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아이들과 함께 잠들었는데 악몽이 나를 깨웠다.

공중화장실에 가서 칸 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려고 하는데 갑자기 남자 두 명이 문을 밀고 들어오려 해서 필사적으로 막으며 "살려주세요" 외치는 꿈. "살려.."가 잠꼬대로 현실화되는 바람에 깼다. 가끔 꾸는 류의 개꿈이다. 보통 이런 꿈을 꾸면 심장이 쿵쿵거리고 식은땀이 나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그런 증상은 없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아서 몇시간을 뒤척였다.. 


왜 이런 꿈을 꾸며 무서워해야 하는가. 


장소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집 안이고, 때로는 거리이고, 때로는 엘리베이터다. 공통점은 매우 일상적인 장소라는 것, 그리고 대항하기 힘든 수준의 폭력이 목전에 있다는 것이다. 꿈에서는 늘 폭력이 현실화 되기 전에 깨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다. 꿈에 나올 만큼 긴장과 불안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공중화장실에서, 거주하는 아파트 주차장과 엘리베이터에서, 심지어 집 안에서도(특히 벨이 울릴 때) 늘 달고 다니는 긴장과 불안이, 여성들에게는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런 걸 모르고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특권이 아니고 무엇인가. 


안전에 대한 욕구.

나는 많은 여성들이 결혼을 택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안전욕구라고 생각한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안락하게 살고 싶어하는 여자들에게는 사치, 허영, 된장녀 이런 딱지가 붙지만, 그 뿌리는 결국 안전욕구라고 생각한다. 유흥가 술집의 공중화장실보다 고급식당과 바의 내부에 설치된 공중화장실이, 낡은 모텔보다 일류호텔이,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이 안전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혼자 사는 여자보다 남자와 함께 사는 여자가 안전하다는 것도. 물론 그 함께 사는 남자가 과연 안전할지는 함께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남성(들)이 작정하고 범죄를 저지르려 달려든다면, 사실 저항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런 장면이 등장하는 영화를 보면 괴롭다.

 <이웃사람>에서 중학생 소녀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연쇄살인마 집 앞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열린 문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는 장면, <함정>에서 남편의 불능을 고치러 섬에 와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행위하는 모습을 보다가 옆에 있던 집주인(마동석)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너무 괴로웠다. <함정>은 정말.. 찝찝해서 끝까지 보긴 했지만 이런 영화를 왜 가져 왔냐고 남편을 원망할 정도로, 좋아하던 마동석배우가 싫어질 정도로 싫은 영화였다. 

 <해무>에서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하자 당연하다는 듯이 여성을 성폭행하려는 놈이 나온다. 그 여성과 서로 사랑하는 다른 남성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 시도는 성공했을 것이다. 

 여성상위니 역차별이라는 말이 우습다. 아프간 여성들을 보라. 우리가 성취한 현재의 지위도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시녀이야기>의 설정이 그저 판타지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 기억에, <시녀이야기> 속, 여성들이 임신을 위한 도구의 처지로 전락하게 된 첫번째 단계는 '계좌 동결'이었다. 어느 날 자신의 예금계좌에 대한 권리가 사라지고, 남편이나 다른 남성가족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야 하는 것. 

 정부와 군대와 금융이 남성의 지배 하에 있는데, 언제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 

<언제나 양해를 구하는 양해중씨의 19가지 그림자>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긴장, 불안, 공포를 흥미로운 구성으로 엮어낸 소설이다.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 양해중씨는 각각의 화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그림자처럼 등장한다. 그가 보여주는 어쩌면 모순되어 보이는 측면들은 오히려 현실성이 있다. 여성이라면 스릴러 읽을 때 못지 않은 긴장감으로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연애할 때, 나는 연애의 최고 장점은 '밤길을 함께 걸을 수 있거나,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있거나, 적어도 밤늦게 집에 갈 때 언제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도 비슷하다. 원룸보다 아파트가 안전하다. 여성 1인 가구보다 4인 가족이 안전하다. 설령 결혼 후 그 상대가 안전하지 않은 자로 밝혀지더라도, 어차피 세상 밖도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주저앉는 선택을 하는 많은 여성들이 생긴다. 가출한 소녀들이 혼성으로 이루어진 가출팸에 의탁하여 보호라는 미명 하에 성매매에 뛰어들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데렐라가 왕자를 선택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을까? 그대로 그 집에 있었다면 그녀는 더 나이들기 전에 지참금을 듬뿍 주는 영감에게 시집보내졌을 것이다. 가난한데 예쁘기까지 한 여성이라니, 그런 먹잇감이 또 있을까. 불특정 다수의 불한당들에게 이러저리 희롱당하고 아빠를 모르는 아이를 낫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럴 바에는 설령 왕자가 찌그러진 호박같은 외면과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더라도 그에게 속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우리의 펠리시아가 생각난다. 펠리시아는 가정에서 돌봄노동과 가사노동을 떠맡고 있었다. 집을 나왔지만 배속의 아이 아빠를 찾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던 그녀에게, 힐디치씨는 안전하고 안락한 탈출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펠리시아는 그가 내미는 유혹을 거절하고 다시 거리로 나선다. 이제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의외의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의, 그리고 사회적 안전망이다.











 사회적 안전망. 연대. 그것만이 내 악몽을 사라질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직은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공중화장실에서의 불법촬영 사건이 끊이지 않는 한, 술에 취한 여성의 준강간 피해에 대해 "여자가 그러고 다니니.."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스토커에 의한 폭력 피해와 데이트 폭력 피해가 계속되는 한, 내 일상에 내재된 공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는 10/21,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드디어 시행된다. 과연 법률 제정의 취지에 맞게 공권력이 잘 대응해 줄 것인지. 위 법률의 제정을 위해 애쓴 이수정교수님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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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27 16: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악몽을 꾸셨군요 ㅜㅜ 이런 종합 페이퍼 너무 좋네요~!! 저기 영화중에 이웃사람만 봤는데, 나머지 영화는 내용이 참 그렇군요 😑 저도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지면 좋겠네요~!!

독서괭 2021-08-27 16:05   좋아요 3 | URL
저런 영화들이 갈수록 더 보기 힘들더라구요 ㅠㅠ 특히 아이가 피해대상인 건 너무 힘들어요. 특히 약자에게 안전한 사회를 희망합니다!

잠자냥 2021-08-27 16: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 <시녀이야기> <증언들> 속 내용이 단순히 디스토피아를 그린 소설로만 읽히지는 않죠. 현실의 재현입니다....ㅠㅠ

그나저나 ˝남편의 불능을 고치러 섬에 와서 남편이 다른 여자와 행위˝....? 아니 그 남편은 아내한테만 불능이었습니까? -_-???

독서괭 2021-08-27 16:08   좋아요 2 | URL
현실의 재현.. 맞아요 ㅠㅠ 전 <증언들>은 못 읽었는데, 이것도 좋은가요?
아, 영화 <함정>의 내용을 매우 간략히 간추리다보니 ㅋㅋ 저도 이 설명은 무엇인가, 싶긴 했는데요 ㅋ 제 기억으로 부부 사이에 어떤 아픔이 있어서 관계가 안 되다 보니 걱정이 된 아내가, SNS에서 저런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남편에게는 그냥 놀러가는 걸로 하고 간 거였습니다. 근데 이 설정이 이해가 되시나요? 아무리 남편이 안 선다고 다른 여자랑 자러 가게 하다니.. 거참 이해불능입니다 =.=

잠자냥 2021-08-27 16:14   좋아요 3 | URL
<함정> 대체 무슨 영화인가 해서 줄거리 찾아봤더니 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맛집 함부로 가면 아니되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증언들>은 시녀이야기 속편인데 <시녀이야기>만큼 좋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딱딱 맞는.. 그 두 작품이 함께 있어야 완성되는 느낌입니다!!

독서괭 2021-08-27 16:17   좋아요 4 | URL
맛집 함부로 가면 아니된다 ㅋㅋㅋ 이 영화의 교훈이군요 ㅋㅋ
시녀이야기 속편인 건 알고 있었는데 속편은 좀 못하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안 사고 있었어요. ㅋㅋ 그만큼이나 좋다니!! 놀랍군요. 시녀이야기 다른분 줬는데 <증언들>과 함께 다시 사야하나..ㅜㅜ

잠자냥 2021-08-27 16:20   좋아요 3 | URL
<시녀이야기> 다시 안 읽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도 속편은 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증언들>도 후덜덜합니다. ㅎㅎ 일단 무쟈게 재미남.

독서괭 2021-08-27 16:22   좋아요 4 | URL
오우 알겠습니다. 접수!!

다락방 2021-08-27 16: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세 영화 모두 안봤는데 다 싫으네요. 안보길 잘했다 싶어요. 특히 중학생이 끌려 들어간다고요? 어이쿠야.. 정말 너무 싫으네요 ㅠㅠ

여동생이 결혼전 혼자 지내는게 저는 언제나 늘 신경이 쓰였더랬어요. 직장 근처에 집을 얻어 살았는데, 베개 밑에 항상 송곳을 두고 잤다고 하더라고요. 제부랑 결혼해서 같이 살게 되었을 때 저는 마음을 놓았어요. 아 다행이다, 이제 여동생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고요. 왜 혼자 사는게 불안해야 하는지 이게 너무 짜증이 나요.

저는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저를 훔쳐보던 옆칸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소리지르면서 나가라고 했지만, 당시에도 그 후에도 엄청 무서웠어요. 제가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있었어요. 남동생이 올때까지 나오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 놈이 바깥에서 기다릴까봐요.

일전에 여자 혼자 배달음식 시켜먹는거 너무 무섭다, 불안하다, 혼자 사는 여자 대상 범죄가 너무 많다..같은 이야기를 여자직원들끼리 모여서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던 남자직원이 그러더라고요.

˝배달 음식을 시켜먹지 않으면 되잖아요!˝

하아... 그 날 그는 모든 여직원들의 야유를 받았습니다. 후.....

독서괭 2021-08-27 16:22   좋아요 3 | URL
네. 다락방님 보지 마세요. 그나마 <이웃사람>이 결말은 시원하게 끝나는 편인데 중학생이 피해자라..ㅠㅠ 아직도 끌려들어가는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현관문틀을 붙잡고 버티던 그 손이요.. ㅠㅠ
이런 공포 여자들에게 너무 당연한 거라 그냥 살다가 어느날 문득 누군가는 이걸 전혀 모르고 평생을 산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더라구요. 모르는 건 죄다.. 모르고선 저런 빻은 말을 하는 것도 죄다 -ㅁ-^
화장실 많이 무서우셨겠네요ㅜㅜ 지하철 치한, 길거리 바바리맨, 집앞골목 성추행범 등을 저도 겪었는데요, 서른 넘은 여자들끼리 모이면 피해경험이 줄줄이 한다발입니다. 연인 사이의 내밀한 문제 포함하면 더하겠죠.
아휴..

잠자냥 2021-08-27 16:28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괭님 말씀처럼 이 나라 여자들 중 일평생 성추행 안 당한 여자들이 없어요. 모여서 이야기하면 그런 경험 없는 여자 정말 하나도 없음.
전 중고등대학교 때 소년스럽게 하고 다녔는데도 추행 당한 경험이 여럿 있으니 말 다했죠. 에이구야.........

독서괭 2021-08-27 16:38   좋아요 4 | URL
ㅠㅠ 여성의 옷차림이 피해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정말 말도 안 돼요. 저도 피해당할 때 전부 ‘야한‘ 것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였어요. 늦은 시간도 아니었구요. 그냥 그 범죄자의 위치, 상황 등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아요. 피해자탓 좀 그만 하면 좋겠어요.

공쟝쟝 2021-08-31 20:21   좋아요 2 | URL
안전에 대한 욕구가 1번이라는 말을 너무 잘 이해해요. 저는 집에 식칼이 없어요. 과도만 두개 있어요 ㅋㅋ 그 사연은 언젠가 글로 이야기 해드릴께요... 총총 ㅋㅋ

독서괭 2021-08-31 20:24   좋아요 1 | URL
헛 쟝쟝님 그 사연 궁금한데요..!!

얄라알라 2021-08-27 17: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20대가 주 참여자인 양성평등 포럼에서 한 친구가, 남녀가 느끼는 문제의 포커스가 완전 다르다, 한국 젊은 여성의 젠더 문제는 성적 위협과 폭력에서 불안한 것과 관련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이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 있는데, 독서괭님의 페이퍼 읽으니 확 느껴집니다. 그 친구가 했던 말의 의미가...

독서괭 2021-08-27 18:28   좋아요 3 | URL
북사랑님 감사합니다^^ 그런 불안함이 폭발한 게 강남역 살인사건인 것 같아요. 일상생활에서 긴장과 불안을 늘 느끼며 산다는 게 참 에너지 소모가 큽니다.. ㅜㅜ

초딩 2021-08-28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전불감증을 초래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혼자 떠나라고 하는 여행책들도 문제인거 같아요

독서괭 2021-08-28 23:09   좋아요 2 | URL
초딩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여행책들을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저는 혼자 떠나는 사람이 정말 안전에 불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주변에 보면 많은 사전조사와 준비를 갖추고 가더라구요. 여행책에서도 혼자 떠나는 경우에 더 필요한 팁을 준다면, 우려하시는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