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금이 작가의 창작노트

밤티 마을 사람들



우리들은 종종 인기리에 방영되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결말이나, 등장인물이 맡은 역할의 비중이 열혈 시청자들에 의해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자본주의의 한복판을 살고 있는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소비자와 동급으로 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극히 대중 지향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엄연히 창작 예술품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드라마에조차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격세지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기억이 하나 떠오르는군요.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열망으로 가득 찼던 등단 초기 시절의 일입니다. 한창 즐겨 보던 드라마에서 주연 배우가 개인 사정으로 출연을 중단하여 극의 내용이 바뀐 다음 나는 더 이상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습니다. 작가의 극본이라는 창작품이 외부의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못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창작 예술품이란 그것을 생산해 낸 작가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절대적 가치를 지닌 대상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는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초판, 대교출판, 1994)을 읽은 독자들의 후속편 요청이 낯설기만 했습니다. 그저 책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라고 고맙게 여겼을 뿐 내가 정말로 뒷이야기를, 그것도 두 편이나 더 쓰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지요.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의 계속되는 요청은 내게 강한 영감과 자극을 주었고, 이미 끝난 것으로 여겼던 큰돌이와 영미의 여정을 계속 지켜보게 만들었지요. 나는 그제야 그들과 그 가족에 대해 할 이야기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나보다 독자가 먼저 알아차린 것이지요.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말은 어쩌면 캐릭터의 생명력이 남아 있다는 말과도 같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 인물을 만들어 낸 작가라 할지라도 자신의 역할을 모두 끝낸 등장인물을 강제로 이끌고 갈 수는 없으니까요.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처음엔 한 편의 장편동화였다가 결국 세 편의 연작 중 첫째 권이 돼 버린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의 캐릭터들은 실제 인물들을 모태로 해서 태어났습니다. 1년 남짓 보았던 이웃 아이들이 모델이었던 큰돌이와 영미는 실제로는 누나와 남동생이었지만, 엄마의 부재와 아버지의 폭력 속에서도 서로 아끼고 정을 나눔으로써 고된 일상을 견뎌 나가는 모습을 더욱 절실하게 그리기 위해 오누이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큰돌이와 영미처럼 두 살 터울의 오누이였던 내 아이들의 모습이 투영돼 좀더 생동감 있게 그릴 수 있었지요. 아버지를 실제와 비슷한 상황의 인물로 했다면, 약간의 정신지체가 있을 뿐이었던 할아버지는 신체장애를 가진 인물로 바꾸었습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 때문에 아이들에게 방패막이가 돼 주지 못하는 현실은 물론, 헤진 담요처럼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표현해 노인의 소외 문제까지 다루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강한 생명력과 매력을 갖게 되리라고 나 자신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팥쥐 엄마는 먼 일가 아주머니를 보고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아주머니는 철없는 나이에 미혼모가 되었던 이력 때문에 세 살짜리 막내둥이를 비롯해 아이들이 일곱이나 있는 집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15년 동안이나 늙은 시어머니와 가족들을 건사했지만 ‘새엄마는 나쁘다’는 고정관념과 편견 때문에 아이들로부터 제대로 어머니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결혼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가슴 속에 가득한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화병만 든 채로 말입니다.
실제로는 친엄마를 따라간 아이들을 그냥 밤티 마을에서 살게 하고 싶었던 나는 대신 큰돌이네 집에 새엄마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일가 아주머니의 불행한 개인사에 마음이 퍽 아팠던지라, 돌덩이처럼 굳어 있는 새엄마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트리는 심정으로 팥쥐 엄마를 그렸지요. 큰돌이네 새엄마에게 역설적으로 못된 계모의 상징인 ‘팥쥐 엄마’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는, 그네가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큰돌이네 집을 바꿔 나가는 모습을 그렸던 것입니다.
팥쥐 엄마는 30대 중반이 넘도록 여기저기 떠돌며 외롭게 지내다 장애인 시아버지에, 애가 둘이나 딸린 시골 남자와 결혼하는 인물입니다. 그런 캐릭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곰보에다 껑충하게 큰 키, 남자처럼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인물로 만들었지만, 팥쥐 엄마는 오히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매력으로 여겨지게 할 만큼 눈부신 활약을 벌였습니다. 마치 내가 꺼내 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흥겹고 신나게 말입니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팥쥐 엄마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네가 부리는 요술을 옮겨 적었습니다.
큰돌이와 영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방패막이가 돼 주지 못하는 할아버지, 어디론가 떠나 버린 엄마, 영미를 위한 입양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오누이를 생이별 하게 만든 쑥골 할머니, 영미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던 양부모 등 여러 어른들의 굴절된 모습을 그려 내느라 몹시 힘들었던 나는 점점 팥쥐 엄마에게 마음을 기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은 큰돌이의 친엄마를 돌아오게 하려던 애초의 계획까지도 바꾸게 했지요. 큰돌이와 영미가 없는 밤티 마을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팥쥐 엄마가 없는 밤티 마을 역시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밤티 마을 영미네 집

큰돌이와 영미라는 캐릭터는 실제 인물에 대한 동정과 연민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불행하고 버겁게 보였던 그들의 현실을 동화 속에서나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 소박한 마음이 최초의 모티프였으니까요.
그에 비해 『밤티 마을 영미네 집』(초판, 푸른책들, 2000)은 첫째 권인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을 기반으로 해서 시작했기에 실제 체험에서 오는 구속감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좀더 자유롭게 큰돌이와 영미를 그릴 수 있었지요. 입양 갔다가 집으로 되돌아온 영미는 팥쥐 엄마는 물론 전에 두려움을 느끼던 아버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큰돌이와의 관계에서도 그 위상이 바뀌었습니다. 양부모에게 받은 사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지요. 밤티 마을로 되돌아와서도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역시 양부모 못지않은 팥쥐 엄마의 사랑 덕분입니다.
큰돌이는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친엄마와의 약속과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팥쥐 엄마에게 끌리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느낍니다. 나는 ‘약속’보다는 ‘마음’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뭉클뭉클 느껴지고, 출렁출렁 움직이는 현재의 마음을 화석처럼 굳어 버린 오랜 약속으로 눌러 두기엔 큰돌이가 아직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 동안 너무 힘들게 살아왔으니까요.
어린 독자들은 『밤티 마을 영미네 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이 큰돌이와 영미를 괴롭히는 재광이네 형제를 팥쥐 엄마가 혼내 주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나도 그 장면을 쓸 때 무척 신이 났습니다. 양손으로 재광이네 형제의 뒷덜미를 하나씩 잡아 올려 공중에서 부딪치는 장면이 다소 과장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썼습니다. 그 동안 어른 못지않은 질곡의 삶을 건너온 큰돌이에게 가슴 뻥 뚫리는 순간을 맛보게 해 주고 싶었고, 영미가 팥쥐 엄마에게 마음을 여는 계기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독자들이 팥쥐 엄마의 구원자 같은 모습에 환호를 보냈다면, 어른 독자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전히 희생하려는 팥쥐 엄마의 모습이 가장 마음에 남는다고 합니다. 나는 친엄마의 갑작스런 출현에 팥쥐 엄마가 큰돌이네 집을 떠날 결심을 하고는 할아버지의 머리를 깎아 주며 혼잣말을 하는 장면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그 동안 동적인 모습만 보여 주던 팥쥐 엄마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는 귀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 왔던 팥쥐 엄마가 듣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에게 소리내 말하는 장면을 통해 그네가 겨우 얻은 행복에 대해 집착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결국 팥쥐 엄마는 그 동안 보여 주던 성품대로 아이들의 친엄마에 대해 모르는 척하고 싶은 갈등과 욕심을 할아버지의 머리와 손톱을 깎아 주면서 함께 잘라 버립니다.
그리고 『밤티 마을 영미네 집』에서 그리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가족 내에서의 비중 있는 결정과 선택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만날 나만 보내는 거야. 왜 나만 미워해?’ 하고 울며 소리치는 영미의 항변을 통해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다 오빠만 좋아해. 사람들두 다 큰돌이 아버지, 큰돌이 할아버지라구 부르구, 우리 집두 큰돌이네 집이라구 부르잖아.’
영미의 아이다운 엉뚱한 말에 식구들은 피식 웃지만 나는 나름대로 우리 사회에서 또다른 약자인 여성의 모습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전편인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개정판(푸른책들, 2004)을 내면서 마음에 걸려 고쳤지만, 초판에서도 큰돌이가 대를 이을 아들이라 집에 남고 영미가 입양돼 가는 것으로 설정했었습니다. 팥쥐 엄마 역시 여자에다 곰보 자국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남의 집으로 떠돌다 결국은 가족을 잃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하기에 충분한 팥쥐 엄마의 파란만장한 개인사는 큰돌이네 가족을 위해 자신의 행복조차 포 기할 수 있는 캐릭터의 근간이 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어른들의 결정에 힘없이 휘둘리기만 하던 큰돌이는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합니다. 집을 떠난 팥쥐 엄마를 찾아나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 낸 『밤티 마을 영미네 집』(개정판, 푸른책들, 2005)은 별다른 노력 없이 얻었던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보다 훨씬 값진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밤티 마을 봄이네 집

『밤티 마을 봄이네 집』(푸른책들, 2005)에서는 새롭게 만들어진 가족이 완전하게 자리잡아 가는 과정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팥쥐 엄마가 낳은 봄이는 팥쥐 엄마와 가족을 더욱 견고하게 이어 주는 끈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갈등의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봄이를 시샘하는 영미에게 화를 내는 큰돌이는 속으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줄도 아는 소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앞의 두 권에서 겪은 일들이 큰돌이를 부쩍 자라게 한 것이지요. 동생을 본 여느 아이들이 하는 대로 통과의례 같은 진통을 겪던 영미는 팥쥐 엄마 얼굴에 흉터를 남긴 것 같은 수두를 앓고 난 뒤에야 팥쥐 엄마와 봄이에게 느끼던 거리감을 떨쳐 버립니다.
새로운 가족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재혼을 한 친엄마의 가족까지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처럼 새아빠도 엄마한테 잘 해 주나, 혹시 나처럼 친엄마의 새 아이들이 속을 썩이지는 않나…….’
큰돌이와 영미 오누이에게 더 이상 친엄마와의 만남은 두렵거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닙니다. 서로의 행복을 확인하고 빌어 주는 시간인 것입니다.  
<밤티 마을> 연작의 완결판인 『밤티 마을 봄이네 집』에서는 그 동안 함께 해 온 등장인물들에게 고루 마음을 쏟았지만 그 중에서도 더 신경을 쓴 캐릭터가 있다면 할아버지입니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아 장애인이 된 할아버지의 일생이 얼마나 굴곡진 삶이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면서 죄스러운 아들이 된 할아버지는 미안한 아버지에서 부끄러운 할아버지로 한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열병을 앓기 전에 경험했던 소리에 의지해 사람과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잔뜩 움츠러져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고 어루만져 준 사람이 팥쥐 엄마입니다. 본인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의 존재감을 일깨워 주고 인정해 준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더구나 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더욱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었기에 할아버지는 새로운 삶을 사는 듯 활기에 찼습니다.  
고추 농사가 잘 돼 기대에 부풀어 있는 큰돌이네 가족에게 태풍이라는 시련을 겪게 하는 일은 참 힘들었습니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 피붙이처럼 정이 들어 버린 그들의 꿈을 짓밟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행복의 가치를 점점 물질적인 것에 두고 억척을 떠는 팥쥐 엄마가 더 변하기 전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어 독해지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독해지지는 못하고 태풍이 몰아치기 전날 밤, 큰돌이와 영미로 하여금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게 했지요. 오누이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들이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그 고통이 담금질이 돼 이 가족을 더욱 단단하고 빛나게 하겠구나.’
하지만 나는, 희망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시련 앞에서 쉽사리 꺼져 버린다는 사실을, 또한 희망은 시련과 함께 사라진 그것을 기억하고 되찾으려는 사람에게만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입니다. 나는 그 때까지 할아버지가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은 오로지 팥쥐 엄마 덕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삶의 진리를 들려 주는 일을, 감초 같은 역할로 처음부터 함께했던 쑥골 할머니의 몫으로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른 가족들은 물론 팥쥐 엄마조차도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을 때 할아버지는 자신이 할 일을 알아 냈습니다. 등장인물들 중 가장 힘든 삶을 살았음이 분명한 할아버지는 이들 가족이 만난 큰 시련 앞에서 이미 단단해진 쇳날이 돼 희망을 캐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다 하려면 당신의 남은 평생이 걸려도 모자랄 것 같은 동작으로 태풍이 휩쓸고 간 고추를, 아니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나는 뜨거워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그분의 존재를 가슴 가득 느꼈습니다.
그리고 책이 나온 뒤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자신의 상처 때문에 아이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밉고 싫었습니다. 내게는 잘 이해도 되지 않고 용서도 할 수 없는 캐릭터였기에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보다는 멀찌감치 밀어 내려고만 들었지요. 하지만 그 역시 따뜻한 부성애를 가진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밤티 마을 봄이네 집』에 이르러서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봄이에게 보여 주는 애정은 봄이의 출생과 함께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큰돌이와 영미를 키우며 체득한 것이지요. 다만 큰돌이와 영미에게는, 그 자신도 상처투성이의 삶 가운데 놓여져 있던 터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좀더 섬세하게 담지 못한 것이 작가로서 못내 아쉬울 따름입니다.

<밤티 마을> 연작은 한 가족의 성장사입니다. 책 밖에서는 10여 년의 세월이, 책 안에서는 4년 남짓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등장인물들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어 사건을 벌이고 겪어 나갔습니다. 자신들을 향한 독자들의 사랑과 관심에 신바람이 났던 게지요. 그 세월 동안 그들과 어울려 희로애락을 겪으며 작가인 나도 함께 성장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초판을 낸 출판사가 달라 책마다 달랐던 그림이 두 권의 개정판과 『밤티 마을 봄이네 집』의 출간과 더불어 통일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뚜렷한 이미지의 캐릭터가 생긴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특히 제목은 『밤티 마을 봄이네 집』이면서도 너무 어린 탓에 구체적인 캐릭터로 형상화되지 못했던 인물 봄이를 앙증맞은 모습으로 아장아장 걷게 해 준 것은 작가가 아니라 화가입니다. 내 마음 속의 풍경보다 더 풍요롭고 따뜻하게 그림으로 표현해 준 화가 양상용 씨도 <밤티 마을> 연작을 완성하는 데 큰 힘을 보태 주었지요.  
밤티 마을에는 이 모든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위 글은 <동화읽는가족> 2005년 겨울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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