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 <불안한 사람들>

한 멍청한 은행강도가 현금 없는 은행을 털러 들어갔다가 경찰이 출동하자 도망, 우연히 오픈하우스 진행 중인 아파트에 들어가 집 구경 중이던 사람들을 인질로 잡게 되는 한바탕 소동극을 메인 줄거리로 하고,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관 두 명의 이야기와 그들이 인질로 잡혔던 사람들 하나하나를 조사한 참고인진술 내용이 교차로 진행된다. 

프레드릭 배크만은 그의 대표작인 <오베라는 남자>에서 보여주었듯, 비호감 캐릭터를 그려내는 데 일가견이 있다. <불안한 사람들>에서는 비호감 캐릭터가 대거 출동한다. 참고인조사 과정에서의 비협조적인 이들의 태도에 속이 터진다. 그러나 계속 가보자. 배크만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절반쯤 들었을 때 나는 여기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졌다. 


'로게르'는 <오베라는 남자>의 '오베'와 비슷한 캐릭터다. 그는 일견 무뚝뚝하고 부루퉁하고 사랑이라고는 1도 모를 인간 같지만, 그의 부인 안나레나가 계속 강조하듯("당신은 로게르를 몰라서 그래요."), 그 안에 깊은 사랑이 있다. 

 "로게르는 그런 방식으로 안나레나를 사랑했다." 


예전에 썼던 <오베라는 남자> 리뷰(☞https://blog.aladin.co.kr/703039174/9263843)를 찾아봤다. 거기 옮겨 둔 이 부분을 읽으니, 로게르의 사랑 방식을 설명하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든다.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소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혔다.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베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편이라도 읽도록 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택단지로 이사하자마자 그는 몇 주 동안 내내 저녁마다 헛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장들이 거실에 놓였다.

"책들을 어디에 보관은 해야 하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라이버 끝으로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오베라는 남자> 210쪽




그리고 안나레나 또한, 그녀만의 방식으로 로게르를 사랑한다. 

오픈하우스마다 찾아가서 싼값에 그 집을 사고, 함께 집을 멋지게 인테리어하여 값을 올려 파는 '프로젝트'의 수행을 반복하며 철새처럼 사는 그들의 생활- 남들은 이해할 수 없거나 돈 욕심에 그러겠거니 할 테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사랑의 결과였다. 


얼마 전, 자려고 들어가는 나를 붙잡고 남편이 인터넷 검색한 코트들을 보여줬다. 세 개의 후보를 보여주며 골라보라는 남편의 말에 열심히 보는 척 하면서, 고맙기도 하지만(내가 입을 코트였다), 약간 짠한 기분이 되었는데, 그건 그러니까...

옛날부터 나는 내 가방을 스스로 산 적이 거의 없다. 명품백 같은 건 관심도 없고, 들기 편한 것 하나 마음에 들면 주구장창 하나만 들고 다니는데다 물건을 험하게 쓰는 편이라 몇 년 못 가 금세 어딘가 뜯어지거나 닳아버렸다.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쓰는 성격이라 계속 들고 다니면, 엄마나 언니가 보다 못해 하나 사다 안겨주는 식이었다. 그리고 새 가방을 들고 다니기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 또 같은 일이..... 

이제 남편이 그 역할을 물려받은 것이다.(긁적) 

<불안한 사람들>의 로게르를 생각하다가, 남편의 이런 행동도 나를 사랑하는 그의 방식이구나 싶었다. 


자기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게 교육받아 자란 많은 남자들이(사실 여자들도 표현법을 잘 배우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걸 진중함으로 포장하면서, 파트너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초코파이적 정신으로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고, 그건 부부상담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하며 서로의 다름을 잘 알고 겉으로 드러난 것에 숨겨진 진정한 속내까지 알아보는 노부부의 모습에는 마음이 찡해지고 만다. 



 얼마전 끝내서 그런가, 의외로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게 놀라워서 그런가, <댈러웨이 부인>도 자꾸 함께 떠올랐다. 

<댈러웨이 부인>에 등장하는 피터 월시. 클라리사 댈러웨이의 첫사랑이었던 이 남자는 신념이 확고하고 직설적인 남자인데, 클라리사에게 "안주인"이 될 거라며 비아냥거리는 말을 던져 상처를 주었더랬다. "속물"이라는 말과 거의 동일하게 느껴지는 저 말을 계속 의식하면서도, 클라리사는 파티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 준비한다. 오랫동안 떠나 있다가 런던으로 돌아온 피터 월시는, 그런 클라리사의 파티에 나타난다.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녀가 준비하는 꽃꽂이 속의 꽃이 되어 얌전히 파티의 일원이 되는 피터는, 그런 방식으로 클라리사를 여전히 사랑한다.

 아, <댈러웨이 부인>의 마지막은 너무 로맨틱해. 







그렇게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불안을 이겨내려는 몸부림. <불안한 사람들>을 통해 프레드릭 배크만이 그려내려는 것은 그것일까. 아직 70% 정도 들은 상태이지만 이미 이 책을 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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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7 23: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분의 책은 안읽어봤어요 ㅜㅜ 왠지 표지가 안끌려서 😅
독서괭님이 애장한다니 관심이 가네요 ㅋ 사랑의 방식은 정말 다양한거 같아요. 남편분 멋지십니다~!!

독서괭 2021-12-07 23:57   좋아요 4 | URL
저는 몇 권 읽었는데, 관심이 가신다면 <오베라는 남자>와 <불안한 사람들> 중 한 권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한 권이 취향에 맞으시면 다른 한 권도 좋으실 거고, 아니면 안 읽으셔도 좋을 작가로^^

mini74 2021-12-08 00: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베라는 남자는 읽어봤어요. 묘한 매력이 있었어요 ㅎㅎ 불안한 서람들도 관심이 갑니다 *^^*

독서괭 2021-12-08 00:30   좋아요 4 | URL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라디오드라마 듣는 느낌으로~ 흥미진진 합니다. 감동도 있고요 ㅎㅎ

다락방 2021-12-08 07:43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최근 독서괭 님의 구매자평에서도 보긴 했지만 [댈러웨이 부인]이 로맨틱하다니, 아 정말 안타까워요. 저는 이십대 중반에 진짜 지루하게 읽었거든요. 다 읽고 나서도 ‘드디어 다 읽었다!‘만 남아있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를 멀리 하다가 최근에 자기만의 방, 3기니 읽으면서 너무 좋아가지고 댈러웨이 부인은 그러면 제일 재미없게 쓴 책이었나.. 했는데... 독서괭 님 감상 보니까 제가 제대로 못읽었던것 같아요. 뭘 몰랐을 때 읽은 듯. 좋은 책을 제가 몰라본 것 같아 너무 안타까워요. ㅠㅠ 조만간 저도 댈러웨이 부인을 꼭 다시 읽어보겠어요! 불끈!

잠자냥 2021-12-08 09:28   좋아요 5 | URL
저도 괭님 리뷰 읽고 아아니, 그 지루한 댈러웨이 부인이 로맨틱한가! 내가 역시 잘못 읽은 게 틀림없어! 싶어가지고.... 다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괭님 고마워요~

독서괭 2021-12-08 23:39   좋아요 2 | URL
저는 몇년 전에 읽을 때, 안 읽히는 게 번역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덮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읽으니 번역은 잘 된 것 같아서, 역자에게 괜히 미안하더라구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걸 많이 읽어보지 않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대체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지금의 다락방님, 잠자냥님이라면 20대에 읽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소감을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로맨틱- 무려 첫사랑 얘기잖아요! ㅋㅋ

책읽는나무 2021-12-11 1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베라는 남자>는 집에 있는데 안 읽었고,
<불안한 사람들> 은 빌려 읽을 참였는데 좀 기대 되고..
<댈러웨이 부인>은 구입할까, 중인데 로맨틱 하다니 완전 기대 됩니다~^^
울프 책 사다 놓은 건 어렵다는 평을 읽은 것 같아 의기소침 그러고 있었거든요ㅋㅋㅋ
결국은 다~~읽어야 하는 거로군요?^^
아가 키우신다고 들었는데 열심히 책도 읽으시고 멋져요♡

독서괭 2021-12-13 16:01   좋아요 0 | URL
나무님~ 세권 모두 저는 좋았는데, 나무님은 어떠실지 궁금합니다^^
울프 책 사다 놓으신 건 어떤 책인가요? 대체로 다 어렵다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 저도 읽은 게 많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읽은 것 중에는 <자기만의 방>- <댈러웨이 부인>-<올랜도> 순으로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작품들은 더 어렵다는 것 같아서 좀 걱정되네요^^;;
멋지다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책 읽을 체력이 부족한 게 넘 아쉬워요 ㅠㅠ

책읽는나무 2021-12-13 18:12   좋아요 1 | URL
와~독서괭님 아녔으면 큰일날 뻔 했습니다. 저 <댈러웨이 부인>사다 놨네요????
이런 이런....ㅜㅜ
두 달 전엔가? 샀었는데 기억도 못하고..... <등대로>랑 고이 모셔 놨네요ㅋㅋㅋ
<자기만의 방>은 몇 년 전 읽다가 중간에 책 덮었었거든요.ㅋㅋ
어려웠나 봅니다.ㅋㅋ
<등대로>읽어 보려 했는데 어렵다고 누가 그러시더라구요ㅜㅜ
그럼 <댈러웨이 부인>부터 먼저 읽어 보면 되겠군요?^^
확인하게 해주셔 감사해요ㅋㅋ
즐거운 저녁식사 시간 되시길요♡

독서괭 2021-12-13 21:24   좋아요 1 | URL
으아 댈러웨이 부인 또 살뻔 하셨네요!ㅎㅎ 알아차리셔서 다행입니다.
울프 책은 대체로 어렵다는 평이 많은 것 같고, 의식의 흐름이라는 게... 안 맞는 분은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얼마전에 라디오북클럽에서 최민석작가가 <댈러웨이 부인>을 소개했는데, 그거 듣고 나니 더 흥미도 생기고 읽는 데 도움이 되었어요^^
즐건 밤 보내세요 나무님~!

2021-12-13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3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13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1-12-13 17:38   좋아요 0 | URL
아하 귀찮다는 느낌을 부러워하시는 거라면 제대로 찾아오셨습니다 ㅋㅋㅋ 귀차니즘 대마왕입니다. 전 부지런한 분들이 젤 존경스러워요.
인터넷 쇼핑 들여다보는 것도 넘 싫어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지인들에게 물어 추천하는 물건을 사는 걸 선호합니다. 책쇼핑만 예외로…
언짢을 포인트가 1도 없는데요?? 단발님도 맛있는 저녁 드시고 푹 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