는 돈 많은 애인만큼이나 불가능하고 사치스러운 장식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 두 인물이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과정을 밀도 있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둘이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치기를 하며 보내던 어떤 날 겪게 된 실체를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은 순간적인 욕정에서 욕망으로, 욕망에서 애정으로, 그리고 애정에서 열망으로 변모한다. 죽은 잭의 집을 찾아간 에니스는 잭의 방에서 브로크백 마운틴 시절에 입었던, 잭과 자신의 셔츠가 겹쳐져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에니스는 겹쳐진 셔츠에서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에니스를 향한 잭의 영원한 사랑? 천만에! 그 순간 에니스가 깨달았던 것은 잭이 그토록 지키고자 열망했던 것이 실은 ‘사랑’이 아니라 ‘기억’-브로크백 마운틴이 그들에게 선물해준-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십 년 만에 이들을 회귀(brokeback은 ‘회귀’라는 뜻을 갖고 있다)시켜 만나게 만든 힘은 ‘사랑’의 힘이 아니라 ‘기억’의 힘이었던 것이다. 

2005년 5월이라는 시점으로부터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나와 아내는 여전히 자운대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아파트 입구의 목련나무는 한 번 더 꽃을 피웠고 두 아이는 가끔씩 아프기는 했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큰 애는 더 이상 자운대에서 같이 놀던 동무들을 찾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서울에 올라 온 초기에 나와 아내는 가끔씩 무심결에 대전 지역의 일기예보를 유심히 듣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안타깝게도(?) 서울이었고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조금 허탈해 했다.

시간의 힘은 막강하다. 우리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 했던 ‘자운대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하지만 나와 아내는 더 이상 ‘시간’의 막강한 힘으로부터 ‘기억’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운대의 기억’을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자운대의 기억’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희미해져버린 ‘기억’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뿐인 것 같다. 가끔씩 그때를 떠올려보는 것, 그리고 아주 잠시 동안 그리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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