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언어”
“아이들 눈높이 맞추는 게 가장 어려워... 교육적 영향 생각하면 쉽게 만들 수 없어”
“그림책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기 때문에 수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출판물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일러스트(illustration) 수준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올해 경기도 파주 출판단지에 둥지를 옮겨 튼 보림출판사는 유·아동용 그림책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다. 권종택(權鍾澤·59) 사장이 1976년 문을 연 이래 30년 가까이 이 분야에 천착하면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초청을 받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는 보림의 책 두 권이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을 만드는데 어려울 게 뭐가 있느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반 책이 기획에서 책이 나오기까지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 데 비해 저희 그림책은 보통 30쪽 분량의 책 한 권 만드는 데 2~3년 정도 걸립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라면 그 책을 읽고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독자의 몫으로 돌릴 수 있겠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신경을 더 쓰게 되고 책임감을 크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책 속에 항상 교육적인 내용이 녹아들도록 노력합니다.”
책의 제작과정은 일반 책을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요즘은 일반 출판사도 기획출판의 비중이 크게 늘었지만, 저희는 기획의 역할이 특히 중요합니다. 보통 책처럼 저자가 완성된 원고를 넘기는 경우는 별로 없고 대부분 출판사가 기획을 하고 작가가 거기에 따라 원고를 작성하게 되거든요. 궁극적으로는 기획 이전에 완성도 높은 원고를 창작해내는 작가가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책의 특성상 책을 만드는 사람은 어른이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아이들이기 때문에 눈높이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에 대해 권 사장은 아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책 판별법을 소개했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아이들 속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잘 모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잘 만든 그림책은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이 봐도 재미있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봐서 재미없는 책은 아이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책이라고 해서 이해하기 쉽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안일한 생각입니다. 작품성이 갖추어졌느냐를 꼼꼼히 따져봐야 아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보림은 그림책이면서도 흥미 위주가 아닌 작품성을 갖춘 교양서를 만드는 데 주안점을 둔다. 책의 소재는 우선적으로 우리 전통문화에서 찾는다. ‘까치 호랑이’ 시리즈는 ‘흥부 놀부’ ‘호랑이와 곶감’ 같은 전래동화를 각색해 미국,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 수출했다. ‘솔거나라’ 시리즈는 김장, 떡만들기, 항아리 빚기 같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기 쉬운 그림과 함께 소개해 5세 이상 아이면 누구나 우리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최근에는 순수 창작물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중이다. 2000년부터 매해 ‘보림 창작그림책 공모전’을 개최해 역량있는 신예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보림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예전엔 아이들 책은 전집으로 사다줬잖아요. 저희도 1990년대 초반까지는 그런 책을 만들었죠. 그러다가 앞으로의 출판시장은 어떻게 달라질까를 생각해 봤어요. 전집은 책 외판원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책을 파는 시스템인데 산업인력 구조가 변하면 앞으로 그런 식의 판매구조로는 살아남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앞으로는 아이들 책 시장도 단행본 중심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1980년대 후반부터 차근차근 단행본 출판으로의 전환을 준비했습니다. 미리부터 준비한 덕에 1990년대 중반 단행본 출판으로 전환하는 데 연착륙할 수 있었죠.”
보림은 출판업계에서 창작 그림책을 가장 많이 만드는 전문출판사로 알려졌다. 여기서 오는 효과는 어떤 것일까? “아무래도 부모들이 아이에게 책을 사줄 때는 무척 신중하기 때문에 신뢰할 만한 브랜드를 가지는 게 유리한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이들 책을 사줄 때는 ‘요즘 유행하는 책이 무엇이냐’를 따지기보다 ‘어디 책이 좋대’라고 묻게 되잖아요. 한두 권의 책보다 출판사의 브랜드가 중요해지는 거죠. 현재 흥미, 재미 위주의 책을 만드는 곳은 많지만 교양있는 창작 그림책을 전문으로 하는 곳은 별로 없거든요. 창작 그림책을 열심히, 많이 만든 회사라는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단행본 출판으로 전환한 이래 지금까지 출간한 책은 250여종. 현재 27명의 직원이 해마다 20종 정도의 그림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연매출은 작년 6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올해에는 70억원 수준을 바라보고 있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 그림책의 특성상 베스트셀러랄 책도 없지만 재고가 남아 손해보는 책도 없다. 대부분의 책이 재판(再版)까지 가며 수천 부 정도는 팔려나간다고 한다. 경영원칙에 대해 묻자 권 사장은 “베스트셀러를 노리고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할 경우 거기에 맞지 않으면 재고가 쌓일 수밖에 없다”며 “어느 출판분야든 일정한 수요가 있기 때문에 품질만 갖춰놓으면 장기적으로 출판시장에서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보림은 앞으로 해외판매 비중을 늘려나갈 계획이다. 지금까지는 소극적으로 저작권을 판매하는 수준에 머물러 해외판매 비중은 5% 미만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9종의 책이 세계 6개국에 번역·출간되었고 올 4월 열린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선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80인’에 보림의 작가 3명이 선정되는 등 향후 해외진출에 대한 전망이 밝은 편이다. “과거에는 판권을 수출하는 게 대부분이었는데 앞으로는 저희가 직접 수출용 책을 제작, 판매할 계획입니다. 수동적인 마케팅에서 능동적으로 돌아서는거죠.” 올해부터 해외마케팅을 전담하는 담당 팀장도 배치했다.
“우리나라는 그림책을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잘 발달돼 있습니다. 해마다 미술·디자인 관련학과 졸업생만 수만 명이 쏟아져나오죠. 또 그림책은 글 없이도 그림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사람들과 공동기획을 할 수 있는 여지가 큽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획을 하고 미국이 그림을 그려서 프랑스에 내다파는 식의 작업을 할 수 있는 거죠. 앞으로는 이런 식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사업을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주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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