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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2023 노벨문학상 수상작 <멜랑콜리아>(민음사,2023)을 읽었다. 마지막 문장 “남아 있는 것은 생선 눈알과 평온한 빛뿐이었다.”을 읽고 난 후 나는 심한 빡침을 감내해야 했다. ‘아~, 썅 이게 뭐지?’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뭔가 있을 거 같아 참고 인내하면서 마지막 문장까지 읽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헛소리의 성찬일 뿐이었다.
끝까지 읽은 이유가 있다. 미쳐버린 헤르테르비그가 미치기 직전에 그려 구데가 팔아준 그림 두 점. 이 그림 두 점이 헤르테르비그가 죽고 비드메가 그의 삶의 궤적을 쫓아 그림과 화가의 일생을 재구성 하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보았다. 하지만 끝까지 작가는 내 기대를 무참히 꺾었다. 미친 헛소리의 성찬으로.
“삶에 자리한 사랑과 죽음, 불안과 허무의 원천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시선”, “시적 언어와 침묵으로 직조해 낸 고독한 영혼의 아득한 초상”이라는 책 뒤 표지의 사탕발림은 허울 좋은 주례사 비평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아주 멋진 보라색 코듀로이 양복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다. (p11) …… 한스 구데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물론 한스 구데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구데와 티데만을 제외하고선 나처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p12) ……
첫 문장과 12페이지 한 대몫이다. 이 문장들은 1권 도처에 흩어져 있다. “한스 구데는 그림을 잘 그린다. 티데만도 그림을 잘 그린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린다.”는 문장은 계속 반복된다. 작가는 진짜 정신병자의 언어적 망상을 자신의 문체로 확립한 듯하다. 계속 읽고 있으면 음악적 환청을 듣는 듯하다. 뭐, 이런 것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시적 언어’일 수 있겠다싶다. 다음 인용된 문장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갈매기들을 봐야 하지만, 갈매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갈매기들이 사라졌다. 나는 다시 갈매기들을 봐야 한다. 만약 갈매기들이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바지 속에 손을 넣어 두 다리 속에 손을 넣어 자위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산드베르그 박사는 만약 갈매기들이 보이지 않으면 바지 속에 손을 넣어 두 다리 사이를 어루만져 보라고 말했다. 나는 두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살짝 움직일 뿐이고, 그것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p254)
나는 화가다. 나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 나는 눈을 치우는 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치울 사람은 많다. 하지만 나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는 화가이며,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나는 눈을 치우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 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가우스타 정신 병원에 있다. (p294)
문장들을 보면 페이지가 무의미할 정도다. 계속 같은 문장을 반복한다. 뭐 미친놈이 혼자 같은 말을 반복하면(미친놈은 혼자 같은 말을 반복한다.) 시적 운율이 생성되어 ‘시적 언어’라 명명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런 문장들이 매 페이지마다 계속된다. 미친놈의 넋두리가 ‘고독한 영혼의 아득한 초상’이라고 표현하면 그건 평론적 기교이겠지.
뭐, 미친놈의 반복적인 문장으로 인해 책장은 넘어간다. 같은 문장이 계속 반복되어 플롯 전개가 매우 느리지만(A-B-C-D, B-C-D-E, D-E-F-G ……) , 그렇기에 눈으로 빠르게 같은 문장을 타고 넘을 수 있다. 그럼에도 5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330여 페이지로 늘리는 작가의 경이로운 글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면에서는 노벨상 감이다. 알프레드 자리는 분량에서 깸이 안 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소설로서의 매력이 0점이라는 건 서사 구조 자체에 있다. 최대 괘씸한 건 재미가 무지 없다는 점. 욘 포세의 작품을 들어 의식의 흐름기법 운운하는데, 그건 푸르스트 정도의 작품을 말하는 거고, 이 작품은 그것도 아니다. 알프레드 자리의 문체를 가볍게 뛰어 넘는, 미친놈의 헛소리를 그대로 실현하는 문장들이다.
위에 인용된 문장들이 끊임없이 나열된다. 주제의식? 흠...2권에서 어느 정도 드러나긴 한다.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난 천재 화가의 비참한 운명”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1권에서는 전무 했던 주인공의 그림과 그 행위가 두 페이지 정도 누나의 시각으로 나타난다. 주인공 라스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후 화구 일체를 없앤 듯하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는 부목 조각에 석탄과 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책에서 주제의식을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일 거다. 414페이지부터 418페이지에 걸쳐 있는 내용. 그는 바위에 앉아 바다 풍경을 보고 부목 조각에 석탄으로 그림을 그린다(물론 다락방에서도 낙서 같은 그림을 그렸다).
완성된 그림들은 바닷가 깊은 동굴에 보관한다. 부목 조각에 물로 섞은 석탄으로 풍경화(구름과 나무배)와 인물화를 그렸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큰 파도와 함께 사라졌다. 남은 작품들을 누나에게 보여분다. 석탄으로 그렸기에 온통 회색와 검은색이었을 거다. 이를 본 누나는 말한다. 그림이 참 훌륭하지만 우울함에 빠져 있는 라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그리고 라스는 모두 바다 속에 던져 넣는다.
작가가 책의 타이틀로 멜랑콜리아라고 붙인 이유를 알 것 같은 대목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재 예술가가 그냥 미쳐버려 그 미친 독백을 빈약한 서사에서 읽는 맛이란 정말 지루함의 극치라 할 만하다. 2권은 1권보다야 낫지만 그래도 지루하긴 마찬가지다. 처음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린 작가의 글쓰기 방식은 참으로 고약하다고 느낀다.
천재 예술가의 고뇌와 그로부터 미쳐버린 얘기는 고흐의 일화로 충분하다. 노르웨이의 비운의 천재작가를 소개해 주려면 좀 더 재밌고 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소설로서 말이다. 노벨 문학상의 기대를 갖고 본 작품은 정말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임팩트 없고 고약하게 지루한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런 작품은 중간에 덮어야 했는데, 끝까지 읽어 빡침을 감내해야했다. 뭐 어쩌랴 이것도 내 선택이었던 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