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 후의 삶까지 생각하는 '태아 프로그래밍'
건강하고 똑똑한 아기를 낳고자 하는 노력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서양에서도 자궁 환경에 대한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은 태아의 평생 건강이 이미 자궁 속에서 결정된다는 매우 혁명적인 가설이다. 과연 엄마 뱃속에서의 삶이 훗날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자세히 알아보자.
부모로서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일생 동안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뱃속에 있는 아기를 미술품처럼 마음대로 조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마가 임신 기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태어날 아기가 평생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는, 꽤 설득력 있는 이론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 노력 여하에 따라 태아에게 건강한 삶을 약속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앞으로 태어날 아기를 위해 준비할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기 운명은 이미 프로그래밍되었다?
현대 의학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생의학적 연구를 통해 엄마와 태아 사이의 신체나 호르몬, 혹은 감정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태아가 세상에 나와 살아가는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왔다. 이를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은 ?태아 프로그래밍?으로, 엄마의 자궁 환경이 아기의 기본적인 신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태아가 엄마의 자궁 속에서 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동안 태아의 세포와 기관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프로그래밍하고, 몸이 태내에서 겪은 체험들을 모두 간직한다는 것이다. 태아 프로그래밍 이론을 뒷받침하는 한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음식을 먹든 얼마의 양을 먹든 몸무게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콜레스테롤과 혈압도 언제나 낮은 수치를 유지한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늘 조심스럽게 식단을 짜고 적당히 먹으면서 계속 운동을 하지만, 언제나 불어나는 몸무게와 고혈압 그리고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대 과학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왜 어떤 사람은 최신형 자동차처럼 멋진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구형 중고차처럼 보잘것없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 섭취 음식물, 그리고 생활방식의 차이가 그 요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 이런 세 가지 주요 요인 외에도 태아가 머물렀던 엄마의 자궁 환경이 아기의 기본적인 신체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태아기에 엄마의 자궁이 ?어떤 환경이었냐?에 따라 심장병이나 비만, 음식물의 섭취 방식, 콜레스테롤 수치, 정신적 결함, 지능, 저항력, 암에 대한 민감성 등이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태아 프로그래밍?을 집대성한 것은 미국의 저명한 태생학 전문가인 피터 너대니얼스 박사로, <태교 혁명>(원제 : The prenatal prescription)이라는 책을 통해 자궁 환경에 따라 태아가 어떻게 형성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물론 피터 박사가 이를 연구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 이전부터 영국 사우샘프턴 병원의 바커 교수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었고 초석을 마련했다.
엄마 뱃속에서 굶주린 아기의 운명은…
태아의 자궁 속 삶이 출생 후 수십 년의 삶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다.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역학적 기록이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그리고 동물실험을 통한 아주 인상적이고 놀라운 자료들을 수집했다. 임신 중의 영양 상태와 평생 건강과의 상관관계는 굶주리거나 당뇨병에 걸린 엄마에게서 태어난 영양 결핍 아이들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50여 년 전인 제2차 세계대전 말에 있었던 네덜란드의 끔찍한 사건을 보면 이것은 더욱 분명해진다. 독일군에 의해 식량 공급이 극도로 제한된(심한 경우에는 하루 750~450㎉만으로 목숨을 연명) 시기에 임신부 뱃속에서 성장한 태아는 출생시 몸무게가 현격히 적고 키도 작았다. 더불어 주로 어떤 시기에 영양 결핍이 일어났는지가 아기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임신 초기 3개월 동안 영양 결핍 상태에 있었던 아기는 스스로 세포를 적게 만들어 에너지를 보존하여 몸의 크기가 전반적으로 작았고, 몸 전체에 발육 부족이 나타났다. 임신 중기, 즉 3~6개월 동안 영양 결핍 상태에 있었던 아기들은 약간 다른 양상을 보였는데, 이 시기는 생리적 조절 상태에 있으므로 대부분의 영양분을 가장 중요한 뇌로 보내 비대칭적인 성장을 보였다. 출생시 머리가 길고 가늘며 몸에 비해 약간 큰 형태였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배고픈 겨울?이 시작된 무렵에 생겨서 자궁에 머문 기간 내내 영양 결핍 상태에 있었던 아기들이었다. 이 아기들은 키와 머리가 지나치게 작았으며, 몸무게도 심하게 가벼웠다. 그들은 대부분 건강에도 문제가 많았으며, 정상인보다 10배나 높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그 후 5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그들은 출생 전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자궁에서 극심한 영양 결핍 상태였던 아기들은 일생 동안 작은 체구로 살아왔고, 그들의 몸은 세포수가 적어서 정상인보다 굶주림에 잘 견딘다. 전쟁으로 인한 영양 결핍 문제는 아주 극단적인 경우지만, 일상적인 영양 결핍 문제도 아기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출생 전의 영양 결핍은 아기에게 비만과 당뇨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증가하는 비만 문제는 어떤 여성이 20~30년 전에 겪었던 태아기의 영양 결핍 때문에 생긴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비만과 출생 전 태아의 영양 결핍을 연관짓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임신부가 자신의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적게 섭취하면 이것이 태아의 몸 속에 프로그래밍되어 태아에게는 출생 후에 열량을 축적하려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궁 속에서 이러한 신진대사를 익힌 아기들은 성장한 뒤 비만 경향을 나타낸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절약형 신진대사?를 한다고 말한다. 나쁜 자궁 환경이 태아에게 나쁜 영양 프로그램을 입력하도록 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태아가 좀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영양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신체 조건을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아는 엄마 스트레스에 무방비 상태
임신 중의 과도한 스트레스가 자궁 환경에 영향을 주면 태아는 자신의 신체에 어떠한 스트레스 반응 체계를 만들기 때문에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거나 쉽게 화를 내거나 자제력이 떨어지게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호르몬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임신부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많은 양의 코르티솔이 생산된다. 자연스럽게 임신부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는 높은 코르티솔 양에 익숙해지고, 스트레스 조절 장치의 눈금은 높은 수치에 맞춰져 전반적으로 태아의 혈액 속에는 코르티솔 수준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하여 태아는 출생 후에도 높은 코르티솔 양을 유지하게 된다. 즉 높은 수치의 코르티솔을 유지함으로써 과도한 스트레스 반응 상태에 빠져들게 되어 외부의 위험이나 갈등 상황에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그다지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이나 위험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높은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에 작은 일에도 격분하거나 짓궂은 장난을 하는 아이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1990년 데이비드 필립스 박사는 1920년에 영국의 하트퍼드셔에서 태어난 1천 명의 남자들을 조사?연구하여 재미있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진이 그들을 조사했을 때 그들의 나이는 60~70대였다. 연구진은 그들이 태어난 당시의 몸무게 기록과 혈액에 있는 스트레스 호르몬의 일종인 코르티솔의 양을 측정하여, 출산 당시의 몸무게가 가장 가벼운 사람의 호르몬 수치가 가장 높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결과는 태아가 자궁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적게 성장하고 출산 후에도 계속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작용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궁에서 받은 과도한 스트레스는 출생 후 일생 동안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유해 물질은 소량이라도 큰 영향 끼쳐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 빠른 속도로 세포 분열하여 평생 동안 사용할 신체 기관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적은 양의 유해한 화합물도 배아 발생이나 태아 발달에는 독소로 작용할 수 있다. 유해한 성분의 위험은 언제나 존재하지만, 특히 배아 발생 초기에는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들은 미세한 화합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자궁 밖에서 들어오는 화합물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일례로 니코틴이 태아의 성장 방식에 끼치는 영향을 살펴보자. 담배에는 잘 알려져 있는 중독성 물질인 니코틴이 들어 있다. 니코틴은 태아가 성장하는 동안 세포 사이에 전달되는 신호(성장하거나 분열하거나 혹은 소멸하게도 한다)에 작용하는 아세틸콜린과 유사하게 작용하여 정확한 신호 전달을 교란시킨다. 이밖에도 담배의 일산화탄소는 헤모글로빈과 결합하여 산소 전달을 방해하고 태반의 성장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저체중아를 낳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유독 물질에 태아가 노출되었을 때 받게 되는 영향은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앞으로 태아가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기능을 수행하며, 발달된 기관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에 관한 연구가 이뤄질 것이다. 최근 주의력 결핍 장애가 태내에서 미세한 손상이나 알코올 섭취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는 연구 보고가 있었는데, 이 보고만 보더라도 임신 중엔 유해 물질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궁 환경을 보다 쾌적하게 하려면…
포천중문의대 약리학 이수만 교수는 ?아직까지 ?태아 프로그래밍?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가 국내에 없어서 그렇지 많은 의사들이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태교를 중요하게 여겼죠. 아기를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설계도면에 해당되는 것이 유전자이고 자궁은 공장과 같습니다. 기계나 자동차도 공장이 파업할 때 만들어졌을 경우 두고두고 말썽을 부리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라고 설명한다. 출생 후 100년보다 자궁 속 환경이 태아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안 이상 최적의 자궁 환경을 만들어줌으로써 태아의 건강은 물론 출생 후의 평생 건강을 도모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임신부가 태아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별다를 게 없다. 잘 먹고 적당히 움직이며, 스트레스를 최대한 줄이며 즐겁고 편하게 생활하면 된다.
골고루 적당히 먹어야_모든 음식을 규칙적으로 아침, 점심, 저녁 식단에 맞춰 섭취할 필요는 없다. 매일 4회, 5회 또는 6회에 걸쳐 적은 양의 식사를 하는 것이 좋으며, 식사 사이의 간식은 건강을 위해 필요하다.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방식은 특히 임신 초기에 도움이 되는데, 위에 항상 음식물이 저장되어 있어서 위산 분비를 억제해 주기 때문이다. 하루에 여러 번 속이 메스꺼우면 실제로 배가 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이 좋다. 입덧이 심한 경우라면 항상 빵이나 과자 등을 옆에 놓아두고,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먹는다. 임신 중?후기 역시 음식을 하루 종일 소량씩 섭취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은 아기가 자람에 따라 임신부의 위가 수축되기 때문이다.
적당히 운동해야_임신부의 적당한 운동은 임신부 건강은 물론 태아에게도 좋다. 임신부가 운동을 하면 심장 박동수, 혈당 등이 적절하게 변하는데, 이때 태아의 것도 함께 변한다. 이러한 변화는 태아가 출생시에 경험하게 될 자연스러운 스트레스와 새로운 영양 공급에 잘 대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운동은 태아에게 수많은 감각 자극, 즉 움직임, 흔들림, 새로운 소리나 리듬 등을 경험하게 하여 뇌와 신체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운동을 많이 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적정 운동량은 차이가 있다. 평균적으로 일주일에 3~4회, 20~30분 정도 빠른 속도의 걷거나 춤추기, 가벼운 조깅이나 수영 등의 운동이 권장된다. 물론 과도하게 체온이 상승하거나 땀을 많이 흘려 수분이나 염분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스트레스는 최대한 줄여야_임신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안겨주므로 매일 코르티솔(스트레스 호르몬)의 양을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힘들다. 직장일을 하든, 큰 아이를 돌보든, 가만히 있든 임신 중에 스트레스를 전혀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트레스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요인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임신부 스스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한 번 지나간 임신 기간은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 또한 운동이나 참선, 요가 등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 도움을 얻는 것도 좋다.
유해 물질은 무조건 차단해야_알코올과 담배는 태아 건강을 위해서 절대 삼가야 한다. 또한 카페인을 함유한 커피나 콜라 등도 가급적 삼가는 게 좋으나, 만약 섭취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신적 스트레스가 된다면 양을 줄이는 방법으로 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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