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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天空을 어깨에 떠받치고 있는 아틀라스처럼
한미화|출판칼럼니스트 bangku@dreamwiz.com
사정은 이렇다. 『철학통조림』이라는 청소년을 위한 철학책을 읽다보니 청소년만 읽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이 시대를 어떻게 쉬크하게 살아야 하는가가 늘 관심사지만 때로는 본질적인 이야기도 필요하다. 『철학통조림』에는 그런 본질이 있었다. 더구나 청소년이 읽을 수 있도록 썼으니 예시와 비유가 풍부해 나처럼 교양이 부족한 사람에게도 적절했다.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으니 혼자 읽기는 아깝고 소개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정작 이 책을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은 작가와 아나운서의 반응은 싸늘했다. 성인대상 프로그램에서 소개하기는 부적절하다, 청소년책을 어떻게 성인대상 방송에서 소개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정말 이 책을 소개할 거냐고 심각하게 되물었다.
자존심이 좀 상한 나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내가 고른 『철학통조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우일의 일러스트를 사용한 표지와 제목이 너무 튀어서 가벼워 보였나. 본문 안의 일러스트나 딸과 아빠의 대화형식 등이 성인이 읽기에는 수준이 낮은 책이라는 인식을 줬는가. 책의 내용이 아니라 외양에 집착한 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청소년책을 성인이 읽으면 안 된다는 건 마치 그림책을 어린이만 보고, 만화책을 초등학생만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기합리화는 이렇게 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소개할 책을 교체했으니 귀한 책을 협찬해준 출판사에 어떻게든 진상을 밝히고 사과를 해야 했다. 게다가 이 책을 출간한 푸른그대는 달랑 『철학통조림』 두 권을 이제 막 펴낸 신생출판사였다. 실망도 클 것이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출판사의 대표와 저자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철학통조림』의 저자인 김용규 씨는 이미 『알도와 떠도는 사원』 『다니』 그리고 『영화관 옆 철학카페』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등 일련의 대중 철학서를 펴낸 저자이다. 그런 그가 푸른그대라는 출판사를 내고 첫 번째로 낸 책이었다.
저자이자 출판사 대표인 김용규 선생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과를 구할 겸해서 아예 저자가 출판사 대표로 변신한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마음 먹었다. 이것이 『철학통조림』을 인터뷰하러 간 사정이다.
한 인터뷰를 위해 집을 방문한 적은 처음입니다. 선생이 쓰신 책의 서문에 보면 '청파동에서' 하는 마무리 글이 보이던데, 거기서 말하는 청파동이 여기군요. 김 5년 넘게 청파동에서 살았습니다. 집사람이 피아노를 전공하는데, 그런 연유로 피아노 소리 때문에 아파트에서 살 수가 없어 단독주택에 살고 있습니다. 단독주택에 사니 집에 온다는 생각이 더 들겠지요.
한미화(이하 한) 『철학통조림』에 나오는, 골치 아픈 질문 던지기가 취미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기가 특기인 딸과 함께 사는 집이 바로 이 집이겠군요. 딸이라는 독자 대상이 분명하니 책을 만드는 작업이 앞의 작업들보다 쉽지는 않았는지요. 김용규(이하 김) 독일 유학중에, 그러니까 제 나이 마흔에 딸을 낳았어요.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으니 공부하는 중에는 아이를 갖는 일을 엄두도 못 내다가 많이 늦었지요. 집사람이 마침 공부를 일찍 시작해서 독일에서 일을 하던 때 아이를 낳았는데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던 제가 딸아이를 목욕시키고 우유를 먹이면서 길렀어요. 그래서 마치 엄마와 딸처럼 아이와 저는 붙어 지내는 시간이 많았죠. 아이가 작년에 중학생이 됐는데, 집사람과 딸아이가 아빠는 왜 다른 사람은 종종 가르치면서 딸은 안 가르치느냐는 항의를 하더군요. 그래서 일요일마다 두 시간씩 딸아이를 가르쳤어요.
한 결혼하고 나서 뼈저리게 느낀 것 중 하나가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지 말라인데, 아버지와 딸의 수업은 원만했나봅니다. 책으로 나왔으니까요. 김 웬걸요.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생각하니 난감합디다. 전문용어도 모르고 무엇보다 아이의 어휘력이 부족하더군요. 그래서 아이를 위해 전문용어를 풀고 예를 넣으면서 새롭게 강의안을 매주 한 편씩 준비했어요. 사람들이 철학을 어려워 하는 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철학자들이 개념을 엄밀하게 사용하길 바라기 때문이죠. 철학자는 자기가 말한 단어가 다른 철학자 누가 사용한 단어와는 다른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고 할 때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철학자가 생각하는 사랑은 틀린 거죠.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말을 두고도 현존재라고 했잖아요. 인간이라는 말에는 이미 선입관이 있다고 생각하니 자기만의 개념을 만든 건데 이러니까 일반인에게는 당연히 생소하고 어려운 거죠. 두 번째 이유는 철학자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보편적인 인간이 사랑에 대해 갖는 개념으로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소설가가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한다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특별한 사람의 특별한 사랑으로 말하지만 철학자들은 인류보편적 사랑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일반인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이야기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요. 거기서 간극이 오는 겁니다.
한 맞아요. 일테면 예가 들어가지 않은 글을 읽기가 어려워요. 김 그래서 아이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개념은 일상용어로 풀고, 소설이나 주변의 사례 등 구체적 예를 들었습니다.
『철학통조림』에는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라는 꼭지가 있다. 이걸 좀 폼 나는 말로 바꾸면 '실존주의란 무엇인가'로 바꿀 수 있다. 딸아이가 아빠에게 “우리는 왜 사는 건가요”하고 묻는다. 그러면 아버지는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라는 책을 통해 실존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까뮈는 인간에게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은 아무런 보람도 희망도 없는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며 이를 시지프의 형벌이라고 불렀다.
시지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영원토록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는 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한다. 신들이 시지프에게 준 이 형벌은 무의미한 노동이었지만, 시지프는 이 노동에 반항함으로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했다. 까뮈는 인간의 삶에는 본래부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시지프처럼 스스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줄 때만 의미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철학통조림』은 추천목록에 올라있을 법한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나 사르트르의 『구토』 같은 고전 이야기를 통해 철학의 개념을 풀어주니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철학적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더불어 고전을 접해야 하는 청소년에게는 맞춤하다.
저자가 출판사 대표가 된다는 일은 어떤 것인가 한 책은 얼마나 파셨습니까. 김 이번 책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중학생도 읽고 이해한다고 하더군요. 주위 분들도 나쁘지는 않다고 하는데, 판매는 미미합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정도 됐는데 2쇄까지 찍었습니다. 두 권이 5천 질 정도 판매된 거지요. 저는 책이 좀 불운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언론에서 아무도 주목하질 않더라고요.
한 아니죠.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셨잖아요. 김 인터뷰를 하기는 했는데, 왠지 책이나 저보다는 일러스트를 그린 이우일 씨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거든요.
한 아마도 청소년책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언론의 반응이 없었던가 보군요. 김 책이 나오고 나서 물어보니 북섹션 담당 기자들은 이 책을 논술용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예 리뷰 대상에서 배제한 듯합니다. 책을 출간하고 나서 대형서점에서는 비소설 코너에 깔렸어요. 그런데 철학책이라 비소설 코너보다는 인문 코너가 적합하겠다 싶어 자리를 바꾸는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저는 『철학통조림』을 출판하면서 청소년책의 운명 같은 걸 몸으로 겪은 셈입니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니 청소년에 맞는 컨셉트로 재미나고 쉽게 만듭니다. 그런데 청소년책이라서 신문과 방송 등의 매체가 일단 거부감을 표시하고 당연히 홍보가 전혀 안 됩니다. 그렇지만 다루는 주제는 인문적 지식이라 성인과 청소년 모두 읽어도 좋을 법합니다. 그러니 청소년 코너가 따로 없다면 인문 코너에 놓이게 됩니다. 그런데 인문서적을 사러오는 3-40대의 남성독자가 보기에는 애들 책이라고 여겨 손이 가질 않는 거지요. 실제로 모 출판사 사장님은 지금이라도 책을 전량 폐기하고 품위 있는 인문서적으로 다시 출간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하더군요.
한 제가 푸른그대를 인터뷰 상대로 고른 이유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렸고 다른 하나는 김용규 선생께서 여러 권의 책을 내신 필자인데, 『철학통조림』으로 직접 출판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이에요. 왜 하셨는지, 해보니 어떤지가 궁금합니다. 김 제가 출판을 한다고 하니 다들 말리더군요. 막 시작했을 때 어느 출판사 사장님과 식사를 했는데, 출판사를 하려고 한다니 대뜸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출판이란 문화적 취향이 있는 사람들이 1억 정도 들고 왔다가 기부하고 나가는 일이다”라고요.
한 사장님께 말씀을 주신 출판사 사장님 역시 1990년대 중반 출판사를 시작하실 때 주위 선배들에게 같은 말을 들었을 겁니다. 김 그렇다면 제가 능력이 없는 거겠지요. 어쨌거나 제가 출판을 하게 된 것은 여러 이유 때문입니다. 어쩌다보니 쓰게 된 책 말고 필자로서 정말 쓰고 싶은 책을 출간하고 싶었어요. 또 명함을 갖고 싶었어요.
한 필자라는 이력이 있는데 명함이 없으면 어때요. 소설가들이 명함을 들고 다니나요. 김 제게 별명이 있습니다. '오무五無 선생'이라고. 없는 게 다섯 가지라는 건데요. 명함, 자가용, 핸드폰, 신용카드, 이메일 주소가 없어요. 나머지야 그렇다 치고 필자가 메일이 없는 걸 의아해 하지만 상업화된 인터넷 환경이 지겨워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을 안했어요. 마흔 살 무렵 한국으로 돌아와 신학대학에 잠깐 자리를 잡았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1997년경부터 죽 집에서 생활했어요. 옛날에 어머니가 여자도 오십이 넘으면 부엌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제가 학교에 나가는 아내를 대신해서 부엌일을 한 것이 쉰 넷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매달리고 싶다는 바람이 출판으로 저를 내몰았죠.
김용규 선생은 198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프라이부르크대와 튀빙겐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고 몇 년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면서 박사 학위를 포기했다. 결국 박사학위 없이 귀국한 탓에 대학에 자리를 잡기는 어려웠고 논술 지도교사를 대상으로 철학사상을 강의하게 되었다.
첫 책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론과실천)은 부업으로 했던 논술지도의 결과이다. 철학을 아이들에게 가르쳐보니 아이들이 통 흥미를 보이지도 않거니와 꾸벅꾸벅 졸아서 아이들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한참 판타지 소설이 유행할 때라 그런 소설들이 열거됐고 김용규 선생도 따라 읽었다. 판타지 소설이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그래서 환상적 이야기 속에 철학적 지식을 담아 강의한 내용을 한 꼭지씩 만든 것이 바로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이론과실천) 역시 일반인들에게 철학 강의를 했던 결과물이다. 중년 주부들을 대상으로 철학 강의를 하게 됐는데, 역시나 철학이야기를 재미없어 했다. 중년 여성들이 문화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나 살펴보니 영화였다. 자신이 유학 전에 본 영화라야 <람보> 정도 수준인데 그들은 타르코프스키나 앙겔로플로스의 작품 같은 예술영화를 즐겨본다는 사실을 알고 그때부터 그런 영화들을 찾아봤다. 그리고 영화에 철학을 얹어 강의를 했다. 그 강의록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김 제가 명함이 갖고 싶다, 부엌에 들어가기 싫다 등으로 출판을 시작한 이유를 말했지만, 아마도 필자로서 혹은 생활인으로 사는 데 한계가 분명하니 차라리 내가 출판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던 거지요. 집사람이 학교에 나가니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는 아니지만 사회적 수입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순전히 책만 써서는 충족할 수가 없어요. 제 또 다른 별명이 연봉 삼백입니다. 일년 동안 글 써서 책 한 권 내고 인세 300만원 받는다고 해서 붙은 별명입니다. 단행본을 쓸 때 시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필자로서 책을 쓸 때 다른 사람도 쓸 수 있는 책을 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내가 아니면 태어날 수 없는 책을 쓰고 싶지요. 그건 구태여 글을 쓰는 사람의 자존심이겠죠. 굳이 단행본을 내고 싶은 저자가 있다면 그건 자기만 쓸 수 있는 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행본은 시장을 무시하고는 쓸 수가 없어요. 제가 내고 싶은 책도 받아주는 출판사가 있어야 출간이 가능하니까요. 그러다보니 결국에는 남들도 다 쓰는 책을 쓰게 됩니다. 출판사에서는 늘 그러지요. 국내에 저자가 없다고요. 그러나 우리 시장은 국내 저자들이 쓰고 싶은 책을 쓰도록 허락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제가 살다온 독일은 우선 책의 가격이 우리보다 10배는 비싸요. 강의 안 해도 책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가 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다 빈치 코드』처럼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한 권의 책만 보고 말지요. 다른 책은 천 명의 독자도 사 보지 않아요. 그러나 독일에서는 독자들이 다양한 책을 사서 봐요. 그러니 책을 써서 존경도 받고, 먹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 환경이 마련되어 있으니 다양한 책도 나올 수 있는 거고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이 필자가 시장을 염두에 두고 책을 써서 잘 팔리고 책의 질도 높아지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아요. 시장을 염두에 두면 둘수록 책의 질은 떨어져요. 국내 저자를 보고 함량이 부족하다고 그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요. 저 역시 쓰고 싶은 책은 엄두도 못 내고 어떻게, 많이 팔리지 않을까, 하고 『철학통조림』을 냈던 게 아니겠습니까. 이 책이 대중 철학서로서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책은 아닙니다. 대학 교양과정의 윤리학체계를 담고 있으며, 고전작품을 예로 들고 있는 의미가 있는 책입니다.
국내에서 전문 필자로 산다는 일 한 처음 선생의 존재감을 알린 『알도와…』는 연작예정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후속편이 나오지 않은 것은 왜입니까. 김 지금은 제가 출판사를 시작했으니 그나마 출판에 대해 참 많은 걸 알게 된 셈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책도 잘난 사람이나 출간하는 걸로 알았어요. 어찌어찌 이론과실천으로 원고가 갔는데, 김태경 사장이 『알도와…』을 무척 좋아했어요. 그가 그동안 이런 지식소설을 찾았던 거죠. 그러면서 제게 과도한 희망을 주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이론과실천이 사업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였는데 저는 그런 걸 몰랐어요. 당시 김태경 사장의 개인적 바람 위에 제 책이 놓여져서 과도하게 평가되었던 것인데 그걸 저는 액면 그대로 다 진실로 받아들였어요. 근거 없는 희망이 커지다보니 나중에 절망도 그만큼 컸습니다.
한 『알도와…』은 당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던 걸로 아는데요. 책의 판매는 부진했었던가 보군요. 김 8천 질 정도 팔렸습니다. 당시 이 책을 두고 김 사장은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이원호의 『밤의 대통령』의 원고를 처음 접했을 때만큼 흥분된다고 평했어요. 그야말로 초 밀리언셀러를 기대한 거지요. 저와 김 사장이 공동으로 환상을 갖고 책을 바라봤으니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 그래서 후속작업을 안 했지요. 후속작업을 위해 밑그림을 그려두었던 원고가 올 여름에 나온 『다니』(김성규 공저, 지안출판사)입니다. 원고에서 『알도와…』에서 다룬 부분을 제하고 책을 냈지요.
한 보통 소설은 동생과 함께 작업을 하고, 나머지 책은 혼자 작업을 하시더군요. 김 보통 제가 스토리라인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갈 지식을 간추리면 동생이 서술과 묘사를 도와주지요. 『알도와…』 때에도 동생이 도와줬지만 이름 밝히기를 거부했어요. 『다니』는 10년 전에 동생이 제인구달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쓴 중편이 바탕이 됐어요. 아주 서정적인 작품이었는데, 중편이니 책으로 내기도 애매해서 묵혀 두었던 원고죠. 그래서 그 소설을 기본으로 하되 주제를 환경문제로 잡고 다시 틀을 잡았어요. 『다니』는 동생 이름으로 출간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제가 이름이 알려졌다고 출판사에서 반대를 하는 바람에 공동이름으로 나왔어요. 사실 『다니』를 시작으로 동생을 공적인 글쓰기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는데 이 책 역시 판매가 그저 그렇습니다. 연봉 삼백 수준인 인세를 반으로 나누니 수고비도 안 나오지요. 동생이 앞으로는 형님이나 글 많이 쓰라고 하니 제가 할 말도 없더군요.
한 그렇지만 작년에는 『다 빈치 코드』 같은 팩션이, 올해는 최인호의 『유림』처럼 소설이지만 지식이 앞선 책들이 인기를 얻었으니 지식소설을 좀 더 쓰실 생각은 없나요. 김 저는 문학하는 사람도, 문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일년에 소설 몇 권 정도를 읽기는 합니다. 귀국해서 간헐적으로 소설을 사서 읽긴 했는데 그때 한 생각이 언제까지 이런 이야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싶더군요. 인간의 내면 즉 정신세계가 욕망과 감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사람에 따라서는 이성적 사고로 구성되어 있기도 해요. 그런데 왜 유독 소설은 감성만 조명하는가 싶었어요. 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내면이나 자아가 규정되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규정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건 결국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니까요. 지식소설을 내면서 이런 식의 접근이 다른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문단에서는 지식소설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듯해요. 『다니』를 두고 지식소설이라고 하면 다른 소설은 지식이 없다는 거냐는 반응이지요.
독일사전과 우리사전을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는 명사가 많고 적다는 것이다. 독일은 명사가 많아 학문하는 사람이 개념을 내세우기가 쉬운데 우리는 반대로 형용사가 많다. '빨갛다'라는 말 하나만도 여러 가지 형용사로 표현된다. 아마도 이런 차이가 감성적이고 애잔한 소설을 좋아하는 국민성과도 연결되지 않는가 싶다. 영화로 말하자면 <너는 내 운명> 아니면 <가문의 영광>을 선택하는 식이다. 대중은 슬프거나 웃기는 영화를 좋아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추리소설이나 SF가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해할 만하다. 대중이 드라마를 좋아하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소설이 큰 인기를 얻는다는 게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 이왕 출판을 시작하셨는데 계속 하실 건가요. 김 제가 생각하는 책을 출판을 통해 구현할 수도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막상 해보니 뜻대로 되지는 않더군요. 표지나 책의 컨셉트만 해도 출판을 한다고 다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요. 게다가 만 권이라는 책이 모두 시장에 출고됐지만 자금은 거의 회수가 안 되고 있어요. 모 도매상애서는 책을 가져가고 아직 한 푼도 결재를 안 해요. 제가 출판계에 특별한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니 외상거래도 안 되고요. 출판을 시작했지만 고민 중입니다.
책을 내고 반응이 없을 때 가장 상처를 받는 것은 자존심이며, 그로 인해 깊어지는 것이 자기 환멸이다. 여기에 대해 김용규 선생은 영화로 보는 철학책을 세 권이나 출간한 저자답게 타르코프스키 이야기로 답을 했다.
영화사에 남는 감독으로 기억되는 타르코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다. 천공을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가 위대한 것은 오랫동안 그런 일을 해서가 아니라, 언제든 던져버릴 수 있지만 자기 환멸에 빠지지 않고 그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소련의 억압으로 평생 7편의 영화밖에 만들지 못한 타르코프스키는 서방세계로 나와서도 상업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예술이라는 신념을 위해 살았다. 그러나 신념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회의와 자기 환멸이다. 일을 하다보면 이게 옳은 일인가, 내가 과연 옳게 살았는가 싶은 환멸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타르코프스키가 그랬듯 혹은 아틀라스나 시지프처럼 우리 모두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를 찾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니까.
기사게재 : <기획회의> 32호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