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두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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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후에 사람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지인이 사망했을 때, 혹은 죽은 사람에 대해 신문에서 떠드는 모양을 볼 때,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오래전 부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꼭 부검이 필요 없는 명확한 사인(死因)에 의해 죽게 되기를 바랐다. 그때는 신체가 낱낱이 해부되는 게 불편하고 유족에게 끔찍한 일이라 그랬지만, 이제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더욱 그걸 바라게 되었다. 말이 많이 나게 되는 죽음, 그 원인을 파헤치다 보면 망인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까? 


<호르두발>은 부정적인 답을 내놓는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서 읽은 <평범한 인생>에 비하여 어둡고 공허한 느낌을 주는데, 해설을 보면 조금 이해가 된다. <호르두발>에서 '어느 누구도 주인공의 진실에 접근할 수 없다'는 명제(테제)가, <별똥별>에서 '누구라도 주인공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반명제(안티테제)가 제시되며, 마지막으로 <평범한 인생>은 '주인공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여러 모습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확보'하게 되는 합명제(진테제)를 담아냄으로써 카렐 차페크의 '철학 3부작'은 완성된다. (284쪽) 


내용을 간단히 보자. 

유라이 호르두발은 고향에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돈을 벌러 아메리카에 갔다가 8년 만에 귀향한다. 추레한 모습으로 도착한 남편을 본 폴라나는 몹시 당황할 뿐 조금도 반겨하는 기색이 없는데.. 딸 하피에는 아빠가 낯설기만 하다. 집 안의 머슴으로 들어와 있다는 스테판 마냐는 호르두발과는 여러모로 반대편에 있는 젊은 사내다. 이들의 기묘한 동거생활, 호르두발의 누구에게도 뱉어내지 못하는 괴롭고 외로운 독백이 1부의 전반부를 구성한다. 폴라나와 스테판이 그렇고그런 사이라는 소문을 듣게 된 호르두발은 스테판을 내쫓지만, 폴라나의 무언의 시위에 견디지 못하고 하피에와 약혼시키겠다며 스테판을 다시 데려오고, 스테판의 성질을 계속 긁은 후 다시 내쫓는 희극을 벌인다. 어느 날 빗속을 헤매고 온 호르두발은 병을 앓아 눕게 되는데...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하는 1부(이 소설은 3부로 이루어졌다)는 호르두발의 떠들썩한 침묵(호르두발은 말수가 매우 적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여러 사람과의 대화가 오간다)으로 이루어져 다소 지루한 순간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나면 이 부분이 꼭 필요했음을 알게 되니 꾹 참고 읽어 보시길. 


--------이하 스포일러 주의-----------


2부와 3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다. 화자가 바뀌었기 때문. 이미 사인(死因)이라는 말을 던져두었기 때문에 새삼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바로 호르두발의 죽음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는 것. 호르두발의 죽음은 사인도 경위도 동기도 불명확하여 경찰관들이 수사에 나선다. 2부에서 수사를 마치고 3부에서는 법정 풍경이 펼쳐진다. 피고인으로 기소된 것은 폴라나와 스테판. 많은 사람들이 증인으로 나와 호르두발의 삶에 대해, 폴라나와 스테판의 행적에 대해 증언한다. 우리는 1부에서 호르두발의 내면을 보아 그의 진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므로, 2,3부에서 그의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면서 허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호르두발이 고향에 돌아오면서 소중히 품에 안고 온 상당한 액수의 달러는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그는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상상한다. 소를 사고, 폴라나가 팔아버린 목초지를 다시 사고, 마을 사람들에게 한턱 내며 우쭐대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입밖에 내지도 실행하지도 못한다. 결국 그의 죽음 후 그가 목에 걸고 다니던 돈주머니는 사라지고 만다. 

과연 표현되지 않은 선의는, 전달되지 않은 생각은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또는 고인의 생전에 그의 의사로 분명히 표현된 것이라 하여 진실이라 믿을 수 있을까? 호르두발은 생전에 그의 모든 재산을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정절과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폴라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 또한 그는 생전에 스테판과 하피에를 약혼시키고 그에게 상당한 재산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에 의해 우리는 그가 품었던 생각- 의심과 선의-도 알 수 없고 그 자체(폴라나의 정절과 사랑)를 사실로 믿을 수도 없다. 호르두발 살인사건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인 증거도 없고, 스테판의 자백은 증거와 들어맞지 않는다. 진실은 대체 무엇인가? 진실이란.. 과연 존재는 하는 걸까? 


유라이 호르두발의 심장은 어딘가에서 분실되었고 영원히 매장되지 않았다. (281쪽)


이 작은 마을에서 남편을 배신하고 머슴과 간통하며 심지어 남편을 죽이기까지 한(아마도) 폴라나는 순식간에 악마화/마녀화 된다. "자신의 부인을 믿지 못하는 삶은 과연 어떠할까!"(248쪽), "그런데 폴라나의 목을 매달지 않는다고 한다면 여자들이 조만간 줄줄이 자기 남편들을 살해하지 않을까?"(249쪽)

이런 상황에서 변호인의 아래와 같은 변론은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다. 


신사 여러분, 잠시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중 그 누가 자신의 가까운 사람이나 이웃 사람 앞에서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주위사람들이 여러분들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마도 이 여자에 관한 것보다도 더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떠한 완전무결도 비열한 험담과 중상으로부터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없을 것입니다. (266쪽)    



이 책도 곱씹을수록 좋았는데, 별을 네 개 준 이유는 1부가 다소 지루해서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 그래도 카렐 차페크의 철학 3부작은 소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별똥별>을 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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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15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66쪽 인용문이 진짜 허를 찌르네요. 그러게요. 저도 비열한 험담의 대상으로 수시로 소환될텐데요. 다른 사람의 험담을 일삼고 다른 사람의 프라이빗한 상황을 가벼이 전달하는 그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험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수시로 해야 할텐데 말입니다.
책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 평소에 정리정돈을 잘해둬야 할텐데 생각해요. 제가 없는 곳에서 제 자리 정리하려던 사람은 경악할 테니까요.. ㅠㅠ
생각만 하고 있네요. ㅠㅠ

독서괭 2023-09-15 12:55   좋아요 2 | URL
또다시 생각나는 다락방님의 책상샷...ㅋㅋㅋㅋㅋ
전 가끔 갑자기 죽게 되면 알라딘 서재를 어떻게 해야하나, 서친님들께 어떻게 알려야 하나 고민해봅니다. 가족,친구 누구도 모르고 있기 땜시.. 한명한테만은 얘길 해놔야 하나 싶기도 하네요. 가끔 갑자기 사라지는 서친님들 계신데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해서요 ㅠㅠ
이 책 좋아요 다락방님. 그러고보니 <평범한 인생>에서 병든 노년의 화자가 열심히 하는 일이 책상정돈이었던 것 같은데 ㅎㅎ 이 책도 읽어보시면 좋겠네용!
참, 인용문 보면서 저도 그런 생각 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남의 얘기는 더 조심해야겠다 다짐하게 되네요.

페넬로페 2023-09-15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르두발, 별똥별, 평범한 인생
순서로 읽어아 하는 건가요?
우리가 사실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내 속에 있는 나도 모르는데요.

독서괭 2023-09-15 21:15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땡기는 것부터 읽으심 될 듯요. 저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반테제라는 별똥별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합니다!

새파랑 2023-09-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ㅋ 독서괭님 차페크의 팬이 되신거 같습니다 ㅎㅎ 스포일러 위까지만 읽었는데 완전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독서괭 2023-09-16 13:13   좋아요 1 | URL
차페크 계속 읽을 것 같아요^^ 새파랑님 이 책도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