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세계관의 역사 - 칸트.괴테.니체 게오르그 짐멜 선집 2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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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는 주체와 객체의 방정식을 객체의 측면에서 푸는 반면, 칸트는 주체의 측면에서 푼다. 비록 후자의 주체는 우연적이고 개인에 따라 분화된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의 초개인적 담지자인 주체다. 과학적-방법론적으로 보면, 칸트는 당연히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사상가이다. 반면 괴테는 주관적이고 존재의 상(像)을 자신의 정열적인 개별성에 따라 형성하는 사상가이다. 그러나 세계관적으로 내용적 결과에 입각해 보면 칸트는 주관주의자이다. 그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안으로 끌어들여 의식의 형식에 의해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오직 자족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만을 인정하는 바, 이 존재의 내부에서는 주체와 그의 삶 또한 자연의 총체적 삶이 고동치는 맥박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32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근대 세계관의 역사>에서 세 명의 사상을 통해 18~19세기 근대세계를 설명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분화'(分化)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통일'(統一) 그리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와 '초인'(Ubermensch)이 근대 세계관을 지탱하는 세 개의 발이다.


 칸트에게서는 가치가 인간에서 나와 자연으로 가지만, 괴테에게서는 자연에서 나와 인간에게로 간다. 인간의 특별한 지위는 자연이 그것의 최상의 창조물인 인간으로 발전했고 상승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세계발전의 최종목표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칸트에게서 인간을 그 외의 존재와 대립시키며 이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72


 짐멜에게 칸트와 괴테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칸트는 인간-자연의 구도에서 물자체인 자신과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말한다면, 괴테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이념이 드러남을 강조한다.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선 외부에서의 결합. 이것이 본문에서 강조되는 칸트와 괴테의 사상이자 차이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들 분화와 통일이라는 관점의 차이를 칸트와 괴테의 분야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칸트 철학과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괴테의 문학.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과학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현신처럼 칸트와 괴테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다른 한 편으로 시대가 자연을 바라보는 역사관, 시대관의 변천이기도 하다.


 18세기의 이상은 고립되고 본질적으로 동질인 개인을 요구했다. 개인은 합리적-보편적 법칙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로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19세기를 특징짓는 이상은 노동분업에 의해 분화된 개인들을 고려했는데, 이들은 분업과 분화의 맞물림 위에 토대를 둔 사회조직들과 결합되었다. 분업과 분화의 두 원리는 근대경제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22


 이성(reason)의 강조가 계몽주의를, 분업이 산업혁명을 가져와 18세기 근대를 열었다면 19세기 근대의 통일적 세계관은 분업과 분화 그리고 이성의 결과물이다.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을 강요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자연 앞에서 개인들은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다르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었다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된 이후 사회는 '서로 같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고, 이들의 유대와 연대가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여기에서 머무른다면 자연에 대한 이성적인 인간의 승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선 필요가 생긴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니체의 세계관을 가져온다. 니체의 사상이 접목되어 '인류'와 '초인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인-사회'는 분화와 통일이라는 단순순환에서 벗어나 우상향의 진보적 세계관으로 정립될 수 있다.


  니체는 인류의 낮은 위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이상을 인류적 이상으로 대체시키려 한다... 니체는 우리 종족을 완성된, 따라서 불변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고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초인이란 인간종족의 훨씬 더 높은 단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시기는 발전능력이 있는 한 그 단계를 넘어서는 초인이 존재한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50


 이처럼 짐멜의 <근대 세계관의 역사>는 칸트와 괴테라는 다소 낯선 조합을 통해 개인-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접근법이지만 철학과 문학의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짐멜의 저작을 통해 근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괴테에게) 미학적 심상의 파괴는 곧 진리의 파괴이다. 수학적 자연과학이 사물을 가능한 한 무특성의 요소들로 분해해 얻어지는 계산적 표상은, 괴테에게 미학적-직관적 가치가 결여되기 때문에 심각한 방자함이자 사로(邪路)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칸트에게 미학적 규준은 자연인식의 대상에 대한 방자함이자 사로가 될 것이다. - P54

의지와 당위가 대립하게 되고, 자연적 주관성과 객관적 도덕법칙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통일성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칸트에게서는 객관적 도덕명령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 명령은 모든 특수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지만 주체의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괴테에게서는 도덕적-실천적 삶의 요소들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성, 즉 모든 대립을 포괄하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통해 주어진다. - P55

칸트에게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물자체‘에 속하는 내적인 측면이 하나요, 단지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측면이 다른 하나이다. 결국 인간은 화해되지 않은 두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와 반대로, 괴테가 보기에, 가시적인 것에서 진행되면서 경험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한 행위는 인간의 이념을 드러낸다. 바로 이 이념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는 세계의 요소나 역량이 된다. - P92

칸트는 전적으로 기존의 도덕을 공식화하려 한 반면, 니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으로 멈추어 서 있는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려 한다. 칸트는 주어진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론가이며, 니체는 주어진 것을 실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도덕의 사제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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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슬랍스키는 지나치게 열정적인 정원사처럼 직접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린 순간, 좀더 나은 무언가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씨앗을 뿌리기 위해 식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런 행동은 배우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네미로비치에 따르면, 배우들의 자신감 결여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동안 스타니슬랍스키는 연기에 접근하는 완전히 새로운 길, 그가 "시스템"이라고 부른 길을 개척할 터였다. 이 "시스템"에서 마침내 메소드가 탄생할 것이다.

영감이 서식하는 곳은 의식conscious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감은 스타니슬랍스키가 초의식superconscious이라고 명명한 곳에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초의식이란 프로이트의 잠재의식subconscious 개념이 아니라 스타니슬랍스키는 프로이트를 읽은 적이 없다 의식적인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정신의 일부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의식적인 통제력이 부족한 것이 배우에게 특별한 어려움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스타니슬랍스키는 깨달았다

결국 예술은 현실 삶의 복제품이 아니다. 연극을 포함한 예술은 경험을 편집하고 압축한다. 그 과정을 통해, 그리고 예술가의 관찰을 통해, 경험은 의미와 삶과 진실의 밀도가 높아질 때까지 압축된다.

배우의 생생한 경험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 역할과 과정을 조각으로 분해할 필요성, 의식적인 과정을 활용해 영감에 접근하고 조작한다는 목표는 "시스템"과 "시스템"에서 나온 모든 것의 토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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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2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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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직 사진의 소년처럼 파열되고 신에게 버림받은 듯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었다. 그들 주변에는 어떤 아우라(Aura)가, 시선이 그것을 파고드는 동안 그 시선에게 충만한 안정감을 주었던 어떤 매질(媒質)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아우라에 상응하는 기술적 등가물도 분명히 있다.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이어지는 명암의 절대적 연속체가 그것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75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은 복제기술에 의해 파괴되는 아우라(Aura)에 주목한다. 일회적인 의식(儀式)과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가치는 복제기술이 만들어 내는 복제물의 반복적인 생산과 일시적 가치로 대체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아우라의 소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벤야민은 한 걸음 더 들어가 예술을 바라보는 대중의 태도에 주목한다.


 상(像)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84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낸다. 복제기술은 복제를 대량화함으로써 복제 대상이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대신 대량으로 나타나게 한다. 또한 복제기술은 수용자로 하여금 그때그때의 개별적 상황 속에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그 복제품을 현재화한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47


 핵심 부분이란 바로 예술작품의 진품성이다. 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까지 포함하여 그 사물에서 원천으로부터 전승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 개념이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물질적 지속성이 사람의 손을 떠나게 되면 사물의 역사적 증언 가치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로써 흔들리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 사물의 전통적 무게(의미)이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46


  의식에 깃들었던 예술이, 복제기술에 의해 파괴된 옛 터전을 떠나 새롭게 자리한 곳은 정치(政治)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서 재현되어 아우라를 간직했었다면, 사진과 영화에 의해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노출된다는 사실은 관객들이 수용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비평가, 행위가로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피카소와 같은 회화에 대해서 가졌던 가장 낙후된 태도가 채플린과 같은 영화에 대해 갖는 가장 진보적 태도로 바뀐 것이다. 여기서 진보적 태도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고 체험하는데 대한 즐거움이 전문적인 비평가의 태도와 직접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p134


 이처럼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를 통해 기술복제 시대의 미학(美學)을 대중과 정치에서 발견한다. 지난 20세기 기술복제가 가져온 접점 - 대량생산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와 대중에 의한 지배를 의미하는 민주주의의 만남 - 다음에 벤야민은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대결을 예상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의 예상과는 조금은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매스 미디어 대신 개인 미디어의 등장, 파시즘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 대신 민주주의 정체 내에서의 성향 대립은 기술복제시대를 가능케 했던 기술이 이제는 보다 예리한 메스가 되어 우리 사회를 분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다 심화되는 인간소외의 현실 속에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사진의 작은 역사>는 '아우라'라는 단어의 의미를 넘어선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른 법이다. 다른 이유는 무엇보다 인간이 의식을 갖고 엮은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엮인 공간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_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p168


 예술 생산에서 진품성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그 효력을 잃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예술의 모든 사회적 기능 또한 변혁을 겪게 된다.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_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2판)>, p53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이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matrix)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 P143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작품들을 더 이상 개인들의 창조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은 집단적 구성물이 되었고, 너무 강력해져서 그것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에 걸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계적인 복제방식들은 일종의 축소기술인 셈이고 또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작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그러지 않고서는 그 작품들은 전혀 이용할 수 없게 된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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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란 민족들이 깨어나 자기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이 없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한다. 다만 발명을 하더라도 애초부터 무언가 남들과 다른 특징이 있어야 써먹을 수 있는데, 물론 이러한 특징은 앞서도 말했듯이 순전히 부정적인 성격의 것일 수도 있다.(다시 말해서, 기득권의 참여 자격을 박탈하는 특징일 따름이며 장차 새로운 ‘민족’을 형성하게 될 그들 실격자들 간에 그 이상의 아무런 적극적인 유사성이 없을 수도 있다.)

겔너의 핵심주장 즉 "‘민족(정체)성’에 의한 분류는 ‘문화적’ 분류이고 이것은 언어적 분류이다(아니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족주의를 기본적으로 언어중심의 운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와 ‘언어’는 근대적 조건에서 다소간에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는 스미스가 ‘근대화 이론’을 이미 불신의 대상이 된 낡은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면서, ‘전통’과 ‘근대성’의 개념이 유럽중심주의의 산물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통’ 대 ‘근대성’이라는 관념은 잘못된 것이고,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도 불가피하거나 불가역적인 전환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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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행위, 즉 에크리튀르ecriture의 원초적인 형태가 여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처음에 선의 형태가 있었다. 어느 순간 아마도 감수성도 풍부하고 지적 호기심도 왕성한 어떤 사람이 그 형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낸다.
의미는 형태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문자를 새긴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의미를 알았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거울문자라고 하는 좌우가 뒤바뀐 문자가 이따금 발견되는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그 문자는 의미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선 그 ‘구불구불한’ 난해한 형태로 사람들을 끌었고, 사람들은 점차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독점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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