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전후에 이미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남자는 누구나 야동을 본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야한동영상'은 그 범주가 매우 넓다. 그건 예술영화의 한 장면일 수도 있고, 포르노일 수도 있고, 불법촬영물일 수도 있다. 그걸 다 퉁쳐서 '야동'이라고 하면서 관대하게 보는 말들을 들어 왔다. 은연중에 나도 불법촬영물을 제외한, 촬영 및 유포에 당사자가 동의한 영상은 보건 말건 당사자의 자유라고 생각해 왔다. 너무 이상한 것- 그게 뭔지 잘 모르겠지만, 아동,청소년이 등장하거나 너무 잔인하거나 그런 거?- 만 아니면, 그리고 거기에 중독만 되지 않는다면 내 파트너가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다행히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안 보거나, 적어도 나에게는 숨겼지만.
하지만 여기서 포르노 반대를 외치는 알라디너님의 글을 읽고,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이게 그냥 개인의 자유로 치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페이드 포>에서 성매매를 직접 경험한 레이첼 모랜이 아주 분명하게 포르노에 반대해야 할 이유를 정리해준 부분을 만났다. 길지만 매우 인상적이므로 인용해 본다.
어떤 여성들은 포르노에 반대하지 않지만, 나는 반대한다. 성적으로 노골적인 포즈를 취한 채로 사진 찍히는 경험을 해봤기에 화려한 시각적 이미지 뒤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산업 안팎으로 여성을 막대하게 훼손하는 모욕적이고 착취적인 산업이다.
포르노를 건전하게 보이려는 시도로 포르노가 성적 자기 결정의 한 방식이며, ‘성적으로 힘을 실어준다‘라고 한다. 내게는 발가벗겨져 사진 찍히고 자세를 취하는 행위가 발가벗겨져 일방적으로 성행위당하고 자세를 취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 당시에 여섯 명 정도의 아이들과 함께 일했는데 그 아이들 모두 10대 중후반이었다. (...)
나와 같이 그곳에 있었던 열입곱 살 소녀 한 명(아동 성학대 생존자)은 집주인이 그 아이와 계속 잠자리를 시도했기 때문에 임신해서 집을 떠났다. 그 아이는 나이 든 남자들한테 계속 성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거라면 차라리 돈을 받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아이들이 도달한 공통의 결론이었다.
사회적으로 더 권력 있는 남성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현실은 줄곧 수그러들지 않았고, 도망칠 수 없었기에 우리에게 실질적 혜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착취를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했다‘라고 표현하는 일이었다. 성매매를 ‘성적 자기 결정권‘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뒷받침될 수없는 이유는 우리가 성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인 이유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적인 요소는 즐길 수 없었고 견뎌야 했는데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더라면 업주에게는 빈 업소가, 성구매자들에겐 빈 필름이 남았을 테다.
카메라 반대편에 서봤기에, 솔직히 말해 현재 포르노를 보는 습관이 있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고, 맺을수도 없다. 포르노를 불쾌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설득하려는 어느 누구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인간됨을 지키는 일은 때때로 무엇을 수용할지에 대한 경계를 세우는 일을 필요로 한다. 나는 스트립과 포르노가 초래하는 폐해와 수모를 겪었다. 무해한 산업이 아니다. 구별 지을 수 있는 산업도 아니다. 성매매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들이다. 이 체제는 그 정점과 핵심 모두에 상품화를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저하시킨다. - <페이드 포> 126-128쪽
포르노를 보면서, 성매매를 하면서, 여자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까?
거기 있는 여자들과 거기 없는 여자들을 정확히 구분지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우습다. 그 경계 자체가 분명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 둘을 다르게 보는 내심에는 자신의 더러운 부분을 감추려는 무의식이 있다. '거기 있는 여자들'은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니까 내가 함부로 해도 되고, 내 더러운 욕구를 마구 풀어도 된다. '거기 없는 여자들'이 해주지 않는 것들을 그들은 해주니까. '거기 없는 여자들'은 남자들의 욕구를 다 채워주지 못하는 대가로 거기 가는 남자들을 수용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까. 남자들의 욕구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니까.
뭐? 그럼 성매매 안 하고 포르노 안 보는 남자들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없다는 말인가? 관계를 맺는 것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정서적 친밀감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운가? 사자도 교미를 할 때 다정하게 애무한다. 정서적 친밀감이 제거된 섹스, 특히 상대가 원하는지를 무시한 채 이루어지는 섹스는 폭력이지 에로가 아니다. 무조건 여자랑 할 기회가 되면 하는 게 '정상'이고, 못 하면 '줘도 못 먹냐'며 고자라고 놀려대는 일부 남성문화는 섹스를 인간 대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냥 자기 성기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으로 여기는 것이다. 거기에는 인간 여자는 없다.
포르노와 성매매는 원래 있던 자연스러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 없던 폭력적 욕구를 만들어 낸다. 더 새롭고 더 자극적인 욕구에 익숙해질수록 종전에는 만족스러웠던 섹스는 불충분해진다. 그렇게 중독으로 이어진다.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성매매라는 사실과 거리를 두려 하는 몇몇 구매자들은 우리 여성들 사이에서는 이야깃거리였고, 때로는 술을 마시러 가서 구매자들이 접시 밑이나 잔 받침에 돈을 끼워 넣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남자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만끽해야만 했다. - <페이드 포>,141쪽
이야말로 성매매를 지탱하는 주춧돌이다. 자신과 인생을 공유하는 여성에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기대를 할 수 없는 변태 성향을 다른 계층의 여성에게 떠넘기려는 남성의 고집이다. 여성들은 존중과 경멸, 품위와 천박, 존경과 비난이라는 두 부류로 구별되게 나뉜다. - <페이드 포>, 145쪽
아니, 그러니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거냐고...
<페이드 포> 10장의 '고급 창녀 신화'는 몹시 흥미로웠다. 고급이나 저급이나 성매매인 건 똑같은데, 그 사이에 위계가 생기고 성매매 여성들 스스로도 그것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독특하게 가장 하급으로 취급되는 거리 성매매에서 시작해서, 안마, 업소(룸살롱 같은 걸 말하는 듯), 에스코트 에이전시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고급 버전까지 골고루 경험했고 자유롭게 업종을 오갔는데, 오히려 착취의 측면에서는 에스코트가 제일 심하다고 보았다.
'고급' 성매매 시장에서 겪었던 경험들만큼 '고급' 같지 않은 일은 없었다. 섹스를 위해 돈을 지불하는 데 품격이 있을 리 없고, 성매매가 일어나는 환경이 상관있을 리 만무하다. - <페이드 포>, 152쪽
고급 창녀 신화는 대체로 그 신화를 믿으려고 섹스에 큰 돈을 지불하는 구매자들의 욕망과 맞닿으므로(성매매의 다른 신화들과 같이) 계속 지속된다. 많은 성구매자들이 에스코트 에이전시에 전화하면 고급의 질이 집 문 앞에 도착할 거라 짐작하고 싶어 하며, 그 질에는 고급의 여자가 부착됐을 거라는 생각이 뒤따른다. 고급 창녀의 개념은 성매매 시장을 극대화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고, 그로부터 수익을 창출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삶의 모든 부분에 계급적 편견이 존재하듯이 에스코트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들이 거리 성매매 여성들보다 어찌됐던 더 낫다고 하는 그 개념을 믿는다. - <페이드 포>, 157쪽
우리나라에서는 에스코트 여성 비슷한 개념으로 '텐프로'가 있다. 한때 '강남 돌아다니면 눈에 띄는 예쁜 여성들은 다 텐프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레이디 크레딧>에서도 텐프로로 표상되는 성매매의 서열화에 대해 분석한다.
그들은 부가가치가 있는 여성에게만 욕정을 느낌(그렇다고 자신에게 암시함으로써 자신의 성욕이 평범한 남성의 성욕과 다르다는(더 고급이라는) 것을 자신에게(그리고 다른 남성에게)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참고한다면 텐프로라는 업소를 통해 ‘고급‘으로 인정받는 것은 결국 구체성을 상실한 여성 접대부가 아니라 그곳을 이용하는 남성 고객이다.
(...) ‘텐프로‘는 마치 결코 닿을 수 없는, 범접할 수없는 어떤 곳을 나타내는 대명사다. 그러므로 텐프로는 언제나 그보다 낮은 등급의 외부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흥업소는 텐프로에서 노래방까지 각 분류의 업소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서열화되고 군집을 형성한 채 표상된다. 또한 텐프로를 중심으로 한 업소의 서열화는 여성의 가치가 외모를 기준으로 서열화될 수 있다는 관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텐프로와 비교해서 ‘부족분‘만을 드러낸다. - <레이디 크레딧>, 227쪽
사실 현재 성매매 산업의 재구조화 국면에서 여성들의 위계화된 ‘몸 가치‘, ‘사이즈‘에 따라 업소가 세분화 등급화되어 있다는 생각은 전후 관계가 뒤바뀐 것으로 그 자체로 여성혐오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갖는다. 여성들은 이러한 생각 속에서 자신의 몸가치를 확인하고 언제나 결여된 존재로서 순응해야 한다. - <레이디 크레딧>, 232, 233쪽
참 성매매 하면서도 지가 고급이고 싶다 이거지.. 거 참 재밌는 욕망이다.
텐프로라는 걸 설정해서 고급지고 싶은 구매자들 끌어모으고, 여성들에게는 너도 텐프로 될 수 있다며 성형 부추기고.. 진짜 이 세계 돌아가는 꼴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냐..
<페이드 포>는 밑줄 그을 곳이 많아서 진도가 빨리 안 나간다. 찬찬히 읽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