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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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 그의 첫 번째 서스펜스 도전 소설이라는 『나오미와 가나코』를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역시 오쿠다 히데오구나.’라는 생각. 물론, 서스펜스로서 구성이 탄탄하다거나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이 없진 않다. 하지만,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임에도 지루함 없이 언제 읽었는지 모를 만큼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후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제목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두 여인이다. 대학동창인 나오미와 가나코가 그들이다. 나오미는 백화점의 외판부 직원으로 언제나 백화점 vip 고객들만을 상대하는 올드미스이며, 언제나 당차게 살아가는 여인이다. 반면, 가나코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은행원과 결혼하여 가사에만 전념하는 순종적 여인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정기적인 만남을 갖던 두 동창. 어느 날 나오미는 가나코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가나코를 남편의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가나코의 남편 ‘제거’를 계획한다.

 

이 소설, 『나오미와 가나코』는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전반부인 <나오미 이야기>는 나오미가 가나코와 함께 가나코의 남편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가나코 이야기>는 남편 제거 후, 둘의 범행이 드러나게 되는 과정과 이를 피해 도주하게 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과연 나오미와 가나코는 무사히(?) 수사기관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까?

 

이 책은 무엇보다 가정폭력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가나코의 남편은 평범한 은행원이자 성실한 회사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뒤에는 아내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며, 아내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추악함이 감춰져 있다. 이런 추악함을 대하며 연약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점차 나아지겠지 하는 거짓 희망을 품고 참아내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의 마수에서 도망치는 것인가? 두 여인이 선택한 것은 둘 다 아니다. 남편의 ‘제거’를 선택한다. 그것도 완전범죄를. 물론, 이것은 끔찍한 범죄이지만, 그럼에도 그 선택은 가나코를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젯밤 가나코에게 들은 남편의 폭력 이야기에 나오미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봉인됐던 기억의 상자가 열려 이중의 타격을 받았다. 기억에서 생생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 맞던 폭력의 광경. 가정 폭력은 주변 사람들마저 지옥에 빠뜨린다.”(28쪽)

 

그렇다. 나오미가 가나코를 위해 가나코 남편의 ‘제거’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이유는 자신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지옥을 맛봤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지옥을 만들어내는 범죄다. 이러한 범죄 앞에 ‘제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나가는 모습은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넘어 당연시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여인의 복수극이 성공하길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이처럼 독자들을 나오미와 가나코의 살인의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질문한다. 아무리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할지라도 과연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후반부 <가나코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쩌면 이런 질문 때문에 평소 오쿠타 히데오의 작품처럼 통쾌함에서 그치지 않고, 뭔가 찜찜함이 후반부에는 가득한 것이 아닐까? 통쾌한 복수극, ‘제거’의 성공 뒤에 독자들이 갖게 되는 찜찜함이야말로 독자를 향한 작가의 무언의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가나코의 불안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밤 11시가 되어서도 전화는 없었다. 오늘 중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 마치 언제 집행될까 두려워하는 사형수의 심정이었다. 밤이 새고 다시 요코의 전화 앞에서 떠는 하루가 시작됐다.” (424쪽)

 

범행 성공 후에도 여전히 가나코는 불안함에 떤다. 이러한 불안함이야말로 그들의 제거작전은 윤리적인 부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두 여인은 완전범죄로 여겨졌던 자신들의 제거작전 안에서 드러나는 허술함 때문에 불안함에 떨게 된다.

 

이러한 불안함을 통해, 작가는 거듭 질문한다. 과연 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작가는 말한다. 두 여인이 벌인 ‘제거’작전은 어쩔 수 없는 범죄라고, 이런 행동은 동물적인 행위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살인, 제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두 주인공의 고백이자 작가의 결론이다.

 

“사람 하나를 죽였다는 의식은 본인 스스로도 놀랄만큼 희박했다. 어쩌면 그날 밤의 광경이 되살아나 괴로워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지만, 이젠 생각나지도 않았다. 기억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인간은 의외로 동물적인지 모른다.” (330쪽)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건가. 아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423쪽)

 

분명, 두 여인의 제거작전은 찜찜함을 낳는다. 불안함을 동반하는 죄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거사는 두 여인에게는 해방의 출구였음을 작가는 말한다. 결국, 작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다는 결말을 우리에게 전한다. 두 여인은 세상의 심판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여인의 체포로부터의 탈출을 독자들은 끝내 응원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는 독자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공범이 되며, 책장을 덮게 된다. 올 여름 더위를 식혀줄 재미난 소설임에 분명하다.

 

참,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이라면 이 소설로 인해 평생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내 아내가 날 제거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회개하라! 그렇다고, 이 소설을 여성들이 열광하는 소설이라 말하는 것 역시, 조금 저어된다. 남성인 나에게도 신나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오쿠다 히데오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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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려줘 미래인 청소년 걸작선 42
A. S. 킹 지음, 박찬석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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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 프로그램 가운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이 있다. 사실 이 아이들은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런 tv 프로그램에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 있는 모습이 방영되어지고, 그 문제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깊게 각인되어져서, 두고두고 그 아이가 문제 있는 아이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진다면 어떨까?

 

『나를 돌려줘』란 이 청소년소설은 바로 이런 질문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주인공 제럴드는 어린 시절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하여 일약 스타가 된다. 제럴드는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장소에 똥을 쌌기 때문이다. 식탁 위에 올라가 그곳에 똥을 싸기도 했고, 엄마가 아끼는 신발 안에 똥을 싸기도 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장소에 다양한 모습으로 똥을 싼다. 이런 이 일로 인해 그는 일약 똥싸개가 된다. 문제는 한 번 똥싸개는 영원한 똥싸개라는 점. 다섯 살 어린 나이에 벌인 일로 인해, 그는 열일곱살이 된 지금도 똥싸개로 손가락질 받는다.

 

이를 통해, 소설은 먼저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의 부작용에 대해 고발한다. 한 아이의 인생과 그 가정의 문제에 진정성 있게 접근하기보다는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위해 보다 더 자극적인 내용을 원했던 그들에게 똥을 싸는 퍼포먼스야말로 대박 사건 아니었겠나? 이러한 방송 매체의 일그러진 초상을 작가는 고발한다. 그리고 실제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의 인생이 진짜 달라졌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붙은 똥싸개라는 꼬리표는 끝까지 제럴드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그런데, 진짜 제럴드를 괴롭히는 것은 따로 있다. 사실, 제럴드가 똥을 싼 이유는 사실 똥을 싸는 것만이 어린 제럴드에게는 유일한 항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물건에 똥을 싸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아직 살아있고, 아직 화가 나 있다는 걸 그들에게 일깨워주는 유일한 소통 방법이었기 때문이다.”(100쪽)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제럴드로 하여금 똥을 싸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토록 제럴드를 화나게 하는 걸까? 그건 바로 큰 누나 타샤라는 존재다. 소설에 등장하는 타샤는 싸이코패스다. 동생들을 괴롭히는데, 단순히 부모의 사랑을 빼앗겼다는 생각에서 괴롭히는 게 아닌, 동생들을 악의적으로 괴롭히며 그 안에서 쾌감을 느끼는 아주 악한 모습이다. 심지어 엄마를 정기적으로 구타하기도 하는 그런 악의 화신이자 인간말종 같은 모습이다.

 

이런 싸이코패스 성향의 타샤로 인해 제럴드는 세상을 향해 똥을 쌀 수밖에 없다. 누나는 마치 자신을 죽일 것처럼 괴롭히는데, 눈을 감고 타샤 편만 들어주는 엄마의 편애와 바쁘다는 핑계로 무관심한 아빠의 모습이 더욱 타샤의 엇나감을 부추긴다. 편애와 무관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지, 편애와 무관심은 죄악임을 이 소설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상황 가운데 제럴드는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된다. 그 안의 응어리가 시시때때로 분노로 표출되는 것. 왜 그렇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에야 그러한 응어리가 똥을 싸는 행위로 분출되었다면, 커서도 같은 퍼포먼스를 행할 수도 없지 않나. 그렇기에 제럴드는 분노 조절 장애로 힘겨워한다. 그런 제럴드가 분노 조절 장애를 이겨낼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제럴드는 자신만의 세상을 만든다. 바로 ‘제럴드데이’라는 가상공간인데, 제럴드는 시시때때로 자신만의 세상으로 도피한다. 그곳은 마치 꿈꾸는 공간으로 제럴드의 꿈과 바람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행복의 눈물, 아이스크림, 거기서는 타샤 누나 때문에 안달복달하느라 바빠서 엄마가 리지 누나랑 나한테 무신경하지 않았다. 제럴드데이에는 타샤 누나가 없었다. 타샤 누나가 리지 누나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우지도 않고 나더러 ‘저능아 게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타샤 누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38쪽)

 

‘제럴드데이’가 제럴드에게 도피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엔 타샤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함만으로도 누군가를 힘겨워하고, 그의 부재가 누군가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존재라면 이 얼마나 무가치한 삶이며, 불행한 삶인가. 아무튼 제럴드에게 누나 타샤는 그런 존재다.

 

제럴드는 ‘제럴드데이’가 있기에 분노를 억누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은 진짜가 아니다. 이곳은 상상 속의 공간이다. 이곳에 자주 드나들수록 도리어 제럴드의 삶은 정상적일 수 없다. 다른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둘째, 제럴드에게 찾아온 사랑이다. 제럴드는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자신을 똥싸개가 아닌 제럴드로 관심을 가져주는 한나를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나는 제럴드로 하여금 ‘제럴드데이’로의 도피 없이 일상적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여기에 조라는 친구의 만남, 그리고 몇몇 사람들의 진정 어린 관심이 제럴드를 ‘제럴드데이’에서 벗어나 일상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다.

 

결국엔 사랑이 제럴드를 돌려준다. 사랑이 제럴드에게는 구원이다. 분노조절장애를 떨쳐내고 자신을 돌려받게 된 제럴드에게 응원을 보내며, 제럴드와 같은 아픔, 슬픔, 분노를 삼켜야만 하는 이 땅의 수많은 청소년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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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2
박건웅 지음, 최용탁 원작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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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책이 나왔다. 최용탁 원작의 동명제목의 소설인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그래픽노블로 새롭게 출간한 이 책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북멘토 출판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북멘토 그래픽 노블> 시리즈 두 번째 책이다.

 

먼저,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살펴보자.

 

보도연맹 학살사건(保導聯盟虐殺事件)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국군·헌병·반공 극우단체 등이 국민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 등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4934명과, 10만 명에서 최대 120만 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추정되는 대학살 사건이다.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이 사건에는 미군도 민간인 집단 학살 현장에 개입했다.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철저히 은폐했고 금기시해 보도연맹이라는 존재가 잊혀져 왔지만, 1990년대 말에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 피해자들의 시체가 발굴되면서 보도연맹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임이 확인됐다. 2009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통해 정부는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현재에도 사건 진상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됐던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됐다. 일제 강점기때 친일 전향 단체였던 대화숙을 본떠서 만든 조직체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분쇄‘, ‘남로당,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주요 강령 내용 등을 내세워 철저히 반공주의 강령으로 삼았었다. 국민보도연맹 외견상 민간단체 성격을 띠었으나, 조직체제를 보면 총재직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효석이 맡았고, 고문으로는 신성모국방장관, 지도위원장에는 이태희 서울지검장등이 맡았다. 각종 장관들이 국민보도연맹 요직을 맡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민간단체라기보다는 관제 단체에 가까웠다.

- 출처 : 위키백과사전

 

위의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국민보도연맹은 국가가 주도하여 좌익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우익으로 계도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다. 그 수장을 내무부 장관이 맡을 만큼 국가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국가가 조직하고 관리하는 단체였던 거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 좌익성향을 가진 자들이 적에게 동조하여 반정부활동을 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였던 거다. 그래서 사전에 그런 불안요소를 제거하려 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망상은 그저 망상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현실에서 실현된다. 수많은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도 말하였듯이 마치 구제역이 돌자 멀쩡한 가축들을 생매장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린 구제역이 발발하여 마치 큰 일이 날 것처럼 수많은 가축들을 도축하였지만, 정작 구제역에 의해 죽은 가축은 없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한 우리는 사랑니가 나면 사랑니를 뽑아버리곤 한다. 왜냐하면, 사랑니는 너무 안쪽에서 나기에 분명 썩어 장차 더 많은 고통을 주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멀쩡하게 썩지 않고, 도리어 안쪽에서 이빨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랑니 역시 적지 않다. 그럼에도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으니 뽑아버려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생각에서 머물지 않고 뽑아버리는 행동을 우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뭐, 사랑니는 그저 하나의 이빨에 불과할 뿐이고, 구제역이란 괴물로 인해 도축된 가축들은 그저 가축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같은 논리로 인해 이 땅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생명은 사랑니나 가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 과연 잠재적 위험요소일지 모른다는 추정만으로 그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당시의 정권과 그 안에 기생하던 권력자들의 죄악이 무엇으로 씻길 수 있을까?

 

게다가 이 일을 일선에서 행한 자들은 대한민국 군인, 헌병, 경찰이었다. 이들이 누구인가?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자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도리어 자신들의 존재목적을 상실하고, 도리어 자국의 국민들을 학살하였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고, 수많은 유가족들이 있음에도 그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입을 벌리는 순간 그들은 빨갱이가 되어 자손대대로 대한민국 땅에서 살아가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이 이들의 가슴에 다시 한 번 치유키 어려운 상처를 준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씻기 어려운 상처 치유를 위해 노무현 정권은 국가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이 일을 행한 주체세력들은 이 일에 대해 사과하였나? 아니, 그 일에 대한 반성이나마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승만의 유가족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하다. 또한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음의 웅덩이로 몰아넣도록 명령을 하였던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 일에 충실히 임무(?)를 완수한 자들은 과연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만행을 반성하기나 할까?

 

당시 산청, 함양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저지른 서른이 채 안 된 국군지휘자는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그저 위에서 시켜서 한 것일 뿐이고, 지금도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애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그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보도연맹사건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그 엄청난 일을 벌인 당사자들과 그 후손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라는 것은 꿈에 불과한 것일까?

 

작가는 말한다. “거대한 힘을 가진 국가폭력에 우리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억하는 것”이라고. “오직 기억하는 것이 망각의 시대 뒤로 숨은 추악한 진실을 끌어내고 학살자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바로 그 유일한 무기, 정의의 심판을 위해 어느 물푸레나무는 기억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 역시 이 끔찍한 일을 기억하려 한다. 너무 끔찍하고 너무나도 슬픈 일이기에 기억에서 지우고 싶지만 말이다.

 

바로 그 끔찍한 기억, 그 통곡의 기억들을 작가는 이 책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에서 흑백 판화 그림들을 통해, 우리에게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 기억에 접속하는 것이 사실 힘겨운 시간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한 동안 그 아픔, 그 통곡, 그 슬픔에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된다. 하지만, 진정한 이 땅의 화해, 이 땅의 치유를 위해, 우린 여전히 슬픔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고, 그 기억에 접속해야만 한다. 힘겹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어느 물푸레나무가 전하는 그 기억에 접속할 수 있길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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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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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드리면 폭발하는 오베가 왔다.”

“30초마다 웃음이 터지는 시한폭탄 같은 소설”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장편소설 『오베라는 남자』에 대한 출판사의 선전용 문구다.

 

이 문구가 맘에 들지 않는다. 먼저, 오베는 건드리면 폭발하는 그런 ‘건달(드리면 려드는 사람)’과 같은 성격인 것은 맞다. 주인공 오베에 대해 조금은 과장된 감이 없진 않지만, 잘 설명해주고 있는 문구다. 하지만, 두 번째 문구는 맞지 않다. 이 책은 30초마다 웃음을 터트리는 소설은 결코 아니다. 물론, 소설은 재미있고 유쾌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재미는 웃음만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런 선전 문구가 책의 내용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고 있지 않나 여겨진다. 이 책은 결코 그렇게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오베라는 이 남자는 59세의 할배(요즘으로 본다면 청년이지만)이지만 여전히 혈기왕성하고,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사내다. 자동차란 오직 사브(오베에게는 국산차)만이 진리라 여기는 사내인 오베,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할 단어는 아마도 ‘원칙’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원칙’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다. 오베가 정의하는 ‘원칙’은 이렇다. 사내는 결코 남을 일러바치지 않는다. 비록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 할지라도(실제 오베는 이런 원칙으로 인해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또 이런 ‘원칙’도 있다. 거스름돈을 잘못 남겨준 빵집에는 영원히 가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찍히면 재미없겠다. 또한 오베가 목숨을 걸고 지키는 원칙이 있다. 오베네 마을의 거주자 구역에서는 차량 운행이 금지되어 있다. 오베는 이 원칙을 끝내 지키려 한다. 자신이 강도의 칼에 찔려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구급차가 거주자 구역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여긴다.

 

오베의 이런 ‘원칙’을 고수하는 정신은 자연스레 ‘깐깐함’으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오베는 깐깐한 할배다. 오베는 앞뒤 꽉 막혀 있어 결코 융통성이 없는 깐깐한 할배다. 하지만, 오베의 이런 ‘깐깐함’이 전혀 밉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다. 도리어 이런 ‘깐깐함’이 귀엽게 느껴지며, 소설을 읽어가는 가운데, 오베의 이런 ‘깐깐함’을 오히려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베의 ‘원칙’, ‘깐깐함’, 그 이면에는 뜨거운 ‘정(情)’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시작될 무렵의 오베는 6개월 전 아내를 잃고 자살을 결심한다. 물론, 작가의 표현처럼 오베는 삶을 포기하고 죽는 종류의 남자는 아니다. 단지 사랑하는 아내 소냐 없이 인생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를 모를 뿐. 그래서 다양한 방법의 자살을 시도한다. 목매달기, 자동차 배기가스 흡입, 기차선로 뛰어들기, 약물복용, 권총 자살에 이르기까지. 물론, 오베가 아내의 죽음 이후 처음부터 자살을 결심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살은 오베의 ‘원칙’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갑자기 자살하여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회사에 피해를 준다고 여겼기 때문. 그러한 피해는 주지 않는다는 것이 오베의 ‘원칙’이다. 하지만, 오베는 컴퓨터를 모르는 구세대여서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한다. 이제 오베는 ‘원칙’을 어기지 않으며 자살하여 아내 곁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양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자살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처음 목을 매었을 때는 끈이 끊어졌다. 기차에 뛰어들려던 계획은 도리어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며 영웅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는 이웃들의 방해로 인해서다. 특히,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얼간이 가정 때문이다. 깐깐한 오베의 눈에 전혀 들지 않는 얼간이 같은 멀대 남편과 셋째를 임신한 이란 여성 아내, 그리고 마치 트롤처럼 느껴지는 두 딸 아이들. 이들은 언제나 오베를 귀찮게만 하는 이웃이다. 하지만, 오베는 점차 그 얼간이 같은 가정에 의해 마음이 열리게 된다. 뿐 아니라, 뚱보 젊은이, 호모 젊은이, 갈 곳 없는 길고양이 등을 통해, 오베의 얼어붙은 마음은 녹아내리고, 결국 정이 넘치는 깐깐하지만 귀여운 할배가 되어, ‘원칙’을 고수하기 위한 정의의 투사로 변신하고 만다.

 

이 소설은 깐깐한 할배가 변하는 모습을 재미있게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오베의 ‘원칙’과 대조하여 또 다른 원칙을 고수하는 자들을 고발하고 있다. 그건 바로 관료주의 행정체제다. 세계최고 수준의 사회복지국가인 스웨덴.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부작용들이 있음을 작가는 고발한다. 각 개인의 소망과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원칙만을 고집하는 행정체계에 대한 고발. 이는 오베의 꽉 막힌 성격, 원칙만을 고집하는 고리타분함과 오버랩 되면서도 결코 같지 않다. 같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두 경우의 ‘원칙’은 대조된다. 그 차이는 바로 ‘정(情)’이다. 깐깐한 할배 오베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향한 ‘정’이 숨겨져 있다. 오베는 단지 겉으로는 한없이 투털거리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정’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하얀 셔츠로 상징되는 관료주의에는 이것이 없다. 오직 원칙만을 고집하는 깐깐함이 있을 뿐. 그들에게는 개인의 사정, 개인의 소망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그저 서류와 상황에 따른 ‘원칙’만이 존재할 뿐. 게다가 그러한 원칙을 빙자한 부정(不正)이 감춰져 있을 뿐이다.

 

이처럼 프레드릭 배크만은 『오베라는 남자』를 통해, 관료들의 꽉 막힌 행정을 고발하고 있다.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술에 취한 버스기사로 인해 사고가 나고 아내가 장애인이 되었을 때, 오베의 상황에 대한 묘사다.

 

“결국 그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스페인 정부에 편지를 썼다. 스웨덴 당국에도 썼다. 경찰에도. 법원에도. 하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아무도 신경 안 썼다. 그들은 법전이나 다른 권위를 참조하여 대답했다. 변명했다. .... 하지만 어디에서나 이내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엄격하고 독선적인 얼굴로 그를 막아 세웠다. 그들과는 싸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국가의 편에 서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국가여서였다. 마지막 민원은 거부당했다. 싸움은 끝났다. 하얀 셔츠를 입은 남자들이 그러기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오베는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279쪽)

 

개인의 아픔, 개인의 바람, 개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원칙’은 세상을 삭막하게 만들지만, 오베와 같이 정을 동반한 깐깐함과 원칙고수는 귀여움을 선사한다.

 

또한 생을 포기하고 죽으려 하던 오베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고 공급한 건 다름 아닌 오베가 귀찮아하던 ‘이웃’이었다. ‘이웃’은 오베에게는 귀찮은 방해자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점차, 오베는 그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묘한 매력에 빠져든다. 마음대로 자살조차 하지 못하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이웃, 그들의 막무가내 개입은 도리어 깐깐한 할배 오베를 정이 가득한 ‘이웃’으로 만들게 된다. 이것 역시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철저한 개인주의로 빠져드는 현실 속에서 이웃의 문제들로 인해 기꺼이 내 삶을 방해받을 수 있는 모습,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하게 된다는.

 

아무튼 『오베라는 남자』를 통해, 깐깐한 할배, 원칙주의자가 전해주는 묘한 매력에 빠져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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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증언
오정은 지음 / 디아망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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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은 『경계의 증언』을 읽으며 역시 작가의 상상력은 참 기발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 『경계의 증언』의 장르는 뭘까? 시대극이며, 판타지, 추리소설이기도 하며, 또한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는 로맨스 소설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이 시대에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소설에서는 이를 ‘이능’이라 말한다)을 가진 이들이 있다.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능자들이 모여 특별한 수사팀을 이루고 있다. 오직 형조의 수장과 임금만 그 실체를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조직. 이능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통해, 살인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곤 한다.

 

이들의 능력은 대략 이렇다. 어떤 이는 투시하는 능력이 있다. 그렇기에 시신을 부검하지 않고도 부검한 것 이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또 어떤 이는 축지법을 행하기에 정보력에 있어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능자는 모든 사물 이면의 것을 그릴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이면에 감춰진 욕망을 그릴 수 있고, 시신의 뼈를 보면 시신의 살아생전의 얼굴을 그대로 그릴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죽음의 영역을 다녀올 수 있다. 그런 능력을 가진 이가 바로 주인공인 은우다. 은우는 망자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 마지막 머무르는 공간인 ‘경계’로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경계’는 구천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곳은 망자의 살아생전 가장 살고 싶어 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경계’는 망자의 파라다이스인 셈. 은우는 바로 이러한 ‘경계’로의 여행을 통해, 망자의 생전 이상향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이것이 수사에 도움을 준다.

 

이처럼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이능자들, 그들 앞에 특별한 사건이 주어진다. 연달아 대단한 배경을 가진 집안들의 여식들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 그것도 아주 특별하고 끔찍한 모습으로 말이다. 이 사건을 쫓아가는 가운데, 이능자들은 임금의 이복형인 하월군과 얽히게 되고, 더 깊이 조사하는 가운데, 몇 년 전의 반란사건과 마주서게 된다. 이능자들은 조사를 거듭하면서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는데,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일까?

 

이 소설을 통해 오정은 작가의 책을 두 번째로 만났다(오정은 작가의 소설은 이 책까지 현재 3권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고 재미나다. 이것이 내가 만난 오정은 작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오정은 작가의 『미시시피 카페』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손을 뗄 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 소설을 재미나게 쓸 수 있는 이능을 가진 작가다.

 

재미나기에 그만큼 술술 읽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담지하고 있는 메시지는 참 정치가 무엇인지를 전해주고 있다.

 

“조선은 어느 한 가문의 나라가 아닙니다. 조선은 ... 처음부터 조선은 백성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을 백성에게 돌려 줄 왕을 만들어야지요. 그것이 이 늙은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소이다.”(378족)

 

“이 나라의 정치는 처음부터 잘못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같이 잘 사는 조선을 만드는데, 어찌 세력이 나뉘고 붕당이 나뉜답니까. 그것부터 뿌리 뽑아야 합니다.”(379쪽)

 

그리고 소설 속의 사건들 배후에 존재하는 사상은 평등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사상.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공평한 분배가 돌아가야 한다는 묵자의 주장이 소설 근저에 깔려 있다. 아울러 그러한 이상을 향해, 비록 작은 힘이라 할지라도 모여들 때,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작가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메마른 땅이라도 불을 피우는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마을이 됩니다.”(390쪽)

 

어쩌면,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경계’가 그 사람의 이상향과 연결되는 것도 이러한 꿈을 향한 우리의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바람직한 이상적 세상을 향해 연대하는 자들과 대조하여 권력자들을 등장시킨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내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위해 진실마저 감추고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킬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 뿐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 욕정을 풀기 위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들을 벌인다. 오직 자신들의 욕정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노리갯감으로 대하는 권력의 끔찍한 모습을 작가는 보여준다. 비록 그들은 겉으로는 고상한 척 포장해도, 작가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시를 읊는 짐승들”에 불과하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역사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대다수 권력자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이 소설은 무엇보다 권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면서도, 또한 무엇보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의 『환다지, 조선을 꿈꾸게 한 일곱 권의 책』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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