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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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들에게 ‘강의’라는 단어는 슬라이드 상영을 뜻하는 것이고, 슬라이드의 양은 강의자의 지식의 양을 의미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록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만, 슬라이드의 양과 학생들의 반응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슬라이드의 양이 늘어날수록 강의실은 조용해진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자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사실 요즘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은 내용과 상황에 관계없이 일단 슬라이드만 내려오면 양쪽 눈이 감기면서 의식수준이 떨어지는 파브로프의 조건반사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 직업병이다, 불치(不治)의.

‘강의’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겨울 것이라는 선입견은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학창시절의 경험 때문이리라. 하지만 곰곰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꼭 그 이유 때문만도 아니다. 차례에 나와 있는 이 책에 소개된 동양 고전들의 목록을 보자! 자그마치 열권이 넘는다. 한 두 사람의 저서를 지정해서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 열 명이 넘는 동양 사상가들의 저서를 오백 쪽 남짓한 책에서 모두 ‘강의’를 하겠다니! 이건 마치 동양고전에 대한 ‘수박겉핥기’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난 ‘강의’를 읽었다. 왜?


몇 년 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던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는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강의자의 독특하고 명쾌한 해석과 동, 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듣는 사람들에게 동양고전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모호하고 불분명했던 동양철학에 대한 의문들은 햇빛이 안개를 쓸어가듯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강의는 끝났다. 하지만 텔레비전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동양고전들에 대한 ‘열광’도 끝나버렸다. 이상하게도 ‘강의’가 끝나고 난 후에 내게 남은 것은 동양고전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아니었다. 화려한 지식의 잔치가 끝난 뒤에 오는 허탈함. 하지만 ‘강의’라는 책이 어쩌면 이걸 해결해줄 지도 모른다는 것, 이게 이 책을 읽게 된 나름대로의 이유다. 


도대체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하며, 왜 하필 ‘강의’라는 형식이 필요한 것인가? 동양고전들에 대한 ‘강의’가 필요했다면 다른 전문가들의 책들도 많은데 굳이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사실 치열한 현대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저자의 이전 저서를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그가 하고자 하는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가 결코 지식의 전달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가르치기’ 위해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기’ 위해 강의한다. 이 책의 제목으로 붙어있는 ‘강의’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대화, 혹은 의사소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설명한 책들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저자가 눈높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 방대한 지식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해 동양고전에 대한 ‘열광’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다. ‘열광’은 텔레비전 강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저자의 책 속에서는 항상 이런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는 강의한다. 무엇에 대해서? 동양고전들? 물론 표면적으로는 동양고전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그게 아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도(道)라는 것은 길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동양고전을 살펴보는 것은 과거를 성찰(省察)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성, 찰, 결국 그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글자이다. 나와 내가 속한 세계를 반성하며 살피는 것. ‘강의’ 속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성찰’의 대상은 다양하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세계를 지배했던, 혹은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역사적 전망일 수도 있으며, 인(仁)과 덕(德)같은 인간관계의 가치들일 수도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은 절대로 이런 ‘성찰’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순대국밥을 한 그릇 먹더라도 전문집을 찾아 가서 먹어야 ‘진짜’ 순대국밥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요즈음은 ‘전문’의 전성시대다. 점심 한 끼를 해결하는데도 ‘전문’을 따지는 마당에 의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문’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열광은 의학을 ‘전문기술’로 환원시켜버렸고 의사들을 단지 전문기술자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평생을 걸어야 하는 의학이라는 길(道)이 단지 몇 가지 '전문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사실 의사와 전문기술자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 밖에 없다.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들어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찰’이라는 단어, 혹은 행위이다. 뚱딴지같지만 이것이 여태껏  대답하지 않고 있던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한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이다. 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그 기술과 기술이 속한 주변세계를 반성하며 살펴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전문기술자가 아닌 의사가 될 수 있다. 의학도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제목은 '과학은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한다'에서 착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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