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영복 선생님께


언제부터인가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은행알들이 구릿한 냄새를 풍기며 동네 철부지들마냥 좌충우돌 교정(校庭)을 굴러다닙니다. 아침마다 의외의 한기(寒氣)가 이부자리 밑으로 삐죽 나온 발바닥에서 느껴집니다. 가을입니다, 그리고 어느덧 시월의 끝자락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하늘에는 달이 둥글고 땅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두루 원만하다는 한가위도, 이젠 철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선생님의 편지 속에서도 스무 번의 가을과 스무 번의 한가위가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수많은 가을과 앞으로 있을 그보다 더 수많은 가을, 얼핏 보면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현재의 가을에서 그 다음 가을로, 그 다음 가을에서 다시 처음의 가을로. 하지만 ‘바깥’의 시간은 그 나름대로 조금씩, 아주 천천히 흘러갑니다. 비록 육안으로 시간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굵어지는 것을 보면 간접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도 이렇게 빙글빙글 돌면서 천천히 흘러갔을까요?


“87년이 저물면/88년이 밝아오고/88년이 저물면/89년이 밝아오고......(387쪽)”


‘스무 번째 옥중 세모를 맞으며’에서 그려진 ‘그곳’의 시간은 ‘바깥’의 시간처럼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의 시간은 벽과 벽 사이에 멈춰 있다가 해가 바뀌면 아침이슬과 함께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니었습니까? 아니면 무릉도원의 시간처럼 ‘그곳’을 나오는 순간 갑작스런 도약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곳’은 시간이 멈춰 버린 곳, 아니, 좀 정확하게 말하면, 시간들이 흘러가지 못한 채 벽 속에 갇혀버린 곳입니다. 그래서인지 ‘그곳’에선 아무도 성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아무도 성장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멈춘 시간들이 이따금씩 갑작스럽게 도약합니다. 선생님이 구속될 때의 나이 또래인 젊은 친구들이 베푼 ‘장인 영감 대접’과 같은 사건 속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들마저 없다면 벽 속에 갇혀버린 시간들이 어떻게 흘러갈 수 있을까요? 그런 시간들은 모두 증발해버린 것은 아닐런지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 이 십년이라는 세월이 이 두툼한 편지들을 관통하고 있지만 그 속에서 역사의 흔적들을 찾아 낼 수가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두툼한 편지들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1968년부터 1988년까지 이십년 동안 일어났던, 다사다난했던 한국현대사의 역사적 외연(外延)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응시를 통해 끊임없이 투명해져가는 한 무기수의 개인사적 내면(內面)이었습니다.

그 내면 풍경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곳'에 존재하는 소박한 풍경소(風景素)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침이면 기상나팔보다 먼저 따갑게 지저귀는 참새소리가 있습니다(142쪽). 봄이 소복이 담겨있는 미루나무 가지 끝의 까치집이 있습니다(150쪽). 흙 한줌을 소유하고 있는 5월 창가의 팬지꽃과 열두 시의 날개를 조용히 열어 수평이 되게 하는 나비가 있습니다(151쪽). 9월 중순, 캘린더 속에는 높은 가을 하늘 아래서 타고 있는 이월화(二月花)보다 더 붉은 홍엽(紅葉)이 있습니다(158쪽). 햇빛 한 줌 챙겨줄 단 한 개의 잎새도 없이 동토(凍土)에 발목 박고 풍설(風雪)에 팔 벌리고 서있는 겨울나무가 있습니다(315쪽). 하지만 이 모든 풍경소(風景素)들이 알록달록한 현실의 풍경으로만 보이지 않고 때때로 무채색의 관념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기수라는 외적인 조건, 혹은 ‘기다림’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삭막한 본질 때문일 것입니다. ‘기다림’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되는 순간 일상의 모든 행위는 무의미해집니다. 어떤 결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를 견디는 것이 일상의 전부가 되어 버릴 때 ‘서사(narrative)’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 선생님의 편지를 읽는 동안 문득, 엉뚱하게도,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떠올렸습니다. 의미 없는 의미와 이야기 없는 이야기, ‘기다림’이 숙명이 되어 버린 인물들의 희비극. 분명 베케트의 작품 속의 두 인물이 기다리는 ‘고도’는 ‘바깥’에서 오는 것입니다, 황량한 무대 위의 유일한 무대 장치인 나무 너머에서. 그 순간이, 찰나(刹那)이건 영겁(永劫)의 세월이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공연한 ‘고도를 기다리며’가 죄수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연이나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아마도 죄수들의 ‘고도’는 ‘바깥’ 세상이나 ‘바깥’의 자유였겠지요. 그렇다면 선생님이 이십 년동안 계셨던 ‘그곳’의 ‘고도’ 역시 ‘바깥’이라는 곳, 혹은 ‘바깥’이라는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그 어떤 총체적인 것’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선생님께서 ‘바깥’으로 나오셨던 1988년이라는 시점으로부터 거의 이 십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그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깥’에 계십니다. 혹시 그 시간동안 ‘그곳’에서 꿈꾸셨던 ‘고도’를 ‘바깥’에서 만나셨습니까? 물론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질문은 굉장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고도’는 ‘바깥’, 나무너머,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 황량한 무대 어딘가,에서 솟아오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봄은 산 너머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것이니까요(280쪽).


2006년 10월 31일

선생님의 편지를 읽은 어떤 독자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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