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하우스 허윤형 사장
등록일 : 2005/11/07
이야기꾼의 시대를 꿈꾸는 출판인

김현미_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짐 꾸리기의 마지막 절차는 책을 고르는 일이다. 쌓아놓고 바라보기만 하던 책들을 이번 기회에 몽땅 읽을 듯한 기세로 서가를 훑어보지만, 트렁크의 빈 공간이 허용하는 책은 기껏해야 두세 권. 이제 미인대회 심사를 하듯 요모조모 따진다. 휴가지에서 읽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내용이어서 탈락, 하드커버는 무게 때문에 탈락, 책이 너무 커도 탈락.

역시 작고 가벼운(무게도, 내용도) 책이 제격이다. 짧은 여행일수록 심사기준은 더 엄격해진다. 이렇게 해서 지난여름 퍼트리샤 콘웰의 『사형수의 지문』 『카인의 아들』 『시체농장』이 차례로 나의 여행에 동반했다. ‘스카페타 시리즈’라고 불리는 콘웰의 소설들은 작고, 가볍고, 재밌어서 위의 기준을 다 통과한다. 깔개 하나 들고 한강변에 나갈 때도 부담 없이 콘웰의 소설에 손이 간다. 신간이 나오면 재빨리 챙겨두기 시작했다. 슬슬 중독의 조짐이 보인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노블하우스’라는 낯선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2004년 2월 11일 출판등록. 올해로 2년째를 맞는 신생출판사다. 하지만 갖고 있는 목록이 만만치 않다. 법의학 스릴러 분야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퍼트리샤 콘웰 외에도 테크노 스릴러의 거장 톰 클랜시, 현재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로 꼽히는(그러나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히가시노 게이고, 영화 <본 컬렉터>의 원작자로 알려진 서스펜스의 대가 제프리 디버. 추리소설 마니아들이라면 한껏 군침이 도는 이런 작가들을 한 지붕으로 끌어들인 출판사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 사장은 인터뷰 제의에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1년 조금 넘은 출판사가 무슨 자랑거리가 있겠느냐, 목표는 원대하나 실현된 게 별로 없으니 올해를 넘기고 보자는 정중한 거절이었다.

노블하우스의 목록을 보면 다양성이나 종수 면에서 빈약하다는 말이 맞다. 하지만 허윤형 사장의 출판 경력을 알고 나면 꼭 만나고 싶어진다. 300만 부를 기록한 『연탄길』시리즈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면 설명이 필요 없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잔뜩 호기심으로 무장하고 무작정 노블하우스를 방문했다.



묻혀있던 『연탄길』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다
김현미(이하 김) 노블하우스의 탄생을 설명하려면 사장님의 삼진기획 시절부터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먼저 올해로 출판 입문 몇 년째이신가요?
허윤형(이하 허) 9년이네요. 저는 시 전문 출판사에서 시작했어요. 제가 시에 대해 관심이 많았거든요. 아니 너무 좋아했고 한 때는 종교였죠. 저희 할아버지 두 분이 시인이셨고요.
그런데 막상 출판계에 들어와보니 아니다 싶은 관행들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다른 문학 출판사로 갔다가 전통적으로 문학이 강한 삼진기획으로 옮겼습니다. 거기서 제가 정말 만들고 싶었던 책을 발견한 거죠. 『연탄길』.

   『연탄길』은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한 원고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진기획에 출근했는데 당장 진행되고 있는 원고가 없어서 답답했습니다. 입수된 원고라도 있으면 검토나 하자 했는데 『연탄길』이 눈에 쏙 들어오는 거예요. 6개월 동안 출판사에서 잠자고 있던 원고라고 하더군요. 한 꼭지 한 꼭지 클리어파일에 끼워져 있어 참 희한하다 싶었죠. 원래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제목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으나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작가가 인세도 제대로 못 챙겼다는 말을 들었죠.
다른 출판사에서 검토를 했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집으로 가져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까지 꼼짝 않고 읽고 감동을 먹었죠. 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고 눈물도 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다음날 저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또 운이 좋았던 게, 원고를 읽으면서 삽화가 들어가면 좋겠다 싶어 저자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마침 자기가 직접 그려놓은 게 있다는 겁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이 원고를 검토해 주신 분이 그림을 넣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서 저자가 준비해 두었다는 말을 듣고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지요. 그 뒤 저자 이철환 선생과 원고를 다시 쓰다시피 해서 『연탄길』이 나온 겁니다.

   『연탄길』이 처음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죠? 밀리언셀러가 되기까지 어떤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네, 초반에 책이 정말 조금씩밖에 안 움직였어요. 『연탄길』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초판이 나오고 1년쯤 지나서였어요. 2-3만 부 선에서 답답하게 팔릴 때, 나는 중요한 것은 ‘이 책을 꼭 팔아야겠다는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작가가 미워할 수 없는 분이었어요. 뭔가 한 가지라도 더 해주고 싶어지는….도저히 애정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어찌 보면 편집자를 괴롭히는 저자죠. 전 이철환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에 푹 빠졌고 오로지 『연탄길』을 띄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문화관광부 추천도서로 선정됐지만 판매가 확 오르지 않았어요. 출간 후 1년 쯤 되는 시점에서 책이 4만 부 선에서 끝나버릴 것 같아 이런 제안을 하기도 했죠. “선생님, 이번 연말에 리어카에 책 200권 정도 싣고 명동으로 나가서 나눠줍시다.” 『연탄길』에 리어카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리고 직원들에게 이 책에 ‘올인’하자고 했죠. 대한민국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몽땅 뽑았더니 300개가 넘어요. 이렇게 많았나 하고 놀랐죠. 직원들과 함께 각 프로그램에 ‘연탄길 사연 보내기’를 했습니다. 저자가 7년 동안 주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감동이 커서 방송국에 사연을 보내면 틀림없이 채택될 거라고 확신했죠. 그리고 각 학교 교감선생님들과 중학교 도서지도 교사 분들에게 책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곧 널리 알려지기를 원하는 저희 뜻을 이해하셨죠. 이런 노력이 보람이 있어서 KBS 에 소개되면서 매출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MBC <느낌표>에 등장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어요. 에도 여러 편이 애니메이션화 되고요. 여기서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는데, 『연탄길』을 ‘느낌표’ 선정도서로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은데, 선정도서가 된 적은 없고, 저자가 ‘느낌표’의 ‘길거리 특강’에 출연해 하신 말씀이 감동적이어서 효과가 아주 좋았어요. 꺼져가던 불이 다시 확 타올랐죠.

   그 효과가 자연스럽게 『연탄길』 2권, 3권으로 이어졌겠네요.
   저는 ‘연탄길’ 시리즈를 만들면서 독자의 힘을 실감했어요. 『연탄길』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잖아요. 대부분 저자가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제자들로부터 들었거나 직접 겪은 이야기인데,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로 만나니까 묘하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인터넷 카페도 만들고 한 달에 한 번씩 MT도 가고 하거든요. 모두 『연탄길』의 충성독자였죠. 한 친구는 지금까지 구입해서 주위에 선물한 『연탄길』이 280권이라고 했어요.
제가 “사재기야”라고 농담을 했지만, 정말 고마웠죠. 또 그 친구들은 중학교 시절 선생님(저자)이 기타 들고 와서 노래와 시를 들려주던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고 그때 선생님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 모아두었다가 다음 책을 만들 때 참고하라고 제게 주기도 했어요. 열 명의 고객보다 한 명의 충성고객이 낫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편집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군요. 저자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또 책 한 권에 얼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것인가, 고민스러울 때가 있거든요.
   제가 출판일을 시작할 때는 기획과 편집을 분리하는 게 유행이었어요. 기획자들이 출판피디, 출판프로듀서라고 찍힌 명함을 가지고 다녔죠. 하지만 저는 기획이나 편집이 맞물려야지 분리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냥 에디터라는 말을 좋아하죠. 작가를 섭외하는 일부터 저작과정을 도와주고, 책을 프로듀싱하고 마케팅까지 다 같이 해야지 어느 단계까지만 기획자의 일이고, 다음부터는 편집자의 몫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어쨌든 저는 책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 만들면 3일 정도 앓아누워요. 『연탄길』 2권까지 만들고 말 그대로 뻗어버렸습니다. 책이 징글징글하더라구요.
그래서 회사에 양해를 얻고 거창의 한 절로 들어갔습니다. 책을 몇 권 챙겨가긴 했는데 글자를 보기도 싫었어요. 그런데 3일 지나니까 책이 읽고 싶어요. 가져간 책을 단숨에 읽어버리고 빈둥거리기가 싫어서 스님 책 빌려 읽고 옆 방 고시생들 책 빌려다 읽고. 아, 이게 활자중독이구나 싶더군요. 그 절에 서른 중반과 마흔 살 정도된 고시생이 있었는데 이분들과 어울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획이 막 떠오르는 겁니다. 야, 이거 책 되겠다. 책 만들다 보면 만나는 사람이 다 저자로 보이잖아요. 책에 푹 빠져있던 시절이죠.

원 소스 멀티 유즈로 문학 출판 살리고파
   이제 노블하우스 창업으로 이야기를 옮겨가죠. 잘 나가던 기획자가 왜 갑자기 독립을 선언했나요?
   삼진기획 목록을 보면 소설 쪽이 탄탄해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도 제일 처음 냈고,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소설 목민심서』와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도 있고 한수산 선생의 책도 꾸준히 냈어요. 전 출판사가 소설과 에세이로 특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발행인은 더 장르를 다양화하기를 원했죠. 다른 출판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지만 출판시스템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만들고 싶어서 창업을 결심했습니다.
이걸 설명하려면 출판비평모임(이하 출비)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서 만든 출판계 모임이 ‘출비’였습니다. 출판계에 편집자 중심의 소모임이 적던 시절이라 꽤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에서도 제가 답답했던 게 출판의 엄숙주의였습니다. 인문·교양 아니면 책으로도 안 쳐주는 듯한 분위기. 하지만 이 모임을 통해 만난 선후배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죠. 그분들이 책을 대하고 만드는 자세를 지켜보며 에디터로서 좀 더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그 시절을 생각하곤 합니다. 그 와중에 좀 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출판 마케팅을 시도해서 한국 출판의 관행을 바꿔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출판마케팅 분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기획해서 냈더니 이렇게 팔렸다’ 식의 후일담 수준의 이야기이지 제대로 예측해서 마케팅을 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는 출판이 대기업 마케팅 전략을 배워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출판 창업만 해도 기획자로 경력을 쌓으면 기획아이템 5-10개쯤 챙겨서 있는 돈 다 털고 부모님 돈까지 끌어 모아 출판사를 차리는 식이잖아요. 그게 싫었어요. 언제까지 출판업은 이렇게 영세하게 할 거냐. 제대로 한 번 해보자 했죠. 그때 마침 투자제안을 받아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블하우스’의 주력 분야가 장르문학이라는 것은 뜻밖이에요. 처음에는 발행인이 추리소설 마니아여서 취미생활을 하는가 보다 생각했죠.
   제가 독립해서 소설을 한다니까 선배들이 “문학은 죽었다” “왜 시장도 어려운데 하필 소설을 내려고 하느냐”며 말렸어요. ‘1쇄 작가’라는 말이 나올 만큼 소설 시장은 침체였거든요. 트렌드를 좇아서 경제·경영서를 내라고 충고하더군요. 하지만 전 소설을 고집했습니다. 내가 출판을 하는 이유는 출판밖에 모르기 때문이고,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소설·문학이니까 당연히 그걸 해야죠. 오래 전에 시인의 꿈은 접었지만요.
그리고 좀 따져보고 싶은 게 장르문학이라는 애매한 용어에요.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말을 쓰게 됐는지 정체불명이잖아요. 전 그 말이 ‘주홍글씨’같아요. 넌 비주류다 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 장르문학 대신 ‘크라임픽션’이라는 말을 썼으면 해요. 아직도 서점에 가면 ‘공포·추리’로 한데 묶어 놓는데 정말 답답합니다.
어쨌든 왜 책이 책으로만 끝나야 하느냐,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개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책이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게임도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려면 소설을 해야 하죠. 그것도 대중적인 소설로. 그때 에이전시로부터 톰 클랜시를 소개받았습니다. 톰 클랜시야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작가인데, 예전에 고려원에서 책이 나오다가 끊어졌잖아요. 그 후 8년 동안 국내에 톰 클랜시 책이 한 권도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거래하던 출판사가 문을 닫은 뒤 한국 시장 자체를 불신하는 것 같았어요. 몇몇 출판사가 톰 클랜시와 계약하려다 실패하고 신생출판사인 저희에게 넘어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클랜시 전작을 내겠다는 제안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저희는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출판한다는 ‘전작주의’를 표방하고 있거든요.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개념에서 클랜시는 대단히 매력적인 작가입니다. 그의 소설 중 4편이 이미 영화화됐고, 그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게임만 30종 정도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30대 중반부터는 클랜시를 소설가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은데, 20대는 게임제작자인 줄 아는 사람이 많아요. 국내에서 처음 번역한 클랜시의 소설 『레인보우식스』만 해도 오래 전에 게임으로 나와 공식 카피만 30만 장이 팔렸다고 합니다. 네이버에 톰 클랜시 카페가 두 곳이 있는데 ‘톰 클랜시 마니아’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으로 회원이 300여 명이고, ‘톰 클랜시 마니아’는 회원이 2000명인데 모두 클랜시 원작의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죠. 소설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클랜시 골수팬들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클랜시 책이 100권 정도 되는데 2008년까지 다 낸다는 계획이지만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소설·문학이 모든 문화의 기초라고 생각합니다. 『태백산맥』이 MBC와 판권계약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김영하의 소설이 프랑스에서 출간된다는 소식도 있습니다. 전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요. 반면, 오래 전 허영만 선생으로부터 600만원에 『아스팔트 사나이』 TV판권 계약을 했다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형편없는 대우를 받아도 작가들은 자신의 소설이 영상화된다는 기쁨과 파급효과 때문에 계약을 합니다. 아직까지 돈이 적다고 계약을 안 하는 작가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상물들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지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옥탑방 고양이』의 참신한 소재, 『내 이름은 김삼순』의 톡톡 튀는 캐릭터, 『불멸의 이순신』의 충실한 사료는 모두 원작의 힘에서 나옵니다. 요즘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가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드는 비율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문학과 TV, 영화가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미국에 수출될 때 영화의 원작이 있었다면 책도 많이 팔렸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은 영화와 TV 드라마란 원작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 강합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런칭하기 전에 출판계가 먼저 법석을 떱니다. 김형경의 『외출』이 지극히 일본적인 경우지요. 과정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요. 예전에 하지원 주연의 <폰>이라는 영화가 일본에 수출될 때 개봉 전 한국에는 없는 소설을 만들어 출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작가가 썼다고 하더군요. 말이 길어졌지만, 이것이 제가 소설을 고집하는 이유이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작가를 찾는 이유입니다.

한 작가의 작품을 한꺼번에
   톰 클랜시의 지명도야 다 아는 바지만, 퍼트리샤 콘웰이 한국 시장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 놀랍습니다. 얼마 전 10만 부 돌파 기념 이벤트를 시작했더군요. ‘스카페타’시리즈로 알려진 몇몇 작품은 몇 년 전 시공사에서 출간됐던 것으로 리바이벌 한 것이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터져준 게 ‘스카페타’ 시리즈입니다. 톰 클랜시와 콘웰이 모두 펭귄 푸트남 소속이어서 저희가 클랜시 책을 계약하면서 자연스럽게 콘웰과도 계약을 하게 된 거죠. 콘웰 작품은 예전에 장원 출판사에서 한 권이 나오고 나머지는 시공사에서 출판됐는데, 판매는 매우 부진했습니다. 당시 존 그리샴 열풍이 불어 출판사의 관심을 덜 받은 것도 부진했던 이유죠. 이런 외부적 요인을 걷고 보면 콘웰의 소설은 상당히 작품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콘웰이 1차 런칭이 실패한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스카페타’ 시리즈를 로맨스 소설 분위기로 가는 것은 곤란하고, 본격 문학의 분위기를 내는 서정적인 표지, 그리고 전작 완간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일관된 표지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번 표지를 수정했는데 27번 바꿔 28번째 시안으로 확정됐습니다. 정말 디자이너에게 미안했죠.
원래 한 권인 책을 2권으로 나눈 것을 두고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책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종이도 되도록 가벼운 것(이라이트)를 쓰고 톰 클랜시 것에 비해 판형도 작죠. 그리고 가격은 8000원입니다. 소설 특성상 대여점 시장을 염두해 두지 않을 수 없었고요 . 저는 판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패키지라고 하는데, 패키지라는 말에는 가격 정책과 타깃을 포함한 디자인을 뜻합니다.
처음에는 국내에 전혀 번역되지 않은 새로운 작품부터 출간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시리즈 처음부터 다시 완전히 새롭게 번역해서 내는 쪽으로 바꿨습니다. ‘스카페타’ 시리즈 런칭을 위해 여러 가지 고민을 많이 했죠. 현재 ‘스카페타’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1억 부가 팔렸고 일본에서만 1천1백만 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또 영화 판권도 팔렸는데 『사형수의 지문』 『카인의 아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대중성과 작품성을 겸한 소설을 찾아내는 안목이 필요해요. 재미있는 것은 저희가 한국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신생출판사지만, 해외에 나가 이런 작가들 작품을 낸다고 하면 눈의 휘둥그레져요.
예를 들어 일본에서만 해도 톰 클랜시 작품 판권은 일본 신초사, 콘웰은 고단샤, 제프리 디버는 문예춘추사가 가지고 있거든요. 이처럼 일본의 메이저 출판사들이 하나씩 갖고 있는 판권을 한국에서는 저희가 모두 갖고 있으니 무슨 대단한 힘이 있는 줄 알죠. 노블하우스는 작품보다 작가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한 작품을 내보고 반응이 좋으면 계속 계약하는 게 아니라,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한꺼번에 계약하는 시스템입니다. 물론 위험부담이 크지만 그러기 전에 철저한 시장조사와 신뢰관계가 선행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 전략이 지금까지는 주효한 것 같습니다.

   작가에 따라 담당 에디터가 따로 있더군요. 책 판권란에 ‘담당 에디터 코멘트’가 짧게 들어가 있어서 신선했습니다.
   작가 한 명이 선정될 때마다 담당 에디터가 정해집니다. 미국에서는 가장 잘 나가는 에디터가 400억 원이 넘는 연봉을 받아요. 우리나라 에디터 중에 연봉 1억 원 이상 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시장규모가 다르긴 하지만 문학이 출판의 꽃이라면 그 꽃을 키우고 가꾸는 사람인 에디터도 그만한 대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 에디터들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고 걸작이 나오도록 유도하기도 하고 작가들의 뒤편에 서서 묵묵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문학 에디터들에게는 다른 장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잠재력이 있지요. 아무리 문학이 죽었다 해도 1980년 이후 베스트셀러 목록은 대부분 소설입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납세 순위 1,2위가 연예인이나 정치인, 경제인들이 아니라 추리소설 작가들이에요. 톰 클랜시 같은 사람은 초판 부수만 200만 권이죠. 퍼트리샤 콘웰은 100만 부. 그런데 콘웰의 일본판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시리즈가 14년 동안 계속 출간되는데 번역자는 한 명뿐이었어요. 저는 에디터뿐만 아니라 전담 번역자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국내 번역자들은 대부분 매절형태로 계약을 했는데, 노블하우스는 번역자가 원치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 100퍼센트 인세계약입니다. 책이 많이 팔릴수록 번역자도 이익을 나눠 갖는 게 맞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야 확실히 번역에 책임감도 생깁니다. 또 앞으로 노블하우스 재팬과 노블하우스 타이완을 설립하려면 번역자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국내물을 해외에 알리려면 그분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이야기꾼의 시대를 꿈꾸는 허윤형 사장과의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노블하우스 재팬과 노블하우스 타이완 설립이 결코 꿈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이 무럭무럭 커졌다.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며 눈시울을 적시는 이 휴머니스트가 일을 낼 것 같다.

기사게재 : <기획회의> 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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