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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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는, 제목부터 반체제적인 혐의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 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들여다보는’ 행위 때문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백골과 함께. 어둔 방에 눕는 순간 방은 ‘우주’로 변하고 ‘소리’처럼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마치 ‘별헤는 밤’의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가을로 가득한 하늘’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가을 속의 별들로 가득 차 있는 하늘은 곧 ‘또 다른 고향’ 속의 ‘우주’가 된다. ‘나’는 방에 누워서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이 눈물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짓고 있는 백골과 나,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있지만 내가 우는 것인지 백골이 우는 것인지 여전히 알 지 못한다. 왜냐하면 백골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백골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또 다른 고향>의 ‘백골’은 <자화상>의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눈물짓는’ 슬픈 일인 것이다. ‘나’가 꿈꾸는 ‘자화상’은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백골’의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혼’, 또는 ‘지조 높은 개’의 모습이다. 시인은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 개’에게 쫓기는 것이 어둠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개가 ‘나’를 쫓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가 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고 어둠 속에서 고작 곱게 풍화작용이나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가 ‘아름다운 혼’이 되거나 ‘지조높은 개’의 쫓김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이다. ‘백골’을 떨쳐버리는 것, <또 다른 고향>에 가는 것은 그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194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詩 ‘별 헤는 밤’의 정경은 그가 처한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기만 하다. 가을 하늘에는 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나’는 언덕에서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표현처럼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나’처럼 ‘아무 걱정도 없이’ 시를 읽게 된다. ‘나’는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서 ‘가을 속의 별들’을 ‘아무 걱정도 없이’ 다 헤일 것 같지만 결국 이 일을 완벽하게 끝내지는 못한다. 뒤의 내용을 참고로 한다면, ‘나’는 별을 헤는 행위를 끝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별’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만드는 것이 ‘나’의 원래의 목적이다. 좀 다르게 말한다면, 별을 헤는 행위는 곧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나’가 별에 붙이는 이름들은 추억, 사랑, 쓸쓸함 같은 단어들로 시작해서 어느새 ‘어머니’로 연결된다. ‘어머니’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인명(人名)들의 첫 단추이면서, 모든 인명(人名)들을 생각나게 해 준, 일종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 별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소학교 때 친구들과 이국 소녀들의 이름들을 거쳐 강아지나 토끼같은 동물들, 아마도 여기 등장한 동물들은 ‘나’가 누이와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속의 주인공들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시인들의 이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문득, 갑자기 쏟아져 나온 이름들, 또는 의미들의 홍수 끝에 ‘나’는 이들이 ‘아슬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이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어머니’마저도 ‘멀리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내게 남아있는 이후의 당연한 순서는, 또는 별을 헤는 이 ‘의식(儀式)’의 마지막은 당연히 ‘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언덕의 흙으로 덮어버린다. 시인은 이 행위의, 흙을 자신의 이름에 덮어버리는 것,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나’는 결국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된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 부끄러운 것일까? 나? 나의 이름? 벌레가 된 ‘나’는 ‘나의 별에도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름 위에 덮힌 흙 위에서 풀이 자랄 것을 고대하며.


윤동주의 시(詩)를 오래 간만에 정독해서 읽었다. 꼭 한 가지만 얘기해야 겠다. 윤동주에게 이육사와 같은 저항시인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여전히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읽는 일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오히려 윤동주 시인이 저항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시와 생애가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한, 순백의 시를 쓰는 이들도 감옥에서 죽어야 했던 그 시대는 도대체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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