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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풀잎은 노래한다>, <마사퀘스트> 등으로 널리 알려진 도리스 레싱. 명성만 익히 들은 작가의 작품들 중 한 권인 <다섯째 아이>. 언젠가는 꼭 읽어야할 목록에 포함된 작가였지만, 이러저러한 일들로 인해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읽게 됐다. 읽어 가면서 좀 지루한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자 많은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179페이지밖에 안 되는 심플한 가족의 얘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주제는 넓고 깊었다.
이 소설은 여러 가지 시각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다섯째 아이 엄마인 해리엇의 선택이 과연 최선이었는지에 대해서 묻고 또 묻는 되새김질을 계속했다.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작품의 이야기를 풀어보면 이렇다. 아주 건전하고 정상적인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다. 이들 부부는 문란한 혼전 성관계, 이혼, 혼외정사, 마약, 딩커 등과 같은 사안들을 거부하며 행복한 가정 만들기를 실천한다. 그 행복의 핵심이 바로 매우 많은 아이들을 가지기를 원하는 거. 데이비드와 헤리엇 부부는 지인들의 이상한(?) 시선 속에서도 굿굿이 자신들의 바람을 실천한다. 그리고 부부는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까지 지극히 화목한 가정생활을 누린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난다. 다운증후군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아이. 인지 능력이 모자라고 힘만 쌘 폭력적인 아이는 엄마 해리엇의 돌봄의 범위를 벗어나 버린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친척들이 모두 모여 북적북적한 때를 보내던 시절도 벤이 태어난 이후에는 점점 소원해져가고, 아이들은 벤 때문에 집에서 생활하는 걸 불편해 한다.
보다 못한 남편 데이비드는 친척들과 상의하여 벤을 어느 기관에 보내는 결정을 한다. 어느 날 벤은 검은 승용차에 실려 기관에 감금된다. 해리엇은 자신과 진지한 상의 없이 벤을 기관에 보내는 결정을 내린 것에 서운해 하지만, 벤 때문에 가족이 겪는 사태를 감안하여 그 결정을 감내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로서 자식에 대한 본능적 애착에 벤을 보러 시설을 방문한다. 거기서 벤이 약물에 취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해리엇은 시설의 규정에 어긋나지만 엄마로서의 윤리적 정당성을 강조하며 벤을 집으로 데려오는 결정을 내려버린다.
데이비드 가족의 불행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해리엇이 벤을 집으로 데려오자 나머지 네 아이들은 엄마가 없어져버렸다. 엄마가 오직 벤에게만 신경을 집중하기에 자기들은 소외받는 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벤의 위협적 행동과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할아버지 집으로, 외할머니 집으로, 그리고 기숙학교로 떠나고 집에서는 벤의 바로 윗 형인 폴만 남게 된다. 폴도 역시 벤 때문에 학교에서 늦게 귀가한다. 아버지 데이비드는 일을 더 만들어 집에 들어오는 시간을 줄여버리고, 집에서는 잠만 잔다.
이 부부의 바람들, 즉 (벤이 태어나기 전에) 일가친척들과 가족들이 큰 집에 모두 모여 웃고 떠들던 행복한 상황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 큰 집에는 오직 벤과 헤리엇 둘 뿐이다.
이 상황을 명확히 인지한 헤리엇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 벤을 돌볼 청소년 하나를 섭외한다. 이름은 존. 아이를 돌보아주는 보모를 구한 것인데, 헤리엇의 이 결정은 결국 벤을 악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결정적인 선택이 된다. 왜냐하면 존은 부랑아이자 학교문제아들의 리더였기 때문이다. 단지 벤이 존을 잘 따른다는, 그래서 엄마의 근심과 걱정을 덜어줄 수 있다는 알량한 근거가 벤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존의 무리는 점점 일탈 횟수를 늘려가다, 결국 범죄자의 길을 걷게 된다. 벤도 커가면서 이들을 따르게 될 거라는 암시는 책의 마지막 헤리엇의 자조 섞인 생각 속에 암시되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단연 해리엇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데이비드의 아내이자 벤의 엄마인 헤리엇의 행동과 생각으로 일관된다. 그래서 헤리엇의 두 가지 결정이 더 도드라진다. 그 하나는 벤을 기관으로 보냈다가 다시 집으로 데려온 결정이고, 이로 인해 데이비드 가족은 모두 해체된다. 그리고 후자, 즉 헤리엇이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선택한 벤. 그에 대한 양육의 책임과 한계를 절실히 느낀 해리엇은 벤을 부랑아 청소년 존에게 맡겨버린다. 이후 벤에 대한 헤리엇의 통제권은 완벽히 상실되고 벤은 청소년 무리에서 성장하게 된다.
해리엇은 왜 그런 결정을 내린걸까? 가족 모두의 행복을 위해 벤을 희생시켰으면 안됐을까? 자신이 엄마로서 윤리적 양심을 접었으면 안 됐을까? 아니, 아이에 대한 양육 책임이 발동하여 벤을 집으로 데려왔다면 왜 끝까지 벤을 가정에서 책임지지 못했을까? 왜 벤을 껄렁한 부랑아에게 맡겨 버리는 우를 범한 걸까? 이 책을 읽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의문부호들이었고, 급기야 해리엇의 결정에 화가 나기도 했다. 그래서 헤리엇이 행한 모든 순간의 결정들이 아쉽다. 결국 그녀의 결정으로 인해 가족은 해체되었고, 벤은 범죄자의 소굴에서 성장하게 되었으며, 자신은 혼자 집에 남아 벤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해리엇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사실 이 불행의 심연은 보다 근원적이다. 벤이 태어난 이후 시종일관 헤리엇을 괴롭힌 건 윤리적 상황의 딜레마였다. 아이를 없애버리는 것에 대한 윤리적 두려움과 벤을 자식으로 양육하고자 했을 때의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의 근본 원인은 벤이 기형아(다운증후군)라는 사실을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다. 엄마가 볼 때 벤은 정상의 범주에서 한 참 벗어난 아이지만, 의사와 정신분석가 그리고 학교의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벤이 정상의 범주에 있다는 걸 강조한다. 바꿔 말하면 엄마인 해리엇이 이상하다는 결론이다. 헤리엇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히스테리 증상마저 일으킨다. 참다못한 헤리엇은 아이를 부랑아에게 돌봄을 맡겨버린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기형아로 태어난 벤을 엄마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마음이 아이에게 투사되어 고착된 게 아닌가 하는 정황 말이다. 학교 선생님과 의사가 해리엇의 감정적인 토로를 듣고 그 정도아이라면 정상의 범주라고 판단한 것은 매우 중요한 지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만큼 해리엇이 벤을 어떤 편견과 시선으로 양육하고 있는지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벤은 학교에서 정상적으로 어울리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벤이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정황은 책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엄마의 벤에 대한 편견이 아이를 더욱 나쁜 방향으로 내모는 결과가 되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헤리엇의 딜레마를 이해한다. 헤리엇이 벤을 양육함에 있어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너무 쉽게 포기한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벤이 존의 무리를 잘 따른다고(그 아이들 배경을 알면서), 돈까지 줘가며 벤을 그 아이들 손에 맡겨버렸을까? 개인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지지해 줄 수 없는 결정이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떠나면 정상적으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심리학과 교육학 보고서는 넘치고도 남는다.
여성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헤리엇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소설 속 데이비드가 말할 것처럼 우연하게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 그게 엄마의 잘못은 아니며 더욱이 가족의 잘못도 아니다. 엄마가 그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하면 끝까지 책임지는 게 맞다. 희생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 한 결혼 이후의 결과들은 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전혀 담보하지 못한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멈출 수 없게 하는 글의 힘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