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멍에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3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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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회에서 쌓아온 자신의 경력과 지위, 생활 기반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훌훌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그전의 나의 삶과 전혀 관계없는 그런 모습이라면, 뿐 더러 세상적 잣대로 인정받지 못할 그런 모습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뿐 아니라, 어떤 외부적인 압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런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자기 내부의 갈등과 확신으로 인해,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들을 자발적으로 털어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홍상화 작가의 소설 『사람의 멍에』는 바로 그런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 속 화자인 ‘나’ 대식은 어느 날 말도 안 되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의 오랜 친구인 승혁이 미국에서 쌓아온 모든 생활 기반을 버리고 한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다. 승혁은 외국인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건축설계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설계사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으며, 미모의 아내, 그리고 사랑스러운 딸, 이처럼 부족한 것 없는 삶을 살아가는 친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입국했다는 거다. 심지어 오랜 세월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살아가던 사랑하는 아내마저 버리고 말이다. 행복한 가정마저 버리고 승혁은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

 

놀랍게도 입국한 승혁은 바닷가에서 막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뿐 아니라, 그 지역의 건달과 헤게모니 싸움까지 해가며 말이다. 이런 놀라운 모습을 보게 된 ‘나’는 더욱 의아해 하며, 승혁의 아내인 석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기도 하고, 석영의 고민 상담을 자처하기도 한다. 사실 대식의 마음속에는 석영이란 여인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무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과연, 승혁과 석영,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나’ 대식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이 소설 속에서 작가는 “사람의 멍에”를 과감히 끊어버리고 자유로운 삶을 찾는 중년의 남성, 그리고 “사람의 멍에”를 멍에가 아닌 안정적 삶,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이라는 자위하며 살아가는 중년의 남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엉뚱한 결정을 하였던 승혁, 그에게 있어서, 안정적인 삶, 성공한 삶, 행복한 가정, 이 모든 것이 도리어 ‘멍에’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고, 지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아가며, ‘영감’이라 불리고, 에이즈에 걸린 시골 작부의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살아간다. 물론, 여기에 더하여 승혁에게는 홀로 열정을 쏟으며 매달리는 꿈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국보 1호인 숭례문을 완벽한 건축물, 역사에 빛날 완벽한 건축물로 재창조하려는 꿈이 있다. 그래서 이 작업을 홀로 한다.

 

그러니, 승혁에게는 자신의 열정과 꿈을 좇는 삶이 아닌,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삶 속의 모든 여건들을 “사람의 멍에”라 여기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가정이라 할지라도. 아울러, 이러한 멍에에 매여 살아가며 세상적인 성공을 좇아 살아가던 삶은 마치 사육되는 돼지와 같은 삶이었다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꿈을 향해, 모든 멍에를 깨뜨릴 수 있는 그 열정과 무모하리만한 용기가 멋스럽다. 게다가 자유로운 사랑을 지나 절대적 사랑, 완전한 사랑을 표상하기 위해 에이즈에 걸린 시골 작부를 등장시키는 모습 역시 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감이 없지 않다. 에이즈마저 겁내지 않고, 천대받는 인생을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 그 모습이 어쩌면 “사람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사랑만이 순수한 사랑일까? 게다가 이 시골 작부와의 사랑 역시 또 하나의 멍에로 승혁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멍에를 벗기 위해 선택한 삶에서, 여전히 또 하나의 멍에를 매는 모습이 아닌가. 어쩌면 작가는 결국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사람의 멍에”를 온전히 벗기엔 불가능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승혁의 삶에 대조되는 인생이 바로 ‘나’ 대식이다. 대식은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 여긴다. 오히려 더욱 자유롭게 아부하고, 자유롭게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만들어가며, 자신의 성공적인 삶을 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삶 역시 어쩌면, “사람의 멍에”를 벗어버리는 모습이라 볼 수도 있다. 세상의 어떤 비판과 손가락질도 상관치 않겠다는 자유함(!), 이것 역시 바람직하진 않다 할지라도 “사람의 멍에”를 벗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으리라. 결코 권장하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 대식 역시 여전히 “사람의 멍에”에 매여 있다. 그건 그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여인, 그리고 남 몰래 키워온 사랑의 대상 석영과 여행을 결정하면서도 여전히 현실에서의 삶에 발목을 잡히는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을 굳이 “사람의 멍에”로만 해석할 필요도 없다 여겨진다. 어차피 우리네 삶이란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 본능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사는 것만이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날 힘겹게 하는 의무, 날 얽어매는 삶의 자리들, 이것들이 삶의 ‘멍에’가 아닌, 어쩌면 삶의 ‘축복’일 수도 있다. 특히, 가족이란 그렇지 않은가. 물론, 가족을 생각할 때, 내 맘대로 살 수 없다. 내 맘대로 결정할 수 없고, 내 맘대로 행동할 수 없다. 그러니, 어쩌면 ‘멍에’라 여길 법하다. 하지만, 그런 ‘멍에’는 기꺼이 맬 수 있는 멍에가 아닐까. 가족이야말로 날 현실에 안주하게 하는 ‘멍에’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 삶에 가장 커다란 축복이며, 행복의 근원이기도 하기에 말이다.

 

그러니, 굳이 ‘멍에’라기보다는 또 다른 내 삶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한계라 볼 수는 없을까.

 

 

그럼에도 작가가 말하는 분명한 바는 현실에 타협하며 살아가는 인생은 마치 사육되는 돼지와 같은 인생이라는 점. 내 열정과 꿈을 위해서라면, 내가 쌓아온 삶의 기반마저 포기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삶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여전히 “사람의 멍에”를 수없이 매고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그 멍에가 의무감에 의한 것만이 아닌, 내 삶의 진정한 행복, 의미, 가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왕이면 그러한 멍에들 역시 함께 열정과 꿈을 향해 나아가는 동반자들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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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타이쿤 환상의 숲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임근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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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미완성 유작이란 타이틀만으로도 이 책, 『라스트 타이쿤』에 대한 관심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가 마지막 정열을 쏟았던 작품은 어떨까? 란 기대감으로 책장을 펼친다.

 

이 책은 할리우드에서 극작가로 실제 활동하였던 피츠제럴드의 경험이 잘 녹아들어 있으며, 아울러, 그 당시 작가로서 본인이 느꼈던 회환 역시 묻어나는 작품이다.

 

소설 속의 화자 세실리아는 어려서부터 할리우드에서 자랐기에 할리우드의 생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여대생이다. 할리우드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프로듀서의 딸로 태어나 자란 세실리아. 그런 그녀 앞에 또 다른 할리우드의 절대 권력자가 등장한다. 바로 먼로 스타라는 젊은 프로듀서.

 

바로 이 먼로 스타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영화판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는 절대자인 그는 결코 겸손하지도 않으며, 자신이 누릴 권력의 힘을 사양하지도 않는 절대자이다. 그런 그를 세실리아 역시 마음에 품게 된다. 하지만, 먼로 스타의 마음을 휘어잡는 한 여성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여성은 평범한 여성. 이 평범한 여성과 할리우드의 절대자 간의 사랑이 소설의 주요한 기둥이 된다.

 

과연 저자는 이 사랑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영화판의 절대자라 할지라도 사랑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까?(둘 간의 사랑은 불장난으로 그치게 된다) 아님, 엄청난 일중독자일지라도 사랑의 불꽃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걸까?(스타는 엄청난 일중독자이다. 휴일도 없는) 아니 어쩌면, 거래처럼 사랑을 주고받을 것처럼 여겨지는 그곳 역시 뜨거운 사랑이 존재하며, 사랑의 상처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난 이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실제 할리우드에서 극작가로 활동하며 경험하였던 회한이 작품 곳곳에 녹아 있음에 관심이 간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생명은 절대 권력을 가진 프로듀서의 말 한 마디에 달려 있다. 소설 속의 먼로 스타 역시 그런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화자인 세실리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은 세실리아의 말이다.

 

“제인이 시나리오 작가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난 자라면서 시나리오 작가라 비서와 꼭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 쪽은 항상 숨결 속에 칵테일의 냄새를 품기고, 식사 때에 집에 찾아오는 일이 많다고 하는 점이었다. 동부에서 오는 극작가만은 예외로 이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는 한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되지만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작가처럼 화이트칼라로 격하되는 것이었다.”(179쪽)

 

아무튼 이 소설은 미완성 유작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전부 완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다시 다듬지도 못했다. 그러니 어쩌면, 실망스러운 내용일수도 있다. 무엇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조금 거칠고, 불친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작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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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다비도프氏
최우근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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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특별한 초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능력 가운데 단골메뉴 가운데 하나가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투명인간이 되면, 불투명한 우리들이 하지 못하는 많은 일들을 하게 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투명인간이 됨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주인공은 연극배우다. 단역으로 시작하여,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주연배우로서 무대에 오르게 된다. 주인공의 인생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간, 하지만, 그 행복한 시간이 가장 끔찍한 순간이 되어버린다. 무대에서 주인공은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배우로서의 시각적으로 관중에게 다가가야 하는데, 투명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이때부터 주인공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연인이 곁을 떠나게 되고, 부모님 역시 그의 곁을 떠나 시골로 내려간다. 심지어 동네에서 잘 따르던 개조차 주인공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듯 뒤쫓곤 한다. 몸이 보이질 못하니 정상적인 직업을 얻을 수도 없다. 그럼, 투명한 이 능력을 이용해서 뭔가 자신의 유익을 꾀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은행을 턴다든지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왜?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하는 순간 정말로 투명인간이 되어버리는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투명인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투명인간이 아닌 걸로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다.”(50쪽)

 

투명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바람직하지 못한 일에 사용하는 순간, 이제 영원히 투명인간으로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 생각 안에 투명인간이 된 주인공이 자신의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 황당하고 당황스러움, 대략 난감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주인공 앞에 강적이 나타났다. 그건 바로 앞집에 혼자 사는 아가씨. 이 여인은 자신의 집 앞에 사는 총각이 투명인간임을 알고는 자신을 철저하게 방어한다. 투명인간이 언제 자신을 훔쳐볼지 모른다는 피해망상과 함께 말이다. 자신의 고양이 토토를 납치했다는 누명을 씌우기도 하고, 심지어 경찰에 신고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주인공은 경찰에 잡혀가기까지. 이런 이 여인의 막 되먹은 모습, 제멋대로인 모습, 상대의 말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 내뱉는 후안무치의 모습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꽉 막히고 얄밉기 그지없는 마녀 같은 모습이다(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반전이 있답니다).

 

신고에 의해 주인공을 붙잡아가는 최형사는 주인공을 심문하는데, 사실 최형사야말로 주인공을 얽어매는 후안무치다. 최형사가 주인공을 붙잡고 괴롭히는 이유는 여인의 신고 때문이 아니다. 단지 주인공이 투명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언제 그 능력, 보이지 않는다는 능력을 가지고 범죄를 행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히는 것. 그에게 있어 투명인간은 마땅히 범죄를 저지르게 될 잠재적 범죄자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미안한 얘기지만 자네가 무슨 짓을 하던 그건 중요하지 않네. 모기의 사정 같은 거 묻지 않아.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놈이 모기니까 잡는 거야.”(119쪽)

 

비록 모기가 날 물지 않았다 하지라도, 언젠가 날 물 것이기 모기를 잡는 것처럼, 투명인간 역시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 투명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 이게 바로 투명인간들이 겪는 비애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러한 투명인간들은 여전히 존재할 지도 모른다. 아무 잘못도,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어느 특정부류에 의해 위험세력으로 규정지어지고, 그로 인해 박멸해야만 하는 모기가 되어버리는 자들이 왜 없겠는가. 우리의 역사 속에도 이러한 투명인간은 허다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하는 자로 규정지어져, 온갖 혐의를 뒤집어쓰고 내몰려야만 했던 수많은 투명인간들. 온갖 핍박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이들의 비애가 소설 속의 투명인간에게 오버랩 된다.

 

투명인간으로서 홀로 내던져진 주인공은 자신 외에도 수많은 투명인간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하나의 모임을 만들고 있음도. 바로 이들은 자신들의 모임에 각자 고유한 향수를 뿌리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에게 주어진 향수가 바로 ‘다비도프 쿨워터맨’. 그래서 이제 그는 ‘다비도프’라 불리게 된다. 과연 다비도프 씨는 투명인간 모임을 통해, 최형사의 위협과 앞집 여자의 히스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무엇보다 무지 재미있다. 하지만, 이와 함께 투명인간의 비애가 가슴을 울리기도 한다. 투명인간이기 때문에 더 많은 제약을 받아야 하며, 또한 삶의 자유를 박탈당할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수많은 투명인간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득권인 불투명한 인간들의 쥐 콩만 한 호의를 희망으로 삼고 살아야만 하는 투명인간들의 삶. 게다가 존재 자체가 감춰지고, 어느 언론도 관심을 갖지 않는 투명인간들. 그들의 비애가 돋보이는 소설이다.

 

아울러 이런 투명인간의 슬픔은 오늘 우리 시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오늘 이 땅에도 여전히 이런 수많은 투명인간들은 존재할 것이기에. 기득권의 쥐 콩만 한 호의를 희망으로 착각하고 살아야만 하는 이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감에도 그 존재 자체가 감춰진 수많은 사람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관심 밖에 존재하는 자들. 그들 모두가 이 시대의 투명인간 아닐까? 이 땅의 수많은 투명인간들의 자아 찾기가 시작되길 소망해본다. 그리고 완벽한 투명 그 자체인 다비도프 씨를 ‘보는’ 앞집 안나와 같은 이들이 이 땅에 많아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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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 한림아동문학선
주얼 파커 로즈 지음, 김난령 옮김, 박기종 그림 / 한림출판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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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설탕』은 미국에서 노예해방이 선언되고(1863), 실제 노예해방이 이루어진지(1865) 5년이 지난 1870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남부 루이지애나 주의 리버로드 사탕수수 농장을 지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올해로 열 살인 ‘슈거’는 자신의 이름이 싫다. 왜냐하면,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슈거에게 설탕은 달콤한 단어가 아닌, 고통과 눈물, 그리고 벗어나고 싶은 역겨운 단어이기 때문이다. 슈거가 일하는 사탕수수 농장 리버로드는 경치가 참 좋다. 하지만, 이것은 한 발 물러난 상태, ‘밖’에서 바라보는 풍경이고, 직접 그 ‘안’에서 사탕수수와 씨름을 해야만 하는 이들에게는 이곳은 가장 불쾌하고 끔찍한 곳에 불과하다. 이것이 슈거가 자신의 이름을 싫어하는 이유다.

 

이런 슈거는 외톨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기 전 어디론가 팔려갔고, 엄마는 하늘나라로 이사 갔다. 단짝이던 리지는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찾아 북부로 떠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리버로드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슈거 역시 자유로운 세상을 향해 떠나고 싶지만 혼자서는 갈 수 없다. 그리고 그를 돌봐주는 빌 아저씨 부부는 많은 나이로 인해 북부로 가지 않고 있다. “전혀 모르는 나쁜 일보다 이미 알고 있는 나쁜 일이 더 낫다.”는 말을 하며.

 

한편 리버로드 농장에 또 한 사람의 외톨이가 있다. 바로 농장주인의 둘째아들인 빌리. 빌리는 슈거랑 놀고 싶다. 하지만, 빌리의 부모는 슈거랑 노는 것보다는 외톨이로 혼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버로드의 흑인 일꾼들 모두 슈거가 빌리와 어울리는 것을 반대한다. 그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신분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둘은 어울리며 우정을 쌓아간다. 과연 둘의 우정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그리고 슈거는 과연 리버로드를 떠나 새로운 삶을 찾아 갈 수 있을까?

 

이 책은 노예해방이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흑인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지도, 백인들의 의식구조가 달라지지도 않은 그런 과도기의 상황, 하지만 조금씩 시대가 변해가는 그런 역사의 한 가운데서 어린 흑인 소녀가 겪어 나가는 삶을 그려내고 있다. 아울러 달콤한 설탕을 만들어 내기 위해 온갖 끔찍하고 힘겨운 상황을 견뎌내야만 하는 노동자들의 밑바닥 인생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렇기에 처음 시작은 안타까움과 먹먹함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는 시대에 맞게 리버로드 농장도 점차 변하게 되고, 그런 가운데, 화해의 장이 이루어진다. 흑인 노동자들과 중국인 노동자들 간의 갈등과 화해, 슈거와 빌리 그리고 빌리의 부모님간의 갈등과 화해가 그 주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한 가운데, 슈거가 있다. 천방지축 말썽꾸러기 같은 슈거가 사실은 화합의 씨앗이다.

 

아울러,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을 꿈꾸는 어린 소녀와 그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전혀 모르는 나쁜 일보다 이미 알고 있는 나쁜 일이 더 낫다.”는 이 말은 어쩌면 삶의 지혜가 담겨진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새로운 도전에 대한 도피처로 사용되어진다면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똑같은 나쁜 상황의 결과를 낳게 된다 할지라도 후회함 없이 새로운 인생을 향해 도전해 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적어도 삶의 후회는 없을 것이기에. 그리고 도전하는 동안만이라도 행복과 설렘을 느낄 수 있기에.

 

이 땅에 슈거와 같은 화해와 화합의 씨앗, 그리고 도전과 희망의 씨앗들이 많이 심겨질 수 있다면 좋겠다. 청소년들이 꼭 한 번쯤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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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신은
한스 라트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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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도 많지만,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신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한데, 그 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모습이라면 어떨까? 전지전능한 신, 실수치 않는 신이 아니라, 마치 우리 인간들처럼 실수도 잦은 신이라면? 게다가 노는 것도 좋아하는 신이라면?

 

여기 그런 신이 있다. 한스 라트의 소설,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에 등장하는 신이 바로 그런 신이다. 신이지만, 인간의 옷을 입고 살아가며, 자신의 힘이 약해짐에 고민하는 신. 죽지 않는 신, 세상을 만든 창조주이면서도 자신이 죽으면 어쩔까 걱정하는 신. 하지만, 여전히 소소한 기적을 만들어 가며, 인간들을 돕는 신. 수많은 일들을 하며 위기의 순간에 놓인 인간들을 돕지만, 도리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신. 도박을 좋아하고, 포도주를 좋아하는 신. 크리스마스에는 빈둥빈둥 뒹굴어야 제 맛이라 생각하는 신. 자신의 고민을 실패한 심리학자에게 상담하기를 원하는 신. 과연 이런 신의 모습, 이런 설정에 어쩌면 반감을 갖는 분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임을 기억하자. 게다가 비록 재미난 설정이며, 일견 발칙한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신에 대한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이 담겨 있음을 읽어낸다면 어떨까?

 

무엇보다 이 소설 가운데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내용은 신의 힘이 점차 약화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신을 믿지 못하는 시대이기 때문. 믿음이 없기에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한 신의 영향력 역시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접근이야말로 우리에게 신앙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내 안에 내가 섬기는 신을 향한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내 삶을 향한 신의 간섭과 섭리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한 빈둥거리는 한량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소설 속의 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며,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니 도리어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여전히 사람들을 돕곤 한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도 우릴 향한 신의 마음이 아닐까? 우린 여전히 신을 하찮게 여기며, 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정신병자 취급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우릴 위해 숨겨진 도움과 숨겨진 기적을 행하시는 신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이런 요상한 신 아벨 바우만이 심리상담을 의뢰한 심리치료상담자인 야곱 야코비 박사는 실패한 심리학자이다. 결혼도, 경제활동도, 자신의 상담도, 모두 실패하였고, 가족들의 신뢰마저 잃은 그는 심리학자, 정신상담 치료자답게 대단히 이성적 사람이다. 게다가 무신론자이다. 하지만, 정신병자 같은 아벨 바우만과 함께 시간들을 보내며, 신이 진정으로 존재함을 점차 믿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바꾸고자 하는 결단도 하게 된다.

 

대단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발칙할 정도로 유쾌한 설정과 매끄럽고 가벼운 진행이 돋보인다. 작가의 유머가 물씬 느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잔잔한 감동 역시 선사하는 좋은 소설이다.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초월자로서의 신도 귀하고 의미 있겠지만, 이 소설 속에서처럼 우리와 별반 다름없는 신의 모습도 귀하고 의미 있게 다가오는 흥겨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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