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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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도 많지만,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 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라면 어떨까? 전지전능한 신, 실수치 않는 신이 아니라,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실수도 잦은 신이라면? 게다가 노는 것도 좋아하는 신이라면?

 

여기 그런 신이 있다. 한스 라트의 소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에 등장하는 신이 바로 그런 신이다. 신이지만, 인간의 옷을 입고 살아가며, 자신의 힘이 약해짐에 고민하는 신. 죽지 않는 신, 세상을 만든 창조주이면서도 자신이 죽으면 어쩔까 걱정하는 신. 하지만, 여전히 소소한 기적을 만들어 가며, 인간들을 돕는 신. 수많은 일들을 하며 위기의 순간에 놓인 인간들을 돕지만, 도리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신. 도박을 좋아하고, 포도주를 좋아하는 신. 크리스마스에는 빈둥빈둥 뒹굴어야 제 맛이라 생각하는 신. 자신의 고민을 실패한 심리학자에게 상담하기를 원하는 신. 과연 이런 신의 모습, 이런 설정에 어쩌면 반감을 갖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임을 기억하자. 게다가 비록 재미난 설정이며, 일견 발칙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신에 대한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이 담겨 있음을 읽어낸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이 소설 가운데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내용은 신의 힘이 점차 약화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신을 믿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 믿음이 없기에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한 신의 영향력 역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야말로 우리에게 신앙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내 안에 내가 섬기는 신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내 삶을 향한 신의 간섭과 섭리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빈둥거리는 한량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소설 속의 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니 도리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을 돕곤 한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도 우릴 향한 신의 마음이 아닐까? 우린 여전히 신을 하찮게 여기며, 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정신병자 취급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릴 위해 숨겨진 도움과 숨겨진 기적을 행하시는 신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요상한 신 아벨 바우만이 심리상담을 의뢰한 심리치료상담자인 야곱 야코비 박사는 실패한 심리학자이다. 결혼도, 경제활동도, 자신의 상담도, 모두 실패하였고, 가족들의 신뢰마저 잃은 그는 심리학자, 정신상담 치료자답게 대단히 이성적 사람이다. 게다가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정신병자 같은 아벨 바우만과 함께 시간들을 보내며, 신이 진정으로 존재함을 점차 믿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바꾸고자 하는 결단도 하게 된다.

 

대단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발칙할 정도로 유쾌한 설정과 매끄럽고 가벼운 진행이 돋보인다. 작가의 유머가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잔잔한 감동 역시 선사하는 좋은 소설이다.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초월자로서의 신도 귀하고 의미 있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처럼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신의 모습도 귀하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흥겨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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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소녀 우리같이 청소년문고 14
이정옥 지음 / 우리같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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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가위소녀』는 위소에 대한 이야기다. 위소는 가위소녀의 준말이자, 위험한 소녀, 위태로운 소녀의 준말이기도 하다. 이제 중학생인 솔은 초등학교시절부터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곤 해서, 위소라 불린다.

 

솔이 자신의 머리를 마치 남자 아이들처럼, 그리고 아무렇게나 잘라대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먹먹하고 막막하여 견딜 수고 없기 때문이다. 솔의 가정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솔의 막막함을 알 수 있다.

 

솔의 엄마는 자폐를 앓고 있다. 그리고 엄마보다 5살이 많은 외삼촌 역시 자폐를 앓고 있다. 솔이 아빠가 누구인지는 끝내 밝히지 않아 모른다. 아마 여기에도 솔이 가위를 들어야말 견뎌낼 수 있는 아픔, 기막힌 사연이 담겨 있으리라. 자폐를 앓고 있는 엄마를 둔 솔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낼 수밖에 없는, 그렇게 해야만 견뎌낼 수 있는 어린 솔의 삶의 무게가 독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리고 솔의 이런 가위질은 엄마보다 자폐의 정도가 심한 삼촌의 가위질에 영향을 받았다. 삼촌의 자폐 증상 가운데 하나는 가위로 뭔가를 끊임없이 잘라야만 한다. 삼촌보다는 자폐의 증상이 약하지만, 엄마의 증상은 갑자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버리는 것. 이처럼 위소 솔을 가로막은 삶의 견고한 벽이 존재한다. 이런 솔의 막막함을 솔은 이렇게 표현한다.

 

“삼촌이 가위질을 하는 게, 그렇게 해서라도 꽉 막힌 삼촌의 머릿속을 ‘풀어’보려는 것으로 여겼으니까. 엄마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 버리는 게, 그렇게 해서라도 꽉 막힌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것으로 생각되었으니까. 삼촌도 그렇고 엄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먹먹하고 막막해서 견딜 수가 없었을 테니까.”(162쪽)

 

이처럼 막막하여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게를 안고 살아가는 솔이,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을 건너는 동력으로 여러 가지가 등장한다. 먼저, 작은 외할머니인 산할머니가 가장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다. 언제나 더불어 사는 삶,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산할머니를 통해, 솔은 진정한 친구들을 갖게 된다.

 

또 하나의 동력은 증조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아버지)인 꽃할배의 젊음, 치기, 객기 등이 아닐까 싶다. 이제 곧 아흔을 맞게 될 연세임에도 여전히 멋쟁이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청년 꽃할배의 그 젊은 정신 역시, 애늙은이처럼 살아가는 위소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동력이 된다.

 

또 하나는 아무래도 친구들이겠다. 진정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친구들을 통해, 함께 손을 잡고 마치 담쟁이처럼 그네들의 앞을 가로막은 벽을 올라 넘어가는 모습이야말로 이 시가 지향하는 바일 것이다.

 

이 땅의 수많은 ‘위소’들이 그들 앞에 가로막고 있는 벽을 올라 넘어가는 축복이 있길 소망해 본다.

 

작가는 위소, 솔 앞에 놓은 인생의 무게를 벽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벽을 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란 시로 풀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의 출처를 밝히지 않음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다가 작가는 처음에 이 소설의 가제를 <담쟁이>이라 붙였다니, 이 시는 이 작품 가운데 위소인 솔과 그의 친구들이 함께 손을 잡고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결국에는 넘어가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적어도 출처를 밝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세월호’라는 엄청난 사건 이후에 자신의 작품이 다시 고쳐 쓸 수밖에 없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런 과정 가운데 누락된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아쉬움이 남는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역사 가운데 결코 지울 수 없는 엄청난 아픔의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우린 영원히 기억해야 마땅하며, 더 이상 그런 끔찍하고, 말도 안 되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아야 함에 분명하다.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엄청난 사건을 꼭 반영해야만 한다는 작가의 의무감(?)이 왠지 이 소설 속에서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갖게 하고 있다 여겨진다. 물론, 이것을 더 좋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내 개인적 생각은 그렇다. 왠지 뜬금없다는 생각이었으니.

 

아무튼 그럼에도 이 땅의 수많은 ‘위소’들에 대한 돌아봄의 시간을 갖게 한 좋은 작품임에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도 등장하는 시 <담쟁이>란 시를 언급하며 이 땅의 모든 '위소'들이 벽을 넘길 소망하며 서평을 마칠까 한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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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의 분실물센터
브룩 데이비스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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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는 다 죽게 마련이다(이 책에서 밀리를 통해 강조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 역시 포함된다. 하지만, 모든 생명이 죽기 마련이기에 죽음이 가벼운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특히, 누군가의 죽음 뒤에 남겨진 자가 겪어야 할 충격의 시간들, 공허한 시간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그 죽음이 나와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죽음에 대해 때론 다소 유쾌하고, 때론 다소 철딱서니 없으며, 때론 다소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이야기가 있다. 제목도 범상치 않은 『밀리의 분실물 센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명이다. 제일 먼저, 밀리가 주인공이다. 이제 겨우 7살인 꼬마 아가씨 밀리. 그녀에게는 남들과 다른 취미(?)가 있다. 바로 죽음을 수집한다는 것. 자신이 기르던 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죽음, 그리고 거미와 파리의 죽음까지 수집한다. 그리고 이 죽음을 자신만의 노트, 「죽은 것들의 기록장」에 기록한다. 왠지, 덴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을 떠올려보게 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런 밀리의 「죽은 것들의 기록장」 28번째로 기록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아빠.”

 

그렇다. 밀리의 아빠는 어린 밀리를 남겨놓고 죽는다. 그런 밀리에게 아빠의 죽음보다 더 큰 충격의 사건이 다가온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간 백화점. 엄마는 속옷코너에서 기다리라 하고선 사라져 버린다. 밀리는 그곳 백화점에서 떠나지 않는다. 밤엔 몰래 숨어 그 자리를 지킨다. 하루, 이틀,,, 하지만, 엄마는 오지 않는다. 밀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사라져 버린 거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있었으니, 이 눈길은 바로 또 다른 주인공인 80이 넘은 나이의 노인, 칼. 칼 역시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경험하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 여기 있어.’란 말을 거듭하며... 그런 칼을 아들과 며느리는 요양원에 보내버리고, 그곳에서 어느 날 칼은 아내가 살아 있을 당시 일탈을 꿈꾸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바로 문 닫은 백화점에 몰래 남아 밤을 보내는 일탈에 대한 이야기들. 하지만, 칼과 아내는 언제나 상상과 말은 많이 해도 행동으로는 잘 옮기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 그런데, 문득 아내가 살았을 때 했던 그 말을 칼은 떠올리게 되고, 실제 행동으로 옮기려 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밤중에 요양원을 몰래 빠져 나가 문을 닫기 전 백화점 남자 탈의실에 숨어 있다가 아무도 없는 백화점에 남아 있는 모험을 즐기다가 밀리를 보게 된 것. 그리고 칼은 밀리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품는다. 그래서 백화점의 관계자들이 밀리를 위탁시설에 보내려 할 때, 밀리의 탈출을 돕는다. 물론, 후엔 함께 밀리의 엄마 찾아 떠나는 여정에 합세하게 된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역시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루하루를 시간을 죽이며 보내는 할머니 애거서. 그녀의 일상이 참 의미 없다. 그녀의 일상은 그저 의자를 옮겨다니며 앉는 것뿐이다. 믿기지 않는 심정의 의자에 앉는 것으로부터 일상을 시작하여, 맛을 음미하는 의자, 안목을 과시하는 의자, 분노하는 의자, 불평하는 의자, 좌절하는 의자 등에 앉는다. 물론, 하루의 마무리는 또 다시 믿기지 않는 심정의 의자에 앉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렇게 수년을 살아간다.

 

그런 애거서는 ‘안목을 과시하는 의자’에 앉아 창밖을 쳐다보다가 옆집 밀리를 보게 된다. 백화점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온 밀리를 말이다. 처음엔 참견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밀리의 엄마 찾는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경찰서에서 또 다시 도망친 칼이 극적으로 두 사람이 타고 떠나는 버스를 발견하게 되고, 나중에 그 버스에 합류하게 됨으로, 이 셋은 그들만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되고, 이런 가운데 그들만의 방식으로 죽음을 떨쳐버리게 되는데. 과연 밀리는 엄마를 찾을 수 있을까?

 

이처럼 세 명의 주인공은 모두 어느 식으로든 죽음을 애도하는 자들이다. 7살 꼬마 여자아이와 80이 넘은 두 남녀, 이렇게 세 사람은 그들만의 여정을 통해, 또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바는 무엇일까? 먼저, 칼이 아내를 생각하며, 외치던 말, “나 여기 있어.” 그리고 밀리가 엄마를 기다리며, 또한 엄마를 찾아가며, 언제나 적는 말, “엄마, 나 여기 있어요.” 이 말 안에 죽음을 애도하는 작가만의 방식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남겨진 자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어쩌면, ‘거기’가 아닌 ‘여기’ 아닐까? 물론, 죽은 자들은 ‘거기’에 있겠지만, 우린 여전히, ‘여기’에 있으며, ‘여기’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공간이 아닐까? 비록 지금 당장은 슬픔이 있고, 허전함과 공허함에 짓눌려 있다 할지라도.

 

또 하나 작가가 남은 자들에게 바라는 바는 죽은 자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남겨진 자들이 다시 서로 부대끼며, 살아 있음을 느끼며, 생기 넘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죽음에 짓눌려 하루하루 공허하게 살아가던 칼과 애거서가 다시 사랑을 느끼고, 젊은 시절의 만용을 부리기도 하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어쩌면 살아 있음의 기운 아닐까?

 

물론, 소설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말,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간 다 죽음을 맞는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즐거움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을까? 때론 그런 삶이 만용이나 객기처럼 비춰질지라도, 살아 있음을 느끼며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이미 떠난 사람을 애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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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전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김성재 지음, 백대승 그림 / 현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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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토끼전>이지만, 실상 그 온전한 내용을 다 읽어본 적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다. 이번에 현암사에서 출간된 『토끼전』에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작품해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토끼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다. 이 말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그만큼 구전된 전승이 각양각색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판소리계 소설들이 대체로 그러한대, 그 중에서도 <토끼전>이 가장 다양한 이본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명칭 역시, <토끼전>, <별주부전>, <토선생전>, <토생전>, <토처사전>, <토공전>... 등등 수많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고 하니, 그만큼 다양한 전승과 이본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 『토끼전』은 이런 다양한 이본 가운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대본을 거의 그대로 활자화한 완판본 『토별가』를 대본으로 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커다란 줄거리를 그대로 하면서, 판소리가 계속되면서 여러 가지 살이 붙어 있다고 여기면 될 성싶다.

 

토끼전을 읽으며, 무엇보다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점은 당시 판소리를 통해, 응어리를 해소하던 민중들의 마음을 느껴보게 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토끼의 승리가 두드러진다. 토끼는 가장 약한 동물 아닌가! 그런 동물이 용궁 전체를 조롱하듯 골려먹고, 자신의 목숨을 건져낼뿐더러 엄청난 영웅담을 만들어감이야말로 민중들이 열광할 소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용왕이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는데, 그 이유 역시 참 풍자적이다. 용왕이 병에 걸린 이유는 너무 놀아서다. 민중의 삶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과로하여 병에 걸린 것이 아니다. 민중의 삶이야 어떻던 상관치 않고 자신들만의 향락에 젖어, 그 쉼과 놂이 지나쳐 병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는 지도자. 『토끼전』은 시작부터 통쾌하다.

 

마지막은 또 어떠한가. 용왕이 어떻게 병에서 낫게 되느냐하면, 다름 아닌 지혜로운 모습으로 육지로 돌아간 토끼가 마치 바다 세상 전부를 조롱하듯 싸놓은 토끼 똥을 먹고 낫게 된다. 민중의 똥을 드시고 힘을 얻게 된 나랏님! 게다가 토끼 똥이야말로 얼마나 그럴듯한 모양인가. 환약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양새야말로 해학의 극치가 아닐까?

 

토끼의 간을 필요로 하는 설정은 또 어떤가? 어째서 권력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민중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간을 구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진행시켜나가는 걸까? 그 발상이야말로 권력의 무서움을 보여준다.

 

또한 용궁의 내각 신료들의 모습은 또 어떤가? 너도나도 입만 살아 있는 신하들, 말로만 충신이고, 자신들은 수많은 권리를 누리면서도 책임은 떠넘기기에 바쁜 모습, 서로 편을 나눠(문과 무) 헐뜯고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과연 설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이야말로 판소리소설이 보여주는 풍자와 해학이 아닐까?

 

물론, 이런 풍자의 극치는 토끼의 혓바닥에 놀아나는 용왕과 신하들의 모습이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논리임에도 용왕과 신하들은 혹해서 오히려 충신인 주부 자라를 압박하지 않나? 어쩌면, 충성을 다했음에도 용왕과 신하들의 타박을 들어야만 했던 주부 자라가 토끼의 똥을 고이 간직하여 용왕에게 가져감이야말로, 자라 역시 소심한 복수를 하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쩌면 자라는 토끼 똥이란 말을 하지 않고 용왕에게 진상했을 것이다. 비록 토끼의 간은 놓쳤지만, 결코 구할 수 없는 영약을 구했노라며...

 

『토끼전』, 어쩌면 여전히 풍자와 해학에 갈증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청량한 영약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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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의 묘
전민식 지음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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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식 작가의 신작 『9일의 묘』는 풍수로 먹고 사는 지관들과 이와 맞물린 군인들의 권력을 향한 욕망을 그려내고 있는 소설이다.

 

때는 1979년 10월 26일을 앞둔 시점이다. 최고의 지관, 아니 전설적 지관인 황창오에게 전수받은 실력을 가진 지관임에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기 위해 도굴을 감행하는 중범과 도학, 그리고 해명은 그만 현장에서 발각되고 만다. 중범과 해명은 무사히 도망치게 되었지만, 도학은 붙잡혀, 광에 갇히고, 도학을 붙잡은 자들인 김선각 중령, 김중각 소령 형제는 권력을 도모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묏자리를 잘 씀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에 서길 원하는 자들이다. 마침 10 ․ 26사태가 일어난 혼란의 시기에 선각, 중각 형제가 줄 댄 사령관이 권력을 잡게 된다. 그리고 이 일에 도학이 지관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한편, 도망쳤던 중범과 해명은 또 다른 권력을 쫓는 장대승 참모총장 라인의 호출에 의해 왕을 내는 명당자리에 암장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곳에 도학을 대동한 김선각 중령이 군사들을 이끌고 오는데. 과연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이며, 전설적인 지관인 황창오의 친아들 중범과 양아들 도학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누구나 명당에 대한 관심이 있을 것이다. 물론, 많은 이들이 풍수지리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 무시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명당에 무관심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소설은 과연 동기감응이 진짜 효력이 있을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동기감응론이란 같은 유전자에서는 같은 에너지 파장이 발출되기에 기(氣)가 같은 동종의 기(氣)끼리는 서로 감응을 일으킨다는 이론이다. 이런 논리로 부모 자식 간에는 유전자가 같아 그 에너지 파장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기에 죽은 시신이 어떤 장소에 어떤 모습으로 묻히느냐에 따라 후손에게 그 기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론이다.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공명’과 유사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소설의 관심은 이런 동기감응을 통한 발복(發福)이 실재 존재하느냐 않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 발복(發福)을 쫓으며, 이것을 통해 권력을 붙잡으려는 자들의 더러운 욕망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관들도 믿지 않는 혈에 목숨을 걸며, 사람을 죽여 가며 그 혈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더러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건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믿어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과 다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과 부조리와 삶의 아이러니를 외면하려는 얄팍한 욕망에 지나지 않았다. 가지지 못한 걸 가지려는 욕심으로 사람들은 혈을 찾는다고 믿었다.”(54쪽)

 

 

아울러서 이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붙잡기 위해 애먼 사람들을 빨갱이로 둔갑시키고, 방해되는 자들은 아무렇지 않게 제거하는 몰 인간성에 작가는 관심을 기울이고 고발한다.

 

“그들은 진실을 들을 준비보다 진실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 광에서는 진실 같은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광 속엔 주거만 존재할 뿐인데 그 존재가 살아날 수도 있다고 말하라고 한다.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버리는 곳이다.”(123쪽)

“중범이 빨갱이라면 세상엔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을 터였다. 군인과 빨갱이.”(155쪽)

 

소설은 9일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사건답게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아울러 우리의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건드리며, 권력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뿐 아니라 이런 모든 일들이 벌어진 후에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맞으며, 도학의 부끄러워함을 통해,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겪어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 침묵의 당사자들을 향한 에두른 질책도 잊지 않는다.

 

“도학은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은 게, 아무렇지도 않게 눈뜨고 아침을 맞이한 일이 부끄러웠다.”(217쪽)

 

하지만, 어찌 아무렇지도 않게 새날이 밝았으랴. 새날을 기다리며 흘렸을 그 통곡의 세월, 눈물이 왜 없었겠나. 외치고 싶어도 커다란 격류 앞에 무능함만을 드러내며 움츠러들었을 부끄러움과 그 이면의 아픔은 왜 없겠나. 도학 역시 그랬지 않았나. 모두 역사의 희생자들 아니었을까? 단지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이런 아픈 역사, 부끄러운 우리의 모습을 잊지 말자.

 

아무튼 이 소설은 최고의 명당, 혈을 찾아 숨 가쁘게 펼쳐지는 전개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마지막 오봉쟁주의 실체는 왠지 온전한 조화와 안녕을 누리는 명당의 모습을 보여줌으로 그 동안의 아픔과 눈물, 충격을 어느 정도는 상쇄해 주는 느낌이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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