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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를 이미 봤고, 충분히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책에 대해서는 별 기대가 없었다. 전자책 도서관에 없었다면 굳이 읽지 않았을 텐데.
책과 영화를 둘다 봤는데 둘다 만족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각색이나 연출이 불만인 경우가 많고,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면 이미 화면으로 본 장면들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되거나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오베라는 남자는, 둘다 좋다. 책을 먼저 읽었으면 어땠을까. 그래도 영화도 좋았을 것 같다.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은 유머다. 그래서 내용을 알고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재미난 비유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오베는 마치 해적 차림을 한 미르사드가 보행자 전용 아케이드에서 그를 멈춰 세운 다음 여기 찻잔 세 개 중에서 은화를 감춘 게 뭔지 맞춰보라고 말하기라도 한 듯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383쪽(크레마에서 본 전자책 기준, 이하 동일)
확실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동을 받는 포인트가 달라진다. 실연당해 본 지가 하도 오래 되다 보니 얼마전 읽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은 작가에게 미안할 만큼 감정이입이 안 됐다. 한창 실연의 아픔을 겪는 사람이 읽을 때와는 천지차이겠지. 반면 결혼 후에는 '사별'을 이야기하는 작품만 보면 금세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전자책을 무료로 대여해 주기에 이게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읽었던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아내인 소냐를 앞서 보내고 뒤따라갈 계획을 세우며 살아가는 오베 역시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만, 대부분은 죽음이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데려갈지 모른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 언제나 자신을 비껴가리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우리를 홀로 남겨놓으리라는 사실이다. -438쪽
'까칠하다'고 표현되는 오베의 성격은 무엇 하나 좋게좋게 넘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데, 그건 바로 그가 엄격한 원칙주의자라는 뜻이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원칙과 규율을 어기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회에서 오베는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는 진상 노인이다(사실 59세 밖에 안 됐지만). 오베는 부조리한 '하얀 셔츠(를 입은 공무원)'들과 싸우고, 거주지를 어지럽히는 규칙 위반자들과 싸우고, 자신에게 원칙을 굽히라는 요구를 하는 모든 것들과 싸운다. 그리고 그런 그의 곁에는 외국인이민자(파르바네), 고도비만자(지미), 뇌졸중환자(루네), 동성애자(미르사드), 상처 입은 길고양이 등 주류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이 모여 든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주류 사회에 대한 비주류(소수자)의 대항과 연대, 그리고 승리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베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으로 답하는 남자, 자신 안의 이타성과 선량함을 순순히 인정하기에는 너무 수줍은 남자, 그래서 선한 일을 할 때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아내가 실망할 것이다"라는 핑계를 대는 남자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로, 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점점 더 차별을 두었다. 실천하는 사람과 말만 하는 사람들을 구별했다. 오베는 점점 더 말을 줄이고 점점 더 실천을 했다. -107쪽
파르바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여자들을 얼어 죽게 할 수는 없겠죠, 오베, 그렇죠? 애들이 당신이 광대를 공격하는 광경을 봐야 했던 걸로 충분하잖아요. 안 그래요?"
오베가 그녀에게 언짢은 시선을 보냈다. 그는 말없이,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그애들의 변변찮은 애비가 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창문 하나 열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만약 그가 어린이 살해범 자격을 새로 취득한 채 저세상에 도착할 경우 오베의 아내는 엄청난 양의 잔소리를 끓여 부을 것이다. -179쪽
4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소냐는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수백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들에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읽혔다. 같은 기간 동안 그녀는 오베가 셰익스피어 희곡을 한 편이라도 읽도록 하는 데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택단지로 이사하자마자 그는 몇 주 동안 내내 저녁마다 헛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그가 작업을 마쳤을 때, 그녀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장들이 거실에 놓였다.
"책들을 어디에 보관은 해야 하잖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라이버 끝으로 엄지손가락에 난 작은 상처를 콕콕 찔렀다.
그녀는 그의 품에 파고들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10쪽
그리고 소냐는 그런 오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오베와 소냐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얼마나 지극히 사랑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둘은 거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극과 극이다. 남중 남고를 나와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와 문학소녀로 자라나 국문학을 전공한 시인의 만남이랄까. 오베의 지극한 사랑은 소설 전반에 걸쳐 담담하게 드러난다. 큰 사고를 당해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린 사느라 바쁠 수도 있고 죽느라 바쁠 수도 있어요, 오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276쪽
그래서 오베는 쫓겨나는 대신 야간 청소원이 되었다. 만약 이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그날 아침 자기 조를 떠날 일이 결코 없었을테고, 그녀를 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그 빨간 구두와 금 브로치와 윤기 나는 갈색 머리도. 또한 남은 평생 동안 누군가 맨발로 그의 가슴속을 뛰어다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될 그녀의 웃는 모습도 볼 일이 없었으리라.
그녀는 종종 "모든 길은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일로 통하게 돼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그 '원래 당신이 하기로 예정된 것'은 아마도 '무엇'이었으리라.
하지만 오베에게 그건 '누군가'였다. -115쪽
"날 속이면 안 돼요, 여보." 그녀가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커다란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도 안 볼 때 당신의 내면은 춤을 추고 있어요, 오베. 그리고 저는 그 점 때문에 언제까지고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이 그걸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간에." -155쪽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는 커다랗고 둥근 바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고, 마치 그녀의 볼을 만지듯 좌우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보고 싶어." 그가 속삭였다.
아내가 죽은 지 6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오베는 하루에 두 번, 라디에이터에 손을 얹어 온도를 확인하며 집 전체를 점검했다. 그녀가 온도를 몰래 올렸을까봐. -61쪽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75쪽
이 대책없이 까칠하고 못말리게 사랑스러운, 고집불통 이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제는 저 세상에서 소냐를 만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부끄러운 듯 딴청을 부리고 있겠지.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