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레 폴레- "천천히 해도 결국은 간다"
김광수 <afrikaans@netsgo.com>
          
▲ 물동이를 이고 가다 이웃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아프리카 여인들.사진 출처 : www.allafrica.co.kr  
지난 1992년 겨울 방학 기간 케냐 나이로비에서 겪었던 일이다.
나이로비 국립대학 스와힐리어과 교수인 케네네와 무티소(Kineene wa Mutiso)란 분이 필자가 묵고 있던 숙소에 찾아왔다. 불편한 게 없는지 살펴 보려 온 것이었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 그는 필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다음날 저녁 7시에 숙소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다.
약속 시간에 숙소의 로비에서 기다렸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이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는 대학 교수였고, 한국에서 아프리카어과 초빙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어 한국문화에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현지 아프리카인과는 시간 관념이 다를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1시간 30분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배도 고픈데다, 무료함에 지쳐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입 속으론 ‘험한 말’까지 맴돌았다.
그러다,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슬그머니 걱정되기도 했다.

‘결국 나타나지 않겠구나’ 하며 포기하려는 순간, 로비 입구로 들어서는 그 교수가 눈에 띄었다.
휘적휘적 여유롭고 당당하게 다가와서는 “자, 갑시다!” 하는 것이다. 자상한 미소를 띤 채….
혼란스러웠다. ‘내가 약속 시간을 잘못 알았나?…’
그도 그럴 것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는 한참을 기다렸다는 사실도 순식간에 잊은 채 따라 나섰다.

오후 7시 저녁 약속. 그러나 저녁 식사를 한 시간은 결국 밤 11시 30분이었다.
‘성찬’도 아니었다. ‘차파티(한국의 부침개 같은 것)’, ‘카랑가(고기 스튜)’ , 그리고 맥주…
그게 몇 시간 주린 배를 채운 식단의 전부였다.

행복을 ‘지금 바라보는 이대로’로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아프리카에서 약속을 할 땐 늘 마음을 다잡았다.
“늦게 가야지!…암, 늦게 가야 하고 말고!”
그런데 이제껏 필자는 단 한번도 상대방으로부터 약속 시간에 늦었다는 이유로 책망을 들은 적이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고의적으로’ 늦게 나간 필자보다, 먼저 와서 기다린 아프리카인을 본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프리카에서 약속 시간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비행기다.
아무리 늦더라도, 뜨긴 뜨기 때문이다.
이∙착륙 시간이 ‘2~3시간밖에’ 늦지 않는 경우가 그래도 자주 있으니까…
연발, 연착은 일상적인 일이다. 출발이 늦어진다고, 도착이 지연된다고 안내 방송이 나오는 경우란 없다.
“오겠지…” “가겠지…” 아프리카인들은 왜 늦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기다린다.
우리나라 같으면 난리가 날 터인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세계화한 것은 역시 비행기라는 사실이다.

아프리카인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우리가 느끼는 시간과 다르다.
그들에게 시간은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과도 같다. 아프리카는 ‘정적’인 사회이다.
‘시(time)’보다 ‘상(aspect)’이 더 중요시 되는 사회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빠른 것이 미덕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정확하게,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라는 구호처럼…

우리 사회에서 ‘빨리’라는 시간의 개념은 , ‘욕망의 충족’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인들은 ‘빨리’에서 행복을 찾지 않는다.

아마 우리가 행복을, 끊임없이 ‘충족시켜야 할 어떤 대상’으로 기대한다면, 아프리카인들은 행복을 ‘지금 바라보는 이대로’로 받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들은 ‘행복’이라는 ‘목적어’ 없이, 행복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인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폴레 폴레 은디오 무웬도(Pole pole ndio mwendo.)” - 천천히 해도 결국은 간다.
”하라까 하라까 하이나 바라까(Haraka haraka haina baraka.)” – ‘빨리 빨리’에는 행운이 깃들지 않는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 물론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하라까 하라까 이나 바라까(Haraka haraka ina baraka)” – ‘빨리 빨리’는 복을 가져다 준다.
2002/06/08
김광수 박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Potchefstroom Univ. 역사학과에서 아프리카 지역학(역사와 문화)을 전공하였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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