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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희망곡 문학과지성 시인선 315
이장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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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험을 봤다. 그보다 더 오래만에 시집을 샀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오랜만에 시라는 걸 써봤다. 이 시집을 읽은 덕분이다. 나이가 드니까 '오랜만에'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워진다. 쓰지 말아야 겠다. '오랜만에'라는 단어를 천천히 발음하면 마치 긴 한숨이 폐속에 고이는 것 같다. 징글징글하다. 

이장욱의 시집 <정오의 희망곡>을 읽다가 문득 시를 쓰고 싶어졌다. 정오마다 희망하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정오를 희망하는 건지, 노래를 희망하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다. 희망이라는 게 매일 정오마다 생긴다는 것, 그것이 훨씬 중요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쉬운 희망이라는 것은 쉬운 절망만큼이나 기만적인 것. 매주 복권을 사는 이들에게 희망은 쉬운 거지만 그 근거는 늘 위태롭기 마련이다. 쉬운 희망들은 매주 쉽게 절망하리라.  

서평이 이 시집과 점점 관련이 없어진다. 난 이 시가 갖고 있는 낯선 연관들과 외계인같은 시점이 좋다. 혹시 시인이 외계인? 시를 써본 건 아마 대학교 2학년 이후로 처음 인것 같다. 꽤 오랜만이네, 후우- (긴 한숨이 폐 속에 또 한번 고인다). 그럼 한 십 오년쯤? 내게는 '시'란 것이 정오의 희망곡이었나 보다라는 생각을 잠깐. 이 시집을 고르면서 생각난 건데 이상하게 난 386세대의 막내들에게 끌린다. 신입생때 나를 가르쳐 주던 선배들과 비슷한 연배여서 그런가? 

<황금빛 모서리>의 김중식, <가끔 중세를 꿈꾼다>의 전대호, 소설가 김영하 등등등. 몇명 더 있을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명단에 이장욱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추가해야 겠다. 오랜만에(정말 자주 쓰네!) 맘에 드는 시인을 만났다. 나도 가끔 시를 써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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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을 받다 장정일 문학선집 6
장정일 지음 / 김영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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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을 받다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들
단지,

지루하리만큼 긴 비명
뼈 속까지 내려간 울음
그러나,

격문은 아닌 것
호소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그런 것들이,

주목을 받다ㅡ

꽃.

각 연이 제시하고 있는 의미들을 대략 정리해 보면, 1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은 2연에 등장한 '긴 비명'이자 '울음'이고 이것은 3연에서 등장한 '격문'도 아니고 '호소'도 아닌 것이다. 결국 이 시를 읽는 독자가 궁금해 하는 것은 시인이 연을 바꿔가면서 반복적으로 여러 단어들로 변주해서 얘기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게 무엇이냐는 것이 아니다. 4연을 살펴보면, 시인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결론부터 얘기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주목을 받(았)다. 이것이 시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시를 훑어 보면 결코 '그것'은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긴 비명'처럼 처절하고 '뼈속까지 내려간 울음'처럼 진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주목을 받다라-'는 말 끝은 길게 늘어진다. 줄표(-)는 무언가를 준비하기 위한 숨고르기다. 그리고 약간의 침묵.

'꽃'이라는 한 단어로 구성된 마지막 연은 일종의 화룡점정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꽃'이라는 단어를 찍는 순간 긴 비명과 울음들은 '꽃'으로 변해버린다, 마치 모자 속의 비둘기가 마술사의 모자 속에서 꽃잎으로 변해서 무대 위에서 날리듯이.  

8월이 시작되면서 처음 읽은 것은 장정일 선집에 들어 있는 <주목을 받다>라는 시집이다. 이 시집의 최대 미덕은 쉽다는 것이다. 게다가 매 작품마다 시인이 직접 간략한 해설을 달아놓았다. 물론 해설이 달려 있다고 해서 시가 항상 이해하기 쉬워 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과 지성사 시집 뒤에 달려있는 무시무시한 시 해설을 보라. 해설을 읽고 시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시 '주목을 받다'의 해설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사실 해설을 읽으면서 시를 하나하나 풀어서 읽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는 늘 '전체'로서 다가와야 한다. 그럼에도 이 시의 마지막 연에 쓰인 '꽃'의 의미는 궁금하다. 나의 해석은 이렇다. 이 시에 쓰인 '꽃'은, 또는 '꽃'이라는 단어는 '예술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김춘수 시인의 '꽃'에 나오는 꽃처럼, 말은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릴 때 비로소 투명해진다. 

이 시 속의 '꽃'도 투명하다, 한, 없,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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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시전집 1 - 1941년 첫시집 <화사집>부터 7시집 <떠돌이의 시>까지
서정주 지음 / 민음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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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두고 풋살구가 꼭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도라오지 않는다하는 外할아버지의 숯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눈이 나는 닮었다한다.
스물세햇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하드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罪人을 읽고가나
어떤이는 내입에서 天痴 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찰란히 티워오는 어느아침에도
이마우에 언친 詩의 이슬에는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서꺼있어
볓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느러트린
병든 수캐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종을 아비로 둔 ‘나’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 애비를 기다린다. 방안에는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어매가 있다. 어매는 손톱이 깜한 ‘나’에게 바다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숯많은 머리털과 크다란 눈을 가졌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에 대해 얘기한다. 시 속에서는 더 이상의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그 이후의 어매의 이야기는 ‘나’가 외할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얘기 정도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 성격은 이랬고, 어떤 일들을 하고 다니셨으며, 어떤 친구들을 사귀었고 등등등. 결국 이 구절은 ‘나’가 애비와 어매를 닮았고, 애비와 어매는 그들의 애비와 어매를 닮았으며, 또 그 애비와 어매의 애비와 어매는 그들의 애비와 어매를....... 이 끊임없는 핏줄의 인과관계(?)가 스물 세 살의, 현재의 ‘나’를 만들었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나를 만든건 八割이 바람이다’라는 진술을 통해서 ‘나’는 핏줄의 인과관계의 결과물로서의 ‘나’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부정한다. 굳이 얘기하자면 나머지 이할 정도만이 이런 인과관계의 산물일 뿐이다. 그럼 팔할을 만든 ‘바람’이란 것의 정체는  대체 뭘까? 물론 바람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듯이 이것은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당연한 얘기지만 시속에서는 바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또는 바람이 무엇에 대한 은유인지 구체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도가도 세상을 부끄러워하였고, 어떤 이들은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 갔고,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갔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나를 이루고 있는 팔할의 바람 때문에 나는 부끄러워졌고 죄인이자 천치가 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바람이라는 것은 결국 세상에 떳떳하지도 못하고 정의롭지도 못한 그 무엇이, 또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그 무엇이 아닌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죄인이자 천치인 시인은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을란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은 바람이 만들어낸 결과들을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자신은 뉘우칠 생각이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나’의 이마우에는 詩의 이슬과 멫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다. 시의 이슬은 바람이 내게 만들어 준 것이고 멫방울의 피는 팔할을 이루고 있는 바람 때문에 생긴,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생긴 결과물이다. 어느 아침에나 이슬과 피가 범벅이 되어 있는 나의 모습은 그래서 늘 혓바닥 느러트린 채 헐덕이는 병든 수캐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시의 제목인 자화상, 나의 모습인 셈이다.

혓바닥 느러트린 채 헐덕이는 병든 수캐!

미당 시전집을 읽었다. 여러가지 생각들 때문에 미당의 시를 읽는 것은 맘이 편하지 않다. 사실 그래서 제대로 읽어내기가 힘들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래서 더욱, 읽지 않게 된다.

미당 시전접을 읽고 나서 처음 느낀 느낌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글쎄, 아마도 내 직업이 시인이었다면 약간의 질투를 느꼈겠지만 난 안타까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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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원본대조 윤동주 전집
윤동주 지음 / 연세대학교출판부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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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또 다른 고향’이라는 시는, 제목부터 반체제적인 혐의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이 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들여다보는’ 행위 때문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백골과 함께. 어둔 방에 눕는 순간 방은 ‘우주’로 변하고 ‘소리’처럼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마치 ‘별헤는 밤’의 언덕에서 바라보았던, ‘가을로 가득한 하늘’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가을 속의 별들로 가득 차 있는 하늘은 곧 ‘또 다른 고향’ 속의 ‘우주’가 된다. ‘나’는 방에 누워서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곱게 풍화작용하고 있는 백골이 눈물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눈물짓고 있는 백골과 나,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있지만 내가 우는 것인지 백골이 우는 것인지 여전히 알 지 못한다. 왜냐하면 백골이 곧 나이고, 내가 곧 백골이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또 다른 고향>의 ‘백골’은 <자화상>의 ‘사나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아니라 ‘눈물짓는’ 슬픈 일인 것이다. ‘나’가 꿈꾸는 ‘자화상’은 ‘곱게 풍화작용을 하고 있는 ’백골’의 모습이 아니라 ‘아름다운 혼’, 또는 ‘지조 높은 개’의 모습이다. 시인은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 개’에게 쫓기는 것이 어둠뿐만이 아니라 ‘나’까지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개가 ‘나’를 쫓는 이유는 분명하다. ‘나’가 어둠의 일부이기 때문이고 어둠 속에서 고작 곱게 풍화작용이나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가 ‘아름다운 혼’이 되거나 ‘지조높은 개’의 쫓김을 당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이다. ‘백골’을 떨쳐버리는 것, <또 다른 고향>에 가는 것은 그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194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 詩 ‘별 헤는 밤’의 정경은 그가 처한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는 달리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기만 하다. 가을 하늘에는 별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나’는 언덕에서 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표현처럼 이 시를 읽는 독자는 ‘나’처럼 ‘아무 걱정도 없이’ 시를 읽게 된다. ‘나’는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서 ‘가을 속의 별들’을 ‘아무 걱정도 없이’ 다 헤일 것 같지만 결국 이 일을 완벽하게 끝내지는 못한다. 뒤의 내용을 참고로 한다면, ‘나’는 별을 헤는 행위를 끝내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별’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만드는 것이 ‘나’의 원래의 목적이다. 좀 다르게 말한다면, 별을 헤는 행위는 곧 이름을 붙이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나’가 별에 붙이는 이름들은 추억, 사랑, 쓸쓸함 같은 단어들로 시작해서 어느새 ‘어머니’로 연결된다. ‘어머니’는 이후에 나오는 모든 인명(人名)들의 첫 단추이면서, 모든 인명(人名)들을 생각나게 해 준, 일종의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어느 별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소학교 때 친구들과 이국 소녀들의 이름들을 거쳐 강아지나 토끼같은 동물들, 아마도 여기 등장한 동물들은 ‘나’가 누이와 아이들에게 읽어주었던 동화속의 주인공들이리라, 그리고 자신이 읽었던 시인들의 이름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문득, 갑자기 쏟아져 나온 이름들, 또는 의미들의 홍수 끝에 ‘나’는 이들이 ‘아슬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이 행위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어머니’마저도 ‘멀리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현실로 돌아온 내게 남아있는 이후의 당연한 순서는, 또는 별을 헤는 이 ‘의식(儀式)’의 마지막은 당연히 ‘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어야 한다. 하지만 어머니가 북간도에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지 못한다. 대신 자신의 이름을 언덕의 흙으로 덮어버린다. 시인은 이 행위의, 흙을 자신의 이름에 덮어버리는 것,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이름’을 가진 ‘나’는 결국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된다. 그런데 ‘나’는 무엇이 부끄러운 것일까? 나? 나의 이름? 벌레가 된 ‘나’는 ‘나의 별에도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이름 위에 덮힌 흙 위에서 풀이 자랄 것을 고대하며.


윤동주의 시(詩)를 오래 간만에 정독해서 읽었다. 꼭 한 가지만 얘기해야 겠다. 윤동주에게 이육사와 같은 저항시인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여전히 윤동주의 시와 생애를 읽는 일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오히려 윤동주 시인이 저항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시와 생애가 더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순수한, 순백의 시를 쓰는 이들도 감옥에서 죽어야 했던 그 시대는 도대체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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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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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김수영 시 전집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읽었다. 물론 현재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숙제라는 것이 아마도 더 큰 이유였을 것이다.  91년 민음사 판 김수영 시전집을 읽다가, 어떤 시는 너무 좋아서 학생수첩에 깨알같이 적었던 기억도 난다.  물론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어떤 것이든 다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여기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사실 민음사판 김수영 시전집을 읽을 당시 수많은 한자어로 인해 해독의 곤란을 겪었던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해독이 어려운 시들과 알 수 없는 한자들의 조합. 사실, 그 시전집을 읽고 있던 시절이 꼭 즐거웠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건 김수영 평전을 읽는 것은 그의 시를 읽는 것만큼이나 감격적이다. 최하림의 꼼꼼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 묘사들은 그의 시전집에서 파편화된 채 제시되었던 그의 삶의 조각을 맞추는 데 도움이 된다. 평전의 가치는 한 인간의 삶을 천천히,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조각들은 이런 식으로도 맞춰지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는 왜 죽었을까? 아니, 어떻게 죽었을까? 그가 살아 있다면 한국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사실 역사 혹은 개인사에서 이런 식의 가정이나 의문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늘 생기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전을 꼼꼼이 읽는다 해도 이 질문들에 대한 완벽한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추측과 공상의 나무들만 무성해질 뿐이다.

교통사고, 김수영의 갑작스런 죽음. 운명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삶은 무서우리 만치 공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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