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억 원의 한 출판사와 5억 원의 200개 출판사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06/03/21

1000억 원 매출의 한 출판사와 5억 원 매출의 200개 출판사.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일까? 얼마 전 '책을만드는사람들'(책만사)에서 이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고 여러 언론에서 그 내용을 크게 다뤘다. 웅진씽크빅 출판부문 최봉수 대표와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가 양쪽의 발표자로 나섰다. 이 토론회는 잡지기획자인 내게도 너무 매력적인 주제인지라 발표문을 뒤늦게 구해 읽어보았다. 그날 참석한 사람들 몇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속마음은 똑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 대표의 주장은 '명쾌'하다. 개별 나라의 사정을 살펴보았을 때"상위 출판사의 시장점유율이 영미권의 경우 랜덤하우스 17퍼센트, 펭귄&피어슨과 사이먼 앤 슈스터가 15퍼센트 등 상위 5개 출판사가 70퍼센트 이상, 프랑스는 아세트와 비방디가 80퍼센트, 심지어 이태리는 몬다도리가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은"단행본 기준 상위 5개 출판사가 5퍼센트 내외다. 민음사계열이 작년에 400억 가까이 매출을 했는데, 시장 점유율은 1.7퍼센트, 1000억 출판사가 나와야 4퍼센트"에 이를 뿐이다. 그러니 규모가 큰 출판사가 나올 필요가 있다는 논리다.

물론 우리 출판계 종사자 중에 이런 주장에 흔쾌히 동의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비난할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한국출판계가 정말로 겸허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느꼈다.

과연 한국출판은 김학원 사장의 발표문에 나와 있는 대로 "전문성의 확보와 최소한 20년, 30년을 한 분야에 매진하는 출판 인력 시스템"을 추구해 왔는가? 작년에 대한출판문화협회가 '1000명의 전문편집자를 키워야 한다'며 국가에서 100억 원을 지원하라는 이른바 '제주도 선언'을 했을 때 '지나가는 소도 웃을 소리'라고 웃고 넘겼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사 직원들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대로 된 대접을 하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출판계는 인력난이 심각하다. 그런데도 '한국형 임프린트'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몇 출판사에는 경력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들 회사는 대기업 수준의 연봉과 인센티브, 그리고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한다고 한다. 위즈덤하우스의 김태영 사장은 회사 경영의 다른 것은 양보할 수 있어도 55세 정년 시스템만큼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지금까지 이 땅의 출판'업자'들은 그렇게 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생각하고 처자식을 줄줄이 회사로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김학원 사장의 주장은 어떤가? 1개 회사보다는 200개 회사가 있을 때 출판물의 다양성이나 창의성, 혁신성을 추구하기 쉽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그의 표현대로"깊이를 통한 두터운 넓이의 개척이며 사유의 세계가 보다 전문적이면서 보다 대중적인 길을 열어갈 희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화려한 수사가 갖는 기만일 뿐이다.

지금 이 땅의 출판풍토에서는 그 같은 일이 99퍼센트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과다 할인경쟁이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는 지금 현실에서 연 5억 원 매출의 출판사가 나도 한몫하자고 나서기는, 더구나 '깊이'마저 갖춘 책을 펴내기는 10년 가뭄에 밭에서 콩 나는 것보다 어렵다.

전문기획자가 '깊이'를 지닌 책을 펴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할인경쟁 체제보다는 도서정가제가 훨씬 유리하다. 그런 구조라야 자본경쟁이 아닌 질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김학원 사장은 지금까지 도서정가제는 변화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갖는 시대착오적 망상이라고 비판해왔다. 따라서 그의 이번 주장은 모순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날 이벤트의 한 참석자가 지적한 바대로 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욕망을 숨겼지만 결국 두 사람의 견해가 같은 맥락이라는 의견에 내가 전적으로 동의한 이유다.

기사게재 : <기획회의> 172호 발행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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