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7
페데리코 안다아시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해부학자의 삶을 다루었다는 설명만 보고 덜컥 주문해 버린 책이다. 그러니 페데리코 안다아시라는 작가의 이름은 당연히 처음 듣는 것이고, 작가의 나라인 아르헨티나- 메시? 참 보르헤스가 있었군- 역시 소설이라는 분야와 관련해서는 그리 익숙한 나라가 아닐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덜컥 사서, 후다닥 읽은 것은 '해부학'이라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막상 책을 사서 표지와 속지에 쓰인 설명을 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해부학자 마테오 콜롬보가 발견한 것이 그 뭐냐... 음... 그러니까... 흠흠...작년 광고계 최대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참, 뭐라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 여성 질 속의 해부학적 구조인 클리토리스였다는 사실이다. 클리토리스가 뭐냐고? 아마도 인터넷으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우선 이 단어를 검색창에 치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곳에서는 검색하지 말자, 검색자가 19세 이상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심상치 않은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를 검색해서 나오는 것은 형이상학과 아주 거리가 먼, 주로 허리하학(?)에 관한 것들이다.   

여성 질 속의 구조물이면서 여성의 성감대 중의 하나인 클리토리스. 이것을 발견한 해부학자의 삶이, 이 소설이 사실이든 허구든 간에, 결코 마테오 콜롬보의 스승이면서 실제 시체를 최초로 해부한 베살리우스나, 폐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의 삶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살리우스는 산사람을 해부했다가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성지순례를 하던 중에 죽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 속엔 성스런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마테오 콜롬보가 발견한 것은 클리토리스다. 그러니 그의 삶이 해부실과, 강단과, 아카데미와, 연구실, 그러니까 연구와 진료와 교육을 오가면서 전개될 것이라는 우아하지만 속보이는 상상을 하지는 말자, 그건 저자와 독자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클리토리스는 그런 삶 속에 들어가 있을 만한 단어가, 아니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다.   

저자가 고른 독특한 신대륙, 동명의 탐험가 콜롬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처럼,은 여성의 '그곳'과, 남자의 '그곳'과, '그곳'의 유곽과, 변태와, 유아성애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바다 위에 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이 소설은 속된 욕망의 배설과 금기를 꿈꾸는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랫동네와 매음굴을 전전하던 이 작품은 콜롬보의 재판과정으로 넘어와 그의 논문의 각장을 상세하게 공개하면서, 단지 야한, 또는 관능적인 소설의 차원을 넘어선다.  

콜롬보가 논문을 통해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욕망이 클리토리스라는 구체적인 구조물과 어떤 '카이네틱스'로 연결되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영혼과 신앙의 문제가 관능과 쾌감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구원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좀 더 단순화 시키면,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성과 속 이라는 중세적 이분법들을 '클리토리스'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의 중심에 있는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그는 자신의 신대륙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래, 모나 소피아! 하지만 '사랑'의 바다위에 떠있는 신대륙을 발견한 해부학자, 마테오 콜롬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매독으로 썩어가는 연인의 몸뚱이였다. 유곽의 마돈나, 속됨과 육체적 욕망의 결정체! '사랑'이라는 단어는 늘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그것을  비추는 육체는 언젠가 썩어 없어진다. 비록 그것이 찬란하도록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나 카레니나 3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 소설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마음이 있어도 손에 잘 안잡히기 마련이다. 안나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인데,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만 하고 읽지 않고 있다가 최근에 대전에 내려가게 되면서 읽기 시작했다. 다 읽는데 무려 세달이 걸렸다. 이 책을 읽으려고 생각한 것은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에서 R이 책에 대한 언급을 해서 읽은 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김영하의 어느 책에선가 현대문학을 이끄는 동력을 얘기하면서 이 작품을 인용한 글을 읽어서이기도하고,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어느 밀란 쿤데라의 문학에세이 <커튼>에서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어서 일 수도 있다.  

R은 '안나카레니나'라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이 '인습의 굴레'라고 지적했고, 김영하는 현대 소설을 이끄는 동력 중의 하나인 '연애'를 언급하면서, 자유연애가 성행하고 이혼이 자유로워지는 어느 날엔가는 안나의 갈등이 별 의미가 없어지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쿤데라는 절정 부분을 언급하면서 안나가 기차에 뛰어 들어 사망하는 부분이 안나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미학적 균형을 의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이들이 지적한 부분들은 기억나지만 정작 내가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다. 아마도 무려 도합 1500쪽이 넘는 분량의 책을, 세달이 넘도록 읽어서 인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이 없는 것이 제목, 그러니까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안나카레니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특별한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안나는 결혼한 여인지만 자신의 남편이 아닌 애인, 그러니까 정부, 브론스키를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써놓으면 마치 이 소설이 안나의 이중생활이나 불륜에 대한 작품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다른 부부들의 연애와 사랑이 비춰지면서 사랑이나 연애가 이 작품의 키워드이긴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이 소설은 안나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그래서 산만하다.

아마도 이 책을 읽는 것이 힘들었던 것은 내가 이 소설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안나'라는 개인의 내면인데, 소설이 그리고 있는 것은 러시아라는 국가의 외연(정치, 사회, 제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작품을 기억하고 있는 연결고리는 인습과, 결혼과, 연애와, 죽음의 미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하나의 키워드가 더 생각났다.  

안나?  

체홉의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주인공 이름도 '안나'다. 안나와 로모프. 생각해보니 둘이 왠지 닮은 것 같다. 불륜의 주인공이고, 사랑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고, 로모프와 브론스키라는 바람끼 있는 애인과 사귀고 있고..... 체홉과 톨스토이가 생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혹시...... 

너무 오랫동안 읽어서 작품의 줄거리고 주제고 별 생각이 안 나지만 체홉의 소설의 주인공 '안나'가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처럼 죽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다.  

후반에 체홉이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그건 '진정한 사랑'을 어렴풋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의 안나가 죽은 것은 바로 그게 없었기 때문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폴 오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폴 오스터의 소설이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작품들과 비교해서 훨씬 단순했졌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한 문장이다. 애덤 워커가 루돌프 보른을 만났다.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출발한 소설은 이 둘의 만남과 헤어짐을 중심으로 두 인물과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리고 참, 노상강도가 한 명 죽는다. 이 소설 속의 가장 극적인 사건은 '살인'이고, 이 사건은 모든 갈등, 그러니까 워커와 보른의 헤어짐의 계기가 된다. 그나마 이 '살인' 역시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 극적인 의미가 희석되어 버린다.      

이 작품이 읽기 어려운 것은 소설의 중심에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소문들만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이 사실인가?, 무엇이 소문이고, 무엇이 사실인가? '워커와 보른이 만났다'라는 단순한 이야기 위에 긴장감을 주는 것은 사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는 소문의 모호함이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 소문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단어가 아닐 듯 싶다. 왜냐하면, 이 소문들은 누군가에서 말해지고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근친상간과, 살인과, 동성애와, 롤리타 컴플렉스로 이어지고, 일인칭으로, 때론 이인칭으로, 소설로, 녹음기로, 편지로, 일기로 기술된다, 마치 사실인양.  

금기의 단어들로 가득한 소문의 내용이 전개되고, 소설의 후반부에서 워커와 누나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기억은 해석에 불과하다' 는 <라쇼오몽>의 주제를 또 써먹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불안함은 잠시뿐. 폴오스터는 이 지점에서 이제껏 전개된 이야기에 다시 한 번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들을 활짝 열어두면서 이전 소설 속에서 써먹었던, '물타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이 작품 속의 '물타기'가 이전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물타기가 '소설'이라는 형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워커와 보른의 이야기가 다른 이의 이름으로 된'소설'로 출판될 것을 암시한다. 물론 이것도 가능성일뿐.    

이 책의 결말은 모호한 소문만큼이나 모호하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나면 몇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왜 사실은 안되고 픽션은 되는 걸까?  '보이지 않는' 이란 단어의 의미는 뭘까? 왜 저자를 바꿔야 할까? 왜 하필 소설일까? 물론 이 질문들의 답을 모른다고 해서 이 소설을 읽는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폴오스터의 최대 강점은 수많은 의문부호들로 가득한 모호함들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는 뛰어난 소설가이면서 완벽한 이야기꾼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굳빠이 이상>이후로 읽은 김연수의 소설들이 모두 별로였지만, 왠지 모를 기대감에 또 읽게 되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집들을 꾸준하게 발표하면서, 동시에 번역도 하는 것을 보면 김연수는 성실한 글쟁이임이 분명하다. 그의 소설들 역시 그의 성실함이 묻어나 있다. 이전에 몇 번 실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의 소설을 또 사서 읽는 것을 보면 그의 성실함이 좋은 결과, 다른 독자들은 이미 그런 좋은 결과를 보았는 지도 모른다, 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닐까 싶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한 이 소설의 시작부분은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또 '운동권'얘기였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대학생때 운동권이었고, 누군가는 누구랑 사랑에 빠졌고, 그러나 누군가는 붙잡혀서 곤욕을 치루고, 그다음에는 인생이 비비꼬이고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한 때 홍수처럼 쏟아졌던 운동권의 '후일담'을 소재로 한 소설들을 몇권 읽어본 독자라면 정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불 보듯 '빤'한 것 아닌가! 

이 소설 역시 그런 빤함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이 전개되면서 작가는 이런 빤한 스토리 라인에 좀 새로운 문제제기를 시도한다. 작가가 던지고 있는 의문은 그 모든 일들과 세상을 개혁하고, 대의에 목숨을 걸고, 화염병을 힘차게 던졌던 우리, 또는 나라는 존재가 '우연'한 것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화염병을 던지고,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을 맞으며 지키려고 했던 모든 행위들이 어떤 역사적인 필연에 의한 것들이 아니라 단지 우연한 해프닝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개인들의 삶과 삶의 목표들은 지극히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과거와, 그들의 조상들의 과거와,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과거를 엮어가면서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사실, 그의 답이 썩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리고 그 답이 아주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답은 '나'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의 모든 행위는 '우연'이라는 공허한 근거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는 훨씬 더 필연적이고 현실적인 이들의 삶이 얽혀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독일과 일본과 한국을 거쳐서, 또 주인공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인생역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결론이다.

역시나, 이 소설 역시 김연수의 다음 소설들을 읽을까 말까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새로운 문제제기를 시도하려는 그의 '성실한' 노력이 돋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탐정의 규칙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혁재 옮김 / 재인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소설의 규칙들을 제시하고, 거기에 해당하는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제목에 굉장히 충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진짜 명탐정, 또는 추리소설의 '규칙'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왠지 좀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이 작품 속의 단편들이 규칙에 갇혀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추리소설은 픽션이고, 따라서 탐정 역시 완벽할 수 없고, 작가 역시 완벽할 수 없다, 절대로! 이걸 모르고 있는 독자들이 있을까? 굳이 추리소설이 갖고 있는 태생적 한계와 약점들을 들추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건 마치 순정만화를 그리는 만화가가 백마 탄 왕자는 없고, 신데렐라나 캔디처럼 역경을 딛고 왕자님이나 테리우스를 만나는 것이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만화를 그리는 일과도 같다. 일종의 자학성 작품활동이라고나 할까!  

이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자학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긴장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작가 자신이 자신이 쓰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 냉소적인데, 독자는 말할 것도 없다. 집중을 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는 것이다. 

추리소설의 한계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자학'의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뭔지는 나도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단편은 이런 문제의식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마도 이 소설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좀 더 진지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