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시각 제공” 부부가 편집부터 영업까지 도맡아... "출판사 편집자들이 벤치마킹 하는 책"
책을 잘 만드는 것과 잘 팔리게 만드는 것은 다른 일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문화에 관한 책을 전문으로 내는 ‘이산’은 책을 잘 만드는 출판사로 알려졌다. “이산의 주독자층의 하나가 출판사 편집자들이에요. 내용을 보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편집했나를 보려고 사는 거죠. 벤치마킹이 많이 돼서인지 이제는 다들 엇비슷해진 것 같아요.”
이산의 강인황(康仁煌·44) 공동대표의 말이다. 또다른 대표는 강씨의 부인인 문현숙(文賢淑·40)씨. 이들 부부 외에 다른 직원은 없다. 이들 부부가 편집, 영업은 물론 표지 디자인까지 도맡아 한다. 둘 다 일손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남편 강씨가 인터뷰하는 동안 부인 문씨는 묵묵히 일에 매달렸다. “한 달쯤 전에 편집 일을 하던 직원이 그만뒀어요. 지금까지 한두 명 정도 직원을 두기도 했지만 주로 둘이서 운영해왔습니다.”
부부는 모두 출판사 편집자 출신이다. 각각 한 동네에 있던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시절 문화운동에 관심있는 편집자들의 모임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결혼 후 남편 강씨는 서울 신촌에서 ‘알서림’이란 사회과학 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을 인수해 5년 동안 운영했고 부인 문씨는 돌베개에서 편집장을 지냈다. 마침내 1996년 여름 자신들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야에서 자기 출판을 해보기로 결심하고 ‘이산’을 차렸다.
출판사 이름은 중국 고사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에서 따왔다. ‘우공’(愚公:어리석은 이)이란 사람이 산을 옮기려고 한 데서 나온 이 말은,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속뜻으로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산이란 이름이 발음하기에 좋잖아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독자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지어야겠다는 취지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우직하게 산을 옮기려고 한 ‘우공’마냥 이산은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라는, 장사가 안 되는 분야에서 우직하게 책을 펴내고 있다. 출판사 설립 당시 이산의 소망은 책 한 권 내서 다음 책 낼 자금 정도만 마련하는 것. 다행히 첫 책인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가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으며 다음 책을 만들 종자돈을 마련해주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동양을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은 잘 알려졌었잖아요.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는 일본인이 자신을 서양과 동일시한 채 동양을 바라보는, 동양적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시각이 신선하잖아요. 지금까지 5000부 정도가 팔렸는데 인문 학술서적이 이 정도 팔렸으면 전국의 인문학 하는 웬만한 대학원생은 다 한 권씩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지금까지 이산에서 나온 책은 총 45권. 지난 10년 동안 1년에 4~5권 정도 만들어온 셈이다. 이 중 한 권만 빼고는 모두 번역서다. “처음부터 번역서만 내겠다고 정해놓은 건 아니에요. 다만 저희같이 한 번에 책을 한 권씩 만드는 소규모 출판사는 막상 기획을 했는데 원고 내용이 기획한 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 대책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사전에 원고 내용을 검토할 수 있는, 외국에서 출간된 책에 눈이 먼저 가게 되는 거죠. 내년에 국내 저작을 한 권 더 출간할 예정입니다.”
유일한 국내 저작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유인선 교수가 쓴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 책은 원래 대우학술총서로 출간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직전까지만 다뤘었는데 근대 이후를 추가하고 앞부분을 수정, 보완해서 분량이 두 배 정도로 늘었죠. 예전에 출간됐던 책을 제가 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검증이 된 상태였고 베트남사는 국내에 집필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책을 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죠.”
이 책의 저자 유인선 교수는 원고를 마무리할 즈음 책을 어디서 내면 좋을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학생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이산이요”였다. 정작 교수는 이산을 알지 못했지만 젊은 인문학도 사이에서는 이산의 브랜드가 단단히 자리매김한 것이다. 문제는 이산의 책이 인문학도를 넘어 대중에게까지 어필하기에는 너무 딱딱하다는 것. 좀더 책을 잘 팔리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은 또다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공들여서 잘 만드는데 이왕이면 조금만 더 말랑말랑하게 해서 팔릴 수 있게 하면 출판사나 출판계 모두 좋지 않겠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10년쯤 전문출판을 하다보니 좋은 책을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베스트셀러 만드는 것 또한 어렵다는 걸 알게 됐죠. 우리한테는 베스트셀러 만드는 재주는 없는 것 같아요. 굳이 베스트셀러를 상업적이라고 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베스트셀러에 편승해서 쉽게 돈 벌려고 하는 아류작은 문제가 있지만요.”
실제로 이산의 책은 눈에 확 들어오는 활자나 편집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책 뒤에 빽빽이 붙어 있는 주석, 참고문헌 등을 보면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어떤 책은 주석과 참고문헌이 책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할 정도다.
“출판사 중에는 판매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원서에 나와있는 주석이나 참고문헌을 빼는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책 뒤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은 이 책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책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근거예요. 이런 작업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출판업계에선 이산의 책은 책 뒤를 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책 뒷부분에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출판사들이 이 부분 작업을 본문 작업이 다 끝난 후에 마무리하듯 하는 데 비해 이산은 본문 편집과 병행한다. “본문과 동시에 진행해야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합니다. 잘 이해가 안되는 본문 내용도 주를 같이 보면서 작업을 해나가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교정을 볼 수가 있거든요.”
현재 이산의 연매출은 2억원 수준. 2001년 출간된 ‘강희제’가 이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9000부 가까이 팔려나간 이래 매출은 계속 이 수준을 맴돌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출판환경이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책을 서점 이외에는 팔고 사는 곳이 없었잖아요. 지금은 인터넷, 홈쇼핑 심지어 대형 할인매장에서도 쉽게 책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독자가 아무데서고 책을 구하기 쉬운 환경으로 변한 셈이니까 저희 같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서점영업도 제대로 못하는데 인터넷, 할인매장 영업은 엄두도 못내거든요. 결국 홍보나 마케팅에 대한 충분한 여력이 있는 출판사는 더 많은 책을 팔고 저희 같은 출판사는 현상유지하기도 어려워지는 거죠.”
우공이산 고사(古事)에 따르면 결국 우공의 정성에 감복한 옥황상제가 산을 옮기도록(移山) 도와준다. 옥황상제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이산의 앞으로 목표는 무엇일까?
“뭔가 포부를 거창하게 말하는 건 체질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라고 말한 조지훈 시인의 말처럼 뭔가를 정해놓고 전진하기보다 그냥 주어진 현실에 충실한 쪽을 선호합니다. 앞으로 출판환경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선 걱정이 되지만, 현재로선 지금 좋아하는 분야의 책을 공부하면서 출판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즐겁습니다.”
(주간조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