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 마운틴
데이비드 밴 지음, 조영학 옮김 / arte(아르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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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 마운틴> 그곳은 11살 소년의 통과의례의 공간이다. 드디어 살상이 허락된 첫 사냥. 하지만, 그 첫 살상의 대상은 사슴이 아닌 사람이란 점이 문제의 시작이다. 자신들만의 사냥 공간인 <고트 마운틴> 그곳에 허락받지 않은 밀렵꾼이 있었던 것. 바로 그 사람을 향해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다. 11살 소년의 무지함 탓일까? ‘나’에게는 살인의 죄의식도 없다. 그 일이 얼마나 끔찍한 큰일인지 아무런 감각도 없다.

 

나는 곧장 걸어가 시체를 보았다. 사슴의 시체를 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다소 들뜬 정도? 그때껏 살아오면서 사슴 말고도 너무도 많은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이 세상에 온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36쪽)

 

이렇게 시작된 <고트 마운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소설 『고트 마운틴』. 작가는 이 소설 『고트 마운틴』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무런 죄의식 없이 살인을 행하는 모습이야말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고발하려는 걸까? 살상이 허락된 공간인 <고트 마운틴>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 그곳임을 고발하려는 걸까? 모를 일이다.

 

솔직히 이 소설 『고트 마운틴』은 상당히 어려웠다. 작가의 묘사 방식이 우선 그렇다. 비약은 예사다. 작가의 사색이 묻어나는 철학적 표현 역시 다반사다. 문제는 이런 사색, 그 영역에 접촉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더욱 책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현대 미국문학의 새로운 거장으로 부상하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기대감을 모두 몰아낼 만큼 난해한 묘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책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자연스럽게 행해진 살인, 그 살인을 뒤처리하는 과정, 그리고 첫 사슴 사냥과 그 처리과정 등은 마치 스플래터 무비를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득 받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러한 영화보다 더욱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은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성찰이 가득한 가운데, 그리고 상당히 잔잔한 묘사 가운데서 피와 살점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 엽기적인 느낌도 받게 된다.

 

아울러 상당히 비현실적인 묘사들로 인해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물론, 이런 몽환적인 분위기는 아름다운 몽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스플래터 무비 안에서의 몽환적 분위기다. 과연 현실 묘사인지, 상상의 묘사인지, 회상인지가 모호한 서술 역시 책 읽기를 어렵게 만든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관심이 많다. 특히, 기독교의 내용을 많이 차용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서적이라 말하긴 어렵다. 종교적이지만, 성서적이진 않다. 이 부분 역시 작가만의 세계가 분명 존재한다.

 

문제는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왠지 작가는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갇혀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호평과 수상이 단지 그네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라는 것 때문은 아닐까 의심이 갈 만큼. 하지만, 분명 그렇진 않을 게다. 좋은 작품을 읽기 힘겨워하는 본인의 독서력의 미천함 탓일 게다. 작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듣지 못함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이처럼 독자의 독서력을 의심케 하는 소설임이지만, 이 책은 수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어쩌면 그 질문이 너무 많아 감당키 어려우리만치. 그 가운데 하나는 과연 사람을 죽이는 것과 사슴을 죽이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작가는 차이가 없다 말하는 듯싶다. 또한 죄의식 없이 살인이 가능한지 작가는 우리에게 묻는다. 답은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인을 행하는 이들은 모두 악인인가? 답은 아니다. 악인이 아니더라도 죄의식 없이 살인을 행할 수 있다. 때론 그것이 잘못임을 아예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살상의 자연스러움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극중의 ‘나’가 바로 그렇다. ‘나’는 결코 악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죄의식 없이 살인을 행한다. 물론, 소설의 말미에서는 톰 아저씨를 향한 살인은 힘겹다. 왜 그럴까? 톰 아저씨는 ‘아는’ 사람이고, 밀렵꾼은 전혀 모르는 ‘익명’의 존재이기 때문 아닐까? 그럼에도, 두 살인은 같다. 심지어 사슴을 향한 살상마저.

 

어쩌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의 것일지 모른다. 우리의 ‘도덕’이란 껍데기 아래에는 이처럼 끔찍한 민얼굴이 감춰져 있노라고.

 

아버지에 대해 아는 바가 있다면,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바르게 살고 싶어했다. 가능하다면 우리를 녹인 다음 다른 틀에서 모양을 떠서 새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한테 기회가 없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지워진 것도. 지금에 와서도 겨우 내 옆의 그림자로만 남은 것도 그래서였다. 미래의 내 모습이 되었어야 했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었던. 누구도 타고난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도덕은 우리의 맨얼굴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다. (235쪽)

 

아무튼 어려운 책을 만났다. 평가는 읽을 여러분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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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이순원 지음 / 북극곰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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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나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연다. 게다가 제목도 『첫사랑』이다. ‘첫사랑’이란 단어는 왠지 가슴 설레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서툴지만 풋풋하던 시간을 떠올리기 때문이리라. 뿐인가! 표지도 참 예쁘다. 아니, 깔끔하다고 해야 할까? 하얀 바탕에 핑크 하트모양, 게다가 출판사 로고와도 잘 어울린다.

 

그런데, 표지 디자인만 깔끔한 것이 아니다. 처음 만난 이순원작가의 글이 참 깔끔하다. 잔잔하고 편안하게 풀어나가는 글 솜씨에 금세 반하고 만다. 책 제목처럼, 이순원 작가를 향한 ‘첫사랑’이 시작되려나 보다. 작가의 글은 잔잔하되, 흡입력이 있다. 다음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지 계속하여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아울러 ‘첫사랑’의 순수함이 오염되지 않고 끝내 지켜짐에 흐뭇한 마음마저 든다. 요즘 ‘첫사랑’이 얼마나 변질되고, 오염되었나? SNS를 통한 친구찾기는 불륜의 못자리가 된지 오래다. ‘첫사랑’이란 단어가 풋풋함과 순수함의 설렘보다는, 중년의 탈선의 설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마저 드는 시대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의 시골 초등학교 동창들이 만들어 가는 첫사랑의 스토리는 끝내 순수하다. 이젠 어느덧 모두 중년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순수함을 지켜낼 수 있음이 멋져 보이기까지 하다. 어쩜 이는 작가의 순수함이 묻어나는 것이리라.

 

이야기는 초등학교 동창모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모임에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 만나게 되는 친구들이 등장하며, 한껏 옛 추억을 건져 올리는 일에 고무된다. 이런 가운데, 모든 남자 아이들 마음 속의 연인, 첫사랑이었던 자현을 언급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사내아이들의 첫사랑인 자현은 안타깝게도 두 번의 결혼에 실패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그 사실을 모르는 친구들도 많은데, 특히, 어린시절 절대빈곤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끝으로 학업을 마쳐야만 했던 운봉은 자현이 궁금하기만 한데, 과연 만인의 ‘첫사랑’인 자현은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까?

 

‘첫사랑’은 모두에게 설레는 단어다. 하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첫사랑’은 설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첫사랑’이란 소제와 함께 풀어나가는 그 시절, 어렵던 시절, 힘겹던 그 시절이 도리어 독자들에게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물론, 시대적 공감이 독자에게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시대적 공감이 없는 이들에게는 조금 맹맹한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시대적 공감이 있는 독자들에게는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려 보게 되는 멋진 시간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미선은 주인공에게 당시 어린 시절 주인공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하며 밥 한 끼 거하게 대접한다. 그 이유는 힘든 가정 형편에 운동하던 그녀에게 매일같이 전해지던 도시락에 있다. 그 도시락은 주인공을 통해 전해졌는데, 그 안에는 언제나 계란 후라이 하나 얹어져 있었기 때문. 요즘이야 흔한 음식이 되어버린 달걀. 하지만, 당시에는 도시락 위에 얹어진 계란 후라이는 당시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사실 사내아이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계란 후라이는 누군가에게는 지켜내야 할 대상이자, 누군가에게는 탈취해야할 대상이기도 하였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으며 떠올려 보게 되며, 미소 지어 본다. 계란 후라이를 다른 친구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밥 위가 아닌, 밥 아래에 깔아 숨겨 싸가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또한 작가는 ‘첫사랑’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힘겨운 삶을 딛고 씩씩하게 일어서길 촉구하기도 한다. 바로 만인의 연인인 자현의 모습을 통해 말이다. 물론 가정형편으로 초등학교가 학교의 끝인 운봉의 인생 스토리 역시 그렇다.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업이 아닌 버스 안내양으로, 공장으로 내몰려야만 했던 시절. 그 가운데 배움의 한계로 좌절한 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배움의 한계를 극복하는 운봉의 모습도 있다. 뿐 아니라, 반복된 결혼의 실패, 그 힘겨움을 딛고 삶을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자현의 모습도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작가는 단순히 ‘첫사랑’의 설렘만이 아닌, 오늘 우리들의 힘겨운 삶을 멋지게 헤쳐 나가길 촉구한다.

 

아울러 이러한 씩씩함과 함께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는다. 이는 사랑의 멋진 결실은 독자들의 몫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삶의 힘겨움 속에서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독자들의 삶 속에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들이 가득하길 소망해 본다. ‘첫사랑’이 이렇게도 풀어나갈 수 있구나 싶은 맑고 예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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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시크릿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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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아니 평범하다기보다는 모범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주부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모범적 남편, 세 딸아이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많은 이들과의 관계를 멋지게 꾸려가는 사교성까지 갖춘 여성이다. 그런 그녀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게 된다.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한 남편의 편지 한 통 때문. 오래전에 남편이 써 놓은 편지에는 “반드시 내가 죽은 뒤에 열어볼 것”이란 문구가 쓰여 있다. 그러니, 더욱 그 안의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이 당연지사 아닐까? 과연 세실리아는 이 편지를 열어보게 될까?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남편의 비밀은 무엇일까?

 

리안 모리아티의 소설 『허즈번드 시크릿』은 세 명의 여인들이 각각의 화자가 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앞에서 언급한 세실리아 외에도 딸을 오래전 살인사건으로 잃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노부인 레이첼. 평범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중 쌍둥이처럼 지내던 사촌과 남편의 사랑 고백이란 청천벽력으로 인해 삶이 무너져 내린 테스가 그들이다. 이들 세 여인이 이런저런 모습으로 서로 얽히며 만들어가는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과연 편지에는 어떤 비밀이 감춰져 있는 걸까? 과연 사랑의 상처를 입은 테스의 사랑은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노부인 레이첼의 노년의 삶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흥미를 돋운다.

 

세실리아는 우연히 발견한 남편의 편지를 끝내 열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끔찍한 남편의 본 모습을 직면하게 된다. 언제나 극히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던 남편이 사실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하지만, 이 사실을 세실리아는 밝혀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야 하는 걸까? 과연 자신의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 진실을 묻어두는 것이 옳은 걸까?

 

이처럼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묻는다. 과연 무엇이 옳은 걸까? 이 선택 역시 독자의 몫일 것이다. 인생은 흑과 백으로 선명하게 나눌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 작가의 메시지이다. 편지를 열어 보게 된 세실리아는 이제 그 비밀을 알게 됨으로 인해 비밀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

 

아울러 비록 엄청난 죄악을 범한 자라 할지라도 그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그 사람의 인생을 규정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을 작가는 우리에게 던진다. 세실리아의 남편 존 폴은 극히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모든 이들이 인정하며 닮고 싶어 하는 가정적인 남편이자 아빠다. 게다가 지역사회에서 수많은 봉사활동을 행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가 행한 어린 시절의 끔찍한 범행 때문이다. 존 폴은 세상이 밝혀내지 못한 그 범행을 자백할 용기는 없다. 하지만, 그 범죄로부터 하루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에 자신 나름대로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굉장히 즐거운 일, 전적으로 자신만을 즐겁게 하는 일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포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 인생을 단 한 번의 실수(?)로 악인이라 낙인찍어야 옳은가?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평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속죄하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옳은 방법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를 용서해야 하는 걸까? 자신만의 방법으로 속죄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그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아울러, 그가 감춰버린 진실로 인해 피해자인 레이첼은 애매한 사람을 평생 의심하고, 미워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누구 책임일까?

 

결코 쉽지 않은 내용들이며, 선명하게 답을 밝힐 수 없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가는 하나의 결과를 제시한다. 결국엔 존 폴의 감춰진 진실로 인해, 그것은 또 하나의 흉기가 되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함으로, 물론 그것이 정당한 결말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결국 죄에 대한 결과는 자신들에게로 돌아오게 됨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이러한 죄와 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에는 세 여인의 결말들은 모두 가족이 지켜지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일지 모르겠다. 아울러 죄와 벌을 넘어, 화해와 용서의 손짓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결국 우리가 꿈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세 여인의 삶에 나름의 형식으로 결말이 주어진다. 하지만, 완전히 닫힌 결말은 아니다. 여전히 느슨하게 열려져 있다. 아마도 작가는 인생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열어보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엔 독자의 몫임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닐까? 닫힌 듯싶으면서도 열린 결말. 어쩌면 우리 인생이 그렇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인생이 비록 확고한 신념 위에서 굴러가는 듯 여겨질지라도, 그 신념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평소에는 짜임새 있게 맞물려 굴러가는 듯 보일지라도 순식간에 이가 빠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정부분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가 열어가는 판도라의 상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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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광적선 개도적선 2015-07-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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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조선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78
김소연 지음 / 비룡소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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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으로 날 바라볼 때, 때로는 그 시선이 자신을 스스로 바라보는 것보다 정확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청소년역사소설인 『굿바이 조선』은 이처럼 외국인의 시선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본 장편소설이다.

 

때는 1905년, 열강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시기, 러시아의 귀족 장교인 알렉세이는 조선탐사단의 일원으로 조선을 찾아온다. 물론, 이들이 조선을 탐사하는 목적은 조선을 삼키기 위한 기반 마련을 위한 것. 이 탐사단의 분대장 가운데 하나인 알렉세이는 자신의 분대원인 비빅, 니콜라이와 함께 조선을 탐사하기 시작한다. 비빅은 다소 다혈질의 거구 퇴역 군인이며, 통역관인 니콜라이는 조선인으로서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은 탐사여행에 필요한 말을 구하던 중 근석이란 소년과 함께 여정을 떠나게 된다. 과연 이들의 탐사를 통해 발견되어지는 조선은 어떤 모습일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던 조선을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설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조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당히 무능하며, 본질을 상실한 정부의 모습이다. 조선에 대해 탐문하던 알렉세이에게 한 러시아 상인은 조선인들은 마치 백조와 같다고 말한다. 백조가 사냥꾼에게 사냥을 당하듯이 러시아 수비대에 의해 조선인들이 사냥당하고 있다는 것. 이에 조선의 정부는 왜 가만히 있느냐는 알렉세이의 질문에 러시아 상인은 이렇게 말한다.

 

작금의 코레야라는 국가가 그렇습니다. 사살 사건이 지방 정부에 보고된다 한들 그에 대한 항의나 재발 방지 요구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럴 만한 힘이 없으니까요. 단적으로 말해 코레야 정부는 자국민을 지킬 힘도 의지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30쪽)

 

자국민을 지킬 힘도 없을뿐더러 의지도 없다는 평가가 우릴 부끄럽게 한다. 더 서글픈 것은 이런 모습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 아닐까?

 

뿐만 아니라 동학군을 외세의 힘을 빌려 척결하려는 조선의 모습을 바라보는 외국인의 시선 역시 우릴 부끄럽게 한다.

 

알렉세이 두 눈이 커졌다.

“동학군은 코레야 사람 아닙니까?”

“조선 사람 맞지요.”

“그런데 지금 외국 군대에게 자국의 백성을 학살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왕조에 반역하고 사민평등을 내세우며 극악한 도적질을 일삼는 동학당 따위는 조선 백성이 아니오. 도적 떼일 뿐이오. 반상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양반을 능멸하는 저런 무리는 하루 속히 이 땅에서 쓸어 버려야 하오.”(109-110쪽)

 

반상의 질서가 더 중요하고, 민중은 함께 가야할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는 양반의 사고구조에 화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럽기만 하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의 모습은 이처럼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순하디 순한 백조가 되어 수많은 외세의 폭력에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이러한 양반과 정부의 왜곡된 시선, 본질을 상실한 모습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조선은 백조에 불과하다. 겉으로는 고고한 척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불쌍한 동물이 조선의 현실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런 시선은 조선에 직접 들어와 탐사하는 가운데 점차 변하게 된다. 힘없던 백조에서 절개를 잃지 않고 용감하게 역사에 맞서는 백두산 호랑이로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선이 변하는 이유는 조선 안에서 살아가는 민중들의 삶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꿈틀대며 깨어나고 있는 민중들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부정부패의 온상지인 탐관오리들의 창고를 터는 동학군의 모습이며, 외세에 대항하여 싸우는 의병대의 모습 등이다. 아울러 이런 모습들을 통해, 새롭게 깨어나는 근석 역시 여기에 속한다. 그저 시골마을의 소년에 불과했던 근석은 알렉세이 일행과 함께 하는 가운데, 깨어나게 된다. 근석의 고백을 보자.

 

나는 지금껏 조선이 임금님 한 분의 나라인 줄만 알고 살았어요. 그래서 한 번도 산과 들이 내가 지켜야 할 내 것이라고 여겨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대장님과 여행을 하다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깨닫게 되었어요. 조선은 임금 한 사람만의 나라가 아닌 이 땅에 사는 모든 조선인의 나라라는 걸 말이에요. 조선이 백성의 나라가 아니라면 왜 의병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적군과 싸우고 동학당들이 탐관오리의 사창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겠어요?(250쪽)

 

결국 작가는 『굿바이 조선』이란 소설을 통해, 우리의 민중이 이처럼 깨어나길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럼으로 우리 조선(대한민국)이 여전히 오늘날 이 땅의 열강들에게 백조에 불과한 모습에 머무는 것이 아닌 이제는 호랑이의 모습으로 열강의 눈에 비춰지길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

 

아울러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의미는 이처럼 백조에 불과했던 조선이 호랑이의 모습으로 열강의 눈에 비춰질뿐더러, 열강의 시선이 우리 조선의 시선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렉세이가 그렇다. 사실 알렉세이가 조선 탐사단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자신의 민중을 보호하기보다는 민중을 학살하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회의였다. 이제 알렉세이는 시골 아이 근석이 세상을 향해 눈을 뜨는 모습을 통해, 이젠 도망치지 않고, 근석처럼 자신의 고국을 위해 뭔가 해야 할 바를 찾아 떠나게 된다. 이런 모습 역시 타자의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봄일 것이다. 외국인의 눈으로 조선을 바라보는 것에서 이 소설은 그치지 않고, 조선을 통해, 다시 자신들을 바라보게 됨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선의 확장은 오늘 우리 독자들에게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근석과 알렉세이, 아울러 니콜라이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조국의 멋진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게 되길 소망한다. 물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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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와 가나코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해용 옮김 / 예담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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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 작가 오쿠다 히데오. 그의 첫 번째 서스펜스 도전 소설이라는 『나오미와 가나코』를 읽은 후, 드는 생각은 ‘역시 오쿠다 히데오구나.’라는 생각. 물론, 서스펜스로서 구성이 탄탄하다거나 대단히 뛰어나다고 평하기에는 뭔가 2% 부족한 느낌이 없진 않다. 하지만, 5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임에도 지루함 없이 언제 읽었는지 모를 만큼 소설에 몰입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후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제목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은 두 여인이다. 대학동창인 나오미와 가나코가 그들이다. 나오미는 백화점의 외판부 직원으로 언제나 백화점 vip 고객들만을 상대하는 올드미스이며, 언제나 당차게 살아가는 여인이다. 반면, 가나코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은행원과 결혼하여 가사에만 전념하는 순종적 여인이다. 대학 졸업 후에도 정기적인 만남을 갖던 두 동창. 어느 날 나오미는 가나코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며, 가나코를 남편의 끔찍한 폭력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가나코의 남편 ‘제거’를 계획한다.

 

이 소설, 『나오미와 가나코』는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되는데, 전반부인 <나오미 이야기>는 나오미가 가나코와 함께 가나코의 남편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과 실행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인 <가나코 이야기>는 남편 제거 후, 둘의 범행이 드러나게 되는 과정과 이를 피해 도주하게 되는 모습을 다루고 있다. 과연 나오미와 가나코는 무사히(?) 수사기관을 피해 도망칠 수 있을까?

 

이 책은 무엇보다 가정폭력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가나코의 남편은 평범한 은행원이자 성실한 회사원의 탈을 쓰고 있지만, 그 뒤에는 아내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며, 아내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추악함이 감춰져 있다. 이런 추악함을 대하며 연약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점차 나아지겠지 하는 거짓 희망을 품고 참아내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의 마수에서 도망치는 것인가? 두 여인이 선택한 것은 둘 다 아니다. 남편의 ‘제거’를 선택한다. 그것도 완전범죄를. 물론, 이것은 끔찍한 범죄이지만, 그럼에도 그 선택은 가나코를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어젯밤 가나코에게 들은 남편의 폭력 이야기에 나오미는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봉인됐던 기억의 상자가 열려 이중의 타격을 받았다. 기억에서 생생한,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얻어 맞던 폭력의 광경. 가정 폭력은 주변 사람들마저 지옥에 빠뜨린다.”(28쪽)

 

그렇다. 나오미가 가나코를 위해 가나코 남편의 ‘제거’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이유는 자신 역시 어린 시절 어머니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해 지옥을 맛봤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은 지옥을 만들어내는 범죄다. 이러한 범죄 앞에 ‘제거’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나가는 모습은 어떤 윤리적인 질문을 넘어 당연시된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여인의 복수극이 성공하길 응원하게 된다. 작가는 이처럼 독자들을 나오미와 가나코의 살인의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능력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질문한다. 아무리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할지라도 과연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후반부 <가나코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질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어쩌면 이런 질문 때문에 평소 오쿠타 히데오의 작품처럼 통쾌함에서 그치지 않고, 뭔가 찜찜함이 후반부에는 가득한 것이 아닐까? 통쾌한 복수극, ‘제거’의 성공 뒤에 독자들이 갖게 되는 찜찜함이야말로 독자를 향한 작가의 무언의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 살인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가나코의 불안함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밤 11시가 되어서도 전화는 없었다. 오늘 중으로는 아무 일도 없을 것 같다. 마치 언제 집행될까 두려워하는 사형수의 심정이었다. 밤이 새고 다시 요코의 전화 앞에서 떠는 하루가 시작됐다.” (424쪽)

 

범행 성공 후에도 여전히 가나코는 불안함에 떤다. 이러한 불안함이야말로 그들의 제거작전은 윤리적인 부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두 여인은 완전범죄로 여겨졌던 자신들의 제거작전 안에서 드러나는 허술함 때문에 불안함에 떨게 된다.

 

이러한 불안함을 통해, 작가는 거듭 질문한다. 과연 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작가는 말한다. 두 여인이 벌인 ‘제거’작전은 어쩔 수 없는 범죄라고, 이런 행동은 동물적인 행위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살인, 제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두 주인공의 고백이자 작가의 결론이다.

 

“사람 하나를 죽였다는 의식은 본인 스스로도 놀랄만큼 희박했다. 어쩌면 그날 밤의 광경이 되살아나 괴로워할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지만, 이젠 생각나지도 않았다. 기억이 다가가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인간은 의외로 동물적인지 모른다.” (330쪽)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 이건가. 아니,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자신에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죄를 인정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후회하지도 않는다.” (423쪽)

 

분명, 두 여인의 제거작전은 찜찜함을 낳는다. 불안함을 동반하는 죄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거사는 두 여인에게는 해방의 출구였음을 작가는 말한다. 결국, 작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였다는 결말을 우리에게 전한다. 두 여인은 세상의 심판을 거부한다. 그리고 두 여인의 체포로부터의 탈출을 독자들은 끝내 응원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작가는 독자들을 공범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공범이 되며, 책장을 덮게 된다. 올 여름 더위를 식혀줄 재미난 소설임에 분명하다.

 

참,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들이라면 이 소설로 인해 평생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내 아내가 날 제거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회개하라! 그렇다고, 이 소설을 여성들이 열광하는 소설이라 말하는 것 역시, 조금 저어된다. 남성인 나에게도 신나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역시 오쿠다 히데오는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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