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정말 다른 별에서 온 낯선 종족인가?
-이 금 이
또 딸아이가 짜증을 부린다. 도대체 짜증을 부리는 이유나 확실하게 알았으면 좋겠다. 아니, 아이가 이유를 밝혀도 그것이 내게는 공연한 트집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순간 ‘내가 봉이야?’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한다. 하지만 가족은 서로에게 쓰레기통과 같은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엄마인 내가 봐줄 수밖에. 꾹꾹 눌러 참으며 받아들인 짜증이 쓰레기통 밖으로 넘쳐 흐를 지경이 되면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다.
“나중에 꼭 너 같은 딸 낳아라.”
아, 이건 내가 내 어머니한테 귀에 딱지가 앉게 듣던 대사다. 그래도 찔끔해서 행동을 돌이켜보게 할 만큼의 권위를 지녔던 어머니에 비하면 나는 훨씬 초라하다. 아이가 콧방귀도 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전으로 허를 찔러야지. 나는 의기양양하게 덧붙인다.
“니 딸이 지금 너처럼 하면 그때 내가 니 편 들어줄 줄 알아? 내가 니 딸 엉덩이 두들기면서, ‘괜찮아, 괜찮아. 니네 엄마는 더 했어.’하고 니 딸 편 들어줄 거야. 그렇게 복수할 거야.”
그런데 어째서 어린 시절, 언니도 오빠도 없던 내가 날 때린 사내녀석한테 ‘나중에 우리 고종사촌오빠가 오면 일러줄 거야!’하고 울면서 외치던 모습이 떠오른담. 딸애한테 개미오줌만큼도 위협이 되지 않으리란 감이 온다.
“일러라, 찔러라!”
조롱하던 사내녀석처럼 내 아이도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나는 나중에 자식 안 낳을 건데.”
“왜? 왜 안 낳아?”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엄마가 그렇게 할까봐.”
완벽한 k.o패다. 인정하는 대신 속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괜찮아. 그래도 짜증이 좀 수그러들었잖아. 그리고 애가 엄마 아니면 어디 가서 저렇게 성질을 부리겠어. 철들면 나아지겠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켜봐줘야 하는 것은 어른의 의무다. 청소년 소설 『유진과 유진』을 쓰면서 내가 배운 것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청소년소설이 쓰고 싶었다. 작가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책이 삶의 일부인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문학전집을 시험공부 하듯이 밑줄 그어가며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지금 내 또래 아이들의 삶이 담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동화작가 된 뒤, 주로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한 장편 동화를 쓴 것도 어쩌면 그 아쉬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편동화 『너도 하늘말나리야』도 청소년 독자를 가지고 있지만, 나는 중.고생을 주인공과 독자로 삼은 본격 청소년 소설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기를 내 아이들이 중학생이 된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청소년이었던 때와는 30여 년의 세월만큼이나 달라진 요즘 아이들의 이야기를 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추억에 기대어 내 청소년기를 소재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요즘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라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고백하건데, 첫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청소년에 대한 내 인식은 언론과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미 문제아이거나, 아직은 아니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예비 문제아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해독할 수 없는 언어와 사고를 지닌 다른 별에서 온 낯선 종족처럼 여겨졌다.
나의 첫 청소년 소설은 그러한 선입견이 깨지는 곳에서 출발하였다. 운이 좋게도 우리 아이의 학교는, 시험감독이며, 도서관 사서 도우미, 교통 지도, 급식 지도 등으로 엄마들이 학교에 드나들 기회가 많다. 아이가 입학한 뒤, 드디어 청소년 소설을 쓸 때가 되었다는 의욕에 불타오른 나는 학교의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교실에서 시험감독을 하며, 도서실에서 사서 도우미를 하며 만난 아이들을 통해 나는 그들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종족이 아니라 평범한 내 아이의 또래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선입견이 깨지자 손등을 덮는 교복에 싸인 1학년은 물론, 코밑이 거무스름하고 여드름이 발긋발긋 돋아난 2학년도, 변형시킨 교복으로 나름대로 멋을 부린 채 말년 병장처럼 느물대는 3학년들까지도 모두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이들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3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중학생이었던 나 자신과도 만날 수 있었다. 추억의 편린에 의해 재구성된 모습이 아니라, 사춘기라는 열병을 앓으며 일탈을 꿈꾸었던 그때의 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모호한 경계에 서서, 내미는 어떤 손이라도 덥석 잡고 싶을 만큼 나를 에워쌌던 근원적인 외로움과 불안함까지도 고스란히 기억이 났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어렴풋이나마 아이들을 알 것 같았다. 그들의 낯선 언어와 행동 뒤에 숨겨진 마음은 30여 년 전 아이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이의 국어선생님이 보여준 아이들의 글은 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누가 요즘 아이들을 ‘풍요로움을 누리며 사는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이야기했던가? 익명이어서인지 솔직하고 과감하게 내면을 드러낸 아이들은 상처 투성이의 약자였다. 부모나 선생을 비롯한 어른들의 대다수가 몰이해와 편견, 폭력으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일탈과 방종, 폭력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었다.
아이들의 비명을 들어주고 대신 그 고통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전까지는 ‘성폭력 피해’를 꼭 청소년 소설에서 다뤄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그 어떤 폭력보다 강한 상처를 남긴다. 큰유진이와 작은유진이가 경험한 성폭력 피해를 통해 요즘 아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폭력’과 ‘상처’를 그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어둡고 아프게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자칫, 두 유진과 입장이 다른 아이들에게 공분을 불러일으킬 뿐, 공감을 얻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부딪히는 일상을 담아, 어떤 상처라 할지라도 그것이 삶의 길을 멈추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오랜 시간 머무는 학교는 내게 많은 자극과 영감을 주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었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구체적인 공간 들이 떠올랐으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이 내 등장인물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살아 움직이는 두 유진과 소라를 따라다닌 덕분에 나는 쭈뼛거리지 않고 그들의 일상과 내면을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유진과 유진』에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이 등장한다. 많이 고민했던 부분 중의 하나가 어른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릴까 하는 점이었다. 소설을 읽은 어른들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동시에 바람직한 어른의 길을 찾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적이어서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어른을 그리기보다는 어른들 또한 아이들처럼 여전히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아이와 어른을 모두 경험하였다. 사춘기 소녀에서 엄마를 오가는 동안 나는 내가 저절로 어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동안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지켜봐주었다. 세상이, 그리고 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았으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첫 순간에서 내 삶은 정지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된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과 세월에 빚을 진 존재들이며 빚을 갚아야하는 것은 채무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아무리 요즘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어른이라 할지라도, 한때는 요즘 아이들이던 자신의 과거가 보일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내게 묻는다. 그들은 정말 다른 별에서 온 낯선 종족인가?
내가 쓰고자 하는 청소년 소설은 앞으로도 그 질문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위 글은 월간 『어린이와 문학』2005년 8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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