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연재되는 이진송 작가의 '아니 근데'를 가끔 읽는다.
이번에는 "프메 인기몰이 이동욱부터 청담부부 정우성·이정재까지…‘아저씨 열풍’의 이면"
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2,30대 젊은 여성들이 40대 이상의 남성 배우를 좋아하는 현상을 분석했다.
기사 링크: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209231558005
그냥 ‘아재 열풍’이라 착각마라…# 무해함 # 헛물안켬 # 사리분별
이라고 첫줄에 써 있듯이, 과거 나이 많은 남성이 젊은 여성과 교제/결혼하면 능력 있다고 추켜세워지고, 이런 사례를 바탕으로 나이 많은 남성들이 젊은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보던 것과 최근의 아저씨 열풍은 결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는, 즉 '무해한' 남성상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요즘 어린 여성들이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소식에 가슴이 설렌다면, ‘떼잉!’ 거기서부터 탈락입니다. 이는 결국 ‘무해한 남성상’에 대한 열망과도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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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남성상의 인기에는 절박한 측면이 있다. 2022년의 이성애자 한국 여성에게 연애, 남성, 구애는 위험하고 두려운 개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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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과 마시는 커피 한 잔도 긴장하게 되고, 안전하게 이별하는 ‘꿀팁’을 공유하는 것이 여성들의 현실이다. 아저씨 열풍은 이러한 맥락에서, 단순히 ‘나이 많은 남자’가 아니라,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어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는 최소한의 분별력을 갖춘 남자’를 안전하게 사랑하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다. - 이진송 칼럼 중
* 꼭 원문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주 재미있고 공감가는 글입니다^^
<디지털 미디어와 페미니즘>의 두번째 글, 백지연의 '불안에도 불구하고'는 이런 여성들의 불안을 분석한다. 김예란의 첫 글이 정동이론을 바탕으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몸'들의 투쟁으로서 미투를 분석했다면, 백지연의 이 글은 이론보다 조금더 직관적으로 여성들의 불안을 설명하여 공감이 쉽다. 그렇다고 직관만 내세우는 엉성한 글은 물론 아니다. 현대 여성의 집단적 불안을 만들어내는 미디어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고, 불안의 근본적 원인이 '젠더간 권력차이'에 있으며, 이런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선택하는 도피는 결국 불안을 증폭시키게 될 뿐이므로, 여성들은 '미러링 전략' 등을 통해 싸우기를 택하였다는 전개를 통해, 싸우는 여성들의 정동을 논리적으로 지지하는 글이다.
가령 미디어는 ‘세상은 너희에게 이렇게 무서운 곳‘임을 알려주는 정보를 늘어놓으면서도, 동시에 여성이 느끼는 불안을 개인적 사연의 형식을 빌려 소비시킨다. 여성들은 언제나 당하고, 울다가, 사건을 해결하지 못한 채 사라진다. 이런 이야기 구조 내에서 여성의 불안은 사회적인 실체를 가진 사실로 구성될 수 없다.
반면, ‘시스템‘은 남성의 불안 원인을 설명하는 단골 기제다. 예를 들어, 2015년 초반 즈음부터 온라인 공론장의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였던 여성혐오를 다룬 많은 기사들이, 남성이 여성을 혐오하고 차별하는 이유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린다(백지연, 2017). 남성의 경제적 불안(문강형준, 2016.1.15), 결혼에 대한 불안(조한혜정, 2016.2.16), 여학생과 경쟁하는 남자 청소년의 불안(백승찬, 2015.8.12), 여성과 마찬가지로 약자인 남성의 불안(박권일, 2014.8.11) 등은 모두 신자유주의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기사들은 사실로서 확인해주었다. 이와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과정은 엉성하지만, ‘여성혐오는 최근에 생겨난 것이다‘, ‘여성은 성격적으로 예민하다‘는 ‘문화적 전제 (Van Gorp, 2007)‘가 그 공백을 메워주면서, ‘불안‘이라고 이름 붙여진 감정을 대하는 사회의 방식에 개입한다. - P53
감히 확신하건대, 모든 여성은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겪었던 불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 기억은 개별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집단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특히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주요 에이전트인 미디어 (박동숙·이재원·정사강·강혜원 · 김해원, 2014)는 여성 집단이 불안의 기억을 축적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 p55
나 또한 감히 확신한다. 모든 여성은 여성이라는 성별 때문에 겪었던 불안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옛날 교과서에 실렸던 글 중 이런 게 있었다(지금 찾아보니 계용묵 작가의 '구두'라는 수필이다). 화자는 남성인데, 어느날 밤 집으로 걸어간다. 그의 앞에는 한 젊은 여성이 걸어가고 있다. 방향이 같아 앞뒤로 걸어가던 중, 여성이 불안한 기색으로 힐끔거리기에 화자는 앞서가려고 빨리 걷고, 그러나 여성도 더 빨리 걷다가, 결국 골목으로 들어가 달아난다. 남성은 황당하고 억울한 마음으로 집에 간다..
대충 이런 스토리였던 듯. 문제는 이 글에 여성이 느끼는 불안에 대한 공감같은 건 없이,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당함으로써 느끼는 억울함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를 보니, 내 기억이 대충 맞다. 이 글은 계속 생각나면서 내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켰다.
한국일보 기사: 왜 사회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구두'를 신는 법을 가르칠까
기사링크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80410470004832
일전에 같이 일하던 남성이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지하철에서 손잡이 잡고 서서 한손으로 핸드폰을 들여다보는데, 바로 앞 의자에 앉아있던 여성이 가방인지 뭔지로 다리 부분을 가리더라는 것이다. 본인은 그 사람이 있는지 인식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억울할까? 그전에 수많은 불법촬영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여성이 핸드폰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에 그렇게 불안을 느꼈겠는가?
저런 수필이 교과서에 실리고 남성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법만 가르치니 이모양이 되었나 보다.. 요즘 교과서에는 여성작가의 글이 많이 실려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렇다면 불안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연구에 따르면, 개인이나 집단 간의 권력 차이와 이를 유발하고 유지하는 구조적인 조건이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안의 주된 원인이다(Ohman, 2008;Barbalet, 2001; Flam, 1993; Kemper, 1978). 여성이 느끼는 불안은 젠더간 권력차이에서 발생하고, 남성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이 원인을 존속시킨다는 뜻이다. 불안은 다양한 강도를 가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정도가 변하며 내면적이거나 환경적인 상황에 의해 구체적인 양상이 달라질 수 있지만(Spielberger, 1966), 남성과 여성의 권력의 차이가 지속적이고 안정화되어 있다면, 이를 고질적인 문제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한국 여성들의 불안은 한국 사회 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지속된다. - P56
궁극적으로 도피는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는 탓에(Bourne, 2010) 안타깝게도 도망의 결말은 언제나 비슷하다. - P59
더불어 미러링의 발화자들은 자신의 언어가 남성 청자에게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러링 전략의 궁극적 목적은 원본이 가진 폭력성을 지적하고, 미러링(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중잣대와 이를 만든 차별적 인식을 드러내보이는 것을 통해 젠더권력의 차이를 좁히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잡음 없이 받아들여졌느냐‘는 기준은 미러링의 성공적 수용 여부를 판가름하는 주요 기준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잡음과 거부감의 유발이 미러링의 목적 달성을 돕는다.
미러링을 통해 표현된 언어의 원본은 ‘일간베스트‘ 뿐만 아니라 ‘디시인사이드‘, ‘오늘의 유머‘, ‘엠엘비파크‘ 등 온라인 공간의 남성 중심의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누적되어온 여성혐오 발언과 철저하게 대립쌍을 이루고 있다. 이 대립의 구조는 미러링의 폭력성을 비판하는 순간 그의 원본이 되는 남성들의 여성혐오를 함께 비판하지 않을 수 없도록 짜여진 언어적 전략이다. 못마땅하고 기분이 나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러링을 수용하는 사람의 존재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성차별주의자로 만드는 구도인 것이다. - P72
나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때만 해도 '여자 남자 편가르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왜 여성혐오라는 말로 편가르기를 하냐'는 남성상사의 말에 맞장구를 치던 사람이었다. 미러링에 대해서도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같은 말로 되받아쳐봐야 나까지 수준낮은 인간이 되는 거 아니냐는, 약간 도덕군자 같은 마인드가 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뒤 페미니즘을 자세히 접하고 이런저런 일들을 겪어가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 글에서 백지연이 미러링의 의의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해주니 좋았다.
여성들은 두려움에 얼어붙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에도 불구하고 생각하고, 불안과 함께 말하며, 불안을 없애기 위해 싸우기를 선택했다. 여성의 불안은 젠더 권력의 차이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어디서든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여성들의 싸우기는 계속될 것이다. - P74, 75
"서로 다른 수준의 관여도를 가진 여성들"(67쪽)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이들이 자신의 관여도 수준에 따라 적절하게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열리게 되었다는 점도 강조하는데, 공감가는 부분이다. 직접 시위에 참여하거나 '마녀D'처럼 연대활동을 하지 못해도,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것, 피해자에 대한 지지의 의사를 작은 목소리나마 표현하는 것, 주변 사람들과 이런 생각을 나누는 것도 싸움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제 읽기 시작하는 <디어 마이 네임>는 성폭력 피해자로서 원치 않는 법정 싸움에 나서야만 했고(가해자가 죄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가해자에 대해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유죄를 인정하였음에도 판사가 구형에 현저히 미치지 못하는 낮은 형을 선고하는 꼴을 봐야 했던 저자가, 몇 년 동안의 가명 사용을 그만두고 자기 이름을 찾아 쓴 책이다. 자신 같은 피해자가 더이상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쉽지 않은 일을 해낸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며, 책을 사 읽는 것 또한 싸움을 지지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나는 내 사생활을, 연애를, 과거를, 가족을 난자하는 불쾌하고 날 선 질문들, 내 이름을 물어보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나를 반라의 상태로 만들어놓은 이 남자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으려고, 시시콜콜 쓸데없는 사실들을 쌓아 올리고 있는 무의미한 질문들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육체적인 폭행 이후 나는 나를 공격하도록 설계된 질문에 공격을 당했습니다. 보세요, 그 여자가 사실이라고 하는 말들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녀는 정신이 나갔어요. 사실상 알코올중독이고, 어쩌면 꼬시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 남자는 멀쩡한 운동선수고, 두 사람 모두 술에 취했고, 뭐라도 했겠죠. 그녀가 기억하는 병원 관련 일들은 사실과는 관련 없는 일이고, 그걸 왜 고려해야 합니까. 브록에겐 많은 게 걸려 있고, 그래서 그는 지금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고 던지는 질문들에 말입니다. - 523쪽 (책 맨 뒤에 실린 피해자 진술서 중)
관련 기사 링크: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848102.html
'법대로'가 만능의, 최선의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법 시스템을 이용해 싸우길 선택한다면, 그럼에도 당신이 피해자와 함께 싸우길 선택한다면,
혼자 싸우지 말자.
혼자 싸우게 두지 말자. - 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