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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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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가 끔찍한 책이란다. 당시에는 그 책이 정말 그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사람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다.  

마루야마 겐지는 외모만 봐도 왠지 소설가라기 보다는 수도승에 가깝다. 그의 소설론을 담은 <소설가의 각오>를 읽어보면, 이런 그의 외모가 괜한 '가오'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끔찍하다는 글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고행하듯이 써야 한다는 그의 글쓰기 철학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마루야마 겐지의 말처럼 글을 써야 한다면, 참으로 끔찍한 일일 것 같다.  

내년 수업때 독서론에 대한 것을 강의하기 위해 고른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말하자면, 한마디로 '끔찍하다'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책을 읽는다면, 물론 본인은 즐겁겠지만, 독서라는 것이 참으로 끔찍한 일일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에게 글쓰기가 고행의 과정이라면, 다치바나 씨에게 독서는 일종의 전투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한 분야를 알기 위해서는 1미터 높이의 책을 읽어야하고,자신은 어떤 분야에 대한 책을 쓸 때 4-5미터 정도의 책을 읽고 쓴다는 등, 독서를 가시화(?) 하고, 독서량을 몇미터 단위로 수치화시키는  그의 독서론은 가히 전투적이라 할 만하다.  

하긴 먹는 것을 전투로 삼는 푸드 파이터(food fighter)도 있는 마당에 리딩(reading) 파이터가 존재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닐 것 같긴하지만......  

하지만 의외로 이 책 속에는 기존의, 혹은 나의 생각과 다른 몇가지 점들을 제외하고는 별 내용이 없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 겠다. 그의 독서적 기행?, 아니면 기행적 독서? 를 제외하고 이 책 속에서 인상에 남는 몇가지를 지적해보면,  고전이 된 문학들을 읽지 말라는 것, 굳이 통독을 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등이다. 그의 주장이 과격하고 극단적이 면이 있지만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나 역시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고전이 된 문학들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 전체를 읽을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은 좀 지나치지 않나 싶다.  

그의 주장이 과격하고, 그가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독서 방법이 조금 끔찍하지만, 과격하고 극단적인 주장들을 정답인 것처럼 밀어붙이는 저자의 내공이 대단하다. 사실 독자들은 이런 내공에 감동하는 법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앞으로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근데, 너 몇미터나 읽어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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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패러독스 2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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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은 기발하기는 하지만 왠지 정이 안가는 작품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던 것 처럼 일종의 '반칙'을 썼기 때문이다. 마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홈런왕이 되거나, 금지약물을 복용하고 백미터 세계신기록을 낸 거라고나 할까?  

 더군나나 나 역시도 포와로의 추리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피에르 바야르는 이 책에서 포와로의 해석이 망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한다. 저자의 주장은 크게 두가지인데, 하나는 진짜 '범인'을 찾아가는 것이다. 포와로 내세운 증거들의 허황됨과 소설 속의 화자가  의도적으로 '생략'한 부분들을 추측하면서 꼼꼼하고 섬세하게 자신의 추리를 전개해나간다. 근데 문제는 저자의 추리가 포와로의 추리처럼 신선하지도 극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준의 수사, 또는 추리를 제시하고 저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범인군을 제시할 뿐이다. 

포와로의 수사가 억지와 비약이 많고, 포와로 자신이 해석 망상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겠는데...... 그게 뭐? 어차피 포와로는 현실 속의 인물도 아니고 이야기가 실제 사건은 아니잖아? 그러니 진범은 굳이 잡아서 뭐하냐고 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사실 이야기 속에서야 논리적인 '진범' 보다야 극적인 게 낫잖아!

해석, 이론, 망상에 관한 저자의 알쏭달쏭한 설명들이 꽤 길게 이어지면서 이러한 불만은 거의 책을 덮을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묘미는 바로 여기서 부터이다. 이것이 저자의 두번째 주장이다. 바야르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라는 텍스트를 정신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정신분석학 적인 진범을 제시한다. 바야르가 제시한 범인은 원작의 진범보다도 훨씬 더 극적이면서 훨씬 더 논리적이다.   

'망상'에 관한 설명을 읽다가 잠들지 말고 반드시 바야르가 제시하는 범인을 읽으라. 진짜 놀라울 따름이다.  

추신: 피에르 바야르가 쓴 다른 책들은 번역이 안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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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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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교양이 있으려면 책을 좀 읽어야해', '책도 안 읽고 무식한 소리 하는 것 좀 봐라', '이상한 책좀 읽지말고 제대로 된 책을 읽어라' 수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고 협박하고 경고한다.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폼나는 미래를 위해서, 훌륭한 직업을 위해서, 멋진 집과 폼나는 차를 구입하기 위해서 지금하는 쓸데없는 짓 대신에 책을 읽을 것을, 그러니까 독서를 하라고 강요한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뿐만이 아니다. 공중파 방송이 앞장 서서 강요하기도 한다. 몇년전 <느낌표>라는 코너에서 한 '책읽기' 강요 프로그램은 이러한 사회적 강요의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이들의 강요 속에서는 경고가 들어있고 그 경고 속에는 당연히 약간의 협박 비스무래 한 것이 들어있다. 책을 안 읽고, 교양이 없는 사람의 미래에 대한, 또는 그 사람들이 모인 국가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협박을 한 수 거든다.   

근데, 독서라는 것이 대체 뭘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뭘까? 어째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곧 교양없음과 무식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일까? 어차피 모든 책들은 읽자마자 대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고, 책을 읽지않고도 책의 내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 굳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가며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의 저자는 책을 읽지않고 읽은 척 할 수 있는 상황과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한다. 아니, 책을 읽는 방법도 아니고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하는 방법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누군가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들에게 차마 이 책을 읽어보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내 대답은 알아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저자가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진지하게 철학과 문학을 끌어들여가면서 까지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는데 그깟 항변에 굳이 책읽기로 시간을 낭비하라는 충고를 하라고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약간 눈치가 있는 사람은 그러니까 결국 책읽지 않는 법에 얘기하면서 책을 읽으라고 주장하려는 책 아냐?하는 반문을 할 수 있다. 물론 저자가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읽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이런 식으로 책의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독서하지 않는 행위-책에서는 '비독서'로 통칭하고 있는데-를 통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질문'이지 '답'도 '강요'도, 협박도 아니다. 단지 질문과 질문에 대한 성찰이다. 만약 저자가 이 책에서 무언가 주장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독서 행위가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이고 한가지 의미만을 갖는, 또는 한가지 방식만을 갖고 있는 행위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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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7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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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책읽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편안한 책이 아니다. 읽지도 않은, 게다가 읽지도 않을 책에 대한 독후감들을 읽는 것은 지루함을 넘어서 일종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즐거운 책이다, '더할 나위없다'는 수식어에 대한 정도가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독서일기의 첫번째 장점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면서 이 책 속에 등장한 많은 책들을 소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엄청난 독서광이라 할 지라도 평생을 두고 이 세상의 책을 다 읽지도 심지어 살 수도 없다. 이건 마치 세상의 모든 곳을 여행하고 싶어하는 이가 다른 이들이 갔다와서 쓴 여행기를 읽는 기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책)엔 이러저러한 것들이 있고 저곳엔 그러저러한 것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맘에 들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말고! 두번째는 장정일의 독특한 관점이 담긴 글들을 읽을 수 있다. 주례사식 비평에 식상한 독자들에겐 장정일의 독설은 일종의 청량제와도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1권에 비해서 다른 작가들에 대한 적나라한 평가는 없어졌다는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장정일만의 독특한 관점을 느낄 수 있다. 세번째는, 사실은 이게 가장 중요한 점인데, '독서'라는 행위가 이력서에 취미로 써내기에도 좀 뭐한 취미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독서'라는 진부한 행위가 사실은 진지하고 소중한 행위이자 작업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독서에 대한 철학을 배울수 있다고나 할까?

이 책을 읽은 뒤 부터는 취미란에 독서라는 글자를 좀 더 진하게 꾹꾹 눌러서 쓰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준다는 것이 '장정일의 독서일기' 시리즈가 갖는 최대의 미덕이 아닐까? 독서일기 7권은 언제부터인가 유지해온 '일기'보다는 '독서'와 '글쓰기'에 무게중심이 가있는 형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원고가 저장된 파일을 다 날렸다는 작가의 말을 읽어서인지 글 속의 논리들이 예전처럼 날카롭지 못하다.

하지만 어쩌랴! 

8권을 기다릴뿐이다. 언제쯤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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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한 책읽기와 독서일기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7-09-30 23:42 
    얼마전 포스트에 오른 장정일의 독서 일기 7을 보고 장정일의 독서일기가 7권이 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동안 잊고 있던 독서일기 이다. 포스팅을 할려고 조회를 하니 독서일기를 읽는 몇가지 이유라는 글도 올라와 있다. 다시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1권과 2권까지 읽고 가지고 있다. 읽을 당시에도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비교를 하였다. 둘의 차이는 많다. 제목에서 시사하는 바와 같이 차이가 있다. '독서일기'와..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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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들에게 ‘강의’라는 단어는 슬라이드 상영을 뜻하는 것이고, 슬라이드의 양은 강의자의 지식의 양을 의미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록 교과서에는 안 나오지만, 슬라이드의 양과 학생들의 반응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하나 있다. 슬라이드의 양이 늘어날수록 강의실은 조용해진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다, 자는 사람이 늘어나니까. 사실 요즘에도 나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은 내용과 상황에 관계없이 일단 슬라이드만 내려오면 양쪽 눈이 감기면서 의식수준이 떨어지는 파브로프의 조건반사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 직업병이다, 불치(不治)의.

‘강의’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에 대해 갖고 있었던, 지겨울 것이라는 선입견은 아마도 앞에서 얘기한 학창시절의 경험 때문이리라. 하지만 곰곰이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꼭 그 이유 때문만도 아니다. 차례에 나와 있는 이 책에 소개된 동양 고전들의 목록을 보자! 자그마치 열권이 넘는다. 한 두 사람의 저서를 지정해서 강의하는 것도 아니고, 열 명이 넘는 동양 사상가들의 저서를 오백 쪽 남짓한 책에서 모두 ‘강의’를 하겠다니! 이건 마치 동양고전에 대한 ‘수박겉핥기’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난 ‘강의’를 읽었다. 왜?


몇 년 전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되었던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는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강의자의 독특하고 명쾌한 해석과 동, 서양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듣는 사람들에게 동양고전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모호하고 불분명했던 동양철학에 대한 의문들은 햇빛이 안개를 쓸어가듯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강의는 끝났다. 하지만 텔레비전 강의가 끝남과 동시에 동양고전들에 대한 ‘열광’도 끝나버렸다. 이상하게도 ‘강의’가 끝나고 난 후에 내게 남은 것은 동양고전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아니었다. 화려한 지식의 잔치가 끝난 뒤에 오는 허탈함. 하지만 ‘강의’라는 책이 어쩌면 이걸 해결해줄 지도 모른다는 것, 이게 이 책을 읽게 된 나름대로의 이유다. 


도대체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하며, 왜 하필 ‘강의’라는 형식이 필요한 것인가? 동양고전들에 대한 ‘강의’가 필요했다면 다른 전문가들의 책들도 많은데 굳이 스스로 비전문가임을 주장하는 저자의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 사실 치열한 현대사회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맹(孔孟)과 노장(老莊)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저자의 이전 저서를 읽어 본 독자들이라면 그가 하고자 하는 동양고전에 대한 강의가 결코 지식의 전달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는 ‘가르치기’ 위해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하기’ 위해 강의한다. 이 책의 제목으로 붙어있는 ‘강의’라는 말의 의미는 결국 대화, 혹은 의사소통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이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설명한 책들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여운이 오래 남는 이유는 ‘비전문가’임을 자처하는 저자가 눈높이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동양고전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 방대한 지식을 원하는 독자들은 이 책이 무척이나 불만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해 동양고전에 대한 ‘열광’을 원하는 독자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다. ‘열광’은 텔레비전 강의만으로도 충분하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저자의 책 속에서는 항상 이런 목소리가 느껴진다, 그는 강의한다. 무엇에 대해서? 동양고전들? 물론 표면적으로는 동양고전에 대해서 강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그게 아니다. 저자는 서론에서 도(道)라는 것은 길에서 생각하는 것이고 동양고전을 살펴보는 것은 과거를 성찰(省察)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성, 찰, 결국 그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글자이다. 나와 내가 속한 세계를 반성하며 살피는 것. ‘강의’ 속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성찰’의 대상은 다양하다. 그것은 한국 사회와 세계를 지배했던, 혹은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역사적 전망일 수도 있으며, 인(仁)과 덕(德)같은 인간관계의 가치들일 수도 있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처세술은 절대로 이런 ‘성찰’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순대국밥을 한 그릇 먹더라도 전문집을 찾아 가서 먹어야 ‘진짜’ 순대국밥을 먹었다는 생각이 들만큼 요즈음은 ‘전문’의 전성시대다. 점심 한 끼를 해결하는데도 ‘전문’을 따지는 마당에 의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전문’에 대한 과도한 집착 또는 열광은 의학을 ‘전문기술’로 환원시켜버렸고 의사들을 단지 전문기술자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평생을 걸어야 하는 의학이라는 길(道)이 단지 몇 가지 '전문기술'을 배우는 것만으로 끝나버린다면 얼마나 허탈한 일인가!

사실 의사와 전문기술자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 밖에 없다.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들어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찰’이라는 단어, 혹은 행위이다. 뚱딴지같지만 이것이 여태껏  대답하지 않고 있던 ‘응급실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에게 왜 동양고전이 필요한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답이다. 의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기술에 매몰되지 않고 그 기술과 기술이 속한 주변세계를 반성하며 살펴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전문기술자가 아닌 의사가 될 수 있다. 의학도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덧붙임: 이 글의 제목은 '과학은 열광이 아닌 성찰을 필요로 한다'에서 착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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