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알라딘 인기책 1위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레볼루션 No.0>이다. 하지만 몇 주 전만하더라도 장정일의 신간인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2>이 계속 1위였다. 지금은 순위가 계속 밀리고 있는 중인데, 장정일 책을 사기 위해 둘러보던 중 빵가게재습격님이 올리신 리뷰에 시선이 멈춰졌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의 p168 인용 부분이다.  

글쓰기의 가짓수는 무척 많고, 교양이란 매우 폭이 넓은 세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글쓰기 하면 곧바로 시나 소설을 떠올리고, 그걸 읽는 게 교양의 다인 양 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르의 문학이 글쓰기의 피라미드 가장 높은 꼭대기에 좌정하고 있으면서 그 외의 글쓰기를 억압하는 사회, 고작 시집이나 소설 몇 권을 읽는 것으로 교양인 행세가 가능한 나라는 가망이 없다.  BBK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에서라면, 거의 반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부 이상 팔리고 그 사건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 같은 소설이 100만 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 소설 <도가니>도 그렇다. 청각장애자 학교에서 일어났던 성폭력 사건을 유명 작가가 논픽션으로 썼다면, 사회적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영향으로 진실이 발본되고 미비한 법들이 고쳐질 확률도 높으나,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는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다. -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p168

이 대목을 읽고 장정일의 말에 백번 공감했다. 그런데, 과연 해당 사건을 논픽션으로 출간해서 사회적 파급력을 기대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슈화가 잠깐 되기는 하겠지만 미비한 법과 제도들이 고쳐질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하튼 그건 그렇고, 나의 궁금증을 증폭시킨 것이 우리 사회에서 교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궁금해서 미치겠다>처럼 호기심을 채우고자 백과사전을 읽어내는 것이 교양인가? 이것이 교양이라면 ‘교양=지식’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흠, 생각에 빠지다 보니, 예전의 일례가 스쳐지나간다.

지인 중에 결혼을 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이 있다. 40이 됐는데도, 계속 선만 보고 있는 중이다. 헌데, 이 분은 선만 보고 오면 투정을 해댄다. 여자가 이쁘면 교양이 없다고 하고, 교양이 있으면 외모가 아니란다. 두 개 중에 하나를 포기하면 금방 결혼할 거 같아, 빨리 결혼 하고 싶으면 하나를 포기하라고 했더니, 절대 그럴 수 없단다. 책도 안 읽는 여자와 어떻게 살며, 더군다나 외모가 딸리는 여자와 어떻게 같이 다니냐는 것이다. 난 이분이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는 이상 3년 내에 결혼하기 힘들 거라 말해줬다. (이분은 그 해에 꼭 결혼을 해야 된다고 비장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분이 ‘책 안 읽는 여자’를 ‘교양 없는’여자로 단정한데 있다. 이것은 우리가 참 많이도 듣던 말 중 하나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교양이 있으려면 책을 좀 읽어야해'라거나, '책도 안 읽고 무식한 소리 하는 것 좀 봐라'라는 말은 우리가 꽤 많이 들어오던 격언(?)이다. 이 말 속에는 ‘책=교양=지식’이라는 관계가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말 속에 말이다.

이를 종합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교양은 곧 지식이나 책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는 명제는 교양의 의미를 규정짓는 제1의 선언쯤 되는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의 각종 입사시험에 ‘교양 시험’ 내지 ‘일반 상식 시험’의 구성을 보면 이를 뒷받침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지식 위주의 교양이라는 것을 비판하고, 자신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 곧 교양이라고 하는데, 이는 교양의 일반적 논의를 무시한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지식(책)은 곧 교양인가?’ 라는 물음에 단호히 위의 잠정적 결론처럼 ‘그렇다’라고 잘라 말하기에는 꺼림칙한 뭔가가 발목을 잡는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지식이 교양의 범주에 포함되는가?’란 의문 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교양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나도 백과사전을 찾아봤다. 두산백과사전에 올라 있는 교양의 의미를 살펴보면 좀 거창하다 싶다.

교양을 뜻하는 영어 'culture'의 원뜻은 '경작(耕作)'이고, 독일어의 'Bildung'은 '형성'이라는 뜻임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여기에는 인간정신을 개발하여 풍부한 것으로 만들고 완전한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시대마다 일정한 문화이념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므로 교양의 내용은 시대 또는 민족에 따라 달라지는데, 적어도 유럽문화권에 있어서는 이제까지 그리스·로마적인 교양의 이념이 일관하여 계승되었다. 고전 그리스에서의 '파이디아(paideia:교육)' 이념이 헬레니즘을 거쳐 그리스도교 세계로 계승되어 '그리스도교'라는 새로운 교양이 확립되었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근대 유럽에서의 교양은 로마시대에 형성된 후마니타스(humanitas:인간성)의 이상을 다시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의 우위가 결정적인 현대에서는 이것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교양이 요구되기 시작하고 있다.


줄친 부분을 보면 교양이 무엇이고 어떤 걸 공부해야 하는지 좀 막연하다. 그렇다고 추상적인 설명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정신을 개발하고 완전한 인격을 형성해 가는” 방향으로 공부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말이다.

헌데, 교양의 내용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니 환장할 노릇이다.

좋다, 교양이 무엇인지 그 실체(?)에 접근해 보도록 하자. 일단 <교양>이라는 이름을 달고 출간된 책들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도대체 어떤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지. 책을 보면 ‘교양’이라는 실체가 잡힐 수 있지 않을까?

일단 교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책을 검색한 이후 논술과 학습에 관련한 것들(고전을 소개한 책 포함)제외하고 교양의 사전적 정의에 근접한 내용을 담은 책을 찾아보니 4권을 추릴 수 있었다.

홍세화, 21세기를 바꾸는 교양(7인7색), 한겨레, 2004
교양으로 읽어야 할 절대지식 세트(절대지식, 세계명작, 중국지식); 1권으로 침.
또 다른 교양, 에른스트 패터 피셔
디트리히 슈바나츠, 교양, 들녘, 2006
 

 


 

 

 

홍세화&박노자  씨의 책은 7인의 시론을 모아 놓은 것으로 ‘교양’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너무도 지엽적이다. <절대지식 세트>는 고전과, 문학, 그리고 중국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어 이 역시 ‘교양’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빠져 있다. 주로 고전의 소개에 그치고 있다. <또 다른 교양>의 경우는 부제가 ‘교양인이 알아야 할 과학의 모든 것’이다. 이 교양서는 현대 과학의 주요 분야들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책이다. 역시 ‘과학’, 그것도 ‘현대 과학’의 성과만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너무 지엽적이다.

이로부터 보건데, 현재 ‘교양’이라는 내용을 구경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책은 디트리히 슈바나츠의 <교양>이 유일할 듯싶다. 책의 내용을 보면 사람이 알아야할 거의 모든 것을 다 갖추어 놓은 듯하다. 이 책에 대한 유시민의 추천을 보면, 더욱 신빙성이 더해진다.

“교양인을 만드는 기본요소는 슈바니츠가 강조하는바 역사와 철학, 문학과 예술에 대한 이해이며, 사회를 자기의 내면에 비추어봄으로써 사회를 결속시키는 도덕적 구속력을 생성해내는 유연하고 자성적인 정신인 것이다. 이러한 교양의 기초가 없는 전문가는 한 뼘도 안 되는 전문영역에 갇혀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그는 길을 잃고 만다. 평지에 높이 솟은 돌기둥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불안하다. 이런 사람들은 <교양>의 마지막 구절을 작업실 컴퓨터 모니터에 붙여 두면 좋겠다. 잃어버린 교양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배운 사람들’이 언제나 가슴에 담아두어야 할 잠언이기 때문이다.

-교양은 정신의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형식이다.-


유시민의 추천사에서 보듯이 <교양>에는 유럽의 역사(고중근세), 기독교, 종교개혁, 계몽주의, 현대(19, 20세기), 유럽의 문학, (서구)미술의 역사, (서구)음악의 역사, 철학과 철학자들, 성 논쟁의 역사, 언어, 책과 글의 세계, 지역학, 지능과 창조성, 성찰적 지식 등 실로 서양 문화의 기반이 되는 모든 것을 766페이지 속에 담고 있다.

이 책은 ‘교양’에 가장 근접한(?) 내용을 담은 책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이 책을 보고 교양을 안다는 것은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우리 것만 없느냐? 가만 보면 자연과학에 관계된 많은 것들이 빠져 있다.

위에서 두산백과사전의 교양에 대한 설명에서도 보았듯이 교양은 시대와 민족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시대 우리나라의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양은 슈바니츠의 책에 ‘우리 것’과 '과학 분야'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역사(고대, 중세, 근세, 근대, 현대), 유교 불교 도교, 한국 문학, 한국의 철학과 철학자들, 한국 미술의 역사, 한국 음악의 역사, 민주화, 우리말 바로 알기 등이 추가되고 여기에 자연과학을 더 얹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교양이라는 것은 한 권의 책을 통해서 함양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인 것 같다. 모르는 것보다야 낫지만 뭔가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출판사들은 다투어 ‘OO교양신서’같은 총서 류나 ‘지식’ 시리즈를 기획한다. 이런 총서 류를 보면 백과사전의 주제별 묶음 쯤 돼 보인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고등교육(교육은 교양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이 지향하는 교양은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 같다. 그곳이란 어디일까? (개인적 생각인데) 나는 그 높은 곳이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일전의 어느 에세이에서 유시민은 ‘교과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시민에 따르면 자기가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교과서에서 배웠다고 했다. 이 말에 천만 배 공감한다. 중고등학교 때 배웠던 교과서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배웠던 교과서는 전문가를 빼놓고 알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알려준 것 같다.

고교 시절 배웠던 기초 과목과 일명 암기과목들, 즉 국어, 수학, 문학, 정치, 경제, 세계사, 사회문화, 지리,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음악, 미술 등이 이른바 교양이라는 것의 가장 밑에 위치할 것이다. 이는 디트리히 슈바나츠의 <교양>을 훑어 봐도 대번 알 수 있다. 이 기초 교양 과목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에 더하여 대학에서 개설하고 있는 교양과목(이 대학 교양과목들도 기초 교양 과목들의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다)들, 예컨대 철학개론, 문학개론, 사회학 개론, 자연과학 개론, 경제학 개론, 법학 통론, 한국사, 경제사, 세계문화사, 논리학, 경제수학입문, 경제학 원론, 행정학 개론, 복식문화사, 언어학 개론, 정치학 개론, 미술사, 음악사, 심리학 개론, 경영학 개론 등을 읽고 이해한다면 위에서 말한 ‘교육이 지향’하는 ‘교양’ 수준에 도달하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교양이란 백과사전적 지식 보다는 체계가 잡힌 보편적 지식의 덩어리들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교양은 곧 ‘지성의 역사(=지성사)’의 일반적 표현인 듯싶다.

헌데, 이렇게 열심히 나름대로 찾은 ‘교양’이 ‘교양’이 아니라면, ‘교양’이란 대체 뭐지?? 

 

***************** 

책을 읽으면서, 교양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읽고 있는 교양 신서가 어떤 의도로 기획된 건지도 의심스러웠고. 그래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단행본 책을 찾아 봤다. 헌데, 없었다! 교양을 논한 비슷한 책을 찾았는데, 대부분 교양에 대한 두루뭉술한 서술 뿐이었다. '교양'이 무엇인지 답답했다. 개인적으로 좀 중요한 화두라고 나름 생각하는데, 직접적인 소개서가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하다. 그래서 좀 생각을 해 봤는데, 시원스런 답변은 못 찾은 것 같다. 혹시 교양을 논한 책을 알고 계신 알라니너 분들이 계시면, 무지한 야무에게 깨우침을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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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8 0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8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8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0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9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1-09-08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야무님 꽤 유쾌하시네요. 생각없이 들렀다가 글 잘 읽고 갑니다.

아는 건 없지만 어디선가 읽은 몇 구절 조합해서 덧붙이자면, 제가 아는 한 '교양' 독일의 'Bildung' 은 본질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속성과외' 목록입니다. 빌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8세기인데, 이때 독일은 강력한 통일국가도, 법치적 분권도, 본격적인 자본주의의 시행도 이뤄내지 못한 '후진국' 이었죠. 자본주의, 통일국가, 법의 분권화를 진작 이뤄내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독일은 수많은 나라로 쪼개진 후발주자에 불과했으니까요.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배우고 익혀야 할 특정 목록을 '갱신'하게 되는데, 이게 소위 '빌둥'입니다. 그리고 이 목록을 배우는 목적으로 '인간다운 삶과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운운이 붙었을 것이고요. 이렇게 말하면 목적을 감추기 위해 근사한 '타이틀'을 붙였다는 감이 있지만, 실은 당대 독일 지식인들은 '인간다운 삶'과 '근대성'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해요. 민족주의를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속성으로 생각한 구한말 우리 지식인들과 동일하게요. 어째건, 이 '빌둥'은 '근대성'을 빨리 습득해야 할 일본에서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서양을 쫓아 근대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요구에 쫓기고 있던 일본은 '근대성'을 학습하기 위해 '서양근대국가의 정수'라고 생각되는 목록을 만들어서 책을 통해 습득하고자 하는데요. 이게 소위 '교양'입니다. 다만 이 때 세워진 교양 즉 '다이쇼 교양주의'는 철학/역사/문학등을 중심으로 리스트들이 만들어졌고, 이게 인문쪽에 치중되어 있는 '교양'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게 아닌가 싶어요.(사실 인문쪽에 치중되어야 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근대성은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할 것인가라는 인문적 전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요컨데 '교양'은 '속성과외'리스트입니다.^^ 최근에 교양에 과학기술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교양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 안는 것입니다. 교양이란 근대성 또는 쓸만한 지식의 집합으로 정의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 근래 들어 '교양'의 문제가 언급되고 대학밖 '교양' 강의가 활발한 이유는 '교양'의 이런 역사적 과정과 무관하게 '교양' 자체가 내세웠던 근본적인 질문,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늘어난 것에 기인합니다. 전에는 '속성과외' 리스트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면 나라도 부강해지고 나도 잘 살고 이랬는데, 이게 한계에 부딪친거죠. 동시에 물질적 풍요가 보편화되면서 단지 '학습기계'로 살아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의미를 찾기 시작한 측면도 크고요. 강유원 선생의 강의가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이런 의문을 채워주지 못하고 '죽어버렸기' 때문에 대학밖에서 호응을 얻었다는게 대단히 아쉬운 측면이 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대중화의 열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어요.

교양에는 속물적 성격도 대단히 내재하고 있는데, 이는 베블런이 신랄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베블런이 정의한 '교양'이란 상류계급이 자신을 '일반대중'과 분리하여 나타내기 위해 익히는 '쓸모없고 시간 많이 걸리는 사치스런 항목'에 불과하죠. 저는 이걸 읽으면서 대단히 웃었답니다. 서양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려면 교양이 필요하다 운운은 이런 측면이 가미되어 있을 겁니다.

교양에 대한 정의도 많고 접근방법도 다양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정의를 꼽으면 가다머가 제시한 '교양'입니다. 가다머는 비코를 인용해 교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타자의 입장에 서 보는 것' 그런데, 이 단순한 말에는 여러가지 함의가 들어있죠. 타자의 입장에 서 보려면 자신을 객관화 할 줄 알아야 하고, 자신과 타자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필요로 합니다. 교양은 이런 걸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 수많은 리스트와 공부시간과 열의를 통해 기껏 얻는다는 지점이 '타자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라니 그야말로 맥빠지는 결론이 아닐 수 없지만, 뒤집어서 '인간다움'이란 그런 소박한 것이면서도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 라는 통찰도 담고 있는 듯이 보이고요. 너무 인생 목표를 거창하게 잡지 말라는 '쾌락주의'의 결론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설이 길었습니다. 공자님 앞에서 문자쓴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난삽한 댓글 줄입니다.^^

yamoo 2011-09-08 20:01   좋아요 1 | URL
아, 빵가게님 정말 감사합니다. 첫단락은 제가 미처 몰랐던 사실입니다! 프린트 해서 봐야 겠어요~ 빵가게님께서 교양에 대한 적절한 논의들을 모아주셨군요! 비코의 책과 가다머 그리고 베블런의 책들은 이미 봤습니다만...설렁설렁 봐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본 책이 빵가게님과 달라서 그런지 제가 본 책에서는 교양에 대해 언급한 걸 보지 못했네요~

교양에 대한 긴 댓글은 정말 제게 매우 많은 도움이 됐네요. 교양의 범주를 어디까지 잡아야 할지 매우 답답했는데, 어느 정도는 가닥을 잡은 것 같습니다! 긴~글, 정말 감사합니다!

cyrus 2011-09-09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양의 의미에 한번쯤은 생각해본적이 있는데 이것이 교양이다라고 딱히 뭐라고
정의내리기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요하는 문제인거 같아요. 저는 아직 교양이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를 못 내리겠어요. 생각하기에는 제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기에는
너무 부족한거 같고요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올바른
윤리적 가치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정말로
제대로 된 교양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고요.. 나름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드네요.

yamoo 2011-09-13 20:46   좋아요 0 | URL
교양이란 무엇인지 딱히 정의 내리기 힘들지만 누구나 두루 사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에...한 번쯤은 개론서가 출간됐으면 합니다.

시루스님두 교양과목을 들으시면서 한 번 생각을 정리해 보시고...저한테 좀 알려주시길~ㅎㅎ

2011-09-10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3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9-1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 님. 오랜만입니다. 추석 연휴는 잘 보내고 계시지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만 생각해본다면 그보다는 데이비드 덴비의 책을 한 번 살펴보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교양이라는 건, 참 어떻게 정의를 내리기가 어려울 듯 싶은데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교양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생각해 보기엔 괜찮은 것 같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6371601


^^.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yamoo 2011-09-13 20:4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결님~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영부영하다보니, 벌써 명절 마지막날이네요..ㅜㅜ 하두 돌아다녀서 발만 아푸구...아흐~

덴비의 책은 두 권 모두 갖고 있다가 친구 선물로 줬습니다. 그 책두 고전 감상문 모음집(소개서)에 포함되는 책이라서 살짝 제외하게 되었어요~ 이런 류의 책이 좀 많더라구요..ㅎㅎ 그래서 전 절대지식 세트3권으로 대체했다는^^

저도 많이 궁금해 하는 분야라..교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론적인 책이 한 권 나오면 좋겠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 누가 올려 놓은 글입니다. 그도 어느 사이트에서 [펀글]이던데...사이트 내에서 덧글 논쟁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좀 된 글인데, 페미니즘에 대한 논쟁적인 글이라 제 서재에 옮겨 놓습니다. 

 

 

1

남성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졌을 때, 앵무새처럼  "모든 여성이 그렇지 않다." 라는 주장이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라는 논리는 실제로 그러하거나, 항상 그럴 준비가 되어 있거나, 반론에 대한 도피처로서의 자기방어이거나, 실제로 그러하다고 믿고 있거나... 전형적인 자기방어, 자기변명일 뿐이다. 
 

 

"모든 여자가 그렇지 않다."는 논리는, 실제로 "모든 여성이 그러하거나 그럴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정말로 그렇다고 믿고 있다면, 단지 여성들 개개인의 외부적인 상대적 차이점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그렇다고 믿고 싶어하는 희망에 충실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윤리적 학습과 자신의 감정과 본능을 통제하는 하나의 지지대 역할을 하는 가치관의 세계가 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과 그로 인해 받을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러하리라 할 수 있다.  


남성운동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이다. 이것은 하나의 현실에 대한 도피처를 제공하는 해악일 뿐입니다. 남성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아편을 입에 물려주고 현실을 외면하게끔 유도하는 의미 이상의 것은 없다.  


여성단체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남과 여의 전체적인 극심한 대립이다. 여성단체... 페미들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가족해체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겉으로는 가족해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있어서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어야 그들이 생존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존의 보수적 가치관들 중에 자신들의 존립 여부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부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의 단계적 수정을 통해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페미니즘의 가장 큰 요인중 하나는, 여성부의 의도적인 변형된 전통관습 유지에 기인한다. 정상적이거나 아니면 아예 폐지 시켜버리면 세상이 엉망이 되더라도 나름의 균형이 생길 수 있지만, 남성들에게 보이지 않는 희망과 권리란 탈을 쓴 의무를 부여하기 위하다 보니 눈에 띄게 삐걱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날 주어진 현실이 잘못 되었다 여긴다면, 그것이 어떠한 방향으로건 균형을 갖추길 원한다면, 그 현실을 물러설 공간이 없다는 뼈저린 자각을 통한 인식을 통해, 정면으로 맞서야 합니다. "모든 여성들이 다 그렇다."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남성들의 대부분이 그렇게 인식해야만, 세상을 바꿀수가 있는 거죠.  


"모두가 그렇지 않다"라는 논리는, 현실도피를 불러오고 남성들이 원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부분들에 대한 가능성으로 인해 남녀간의 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인 해결 의지를 잊어버리게 한다.  



항상 단순한 인간들이 고정멘트로 달고 다니는 말..

"니 엄마, 니 여동생, 누나, 딸... 어쩌고..." 처음에는 전부 여자들이 썼다. 그녀들이 알바였는지...사전공작에 의해 주입된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수의 남성들도 이 말을 좋아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말은 절대적으로 "여성 취향"의 논리적 접근과 사고방식에 근거해야만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저는 이해가 안 가는 것 중 하나가, 미성년과 성관계를 맺은 남성들을 보고 "자신의 딸을 생각해 보라"는 주장들입니다. 그럼 결혼을 할때는 자신의 누이를 떠올리며 상대를 고르고, 잠자리를 가질때도 누이를 떠올리라는 것인지... 결혼 상대자와의 연령차가 정확히 몇 년 몇 개월이 되어야 하고, 연애 상대자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인지...

가족은 가족이고 남녀관계는 남녀관계일 따름입니다. 가족은 나와의 관계일 뿐이지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나와 똑같은 가족이 아닌 것이다.
(응답맨 註 : 참고로 니 엄마, 니 여동생이란 말을 달고 다니는 무뇌충 페미들에게 이런말을 "니 오빠, 니 아들, 니 아버지였다면?"..라고 반문하라. 니 엄마니 여동생이니 이런 말은 전형적인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다. 즉 남자는 무조건 강자, 여자는 무조건 약자이고 무능력한 존재인 하등한 인간으로 간주하는 데서 나오는 말이다. 즉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시각으로 본다면 절대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들이다)

이것은, 공과 사의 구분을 못하는 전형적인 여성들의 사고방식입니다. 또한, 유아적 사고에 기인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은 아무리 똑똑하고 많이 배웠다 하더라도, 평생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되는 정신연령이 굳어지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의 정신적 수준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여성의 경우는 이러한 시기가 굉장히 빨리 찾아오는데, 바로 초경을 전후해서 생긴다. 신체적 변화와 더불어 굳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임신과 출산과 결혼생활에 적합한 신체적 환경과 더불어 정신도 그에 걸맞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2세의 출산과 육아를 위해 능동적인 배우자 선택이 아닌 수동적인 배우자 선택이라는 본성으로 인해 언제 불시에 선택당해 2세를 위한 환경에 돌입할지 모르기 때문에 일찍 완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에는 10세를 전후해서 대부분 초경을 치른다.

성장이 지금보다 더디었던 과거에도 대부분 지금보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이러한 나이 때에는 남녀를 불문하고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여기는 부분이 강한 편이다.

세상의 중심은 나이고, 나를 중심으로 가족이 형성되고, 그 가족을 중심으로 세상이 형성되었다. 아무리 덜떨어진 사람이라도 성인남성이라면, 이와 정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남녀의 가장 큰 의식차이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어긋남의 하나가 이것에 기인한다.

유아적 정신연령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 모든 사물을 자신을 둘러싼 가족에 비쳐보기에 "니네 엄마, 니네 딸..." 운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은 공과 사의 구분을 잘 못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과 사를 구분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시야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여성이, 특정한 사상적 학문이나 주변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면, 100% 필연적으로 피해의식을 가지게 되고 주변을 원망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떼를 쓰는 것과 똑같다고 보면 정확하다.
(응답맨 註 : 제가 항상 하는 말 "아마에"와 같은 의미이다. "아마에"라는 것은 애들이 하는 것이지 성인이 하면 덜떨어진 애 취급 받아야 한다는 생각)

"모든 여성이 그렇지 않다"는 논리는 남성들의  자기권익뿐만이 아니라, 여성들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도 독만 될 뿐이다.  A 수준의 것들을 남성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두가 그렇지 않다"란 논리로 인한 남성들의 자기안위와 현실무시는, A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된 시점에서 등장한 진행된 B가 나올수 있는 시간만 벌어줄 뿐이고, 이는 최종적으로 Z의 결과가 나오도록 만들 뿐이다. A 에서 문제인식을 제대로 했다면, 대부분의 남성들이 A선에서 확실하게 막을수 있는 것들도 분명 많다.


2.

여성은, 선악의 개념이 자신에게 이익이냐 손해냐에 따른다.

순결을 중요시 하는 여성이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손해가 중요한 것이며, 수단만 있다면 수많은 남성과 관계를 맺고도 태연하게 자신이 순결한 척 행동할 수가 있으며, 또한 이러한 면들이 젊어서는 자유분방한 연애와 성을 주장하다가 결혼할 때에 현실인정이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나는 실재적인 그들의 속마음이다.

한국의 현실은 보수적(?)이어서 순결하지 못하면 질타를 받는다라는 이유가 아니라, 젊어서는 놀고 즐기는게 이익이고 그로 인한 손해는 거의 없기 때문이며, 결혼 후에는 그 반대가 손익이기 때문이며, 상대 남성의 남성이 가진 근본적인 본성을 억제시키고 자신만을 위한 노예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명분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가진 본질에 가깝게 다가갈수록, 모든 여성이 그러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망상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것... 남성과 여성의 상생(?)은 끝없는 요구의 연속이라는 여성이 가진 속성에 이끌리기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제대로 된 조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성의 치마자락을 붙잡지 말고 당당히 남성들이 홀로 서서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그것이 남성만을 위한 것이건, 남녀 모두를 위한 이상적인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건 가능해질 수 있다는것...  


조선속담에, "여자와 입씨름하는 남자 치고 제대로 된 남자 없다..." 라는 말이 있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여자가 하는 요구와 주장들을 그냥 들어주고 잠잠코 침묵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옮고 그른 것을 따지기에는 상대로서 적합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리 상대의 의견을 듣고 또 설득해 봐야 쓸데 없는 시간낭비라는 뜻인 것이다. 조선시대는 남녀의 역할구분과 권리와 의무를 동등하게 구분지었고 그 선을 명확하게 나누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못한 세상이 되버렸다.  


그러니 다시금 어떠한 방향으로건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날의 우리는 옮고 그름을 논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그렇지 않다." 라는 논리는 옮고 그름을 공의적으로 논할 필요와 명분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과, 정말로 소수만의 문제라면, 남성들이 느끼는 분노감의 색채는 지금과는 분명히 다를 것이며, 수많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는 것에 대한 감정적 반발로 인해 그들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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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각 분야의 고수분들이 많은 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분도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일 전 제 서재를 오랜 만에 찾아오신 알라디너분의 서재에 인사차 갔다가 엄청난 서재를 운영하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포스팅이 많이 없어 처음글부터 마지막글까지 금새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읽고 나서는 그분(이하 J님)이 주장하시는 바가 사실이라면(미천한 제 눈에는 주장하는 바가 모두 타당한 것 같습니다) J님은 도올이거나 아니면 도올에 필적할, 아니 우리나라 노장철학계의 독보적인 전문가 이실 것입니다.

글의 문체가 도올과 너무 흡사하여, 혹시 도올밑에서 수학하신 분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만큼 J님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볼 때 매우 독선적입니다.

그가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은 거의 모든 노장 철학 번역서들이 노장 철학을 잘 르고 번역해서, 진정한 노장철학을 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J님이 비판하는 바를 따라가 보면 노장에 관련된 책들의 중요한 오역이 무엇인지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오역이 사실이라면 노장에 관계된 책들은 모두 다시 출간되어야 될 듯싶습니다.


제가 J님의 서재에 들어가 이 글을 옮겨 놓는 이유는 J님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에 많은 공감을 했기 때문입니다.

   
  노자를 아는 체는 사람들 또한 전혀 노자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글에 댓글 달면서 감사하다느니 하고 잠꼬대하는 사람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가 별로 없다고 비전문가의 왜곡된 번역서를 두고 이런 한심한 작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제대로 아는 전문가 누가 한번 나와서 방송강의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J님이 지적한 노장에 관계된 책의 오역 비판에 대한 핵심을 옮겨 놓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제대로 된 노장 철학서를 선택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분이 지적하시는 부분이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1인 이기에....

대표적인 장자해설서 <장자, 안동림 역주, 현암사>를 비판한 부분입니다.

철학적 바탕이 없는 번역은 상식 수준의 해설이 되어버린다. 철학책 번역은 문자, 한문실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에 대한 깊은 철학지식과 특히 장자는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 이해가 있어야 번역이 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도 많이 떨어진다. 그런데 다른 책은 또한 이보다도 못하니 이 책을 보는 자가 많은 것이다. 
 동양철학, 도가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들을 통일성없이 막 번역어를 갖다 붙여놓았다. '천지'를 '천지자연'으로 해놓으면 오역이다. 천지는 천지이지 자연을 왜 가져다 붙이는가? 뜻이 맞다고? 천만에. 천지는 우주라는 뜻이지 자연이라는 뜻이 아니다. "道德" 은 '도와 덕'이지 '도덕'이 아니다. 도덕은 우리가 모랄을 번역한 개념이다. 장자의 도덕은 도와 덕을 붙인 두 단어이다. 모랄이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 노장에는 도덕, 모랄을 초월하라고 하지 모랄에 대한 철학이 없다.
이런 두 예들 외에 무수히 많은 장자의 중요한 철학개념들에 대한 번역어가 철학적 고찰이 없이 그냥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막 한글로 옮겨 놓았다. 무수히 많은 부분에서 오역,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오역이 발견된다.   
 꼭 이 책만이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의 기초적이면서 핵심적인 오역을 하나 짚어보자.  본책 덕충부에 '인기지리무진' 얘기에서 '天죽'이 나온다. 여기서 '天'을 역자가 '자연'이라 번역했는데 오역이다. 장자에 나오는, 노자도 마찬가지, '天' 자는 지금 우리가 아는 자연, 네이쳐가 아니다. 절대 아니다.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의미를 '하늘'이라는 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장자를 강의하는 거의 모든 교수들과 장자 번역서 모두, 장자를 읽는 모든 사람들이 '천'을 '자연'으로 알고 장자를 '자연철학'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다 틀렸다. 
"자연이 먹여살리는데 어찌 또 '人爲'가 필요하랴"  자연이니 인위하는 말들이 모두 장자의 용어가 아니고 장자사상에는 이런 개념을 쓰지 않는다. 이런 법주로 설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정 자체를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이런 범주개념으로 설명을 천 페이지를 해도 다 꽝이다. 자꾸 서양철학개념을 노자, 장자를 설명하려고, 아니 동양철학 다 마찬가지다, 하니까 노자, 장자사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쓰는 '자연'이라는 개념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이 동일할까? 하이데거 기초만 알아도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에 하이데거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다. 노자 장자에 나오는 '物'이란 개념은 어디에 가까울까? 우리가' 물질' 또는 '사물'이라고 쓰는 용어에 현혹되어 이 '물'자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서양의 '자연'은 물질이다. 그러나 노장의 물은 물질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존재자'라는 개념과 거의 같은 의미다. 노장의 '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물의 본질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 그러하다'를 한자로 '自然'이라고 노자가 한 것이다. 그러니 이 '자연'을 지금 우리가 쓰는, 서양의 용어인 '네이쳐'로 읽으면 절대 안 된다. 하나님을 뜻하는 '신'을 '신발'로 보면 안 되듯이.  노자가 '自然'이라고 한 표현을 장자는 '天'이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곽상이 장자의'천'을 '자연' 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때의 '자연'은 '네이쳐'가 아니라 노자의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으로 쓴 것이다. 도의 본질성격이 스스로 그러함이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는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본질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노장의 주장이다. 왜? 모든 존재자는 다 虛허하기 때문에. 즉 비워져 있기 때문에.  그러니 자연을 팔아먹는 모든 장자 번역책 잘못 것을 알 것이다. 장자를 왜곡하지 말라. 이 책의 모든 부분이 다 틀리다는 게 아니라 이런 중요한 부분은 분명히 알고 가려 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이 책뿐 아니라 모든 장자 번역서에 대해 하는 말이다.



다음은, 역시 가장 많이 팔린 <도덕경, 오강남>에 대한 비판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 노장전문가(노장철학으로 박사논문 쓴 사람)은 몇 명 안된다. 이런 사람들만 노자를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것도 안 되는 사람 중에 노자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까놓고 애기해보자. 오강남 역자가 노자의 도를 정확하게 알까? 내가 이 책을 본 바로는,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그럴 듯하게 써놀았다. 다른 거의 모든 번역서처럼.
 노자는 대자연에 대해 설교한 적이 없다. 자연을 말하지 않는다. 문명에 대해 말하지. 자연에서 살라? 자연의 순리에 맞추어서 살라?
 인간은 이미 자연의 순리에 따라 태어났다. 인간이 자연의 산물이다. 뭘 또 자연에 맞추어서 사는가? 그렇게 안 살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그렇게 살기 싫어도 살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을 벗어나서 살고 있단 말인가? 1초라도 벗어나면 인간은 바로 사라진다. 아니, 벗어날 수가 없다. 죽는다는 현상도 자연 현상이므로.
 노자가 자연을 찬양했는가? 찬양할 필요가 없다니까. 당신들은 공기를 찬양하는가? 하늘과 땅을 찬양하는가? 찬양할 필요없다. 찬양 안 해도 인간은 이것들과 더블어 살수밖에 없는 자연물 가운데 하나이다. 그냥 살다가 가면 된다.
 노자는 자연은 말하지 않는다. 자연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말 안 해주어도 자연은 그들이 스스로 그러하게, 스스로 알아서 자연의 순리대로 잘 살고 있다.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자연의 하나이면서도 자연을 파괴하면서, 4대강 사업이나 하면서, 살고 있는 인간이다. 노자는 자연이 아니라 문명에 대해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노자에 있어서는 문명도 자연이다. 새가 집을 짓는 것도 문명이다.  이만하자, 당신들이 노자를 모른다면 당신들 책임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잘 알려주지 못한 것이 문제지. 이 한심한 현상들을 어찌해야 하는가? 오강남의 번역과 해설은 다른 일반 번역서와 다름 없는 비전문가의 어설픈 왜곡이다.

 

 이 외에도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대표적으로 유명한(?) 번역본에 대한 오역의 지적 예입니다.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많지만 아래 대표적인 책들만 소개)


 <도덕경> 노태준. 도의 본체? 이 표현을 보면 역자가 노자의 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도가 본체라는 말인가, 도에 대한 본체가 따로 있다는 말인가. 다 틀렸다. '본체'라는 말이 서양의 실체론에 빠진 말이다. 도에는 본체가 있지도 않고 도가 본체도 아니다. 도가 본체일 수 없다는 것이 노자의 도사상이다.  자연? 네이쳐 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뜻이지 네이쳐가 아니다. 자연의 이치대로 살라? 이런 것은 노자사상이 아니다.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강신주
장자의 도가 타자와의 소통이라고 하는데 그럴 듯해 보인다. 철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런 서양스러운 용어로 표현하면 대단해 보일 것이다. (중략) 도가 과연 타자와의 소통인가? 타자와 우리가 소통을 하는 영역은 사회정치적인 공적 영역에서 일뿐이다. 타자와의 소통은 도가 가지고 있는 곁가지의 한 성격일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곧 도는 아니다.  장자는 무아론을 말하는데 빈배 설화같은 것이다. (중략)나가 없는데 누구와 소통을 한단 말인가? 타자와? 타자도 무아상태라면 누구와? 그 누가 없는데 누구와 누가 소통을 하는가?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한 것은 정치영역에서 있다. 왜? 합의를 해야 하니까. 타자는 나와 다르기때문에 서로를 인정하든가, 결정을 하려면 합의를 해야 한다. 3, 4냐 4, 3이냐. 그럼 3.5로 합의하자라든가. 이게 조삼모사의 메세지인가? 조삼모사가 말하는 것은' 허' 불교용어로 '공' 이 바탕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어리석어서 그걸을 모른다. 알면 원숭이에서도 부처가 나왔을 것이다. 원숭이에겐 보통 인간 마음을 초월한 영혼수준은 높은 정신경지가 없다.  

 

<노자 잠언록>, 보누스
노자에 관한 번역서가 많은 데 이런 책이 가장 짜증난다. 노자는 철학이다. 어떤 한철학, 관점을 가지고 81장을 번역하고 해설을 해야지 무슨 격언집처럼 아무 것이나 그때 그때 갖다 끼워넣는 식으로 해설을 하는가? 노자는 인생론을 위한 격언집이 아니다. 노자의 우주존재론과 정치철학을 알고 성인론을 이해하라. 이런 책은 종이낭비다.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 강신주
노자의 정치철학을 왜곡하지 말라. 노자를 국가주의에 파묻친 사기꾼으로 만드는가? 노자는 원래 아나키즘에 가깝지 않았는가? 난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노자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로 먼저 주어라라고 했다? 지금의 맑시즘을 자본주의가 있지도 않았던 노자에 갖다가 붙여 비판을 한다. 노자를 다시 읽어라.


  

 <노자강의-김충렬 교수의>
이 책의 저자는 우리나라 동양철학계에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장철학을 할려는 사람은 거의 다 이 저자 밑으로 가서 논문을 썻다.  이 사람의 동양철학에 대한 박학함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이 저자가 노자의 도를 알까? 글쎄.......  노자의 도를 제대로 아는지 모르는지 몇 구절 번역을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그 구절을 살펴 본 바로는 모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역시 방동미류의 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선사상적인 깨달음이 있는냐 그것도 아닌것 같다. 이 저자 밑에서 쓴 박사논문을 다 읽어 봤는데 이를 지도한 이 책의 저자가 노장을 아는지 의심스러웠다.  우리나라 노장계는 정말 정글이라는 것을 느낀다. 이 쪽의 큰 인물이 나온다면 이 책은 제외하고라도 노자, 장자의 허섭한 번역서가 이렇게 날립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자-꼭 읽어야 할 인문고전 동양편4> 타임기획 호승희 역                            청소년을 위해 노자를 읽히는가? 노자 도덕경은 청소년은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절대 읽히지 말라. 청소년을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얘들이 읽어서 도움 받을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모르고 역자가, 출판사가 이 책 작업을 했단 말인가? 한마디로 노자를 모르는 자들이다. 노자를 알면 이런 기획 안 한다. 이 책뿐 아니라 청소년 시리즈에 노자, 장자를 넣는데 절대 넣지 말라. 있어도 얘들에게 읽히지 말라. 읽히면 오히려 독이 된다. 물론 읽혀도 전혀 모르겟지만. 만약 애들이 읽고 이해했다면 그건 잘못 안 것이다. 그건 절대 노자의 도가 아니다. 노자는 철학교수도 어려워 못 읽는 책이다. 


<철학콘서트>
"도는 철학, 덕은 정치학" 노자 도덕경에 어디 이런 사상이 있는가? 도와 덕은 이런 식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의 초보 같은데 뭐 이리 여러가지로 아는 체를 하는가? 다른 부분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 가지나 똑 바로 알고 책을 써라. 개론이나 입문서는 오히려 철학의 해박한 대가들이 써야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번역된 노장에 관계된 책은 한권도 없느냐? 그렇지 안답니다. 장자에 대한 좋은 번역서는 없지만 제대로 된 도덕경의 번역서는 있다는 군요! 

J님께서 추천하신 제대로 번역된 4권의 도덕경 (우리나라에서 도덕경을 제대로 풀이한 도덕경 전문 주석서)  

심재원,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 정우서적. 감산덕청의 주석을 함께 완역하고 철학 설명을 해 놓았음.    

임채우,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왕필의 주석을 완역.     

최진석 정지욱, 노자의소, 소나무. 성현영의 주석을 완역.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 소명. 하상공의 주석을 완역. 각주 충실 



 

 

  

 

어떤 분이 J님의 추천대로 <이석명, 노자도덕경하상공장구>를 읽었는데, 오강남 역본의 미진한 부분이 해결되었답니다. 저도 한 번 이들 책으로 유명한 도덕경을 제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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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7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9-0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충렬을 비판하면서 방동미를 부정적으로 거론하는 것을 보면 필자가 도올 제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도올이 김충렬과 방동미 제자거든요.

노이에자이트 2011-09-08 23:07   좋아요 1 | URL
그래서 도올 책에 김충렬 씨에 대한 회고가 가끔 나오죠.도올이 대만국립대학에서 석사학위 준비할 때 지도교수가 방동미였어요.방동미의 마지막 제자죠.

yamoo 2011-09-09 09:37   좋아요 0 | URL
아, 도올이 김충렬과 제자였군요! 오늘 노이에자이트님으로부터 첨 알았습니다! 근데, 말하는 폼이 참 도올하고 비슷합니다. 도올 논어 강좌...그보다 더 잘된 책은 없다는 걸 보고, 전 도올의 제자가 아닐까 생각했었습니다~^^

yamoo 2011-09-09 09:38   좋아요 0 | URL
흠...대만국립대학에서 석사 준비할 때 지도교수가 방동미 였군요! 방동미의 마지막제자라...

글면, 노이에님 도올이 하버드에서 박사 받을 때 지도교수는 누구였는지 혹시 아시나요?? 전, 이것도 궁금해 지네요..헤~

노이에자이트 2011-09-09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벤자민 슈워츠.러시안 유태인 자손이고 세계적인 학자입니다.중국사상사 전공인데 중국혁명과 공산주의운동에도 정통했어요.7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에 온 적도 있고...




yamoo 2011-09-13 20:5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벤자민 슈워츠였군요!

2011-10-27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두매 2012-01-2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데 헛소리 그럴듯하게 써놓았네요. 남 비판하기 참 쉽죠. 유명한 학자 비판하려면 어느 정도 논리 구조가 있어야죠. 어설프게 옆에서 들은거 한 구절 인용하고 비판하는 비판이 아니죠. 노자가 열린 텍스트인데 '노자의 도를 알까?' <--- 이런 식은 수준 이하의 발언이죠.. 덤으로 방동미 선생 언급한 것도 웃기네요.. ^^

ㅉㅉ 2014-10-30 16: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런 약장수한테 넘어가는 사람들도 참 딱하기는 마찬가지고요...

2012-01-26 0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곤들매기 2012-08-29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분 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노자도덕경, 그 선의 향기를 사서 앞쪽의 해제를 읽고 있는데, 지극히 명료해서 살며시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이전에 읽은 도덕경(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 김학목 옮김, 홍익출판사)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네요.

붕새철판구이 2012-10-21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자와 장자, 공자와 맹자, 석가와 달마, 예수와 바울, 마호멧과 XX, 이런 귀신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두려워하는 인간은 대개가 태어난 지 2~3년이 지난 것 들이다. 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왜 개와 같은 과정으로 태어나서 '우리 강아지"가 된 인간들은 이 귀신들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 귀신들의 요란한 재롱이 먹고 사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걸핏하면 불려나와 재롱을 부려야 하는 이 귀신들, 이제 그만 평안히 죽도록 풀어주면 어떨까?

이런 2013-09-19 01:0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병신

성천 2015-02-22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장 사상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고대의 신선사상을 이해 해야한다. 중국으로 건너간 도교는 물질적인 면만 너무 강조하여 우주의 본질을 많이 놓치고 있어서 본래의 뜻을 알기 어렵다.

우짜자고 2015-03-2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글도 잘 모른다
나는 말도 잘 모른다
하고 시픈 말도 없다
듣고 시픈 말도 없다

태어날떼도 문제 업섯고
사러가는데도 문제 업다
주글떼도 문제 업슬거시다

다만,,
사는동안 넘 만은 생각 안하고 사라서면 한다.
ㅋㅋㅋㅋ

이만 2016-08-3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전에 쓰신 글이데 지금 처음 봤습니다.

님글에 J라는 분의 서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이 분의 언어가 좀 과격하지만 들을 만한 얘기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원글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알라딘에 처음인데다 컴에 약해 못 찾겠군요.

나그네 2016-09-09 16: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현재 저 글들은 알라딘에서 죄다 삭제되었습니다. 못 찾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취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쏠리는 방향"이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용례로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다'란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이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합니다. 그래서 취향이라고 하면 아주 가볍게 생각하거나 취미와 비슷한 것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주제로 피 튀기는 논쟁을 하다가도 결과적으로 ‘그건 취향의 문제이다’라고 말을 하면. 거기서 논란 종결입니다. 개인의 취향이라는데 더 말해서 뭘 할까요~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취향이라는 건 일종의 방어벽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자기의 성향을 특징짓는 ‘어떤 것’으로 작용합니다. 뭐랄까, 좀 가벼운 것이라 할까요. 잡담 속에 섞여 간간히 표출되는 ‘그런 것’ 말입니다. “어떤 취향을 갖고 계세요?” “취미는요?” 뭐, 이런 물음들은 초면의 사람을 알기위해, 또는 친밀함을 나타내기 위해 인사치레로 하는 시시콜콜한 탐색의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취향’이라는 개념이 어떤 힘 있는 사람에게 귀속될 경우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화됩니다. ‘권력’이라는 괴물이 말입니다. 특히 권력자의 취향이라는 건 절대적이라서 하나의 ‘현상’을 낳습니다.(여기서 권력자는 정치가 뿐 아니라 사회의 어떤 특권층일수도 있습니다)

일명 법관이나 변호사 그리고 검사로 대변되는 법조인들은 어떤 사건을 받았을 때 그 사건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가장 적합한 법적 해석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개인의 취향이 우선한다고 합니다. 취향에 맞게 이론과 해석을 짜맞춘다나요. 그래서 모든 판결문을 보면 그 판결문을 쓴 법관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사건에 더 적합한 저러한 법이 있는데, 왜 이런 가당치 않는 법으로서 요렇게 해석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관의 취향이 성적으로 보수적이라면 미성년자성범죄자는 이중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한 판결은 바뀔 것(사실 근래 바뀌었음)이며 사회의 ‘경향’을 좌우할 것입니다.

어떤 문학상 시상식은 어떨까요? 어떤 권위자의 취향은 그 선택의 절대성을 부여합니다. 아무리 독특하게 잘 쓴 작품이라도 심사위원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사장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어떤가요. 전직 대통령은 코드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취향의 정치를 하다 가셨습니다.

결국 취향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브르디외의 <구별과 취향의 사회학>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매우 많은 사회제도와 문화가 어떤 특권층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물인 것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말입니다.


 

  

또한, 취향은 논리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분히 감각적이고 충동적이며 무의식적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선입관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현상을 바라보는 진실된 시각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서는 말이죠.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현상. 이것이 우리 사회의 실상이 아닐 런지 생각해 봅니다. 
 

 

****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폭력을 우리나라만큼 남성 우월적 시각에서 다루는 선진국은 없는 듯합니다. 그도그럴것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범죄에는 매우 관대하다는 것을.  

성희롱 파문으로 논란이 됐던 몇몇 국회의원들이 다시 활발히 활동을 하고, 부장검사가 간통한 사실이 현장에서 발각되었는데도 유유히 사표를 쓰고 처벌에서 빠져나가는 나라.  

명백한 강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자가 헤퍼서 그렇다고 소문을 내고 돌아다니는 고대의대 가해자들의 부모.  

참~ 취향한번 독특하군요! 그런 취향이 여성들을 죽이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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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9-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과 상관없는 댓글이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번에 온 책 보니까 420쇄여요.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yamoo 2011-09-03 22:12   좋아요 0 | URL
커헉! 제가 본것이 2백 몇 쇄였는데....와~ 또 몇 달 사이에 배를 찍었군여! 정말 놀랍습니다..저도 한 번 봐야겠는데, 도서관에 맨날 대출중이니...서점에서 죽치고 앉아 보는 수밖에 없겠어요..ㅎㅎ

cyrus 2011-09-02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요즘 세상 돌아가는 보면.. 아무래도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인거 같아요. ^^;;

이 역시 본문과 상관없는 덧글 내용이지만.. 420쇄라니.. 대단하네요.

yamoo 2011-09-03 22:13   좋아요 0 | URL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대한민국...--;;

시루스님과 같은 대학생을 위해 쓴 책이니 한 번쯤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해요..전 서점에 가서 읽다 오려구요^^

프레이야 2011-09-03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피해자 여학생이 학교로 돌아와 오히려 제2, 제3의 상처를 받게되다니요
이건 무슨 취향도 아니고 선입견도 아니고 폭력이에요.ㅠ
상대적으로 권력있는 자의 취향,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yamoo 2011-09-03 22:14   좋아요 0 | URL
완전 폭력이죠...권력을 가진 자의 취향은 정말 폭력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취향과 폭력과의 관계를 논한 책이 나오면 좋을 텐데요. 꽤 재밌을 것도 같습니다^^

루쉰P 2011-09-05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취향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일텐데 그것이 권력과 결합하며 진실을 가리는 마개가 된다는 것이 참 무섭네요. 사실 취향이라는 것은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참 많은데 그것이 권력과 붙을 때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지고 온다는 것 그것은 결국 인간을 위한 사상이 없는 존재들이 사회적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합니다. 여성에 대한 취향도 그렇구요. 말이 안 되는 현실이죠. 그만큼 천박한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지 않나해요.
야무님의 글을 읽으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그것을 파헤치고 그것과 연관되는 것을 찾아내고 하는 그런 글이라 읽으며 너무 재밌네요. 퇴근하기 전에 잠깐 들려서 읽고 가요. 이것도 제 취향일까요? 퇴근하기 전에 서재 들어오는거요. ㅋㅋㅋ

yamoo 2011-09-05 20:14   좋아요 0 | URL
취향이라는 것은 좀 깊게 들어가면 충분히 사회학의 주요 연구 테마가 될 듯합니다. 일부 사회학자들이 이 문제를 연구한 것을 일부 보긴 했습니다만...아직까지 활발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합니다. 단행본으로 나온 책도 별로 없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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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우리네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과연 몇 이나 될까?

주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생활하거나, 20년 거치 대출로 집을 장만하고, 하루 노동의 댓가를 통해 의식주를 연명하는 서민들에게 있어 자유는 유토피아가 아닐까. 오죽하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드회사 카피가 떴겠는가.

현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먹고 살아야하는 당면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 단연코 자유는 없을 것이다. 확실히 자유는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체제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 있어 자유는 그리움의 대상이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일 수밖에 없다.

여기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가 간 사람이 있다. 거친 자연과 더불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썰 들을 풀어내며 ‘자유의 원형’으로 살았던 사람, 조르바! 조르바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순수하고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두목 봤어요?」 「……」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놀랍고도 기뻤다. (아무렴.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태초에 이 땅에 나타났던 사람들의 경우처럼, 조르바에게 우주는 진하고 강력한 환상이었다. 별은 그의 머리 위를 미끄러져 갔고 바다는 그의 관자놀이에서 부서졌다. 그는 이성(理性)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p157)

만사가 그에게는 기적으로 온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서 나무와 바다와 돌과 새를 보고도 그는 놀란다. 그는 소리친다. “이 기적은 도대체 무엇이지요? 이 신비가 무엇이라 말입니까? 나무, 바다, 돌, 그리고 새의 신비는?” (p176)

「저게 무엇이오?」그가 놀라도 크게 놀라면서 물었다. 「……두목, 저기 저 건너 가슴을 뭉클거리게 하는 파란 색깔, 저 기적이 무엇이오? 당신은 저 기적을 뭐라고 부르지요? 바다? 꽃으로 된 초록빛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저것은? 대지라고 그러오? 이걸 만든 예술가는 누구지요? 두목, 내 맹세코 말하지만, 내가 이런 걸 보는 건 처음이오!」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불렀다. 「조르바, 혹 돌아 버린 건 아닌가요?」 「무얼비웃고 있어요? 당신 눈에는 안 보이는가요? 두목, 봐요. 저 모든 기적 뒤에 도사리고 있는 마술을 말이요」 (p260)

조르바는 완벽하게 자본주의를 넘어선 삶을 살았다. 장자가 말한 ‘물아일체’와 ‘무위자연’의 사상을 완벽하게 구현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바로 조르바였다. 하지만 소설 속의 작가(카잔차키스 자신)인 두목(보스)은 조르바의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지만, 현실의 상황을 끊어낼 수 없어 고민한다. 이를 안 조르바는 보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아니야! 줄을 붙잡아 맬 뿐이지……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339)

……이해하고 말고. 그래서 당신에겐 평화가 없는 거요. 이해하지 못하면 행복할 텐데.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p340)


조르바가 두목에게 한 말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자본주의라는 사슬에 묶인 채 우리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나는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곧 이따위 돈 벌이를 벗어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거야!’라고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바람과 결의는 두목이 “언젠가는 자를 거요”라고 내뱉는 말과 똑같다. 조르바는 ‘내가 묶인 줄’을 자르지 않고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일깨운다. 우리는 누구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없다는 조르바의 말이 아프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대화들은 모두 ‘삶의 지향점’으로 귀결된다. 두 주인공 모두 생활고(生活苦) 문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삶에 대한 관심사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목은 아폴론적이다. 항상 이성적인 질서와 이데아적인 것을 꿈꾼다. 이에 반해 조르바는 디오니소스적이다. 이 땅에서 자기의 이기심과 감성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데아같은 것은 빌어먹을 개한테나 줘버리라는 것!

이렇게 호탕한 자유를 구가하는 조르바의 삶은 너무도 멋있다. 조르바로부터 가공되지 않는 자유(진리)의 원형을 접하고 고민하는 두목 또한 멋진 삶이다. 그 둘이 춤을 통해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들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둘이 함께 춤을 추는 엔딩 장면은 정말 잊을 수없는 명장면이다.)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 …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중략) (춤을 추면서)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드리지.”」 p329


조르바가 현대인들에게 자유의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하는 것은 그가 자연과 더불어 살다간 마지막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문학작품의 주인공 중에서 그가 유일한 실존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한편,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히기를 “내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이 누구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꼽을 것이다.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조르바……” 그래서 그런지 책의 도처에 이들의 사상과 마주하게 된다. 

나는 놀랐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이다. 붓다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p155)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듣고 당황하고 말았다. 법이 명하는 대로 자진해서 행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현자(賢者)가 누구였던가? 필연에 순응하고 필연적인 것들은 자유 의지의 행위로 바꾸어 놓으라고 한 사람은? 이게 해탈이나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비참한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p307)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 마지막 부류는 전 우주의 삶을 목표로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모두 한 목숨인데, 단지 아주 지독한 싸움에 휘말렸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글쎄 무슨 싸움일까요? ……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p315)  
어릴 때부터 나는 초인(超人)에 관한 야망과 충동에 사로잡혀 이 세상일에 만족하지 못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神的)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놓치지 않도록 꼭 붙잡았다. (p340)


조르바의 어록을 통해서, 때로는 이 소설의 화자인 나(두목)의 성찰을 통해서 그리고 둘의 대화를 통해서 보여지는 붓다와 니체 그리고 베르그송의 사상은 한데 어울려 ‘자유로운 인간’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자유’라고 말하겠고, 어떤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주느냐고 묻는 다면 단호히 ‘인간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은 무엇인가?’ 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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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9-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의 서재에 이렇게 정식으로 놀러옵니다. ^^ 그리스인 조르바는 저 역시 무척이나 강렬하게 읽은 책이에요. 인용해 주신 주인공 '나'의 철학이 저에게는 참으로 가슴 깊이 남았죠. 자연으로 둘러싸인 환경이 아닌 욕망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유를 찾기란 참으로 어렵죠. ^^ 매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자유로운 삶이란 주체성을 가진 삶이라 생각이 들어요. 환경에 시대에 쓸려 버리는 인생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고 답답한 이 사회 속에서 그런 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파도를 헤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에게 있어 자유로운 삶인 것 같아요.
리뷰 굳!!

yamoo 2011-09-02 16:47   좋아요 0 | URL
조르바는 누구에게나 매력을 주는 인물 같습니다.^^ 루쉰님도 이 작품을 강렬하게 읽으셨군요~ 재미난 리뷰 기대하고 있을 께요~ㅎ

와~~~루쉰님이 생각하시는 자유로운 삶...멋진데요~ 님의 그 삶의 궤적을 항상 글로 남겨주시길!

양철나무꾼 2011-09-0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자유로운 삶이란 그저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사는데도,
그게 순리에 가깝고 자연 그대로인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조르바인걸요.
님의 시선을 통해 만나니...새롭습니다~^^

yamoo 2011-09-02 16:51   좋아요 0 | URL
저두 머리나,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살고 싶어요...ㅠㅠ 근데, 그게 자연 그대로, 순리에 가까운 삶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 더 미치겠어요...ㅜㅜ

저는 뭐, 이 작품 읽고 자유만 생각났더랬습니다. 여전히 전 편협한 가 봐요..한 가지밖에 못보니...

양철님의 시선을 통해 보는 조르바는 어떤 모습일지 무쟈게 궁금하네요...저에게도 그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세요, 네~~?^^

쉽싸리 2011-09-02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르바'를 예사롭지 않은 자유인으로 느꼈던 기억이 나네요. 아무래도 작가는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를 마구 흠모해서 '어디 선창가에라도 가서 살아야겠다. 거기서 멋진 연애도 해봐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며칠을 달떴던것도 같아요. 마음먹는게 참 중요한것 같아요.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는 것도!! 단, 폐를 끼치면 안되겠죠.

yamoo 2011-09-02 16:5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카잔차키스가 불교철학에 심취했다고 해요~

그나저나 쉽싸리님도 그런 생각을 하셨네요..저도 책 읽으면서 조르바를 흠모하며 선창가에 사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만...ㅎㅎ

노이에자이트 2011-09-03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어떤 여자는 조르바같은 남자를 남편이나 사윗감으로 생각하긴 싫다고 아주 솔직하게 말하더라고요.정말 솔직한 답변이죠.

yamoo 2011-09-03 22:11   좋아요 0 | URL
이거 토론 도서였었는데요, 당시 여자분들이 조르바와 같은 남자는 정말 딱 질색이라고 그러더군요~ 솔직한 것 같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